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6월 24일 일요일,
하루 종일, 비가 내린다는 예보가 걱정이 되긴 했으나 2주 전부터 계획해 두었던 부모님과의 동해안 여행은 예정대로 진행되어야 한다. 동생에 의하면 며칠 전, 아버지께서 먼 곳을 응시하면서 “주말 즈음, 파도치는 동해안을 휘이 둘러 봤으면 좋겠는데, 시간 있는가 모르겠다?” 당신의 말씀이 나오기가 무섭게, 동생은 내게 전화를 걸었고, 나도 모든 일을 젖혀두고 우선적으로 아버지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하고 약속을 해 두었던 것이다. 그간 얼마나 외로우셨으면…….
아침 7시 조금 지난 시간, 구미에서 대구로 가는 고속도로는 과연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지고 있다. 동생에게 전화를 거니 이제 막 일어난 듯 목소리에 피곤기가 잔뜩 묻어있다. 아침 일찍 일어나지 못하는 잠버릇 탓이리라. 곧장 효목동으로 갈테니 어여 오란다. 녀석은 툭하면 ‘어여 와’ ‘어여 와’ 하면서 부모님의 충청도 사투리를 꼭 빼닮은 말로 날 간혹 웃기곤 한다.
효목동 어른 댁에 도착하니, 마침맞게 동생이 들어온다. 왠지 어설퍼 보인다. 입고 온 점퍼옷이 안 어울려서 그런가? 그래도 듬직하게 느껴지는 것은 동생에 대한 애정 때문일까? 어른들은 이미 출발 준비가 다 된 것 같다. 부엌에 들어가니 된장찌개 냄새가 진동하는데, 시장기를 이내 자극하고 만다. 사실 우리 부부는 아침을 먹지 못했다. 동생도 마찬가지리라. 밥이 좀 남아 있냐고 했더니, 어머니는 눈치를 채고 주섬주섬 준비를 하시는데 금방 진수성찬이 되어 버린다. 어느 것 하나 입에 맞지 않는 음식이 없다. 늘 그렇듯이 두 형제는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한 그릇을 비우고 말았다.
오늘의 나들이 식구는 다섯 명, 자동차 한 대로 가기엔 제격이다. 나의 애마 산타모 8793에 몸을 실었다. 대구-포항 간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아버지는 뭐 이렇게 좋은 도로가 생겼냐면서 새삼 놀라시고, 동생도 처음 달리는 길이라면서 마냥 들떠 있다. 고등학교 졸업 이후 줄곧 서울에서 살다가 대구로 내려온 지 1년이 채 안 되었으니 경상도 지역의 지리엔 어두울 수밖에 없다. 어머니도 오늘 만큼은 모처럼의 나들이에 얼굴이 한층 훤해진 기분이다. 비가 하루종일 쏟아질 것 같다는 일기예보가 다행히 빗나가 있다. 잔뜩 흐리고 비는 아직 내리지 않는다. 뙤약볕보다는 훨씬 낫단다. 부모님도 동생도 아내도 날씨에는 아무런 불만이 없는가 도다. 무작정 떠나고 보는 여행은 이렇게 부담이 없어 좋은가 보다.
포항 IC를 빠져나와 울진 방향의 7번 국도를 잠시 달리다가 해수욕장 방면으로 우회전을 하였다. 곧 바다가 한눈에 펼쳐진다. 칠포 해수욕장이다. 가는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했지만, 우산을 쓰지 않아도 될 정도다. 대학생들로 보이는 수많은 젊은이들이 모래사장 위를 걸으며 힘겹게 극기 훈련을 하고 있다. 여러 명이 조를 나누어 고무보트를 머리에 이고 있다. 간간히 구령 붙이는 소리도 들린다. 아버지는 두리번거리며 무언가를 열심히 찾고 있다가 갈매기들이 보이지 않는다며 어떻게 된 거냐고 하신다. 갈매기들도 오늘 같은 날은 날갯짓보다 어딘가에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을 거라 대답을 했다. 그래도 못내 섭섭하신 모양이다. 바다의 이미지는 수많은 갈매기가 날아야 하는데, 오랜만의 바닷가는 너무나 을씨년스럽기만 했던 것일까? 먼 곳을 잘 볼 수 없으시니 더욱 그러하다. 2년 전, 오토바이 사고로 한 쪽 눈을 실명하시지고는 이젠 세상을 제대로 볼 수가 없으니 말이다.
