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토요일 12시 30분 경, 대구 포항간 고속도로를 질주하다가 청통 휴게소에서 라면에 공기밥을 말아먹는 것으로 점심을 때우고 다시 달려 경부고속도로를 경유 중부내륙고속도로에 차를 잠깐 얹으니 어느 새 문경 새재를 넘고 있었다. 지난 2월 임꺽정의 작가 홍명희 생가를 찾고, 문경새재를 걸어서 왕복했던 기억이 새로웠다. 고향 충주도 지났다. 중간에 내려 고향집을 찾아들고 싶었지만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다. 오늘의 목적지는 여주, 양평 지역의 역사 기행이 아니던가?
여주에 닿자마자 맨 먼저 찾은 곳은 명성황후의 생가였다. 태어나서 8살까지 자랐다는 생가와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결국 을미사변으로 일본 낭인의 칼에 쓰러져 죽기까지의 모습을 보여주는 기념관을 둘러보았는데 당시의 역사적 흐름을 정리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던 것 같다. 운현궁을 드나들다가 대원군의 눈에 들어 며느리로 발탁되었으나 둘 사이의 정치적 갈등으로 결국 원수로 살기까지의 일련의 휘말림이 결국 조선의 패망으로까지 연결된 것 같아 마음이 내내 무거웠다.
하늘이 잔뜩 흐렸다. 비가 온다는 예보대로 금방 비가 내릴 것만 같다. 근데, 하늘을 올려다보니 한 사람이 바람개비를 등에 짊어지고 패러글라이딩을 즐기며 유유히 날고 있었다. 야, 저 기분은 어떨까? 겨드랑이에 날개가 되어 신선이 된다면 나도 비슷한 기분을 느낄 수 있으려나? 누구는 꿈속에서 날개가 돋아 날아봤다는데......
여주 대교를 건너자마자 오른켠으로 조금 가니 유명한 신륵사(新勒寺) 안내판이 눈에 들어 왔다.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여느 절과는 다르게 깊은 산을 거부하고 민가에서 매우 가까운 강가에 위치해 있었다. 여강(驪江)이라 불리는 남한강 조포(潮浦)나루가에 호젓이 앉아 중생들을 맞고 있었다. 구태여 힘들여 오르지 않아도 되니 좋긴 좋다. 원효대사가 지배층 위주의 귀족 불교에 반기를 들고 ‘대중 속으로’를 외치면서 불교의 대중화에 힘쓸 무렵에 창건된 절이 아닐까 한다. 평범한 사람들에게 사랑 받았을 절이었음에 틀림없다. 절의 제맛은 깊은 산중에 있는 절이라며 평가 절하했을 법도 하지만 내게는 아주 인상적인 절이다. ‘서왕가’를 지은 당시의 선승 나옹화상이 수도하다가 입적한 절로도 유명하고, 가전체인 ‘죽부인전’의 작가 이곡 선생과 그의 아들 목은 이색 선생에 얽힌 신륵사대장각기비(보물230호)가 당시의 사연을 말해주고 있으며, 세종대왕릉인 영릉이 가까이 있는 터에 왕궁 고위 관리들의 출입도 잦았던 절로 추정되며 고종의 비인 명성왕후가 어릴 적 어머니 손잡고 자주 왔을 것만 같다.
신륵사 조사당(보물 180호), 신륵사다층석탑(225호) 등 7개의 보물을 간직하고 있는 절이었다. 보물적 가치라야 의미를 부여하기 나름이겠으나 오랜 세월을 간직한 역사가 찾는 이의 마음을 참으로 풍성하게 했다. 역사의 부침이 고스란히 살아있는 절답게, 신륵사는 수많은 사연을 담아서 흐르는 강물에 흘리고 있는 것 같았고, 법당 안의 부처님은 참으로 자비하셔서 중생들의 원과 한을 다 받아들였던 것 같고, 오늘도 부처님 앞에 선 스님은 찾아온 어느 보살님의 49제 소원 성취를 위해 목탁을 두드리면서 진혼 염불을 하고 있었다.
수리 복원 중에 있는 신륵사다층전탑(보물 226호)과 바위 위에 선 삼층석탑은 강바람 맞으며 지난 세월을 반추하는 듯했고 앞으로 다가올 외로움, 괴로움, 어떤 고통일지라도 순순하게 받아들이겠다는 듯 부처님의 모습을 닮아 있었다. 곳곳에 피어오르는 노란 산수유 꽃과 그 안에서 웃고 있는 여인네의 미소가 어우러져 저 멀리 떠 있는 황포돛배 만큼이나 멋을 더하고 있었다.
