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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중국의 장가계(張家界) 여행

여행 이야기

by 우람별(논강) 2009. 8. 6.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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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장가계 여행

7월 18일 아침 8시 30분, 여행에 참가하기로 한 두호고 친목회원들이 약속 시간에 다들 모였다. 8월말 정년 퇴임을 앞둔 교장 선생님과 함께 하는 여행으로서 기획된 것이었는데 갑자기 교장 선생님께서 개인적 사정으로 불참하게 된 터라 여러 회원들이 출발하기에 앞서 교장 선생님에 인사를 하면서 미안함과 섭섭함을 표했다. 직원들 그리고 몇몇 학부형들의 전송을 받으며 관광버스에 올랐다. 경주에 들러 세 분 선생님과 합류한 뒤 김해 국제공항을 향했다. 날씨는 조금 더웠으나 쾌청했다.

이미 김해 국제공항은 관광객들로 들끓고 있었다. 일상을 벗어나 어디론가 훌쩍 떠난다는 설레임과 기쁨이 묻어나는 말들이 무성하다. 여유 있게 공항에 닿아 수속을 끝내고 출발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일 게다. 우리도 여행사에서 내어주는 이름표와 뱃지를 목에 걸고 소속을 분명히 했고 어떤 여회원은 화장을 하면서 매무새를 다듬기 바쁘다. 다들 여행 차림의 입성이 보기에도 가볍고 시원하다.

여름방학을 이용한 여행이 이젠 어른들만의 몫이 아닌 듯하다. 어린 학생들의 단체 관광이 여기저기 눈에 띄는데 제법 그 수가 많다. 우리가 어렸을 때는 상상도 못했던 것 아닌가? 경제적 여유가 있어서일 수도 있지만 자녀들에 대한 어학 연수 차원의 부모들의 극성스런 교육열 때문일 것이란 생각을 하게 된다.

CA 130 편 중국국제항공공사의 비행기는 출발 시간 12:20에 맞춰 김해 국제 공항의 활주로를 날아 오르더니 이내 구름 속을 뚫고 날기 시작했다. 2시간 40분 정도를 날아가면 북경 국제공항이다. 창문 가에 앉았으나 좌석의 위치가 날개 바로 위라서 아래를 내려다볼 수 없다. 탑승할 때 비행기 입구에서 가져온 인민일보(人民日報)란 신문을 훑어보기로 했다. 특유의 붉은 글씨의 제호가 눈에 와 박히는데 몇 장 넘겨봐도 무슨 내용인지 도통 알 수가 없다. 한문 문화권의 여러 나라에서 공통적으로 쓰이는 한문이라면 한문을 공부한 사람들에게는 적어도 통해야 할 테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사용하는 문자부터가 생소하고 문장 순서도 백화문이라 정통 한문과는 다른 것 같다. 답답한 마음에 전체 문장은 접어 두고라도 우선 간체자(簡體字) 하나라도 익혀둘까 싶어 뒤적뒤적 훑어보기로 했다. 아는 글자가 나오니 반갑다. 얼마 전에 공부해 둔 것이 몇 자 보였던 것이다. 간자가 어떤 원리에 의해 형성되었는가에 대한 모 교수님의 저서를 읽으면서 잠시 익혔던 덕분이리라.

어여쁜 스튜어디스들이 통로를 오가면서 손님들에게 차와 쥬스, 기내식을 제공하느라 바쁘기 시작했다. 나도 쥬스를 한 잔 얻어 마시고 조금 있으니 기내식을 제공한다. ‘치킨 오어 피쉬’하면서 의사를 묻는데 나는 ‘피쉬’를 요구했다. 은박지에 싸인 따스한 음식이 주된 음식이고 그에 딸린 몇몇 반찬이 그리 낯설지가 않다. 한글이 쓰인 포장 김치도 반갑다. 출출했던 터라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먹어 치웠다.

드디어 북경에 도착, 현지 시각은 오후 2시. 우리보다 1시간이 빠른 시간이다. 입국 수속을 마치고 각자의 짐을 챙기고 공항을 빠져 나왔을 때, 북경의 하늘은 온통 희뿌연 먼지로 가득했다. 언젠가 매스컴을 통해서 들은 바 있는 북경의 대기오염 실태를 연상케 했다. 자동차 배기 가스에 의한 오염의 결과라는 것이고 이것 때문에 알게 모르게 죽어가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었다. 1400만의 인구가 모여 산다는 북경, 소도시에 살고 있는 우리로서는 처음부터 낯설다. 숨막히는 더위와 함께 답답할 뿐이다. 현지 가이드의 안내를 받아 공항을 빠져 나와 전세 버스에 올랐다.

북경의 현지 가이드는 어휘 구사가 고급스럽고 엘리트다운 면모를 보이는 사람이었다. 작달막한 키에 예쁘장하고 귀여운 모습이다. 간혹씩 웃음을 흘리는데 인상이 매우 좋았다. 어색한 말투가 있긴 해도 받아들이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흑룡강성에 고향을 둔 조선족 교포 3세라고 한다. 교포 1세인 할아버지의 고향은 경주 건천이라서 틈만 나면 그곳을 찾아간다고 하면서 포항의 우리를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되어서 반갑다고 한다. 우리들도 열렬한 박수로 환영을 했다.

