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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영화 `워낭소리`를 보고

영화 이야기

by 우람별(논강) 2009. 8. 6. 1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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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억 원의 제작비로
100만이 넘는 관객을 동원한 독립영화 ‘워낭소리’,
봤다. 벼르고 벼르다가 드디어 봤다.
얼마 전 이목 형(○○출판사 대표 장봉환 샘)을 통해서
그 영화를 소개받은 적이 있다.
독립영화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는 그 형은 돈을 조금 더 벌면
한겨레 영화학교에 입학을 해서 열심히 공부 좀 하고
끝내는 영화 제작을 꼭 해 보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다.

‘이 영화의 80%는 우리 돌아가신 아버님 얘기’라면서
마지막 장면에서 솟아나는 눈물을 도저히 참을 수 없었고,
함께 영화를 본 아내는 아무리 슬픈 드라마나 영화를 보더라도
눈물을 잘 흘리는 법이 없는데, 이 영화를 보면서는
하염없이 많은 눈물을 흘렸다고 전했는데,
나도 우리 아내와 함께 영화를 보다가
마지막엔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소의 조용한 죽음과 노인 부부의 슬픔이 이 어려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인간의 모습을 적실하게 보여주고 있어서일까,
아니면, 찢어지게 가난한 삶을 살아온 우리 부모나
어느 친척 얘기 같아서일까?

봉화의 청량사를 힘겹게 오르는 노인,
다리를 거의 끌다시피 오르는 노부부의 느리디 느린 행보,
불탑 앞에서 정성되이 절을 하면서 40년이 넘도록 함께 살아오다가
천명을 다하고 죽은 소의 명복을 비는 장면에서 시작하는 영화,
죽은 소가 남긴 워낭(소의 목에 매는, 놋쇠로 만든 방울 종)을 손에 쥐고,
웅크려 앉은 채 먼 곳을 응시하는 헝클어진 머리와 짧은 흰수염이 무성한 노인(79세),
그리고 그가 아끼고 사랑하던 소가 죽기 1년 전의 시점으로 돌아가
소와의 40년 동거가 어떠했는지를 짐작하게 하는
조용한 이야기가 전개된다.

할아버지는 젊은 시절에 소를 구입해서
이 소를 이용해서 수십 년간 농사를 지으면서 살았다.
괜찮게 사는 이웃들은 농기계를 이용해서 빠른 속도로 농사를 잘도 짓더라만
소를 사랑하는 가난한 주인공은 오로지 소를 이용할 뿐, 어떤 문명의 이기도 거부한다.
읍내에 무슨 볼 일을 보러 갈 때도, 꼴 베러 갈 때도, 나무하러 갈 때도 소달구지를 타고 간다.
노인의 소는 이제 기력이 다해서 움직임도 달팽이 처럼이다.
그래도 아랑곳하지 않고 달구지에 의지해서 모든 삶을 꾸려간다.
‘느림의 미학’을 실천하는 어느 도인의 삶을 보여주는 노인 같다.
한평생 함께 해 온 할머니의 끝없는 투정 속에는
그 할아버지가 어떤 분이고, 어떻게 살아왔고,
소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어느 정도인지 고스란히 묻어난다.
‘저 놈의 소가 죽어야 내가 살지’,
‘소만을 돌볼 뿐 나에겐 관심이 없다’는 표현 속에는
할머니의 녹슨 듯한 질투심마저 살아난다.
그러나 할아버지의 관심은 오로지 소다.
더 이상 부리지 못하니 내다 팔라는 말이 주변에 무성하지만 끔쩍도 않는다.
그러나 노인도 소가 나이가 들었으니 신경이 많이 쓰이는가 보다.
앓아누워 있으면서도 힘없는 소 울음소리나 워낭소리만 들으면
본능처럼 바짝 긴장하고 마는 노인의 모습이다.

부리는 소(일소)를 사려고 우시장에 갔다가
요즘 그런 소는 없다고 해서 새끼를 밴 ‘계집애소’(할머니 표현)를 사 오는데,
그 젊은소가 외양간을 떡하니 차지하고
늙은소가 보금자리를 잃고 한데서 지내는 장면,
소가 먹는 여물 다툼에서 늙은소가 젊은소에게 밀리는 장면,
그것을 본 노인이 젊은소를 후려 패는 장면,
굴러온 돌이 박힌 돌 빼내는 형상이요,
힘없는 놈은 결국 역사의 전면에서 물러나야 하는 게 현실이고,
그것을 거부하면서 버둥대 보지만
결국은 막을 수 없다는 메시지인가?

영화감독의 의도가 간혹 눈에 띈다.
느림과 빠름의 대조를 보여주는 듯한 화면이 그것이다.
늙은 소를 끌고 힘들게 쟁기질을 하는데
그 옆에서 트랙터가 뭔가를 하고 있고,
좁은 흙길을 느릿느릿 어슬렁어슬렁 달구지를 타고 가는데,
같은 방향으로 자동차가 빠른 속도로 지나간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대조는 그것만이 아닐 것 같다.
도시와 농촌, 젊음과 늙음, 약삭빠름과 우직함,
오염됨과 순수함의 대조가 은연중에 드러난다.
결국 우리 인간의 삶이 지니는 매력은
물질문명화된 팍팍한 현실 속에서 편리만을 추구하는 약삭빠름보다는
남(소)을 생각하는 아니 배려하는 순수함과 우직함이라는 것이고,
또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직 이 세상에 있다는 것이고,
그런 사람들의 순수함이 더 이상 짓밟혀서는 안 된다는 것이고,
이 영화를 보는 많은 사람들이 원래부터 타고난 그 순수함을
잃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강한 메시지가 아닐까?
적어도 그 영화를 보고 눈물 한 줌 흘린 사람이라면
그 순수함을 온전히 지닌 사람이라 봐도 될까?

늙은소의 발굽은 한눈에 봐도 병색이 완연하다.
한 걸음 한 걸음이 고통스러울텐데 이 충직한 소는
할아버지의 마음을 다 아는 듯
할아버지가 원하는 것은 다 들어준다.
기력이 소진하여 움직이지 못할 때까지.
늙은소의 발굽은 노인의 발과 꼭 닮았다.
소아마비를 앓아서(실제로는 약을 잘못 먹어서 그렇다고 함) 제대로 걸을 수 없는 노인과,
아니 노인이 밭둑에 벗어놓은 고무줄 달린 신과 꼭 닮았다.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에서
허생원과 고락을 함께한 나귀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늙은소는 할아버지처럼 억지로 억지로 걸을 뿐이다.
보는 관객들도 너무 힘이 들어서 다들 가슴이 아프다.
자신도 모르게 흐르던 눈물도 그런 소에 대한 측은함 때문이리라.
자신의 운명을 아는지 늙은소의 눈에서 흘러내리는
진하디진한 그 눈물을 우리 인간들은 어떻게 해석할까?

한 번 보시라!
백문이 불여일견 아니던가?
메모 : 2009.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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