신륵사에서 다시 여강을 건너 세종대왕의 능(영릉)을 찾았다. 근데 오후 5시 이후는 개관을 하지 않는단다. 어쩔 수 없이 담 밖에 있는 안내도를 보면서 상상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눈앞에 두고 그냥 돌아서려니 조금 아쉬웠다. 30여 년이 넘는 재위 기간 동안 그 분의 숱한 업적은 역사에 기록되어 영원히 추앙되고 있지만, 이 세상에 아무것도 남기지 못하고 사라질 것만 같은 내 자신은 참으로 작아 보였다.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효종대왕릉이 있었는데 외관상의 구조는 영릉과 비슷했다. 병자호란의 결과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가야 했던 치욕을 되갚기 위해 북벌을 꿈꾸었던 왕, 그러나 연암 박지원과 같은 실학파들에게 허무맹랑한 것이라면서 여지없이 비판받기도 했던 북벌, 과연 당시의 주장대로 그럴 만한 능력과 의지가 있었던가. 아무리 왕이 의지를 가지고 하려고 해도 신하들이 따라주지 않으면 불가능했던 것, 결국 효종의 승하와 함께 정치적 실패로 끝나지 않았던가? 침략 받은 횟수가 990여 회가 넘는다는 그 치욕의 역사가 요즘 따라 왜 이리 가슴을 헤집는지 모르겠다. 침략의 원흉인 일본은 또 마수의 손길을 내밀고 있고 역사 교과서를 의도적으로 왜곡하고 그들의 침략을 미화시키는 작업을 착착 진행시키고 있고 더구나 교활한 미국의 비호까지 받는다고 하니 기가 찰 노릇이다. 아무도 믿을 수 없는 국제 정세 속에서 그렇게 당하고만 있어도 되는지 참으로 아득하다. 툭하면 정치인의 입을 통하여 독도 망언을 일삼는 일본 극우세력들의 파렴치한과 고구려의 역사를 서슴없이 왜곡시켜 그들 한족의 역사에 편입시키려하는 중국 역사학자들의 뻔뻔스러움에 대하여 호된 꾸지람과 매를 들 수도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현실이 너무 애처롭다. 국수주의나 민족주의를 표방하는 시대는 아니라 하더라도 다른 나라 눈치보지 말고 외교적 발언도 소신껏 피력할 수 있는 정치인들은 왜 없을까? 국제 정세와 관련 동북아의 균형자론을 설파하면서 나름대로의 발언권을 갖자는 대통령의 소신 발언에 대해 격려는 못해줄 망정 호되게 나무라는 듯한 정치인들을 보면서 씁쓸해지는 마음을 숨길 수가 없다.
땅거미가 질 무렵 나는 고달사지에 서 있었다. 절은 허물어져 빈터만 넓게 펼쳐져 있는데, 절 가운데 남은 원종대사의 귀부와 이수(본 비석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있음)는 천년의 역사를 품고 금방이라도 기어 나올 것 같은 기세다. 조금 아래 위치한 연화대는 주인을 잃고서 망연자실해 있고 언젠가 올라앉을 석가모니 부처님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국보 4호 원종대사 부도가 어딘가 있는 것으로 알고 왔는데 보이지 않아 한참을 돌아보니 산 쪽으로 두 기가 조금 떨어진 채 우람하게 서 있었다. 산 아래쪽은 보물이요, 산 위쪽으로 숨어있는 게 국보였는데 부도의 전체적인 형상은 비슷했으나 조각의 정교함에서 국보와 보물은 차이가 확연하게 구분되었다.
고달사지 곁으로 지나는 지방도로 고개를 하나 넘으니 37번 국도가 이어진다. 날은 어두워져 비를 흩뿌리고 있다. 허기가 느껴진다. 청국장을 파는 식당이 보이길래 무작정 들어갔다. 몇몇 아저씨들은 술 한 잔 시켜 놓고 무슨 이야기를 주고받는데 경기도 특유의 말투가 옛날에 많이 들어본 말이라 정감이 간다. 경상도 말투에 익숙해 있던 터라 오히려 반갑다. 하루를 끝내고 동료들끼리 주고받는 푸념 속에는 그들의 삶이 느껴진다. 요즘 젊은 사람들 못 쓰겠다며 뭐라 하는데 4, 50대의 장년들임에 틀림없다.
