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3일 토요일, 오전 10시가 조금 넘은 시각,
구미에서 전세 버스를 타고 중부내륙고속도로를 달린다.
14명의 선생님들이 승객의 전부다.
아내인 명혜당도 앞쪽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나는 오랜만에 만나는 동료들과 이런 저런 관심사를 이야기하느라
그녀를 따로 혼자 앉게 한 채, 줄곧 서울까지 오고 말았다.
내심 표현은 하지 않았으나 조금은 섭섭했으리라.
오후 2시경, 국회 앞 도착,
행사장이 있는 곳으로 천천히 이동,
벌써부터 민중가요가 울려 퍼지고 있다.
‘님을 위한 행진곡’, ‘참교육의 함성으로’
나도 모르게 따라 부르고 있다. 즐거움이다.
명혜당은 내 목소리가 거기에 ‘딱’이라 한다.
그런가? 그런 것 같기도 하다.
명혜당은 얼마 전 이 세상에 태어난
반달이네 집으로 향한다. 어떻게 생겼을까?
나중에 연락을 주고받기로 하고 여의도역으로 사라졌다.
곧 시작될 전국교사대회 준비로 진행요원들이 바쁘다.
관광버스에서 내리는 선생님들이 모여들기 시작한다.
오후 3시가 가까워지면서 풍물과 함께 행사 시작이다.
오종열, 문성현. 김석행 등의 거물급 내빈과
각 시도 지부장, 전교조 위원장 등이 소개된다.
여의도 국회를 향해 피터지게 구호를 외친다.
차등 성과급 반대, 교원평가법제화 반대,
표준수업시수 법제화 등을 촉구하는 외침이다.
전국의 2,000여 명의 선생님들이 약 2시간 정도
여의도 국회를 향하여 목이 터져라 구호를 외쳤고
결의문도 낭독하면서 상징적 의식을 치렀다.
얼마나 정치인들의 관심을 끌 수 있을까?
대선 정국이라서 눈길 하나 줄까?
명혜당에게 전화를 걸어 행사가 끝났음을 알리고
약속 장소인 영등포역으로 갔다. 여의도에서 가깝다.
영등포 롯데백화점 광장 앞, 오가는 사람들을 본다.
노숙자 같은 허름한 사람, 명품으로 치장을 한 귀부인
알콜 중독자, 불량해 보이는 청소년들,
바닥만 쳐다보며 청소하느라 분주한 50대 여인,
걸터앉아 담배를 빨아대는 숱한 애연가들,
전생의 인연으로 오늘 이렇게 보고 있는가?
권현미 선생과 저녁 식사를 함께하기로 한 시간이
아직도 1시간 30분이나 남았다.
해는 져서 이미 컴컴하건만 7시 30분은 되어야 만날 수 있단다.
배가 출출하여 가까운 분식집에 들어가
칼국수 1인분만 주문했다. 꾀를 낸 것이다.
가볍게 나눠 먹으면 허기를 일단 채울 수 있고,
나중에 저녁을 안 먹은 척 다시 먹으면 되니까. 후후^^
요기를 한 후, 약속장소인 백화점 꼭대기 층으로 갔다.
음식점이 모여 있는 곳이다.
음식점 바깥으로 긴 벤치가 놓여 있어
거기에 앉아 피곤함을 달래면서 이번엔
둘이서 또 지나가는 사람들을 감상한다.
친구가 나타날 때까지 그렇게 그렇게.
8시가 가까워올 즈음.
명혜당의 대학 시절 단짝 친구,
김포교육청 상담교사 권현미 선생이 나타났다.
긴 머리, 검은 옷을 입은 날씬한 몸매,
작달막한 키, 뾰독 구두, 이름의 이미지와 다른
아주 지성적인 외모를 갖추고 있었다.
근데, 몸무게 42킬로그램의 가냘픔이 불안했다.
본인은 날씬한 몸매를 자랑이라도 하는 듯 했으나
난 그 날씬함보다는 명혜당의 오동통함이 더 좋다.
처음 인사를 나누는 자리라서 내 딴에는
만나 어떤 말을 할까, 어떤 태도를 보일까 잠시 고민했는데,
만나는 순간부터 자연스런 대화가 시작되고,
그간의 살아온 이야기가 끊임없이 이어지니
나는 맘이 편했고, 가만히 듣고만 있으면 됐다.
간혹 대화에 끼어들어서 변죽을 울리면 그뿐,
이미 난 둘 사이에 낀 또 다른 친구가 되고 말았다.