한 달 전쯤, 아버지께서는 고운 비단 위에 붓으로 직접 그린 산수화 한 점을 선물로 주셨다. 15년 전에 그린 그림인데 누군가에게 넘겼다가 그림을 그린 작가에게 다시 돌아온 것이라고 한다. 그림에 얽힌 그간의 사정은 정확히 모르겠으나 손수 그린 작품으로서 아들에게 인계된 것임엔 틀림없다. 잘 보관해 두었다가 새집으로 이사를 하면 고급스럽게 표구를 해서 가장 잘 보이는 위치에 걸어두고 보리라.
두 눈이 좋아야 글씨도 쓰고 그림도 그리면서 나름대로의 풍류를 즐기실 텐데 요즘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 최근 7,8년 동안은 당신의 아내가 20년이 넘도록 해 온 커피 장사를 돕고 계신다. 평소의 성격으로 봐서는 상상도 못했던 것이었는데 책상머리맡에서 글만 쓰며 보냈던 세월에 대한 미안함 때문인지 지금은 생활 전선에 띄어들어 꼭두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마냥 바쁘게 사신다. 자식들이 보기엔 안쓰럽기도 하지만 건강이 허락하는 한 일을 계속하시겠다고 한다. 자식들도 이제는 그만두라고 못한다. 그저 당신들의 건강을 위해서 무리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그 곱던 손끝도 어느덧 갈라지고 까칠까칠하다. 그 사이에 때가 끼어 험할 대로 험해졌다. 작품 활동하던 그 선비의 손은 이미 아닌 것이다.
칠포 해수욕장부터 북쪽으로 이어지는 해안 도로, 그곳을 달리는 온 식구들의 마음은 이젠 자연과 하나가 되었으니 구불구불한 해안 길을 달리는 오붓한 드라이브가 마냥 즐겁다. 감성이 풍부한 아버지의 입에서 ‘어, 참 좋다!’는 감탄사가 몇 번이나 흘러나왔는지 모른다. 어머니도 덩달아 기분이 좋으시다. 그렇게 다들 즐거워하시니 우리 자식들은 얼마나 좋으냐! 오도리 해수욕장 주변엔 나이 지긋한 아저씨들이 낚시를 즐기고 있다. 낚시하기엔 안성맞춤인 날씨인지 다들 고기를 건져 올리기에 바쁘다. 어머니도 어느 새 그 주변을 어슬렁거리다가 돌미역 한 뿌리를 채취하시고는 비닐 봉투를 급히 찾는다. 집에 가지고 갈 생각인 것이다. 뭘 그런 걸 가지고 가시려 하느냐, 버리라고 해도 막무가내다. 이렇게 좋은 미역을 어디서 구하냐는 거다. 으이구, 알뜰한 어머니 아니라 할까 봐.^^
해수욕장을 돌아 조금만 더 가면 내가 잘 가는 단골집인 ‘두꺼비 식당’(261-0656)이란 곳이 있다. 자연산 회맛을 맛보기에는 기막힌 곳이다. 포항 살 때 손님만 오면 그곳으로 안내하여 푸짐한 회에 매운탕 맛을 보여주곤 했다. 사람좋은 바깥주인이 직접 그물을 쳐서 고기를 잡으니 품질로 친다면 최고 수준이 아닐까? 얼굴은 좀 얽었지만 맘씨 좋고 농담 잘하는 낙천성을 지녔다. 월남전 때 고엽제의 피해를 받은 장본인이기도 하다.