청국장 맛이 기대 이상으로 좋았다. 어머니의 손맛이 느껴질 정도의 만족감으로 공기밥 한 그릇을 더 시켜서 배를 그득 채웠다. 식당 문을 나왔을 때는 제법 빗줄기가 굵어졌다. 길가의 어느 모텔을 잡아 여장을 풀었다. 전날의 수면 부족과 하루의 바쁜 여행 탓으로 난 금방 잠의 수렁에 빠져들고 말았다.
다음 날 아침 7시쯤 기상, 짐을 꾸려 다시 여행을 시작했다. 엊저녁 내내 비가 내렸는지 온 천지가 흠뻑 젖어 있다. 그래도 기분은 좋다. 비가 오면 오는 대로 맑으면 맑은 대로의 그 좋은 분위기를 느끼면 되는 것이다. 낯선 길을 달리는 즐거움은 누구도 방해할 수 없는 나만의 것이 아닌가? 양평의 두물머리 양수리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곳 양수리(두물머리), 관광객을 배려한 산책로가 강가로 길게 이어졌는데 안전사고 방지용 철조망이 눈에 거슬린다. 한참을 안으로 들어가니 수백년 묵은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늘씬하게 서 있는데, 팔당 호수의 원경과 어울려 한 폭의 그림으로 나그네를 사로잡는다. 여기서 얼마 안 되는 거리,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 한 바퀴 휘돌아나가는 곳에 다산 정약용 선생의 유적지가 있다. 행정구역상으로는 남양주시 조안면(鳥安面) 능내리에 속해 있단다. 빨리 그곳을 찾고 싶은 생각에 양수대교를 후딱 건넜다.
우리나라 천주교를 태동하고 실학을 집대성한 마을인 다산의 유적지는 잘 정돈되어 있었다. 대실학자의 사상을 기리고자하는 정부 당국의 배려와 지방자치단체의 정성이 느껴지는 곳이었다. 유적지 입구문을 들어가면 생가인 ‘여유당(與猶堂)’이 보이고 뒤로는 다산의 묘소가 있는 동산이 보인다. 눈을 조금 왼편으로 돌리면 선생님을 모신 사당 문도사(文度社)가 있고 입구 가까이의 왼편에는 다산 기념관이 위치하고 있다.
다산 정약용은 18년 간의 기나긴 유배생활을 끝내고 57세 되던 해(1818년) 가을 백발이 성성한 초로가 되어 고향집 ‘여유당’으로 돌아온다. 유배지의 미완으로 남아있던 <목민심서>를 이곳에서 완성하고 <흠흠신서> 등의 저작을 여기에서 내놓았던 것이다. 백성들의 살림을 살찌우고 나라를 발전시키기 위한 방안으로 실용적 가치관으로의 변혁과 사고 체계를 변혁을 강조했던 다산, 오늘날에도 그의 사상은 유효하다고 봐야 한다. 그저 역사의 인물로만 박제화될 수는 없는 것이다.
여유당 뒷문을 나와 생가 바로 뒤편 언덕 위에 있는 다산의 묘소를 찾았다. 다산은 워낙 오랜 세월 유배지에서 보낸 터라 죽어서는 멀리 떠나지 아니하고 사랑하는 가족과 고향집을 살피고자 집 뒤에 묻혔다. 지관에게 명당을 물어서 무덤을 쓰는 관례를 택하지 않고 명당 여부를 따지지 않고 소신껏 생가 뒤 동산에 묻히고자 힌 것이다. 묘비에는 “도공다산정약용 숙부인풍산홍씨 지묘”라 새겨져 있어 부부 합장묘임을 알 수 있었다. 오직 백성과 나라를 걱정하시며 열정으로 사시다 가신 겨레의 스승이기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묘앞에 빗물이 고여있지 않았다면 큰절을 몇 번이나 올렸을 것 같다.
다산 기념관은 다산의 영정과 실학사상이 담긴 <목민심서>, <흠흠신서>, <경세유표> 등의 저서 및 집필 기록, 산수화 등을 전시하고 있었다. 수원성 축조 시 사용되었던 거중기와 녹로를 그대로 재현해 놓았고, 몇 달 전 남도 답사 때 돌아본 바 있는 강진의 다산초당과 천일각 등도 조형 모형을 만들어 이해를 돕고 있었다.