장가계로 다시 비행기로 출발하려면 4시간이 넘게 기다려야 하므로 그 자투리 시간을 효과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북경 시내에 있는 수족관 한 군데를 들르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北京海底世界’라는 곳인데 가이드의 설명이 거창했다. 정기적으로 멀리 떨어진 바다에서 비행기를 이용해서 공수하는 비용이 만만치 않아서 입장료가 조금 비싸다고 한다. (입장료: 성인- 75위안, 아동-50위안) 겉으로 보는 것과 다르게 안에 들어가 보니 규모가 제법 컸다. 구경꾼들도 엄청나게 많다. 나이 어린 중국 학생들이 특히 많았다. 알아듣지 못하는 말들을 하고 있지만 신기해하는 동심이 그대로 느껴진다.

안에 들어가 보니 자세히 관찰할 수 있도록 되어 있는 곳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곳은 기계 장치가 되어 있어서 가만히 서 있기만 하면 유리로 만든 투명한 터널 속을 관람할 수 있도록 되어 있는 곳도 있었는데, 바닥이 천천히 움직이면서 사람들을 그 속으로 밀어넣고 또 천천히 밀어내는 시스템이 그것이었다. 터널 속에 펼쳐진 좌우상하의 바다 속 풍경을 구경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상어, 거북, 해마, 가오리, 바닷가재, 등 온갖 종들이 거기에서 수영을 즐기고 있었다. 이젠 사람들의 시선도 아무렇지도 않은가 보다. 인어도 그 사이에 끼어서 어설프게 떠 있고, 잠수부도 그 안에서 관광객들을 배려한(?) 몸짓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부산에 있는 ‘아쿠아리움’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의 낙후된 시설이라면서 한 동료는 실망 섞인 푸념을 늘어놓는다.

북경공항에서 버스로 50분 정도를 달려 짤막한 수족관 관람을 마치고 다시 버스에 올라 북경 공항으로 50분을 달리고 있다. 현지 가이드의 설명은 끊임없이 이어진다. 북경이란 도시가 어떤 도시인가, 도시의 도로망에서 중국과 한국은 어떻게 다른가, 등 제법 구체적인 자료를 제공하느라 바쁘다. 한편 고속도로를 끼고 이어지는 큰 키의 미루나무 숲이 눈에 들어오는데 끊임없이 흔들리는 잎들마다 오후의 피곤기가 느껴진다. 먼지 속에서의 아우성이라 더욱 그런가 보다. 빛 바랜 초록이라 우중충하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


CA1383편, 장가계로 날아가는 국내선 비행기다. 현지 시각 19:30 예정보다 1시간 정도 늦게 비행기는 공항을 이륙했다. 출발 시간보다 으레 2, 3시간 늦게 출발하는 경우가 다반사로 일어나기 때문에 중국 여행을 할 때는 충분히 마음의 각오를 하라고 하는 말을 들었기에 오히려 일찍 출발한다는 느낌이다. 국내선 비행기라서 좁았고, 엔진 소리가 너무 크게 들려서 귀에 거슬렸는데, 이내 적응할 수 있었다. 장가계로 여행하는 한국인들이 워낙 많은 탓인지 한국말을 유창하게 하는 중국인 스튜어디스가 배치되어 있었다. 통로를 오가면서 한국말로 친절을 베푸는 품이 제법이다. 나도 그녀의 반응을 보고 싶어서 모르는 간자를 메모지에 써서 무슨 자냐고 물었더니 예상대로 친절하게 설명을 해 준다. 지난 2000년 8월에 북경에서 연길로 날아가는 국내선 비행기에서는 탑승자의 대다수가 한국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말 방송이 없어서 중국인들에 의해 무시당한 불쾌감을 감출 수가 없었던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장가계 공항에 도착했을 때 시계는 저녁 10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습도 높은 후덥지근한 날씨가 가슴을 조여왔다. 짐을 챙겨 좁은 공항을 빠져나와 우리를 기다리던 버스 위에 올랐다. 현지 가이드 김애련 씨가 자신을 소개하면서 뭐라고 말을 하는데, 아직 가이드 일을 시작한 지가 얼마 안 되었는지 어설픔이 좀 묻어난다. 말씨에서 느끼는 어색함일 것이다. 판에 박힌 말을 마구마구 내뱉는데, 반복되는 말이 너무 많다.

장가계의 날씨는 일년 365일 중 200일 가량은 비가 오고 구름이 많이 끼는 날씨라고 들었는데 다행이 비는 내리지 않았다. 가이드도 우리 팀이 참 운이 좋다고 말한다. 내일도 날씨는 좋아서 관광하기에 문제가 없단다.

