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1월 7일, 오전 9시 30분 대구 어른집에서 나와 동대구 톨케이트를 통해 고속도로에 들어서니 4차선 도로가 펼쳐졌다. 확장 공사가 끝나고 언제부턴가 개통이 되었나 보다. 탁 트인 도로가 나들이 기분을 마냥 들뜨게 했다. 시속 100킬로로는 영 성미에 차지 않는다. 과속이긴 해도 130, 140킬로의 속도라야 제격이다. 차들이 온통 경주를 하듯 달린다. 나도 뒤질세라 애마 산타모 7725에 박차를 가했고, 주인의 마음을 읽었는지 참으로 잘 달려준다. 애마와 함께 생활한 지도 4년의 세월, 달린 거리만 해도 지구의 세 바퀴 반이나 된다. 주인과 희노애락을 함께 한 녀석이라 갈수록 애착이 더 깊어지는 느낌이다.
단숨에 서울에 닿았다. 건물과 교통의 흐름부터가 사뭇 다르다. 올림픽 대로를 따라 김포방향으로 한참을 달리다 보니 오른쪽으로 가까이 여의도가 보이는데 63빌딩을 위시하여 찌를 듯한 고층건물이 즐비하다. 녹슨 구리빛 돔지붕을 자랑하는 국회의사당 뒤켠을 휘돌아 달렸다. 오늘도 한-칠레 자유무역협정(FTA) 비준 반대 농민들의 시위가 계속되고 있을 것만 같다. 국민이 뽑은 국회의원이라지만 그 기대에 못 미침은 물론, 냄새나는 검은 돈을 밥먹듯 받아챙기는 함량 미달의 구캐으원들이 득실거리는 곳이라 저 의사당 뒤통수라도 한 대 갈겨주고 싶은 심정이다. 썩을 대로 썩은 정치판이니 만큼, 오는 4월에 실시되는 총선거로 어느 정도 물갈이가 되었으면 좋겠다.
행주대교를 건널 때 시간을 보니 동대구에서 출발한 지 세 시간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다. 단숨에 달려온 서울 나들이길, 이제 시장끼가 느껴진다. 다리를 건너자마자 우회전하여 조금 들어가니 장어구이 전문점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점심 식사 때라 그런지 사람들도 많다. 늙수그레한 곱슬머리 아저씨가 안내하는 식당에서 머무르기로 했다. 정력에 좋다는 장어구이는 많은 사람들이 선호하는 음식이긴 하지만 난 오히려 꽃게탕을 하나 주문했다. 싸려니 생각했는데 무려 2만냥을 내란다. 비싸다. 비싼 만큼 더 천천히 맛있게 먹어야 했다. 서해의 연평도 근해에서 많이 난다는 꽃게, 그것을 둘러싼 남북 군인들의 서해 대전이 떠올랐고, 지금도 연평도에서 근무하는 제자인 대위 '김헌'이란 놈의 씩씩한 얼굴이 떠올라 피식 웃었다.
권율 휘하의 장병들이 나지막한 덕양산(124.9미터)에 토성을 쌓고 가파른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2,300의 병사로서 3만의 왜군을 물리쳤다는 유서 깊은 곳, 고려 때 최무선이 발명한 화차를 동원하여 100여 발의 화살을 동시에 날리기도 하고 아낙네들까지 치마에 돌을 져 나르기까지 하면서 항전했던 감동의 전쟁터, 이순신의 한산대첩, 김시민의 진주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로 알려져 있는 곳, 말로만 듣던 행주산성을 찾아 천천히 헐떡거리며 오르는 기분은 예사롭지 않았다. 맨 꼭대기에는 독재자 박정희의 휘호가 새겨진 행주대첩비가 우뚝 솟아 있는데 그의 재위 시절 역사의 현장마다 단행한 의지에 찬 성역화 사업이 오히려 역겹게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자연스러움을 애써 깨뜨리고만 너무도 도식적인 획일성에서 오는 거부감 때문이 아닐까?