칠포 위의 월포 해수욕장에도 대학생들이 때 이른 해수욕을 하고 있다. 사람들은 거의 없다. 또 차는 달려야 하리라. 되도록이면 많은 곳을 보여드리고 싶은 마음에 운전기사는 바쁘다. 화진 해수욕장에 가까워지면서 7번 국도와 합류하게 되었다. 그 도로는 질주하기에 좋은 도로다. 동해를 바라보며 주욱 달리다 보면 통일전망대까지 갈 수 있는 우리나라 최고의 멋진 도로다. 장사 해수욕장, 구계리 항구를 지나 강구 삼사해상공원까지 잠시 달렸다. 강구면 삼사리(三思里)에 조성되어 있는 삼사해상공원, 그곳의 가장 높은 곳으로 올라가 봤다. 탁 트인 공간인 만큼 가슴이 훤해진다. 아래쪽으로 훑어보니 강구항의 풍성한 모습과 동해의 만경창파가 한눈에 들어온다. 가까이엔 커다란 종을 달아놓은 누각이 보이고, 국민가수 태진아 친동생네 집이라는 희한한 간판을 내건 집도 있다. 연예인들의 유명세를 내건 홍보는 어디를 가든 설득력이 있는가 보다.
‘대게[竹蟹]’로 알려진 강구항을 훑어보며 영덕군이 또 자랑하는 ‘해맞이 공원’을 찾았다. 바다에서 제법 높은 곳에 위치하여 바다를 조망하기에 좋다. 해당화를 주변에 많이 심어 두어서 분위기도 살렸다. 오르내리는 계단 위로는 관광객들이 많이 오가고 있다. 대게의 앞다리가 등대를 거머쥘 듯 기어오르고 있는 형상이 이채롭다. 대게의 고향임을 상징하는 듯한데, 관광객의 눈을 끌기에도 충분했고, 도로 왼쪽으로 서 있는 풍력 발전소의 위용이 돌아가는 바람개비와 함께 신비감을 더한다. 온 가족이 사진 촬영하기에 알맞은 장소 같아서 가까이 몸을 붙이고 사진을 찍었다. 모처럼 부모님과 함께 찍는 것이라서 기분이 좋다. 시간이 좀 더 있으면 해당화 꽃내음 맡으며 계단 아래로 한참을 내려갔다 올라와도 좋으련만, 그저 좋은 위치에서 바다를 한참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우릴 태운 산타모 자동차도 주인을 닮아 지친 기색 없다. 동생은 탁월한 코스의 선택이라면서 한껏 분위기를 살리고 있다. 차창을 열고 바람을 손 안에 가만히 감싸니 그 촉감이 마치 ‘뭐 만지는 것 같다’며 다소 야한 표현을 서슴지 않는다. 그랬다. 모 선생님이 재미있게 표현했던 말을 동생에게 들려주었더랬는데 그것을 기억한 모양이다. 동생의 웃는 모습이 보기도 좋다. 나보다 네 살 아래의 동생, 그는 나이는 많아도 경력이 그다지 오래되지 않은 한의사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 생활을 하다가 사표를 내고 비장한 각오로 다시 공부를 시작, 30대 중반에 한의과 대학에 입학하여 40의 나이에 한의사 자격증을 따낸 대기만성의 인물이다. 졸업하자마자 서울에서 한의원을 개업 3, 4년간 운영을 하다가 지금은 자리를 옮겨 대구의 수성구청 맞은편에 있는 수성 함소아한의원 원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세련된 멋이라고는 찾아보기 어려운, 수더분하고 마음씨 좋은 아저씨 인상의 한의사다. 겸손하고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인간미를 가진 천사표 인물임을 난 잘 알고 있다. 병원의 출퇴근은 자전거로 하는데, 출근하기 전 부모님이 장사하는 곳까지 자전거를 타고 와서 부모님을 배알하고는 다시 자전거를 타고 병원으로 출근하는데 꼬박 1시간 정도의 운동을 그런 식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말 그대로 일석이조인 것이다.
동생과 아버지는 장난끼 섞인 말을 곧잘 주고받는데, 그 말을 가만히 듣고 있다 보면 웃음이 절로 나온다. 아버지는 일부러 아들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말을 꺼내실 때가 많다. 그것도 상당 부분 정색을 하고 얘기하신다. 그러나 아들은 아버지에 대하여 노여움이 없다. 아버지의 말씀이라면 일단 수긍하고 보는 겸손함이 대견스러울 정도다.
