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왕 쓰는 것 끝까지 써 보자
이렇게 겨우 엊저녁 완결했습니다.
다소 긴 글이 되었습니다만
개인적으로 자세하게 기록해 두는 게
좋겠다 싶었던 거지요.
직접 여행을 한 사람이야,
나중에라도 자신이 써 놓은 글을 읽으면서
새록새록 그 옛날의 추억이 떠올라
실감날지 몰라도 처음 읽는 분들로서는
오히려 괴롭지 않을까 싶네요.
그래도 시간나면 한번 읽어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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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곳을 찾아서
여행 첫날
2008년 7월 23일, 공항엔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로 그득했다. 오전 10시가 되자 33명의 일행은 약속장소에 모였다. 우리 가족 6명(내가 처형이라 부르며 아내가 언니라고 부르는 미모의 세 여인, 절친한 남전 형님, 그리고 우리 부부)을 비롯해서 전국 각지에서 모인 사람들이다. 역시 남자는 몇 명 되지 않는다. 나까지 포함해서 7명이 전부다. 연세가 지긋해 보이는 분들도 있고,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어린 학생도, 사춘기의 중학생도 든든한 부모와 함께 왔다. 내색은 안 해도 다들 여행에 대한 설레임으로 가득 차 있으리라.
드디어 12시 35분, 독일의 프랑크푸르트행 아시아나 항공 oz 542편이 활주로를 무서운 속도로 질주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정상 비행고도인 33000피트(1만 미터)까지 날아오른다. 좌석 바로 앞의 눈높이에는 비행시간, 비행고도, 비행기 밖의 온도, 진행방향과 위치 등을 수시로 알려주고 있는 모니터가 작동되고 있다. 프랑크푸르트까지 11시간이 소요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눈뜨고 그 시간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리는 것은 괴로우니 잠이라도 자 둬야만 한다. 억지로 잠을 청할 필요는 없지만 잠이 오면 그냥 자면 되는 거다. 예쁘고 귀여운 스튜어디스들이 서비스를 시작한다. 채널을 마음대로 선택해서 볼 수 있다면서 개인마다 헤드폰을 주더니 음료수와 차까지 따라 준다. 맥주도 주문하니 캔 채로 가져다 준다. 또 조금 있으려니 점심시간이라며 기내식을 제공한다. 항공기 기내식 콘테스트에서 상을 받았다는 김치비빔밥을 신청해서 먹으니 과연 명성대로다. 저녁도 기내식으로 맛있게 먹었다.
프랑크푸르트 현지 시각, 오후 5시. 입국 절차를 마치고 짐을 챙겨 공항을 빠져 나오니 폴란드 출신의 요셉이라는 이름의 기사가 제일 먼저 우리를 반긴다. 8박 9일간의 전 일정을 우리와 함께 생활하게 될 사람인데, 잘생긴 미남으로서 매우 친절하고 간간이 우리말을 잘 구사하는데 친근감을 준다. 버스도 노랑풍선 여행사의 전용인 듯, 옆쪽에 '거품없는 여행사 노랑풍선'이라는 광고 문구가 박혀있다. 인솔자인 진종식 가이드(보통 '진반장'이라 부름)도 여러분들 덕에 전용버스까지 두게 되었다면서 넉살을 떠는데 귀엽다. 버스는 프랑크푸르트를 벗어나 어느새 아우토반(자동차 전용 고속도로) 위를 달리고 있다. 숙소인 다싱(하이웨이 호텔)을 향해서 달린단다. 4시간 정도를 더 가야하는 만큼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아우토반 주변의 풍광을 즐기는 것이 최고의 지혜이리라. ‘아우토반’이라 해서 무한질주가 가능하다 생각했는데, 우리나라의 고속도로보다 더 나을 게 없다. 교통량이 많고 교통사고가 많아지면서 특정 구역을 제외하고는 제한 속도를 시속 120킬로미터 또는 100킬로미터로 규정해 놓고 있다고 한다.
고속도로 주변의 숲이 인상적이다.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살려서 피곤에 지친 운전자들이 잠시 쉬다갈 수 있는 공간을 곳곳에 마련해 놓았다. 휴식 공간 좌우에 숲이 위치하도록 배려해 놓은 게 인상적이다. 중앙분리대를 제외하고는 도로 좌우의 가드레일은 없다. 필요한 곳만 몇 군데 설치해 놓은 정도다. 독일의 유명한 자동차들이 눈에 띈다. 폭스바겐, 아우디, 오펠, BMV, 토요타 등 세계 굴지의 자동차 회사가 내 놓은 고급 승용차들이다. 하나같이 소형이다. 연료를 아껴 쓰려는 소박한 유럽인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중형, 대형급을 선호하는 우리나라 사람들과 금방 비교가 된다. 도로 주변엔 평평한 농지가 아닌 완만하게 경사를 이룬 밭들이 끝없이 펼쳐지고 있는데 누런 빛의 밀밭과 푸른빛의 옥수수밭이 자연스레 대조를 이룬다. 넓고 푸른 녹지를 소유한 평화스런 농가들이 바라보는 이의 마음을 풍성하게 한다. 독일의 농가 수입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나 한미 FTA(자유무역협정)로 망가져가는 우리의 농촌과는 사뭇 다를 것임은 분명하다. 4만 5천불의 국민소득을 자랑하는 독일 아닌가? 게다가 동서독의 분단국가에서 통일 독일의 기치를 내걸고 다시 시작한 게르만족의 비장한 각오를 우리는 배워야 하지 않을까? 이념의 굴레를 들씌워 좌우논쟁을 마다하지 않는 우리의 정치 현실을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하고, 분노까지 치밀어 오른다.
군데군데 뭉게구름과 쪽빛 하늘, 무한히 펼쳐지는 너른 들판, 크고 작은 숲의 어우러짐이 주는 감동도 시간이 흐르면서 붉은 노을을 만드는가 싶더니 강렬한 빛으로 온 세상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이고 만다. 그렇게 해서 날이 저물었고, 현지 시간 10시 30분(한국 시각 새벽 05:30분, 우리나라가 7시간이 빠름) 고속도로 근처의 숙소(하이웨이 호텔)에 도착했다. 오랜 시간 제 때 수면을 취하지 못해 몹시 피곤할 법도 한데 괜찮다. 시차 적응하기가 어렵다고들 하지만 아직 술 한 잔 정도 더 하고 자도 될 것 같다. 남전 형과 여행지 도착 기념 소주 한잔을 나누고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가 다음날을 위해 잠을 자 두기로 했다. 그러나 깊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낯선 잠자리가 충분한 수면을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새벽 5시경, 날이 밝아오기에 자리에서 일어나 호텔 문을 나섰다. 호텔 입구에 갓 배달된 빵 바구니 몇 개가 쌓여있다. 아마 식당에서 주문한 것 같은데, 출출한 김에 빵 하나를 집어들었다. 어차피 오늘 아침 우리 일행들이 먹을 음식인데 미리 하나 먹는다고 누가 뭐라 할까 싶었다. 한입 떼어 무니 맛이 기가 막히다. 주차장엔 10여대의 승용차들이 주차하고 있는데, 그 중에 오피러스 자동차가 눈에 띄어 반갑다. 우리차를 수입하여 쓰는 독일 사람이라면 그는 누구일까? 관세가 붙었을 테니 비싼 값으로 수입했을 테고 그럼 독일에서는 어느 정도의 값에 팔렸을까? 폭스바겐, BMW에 비해서 경쟁력은 있을까? 주차장 옆 정원수를 살펴보니, 빨간 열매를 달고 있는 마가목이 보인다. 울릉도에서 흔히 발견되는 나무다. 몇 년 전 울릉도 나리 분지에서 처음 보았던 감동이 떠오른다. 조금 떨어진 곳에 무궁화도 피어있다. 어, 여기 독일에도 무궁화나무가 있나? 우리나라에만 자생해야 어울릴 나무인데…… 해가 뜨려는지 하늘이 훤해진다. 반달이 아직 중천에 떠있는데 해가 뜨면 곧 그 빛을 잃으리라. 옥수수밭 위로 보이는 달을 카메라에 담으려 옥수수 밭 가까이 다가가니 찬이슬이 발아래 차인다. 넓게 펼쳐진 호밀밭이 인상적이라 그것을 배경으로 찍고, 밀 이삭 하나를 뽑아 결실여부 알아보니 아직 덜 영글었다. 어릴 적 밀밭에 들어가 까실까실한 이삭을 부벼서 그 안의 발그레한 밀알을 입안에 털어넣어 껌을 만들 심사로 계속 씹어댔던 기억이 새롭다. 밭가의 엉겅퀴와 달맞이꽃도 우리의 농촌과 다를 게 없고 시들어가는 바알간 개양귀비꽃이 낯설 뿐이다. 귀에 익은 참새소리가 들려 바라보니 우리나라에서 보는 참새와 날아가는 품과 약삭빠른 움직임이 똑같다. 참새는 그러면 만국의 텃새인가?
2일째
스트레칭 체조로 몸을 푸니 한결 몸이 가벼워진 것 같다. 아침 식사를 간단히 하고, 버스에 오르니 진반장의 친절한 안내가 시작된다. 늘 그렇듯이 그는 모든 이야기를 자연스레 시작한다. 독일에 왔으니 독일의 역사 정도는 알아야 한다는 듯, 게르만족의 이동에서부터 제 3제국 히틀러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일목요연하게 정리를 해 준다. 세계사 시간에 배웠던 것보다 더 귀에 쏙쏙 들어온다. 관심이 많으니 학습효과는 만점이다. 뮌헨 도착까지 두 시간 정도 걸리는데 언제 도착했는지 모를 정도였다. 시내의 도로 한가운데는 전차(트램)가 오갈 수 있도록 철로가 복선으로 깔려 있고 굵은 고압 전선줄이 거미줄처럼 도로에서 일정한 높이를 두고 매달려 있는데 다소 불안하기까지 하다. 시내 곳곳이 전선줄로 뒤덮여 있으니 감전사가 염려되는 형국이다.