북한강을 따라 47번 국도를 달리니 절로 흥이 났다. 그 유명한 경춘가도 위를 나도 달리고 있는 것이다. 서울에서 춘천에 이르는 국도가 좋다는 사람들의 얘기를 언젠가 들은 적이 있고 그 길을 꼭 달려 보리라 한 꿈이 이뤄진 것이다. 목표 지점은 춘천이다. 소양강 댐 위에 다시 올라보는 것이다. 물은 어느 정도 차 올랐을까? 시간 내어 청평사 절까지 유람선 타고 들어갔다 나올 수나 있을까?
청평을 지나 가평이란 곳에 이르렀다.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가평 우체국에서 일하고 있을 홍원근 씨가 바로 그다. 남전 형이 주인으로 있는 카페를 통해 알았지만 아직 얼굴은 전혀 모른다. 글쓰기를 매우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툭하면 메일을 통해 자신의 글을 보내줘서 글 읽는 재미를 안겨 주던 사람이다. 참 좋은 일을 몸소 실천하며 사는, 예수 같은 사람이다. 언젠가 틈내서 가평으로 놀러오라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러나 그를 만날 만한 여유는 없다. 대학교 4학년 때, 국어교육과 친구들과 졸업여행차 들러 놀던 추억의 남이섬(조선 세조 때, 여진족 토벌에 공이 컸던 남이 장군의 묘소가 있던 곳이라 그렇게 불렀다고 함. ‘겨울연가’란 드라마 촬영장으로도 유명함)도 그냥 지나쳤다.
의암댐이란 이정표가 눈에 띄었다. 들러봐야겠다는 생각으로 핸들을 틀었다. 가까이 가 보니 자그마한 댐이었다. 댐 안쪽 가까이 다리가 하나 놓여 있어서 차를 타고 건너니 춘천댐, 화천댐으로 이어지는 길이 또 이어진다. 내친 김에 또 달렸다. 사통팔달 아니랴? 가다 보면 또 볼만한 곳이 있을 것 같다. 의암호 건너 멀리 춘천 시내의 빌딩들이 눈에 들어왔다. 호수가로 구불구불 이어진 길은 나그네의 발걸음을 한결 가뿐하게 할 뿐이다. 얼마를 달려갔을까? 고동색 바탕의 명승지 표시 간판에 신숭겸 장군의 묘역이라는 안내판이 왼쪽으로 보인다. 그냥 지나칠 수 없다. 비포장도로이긴 하지만 2.5 킬로미터 정도 들어가니 장절공(莊節公) 신숭겸 장군을 모신 사당과 묘소가 있었다. 도로 확장공사로 주변이 어수선했지만 사당 주변은 깔끔하게 단장되어 있었다. 장절공 신숭겸은 고려의 개국공신으로 추앙 받았고, 후백제 견훤과의 팔공산 전투에서 죽을 위기에 처한 왕건을 급히 피신시키고 대신 장렬히 전사했던 사람이다. 고려의 예종 임금도 ‘도이장가’를 직접 지어서 죽음을 택한 김낙과 신숭겸 장군을 애도하는 노래를 지어 그들의 충성심과 절의를 찬양한 바 있다.
춘천을 대표하는 음식은 역시 닭갈비와 막국수 아닌가? 오늘로서 춘천 3번째 방문인데, 예외없이 막국수를 시켜 먹어 봐야 한다. 식당 간판마다 닭갈비와 막국수를 내걸고 있다. 소양강댐 도착 10분 전에 있는 어느 한적한 음식점에 들러 점심 겸하여 막국수를 시켰다. 맛이 기막히게 좋았다.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먹어 치웠다. 조금 더 먹고 싶었지만 참았다. 쫄깃쫄깃한 면발에다 갖가지 양념을 넣고 약간의 육수를 부어 버무린 막국수는 입맛을 돋우기엔 안성마춤이 아닐까 한다. 매력적인 음식이다. 식당 주인에게 물으니 음식점마다 그 독특한 맛이 다 다르다는데 내가 느끼기엔 그게 그거다. 여하튼 외지인의 입맛을 자극하기에는 충분했다.
댐 아래에 주차하고 셔틀버스를 타고 댐 위를 향해 오른다. 수문이 열려 하얗게 낙하하는 물보라와 거품, 그 위에 뜨는 무지개를 예상했건만 소양강댐은 그 위용을 보여주지 않았다. 높이 500미터의 사력식 댐으로 대규모를 자랑하는 댐이라지만 담수된 물이 적은 탓으로 오히려 초라했다. 팔당 호수, 청평 호수나 의암 호수에서 느껴졌던 그득함이 없다. 물이 없어 선착장도 수십 미터 아래로 내려가 있어서 한참을 걸어 내려가야 했다.