쇠고기 쌈밥 3인분을 시켜서 저녁 식사를 끝내기까지
오가는 대화는 쉴 새가 없었다. (수다쟁이들!!)
10시 30분, 밤도 점차 이슥해지고 있다.
권선생도 남편의 잦은 전화에 신경이 쓰이는지
수다 그만 떨고 이제 일어서자고 한다.
식사 후 옮긴 찻집에서도 벌써 1시간을 넘게 보낸 것이다.
그 날 여의도에서는 대규모 불꽃축제가 있어서 그런지
거리는 온통 차와 사람들로 그득했다.
여기저기 나뒹굴고 있는 쓰레기로 혼란스럽다.
명혜당과 나는, 이렇게 얘기했다.
‘이런 데서는 살기 싫다. 중소도시가 좋다.
조금만 벗어나면 한적한 시골이 나오는 곳이 좋은 거야.’
권선생은 영등포 주변에 숙소가 많으니
구해보라 하고는 집으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언제 다시 보자며 손사래를 치고는 가버렸다.
헤어지고 밤거리를 조금 돌아다녀 보니 숙소가 많긴 많다.
사람들 구경을 더 할까 싶어 주변을 잠시 배회하니
명혜당이 무섭다면서 야단이다. (겁쟁이!!)
모텔의 휘황찬란한 네온사인이 유혹을 한다.
한 곳을 찾아 들어가니 하룻밤 숙박비가 6만원이란다.
비싸도 너무 비싸다 싶은데,
주말 요금을 더 비싸게 받는 업소들인지라.
그러려니 하고 투숙을 하긴 했는데, 시설은 엉망!
본전 생각이 절로 났으나 참기로 하고 하룻밤을 잤다.
다음 날 아침,
숙소를 빠져 나와 주변에서 식당을 찾았다.
된장찌개 한 그릇 시켜 놓고 오늘의 계획을 짠다.
국립중앙박물관을 둘러보고 시간이 남으면?
우리보다 늦게 식당을 찾은 일행 6명이
요란하게 떠들어 대는데, 고향 친구들인 모양이다.
어제 다들 잔치집 하객으로 와서 놀다가
오랜만에 술 한 잔씩 하고 역 주변에 투숙을 했던가 보다.
여자도 한 명 끼어 있는데, 걸쭉한 말씨로 보아
남자 5명쯤은 너끈히 상대하고도 남을 기세다.
전철을 타고 이촌동 국립중앙박물관을 찾았다.
전철역에서 내려 박물관까지 걸어가는데,
청명한 하늘은 쪽빛으로 가득히 뒤덮여 있다.
대리석 박물관의 모서리가 하얗게 금을 그었다.
부모와 함께 박물관을 찾은 어린 학생들도 많다.
더 없이 사랑스럽고 귀엽다. 학구열에 불타는 아이들이다.
외국인들도 많이 찾고 있음을 금방 알겠다.
명혜당이 몹시 귀여운 여자 아이에게 자꾸 눈길을 주기에
우리도 저런 여자 아이 하나 낳을까 했더니 피식 웃는다.
얼굴을 쓰다듬으려고까지 하기에,
잘못하면 유괴범으로 오해 받는다면서 말렸다.^^
고대역사관, 원삼국시대, 삼국시대, 발해 등
시대 순서대로, 1층부터 3층까지 차례차례 감상을 시작했다.
오전 10시부터 시작한 ‘고인과의 대화’는
오후 2시가 되도록 끝날 줄 몰랐다.
문화재와 관련한 배경 지식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욱 더 새롭게 보이게 될 문화재들이건만
무식함의 소치로 그저 모든 게 새롭게만 느껴졌다.
2년 전에 찾았던 것과는 또 다르게 와 닿는다.
명혜당은 어느덧, 다리가 아픈 모양이다.
자꾸만 그만 쉬자고 한다. 웬만한 것은 눈에 안 차는 눈치다.
나도 움직인 거리가 많아서 그런지 이제 쉬고만 싶다.
조금만 더 보자 더 보자 한 것이 5시간 정도를 보고 있다.
자세히 보려면 하루 종일 봐도 다 못 보리라.
국보나 보물급 가운데 특별한 것이 있으면 사진기에 담았다.
도자기 종류가 특별히 눈에 들어와 몇 점을 찍은 거다.
금강산도 식후경,
전시실에서 나와 식당이 있는 건물을 찾아갔다.
별관에 깔끔한 식당이 하나 있는데 메뉴가 다양했다.
카레 덮밥, 우동을 시켜서 간단히 요기를 하고
박물관을 나오니 하늘은 여전히 쾌청하다.