마리엔 대성당을 들러 그 내부를 관람하고, 나찌의 히틀러가 거사를 계획하던 호프브로이 하우스 등을 차례로 둘러보았는데. 특히 호프브로이는 맥주집 특유의 분위기가 있어서 좋았다. 평소엔 잘 먹지 않는 흰소시지와 햄이 맥주 안주로 괜찮다는 것도 알았다. 수많은 고객들이 남긴 내용 모를 식탁 위의 낙서가 잔상처럼 남았다. 그 전통의 맛을 느껴보기도 하고 히틀러의 나찌당 결사 장면을 상상해 보기도 했다. 수백만의 유대인 학살을 자행했던 그 잔인함과 부도덕함이야 인류의 이름으로 지탄받고 단죄되어야 마땅하지만 한편으로는 당시의 독일 국민들에게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던 지도자였다는 점에서 부럽기조차 하다. 국민들에게 꿈과 희망을 안겨주었기에 우상으로까지 추앙된 히틀러 아니었던가?
뮌헨에서 국경을 넘어 오스트리아의 짤즈부르크까지 가는 길은 그다지 멀지 않았다. '사운드 오브 뮤직'이란 영화를 보면서 가는 길이어서 그랬을 거다. 지금은 할머니가 된 주인공 쥴리 앤드류스의 상큼한 연기와 고운 노래 솜씨가 여전히 감동을 준다. 알프스의 환상적인 배경이 영화의 내용에 걸맞게 관객을 사로잡았기에 짤즈부르크가 관광의 명소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광도 지금까지의 완만한 들판이 아니라 산과 호수가 많아지는 것으로 봐서 알프스가 가까이 있음을 알겠다. 여섯 나라에 걸쳐서 휘달리는 알프스 산맥은 오스트리아의 짤즈부르크에 와서야 제 모습을 보이는가?
'화려도'라는 중국집에서 점심을 먹고, 알프스의 빙하가 녹아 형성된 76개의 호수와 산들이 어우러져 있고, 겨울에는 스키장으로 유명하다는 짤즈캄머굿이란 곳으로 향했다. 케이블카를 타고 1,600미터 고지의 알프스를 올라 아래를 조망하는 멋진 장소라고 해서 옵션으로 선택한 코스는 예기치 않은 가랑비와 안개를 만나 실망스런 여행코스가 되고 말았다. 가장 기대했던 곳이었기에 그만큼 실망이 컸는지도 몰랐다. 좋았던 날씨가 갑자기 흐려지더니 가랑비까지 내리는 상황이 되고 만 것이다. 진반장은 낭패감을 숨기지 못하고 미안하게 됐다면서 다른 장소에서 보상을 해주겠다고 우리를 위로한다. 어찌 하랴! 하늘의 뜻인 것을, 그러나 가파른 산을 오르내리는 케이블카를 타고 그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풍광도 색다른 맛이었고 목장의 풀을 뜯고 있는 가축들, 풀밭위의 그림 같은 집, 저 멀리 보이는 호수의 분위기, 정상에 세워진 십자가, 안개 속을 통해 바라본 상상의 세계에서도 우리는 만족할 수 있었다. 케이블카를 내려서 호숫가로 내려가는 길, 오스트리아의 전통 가옥으로 보이는 집들이 눈에 들어온다. 용마루 끝 박공 부분을 납작하게 숨을 죽인 3층 정도의 집들이 대부분인데 2층 테라스엔 어김없이 곳곳에 화분에 꽃을 심어 장식을 하여 운치가 넘치다 못해 아름다움 그 자체다. 테라스에 앉아 간간이 차를 마시고 일광욕을 즐기는 서구인들의 여유가 느껴져서 좋다. 조금 더 호숫가로 내려가니 모차르트의 어머니가 살았다는 집, '모차르트 하우스'가 있다. '모짜르트'라는 천재 음악가가 있었기에 그를 낳은 어머니도 부각이 되는 것은 동서양이 다를 바 없나 보다. 효도의 시작과 끝을 언급하고 있는 효경(孝經)에도 보면, '몸을 세워 도를 행하여 이름을 후세에 떨쳐서 부모를 현저하게 하는 것'을 효도의 끝이라고 했으니 말이다. 푸른빛의 지붕에 살구색 페인트를 칠한 제법 규모가 큰 2층집인데 창문의 일부에는 모차르트의 어머니와 누이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볼프강 호수! 알프스 산으로 둘러싸인 광활한 호수! 그 위를 배를 타고 다니며 주변 풍경을 카메라에 담는 즐거움은 컸다. 산중턱에 걸린 안개구름이 어느덧 산을 뒤덮었다가 서서히 호수 아래로 흘러내리고, 호수 가까이 자리잡은 초원과 나무로 둘러싸인 평화스런 집들이 그것을 고스란히 안고 있는 모습 같아서 한 폭의 신비스런 동양화였다. 무릉도원이 따로 있으랴. 저런 곳에서 마냥 죽치고 살았으면 싶다. 풍류를 아는 오스트리아 국민들이 다시금 부러울 따름이다. 아내와 나는 그것을 배경으로 타이타닉의 한 장면을 연출해 보았으나 주변의 아름다움에 압도되고 말았다. 또 다른 곳을 바라보니 길게 띠를 이룬 하얀 구름이 산을 가로질러 길게 호수면과 평행을 이루면서 이어진다.
마냥 즐겁게 해 주던 배가 호숫가 낯선 곳에 정박하더니 우리를 내려놓는다. 진반장이 안내하는 길로 올라서니 어느새 요셉은 그곳까지 버스를 몰고 와 우리 일행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다시 짤즈부르크 시내 관광을 위해 왔던 길을 되돌아가야 했다. '아름다운 정원'이란 뜻의 미라벨 정원을 제일 먼저 들렀다. 1606년 디트리히 대주교가 연인 살로메를 위해 지었다는 곳, 많은 조각상들과 분수, 꽃들이 어우러져 그야말로 아름다운 정원이었다. 영화의 여주인공 마리아가 어린이들과 '도레미송'을 불렀던 무대로 유명하다.
잘쯔부르크의 상징이라는 호헨잘츠부르크 성은 1681년에 완공된 성으로서 600여년에 걸쳐서 지어졌다고 하는데 중부유럽 최대의 성으로서 온전히 옛모습을 보존하고 있어서 마냥 신비감을 더해주지만 잘자흐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 위에서 신비스레 바라볼 뿐 더 가까이 갈 수 없었다. 몇 년 전 이곳을 다녀간 친구가 그 성에서 내려다보는 경치가 최고라면서 꼭 가봐야 한다는 말이 생각났지만 시간의 제약상 어쩔 수가 없다. 이런 것이 바로 팩키지 여행의 한계가 아닐까?
다리를 건너 구시가지에 있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거리라고 불리는 게트라이데 거리로 접어들었다. 각 상점마다 독특하게 만들어 놓은 철제 간판들이 세계인들의 이목을 끈다고 하는데, 우리 일행 중에 서울 을지로에서 기획사를 운영하고 있는 안○○라는 여인은 이 거리를 자세히 보기 위해 여행을 왔다고 할 정도이니 그 명성을 조금은 알겠다. 그 거리의 끝자락에는 모차르트의 생가가 위치해 있다. 음악의 신동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가 태어나서 17세까지 살았다는 곳, 그가 어릴 때 썼던 바이올린, 편지, 자필 악보, 모차르트 일가의 초상화 등이 전시되고 있다고 하는데 직접 보지 못하고 5층의 노란색 건물만 한참 바라보다 돌아서 나왔다. 다리를 건너 신시가로 되돌아오다가 뒤돌아 본 호헨짤즈부르크 성은 그윽한 아쉬움의 눈길을 보내주는 듯 했다. 그날 저녁 식사는 일본식이었으나, 중국인이 주인이라 그런지 중국음식에 가까웠다. 무슨 음식이든 잘 먹는 나에겐 아무런 문제가 안 되었다. 그날 저녁은 알프스 산록에 있는 산장 호텔(HOTEL ANLANGER)에 여장을 풀었다.
3일째
다음 날 아침 5시에 일어나 산책을 위해 남전과 나는 호텔 문을 나섰다. 카메라도 챙겼다. 예상했던 대로 아침식사용 빵이 호텔 문앞에 배달되어 있다. 어제 새벽에 훔쳐(?) 먹었던 그 빵맛이 되살아나서 하나를 집어서 남전과 반을 나눠 입에 넣으니 역시 별미다. 이러다가 쟝발장이 되는 것 아닌가 하면서 웃었다. 호텔 뒤로 돌아 인적 없는 마을을 조금 지나니 나무다리 아래로 맑은 시내가 흐르고 있고, 좀더 숲 속으로 들어가니 서울 청계천 정도의 폭으로 제법 많은 물이 소리내며 흐른다. 알프스 산의 계곡을 타고 흘러내려온 물이 아닐까 싶다.
"형, 이런 계곡물을 헤엄쳐서 저 건너편으로 갈 수 있겠어요?"
"그럼, 어릴 때부터 큰물진 뒤에 여러 번 개울에서 수영해 봤기에 이 정도 쯤이야 하지."