덕양산 꼭대기는 군사적인 요새임엔 틀림없었다. 완만한 곳엔 토성을 쌓아 가파름을 도모했고, 그 반대편인 강쪽으로는 기어오르기가 거의 불가능하게 되어 있다. 권율은 그러한 지형지물을 너무도 훌륭히 이용한 것이다. 그곳에서 내려다보는 풍광도 아주 훌륭하다. 특히 한강의 도도한 흐름이 한눈에 들어와 답답한 가슴을 후련하게 해 준다. 수천 년을 그렇게 흘렀을 한강, 나도 잠시 서서 양천(陽川)이 주는 그윽함과 따스함에 취해 있지만 오랜 세월 얼마나 많은 시인 묵객들을 사로잡았을 것인가?
행주산성을 걸어 내려와 강을 끼고 남북으로 뻗어있는 자유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왜 '자유로'라는 이름을 붙였을까? 박정권 당시에 붙인 이름인 듯 한데 남북이 통일되게 되면 북한 주민들이 자유를 찾아 남으로 남으로 내려오라는 의미로 붙인 이름일까, 아니면 이 길을 달리면 자유를 만끽할 수 있다는 뜻일까? 여하튼 처음 달려보는 길이요, 남북 대화의 물꼬를 트게 한 역사의 길이기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음은 나만의 독선은 아닐 것 같다. 한강을 옆에 끼고 계속 달리다 보면 오른쪽으로 고양시가 펼쳐지다가 또 좀 지나니 파주시가 웃으면서 맞아 주었다. 출판사가 밀집되어 있는 출판단지가 보이는가 싶더니 자유로 왼켠 약간 우뚝한 곳에 통일전망대가 서 있고, 좀더 도로를 달리니 어느 새 한강은 서해 쪽으로 방향을 틀었고, 또 다른 강, 임진강이 같은 모양으로 흘러 내려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강 건너는 바로 북한땅 개풍군인 것이다. 강 양쪽으로는 분단의 철조망이 길게 쳐져 일정한 거리마다 초소가 서 있는데, 155마일 휴전선은 그렇게 한반도의 허리부분을 동서로 가로지르고 있을 것이다.
자유로는 계속 이어지고 있지만 잠시 문산읍으로 들어가 산타모 7725가 요구하는 가스 충전을 하고 다시 북으로 달렸다. 조금 지나니 '임진각 관광지'라는 안내 표지가 있다. 웬 관광지? 주차 요금(2,000원)을 내고 그 안으로 들어가니 4층의 하얀 건물 임진각이 덩그렇게 서 있고, 4층 옥상에는 망원경이 설치되어 북녘 땅을 바라볼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건물 앞쪽으로는 경의선 철로가 북쪽으로 연결되고 있는데, 임진각 역 다음이 도라산 역인 듯했다. 그 도라산 역은 국민의 정부 당시 김대중 대통령과 미국의 부시 대통령이 만났던 장소가 아니던가? 부시 대신, 김정일을 거기서 만났다면 더욱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남북 통일의 성공 여부를 떠나 언제쯤 저곳을 통과하는 여행을 할 수 있을까? 철마는 그렇게 달리고 싶어하건만, 그것을 막는 자 누구란 말인가? 민족주의자이셨던 김구 선생이 그리울 뿐이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우리 시대의 영웅을 애타게 그리워하고 있지 않던가?
놀이 시설까지 갖춰져 있긴 하지만 매년 명절 때 북한에 고향을 둔 이산가족들이 함께 모여 차례를 올리는 망배단과 자유의 종각이 서 있는 곳이기에 격에 맞지는 않는다. 휴전 후 만 명이 넘는 북송 포로들이 자유를 찾아 남으로 건너왔다는 당시의 '자유의 다리'가 언젠가 보수되어 똑같은 형태로 전해지고 있지만, 이젠 더 이상 자유의 다리가 아니다. 그 끝은 막혀있고 뛰어 넘고 싶지만 더 이상 갈 수 없어 이산가족들의 아픔과 안타까움을 흰 헝겊에 글씨를 써 여기저기에 걸어 놓고, 빛 바랜 헝겊글씨만 찬바람에 힘없이 펄럭이고 있었다.