공해가 심한 서울이라고는 믿겨지지 않을 정도다.
현재 시각 3시 20분,
오후 5시 40분 부산행 기차를 타려면 2시간 남짓 남았다.
일단 박물관 앞 연못가에서 방문 기념사진을 몇 장 찍고
수심이 얕은 연못가에 앉아 ‘고기들의 향연’을 감상하다가.
남은 시간 활용 차원에서 가까운 명동을 찾기로 했다.
명동역에서 내려
민주화의 성지 명동 성당 쪽으로 발을 옮겼다.
골목골목 사람들이 미어터질 정도로 혼잡하다.
서울의 중심가가 지금은 강남으로 바뀌었다고도 하지만
유행의 첨단을 볼 수 있던 곳은 자고로 명동이 아닌가?
촌놈인 나도 이곳에다가 서울에 온 흔적을 남겨야 할까?
늙수구레한 사람들은 보이지 않고 젊은 축들만 뽐내고 다닌다.
동년배로 보이는 아주머니 한 분이 연탄불에 설탕을 녹여
소다를 섞어서 ‘달고나’를 만들고 있다. 하나에 500원,
명혜당은 그 추억의 ‘달고나’를 사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하트 모양이 찍혀 있는 달고나 하나, 그냥 납작하게 누른 것 하나
나는 조심스레 하트 모양을 남기려고 애를 썼건만
옛날의 솜씨가 안 나와 실패, 그 반쪽이 땅에 떨어지니
명혜당은 그 맛있는 걸 떨어뜨렸다며 앙탈이다.
명동 성당으로 오르는 길,
민주화의 성지요 대한민국 카톨릭 신앙의 메카인 명동 성당,
언젠가는 한 번 오리라던 곳을 이제야 찾는다.
한 장애인이 마이크를 들고 노래를 하는데,
반주 따로 노래 따로 사실 들을 게 없다.
처절한 동정심만 불러일으키는데 그냥 지나칠 리 없는 명혜당,
그녀의 따스한 마음씨가 사랑스럽다. 조금 더 올라가니
명동성당 건물이 거대한 건물빛 망사로 둘러싸여 있다.
오래된 건물이라 내부 수리중이라는 것을 금방 알겠다.
성당 앞마당에 들어서니 50대의 한 여인이 다가온다.
책을 잔뜩 들고 있다. 책 한 권을 사 달라고 한다.
천재적 재능을 가진 시각장애인 아들로 둔 분인데,
아들의 외국 유학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책을 팔고 있단다.
책의 내용은 모자의 삶을 내용으로 한 기사와
장애를 극복하고 훌륭한 음악을 만든 악보 등이다.
명혜당은 또 그냥 갈 수 없다며 한 권 사잔다.
샀다.(15,000원)
건물 오른쪽으로 계성여자고등학교 건물이 보인다.
순간 떠오르는 이름 하나, 김노수 선생님,
총각 시절 울진의 매화중종합고등학교에서 같이 근무하던 사람,
나이도 같고, 마음도 잘 통해서 툭하면 같이 어울렸던 사람,
언젠가 도간 교류를 해서 고향인 충남으로 갔고
다시 또 사립학교인 서울 계성여고로 근무지를 옮겼던 사람,
오랫동안 잊고 지내던 사람이었는데, 이제야 생각이 난 거다.
당장 연락하고 싶었다.
마침 그 학교로 들어가는 수녀님이 한 분 계셔서
세워 놓고 김노수 선생님에 대해 여쭈어 보니 그 학교 교무부장이란다.
연락을 몇 번 취하더니 휴대폰 번호를 알아내 주셨다.
“김노수 선생님, 나 울진에 같이 있던 이권주요.”
“아이고, 이게 누구여. 어딥니까?”
“명동 성당에 왔다가 계성여고가 옆에 있는 것을 확인하고
이렇게 연락을 취해 보는 겁니다. 집은 어디요, 한 번 보고 싶은데“
“그러게요. 미리 연락을 주고 오지 그래 갑자기 찾으면 어떡하오?
내 집은 김포라서 거기선 멀어요. 웬만하면 당장 달려가서 그대를 맞아야 하는디.”
“다음에 올 때는 미리 연락을 하고 오리다.
그나저나 옛날의 그 풍류는 살아 있어요? 나야,
‘권주’라는 이름 덕택에 여전히 술술 넘어가는 술 잘하고 있소만.”
“나도 그대로라고 보면 될 거요. 여전히 시는 쓰고 권주가는 가끔씩 부르는가요?”
