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날의 우중충한 날씨가 맑게 개었다. 햇볕이 강렬했다.
춘천에서 하룻밤 묵은 김에 의암호에 떠 있는 붕어섬이나
소양강 거슬러 청평사를 다녀올까 하다가 그냥 구미로 내려가기로 했다.
춘천을 벗어나 중앙고속도로를 달려서 단숨에 원주를 통과, 북제천 IC로 빠졌다.
충주호 주변을 둘러보고 가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비록 길이 꼬불꼬불해서 다니기가 쉽지 않은 곳이지만, 운치는 최고다.
청풍면에 있는 청풍문화재단지에 들어가 보기로 했다. 두 번째다. 충주댐이 생기면서 수몰된 이곳 사람들의 한이 어떨지는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저 물아래 마을은 토지가 비옥하고 자연경관이 아름다워 선사시대부터 많은 인구가 마을을 이루며 살아온 곳이다.
"삼국시대에는 고구려와 신라가 기름진 들을 차지하기 위해 자주 다투었고 육로 못지않게 수운이 발달하여 강변에 인구가 집중되었다. 특히 청풍은 남한강 상류에 자리잡은 고읍으로 신라시대에는 나제군의 영현이었고, 고려 시대에는 충주목에 예속되어 감무(監務, 고려말부터 조선초까지 작은 현의 원을 일컬음)를 두었다. 조선시대에는 수운의 요충지로 도호부를 두었기 때문에 선사시대부터 근세에 이르는 많은 문화유적을 간직해 왔다. 그러나 시대의 흐름과 국운의 융성함에 따라 충주다목적댐이 건설되니 이곳은 물에 묻히게 되었다. 이에 충북에서는 한국산업산업기지개발공사의 지원을 받아 이 지역 안에 있는 문화재를 보존하기 위하여 1980년에 수몰대상 지역 안의 문화유적을 지표 조사하였으며 1983년과 1985년 3개년에 걸쳐 고고 분야 33지구, 역사 분야 10지구, 불적 분야 5지구 등 48개 지구를 선정, 학계로 하여금 발굴조사 하였고 36건의 유형 문화재를 이전하였다. 이 단지의 규모는 총 16,482평으로 청풍면 안에 있는 문화재 가운데 수몰로 이전이 불가피한 문화재와 발굴조사에서 드러난 중요한 지석묘 등 한곳에 이전하여 한강변의 거석문화재를 한눈에 볼수 있게 배치하였다. 1983년에는 한벽루를 비롯한 5동의 관아 건물과 청풍향교, 불상 그리고 전통적 양식을 갖춘 민가 4동과 비석 등 중요문화재를 이전 완료하였다. 비록 원위치는 물속에 잠겼지만 유형문화재는 원형을 보존하고 건물의 방향과 거리를 원형에 맞추는데 최선을 다하였다" 고 안내판에 쓰여 있다.
이엉으로 덮은 고가 담장 아래 핀 옥잠화는 고고함을 자랑하고 있다.
바람재들꽃의 정가네님 댁에는 옥잠화가 얼마나 피었을까 가 보고싶다.
벼슬아치들의 선정비와 기념비가 즐비하고, 선돌과 고인돌의 모습이 생생하다.
보물 제528호, 청풍 한벽루(淸風 寒碧樓)의 시원스런 모습!!
고려 충숙왕 4년(1317) 청풍현이 군으로 승격되자 이를 기념하여
관아에서 세운 목조건물이며 연회 장소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누각의 풍류가 예사롭지 않다. 돌계단을 딛고 올라서 또 한 단계 오르고 또 오르면 저 끝은?
보물 제 546호, 청풍석조여래입상, 석불의 미소가 압권이다. 조각이야 투박하기 이를 데 없으나
저 자비의 미소야 말로 사바세계 중생들에게 보내는 최고의 선물처럼 느껴진다.
누에치기에서 꼭 필요한 기구다.
저 위에 종이를 깔고 뽕잎을 수시로 제공하면 누에는 쉴새없이 뽕잎을 먹고
잠도 두세 번 자고 하면서 점점 크는 것이다. 징그러울 정도로 성충이 돼서
입에서 보배같은 실이 나오기 시작할 때면 고치를 만들 수 있는 자리로 옮겨준다.
어릴 때부터 어른들이 양잠하던 모습을 보아 왔기 때문에 전혀 낯설지 않다.
삽작문 위에 손을 걸쳐 보았다. 옛날 시골집의 문같아서 정겹기만 하다.
옛날 어른들이 시집갈 때 타고갔던 가마, 울 엄니도 가마타고 시집을 오셨지, 아마......
청풍문화재단지 안에서 내려다 본 충주호의 모습, 가운데 있는 것이 분수인데
엄청난 높이의 물줄기를 조금 전 내뿜었더랬는데, 지금은 흔적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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