정해진 숙소는 四星級인 ‘장가계국제대주점’이었다. 도착해서 우선 늦은 저녁 식사를 하고, 방 배정을 받았는데 친구인 토담 선생과 같은 방을 쓰기로 되어 있다. 여장을 풀고 샤워를 하고 나니 밤 12시가 된다. 다음날 시작되는 여행을 위해서는 잠을 자야 하겠으나 첫날을 어찌 무심히 보낼 수 있으랴. 토담과 나는 친목회장님을 비롯 동료 몇 명을 규합하여 호텔 밖으로 나갔다. 공식적인 모임을 가질 수 있는 시간이 아니라서 비공식적인 자리일 수밖에 없다. 약속이나 한 듯이 호텔 입구의 ‘버드나무 집’에 한 두 명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택시를 타고 야시장 구경을 갈까 하다가 늦은 시간에 무슨 사고라도 당하면 골치 아프니 주변에서 간단히 한 잔 먹자는 의견이 많았기 때문이다. ‘버드나무 집’이란 간판 왼쪽에 우리나라 태극기를 어설프게 그려 넣어 조금 이상했다. 그 주인은 장가계에 살고 있는 천 명 안팎의 조선족 교포 중의 한 사람이고, 몇 년 전 울산에서 한 4년간 살다가 장가계로 들어와 산다고 하는데, 약간은 궁상맞아 보여서 연민의 정이 느껴졌다. 허름한 가게의 사장이지만 장가계를 찾는 한국인들을 상대로 한다면 돈도 제법 벌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술값을 흥정해 보니 중국의 시세와 비교해 볼 때 터무니없이 비쌌다. 그 흔한 이과두주 한 병에 1,000원을 받고 있고, 죽엽청주 한 병에 우리 돈 17,000원을 요구하고 있는데 별 것 아닌 것 같아도 엄청난 폭리를 취하는 셈이다. 그러나 동족이 경영하는 가게이니 우리가 도와줘야 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눌러 앉기로 했다. 늦은 시간을 마다 않고 웃음 흘리며 그 독한 술잔을 들이키니 이국의 낯설음도 잠시 후 없어졌고 우리들의 젊음만 대화 속에 걸쭉하게 남아 있었다. 토담과 난 숙소에 들어와서도 몇 잔 더 마시고 잠자리에 들어야 했다.

다음 날 아침, 호텔 식당에서 뷔페식 식사를 하고 여유가 조금 있어서 주변을 둘러 보았다. 호텔 뒤쪽으로 강물이 흐르는데 저 멀리 댐 같은 것이 보이고 옅은 안개 속으로 큰 다리가 하나 길게 늘어서서 양쪽의 언덕을 연결하고 있다. 부산의 영도 다리를 연상시켰다. 그 아래를 시선을 돌리니 흰옷을 입은 한 아낙네가 뭔가를 열심히 빨고 있는데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풍경이다. 그 강물은 유유히 흘러흘러 중국의 거대한 호수인 동정호로 흘러들어간다고 하는데 그 호수로 흘러가는 네 개의 큰 지류 가운데 하나로서 인구 150만의 장가계시를 관통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행은 시작되었다. 장가계 시에서 50분 가량을 더 달려가면 무릉원구라는 관광지가 있는데 백장대 뒤쪽의 보봉호수와 천자산 자연보호구, 원가계, 하룡공원 등이 오늘의 관광 코스다. 가이드는 차만 타면 마이크를 잡고 계속 이야기를 한다. 그 천편일률적인 이야기를 앵무새처럼 지껄인다. 관람 장소가 나올 때까지 최소한 뭔가를 계속 이야기하도록 되어 있는 게 불문율인 모양이다. 그 성의가 놀랍긴 해도 간혹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좀 주면 좋겠는데 필요없는 이야기를 왜 그리 많이 하는지 짜증이 날 정도다. 말은 많아서 편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장가계 관광지구로 가는 길은 예사롭지 않았다. 길가로 보이는 특이한 가옥들이 아직은 덜 개화되고 가난한 중국인들의 모습 같다. 단층 가옥은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2, 3층의 어설픈 가옥들인데 직사각형의 건물에 직사각형의 구멍이 매층마다 3개 정도 뚫려있고 건물만 있지 사람은 살지 않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평지가 거의 없어 농사지을 장소도 없다. 그저 산비탈의 적당한 곳을 갈아엎어 옥수수도 심고 호박도 심어 놓았다. 심지어는 도로의 절개지 공간에도 무엇인가를 심었다.

도로 또한 궁상맞기 그지 없다. 관광 목적으로 닦아놓은 도로 말고는 우마차조차 다니지 못할 정도의 오솔길이 구불구불 이어진다. 집도 여기저기 흩어져 있을 뿐이다. 남이야 어떻든간에 자기만의 독특한 삶을 추구한다는 중국인들의 민족성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듯하다. 예부터 호남성은 도로가 워낙 험해서 한 번 숨으면 도저히 찾아낼 수 없는 곳이었다고 한다. 중국 인구의 92%를 차지하고 있는 한족들은 비옥하고 광활한 곡창지대를 차지하고는 등 따시고 배부른 삶을 살고 있음에 비해 50여개의 소수 민족들은 밀리고 밀려 이 척박한 땅에서나 살면서 그들만의 생존 방식으로 지금까지 살아가고 있는 것이리라. 이곳 장가계 인구 154만 중에 약 72%가 소수 민족(토가족들이 주를 이루고 그 외에 맥족, 묘족 등이 함께 살고 있음)이라고 하니 이곳이 얼마나 낙후한 지역인지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느 민간 사업자가 좁은 계곡을 댐으로 막아 아름다운 호수를 만들었다고 하는데 그 이름 보봉호(寶峰湖)!
버스에서 내려 호수까지는 걸어가야 하는 길, 그 초입부터 상가 상인들의 흥정하는 소리가 시끄럽다. 부채, 모자, 물 등 온갖 상품을 내 놓고 사라고 난리다. ‘한 개 천 원’, ‘두 개 천 원, 아니 세 개 천 원’ 하면서 빨리 사 달라고 난리인데 일일이 여행객에게 가까이 다가와 붙지는 않으니 사지 않겠다는 마음만 먹으면 아무런 구애됨이 없다. ‘천 원’이라는 발음은 왜 그리 정확한지 모르겠다. 그 이후부터 중국인들로부터 가장 많이 들은 말이 ‘천 원’이라는 말이다.