“네가 아는 게 뭐 있냐? 천하에 무식한 놈 같으니라구. 너 왜 '대게'라고 하는지 아냐?”
“큰 게니까 대게 아니예요?”
“그러니 네가 천하에 무식한 놈이라 카는 거야. 왜 대게라고 하느냐 하면 -----”
“아, 그러시군요. 천하의 무식꾼이라 정말 그걸 몰랐네요.^^”
“야, 임마. 너 386세대의 개념을 알어?”
“예, 그 정도야 알지요. 30대의 나이, 80년대 학번, 60년대 생을 가리기큰 개념 아닙니까?”
“천하의 무식한 놈 같으니라구. 3.1절도 모르고, 8.15도 모르고, 6.25도 모르는 세대란 뜻이여, 이놈아.”
“허허, 그래요. 난 그것도 모르고 지냈네요. 좋은 거 배웠어요.”
축산 항을 끼고 돌아 한참을 달리면 영해의 대진 해수욕장이 나타난다. 1982년 초임 발령을 받아 갔던 영양 석보중학교 근무 시절에 동료들과 함께 찾았던 기억이 있는 곳이다. 이문열의 소설 ‘젊은 날의 초상’에 나오는 칼갈이 노인이 눈 덮인 창수령을 넘어 이곳까지 와서 칼을 내던졌던 이미지의 바다다. 창수에서 영해를 거쳐 대진 앞바다로 내려온 송천(松川)은 바다의 문턱에 다다르면서 큰 다리 하나를 걸쳐놓고 있는데, 거기서부터 시작하여 병곡 고래불 해수욕장까지 연결되는 아스팔트길이 생겨난 것이다. 길 주변에는 명사십리 백사장이 온바다를 머금고 있고, 도로 안팎으로는 간간이 늪지도 만들고 관개 수로로 연결되면서 영해 원황벌의 끝자락을 깔끔하게 정리해 놓고 있는 듯 했다.
오늘의 점심 식사는 고래불 해수욕장이 보이는 선창가 어느 횟집 2층에서다. 비가 올 듯한 날씨가 회를 먹기에는 적당하지 않으나 바닷가를 찾은 입장에서는 포기할 수 없는 음식 아닌가? 모듬회 60,000원짜리 하나를 시켜놓고 소주 두병을 주문했다. 생선회를 안주 삼아 술 한 잔 하다 보면 기분 좋게 취할 것이고, 시간도 잘 흐를 것 같다. 이 얼마나 좋은 분위기인가? 손님도 별로 없어서 2층 식당은 우리 다섯 식구가 온통 다 차지해 버린다. 아버지는 기분이 좋다면서 연방 웃음을 잃지 않는다. 저음의 차분한 목소리로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하시는데 특유의 말버릇이 이어진다. ‘인제’라는 상투어가 없으면 대화 진행이 잘 안 될 정도다. ‘그러니까(그래서) 인제’를 써야 이야기가 이어진다. 그런데 한참을 말없이 듣고 계시던 어머니는 아버지 말씀에 대해 못마땅한 부분이 있는지 그것을 꼬집으면서 제동을 건다. 다소 과장된 말 표현에 대한 거부감의 표현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또 토닥토닥 부부 싸움이 시작될 수밖에 없다. 늘 그러셨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말 표현에 그러려니 넘어가는 법이 잘 없다. 진실만을 얘기해야지 왜 과장하고 감정 상하는 얘기를 그렇게 즐기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태도로 투정을 부리고, 아버지는 그럴 수도 있는 것 아니냐고 어머니를 몰아세우기도 한다. 그 정도가 되면 아들들이 빨리 개입해서 다른 분위기로 전환을 해야 한다. 조금 지나더니 아버지는 미안하다면서 옆에 앉은 어머니의 어깨를 토닥여 준다. “그래도 내가 너희 엄마를 얼마나 끔찍이 사랑하는지 모른다.”면서 금방 웃는다. 먹은 마음이 없으니 화도 금방 풀어지는가 보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벌어다 주는 쥐꼬리만한 월급으로 아홉 식구의 살림을, 조부모가 돌아가신 뒤에는 일곱 식구의 살림을 도맡아 오신 분이셨다. 항상 가난했고, 마음고생이 많았던 세월이었다고 술회하신다. 아버지 당신께서 40대 중반에 실직을 당하여 힘들어 할 때 장사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생활 전선에 뛰어드신 분이다. 지난 세월을 더듬을 때면 으레 한숨과 함께 시작되는 숱한 사연들이 한 편의 소설 같다. 도시로 오기 전의 시골에서의 삶도 어머니에겐 추억거리가 되지 못한다. 우리 자식들에겐 어린 시절의 좋았던 추억을 고스란히 담아놓은 곳이지만.