"물살이 이렇게 세면 밀려서 되겠습니까?"
"거슬러 헤엄치지는 못하더라도 건널 수는 있지. 어릴 때 배운 개헤엄이 최고야"
"역시 대단하십니다.”
한참을 거슬러 올라가다가 갈림길이 있어서 왼쪽의 길로 접어든다. 그리로 가다가 다시 왼쪽으로 난 길로 가면 숙소로 되돌아 갈 수 있을 것이니까. 왼쪽으로만 틀면 원을 그리든 네모를 그리든 원위치로 가게 되는 법이니 길 잃을 일은 없다. 지나가는 기차도 사진에 담고 마을의 모습을 사진에 담으면서 두런두런 이야기하며 산책하는 즐거움도 남다른 재미가 아닐까 싶다. 숙소 가까이 되돌아오니 한 시간이 조금 지났을 뿐, 아직 마음의 여유가 있다. 일행들의 방에 머지않아 모닝콜이 시작될 것이다. 오늘은 비엔나로 가는 날,
짤즈부르크에서 비엔나로 가는 길, 3시간 30분의 먼 거리를 버스로 달려야 하는데, 진반장은 그 지루함을 달래 주려는 듯, 사라사테의 '찌고이네르바이젠', 모차르트의 '엘 비라 마디간', '밤의 여왕', 드보르작의 '유모레스크' 브람스의 '헝가리 무곡' 등 훌륭한 클래식 음악을 계속해서 들려주는 센스를 보이더니 또 특별 서비스로 비엔나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멜크 수도원으로 안내할 테니 기대해도 좋다고 한다. 일행은 박수치며 좋아들 한다. 여하튼 가이드의 친절은 여행객들의 큰 힘임에 틀림없다.
남전 형과 내가 나란히 앞에 앉고 바로 뒷좌석에 앉은 아내와 막내 처형은 어린 시절의 추억을 더듬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언젠가 아내로부터 들은 내용들이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묻어 나온다. 창밖엔 비가 조금씩 내린다. 흘러나오는 클래식 음악과 잘 어울린다는 느낌이다. 비엔나에서 80킬로 정도 떨어진 있는 멜크 수도원에 도착했을 때는 비는 더 이상 내리지 않았다.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의 무대였다고 하는 곳, 수도사들의 의문의 죽음을 둘러싼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추리소설의 배경인 만큼, 수도원 구석구석이 신비함을 그대로 간직한 듯하다. 수도원(성당) 본당 안은 크고 작은 금빛 조각품으로 장식되어 있고, 둥근 천장에는 밝은 색 톤의 성화들이 정교하게 그려져 있다. 기둥과 기둥 사이의 창 위로는 영락없이 원형의 격자창이 나 있어서 둥그런 천장과 자연스레 연결되고 있다. 전체적으로 엄숙한 느낌을 자아내는 본당의 분위기다.
멜크 수도원에서 비엔나로 오는 동안 날은 이미 개어 비엔나의 하늘은 뭉게구름으로 가득하다. 지하철의 움직임도 보이고, 빨간 색깔의 트램이 지나가는 장면도 인상적이다. 4층 높이의 주택이 주욱 연결되어 있으면서 지붕 용마루 위엔 사각형의 무엇이 돌출되어 있는데, 집집마다 연결된 벽난로의 굴뚝이 아닐까 싶다. 어느 베란다에는 뚱뚱한 여인이 한 사람 의자에 나와 앉아 햇빛을 쬐고 있다. 넓은 길 위로 위로는 전차용 전선줄이 복잡하다. 유럽은 아직도 속도 느린 트램을 고집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옛것에 대한 애착이 강함에 틀림없다. 그렇다고 내가 감히 그들을 탓하거나 비난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런 정신이 있었기에 중세풍의 건물들이 곳곳에 고스란히 보존되어 수백 년이 지나도 그 훌륭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 아닌가? 산업화 사회의 서구화 과정을 겪으면서 전통적인 멋이 사라져가는 한국에 비한다면 오히려 이런 전통 고수가 부럽기 그지없다. 서구의 힘은 어쩌면 바로 그 전통에서 비롯된다는 생각에 이르니 초조감마저 생긴다.
점심 식사를 하기로 되어 있는 'Akakiko'라는 식당에 들어갔다. 비엔나에서 가장 성공한 한국인의 식당이고, 체인점을 여러 개 두고 성업 중이라고 한다. 메뉴판에는 태극 문양 밑에 '게미제 비빔밥, 불고기 비빔밥, 호렌소 불고기, 매운탕, 육개장' 등이 적혀 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식당 이름은 우리식은 아니다. 일본식 이름 같아서 그 주인의 정체성이 조금은 의심스럽다. 비엔나를 찾는 많은 일본 사람들을 의식하고 있는 듯한 식당 이름 같아서 섭섭하기조차 하다. 우리가 온 김에 식당이름을 고쳐줄까? 남전 형 같으면 뭐라고 간판을 고칠까? 나 같으면 우리 고향 이름을 따서 '갈매기 식당'이라 하면 불고기의 이미지와 잘 통할 것만 같다. 우리 일행은 육개장 종류로 한 그릇씩 먹었는데 먹을 만 했다.
오후엔 이정은이란 현지 가이드의 도움으로 쇤부룬 궁전 안을 한참 동안 둘러보고 비엔나 시청사, 슈테판 대성당을 둘러보는 투어가 진행되었다.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 3위 안에 항상 낀다는 도시, 인구 160만 명의 음악의 도시, 과거의 화려한 역사를 보여주는 박물관, 오페라극장, 대학 등의 웅장한 건물을 많이 간직하고 있는 도시, 다뉴브강 연안에 위치하여 행정, 금융, 상업의 중심인 도시, 온갖 자랑거리를 간직하고 있는 비엔나임에 틀림없다고 하는데, 겉으로 봐서는 도저히 그 내용과 깊이를 알 수 없는 것이다.
경제학을 공부하고 있는 유학생 이정은 가이드는 총명해 보이는 두 눈을 반짝이면서 우리 일행들에게 자세한 안내를 시작한다. 일행을 쇤부룬 궁전 출입구 쪽으로 안내하더니 그 궁전이 생기게 된 배경과 건물의 특징 등을 자세하게 설명해 준다. 쇤부룬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여름 궁전으로 프랑스 베르사이유 궁전을 본떠서 만들었다고 하는데 외관보다는 내부의 화려함이 더 강조되고 있는 듯하다. 그 내부는 외부와 다르게 그야말로 초호화판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벽과 천장을 금박을 입히거나 순금으로 호화롭게 장식해 놓았고 그 위에 그려진 엄청난 규모의 예술적 그림 등, 왕과 귀족이 누릴 수 있는 모든 물질이 거기에 총망라되어 있는 현장을 보는 듯하다. 잘 꾸며진 무도회장, 회의실, 침실, 18세기 후반에 마리아 테레지아가 수집했다는 동양의 자기나 칠기, 페르시아의 세밀화 등으로 호화롭게 장식된 방들로 그득하다. 1,441개의 방 가운데 공개되는 것은 극히 일부라 하니 합스부르크 왕가의 위력이 실로 어떠했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쇤부룬 궁전은 외관상의 위용은 그다지 크게 느껴지지 않는다. 얼핏 보아도 미완성 궁전이라는 느낌을 주고, 규모면에서는 베르사이유와 비교가 되지 않는다면서 남전 형은 고개를 내젓는다. 약간 높은 위치에 있는 미완성 궁전을 바라보면서 조성된 왕궁 정원은 온갖 꽃들로 의미 있게 조성되어 있다. 오스트리아 국기를 상징하는 꽃으로 테를 두른 곳이 있고, 보드라운 잔디로 그 여백을 메워서 전체적으로 예쁜 정원이다. 아무리 못생긴 사람이라도 그것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면 잘 나올 것 같다. 아름다운 분수와 그리스 신화를 주제로 한 대리석상들도 곳곳에 눈에 띈다.
성 스테판 성당은 지금 보수 중이다. 성당의 앞부분을 큰 천으로 가리고 그 안에서 누군가 보수 작업을 하고 있는 것 같다. 137미터에 달하는 첨탑이 있는 고딕양식의 건물로 65년 간의 공사 기간을 거쳐 1359년에 완성되었다고 하는데 우리나라로 친다면 고려 말에 지은 교회인 것이다. 외양상 보기에 전체적으로 검은 빛을 많이 띠고 있다. 오랜 세월 지나는 동안 모래 성분이 대부분인 벽돌 속에 함유된 철분이 산화되어 나타나는 자연스런 결과라고 한다. 오래된 건물일수록 검은 빛을 띤다는 결론일 게다. 성당의 내부도 살펴볼 수 있었는데, 여느 성당에서나 볼 수 있는 스테인드글라스지만 특별히 규모가 크고 아름다웠다. 성당을 둘러보고 광장으로 나오니 관광객들로 인산인해(人山人海)다. 의상과 얼굴을 독특하게 분장한 사람들 몇 명이 사람들 틈에 돋보인다. 모델이 되어줄 테니 사진을 찍으라는 눈길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그 앞에는 작은 그릇이 놓여 있다. 사진을 찍고 약간의 돈을 거기다 놓고 가라는 뜻일 게다. 그를 모델로 사진을 재미있게 찍어대는 사람들을 잠시 바라보다가 광장으로 나있는 한 골목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니 동양인으로 보이는 한 여인이 가슴이 확 파인 검은 색 원피스에다 청바지를 입고 길 한복판에서 피아노 연주를 하고 있다. 얼핏 들어 보아도 연주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피아노 왼쪽 옆에 'www.Soryang.at' 라고 홈피 주소를 적어 놓은 것으로 보아 자신의 존재를 알리려는 뜻이 분명하다. '소량'이라는 이름과 연주자의 얼굴생김으로 보아 한국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고, 음악의 본 고장인 비엔나 한복판에서 저리도 자신 있게 연주하고 있는 한국인이라면 누굴까? 다가가서 말이라도 한번 건네 볼까? 아니다. 그녀는 지금 연주 중이다. 한참을 듣다가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슈테판 성당의 첨탑 위로는 비둘기 몇 마리가 유유히 날고 있고, 두 말이 끄는 관광마차는 예쁘게 생긴 관광객 두 명을 태우고 우아하게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우리 곁을 지나간다. 진반장은 집합시간이 되었는지 조별로 인원 점검을 하기 시작한다.