어설픈 가마를 만들어 놓고 관광객들을 유인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한 번 타는데 우리 돈 만 원이라고 흥정해 놓고 나중에는 이만 원을 요구한다고 한다. 앞뒤에서 두 사람이 수고를 했으니 2만원을 내는 것은 당연하다는 거다. 하루에 몇 건만 올려도 그들에게는 두둑한 수입이 되는 것이니 여기저기 그런 가마꾼들이 많은가 보다. 살아가는 방법도 여러 가지이기는 하나 그저 돈 벌기에 눈이 어두워 손님들의 안전은 뒷전이고 가파른 산길을 가마를 태워 오른다고 하니 생각만 해도 오싹했다.

보봉호수는 아름다웠다. 비록 인공 호수이기는 했으나 배를 타고 그 주변의 풍광을 완상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제공해 주어서 좋았다. 비취빛 호수물에 산들이 거꾸로 비쳐 물은 산으로 말미암아 더 푸르고 산은 물로 말미암아 푸르다고 표현해야 정확하리라. 길이 2.5킬로미터 평균 수심 72미터의 호수에서 뱃놀이하면서 사방에 우뚝 솟은 영봉들을 접하고 보니 인간과 자연이 완연하게 하나가 된다 그런 풍류가 또 어디 있으랴. 이런 멋을 선인들은 물아일체요, 물심일여라고 했던가?

또 간간이 호수가에 정박중인 배에서 어느 새 나와서는 노래를 예쁘게 불러대는 빨간 옷의 선녀들의 유혹을 차마 뿌리치기가 어렵다. 박수가 여기저기 터진다. 선녀들의 노래에 대하여 노래로서 답하지 않으면 배가 멈춰 서게 되고 누군가 호수 속에 빠져야 한다는 가이드의 설명에 제일 먼저 강호철 선생이 그 흥을 열어젖힌다. 교감 선생님도 지명되어 선상의 무대에 올라 부끄럼 무릅쓰고 ‘총각 선생님’을 부르셔야 했다. 그렇게 한참을 웃다가 호수를 한 바퀴 돌고 나니 이젠 배에서 내리라고 한다. 몇 년 전 북경 주변의 용경협이란 곳에서 배를 띄우고 놀았던 장면과 겹쳤는데, 굳이 비교를 한다면 용경협보다는 조금 작고 물에 뜬 산세도 웅장하지는 않았으나 선남선녀의 온갖 풍류가 넘치고 있어서 내게는 부족함이 없었다. 무릉원구라는 地名에 걸맞는 행복한 순간이었다.

보봉호 관광을 마치고는 우리는 가이드가 안내하는 진주 목걸이 파는 곳으로 안내되었다. 이곳에 대해서는 언급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했다. 으레 관광에는 물건 파는 곳을 들러야 하는 옵션이 작용해서 원하지 않아도 반강제적으로 안내되어야 하는 불편함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다. 절대로 여행 중에는 가이드가 안내하는 상품을 사지 않으리라 마음먹었던 터라 그저 시간만 빨리 지나기를 바랄 뿐이었다. 가이드의 태도가 조금 시큰둥해졌다. 궁금한 게 있어 물어도 건성으로 대답한다.

점심 시간이 되었다. 오늘의 핵심 관광인 장가계 삼림공원을 둘러보려면 든든히 먹어 두어야 했다. 한국식 음식점이었는데 먹을만 했다. 콩나물 무침, 김치, 양배추, 된장찌개 등의 음식이 우리나라 음식점과 큰 차이가 없을 정도였다. 특히 마음 좋게 생긴 뚱뚱한 아가씨가 따라주는 따끈한 차맛은 점심을 다 끝낸 뒤의 포만감을 배가시켰다.

장가계로 가는 길은 마이크로 버스를 이용한다. 주거지역인 무릉원구와 관광지구인 장가계 사이를 잇는 주요한 교통수단인데, 고도의 운전 기술을 자랑하는 사람만이 그곳에 배치된 것 같다. 꼬불꼬불하고 좁은 길을 속도 하나 줄이지 않고 거침없이 몰아가는 운전 솜씨가 그걸 증명하고도 남는다. 거기서는 어떤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다. 잘못하여 길에서 벗어나는 날이면 천길 낭떠러지의 계곡으로 떨어지고 마는 것이다. 하루에도 수십 번을 오가는 그들의 운전 솜씨에 모두는 경탄하지 않을 수 있으랴?

길 좌우로 보이는 우뚝 솟은 봉우리에 정신을 빼앗긴 우리들은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다. 멀고 가까이에 서 있는 봉우리 하나하나가 있는 그대로의 그림이다. 사진을 찍어 남겨두려는 욕심을 부려보지만 눈으로 보는 실제보다 훨씬 못한 것이겠으나 좋다 싶으면 그냥 셔터를 눌러댔던 것이다. 찍힌 경치가 마음에 안 들면 즉석에서 지워도 되는 디지털 카메라의 장점을 살릴 수 있으니 뭐가 아까우랴 까짓것.