임진강변 우뚝한 곳에 '반구정(伴鷗亭)'이란 정자가 두 개 서 있다. 갈매기[鷗]와 더불어[伴] 노닐만한 곳이라서 그렇게 이름 붙였으리라. 지금은 정자 바로 아래가 바로 민간인 통제선이라 출입할 수 없는 곳이지만 옛날에는 정자 아래 배를 띄워 강을 오르내리며 풍류와 멋을 한껏 누렸을 것임에 틀림없다. 서로 다투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둘 다 옳다고 애매하게 판정을 내린 世宗 당시의 명재상 황희 정승의 너그러움(?)이 그 정자에 어설프게 남아 있는 듯 했고, 그의 학문과 덕을 기리는 사당 주변의 풍광 또한 을씨년스럽기만 했다. 철조망 너머로 보이는 북한 땅을 바라보면서 몇 년 전 중국 만주 개산툰에서 두만강 건너 북한 초소를 향해 손을 흔들 때의 장면이 떠올라 그 때의 느낌을 인용해 본다.
- 군인 한 명이 우리 일행들을 향하여 두 손을 휘저었다. 우리도 약속이나 한 듯이 그곳의 병사에게 같은 모양으로 힘차게 손을 휘저으며 외쳤다. 서로 통하는 마음이 있어서일까? 남북이 하나 되는 날, 휴전선이 허물어지고 이산 가족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들이 자유롭게 왕래하고, 남한 사람들은 금강산으로, 칠보산으로, 묘향산으로, 백두산으로! 북한의 동포들도 지리산으로, 한라산으로, 설악산으로 마음껏 등산할 수 있는 날을 상상해 본다. 열 살배기 우리 아들이 나중에 군에 입대하여 이곳의 국경을 지키는 용감한 군인으로 근무하게 되어 경의선 열차를 타고 북으로 북으로 달려가다가, 혜산선 열차를 갈아타고 다시 북동쪽으로 한참을 달리고, 또다시 버스를 타고 이곳 국경까지 면회 오는 날을 상상해 본다. 50년 이상의 분단 세월의 한도 얼음 녹듯 녹아내려 한반도 삼천리 금수강산이 온통 엉기덩기 통일의 춤을 추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더 이상의 냉전도 이데올로기도 아닌 민족주의 정신으로 한 뜻 되어 민족의 저력을 세계 만방에 한껏 발휘하는 그런 날을 상상해 본다. 저승에 계신 김구 선생께서도 흐뭇하게 웃을 만한 그런 날을 상상해 본다. -
해는 점점 기울어 서녘 하늘이 붉은 빛으로 벌겋다. 한겨울의 추위가 두터운 옷 속으로 스며든다. 오후 5시경이니 곧 해는 질 것이고 이내 어둠이 찾아오리라. 자유로의 하행선은 상행선을 달릴 때의 흥분을 가라앉히기에 적당한 길 같았다. 강 건너 서산으로 천천히 내려앉는 붉은 해는 하루의 삶을 정리하듯 숙연함을 더하는 것 같고 내 마음도 덩달아 차분해지는 느낌이었다. 붉은 해넘이의 강렬한 이미지는 좀처럼 가셔지지 않는다. 그래서 이 일대를 양천(陽川)이라 했나 보다. 한강의 일부지만 해의 장관을 가장 잘 바라볼 수 있는 곳이라 그렇게 이름했는가 보다.
아! 이럴 수가? 해가 넘어가기가 바쁘게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희미하던 열엿새 달이 삼각산 쪽에서 점차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어두워 가는 서울 하늘은 아껴두었던 보배를 저렇게 한꺼번에 토해내고 있는 것 같다. 이렇게 복잡하고 멋없는 서울에서 해넘이와 달맞이의 장관을 한꺼번에 감상하게 될 줄 누가 알았으랴! 행주대교를 건너 다시 올림픽 대로로 접어드니 퇴근 차량들이 몰려들면서 도로가 복잡해지기 시작한다. 점점 주행 속도가 느려지고 가다 서다를 반복해야하는 지겨운 시간이다. 그러나 저 강 건너 서울의 달, 대로를 천천히 달려야 하는 운전자들에게 큰 위로가 되고도 남으리라.