청평사 절까지 가 보기로 했다. 배는 오후 4시 30분까지 수시로 운행을 하니 시간상으로 크게 쫓기지 않아도 된다. 3,000원을 주고 외로이 왕복권을 끊었다. 배 안은 온갖 사람들로 가득 찼다. 쌍쌍이 다정하게 짝을 데리고 있는 것 같다. 오봉산(779미터) 등산객들과 청평사를 잠시 찾아드는 사람들일 거다. 볼을 스치는 강바람이 춘기를 머금고 봄내음을 흘리고 있었다. 미끄러져 온 뱃길을 내리니 청평사까지는 30분 정도 걸어가는 거리이다. 햇살은 따스하기만 하다. 한발한발 오봉산 쪽으로 향해 걸으니 봄처녀의 설레임과 뭐가 다르랴. 지나가는 사람들의 표정도 다들 봄 풍경을 닮았다.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모를 계곡의 물은 크고 작은 바윗돌을 매만지고 감싸며 이리 딩굴 저리 딩굴 소양호로 흘러들고 있다. 깊은 못을 만들어낸 구성폭포의 힘찬 하강이 인상 깊다. 깊고 큰 산의 장엄함에 비할 바야 못되지만 많은 수량으로 한 번에 내리붓는 거침없음이 대단하다. 짧은 하강임에도 많은 수량이 저렇게 깊은 확을 만들어냈지 싶다. 어딜 가나 그렇게 자연의 위대함을 알게 되는데 상대적으로 나 자신은 별 것 아닌 게 된다. 어쩌면 자연의 횡포가 아닐까?
청평사는 고려 광종 24년(973)때 창건된 절이라 하니 천년 고찰임에 틀림없다. 진락공 이자현, 매월당 김시습 등이 머물렀던 곳이며, 진락공이 조성했다는 우리나라 정원의 효시인 고려 정원(高麗庭園)과 구성 폭포, 공주탕 등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계곡을 갖고 있는 것이다. 금당 왼켠으로는 보호수로 지정된 800년 수령의 주목이 우람하게 서 있다. 건강한 나무다. 300년 터울의 주목이 또 한 그루 경호하듯 그 뒤에 솟아있는데 청평사의 역사를 줄기줄기 가지가지에 간직하고 있는 것 같았다. 국보로 지정되었던 극락전은 6.25때 불타 없어지고, 그 형태만 복원되어 있고, 또 국보였던 회전문은 지붕이 타버려서 가치가 격하 이젠 보물로밖에 인정받지 못한단다. 다람쥐 한 마리 먹이를 좇아 회전문 주변을 오르락내리락 온갖 재롱을 부리고 있다. 마음 좋아 보이는 처사 한 분이 그 놈을 향해 셔터를 누른다. 절 뒤로 병풍처럼 둘러쳐진 산세가 쪽빛 하늘을 배경으로 한 폭의 그림이다. 송순의 시조 한 수가 연상된다. ‘십 년을 경영하여 초가삼간 지어내니/ 달 한 간 나 한 간 청풍 한 간 맡겨두고/ 강산은 들일 곳 없으니 둘러두고 보리라.’ 속세에서의 소박한 삶과, 자연을 벗삼아 살았던 선인들의 풍류가 그대로 녹아 있는 시조가 아니던가? 우리 인간들이야 잠시 이 세상을 살다가 가지만 변함없는 것은 저 자연일레라.
오늘 중으로 포항까지 달려갈 것을 생각하니 조금 발걸음이 바빠졌다. 선착장까지 잰걸음으로 내려갔다. 근데 선장은 서둘러 온 사람들의 정성을 비웃기라도 하듯 도착하자마자 도망치듯 배를 몰고는 내뺀다. 5초만 일찍 왔어도 탈 수 있었건만...... 일요일이라 그런지 배는 자주 다녔다. 30분이나 기다려야 할 줄 알았는데, 이내 또 태우러 오는 배가 있었던 것이다. 10분 정도 기다리다가 배를 타고 호수 위를 달릴 수 있었다. 소양호의 오후 햇빛은 강렬했다.
메모 : 2005.4.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