‘장가계’라는 글자를 새긴 곳에 이르렀다. 버스는 이곳도 지나쳐 오른쪽으로 한참을 더 달려 가더니 주차장에 닿는다. 여기서부터 엘리베이터가 있는 곳까지 당분간 계단을 올라야 했다. 한참을 올라 뒤를 돌아보니 천 길의 바위 벼랑이 기가 막히게 버티어 서 있다. 그야말로 절경이다. 관광객들을 환영하는 듯한 나름의 몸짓을 보이면서 즈그들끼리 뭐라고 말을 주고받는 듯하다. 손님을 맞는 태도로도 깍듯하다. 저마다 잔잔한 나무옷을 입고는 머리 위로 깨끗한 하늘을 이고 즐거운 표정을 하고 있는 듯하다.

가이드는 우리들의 여유를 보고 있지 못한다. 빨리 가자고 서두른다. 다음에는 거대한 수직 상승의 엘리베이터를 탈 차례다. 맨처음에는 컴컴한 암흑 속을 오르다가 약 70미터 정도는 탁 트인 장관을 볼 수 있을 거란다. 그랬다. 엄청난 속도로 오르다가 어느 순간에 펼쳐지는 장관은 현기증이 날 정도다. 위로 보였던 봉우리들이 어느 새 정면에 있거나 점차 아래로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처음 보는 장관이라 얼떨떨했다.

엘리베이터를 내리고부터는 원가계(袁家界) 코스라고 한다. 누가 이름을 붙였는지는 몰라도 거기서부터는 남다른 답사 코스가 기다리고 있다. 관광객들을 위한 돌길이 잘 깔려져 있는데, 평지이든 오르내리는 길이든 잘 정돈되어 있었다. 자연그대로의 맛은 없었으나 워낙 위험한 곳이라 그렇게 길을 만들어 놓지 않으면 안될 것 같기도 했다. 길을 따라 돌면서 전면에 펼쳐지는 갖가지 형상의 봉우리들을 보게 되는데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동양화의 그림 속에서나 볼까 말까한 장면이 눈앞에 생생하게 펼쳐지고 있으니 꿈인지 생시인지 모를 지경이다.

‘비류직하삼천척(飛流直下三千尺)’이란 말이 있듯이 까마득한 절벽이 눈 아래 밟히는데, 긴장과 스릴 만점의 발걸음 같아서 차라리 겨드랑이에 날개라도 돋아서 힘껏 날아오르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저 멋진 봉우리마다 내려앉아 흔적을 살포시 남겨 두고는 다시 올라 몇 바퀴를 휘둘러 본 다음 날개를 거둬들이고 싶다.
자연의 경이로움에 동료들의 얼굴은 하나 같이 훤하다. 다들 하얀 웃음을 짓고는 사진 찍느라 바쁘고 누구는 이 좋은 절경을 고스란히 우리나라에 옮겨두고는 필요할 때마다 보러 오고 싶다고 말한다. ‘천하제일교’라는 다리는 봉우리와 봉우리를 잇는 천연의 다리인데, 자연의 위대함에 전율감마저 느끼게 했다. 불심 깊은 사람들은 그 다리 건너 마련된 기도처에 기도를 하고는 기념으로 자물쇠를 사서 자기의 이름을 새겨 주변 난간에 달아두고는 잠가 놓았는데 그 매달린 자물쇠의 수효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참다운 불심이 왜곡되면 그렇게 기복신앙으로 흐를 수 있겠다 싶었다.

원가계 코스 곳곳에서도 장사꾼의 ‘천 원 천 원’하는 소리는 이어지고 있다. 구운 밤을 한 아름 건네면서, 부채 몇 개를 건네면서 물병 두, 세 병을 건네면서 모두 천 원이니 사 달라고 한다. 기가 막힌 장면이다. 한 사람이 사면 주변의 사람들도 모여들어 자기 것도 사달라는 식이다. 천하제일교를 막 지나는데 잠든 어린 아이를 업고 휴대폰 고리를 파는 한 아낙이 또 우리 일행을 향해 흥정을 한다. 가지고 있는 것 모두 줄테니 천 원을 내란다. 토담이 그것을 샀다. 그리고는 이내 여러 동료들에게 기념으로 나눠준다. 나도 받았다. 마지막으로 다 판 아주머니는 손을 털고 미련 없이 그곳을 떠났다. 천 원의 매상을 올리기 위해서 그렇게 집착을 보였던 여인의 앳된 얼굴이 아직도 긴 여운으로 남아 있다. 또 어떤 곳은 어린 소녀 둘이 우리 민요인 ‘아리랑’을 노래하고 소년이 익숙한 솜씨로 해금을 연주하면서 일행들이 머물기를 유도했다. 그 장면에서는 우리들도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맥주 몇 병과 안주, 커피, 기념품을 사서 그들이 제공하는 나지막한 의자 위에 앉았다. 의자가 매우 인상적이었다. 무심코 보았던 의자였는데 그 지방의 어디를 가도 비슷한 모양의 나무 의자가 자주 눈에 띠는 것으로 보아 과거 우리나라 학생들의 각진 나무 의자에 대응되는 의자인 셈인데, 우리 것과는 사뭇 다르게 각진 곳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것이 특징이다.