내가 보낸 어린 시절은 서울 송파구 마천동에서였다. 초등학교 중학교를 거기서 다녔다. 근데, 오늘 30여 년만에 그곳을 찾아가야 한다. 한 달 전 내가 불현듯 보고 싶어서 아내와 함께 포항으로 당장 내려가겠다면서 일방적인 통보를 했던 친구, 나의 개인적인 사정상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어 다음에 오라고 말려야 했던 그 친구를 만나러 가는 것이다. 3년 전, 옛집을 허물고 그 자리에 4층 짜리 건물을 새로 짓고 1층은 슈퍼마켓을 운영하고 2층에서 살림을 살고 있음을 전화를 통하여 알려 주었었다. 그가 나를 갑자기 찾으려 했듯이 나도 사실 그를 갑자기 찾게 된 셈이다. 그의 이름은 승수철, 생긴 얼굴형이 흡사 역삼각형 같아서 '세모', '올챙이' 등의 별명도 가지고 있다.
자유로를 달렸던 산타모 7725는 도곡동 어느 낯선 동네 아파트 단지에서 쉬게 하고, 가장 좋은 교통 수단인 지하철을 이용하여 도곡역을 출발, 두 번을 갈아타고 5호선 마지막 종점인 마천역에 내렸다. 1974년 이곳을 떠나 대구로 이사간 이후 30년만에 처음 찾아온 것이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어디가 어딘지 모르겠다. 밤이기도 했지만 세월이 흐른 만큼 그렇게 변한 것을 어찌 탓하리! 일단 허기를 채우기 위해 어느 허름한 분식집을 찾아 비빔밥을 시켜놓고 녀석에게 전화를 걸었다. 왜 당장 집으로 오지 않고 사 먹느냐면서 핀잔을 준다. 음식을 다 들고 나서니 친구 대신 그의 아내가 차를 몰고 와서 맞아 준다. 처음 보지만 인상이 참 서글서글하고 밝아서 참 좋다. 남편이 술을 좋아하다 보니 요즘 몸이 좀 안 좋다면서 미리 귀뜸을 해 주는데, 어느 정도인지 몰라도 건강에 문제가 있음을 호소하고 있는 듯 했다. 아니나 다를까? 만나 보니 친구의 얼굴은 병색이 완연했다. 쪼글쪼글한 얼굴의 주름, 깡마른 체구가 그것을 증명해 준다. 알콜성 간경화 증세로 입원도 서너 차례 했단다. 말도 어눌해서 표현하고자 하는 말도 금방 나오지 않는다. 외로움과 스트레스 때문에 술을 한두 잔씩 하다보니 모르는 사이에 이렇게 심해졌단다. 그의 아내는 병맥주를 몇 병 가져왔고, 사과를 깎아 안주하라면서 몇 마디 말을 건네는데, 남편에 대한 애정과 사랑이 철철 넘쳤다. 그저 남편에 대한 건강이 최대의 관심사다. 자식과 식구를 생각하는 자상한 가장이라면서 남편을 칭찬하는 데 인색하지 않다. '배우자 자랑은 팔푼이'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듯했다. 오랜만의 해후인지라 그간 살아온 이야기는 끝이 없었다. 중학교 시절, 옛집의 다락방에서 타이밍(잠 안 오는 약) 먹어 가면서 시험 공부를 함께 하던 이야기, 장난치면서 웃고 울던 이야기 등을 주고 받으면서 우리는 그간의 추억 공백을 메울 수 있었고, 초등학교 5학년 시절 담임이셨던 이교상 선생님에게서 배운 노래를 함께 부를 때는 눈물까지 흘릴 뻔했다. 그렇게 친구와의 밤은 깊어만 갔고 맥주병은 하나 둘 늘어갔다.
다음 날은 광나루가 가까이 보이는 동네, 풍납동 토성을 답사했다. 토성 위를 기어올라 좌우를 조망하면서 걷는 기분이 새로웠다. 토성을 필요로 했던 당시의 옛날과 그 유적을 잘 보존하려는 오늘날의 시대 정신이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듯 했다. 토성 위를 잠시 걷고 나니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동신중학교 교정을 찾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다. 사춘기 시절 2년 반을 공부했던 학교다. 택시를 탔다.