“시는 잘 못쓰고 있소만 그 노래만큼은 내 18번 아니던가요. 하하하”
조용한 성당 안이 나의 너털웃음으로 시끄러웠던지
명혜당이 조용히 말하라고 자꾸 눈치를 준다.
열차 출발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한국 영화의 메카인 충무로가 가까이 있지만
거기까지 가기에는 시간이 너무 부족하다.
서울역으로 급히 가야만 했다.
서두른 탓에 시간이 30분 정도 남았다.
예매한 차표를 확보한 뒤, 목이 말라 아이스크림을 찾았다.
명혜당이 서울역에 오면 꼭 들른다는 아이스크림점,
의자에 앉아 목을 축이니 피로가 조금 풀어진다.
명혜당은 다시 편의점에 들러 음료수 두개를 샀다.
기차 안에서 목마를 때 마실 음료수란다.
나에게 어느 것을 줄까 하기에
‘잘생긴 것은 예쁜 그대가 마시고 못생긴 음료수는 날 달라’ 했더니
계산대에서 내 말을 들은 아주머니가 재미있다면서 웃는다.
역 광장엔 남미의 페루에서 온 악사 2명이 공연을 하고 있다.
서너 가지의 악기를 번갈아 가며 연주를 하는데, 악기의 달인들이다.
흘러나오는 선율은 잉카제국의 그것이 아닐까 싶다.
독특한 음악에 매료된 행인들이 가던 발걸음을 멈춘다.
우리 부부도 그 소리에 함초롬히 취하고 말았다.
그들에게 고용된 듯한 한 여인이 한 쪽에서
CD를 판매하고 있는데, 사람들이 제법 줄을 섰다.
악사는 더욱 신명난 듯 연주에 열중하고 있다.
혀를 털면서 내는 소리와 독특한 연주가 잘 어울렸다.
해는 서울의 높은 빌딩 뒤로 숨어 버렸다.
예약된 좌석은 부산행 새마을호 8호차 3, 4번
기관실이 있는 첫 칸의 제일 뒷자리다.
안락한 의자에 앉아 발걸이에 발을 걸치니
금방이라도 잠들 것만 같이 편안해 진다.
다들 믿기 어렵겠지만 나는 새마을호를 처음 탄다.
통일호, 무궁화호, 비둘기호를 타보긴 했지만
요금이 비싼 새마을호와는 인연이 없었던 거다.
KTX 열차도 지난 겨울 처음 한번 타 봤다.
1990년 운전면허를 따서 자가용을 몰기 시작한 이후,
17년간은 거의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않았으니 더욱 그렇다.
전국의 어디를 가도 내가 직접 몰고 다녔을 뿐이다.
지구를 10바퀴 이상 돈 거리(약 45만 킬로)를 누비고 다닌 것이다.
프라이드, 아반테, 산타모를 몰고 다닌 거리의 총합이다.
그러던 내가 새마을호 열차를 이렇게 처음 타 보는 것이다.
5시 40분, 출발시간이 되자
서울역을 천천히 미끄러져나와 달리기 시작한다.
한강 철교를 지나는데 어느새 강렬한 해가 서산에 걸렸다.
김민기의 70년대의 노래 ‘강변에서’가 떠올랐다.
‘서산에 붉은 해 걸리고, 강변에 앉아서 쉬노라면
낯익은 얼굴이 하나 둘 집으로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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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은 어두워가고 별들은 춤추는데
건너 공장에 나간 순이는 왜 안돌아오는 걸까
높다란 철교 위로 호사한 기차가 지나가고
강물은 일고 일어나 작은 나룻배 흔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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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한강 변의 누군가 내가 탄 기차를 바라보며
김민기의 노래를 부르고 있다면 분명
나와 의기투합이 충분히 될 수 있는 사람이리라.
한참을 달렸나 보다.
어느 새 명혜당은 코트를 벗어 이불삼아 덮고는
새근새근 잠들어 있다. 나도 피곤했던지
정신없이 잠을 잤고, 차내의 방송소리에 잠이 깨서
주변을 둘러보니 차창 밖은 칠흑같은 어둠이다.
객차 사이를 오가면서 물건을 파는 사람이 있어
호두과자를 한 봉지 샀고, 커피도 한 잔 사서
명혜당과 나눠 마시니 더 없이 행복하다.
이렇게 몸과 마음을 같이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게
내겐 얼마나 큰 기쁨인지 모른다.
‘사랑하는 나의 사람아,
사랑하는 나의 사람아,
너는 아니? 이런 나의 마음을’
메모 : 2007.1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