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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시'를 보고 나서

영화 이야기

by 우람별(논강) 2010. 5. 15. 2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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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를 보았다.

특별한 배경음악 없이 자연의 소리만으로

그 음향효과를 충분히 살리려는 감독의 의도가 보이는 작품이다.

강을 흘러가는 물소리, 그 위로 천천히 떠내려오는 시체

여학생의 죽음, 자살 사건부터 시작이 되는데,

어디서 비롯된 죽음인지, 어떻게 해결되어 가는지

이 영화의 한 축을 이루면서 긴장을 요구하고 있다.

또 하나의 흐름은 주인공의 관심 대상인 시의 완성 과정이다.

영화의 막바지에 이르러서는 절절한 시 한 편이 완성된다.

주인공의 고민스런 삶이 투영된, 가슴을 후벼내는 듯한

그 한 편의 시가 번갈아 낭송되면서 끝이 난다.

 

주인공 양미자(윤정희 분)는 외손자와 함께

생활보호 대상자로 가난하게 살고 있는 66세의 여인이다.

치매 초기 증세를 보이기도 하지만, 시에 대한 관심이 깊어서

김용택 시인의 시쓰기 강의에 고무된 주인공은

문화원 수강생 중에서 가장 열정적인 태도를 보인다.

어떤 자연의 대상을 관찰하면서 틈틈이 메모도 하고 

두리번거리며 시상을 찾으려 하고 한 줄의 싯구를 만들어낸다.

그 진지한 모습이 화면에 자주 비치면서 완성도를 더해간다.

시 낭송 모임에 참여해서 시의 순수를 찾고자 하는 모습이 보인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순간을 이야기할 때도

주인공은 남다르게 어렸을 때의 추억을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하염없이 그 순수의 눈물을 흘린다. 

그런 순수함을 지닌 감성적 할머니였던 것이다.

 

그러나 좁디좁은 외손자와의 생활공간에 들어와서는

말없고 퉁명스럽기만한 외손자(중3) 때문에 늘 고민이다.

세대 차이를 실감케하는 외손자의 '싸가지 없음'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외손자가 여학생 성폭행 사건, 이어 나타난 자살사건에

깊이 연루된 6명의 학생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을 알고부터다.

외손자를 아끼고 사랑하는 외할머니, 고민이 깊다.

그 고민 만큼이나 시쓰기가 어렵게 느껴지고.....

 

주인공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어느 돈많은 회장집 간병인이 된다.

66세의 나이에도 꽃무늬 수두룩한 화사한 외출복이 돋보인다.

젊은 시절 사람들 꽤나 울렸을 자태일테지만

지금은 중풍환자인 회장에게 늘 관심의 대상이 되어 있다.

회장은 그녀를 대상으로 욕정을 풀고 싶어하는 모습을 보인다.

회장의 몸을 씻어주는 장면이 여러 번 보이는데 

500만 원이라는 큰 돈을 결정적으로 얻어내는 사건으로 이어진다.

최음제를 먹은 회장을 능멸하는 장면도 있지만

나중에는 오히려 최음제를 먹이고 회장과 잠시 몸을 섞게 되는 사건

다분히 의도적인 행위였지만 합의금 500만원을 마련한다.

 

6명의 학부형들이 마련한 3,000만원의 합의금,

딸을 잃은 가난한 어머니에게는 그나마 위로가 될 터이다.

그러나 주인공에게는 더 큰 고민이 생겼던 것 같다.

여자 친구를 죽게 만든 외손자의 뻔뻔함, 싸가지없음.

식탁 위에 놓인 죽은 여학생의 사진을 보고도 별 반응이 없는

할머니에게는 말문을 아예 닫아버린 손자의 그 싸가지,

비록 사랑하는 외손자이지만 할머니는 용서할 수 없었던 것 같다.

양심의 가책없이 아무 생각없이 살아가는 외손자였으니....

 

결코 돈으로는 사건의 본질을 해결할 수 없다는 메시지이다.

주인공은 사랑하는 외손자의 양심과 순수를 보고 싶어했던 것이리라.

양심의 가책조차 느끼지 않은 외손자의 뻔뻔함에 비장한 결심을 했던 것 같다.

결국 시낭송 모임에서 만난 아주 인간적인 경찰관에게 고백을 하고....

손자와 배드민턴을 치던 장면이 경찰과 배드민턴을 치는 장면으로 바뀐다.

주인공은 손자가 경찰에 연행되는 장면에도 놀라지 않는다.

그 외손자에 대한 사랑을 남다르게 실천한 것으로 해석된다.

그리고 주인공은 시를 가르쳐 준 김용탁 시인에게

원고지에 쓴 시 한 편과 꽃다발을 한 아름 남긴다.

 

그 이후 주인공은 한 번도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부산에 사는 딸이 올라와 어머니의 종적을 살피지만 없다.

휴대폰으로 연락을 해도 받지를 않는다.

주인공의 자취에 대해서는 관객의 상상력에 맡기려는 의도가 엿보이고

여운을 중시하는 '시'의 본질에도 가까운 마무리일 것 같다.

 

누구나 시를 쓸 수 있다고 하는 시인의 메시지는 있으나

시를 쓴다는 것은 영화에서든 현실에서는 쉽지가 않다.

그래서 영화 속의 김용택 시인은

요즘엔 시가 죽어가고 있다고 진단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시를 읽으려고도 쓰려고도 하지 않아요.'

 

영화를 다 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아직도 영화의 처음과 마지막 장면에서 보여준

강물의 도도한 흐름과 그 흐름소리가

눈과 귀에 강렬하게 남아있다.

 

이창동 감독이 서울로 상경하기 전,

영양고에서 국어교사로 근무하던 시절에 쓴

'광대론'이라는 시편 하나가 오버랩된다.

그는 대학 시절 천상 끼많은 연극배우였으니

시 '광대론'이 자연스럽게 탄생되었던 것 같고,

다섯 번째 영화 '시'까지 탄생되지 않았을까 싶다.

잠시나마 나도 이창동 감독과 함께 인연을 맺어

무대 위에서 만났던 것을 큰 영광이라고 말해도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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