스왈로프스키 제품의 본고장에 와서 그냥 지나칠 수 없다는 생각인지 다들 물건 구입에 열중이다. 아내도 처형들도 마찬가지다. 한참을 돌아다니더니 아내는 시어머니께 선물로 드릴 팔찌를 하나 골랐다고 하고, 처형들 또한 선물용 귀고리와 목걸이를 골라 만족해 한다. 쇼핑이 끝난 뒤 가이드는 저녁 식사를 할 수 있는 곳으로 안내를 하겠다면서 베토벤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의 음악 세계와 모차르트 음악 세계의 차이 등의 차원 높은 이야기와 그 주변의 에피소드는 비엔나에 걸맞아 들을 만하다. 고향인 독일의 '본'을 떠나 오스트리아의 비엔나에 정착해서 음악을 공부하던 시절,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다녔다는 성당이 큰길가 왼켠으로 하얗게 위치해 있고,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전원 교향곡'을 탄생시킨 산실도 바로 이 동네라고 한다. 이 정도 같으면 동네 어귀의 멋스러움과 주막집의 운치로서는 부족함이 없으니 대만족이다.
세계의 유명 인사들이 많이 다녀갔다는 식당의 운치는 집시들의 공연과 매우 관련이 있다고 본다. 우리가 찾은 식당은 언제부턴가 집시들의 주된 활동무대인가 보다. 일할 줄은 모르고 놀고 먹기를 좋아하며 음악을 생명처럼 여긴다는 그들, 기회만 되면 늘 그렇게 식당을 찾은 사람들의 한가운데를 비집고 들어와 바이올린과 아코디언으로 여행객들의 정서를 자극하기 시작한다. 적어도 한국 사람들에게는 '아리랑', '해변의 여인', '소양강 처녀', '과수원길' 등 몇 곡을 연주하기만 하면 금방 5유로 정도는 팁을 챙길 수 있고, 수입을 적당히 챙겼으니 연주를 멈추고 금방 떠나버리는 그들 아니던가? '한국 최고!' 라고 외치고는 금방 가버리는 젊은 집시가 뱉아낸 말은 끈적끈적한 가래처럼 아직도 내 귓바퀴에 묻어있는 듯하다.
아기 팔이 이리저리 엉킨 듯한 모습으로 만들어진 소시지, 햄, 감자가 술안주처럼 제공된 저녁 식사(호이리게)는 푸짐했다. 와인 한 잔은 다소 모자라 한 잔을 더 시켜서 마시니 하루의 피로가 확 녹아버리는 것 같다. 가이드 말에 의하며 오늘 저녁 옵션으로 환상적인 클래식 음악 감상 시간이 마련되어 있는데 참가할 사람은 신청하라고 한다. 피곤한 때문인지 대낮의 적극적 참여 의사를 보이던 때와는 다르게 다들 포기하고 만다. 결국 일행 중 아무도 음악회 참여 의사를 밝히지 않게 되자 가이드는 좋은 기회를 놓쳤다면서 통탄을 하더라마는 전체의 뜻이 그런데 어쩌랴?
그날은 산기슭에 위치한 자그맣고 운치있는 호텔에 투숙했고, 밤이 이슥하도록 맥주를 마시면서 하루를 정리했다.
4일째
이른 아침, 식사를 마친 우리는 다시 버스에 몸을 실었다. 지친 여정에 도움이 될까 궁리를 거듭한 듯한 진반장은 영화 '글루미 선데이'를 DVD로 보여준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부다페스트가 배경인 영화, 그 끈적끈적한 주제가의 멜로디로 인해 자살한 사람이 그렇게나 많았다는데……. 어쨌든 비엔나에서 버스로 3시간 30분 가량 달려 부다페스트에 도착했다. 새하얗게 칠한 현수교 다리가 눈앞에 나타나고 관광객들의 입에서는 감탄사가 터져 나온다. ‘엘리자베스교’라는 예쁜 이름이 붙여진 다리 아래 유럽의 젖줄인 다뉴브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다. 강을 중심으로 오른쪽엔 페스트 지구, 왼쪽엔 부다 지구로 나뉘어 잘 구획되어 있다고 한다. 부다 지구 언덕에서 강물을 굽어보고 있는 여신상은 감람나무 잎을 받들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멀리서 보아도 그 크기와 규모를 알겠다. 조금 더 가니 국회의사당 건물이 장쾌하게 서 있다. 바로크 양식의 지붕을 두르고 있었는데, 영국의 국회의사당에 버금가는 규모라고 한다. 우선 시내 중심가에 위치한 한국식 식당에서 비빔밥을 먹었다. 인천공항에서 사온 김치는 어느덧 진공 속에서도 계속 발효되었는지 팽창 정도가 심해 터지기 직전이었고, 그것을 조심스레 뜯어 비빔밥에 곁들여 먹으니 정말 꿀맛이다. 흡족한 마음으로 식당에서 나와 버스에 오르니, 아뿔싸, 식당에서 실컷 많이 잡수시라고 우리말로 얘기하기에 식당 종업원인 줄 알았던 아가씨가 바로 현지 가이드라는 것 아닌가? 백이면 백, 자기를 웨이트리스로 여긴다는 말로 자기소개를 하고, 이내 헝가리와 수도인 부다페스트에 대한 안내를 시작한다.
부다페스트 최대의 교회이자 높이 96미터의 원형돔이 상징인 이슈트반 교회, 제단 중앙에는 성 이슈트반의 대리석상이 있고 또 예배당에는 그의 오른손 미라가 보존되어 있어 신비스러움을 더했고 교회 입구의 정교한 조각이 눈길을 끈다. 교회의 건립 시작년도와 완공년도가 양쪽에 새겨져 있어서 그 역사를 알 수 있게 했다. 워낙 규모가 커서 건립과정에서 인부들도 많이 희생되었다고 한다.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내부도 훌륭하지만 교회 밖의 광장 도 눈여겨 볼만하다. 광장의 바닥도 문양을 넣어서 뭔가를 상징적으로 표현하려 했고, 전체적으로 이 교회가 세상의 중심인 듯한 느낌을 준다.
다시 발길을 옮겨 우리가 닿은 곳은 겔라르트(일명 '찌타 델라') 언덕이었다. 귀엽게 생긴 가이드는 끊임없이 설명을 한다. 헝가리와 관련된 많은 것을 공부했음을 얼핏 들어도 알겠고, 치과 의사를 꿈꾸고 있는 한국인 유학생의 가이드 경력이라야 겨우 몇 개월일 테지만 우리에게 들려주고자 하는 정성이 갸륵하여 만족도로 친다면 최고의 점수를 주고 싶다. 부다페스트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곳, 멋진 풍광과 서늘한 바람이 우리를 그지없이 기분 좋게 만들어 준 곳에서 우리는 너나없이 부다페스트 시내의 풍경을 배경으로 자신들의 모습을 렌즈에 담기에 바쁘다. 언덕을 한 바퀴 돌아 또 다른 각도의 도시 풍경을 사진에 넣고 내려오는데 아내와 처형들이 교장 선생님 부부 두 쌍의 사진 연출을 시도하고 있다. 좀더 다정하고 과감한 애정 표현으로 포즈를 취하게 하면서 깔깔거리는 여인들, 다소 장난끼가 느껴지긴 하나 보기가 좋았다. 쑥스러운 표정으로 촬영에 임하던 그 분들이었는데 언젠가부터 팔짱을 끼거나 손을 꼭 잡고 다니는 모습을 자주 보여 준다. 해외에 나와서 더 돈독해진 애정인가 보다.
버스를 타고 부다 지구의 왕궁으로 향했다. 어부의 요새라고 이름한 곳에 이르러 헝가리 민중의 저력을 배웠고, 다뉴브강과 어우러진 시내 전경을 마음 편하게 바라볼 수 있었다. 그 요새 바로 뒤로는 마차시 성당이 우뚝 솟아 있는데 역대 헝가리 국왕의 대관식이 거행되었던 곳이라 한다. 뾰족뾰족한 고딕 양식의 탑은 하늘로 가 닿고자 하는 인간의 마음을 닮았으나. 사랑과 평화, 자유를 갈구하는 사람들의 바람을 과연 하늘이 알아주었을까? 외부 수리중이라 그 본래의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한다. 내부의 스테인드글라스를 누군가 꼭 보라고 하는데 어수선한 외부 분위기 때문에 미련을 버렸다. 이제 왕궁이 있는 곳으로 가야할 차례다. 길 따라 왕궁까지 자연스레 연결되어 있는데 한참을 걸어서 가야했다. 한낮의 햇볕은 따가울 정도로 강렬하다. 그늘을 찾고 싶다. 우리나라의 여름과는 다른 것이 있다면 습도가 낮아서 아무리 더운 날도 그늘을 찾아가면 시원하다는 거다.