원가계 일대를 도보로 한 바퀴 돌고 나니 마이크로 버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하룡공원’으로 안내하는 버스였다. 일행은 실은 버스는 10여분 쯤 달려가더니 ‘공산당원 선봉 시범교육기지’라는 표지가 있는 하룡공원 입구에 내려놓는다. 공원까지 가는 길에 잡상인들의 호객 행위가 또 극성이다. ‘천원천원천원’ 계속 귀를 자극한다. 바지 하나만 달랑 입고 땟국이 질질 흐르는 10살 박이 정도의 어린이 두 명이 푸대를 하나씩 들고 우리들 곁에 붙어 섰다. 물병을 다 쓰면 그것을 얻어보겠다는 심사다. 푸대 안에는 빈 병들이 반쯤 차 있다. 우리들이 들고 있는 물병의 물을 다 마셔 버리고 버리기를 바라고 저렇게 따라오고 있는 것이리라. 그들 중 한 명은 두 손이 모두 육손인데 보기가 얼마나 안쓰럽던지 토담에게 사진기를 맡겨 두 아이를 모델로 해서 찍어달라고 했다. 아이들은 주저없이 카메라 앞에 서서 기꺼이 모델이 되어 주었다. 모델료를 지불해야 할 것 같았다. 육손이에게 천 원을 꺼내 주었더니 ‘쎄쎄’하며 무지무지 좋아한다. 다른 녀석은 벌써 저 만큼 내달린 뒤라 줄 기회를 놓쳐 버리고 말았다. 불쌍한 마음에 관광객들이 던져주는 돈을 모으는 재미에 학교도 안 가고 저렇게 거지같이 생활한다면서 가이드는 돈을 주지 말라고 말한다.

천자산 삭도는 단숨에 우리를 아래로 내려놓았다. 그러나 케이블카 안에서 바라보는 주변의 풍광은 최고의 선물이었다. 전■후■좌■후의 빼어난 경치를 한 눈에 보여주었기 때문에 그 짧은 하강의 순간을 잊을 수 없다. 카메라에 담아 그 장관을 담아보려 했지만 제 맛을 살려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이젠 마이크로 버스를 타고 무릉원구 거주지역 주차장까지 내려가는 길이다. 마이크로 버스 기사는 눈치 빠르게 한국 가요를 담은 음반을 틀어놓는다. 티비 모니터에서는 뽕짝 풍의 메들리 음악과 화면이 나오고, 기분 좋은 동료들은 벌써 콧노래로 따라 부르는가 싶더니 합창으로 노래를 부르고 박수를 치면서 장단을 맞추기에 바쁘다. 흥겨움이 잔뜩 묻어나는 노래는 계속되고 있다. 운전 기사도 즐겁고 신명나 보였다. 낯설지 않은 나무들이 차창 밖으로 보인다. 칡덩굴이 나무를 타고 오르는 것이 보였고, 넓적한 입을 자랑하는 오동나무도 있다. 우리나라 정원수로 쓰이는 자귀나무도 간혹 보이고, 특히 편백나무는 일종의 군락을 이루는가 싶더니 어느 지점에선가부터 가로수로 끊임없이 이어져 있다.

그날 저녁 장가계시로 돌아와 저녁 식사를 하고는 우리 일행들은 예정에 없는 시내 관람을 시도했으나 사정이 여의찮아서 결국 호텔 뒤에 있는 연회장에 술자리를 마련했다. 피곤함도 있겠지만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과의 어울림 또한 빼놓을 수 없는 순서인지라 아쉬운 대로 일행 모두는 그 분위기에 빠져들 수 있었다.

3개 조로 나누어 시작한 술자리가 어느 덧 시간이 흐르면서 흥겨운 노래가 흘러나오고 걸쭉한 재담이 이어지면서 광란의 시간으로 이어져 갔다. 천연덕스런 구 선생님의 뱀장사 연극과 최선생님의 빈물병 장단, 강선생님의 ‘아자씨 천원’ 흉내 버전은 흥을 돋구기에 충분했고 이어지는 노래와 춤은 서빙하는 중국인들에게도 좋은 구경거리가 되었는지 힐끗힐끗 바라보면서 즐겁게 웃는 장면이 목격되었다.

공식적인 행사를 끝내고도 못내 부족했던지 또 일부는 시내로 진출하자고 한다. 야시장을 구경하고 싶은 마음들일 것이다. 중국인들의 저자거리 문화를 직접 경험해 보고 싶은 욕심을 누가 막을 수 있을까마는 밤이 너무 깊었고 지금 가도 철시를 다 했다고 하니 차라리 어제 들렀던 버드나무 집에서 여흥을 즐기자는 게 중론이다. 제 2부가 시작된 것이다. 나의 평상심이 흔들린 것도 그 자리에서였다. 나도 모를 흥분에 몸이 흔들렸고 행동에 막힘이 없었고 무슨 말인지는 모르나 거침없이 내뱉었던 것 같다. 평상시 말이 없는 터라 혹 무슨 실수라도 하지 않았을까 모를 일이다. 이럭저럭 파하고 숙소에 돌아왔을 때는 파김치가 되어 있었다.