어머니의 본격적인 장사는 맏아들인 내가 군복무를 마치고 울진 매화중종합고등학교란 곳에 복직 발령을 받아 간 뒤부터였다. 그 때 아버지는 20년 가까이 근무하시던 대학 도서관사서직을 그만두고 나와서 서예와 한문을 가르치는 학원을 차리셨다. 1년 반 동안 ‘청구서당’이란 간판을 내 걸고 시작을 했으나 배우러 오는 학생들은 거의 없었다. 의욕적으로 시작하면서 투자한 만큼의 소득이 없으니 결국 부도가 날 수밖에 없었던 거다. 어느 날 집에 오니 가장 기본적인 살림만 남고 모든 것이 없어져 버린 기억이 있다. 내가 소장하고 있던 책, 아버지의 고서, 우람한 책상 등 남아 있는 것이 없었다. 아버지는 그렇게 생활력을 잃고 말았다. 그래도 몸과 마음은 아직 젊어 이것저것 시행착오도 많이 겪은 시절이기도 하다. 뒤늦게나마 신춘문예 당선을 꿈꾸면서 책상머리맡에서 시, 소설, 수필 등 다양한 문학 장르를 섭렵했다. 서예 부문에서도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고 싶어 국전에 출품하기를 여러 번, 간간이 부탁받게 되는 옛 문집의 번역을 해 주면서 용돈을 벌어 쓰기도 했고, 석물 공장에서 부탁하는 글씨를 써 주고 담배값을 벌어 쓰기도 하면서 뚜렷한 직업 없이 그렇게 산 세월이셨다.
그러는 동안 어머니는 나를 제외한 네 동생들 학비를 벌기 위해 이를 악물고 장사를 하셨다. 처음에는 생옥수수를 사다가 그것을 쪄서 팔기도 하고 미제 물건을 떼다가 약간의 마진을 남겨 팔기도 했단다. 그러나 힘이 너무 들어서 우연히 커피 장사를 해 봤는데 수입이 제법 짭짤했던가 보다. 사람들이 많이 붐비는 곳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팔다가, 시원한 나무 그늘 아래다 손수레를 갖다 놓고 손님들을 기다리며 팔기도 하다가, 10여 년 전부터는 트럭을 하나 사서 그 짐칸에 모든 것을 넣어두고 비교적 편리한 시설을 갖추고 장사를 하고 계신다. 그렇게 생계 유지형 노점상으로 일관한 25년 세월, 그간 어머니는 참 많이도 늙으셨다. 검던 머리도 어느새 백발이 되었다.(염색을 안 하면 완전 백발!)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고희의 연세에도 불구하고 아직 잔병치레 잘 안 하고 매우 건강하시다. 생활력이 강해서 그런지 아플 새도 없다고 말씀하신다. 좀 몸이 아프더라도 장사하다 보면 그 아픔도 잊는단다. 완전한 장사 체질이 된 거다. 오늘 같은 휴일날은 수입도 평일보다 좋으니, 장사 그만두고 놀러 다닌다는 것은 어머니에겐 용서할 수 없는 사치라고 생각하실 정도다.