폭격을 받아 윗부분이 파괴되어 버리고 아랫부분은 총탄의 흔적이 그대로 남은 건물이 하나 있는데, 역사의 교훈을 그대로 전해주려는 당국의 의도가 훌륭하다. 왕궁을 향하여 조금 더 가니 헝가리 대통령이 집무하는 건물이 평범하게 왕궁을 향하여 있다. 헝가리 국기와 EU연합 국기가 대통령을 상징하는 문양을 사이에 두고 펄럭이고 있다. 일반인, 관광객들이 자유스럽게 오가는 곳에 대통령 집무실이 있으니 이상하다. 그만큼 이 나라는 그 어디고 성역이 따로 없는 것이고, 그럴 필요가 없다는 증거이리라.
거대한 왕궁 앞에 섰다. 13세기 벨러 4세에 의해 처음 건설되었다는 부다 왕궁, 제2차 세계대전 때 파괴된 것을 복원해서 지금은 역사박물관, 국립미술관, 국립도서관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부다 왕궁, 그 건물이 남아 지나간 왕조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으나 여러 나라를 관통하며 끊임없이 흐르는 다뉴브강은 사람살이의 유한함과 국가의 흥망성쇠를 비웃기라도 하듯 그렇게 흘러가고 있다. 왕궁 라운지에서 코카콜라, 오렌지 주스를 시켜 마시며 갈증을 잠시 식히고 왕궁의 뒷마당을 훑어보고 돌아나갔다. 왕궁은 고압적이고 화려할 법도 한데 차라리 서민적이었다.
다시 다리를 건너 영웅광장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헝가리 건국 영웅, 마자르족 7인의 영웅들이 웅장하게 조각된 동상으로 서 있는 광장, 주변엔 역사박물관, 극장들이 늘어서 있는데 햇볕이 워낙 강렬하여 사진 몇 장 찍고는 그늘을 찾아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가이드는 일행들이 쇼핑을 할 수 있도록 길가의 어느 건물 안으로 데리고 갔다. 아주 작은 규모의 가게인데 알록달록한 자수 작품, 또꺼이 라는 이름의 아이스 와인, 부다페스트 풍광 그림이 박힌 찻잔 받침 등의 토산품을 팔고 있다. 나도 직장 동료들에게 줄 소박한 기념품을 몇 개 사서 챙겼다. 컵받침으로 쓸 만한 것인데, 네모난 코르크판 위에 그림을 그려 장식한 것이다. 가이드는 자수 작품이 빼어나서 매우 유명하다고 하는데, 직접 보니 어딘지 모르게 어설프고 조악하여 우리나라의 것보다 질적으로 떨어진다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별로 사는 사람이 없다.
쇼핑을 하고 나서 서둘러 들어간 곳은 또꼴리 식당이었다. 목동들이 즉석에서 만들어 먹은 것에서 유래한다는 굴라쉬(현지어로는 구야쉬) 스프가 맨 먼저 나오고, 주된 음식으로 생선까스가 나왔다. 아내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니까 좋다. 거기에서도 집시의 공연이 있었는데, 부산에서 온 팀이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나이 많은 집시에게 5유로의 팁을 주니 바로 그녀들 곁에까지 와서 고마움을 전하려는 듯 더욱 열심히 활을 당긴다. 부산의 일행들은 번갈아 가면서 그를 모델로 하여 사진찍기에 바쁘다.
숙소에 여장을 풀고 잠시 쉬다가 그 유명한 다뉴브강의 야경을 보기 위해 일행은 저녁 9시 20분에 버스를 타고 선착장으로 향한다. 배를 타기 전에 명물인 세체니 다리에 잠시 들러 사람들로 들끓고 있는 야시장을 구경했다. 악사들의 연주에 맞춰 춤추는 사람들, 흥에 못 이겨 키스하는 연인들, 온갖 풍물과 볼거리가 세체니 다리 위에 서있는 이방인들의 혼을 쏙 빼놓는다. 진반장은 이런 광경은 좀처럼 보기 힘든다며 만족해 한다. 다시 버스에 올라 선착장으로 가서 예약된 우리들만의 전용유람선에 올랐다. 해진 뒤 황홀한 조명을 받은 건물들은 저마다의 색채와 윤곽을 드러내며 빛을 발하고 있다. 어디에선가 요한 시트라우스의 불후의 명곡,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공유의 CF 칸타타 배경음악이기도 함)가 흘러나오고, 오묘한 색채와 매력을 뽐내는 주변 건물들, 자연과 인공, 밤하늘과 강물, 한 편의 명화처럼 빚어내는 조화가 감격적이다. 다뉴브강에서 보는 부다페스트의 야경 자체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조명에 사용되는 비용의 80%를 지원받는다고 한다. 조명 비용까지 지원해 준다는 게 의아했지만 사실이라면, 야경도 하나의 문화적 가치로 인정한다는 것일 게다.
선상의 음주 시간이 도래했는지 가이드는 와인, 맥주 중에서 마시고 싶은 것을 신청하라고 한다. 팀별로 각자 신청해서 선선한 강바람 안주 삼아 조금씩 들이키니 다들 기분이 좋아지는가 보다. 겨드랑이에 날개가 돋아 날아오르면 금방이라도 날아오를 기세다. 신선이 따로 있을까 보냐. 풍류를 즐기면 신선인 거다. 이 순간에 배의 끝머리에서 마시는 와인 한 잔과 거기에 잘 어울리는 우리가 준비한 쥐포 안주, 게다가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아내와 처형들의 화음과 나의 남성 저음이 한데 어우러져 다뉴브강의 낭만은 절정을 이룬다.
5일째
규모가 조금 큰 호텔 식당이라서 그런지 아침 식사가 다양하고 푸짐했다. 현지식에 익숙해졌는지 빵과 우유 치즈, 햄 등도 먹기에 전혀 부담스럽지 않다. 배부르게 먹었다. 관광차 하루 종일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것도 칼로리를 많이 요구하는지라 잘 먹어두어야만 한다. 그래선지 우리 일행들 모두가 식성이 좋은 것 같다. 뱃살이 나왔고, 얼굴살이 많아졌다는 핀잔을 아내로부터 듣고 있는 나도 얼마나 잘 먹고 있는지 걱정될 정도다.
오늘은 동유럽의 알프스라는 슬로바키아의 타트라 산맥을 넘어 폴란드로 넘어 가는 날이다. 체코와 별다른 투쟁과 다툼 없이 결별한 슬로바키아, 그 나라의 영토를 그냥 경유하여 지나가는 여정이라서 뭔가 아쉽고 섭섭했는데 마침 슬로바키아의 한 마을에 들르는 행운을 갖게 되었다. 점심 식사를 하기로 되어 있는 호텔 식당에 예정된 시간보다 30분 정도 일찍 도착했기에 가능했다. 그냥 무료하게 기다리느니 호텔 주변을 한 번 둘러보고 점심을 먹는 게 좋지 않겠느냐는 진반장의 제안이었는데, 그냥 식당에 머물면서 쉬어도 좋지만 '힘 있고 근력 있는' 사람은 따라오라는 것이다. 아내와 두 처형은 그냥 편하게 호텔에 머물기로 했고, 남전형과 나, 점촌 처형은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다 판단하고 따라 나섰다. 발걸음을 빨리 해서 계단을 올라가니 전쟁박물관이 나오고, 그곳을 지나 다시 골목을 끼고 100여 미터 정도 경사진 길을 올라가니 탁 트인 광장이 나오는데, '아니, 이렇게 멋있는 곳이 있다니!' 하면서 다들 놀란다. 예기치 않게 좋은 곳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광장의 가장 높은 곳에는 수백 년 정도는 되어 보이는 성당 건물 세 개가 적절한 간격을 두고 서 있고, 비취빛 하늘을 배경으로 다들 기막힌 구도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광장 아래로는 아름다운 분수대가 물음 뿜고 있고, 직사각형 모양의 너른 광장 주변엔 유럽식 건물들이 빽빽히 자리해 있는데 '반스카'란 이름의 마을 규모 치고는 너무 커서 차라리 도시 한복판의 규모가 아닌가 싶다. 구름이 적당히 떠다니고 있는 하늘빛이 좋아서 연달아 카메라의 셔터를 눌러 댔다. 어디를 배경으로 찍든 간에 사진이 잘 나올 것만 같다. 이럭저럭 점심 시간이 다 되어 가니 일행들이 기다리는 호텔식당을 빨리 찾아야 했다. 진반장이 안내하는 대로 오던 길이 아닌 다른 길로 내려가는데 아기자기하게 예쁜 집들과 상가가 잘 어울려 있고, 여전히 티 하나 없는 푸른 하늘이 잘 생긴 뭉게구름과 함께 우리를 한껏 흥분시키고 있다. 짧지만 기분 좋은 답사였다. 꿈에 본 것만 같은 '반스카'란 마을이었다.
점심 식사로 구야쉬 스프 같은 것이 나오고, 감자 튀김이 많이 나왔다. 우리 앞에 최선생님의 네 가족이 앉아 있다. 큰 처형이 먼저 말을 건넨다. 독일 슈투트가르트에서 대학을 마치고 계속 음악 공부(피아노) 중인 따님을 프랑크푸르트에서 합류해서 네 식구가 조용조용 떨어지지 않고 관광을 즐기고 있는 최선생님 가족. 귀티나게 생긴 두 부부의 금슬은 참 좋아보였고, 곧 입대를 앞두고 있는 대학교 3학년 아들도 인상이 참 좋다. 잘 생긴 외모에 마음이 한없이 착해 보인다. 딸은 세계적인 발레리나 강수진을 거리에서 자주 마주친다는 이야기를 얼핏 하는데, 아내의 귀가 솔깃해진다.