이미 학교 주변은 옛날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많이 변해 있었다. 오피스텔, 아파트, 병원 등 고층 건물로 둘러싸인 학교였다. 학교 건물 자체는 당시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운동장 한가운데로 가 서 보았다. 4층 본관 건물 앞 운동장 조회대에 오른 전영진 교장 선생님의 사자후가 귀에 들리는 듯했다. 웅변조의 큰 목소리로 정신교육 하기를 즐겨했고, 툭하면 학생들에게 엄한 벌을 내리시던 분이었다.
서편 건물의 후미진 곳이 호기심을 자극했다. 어떻게 변했을까? 1972년 1학년 때 사용하던 교실이 거기 있었다. 존경해 마지않던 담임이셨던 임인숙 선생님이 거기서 내려다보면서 웃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당시 선생님의 사랑을 한몸에 받던 학급 서기였다. 붓글씨와 펜글씨를 유난히 잘 쓰셨던 선생님은 아직도 큰 감동으로 내 가슴에 남아 있다. 그분에게 배운 펜글씨 체로 몇 장의 편지를 써서 보냈던 기억이 아직 새롭다. 학교 교문을 그냥 나서기가 아쉬워서 수위실에 들러 가르치던 선생님들이 계신가 확인해 보았으나 계시지 않았다. 인사 이동이 잘 없는 사립학교라서 계시리라 기대했건만…….
지하철역 종로 3가에서 내려 6번 출구로 나와서 창덕궁을 향해 걸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창덕궁, 종묘를 답사하고 대원군의 사저인 운현궁을 둘러보고 인사동 거리를 거닐면서 그 분위기를 느껴보고자 하는 소박한 계획은 하나둘씩 실행에 옮겨지고 있었다. 창덕궁을 찾았을 때는 관람 시간이 정해져 있어서(하절기는 30분 간격으로 17회, 동절기는 1시간 간격으로 7회) 개인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어 있었다. 외국인들을 위한 영어, 일본어 안내도 있다. 아침 9시 30분에는 일본인 단체 관람객들이 입장을 했고 9시 45분부터는 나를 포함하여 다섯 명이 한 조가 되어 친절한 가이드의 도움을 받아 관람을 시작할 수 있었다. 가이드는 관람 순서에 따라 이해하기 쉽게 설명을 곁들여 주었다. 그러나 좀더 차근차근 감상하는 시간을 확보하지 않는 것이 아쉬웠다. 설명하는 것은 일반적인 것일 테지만 설명만으로는 부족하기에 개인적으로 시간을 두고 상상하면서 여유 있게 둘러볼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한 느낌이었다. 창덕궁의 건물과 분위기를 감상하면서 한 바퀴(돈화문 → 인정전 → 선정전 → 희정당 → 대조전 → 후원 → 낙선재) 도는 데, 소요된 시간은 1시간 20분 정도이고 약 2.5킬로미터 정도의 다리품을 팔아야 했다.
* 돈화문: 태종 12(1412) 창덕궁의 정문으로 창건되었으며, 이듬해 태종의 공덕을 새긴 오천 근의 동종을 달았던 곳이다. 지금의 돈화문은 선조 40년(1607) 재건되었으며 서울에 남아있는 목조 2층문으로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 인정전(국보 제225호): 창덕궁의 정전. 이곳에서는 왕의 즉위식, 신하들의 하례, 외국 사신 접견 등 국가의 중요 행사가 거행되었던 곳. 현재 건물은 순조4년(1804)에 복구한 것으로 조선조 말기의 건축 양식을 보여줌, 대한제국 시절 일본 사람에 의해 천정에 매달린 조명 시설이 거부감을 줄 수 있음.
* 선정전(보물 제814호): 임금께서 평상시 신하들과 국사를 논의하던 편전. 건물 중앙에 임금이 일월오악도(日月五嶽圖)를 배경으로 앉고 그 앞자리에 신료들이 동서로 벌려 자리를 잡고 그 뒤에서는 사관 두 명이 앉아 군신간의 대화를 일일이 기록하도록 되어 있다. 선정전은 현재 우리 궁궐에 남아 있는 유일한 청기와 전각이다.