불철주야 매달렸던 커피 장사, 이젠 여유를 좀 찾으셨으면 좋겠다. 5남매 다 출가시켜 놓은 다음부터는 심심풀이로, 운동 삼아 하는 장사가 되었으면 좋겠는데 한두 푼이라도 더 벌겠다고 집착을 보일 때가 많아 자식들은 참 안타깝다. 몸이 피곤하고 힘들 때면 장사를 그만두고 하루 쉬고 싶다가도 늘 찾아오는 손님들이 가만두지를 않는단다. 왜 사업장(?)에 나오지 않느냐면서 집으로 자꾸 전화를 해서 결국 또 나가서 장사를 하게 된다는 것이다. 오늘만 해도 그렇다. 벌써 몇 번이나 전화가 왔는지 모른다. 7,8통은 될 거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여기 동해안이여, 모처럼 마누라하고 아들 며느리 데리고 놀러 왔어.” 은근히 자랑 섞인 말투에다가 변명 아닌 변명을 하신다.
노점 커피 장사이지만 그 주변에는 사람들이 참 많다. 주변에 자리를 펼쳐놓고 바둑 장기판을 2,30개 정도 준비해 놓으면 늘 찾아오는 손님들이 있어 하루 종일 신선놀음을 즐긴다. 부모님이 그늘과 자리를 제공하는 셈이니 얼마나 고마우냐, 그 고마움은 커피 한 잔 사 먹는 것으로 보상하면 되니까 또 얼마나 헐값이냐, 40대의 장년층부터 6,70대의 노년층에 이르기까지 세상살이에 이골이 난 사람들이 주요 고객인데, 거의 매일 그곳을 찾는 것으로 보아 백수이거나 직장에서 퇴임한 사람들임에 틀림없다. 용돈들도 넉넉지 않아 커피 한 잔 못 사먹는 사람도 많다고 한다.
“오늘은 난 오뉴월 송아지야.”
“그게 무슨 말입니까”
“그냥, 얻어먹기만 하는 날이란 뜻이지.”
“그러니까 빈손으로 오셨다 이 말씀이죠?”
“유월독초(六月 犢草)라는 말이 있는데, 유월의 송아지가 풀만 뜯듯이 오늘 아무 생각없이 먹기만 하겠다는 거지. 허허허”
얼마 전, 며느리가 한 턱 쏘겠다면서 아버지께서 잘 가시는 단골집으로 모셨는데, 아버지는 며느리 몰래 자리를 빠져나가 계산을 먼저 해 버린 적이 있다. 늘 자식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고 당신께서 사 주는 것을 더 좋아하시는 분인데, 오늘은 여의찮으니 그렇게 겸연쩍게 얘기를 하는 것이리라.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 보니 소주 두세 병을 비웠고, 동생은 기분이 좋아져서 노래라도 한 곡조 뽑을 기세다. 난 운전을 책임져야 하니 음주는 못하고 창밖의 바다 분위기에 취하고 이야기 듣는 것에 취해 시간을 잊고 있었다. 주문한 회를 다 처리할 즈음에 얼큰한 매운탕이 들어왔다. 식구 수만큼 밥을 시켜서 먹고 나니 이 세상 어느 누구도 부럽지 않다. 커피를 한 잔 마시면서 돌아가는 길을 또 상상해 본다. 근데 아버지께서 갑자기 “내 배가 차려면 아직 멀었다.”고 말씀하신다. 모두가 놀란다. 이야기하시느라 음식을 충분히 드시지 못한 것이라는 결론이다. 어머니 왈, “요즘 들어 너희 아버지가 얼마나 음식을 많이 드시는지 모른다. 그런데 체중은 자꾸 줄고 있으니 이상하단 말이야.” 맞다. 음식은 참 잘 드시는데, 체중은 자꾸 빠지고 있음을 나도 이상하게 느끼고 있던 차였다. 건강한 시절에는 60키로 가까이 되던 체중인데 요즘엔 50키로가 채 안된다니 말이다. 걱정이다. 포항 쪽으로 내려가다가 보경사 입구에 들러서 손칼국수 맛을 보시고 가는 것이 어떠냐고 했더니 아주 좋아하신다. 그래서 들른 곳이 보경사 입구의 식당 ‘천령산 가든’이다. 손칼국수 두 개를 시켜서 나는 아버지와 겸상을 했고, 다른 식구들은 식당 주변의 계곡을 산책하면서 아버지의 못다한 식사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메모 : 2007.6.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