점심을 먹고 버스에 올랐더니 진반장이 야심차게 준비한 영화 '피아니스트'가 상영되기 시작한다. 역시 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영화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잔인한 장면도 사실감 있게 보여주고 있다. 우리의 관광 내용에 걸맞는 영화임에 틀림없다. 화면에서 떨어져 앉았고, 시력도 좋지 않아 자막을 읽어갈 수 없어서 답답했지만 대충의 흐름은 파악할 수 있었다. 영화에서 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 유럽 일대는 1,2차 세계대전과 관련되어 엄청난 고통을 겪었고, 많은 상처를 받은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정치인들의 개인적 이념과 야욕, 국가 간의 이해관계에 따라 전쟁과 테러를 마다하지 않았던 역사가 힘없는 민중들이 억울하게 죽어가야 했던 것이다.
폴란드 국경을 넘자마자 교통 체증이 시작되었다. 무슨 이유인지 모르나 몇 년째 좀처럼 개선되지 않는다고 한다. 체증 때문인지 장장 네 시간이나 걸려 도착한 목적지 비엘리츠카, 크라쿠프에서 13킬로미터 떨어진 그 곳엔 유네스코 지정 세계 자연유산 제1호인 소금광산이 있는 곳이다. 우리 일행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던 가이드 한 분이 자신을 소개했다. 점잖으면서도 은근히 유머러스한 '심산'이란 이름의 가이드이다. 먼 옛날 이 곳은 바다였고, 융기해서 바다의 소금기가 그대로 소금덩어리로 변해 매장되어 있다가 13세기부터 암염 채굴이 본격화되었다고 한다. 내부를 구성하는 것은 소금과 소나무밖에 없다고 하더니, 과연 꼬불꼬불 정신없이 밟고 내려간 계단은 소나무, 갱도의 벽도 소나무, 대리석으로 깔린 듯한 바닥도 소금, 세 명의 광부의 최후의 만찬을 새긴 부조도 소금, 킹가 공주 예배당의 호화로운 샨들리에도 소금, 모든 게 소금이었다. 지하 137미터까지 내려간 우리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소금을 캐서 지상으로 올려보내기 위해 사용된 도르래, 지렛대(아르키메데스는 지렛대만 있으면 지구도 끌어올리겠다고 했다고 함) 등 과학적인 원리를 이용한 암염 채굴 현장을 모형으로 보여주기도 했다. 망아지 때 들어와서 죽을 때까지 지하에서 일하느라 금세 눈이 멀었다는 불쌍한 말도 있었다는데 전설처럼 신비하고 슬픈 이야기였다. 마지막엔 쇼팽의 이별곡이 연주되는 인공 연못도 있었다. 세계 유명인들의 회의와 공연이 열린다는 장소를 끝으로 출구로 나가는 길이 한참 연결되어 결국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오도록 되어 있다. 100년 이상 된 엘리베이터, 전통을 자랑하며 스릴이 넘치는 엘리베이터답게 우당탕 쿠당탕, 우지끈, 쿵, 쾅, 끼익, 타당, 특별한 소리를 내면서 지상으로 올라왔다. 이렇게 해서 소금광산 탐사는 나름대로 특별한 체험의 폭을 넓혀 준 셈이다. 좁고 길다란 갱도를 얼마나 걸었던지 배가 출출해질 무렵, 식당에 도착했다. 폴라치케라는 이름의 감자 스테이크가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감자를 잘게 다진 다음 곱게 갈아낸 쇠고기를 입혀 튀긴 음식이라고 하면 될까? 생전 처음 먹어보는 요리라서 신기한 느낌으로 입에 넣었는데 예상 밖으로 맛이 좋다. 다시 버스에 올라 크라쿠프(영어로는 크라카우)로 향하던 중, 진반장이 낸 퀴즈를 맞힌 아내는 앙증맞은 소금 장식물을 받아들고는 기분이 좋은지 입이 귀에 걸린다. (진반장이 낸 퀴즈는 폴란드 출신의 유명인사 5명을 맞히는 문제였는데, '마담 퀴리, 쇼팽, 레흐 바웬사, 요한 바오로 2세, 코페르니쿠스'라고 답했던 것, 기억력이 아직은 괜찮은 듯해서 다행스럽게 생각함) 호텔 JB에서 여장을 풀었다.
6일째
다양하고 풍부한 종류의 샐러드가 특색인 아침 식사를 했다. 오랜만에 준비해 간 컵라면도 먹고 맥심 모카골드 커피를 마시니 기분이 괜찮다. 대평원의 나라라는 뜻을 지닌 폴란드는 스웨덴, 독일, 러시아 등의 지배를 받아 정신적으로 피폐할 대로 피폐한 불행한 나라였다. 그러나 그들을 지켜주었던 것은 무엇일까? 하느님을 향한 그들의 믿음이 아닐까? 카톨릭 교도가 무려 98퍼센트에 달하는 것이 그것을 반증한다고 보면 지나친 해석일까? 폴란드의 제2의 도시, 크라쿠프의 도심 곳곳에 산재한 숲은 키가 큰 나무로 가려 있는데 햇빛을 거의 차단할 정도로 울창한 듯하다. 숲을 가로질러 일행들은 중앙광장에 섰다. 광장 한가운데는 고딕과 르네상스 양식이 혼합된 흰색의 아름다운 직물회관이 자리잡고 있다. 1층 건물 안에는 토산품 가게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어서 호박, 민속인형과 레이스, 목제조각품 등의 각종 기념품을 살 수 있다. 우리는 그저 신기한 듯 이것저것을 바라보면서 눈요기만 했다. 중앙 광장 동쪽에는 두 개의 첨탑이 우뚝 솟은 아름다운 성마리아 성당이 있는데 서거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추기경 시절 미사를 집전했다는 곳이다. 또 광장 한쪽에 외롭게 앉아있는 조그마한 성당이 하나 있다. 30여 명 정도가 미사를 볼 수 있는 정도의 규모다. 내부의 고졸한 맛과 천정의 돔 중앙에 뚫린 원형의 창은 신비감을 자아냈고, 뒷벽의 반공에 돌출된 테라스도 독특하다. 무릎을 꿇고 지그시 눈을 감아 묵상기도를 잠시 하고 나왔다. 성당 앞 그늘진 곳에서는 화가로 보이는 한 남자가 직물회관의 외양을 스케치하고 있는데 하도 보기가 좋아서 사진을 찍어 두었다. 주변을 둘러보던 일행들이 하나둘씩 다 모이게 되자 가이드는 호박 보석을 파는 가게로 안내를 한다. 여인들은 역시 예쁜 것만 보면 사고 싶어 안달이다. 아내는 시누이와 동서들에게 줄 팔찌를 사고, 평소엔 알뜰하던 처형들도 한 두 개씩 맘에 드는 것을 골라 착용해 본다. 남전 형님도 꽤 값이 나가는 호박 장식 펜던트를 골라 목에 걸었다. 잘 어울린다는 평에 매우 흡족해 하는 표정이다.
가까운 곳에 바벨성이 있었다. 르네상스 양식의 오밀조밀한 성 내부를 둘러보고 성곽에 기대어 사진을 찍었다. 그 성곽 너머엔 흐르는 강물이 우리의 눈을 반겼다. 역시 물이 있어야 마음이 편안해지는가 보다. 음료수를 잔뜩 실은 손수레를 낑낑대며 끌고 가는 소년에게 아내와 처형은 안스러웠는지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는데, 소년은 괜찮다고 손사래를 치더니 그냥 가버렸다. 자립심이 강한 녀석인가 보다. 친절을 베푼 것이 오히려 무안하다. 500년간 폴란드 왕이 살았다는 바벨성, 그 내부는 현재 박물관으로 공개되고 있다는데 시간이 없어서 건물 사이의 녹지공원의 분위기에 잠시 취해 있다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크라쿠프 시내 관광을 마치고 거기서 60여 킬로 떨어져 있는 오쉬비엥침으로 향했다. 우리에게 '아우슈비츠'로 알려진 곳이다. 400만 명의 유태인이 학살되었다는 곳, 가이드 심산 씨는 히틀러에 대한 엄청난 연구를 한 전문가 같다. 히틀러가 왜 유대인들을 그토록 증오했으며 유대인 학살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자세하게 설명을 해주는데 그 설명이 대단히 구체적이고 실감난다. 나름대로의 독특한 관점을 가지고 설명하고 있는데 그런 관점과 소신을 갖고 있는 사람이 드물게 느껴지는 요즘이라 오히려 매력적이다. 나이는 정확히 모르겠으나 내 나이보다 조금 더 들어 보인다.
아우슈비츠라는 곳은 지리적으로 유럽의 중심에 위치해 있어서 정치적 목적의 대규모 수용소를 만들 수 있었다고 한다. 유럽의 전지역에 산재해 있는 유대인들을 개처럼 끌어모아서 집단 학살하기에 가장 적절한 위치라는 거다. 수용소 입구에 매달려 있는 당시의 문구, 'ARBEIT MACHT FREI'(노동은 자유를 준다)가 전율감을 준다. 그 문구는 음미하면 할수록 아이러니컬하기만 하다. 일단 수용소에 들어온 사람 중에 장애인, 노인이나, 어린이, 부녀자들은 노동력이 없다고 보고 곧바로 가스실에 보내져서 죽거나, 노동력이 있는 젊은 남자들은 살인적인 노동에 시달리다가 며칠 만에 또는 한두 달 만에 수용소 앞잡이들에 의해 맞아 죽고, 영양실조로 굶어죽어야 했으니, 끝내는 자유를 찾은 사람은 거의 아무도 없었다는 결론이다. 그런데 노동이 자유를 준다고?