* 희정당(보물 제815호): 임금의 처소이며 어전 회의실로도 사용하였다. 1920년 경복궁의 강녕전을 옮겨다 지으면서 앞쪽 신관으로 자동차가 닿도록 변형하였다. 앞뒤 양쪽이 복도로 연결되어 앞으로는 궁궐 입구로 뒤로는 중궁전 행각으로 이어진다.
* 대조전(보물 제816호): 왕과 왕비의 침전이며 왕과 자족들이 생활하던 중궁전이다. 이 건물은 지붕에 용마루가 없는데 이는 용으로 비유되는 왕이 상주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 후원(비원): 후원은 1405년 창덕궁 창건 당시 조성된 것이며 임진왜란 때 대부분의 정자가 소실되고 지금 남아 있는 누정은 인조 이후 역대 임금들에 의하여 개수·증축된 것이다. 이곳은 크게 주합루와 부용지를 중심으로 한 지역, 애련지(愛蓮池)와 연경당(演慶堂)을 중심으로 한 지역, 우리나라 궁궐의 전통적인 조원으로 지형에 어울리게 누각을 짓고 꽃과 나무를 심고 못을 파서 아름답고 조화있게 꾸며져 있다.
* 낙선재: 헌종 13년(1847) 후궁 김씨의 처소로 지은 것으로 1989년 4월까지 덕혜옹주와 영왕비였던 이방자 여사가 살던 곳이다. 서쪽부터 낙선재·석복헌·수강재가 배치되고 전면과 측면에 행각이 둘러져 일곽을 이루고 있는데 통털어 낙선재라 부른다. 후원에는 취운정·상량정, 별당인 한정당이 지형에 따라 배치되고 화계·담장의 무늬 등이 주변 환경에 어울려 소박하면서도 아담한 경관을 이루고 있어 아늑한 정취를 느끼게 한다.
창덕궁을 빠져 나와 탑골 공원(파고다 공원)으로 갔다. 노인들이 참 많았다. 노인들을 배려하기 위한 공간 같았다. 3·1 운동 당시에는 젊은 학생들이 구름처럼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운동의 기치를 내 걸었던 팔각정 주변에 이젠 하릴없이 서성거리는 사람들로 그득하다. 평화스런 시대의 자화상이라고 봐야 하겠지만 두루마기를 걸친 손병희 선생의 동상과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고, 파손 우려가 많은 탓인지 원각사지 10층석탑은 특수 유리로 보호되고 있어서 국보 2호 답지 않게 그 운명이 초라했다. 탑신과 옥개석의 독특한 형태와 정교한 조각도 그다지 가슴에 와 닿지는 않았다.
역사소설 '운현궁의 봄'을 통해 익숙한 이름인 흥선 대원군의 사저 '운현궁'을 찾았다. '운현(雲峴)'은 우리말로 표현하면 '구름재'니까 약간 높은 곳에 있어야 격에 맞다. 바로 옆에 일본 문화원이 위치했는데, 일제 시대 건물 형태가 그대로 남아 있고 운현궁보다 몇 길 더 높은 곳에 있어서 그들의 위협적인 도도함에 기분이 썩 좋지 않다. 운현궁은 한국 근대사의 유적 중에서 대원군의 정치 생활과 부침을 함께한 유서 깊은 곳이고, 그가 능숙한 처세술과 탁월한 정치력을 발휘했던 산실이자 집권이후 대원군의 위치에서 왕도 정치로의 개혁의지를 단행한 곳이라고 평가하고 있고, 고종 임금이 즉위한 후부터 확장, 증축되면서 그 웅장함이 궁궐과 비길만하다고 했지만 지금은 3개의 건축물(二老堂, 老安堂, 老樂堂)만 남아 권력의 무상함과 허무함마저 느끼게 한다. 그 울타리 너머로 새어 나오는 역사의 향기도 더 이상 세인들의 관심거리가 아닌 듯,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바쁘다.