장가계 둘째날이다. 오늘 하루 종일 장가계를 다시 한번 둘러보고 저녁 식사 후 북경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기로 되어 있다. 전날에 잠을 설친 탓에 잠을 깨기가 쉽지는 않았다. 호텔 뷔페식으로 아침을 해결하고 어제 달렸던 그 길을 다시 한번 가야 했다. 오전에는 장가계 입구부터 펼쳐지는 금편계곡과 십리화랑을 둘러보고 오후에는 석회동굴인 황룡동굴을 관람하는 것으로 예정되어 있었다.

금편계곡은 그들 말에 의하면 세계에서 제일 아름다운 협곡이라고 하는데, 우리 나라의 아기자기한 계곡과는 딴 맛이었다. 깎아지른 듯한 벼랑 아래로 석간수가 흘러가면서 계곡을 이루는데 돌기둥과 산봉우리들이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하늘을 받치고 있는 형상이라 전날 본 원가계의 이미지와는 정반대였다. 돌길을 따라 25분 정도 걸어가 봤는데 가도 가도 같은 길의 연속이었다. 기념 삼아 사진 몇 장 찍고 내려와야 했다. 가이드와 약속한 시간이 된 탓이고 그 감흥도 이젠 전날 같지 않았다. 다들 예정보다 일찍 내려와 기념 사진 찍기에 바쁜 모습이었다. 한나라 때의 유명한 대신이었던 장량의 묘라는 현판이 하나 있는데, 이곳에 쫓겨와 살다가 어느 곳엔가 묻혔다고 하는데 정확한 위치는 아무도 모른다고 한다.

다시 버스를 타고 내려오다가 '십리화랑'이라는 곳에 내렸다. 도보로 왕복 1시간을 걷거나 꼬마 열차를 타고 왕복하면서 올려다보는 기암괴석의 조화를 감상하는 코스인데 식지를 길게 펴놓은 모양의 바위, 약초 캐고 돌아오는 수염 달린 할아버지의 모습, 한 가족의 단란한 모습, 큰 언니는 아이를 업고, 둘째 언니는 아이를 안고 막내는 임신을 한 형상의 세자매 바위 등의 기암괴석을 여유있게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십리에 걸쳐서 온갖 이름의 바위 그림을 감상할 수 있는 곳이라서 '十里畵廊'이라 했는가 보다.
아무리 좋은 경치도 자꾸 보면 그 감동이 줄어드는 법, 우리는 자연 속에서 살 수만 없는 바쁘디 바쁜 뜨네기들, 적당한 때 그 자연에서 벗어나 주는 것도 겸손한 미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천자산 지구를 벗어났다. 언제 기회가 있으면 좀더 여유있게 찾아봐야 할 것 같았다.

점심은 ‘한립식당’ 이라는 식당에서 준비를 했다. 얼마 전에 개업한 식당이지만 음식 솜씨가 좋다고 소문이 나서 요즘 많이 찾는다고 한다. 들어가 보니 제법 넓직한 홀이라서 수백 명이라도 한꺼번에 들어갈 수 있을 것 같다. 사실 따지고 보면 음식 맛은 어디를 가나 별 차이를 모르겠다. 식성이 좋은 나에게는 어떤 음식도 문제되지 않으니까.

오후 관광은 다리 품을 많이 팔아야 하는 코스다. 백룡동굴이라는 석회암 동굴 탐방인데,
높고 낮은 동굴 안을 2시간 정도는 헤매고 다녀야 한다. 국내의 웬만한 동굴은 답사해 본 터라서 그다지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다만 규모가 엄청나다고 하니 색다른 분위기에 젖어보겠다는 생각으로 굴속으로 들어갔다. 동굴 속에는 창고, 강물, 폭포, 못, 홀, 廊 등이 곳곳에 있다고 하는데 확인해 본 바로는 동굴의 크기와 모양, 석회수의 이동 여부에 따라 의미를 그렇게 부여했을 뿐이지 석회동굴 본연의 자연 그대로의 공간이었다. 아래로 자라는 종유석은 거의 찾아볼 수 없고 아래서 위로 자라는 석순이 대부분인데, 그 모양과 크기가 각양 각색이다. ‘정해신침(定海神針)’이라는 석순은 무려 그 길이가 19.2미터, 직경이 10센티인 투명한 침이 천정까지 거의 닿아 있다. 중간 부분이 가늘어 혹시 부러질지도 모른다면서 1998년에 인민페 1억 위안의 보험에 가입되어 있다고 한다. 또 특이한 것은 동굴 안에 강이 있어 800미터 정도를 보트를 타고 이동하는 것이었는데 동굴이 개발된 뒤 필요에 의해 어느 한 부분을 막아서 인공적으로 조성한 것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배로 이동하면서 바라보는 동굴의 모양은 자연 그대로라기 보다는 인공이 많이 가미된 것 같아서 거슬렸고, 물 속에 손가락을 넣어 만져보니 미끄럽기가 물먹은 비누를 만지는 것과 같다.

이리저리 구경을 하다가 동굴에서 나오니 여름 햇빛은 더욱 강렬하고 숨이 막힐 정도로 덥다. 다시 시원한 동굴 안으로 들어가고만 싶다. 한여름엔 시원하고 한겨울엔 따스한 것은 그 무슨 조화인가? 일정한 온도를 유지시켜 주는 동굴의 비밀을 새삼 논하지 않더라도 그 변함 없는 한결같음은 엄청난 매력임에 틀림없으리라.