어찌 인간이 인간을 그렇게 잔인하게 죽일 수 있는지……. 가스실에서 죽어간 사람들의 원혼이 아직도 수용소 부근을 맴돌고 있을 것만 같다. 밀폐된 가스실에서 곤충살해용 가스를 마시며 금방 죽지도 못하고 온갖 고통을 겪으면서 20여 분간 신음하다가 죽게 되면 수많은 시체를 화장장으로 옮겨서 한 줌의 재로 어딘가 뿌렸을 것이고, 화장장 굴뚝의 흰연기는 밤낮 쉼 없이 솟아올랐을 테고 사람을 태우는 고약한 냄새는 온 천지를 진동했을 터다.
수많은 유대인 장애자들이 끌려와서 벗어놓은 의족, 그 의족 구두 밑바닥에 귀중품이라도 숨겼는가 싶어 일일이 검색을 당해 뜯긴 흔적, 어린 아이들의 신발, 뜨개 옷, 가죽 가방, 구슬 박힌 샌들, 안경, 빗, 구두약, 35,000켤레의 구두 등 수용된 사람들이 사용했던 것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어 보는 이들의 마음을 얼마나 아프게 하는지 가슴이 미어터질 것만 같다. 특히 죽어간 사람들의 머리털까지 잘라서 모아 둔 곳에서는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그 수용소 관리본부와 가스실 가까이에 설치한 당시의 교수대가 을씨년스럽게 서 있는데, 가이드의 설명에 의하면 수많은 학살을 감행했던 나치스의 수용소장이 종전 뒤, 숨어지내다가 영국의 한 장교에게 잡혀서 결국 자신이 수용소장으로 있던 이곳의 교수대에서 죽어갔다고 한다. 그런 역사적 사실이 인과응보임을 증명하고는 있으나, 아직도 수많은 학살을 자행한 바 있는 자들이 버젓이 살아 행세하고 있는 현실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좀처럼 우울한 기분을 주체할 수 없어서 말없이 있다가 폴란드에서 체코 들어오는 국경에 들어서면서 기분이 좀 나아진다. 국경의 변화가 주는 신선함이리라. 묵게 될 숙소는 체코의 제2도시 부르노(BRONO) 시내가 내려다 보이는 Myslivna호텔이었다. 약간 높은 곳에 위치해 있어서 그런지 시내 사람들이 일부러 이곳까지 와서 술을 한 잔씩 한다고 한다. 큰 열기구 하나가 호텔 바로 위 상공으로 지나가고 있다. 화력 좋은 가스 불을 수시로 켰다 껐다 하면서 조정하는 구조임을 알겠는데. 석양빛을 받으며 떠가는 열기구의 지상 착륙은 그 언제 이루어질까 저대로 계속 올라가기만 해도 될까?
저녁 식사는 돼지고기 스테이크다. 맛있게 먹었다. 식당 아래 테라스에는 제법 많은 사람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낭만적인 분위기를 만들고 있다. 조그만 분수 장식도 있고 무엇보다 꽃 장식이 좋다. 배정된 방에 가서 여장을 푼 후 남전 형과 함께 테라스로 내려와서 자리를 잡은 뒤, 5유로를 주고 생맥주 두 잔을 샀다. 우리나라의 생맥주보다는 투명하지 않고 약간 누런색을 띠는 것이 특징이라면 특징이다. 서서히 어둑해지는 하루의 끝, 한 잔의 맥주로 또 마무리를 하는 거다. 다른 자리에서 술을 마시던 일행이 함께 하자며 남전 형과 나를 부른다. 그 자리에는 진반장과 운전기사 요셉이 앉아 있고, 서울에서 온 안○○ 디자이너, 부동산 중개사 두 여인이 앉아 있다. 청주의 모 사립중학교에서 가정을 가르친다는 최선생도 있다. 다들 기분이 좋은지 말들이 푸짐하다. 폴란드인 요셉도 한국말로 제법 대화에 잘 끼어드는데 퍽 재미있어 한다. 얼마 후 부산 처형이 컵라면을 가지고 테라스로 나오기에 카운터에 가서 뜨거운 물을 구해서 맛있는 컵라면을 만들어 들고 처형들의 방으로 가니 거기도 가족 간의 대화 꽃이 활짝 피어 있다.
7일째
새벽 이슬을 잔뜩 머금은 민달팽이들은 아침을 맞으면서 서서히 딱딱한 길을 벗어나 숲으로 몸을 옮기기에 바쁘다.
부르노에서 체코의 수도 프라하까지는 세 시간이 걸렸다. 이젠 버스 이동 거리가 아무리 길든,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두렵지 않다. 가는 길마다 센스쟁이 진반장이 적절한 멘트를 날려주는데, 이번엔 체코 출신 사람들에 관한 언급을 해 준다. 작곡가 스메타나, '신세계 교향곡'의 드보르작, '변신'의 프란츠 카프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작가 밀란 쿤데라……,
괴테가 아름다운 백탑의 도시라고 명명했다는 중세의 도시, 프라하가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블타바 강('몰다우 강'으로 불리기도 함) 위엔 몇 개의 다리가 무지개처럼 걸려 있고, 영화나 드라마에서 본 붉은 지붕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모습, 매우 아름다웠다. 세계적인 기업으로 발전한 삼성그룹 광고 현수막들이 연달아 나부끼는 오르막길을 지나 적당한 공간에 주차한 후, 예약된 식당으로 가서 점심 식사를 했다. 금강산도 식후경, 배를 불려야 프라하 시내 관광이 순조로우리라. 식사 후, 124미터에 이르는 첨탑의 성 비트 성당으로 들어가기 위해 관광객들이 꼬불꼬불한 줄을 섰다. 수백년 간의 세월 끝에 완공된 성당이라 하는데, 고사리 같다고나 할까, 특이하게 돌출한 삐알라는 건물에 부는 바람의 방향을 바꿔준다고 한다. 그리고 온갖 동물의 형상을 한 것이 혀를 내밀고 금방이라도 아래로 뛰어내릴 것만 같은 모양의 조형물이 낙수 구멍이라고 하는데 사실은 장식물로서의 가치가 더 커 보인다. 특히 본당 안의 왼쪽에 자리잡은 스테인드글라스 중의 하나는 알폰소 무아라는 거장의 손길에 의해 빛과 색채 유리의 아름다운 만남을 빚어내고 있어 특별히 유명하다고 한다. 중세의 프라하 풍경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동판화는 오늘날의 건축물의 위치와 대부분 일치하는데 옛것과 달라진 것이 무엇인가를 알게 하는 자료적 가치가 있는 것 같고, 왕비의 비밀을 지킨다는 빌미로 결국 혀가 잘리고 카를교 아래 블타바 강에 수장당한 얀 신부의 은별 다섯 개를 형상화해서 그의 시신을 직접 안치한 은관도 있다.
인상 좋은 박병훈 가이드는 우리를 계속 이리저리 끌고 다녔다. 제법 긴 거리를 걸어 프라하 성으로 향했다. 성에서 내려다 본 프라하의 시내의 풍경은 붉은 지붕들과 바로크 양식의 큐폴라 지붕, 그리고 푸른 하늘의 어울림 그 자체였다. 프라하의 연인, 전도연이 살았던 것으로 설정된 집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다. 엄청난 땡볕 아래 지친 발걸음, 바알갛게 익은 피부, 타는 목마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셔터를 눌러대기에 바쁘다. 바삐 관광하다 보면 남는 것 사진 아닌가 하는 마음일 것이고 언제 다시 이곳을 찾겠는가 하는 마음의 작용일 게다. 다음은 진반장의 특별 서비스 중의 하나, 프라하 시가지를 가르는 트램을 타고 옛 세도가의 호화로운 궁전에 들러 잠시 쉰 다음, 또 하나의 진반장 서비스인 지하철을 탔다. 지하철 출입구의 엘리베이터를 타고 불어오는 바람이 무척 시원하다. '뮤지엄'이라는 역에서 내린 우리는 바츨라프 광장으로 나갔다. 유럽엔 의미있는 곳을 중심으로 한 방사형 광장이 많은데 이곳은 긴 대로로서 중앙에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놓았고, 제일 높은 곳인 국립박물관 건물 앞에서부터 비스듬하게 아래로 완만한 경사를 이루면서 시작하고 있다. 삼거리 중앙에 위치한 국립박물관과 길 건너 중앙에 위치한 체코의 건국 영웅 바츨라프 동상이 바로 광장의 상징인 것이다. 1968년 소련군에 의해 무참히 진압되었지만 '프라하의 봄'을 연상케 하는 시위의 현장이어서 숙연해지기도 한다. 예속이 아닌 독립을 부르짖다가 많은 희생을 치러야 했던 곳임을 생각하니 마음이 잠시 무거워진다. 박물관의 외벽엔 지금까지도 총탄의 흔적이 역력히 남아 있어서 많은 체코인들이 그것을 바라보면서 지난날의 역사와 교훈을 되새기면서 의롭게 살 것을 다짐할 것만 같다.
상점들이 길게 늘어선 거리를 쉼 없이 걸어가니 까를교가 나왔다. 블타바 강에 걸쳐져 있는 다리 중 가장 유명한 다리, 프라하를 찾는 관광객이면 100% 밟아보게 된다는 가장 유서깊은 다리, 1350년 경부터 150년간에 걸쳐 만들어진 다리라고 한다. 다리의 양쪽에는 15명의 체코 성인들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 특히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성인 얀 신부의 조각이 유명한데 보호망을 쳐 놔서 가까이 가서 만져볼 수는 없다. 다리 건너 언덕 위엔 우리가 조금 전에 보았던 왕궁, 성, 등의 건물들이 짙푸른 숲에 휩싸여 강물과 하늘 사이를 가르는 경계처럼 보였다. 다리 위엔 행인들의 초상화나 캐리커처를 그려주는 화가들, 모자를 벗어놓고 악기 연주를 하는 거리의 악사들, 물고기나 나비가 달린 귀고리, 목걸이, 등 예쁜 장신구들을 파는 사람들로 그득했다. 강물 위로는 날렵한 유람선이 떠있고, 노란 보트에 몸을 실은 연인들도 눈에 띈다. 이렇게 온갖 것을 한꺼번에 보여주고 있는 곳이 바로 다름 아닌 프라하라는 생각을 한다.
중세 유럽의 풍물이 그대로 남아있어 중세의 도시라는 별명을 지닌 프라하, 연간 관광객 방문 수가 프랑스의 파리란 도시보다 더 많다고 해서 놀랐다. 프라하의 또 다른 상징인 천문 시계가 있는 곳으로 사람들이 몰려든다. 정각 5시가 되자 천문 시계의 윗부분 창이 열리더니 예수의 제자 12사도가 한 명씩 나와 모습을 보여주고, 마지막엔 시계 꼭대기의 닭이 울면서 타종이 멈췄다. 아래에 있던 인형도 고개를 까딱이며 신호를 보내기도 하는 요상한 시계다. 시각만 정확하게 맞추면 시계의 기능을 다하는 것이라고 여겼었는데, 보는 즐거움까지 선물해 주는 시계니 금상첨화다. 고딕 양식의 틴 교회, 그 옆의 로코코 양식의 집, 살바도르 달리 전시관, 알폰소 무아 미술관, 소원의 벽이 보이는 광장 바닥에 주저앉아 잠시 걸음을 멈추고 쉬어 본다. 좀더 느긋하게 감상하는 시간도 필요한데, 이리저리 분주하기만 한 것 같아 아쉽다.
체코에서 보이지 않는 국경을 넘어 다시 독일 땅으로 들어왔다. EU회원국이면 검문검색이 따로 필요하지 않아서 국경인지도 모르게 지나가기에 6개국을 돌았어도 실감나지 않고 오로지 한 나라의 광대한 땅에서 여러 도시만을 찾아 돌아다닌 여행을 한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얼핏 봐서 자연 환경이 크게 다른 나라도 별로 없는 것 같고, 게르만족, 슬라브족, 마자르족, 라틴족 전문가들은 그 외양을 보기만 해도 어느 종족인지 잘 구분할지 모르나 내 눈엔 그 사람이 그 사람 같다.
고속도로를 달려 독일의 바이덴 숲 속의 Deutcher Alder호텔에 도착했을 때는 저녁 10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 차를 많이 타서 그런지 몹시 피곤했다. 유럽에서는 사실상 마지막 날이어서 일행들과 함께하는 맥주 파티라도 열어 그간의 여행을 정리하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지만 너무 시간이 늦어 공식적인 모임 갖는 것을 보류하기로 했다. 나 또한 술자리에 참여하지 못하고 그냥 잠자리를 찾았다. 아쉬웠다.
8일째, 그리고 마무리
이른 아침, 산보를 하기 위해 남전 형을 깨우니 오늘은 못 일어나겠단다. 엊저녁 과음 탓이다. 어쩔 수 없이 혼자 숙소 주변을 돌아다니면서 아침을 깨웠다. 여행 기간 동안 매일 아침 5시경 일어나 모닝콜 시간까지 또는 아침 식사 전까지 숙소 주변을 거닐면서 남다른 체험을 하면서 참 즐거웠는데, 이젠 이것도 마지막이다. 오늘처럼 혼자 하는 산책도 괜찮다. 골똘하게 생각에 집중할 수 있고, 남을 의식하지 않고 혼자 마음대로 지껄여 볼 수도 있다.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혼자만의 소중한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독일인들은 사색을 좋아해서 세계적인 철학자들을 많이 배출했다고 했던가? 숲으로 난 작은 길 또한 독일인들의 사색 공간일 것만 같고, 그 길을 따라 오가는 사람들 또한 사색에 잠길 수밖에 없을 것만 같다.
아침 식사를 하고 7시 30분에 출발, 3시간 걸려 하이델베르그에 도착했다. 황태자의 첫사랑이 연상되는 곳이 아닌가? 먼저 하이델베르그 고성에 올라 프랑스와의 격전 흔적을 보았다. 22만 리터를 저장할 수 있다는 세계에서 가장 큰 와인 통을 만져보고, 포를 맞아 비뚤어진 채 겨우 기대어 서 있는 성벽. 그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네카 강을 보고 대학가로 걸음을 옮겼다. 까를 테어도르 다리는 보수 공사 중이었지만 그 건너 칸트, 니체, 하이데거가 거닐었던 철학자들의 숲길이 있다는 진반장의 말을 들으니 더 깊은 의미로 다가왔다. 하이델베르그 대학가는 잘 짜인 우리나라 대학 캠퍼스와는 달리 엉성하게 흩어져있는 모습이었다. 수많은 철학자가 학문을 닦고 제자들을 길러내고, 대학 문화를 꽃피운 곳,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가 거쳐 간 곳, 1386년에 세워졌다는 대학가에 와 있으니 우리도 철학자가 된 듯한 기분에 휩싸였다.
이어서 황태자가 맥주잔으로 건배를 하며 드링크, 드링크, 드링크를 외쳤던 레스토랑을 지나 한국관이라는 음식점으로 들어갔다. 알맞게 숙성된 김치를 넣어 제대로 끓여낸 김치찌개, 콩자반, 열무김치, 오이장아찌, 등 우리 음식을 마음껏 먹으니 날아갈 듯한 기분이었다. 뒷마당에는 크고 작은 사이즈의 김치 냉장고가 여러 대 놓여있어서, 진정한 한국 음식점이라는 실감이 났다. 마지막 쇼핑 장소에 들렀다. 독일의 명품 쌍둥이칼, 스위스제 맥가이버칼, 내부에 박테리아가 번식하지 않는다는 물병, 지포 라이터, 냉장고에 붙일 예쁜 그림자석, 등으로 선물을 마련하고 프랑크푸르트행 버스에 올랐다. 우리가 처음 왔던 곳, 그리고 돌아가야 할 비행기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곳, 프랑크푸르트에서도 진반장 특유의 성의와 배려가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공항에 가기 전 자투리 시간을 활용하여 들른 곳은 뢰머 광장이었다. 귀족 뢰머의 저택이 있고, 상인들의 집과 상가, 골목 안쪽으로 성당이 얼핏 모습을 보이는 광장, 그 곳에도 코스프레 복장의 사람 몇몇이 재미있는 움직임을 보여주며 흥미를 끌고 있었다. 아내의 우상인 차범근이 당대 최고의 축구 리그였던 분데스 리가에서 활약하던 시절, 베켄바워와 건배를 하며 샴페인을 터뜨렸다는 곳이 바로 이 광장의 뢰머 저택 앞마당이다. 우리나라가 배출한 최고의 축구 선수이자 현재 수원삼성의 명감독 차범근은 이 곳 독일에서 아직껏 축구 영웅으로 떠받들어지고 있다는 진반장의 설명이다.
짧은 만남, 긴 이별이라는 말처럼 여운을 주는 우리의 여정은 이제 공항으로 향하는 버스로 이어졌다. 20분도 채 되지 않아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 공항이 나타났다. 마인 강 변의 프랑크푸르트라는 지명은 동독 작센 지역에도 프랑크푸르트가 있어, 두 프랑크푸르트를 구별하기 위해 붙여진 배경이 있다. 공항에서 면세 혜택을 돌려받느라 지루하게 늘어섰던 행렬, 아버님께 드릴 와인, 가족에게 줄 초콜릿과 시계를 고르며 행복한 여정을 마감할 수 있었다. 약간의 긴장이 깃들인 10시간의 비행 끝에 드디어 인천공항에 내리게 되었다. 일행과 간단한 작별 인사를 나누고, 진반장과 아쉬운 악수를 한 후, 뿔뿔이 흩어져갔다. 여행은 이렇게 아쉬움이 남는 것인가 보다.
진종식씨, 노랑풍선의 가이드 진반장에 대하여 이 공간을 빌어 고마움을 표한다. 나중에 기회가 있으면 만나서 술 한잔 하고 싶은 사람이다. 그는 동유럽 8박 9일의 인솔자 및 진행자로서 여행 내내 우리를 즐겁게 해 주었던 사람이다. 인간적인 매력과 정이 넘쳤던 사람으로 우리들 기억 속에 강하게 남아 있다. 가이드로서의 요건을 모두 갖춘 완벽한 사람 같다. 낯선 곳을 찾아다니는 여행객들에게 있어서 가이드의 역할은 절대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데 거의 완벽하게 안내를 해 줬다고 나는 판단한다. 각국의 현지 가이드와의 연결도 자연스러웠고, 그들의 정성어린 안내 덕에 내용적으로 충실한 여행, 감동적인 여행이 되었음을 밝혀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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