동굴에서 나와 주차장까지 가는 길은 잡상인들로 그득했다. 또 ‘천 원 천 원’ 하는 소리가 또 여기저기서 들린다. 나이 어린 소녀가 그 틈에서 조르르 다가와 조막손을 내밀며 뭔가를 사달라고 조른다. 시선을 애써 외면하고 말았다. 나 자신의 냉정함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가슴이 아팠다. 햇살도 더욱 따가왔다.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으로 부지런히 걸었다. 주차장엔 이미 동료들이 거의 와 모여 있었다. 가이드는 선심을 쓰려는 듯 더위에 지친 우리들에게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사 준다. 즐겨 먹던 한국 아이스크림과는 맛이 다르다. 질이 떨어지는 달콤함이라고나 할까? 주변의 지저분함과 느끼함 때문에 단맛도 몰랐다. 가이드는 또 예정된 쇼핑 장소로 우릴 안내한다. 중국 정부에서 관광객들을 위해 좋은 의약품을 제공하고 여행의 피로를 풀어주기 위해 발 맛사지를 해 주는 곳이라는데 부담없이 그냥 가면 된다고 한다. 입에 발린 말이라 믿을 수가 없다. 발맛사지를 공짜로 해 주고 약을 마지못해 사게 하려는 장삿속을 왜 모르랴? 그 속내가 얄미웠다. 여하튼, 우리는 그들이 안내하는 허름한 곳에 들어가 앉게 되었다. 관리자로 보이는 사람이 들어와 정중히 인사를 하고는 발맛사지를 해 줄테니 마음 편히 받으라고 한다. 우선 맛사지용 약품을 탄 따스한 물을 그릇에 담아 개인별로 드릴테니 양말을 벗고 그 안에 담가 보라고 요구한다. 성의를 무시할 수 없는 분위기라서 요구대로 일사불란하게 그렇게 했다. 발을 따스하게 하는 동안 약품을 소개한다고 하면서 그 절대적인 효능을 자랑하기 시작한다.

할 말이 끝나자 스무 살 안팎의 젊은 총각 처녀들이 우리 일행 수만큼 일제히 들어와 일행의 앞에 앉더니 약물에 불려있는 우리들의 발을 수건으로 닦아내고 능숙한 솜씨로 주무르기 시작한다. 우리 얼굴을 쳐다보면서 어서 빨리 약을 사달라는 표정이다. 당장 주문하면 곧장 갖다 주는데 뭘 그리 주저하느냐는 눈치이고, 사 준다면 더 확실하게 서비스를 제공하겠다는 태도다. 그러나 나는 냉담했다. 아무 필요 없는 약을 왜 산단 말인가? 상대방도 마음을 읽었는지 태도가 바뀐다. 맛사지를 하고 있는 손가락의 힘과 태도도 처음과는 다르다. 서로 어색해서 견딜 수 없는 분위기다. 다행히 난 선글라스를 끼고 있어서 저들이 나의 눈을 들여다볼 수 없으니 다행이다. 그러나 너무 싫다. 마음없이 봉사하는 그들에게 발을 맡기고 있는 사실이 불편하기 그지없다.

무릉원구에서의 모든 관광 일정을 마친 일행은 전세 버스를 타고 장가계 시내로 들어왔다. 저 멀리 보이는 천문산 자락엔 커다란 구멍(비행기 4대가 날면서 지나갈 수 있는 크기)이 뚫려있는데 기회 있으면 꼭 보러 오라면서 하얀 손바닥을 내밀고 있는 듯했다. 예정된 곳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북경 발 비행기를 타기 위해 장가계 비행장으로 향했다. 가이드의 애교 섞인 방송이 또 흘러나온다. 다음에도 자신을 잊지 말고 다시 찾아 주었으면 좋겠다는 의례적인 인사를 하고 있다. 그 진실성이 잘 느껴지지 않아서 불만이지만 다른 동료는 그녀에게서 어떤 느낌을 받았을지 궁금했다.

베이징으로 향하는 국내선 비행기는 저녁 9시 35분 출발 예정이었으나 11시 20분은 되어서야 출발했다. 두 시간 가까이 연착된 셈이다. 북경의 숙소에 도착한 것은 새벽 3시가 되어서였고, 그 피곤함을 소주 한 잔으로 달래고 몇 시간 뒤의 북경 여행을 준비해야 했다.


* 북경 여행은 똑같은 코스를 세 번이나 반복했기에 여기서는 기록하지 아니함 *
< 이후의 여행코스는 다음과 같다. >
만리장성 ■ (북경 요리, 오리구이) ■ 천안문 광장, 자금성, 이화원 ■ (동오사조관 비단 쇼핑센타) ■ 저녁 식사(만주족이 경영하는 현지식) ■ 일찍 잠자리에 취침 (다음 날 새벽 4시에 모닝콜 대비) ■ 조식(05:00) ■ 북경 공항 도착(06:00) 출국 수속 ■ 북경 출발(08:10) ■ 김해 국제 공항 도착(11:25), 입국 수속 ■ 포항 도착(14:30) ■ 환여동 우리 회 식당에서 점심 식사하면서 마무리 ■ 귀가
메모 : 2005.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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