인사동 거리로 발길을 옮겼다. 화랑, 필방, 골동품 가게, 전통찻집 등이 독특한 이름의 간판을 내걸고 성업 중이고 한국적인 문화가 주를 이루는 거리임을 금방 알 수 있다. 한 모퉁이를 지나는데 눈에 확 띠는 광고 문구가 있다. '묵심요(默心窯) 明匠 이학천 전시회'였다. 작년 여름 남전 선생님 일행과 찾아갔던 묵심요였기에 새삼 반가웠고, 무작정 전시실 안으로 들어갔다. 명절을 앞두고 명장이 만든 다기 세트를 조금 싸게 판매한다고 하는데, 그 가격이 6, 70만원 정도이다. 진사(辰砂) 자기의 달인답게 붉은 유약이 적절한 형태로 묻어있어 보통 사람이 보더라도 구매 욕구가 절로 생길 것만 같았다. 호형호제하기로 했던 주흘요(主屹窯)의 월파(月波) 선생은 요즘 어떠신가 궁금하다. 멋있는 구레나룻 휘날리며 작품 제작에 골몰하고 있을까? 풍류를 너무 좋아하는 나머지 작품은 뒷전이고 술에 빠져 있지 않을까?
문화의 거리에서는 행인들의 걸음걸이가 다들 여유가 있다. 예술가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간혹 눈에 띈다. 독특한 옷차림과 머리 형태를 보여주는 사람들이 그들이다. 외국인들도 호기심 어린 눈으로 지나다닌다. 인사동 언저리에 있다는 '귀천' 까페는 좀처럼 그 정체를 드러내지 않았다. 어느 좁은 골목에 초라하게 서 있다는 '귀천' 까페, 기회가 되면 꼭 한 번 들러 보리라 마음먹었던 곳이다. 한참을 헤맨 후 드디어 찾았다. 소문대로였다. 허름하기 이를 데 없는 찻집이었다. 천상병 시인(1993년 작고)과 미망인 목순옥 여사가 20여 년 전에 문을 열었다는 그 까페, 두 평 남짓한 좁은 공간에 기껏해야 사람 대여섯 명 정도만 앉아도 꽉 찰 것만 같다. 세월이 흐른 만큼 실내의 탁자, 의자 등의 집기는 고졸한 맛이 있고, 실내 책꽂이를 배경으로 다정스레 찍은 천상병, 목순옥 부부의 빛 바랜 사진은 이 까페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사진과 똑같은 장소에서 한 여인이 책꽂이에 있는 시집을 꺼내서 읽고 있었다.
8년 전, 포항여고에 근무할 때의 장면이 떠올랐다. 문학 교과 시간에 40여 편의 시를 한꺼번에 다루어 주어야 했던 적이 있다. 그 많은 시를 일일이 교사가 판에 박힌 듯이 설명해야 한다는 것이 내키지도 않았기에 그것을 학생들 개개인의 발표로 떠넘기게(?) 된 것이다. 각 시마다 발표자를 정해서 학생들로 하여금 나름대로의 생각을 자유자재로 표현하게 하는 것이었는데, 다들 진지하고 흥미진진하게 수업에 임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특히 천상병의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이렇게 시작하는 '귀천'이란 시를 발표하게 된 학생 몇몇은 뭔가 남다른 데가 있었다. 준비를 열심히 해서 눈에 띄는 수업을 해냈던 것이다. '귀천' 이외의 시를 몇 편 더 암송하기도 하고, 시인과 관련한 책, 논문 등을 찾아서 읽는 등 준비된 이야기가 얼마나 많고 잘 하던지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발표가 끝난 뒤에는 모임을 만들었다며 자랑을 했다. 졸업하자마자 서울 인사동에 있는 '귀천' 까페를 찾아 차를 한 잔 할 것이고, 의정부에 있는 시인의 묘소도 찾아가 참배하기로 결의했다는 것이었다.
'귀천' 까페는 故 천상병 시인을 고모부라고 부르는 한 여인이 운영하고 있었다. 친절했다. 주문을 받아 내게 건넨 진하게 달인 대추차가 주인의 마음처럼 참 따스하다. 오래 전부터 실내 벽에 걸려있는 중광 스님의 그림 몇 편은 '나는 걸레/ 반은 미친 듯 반은 성한 듯/ 사는 게다'라는 강한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 듯 했다. 대학생으로 보이는 여학생 두 명이 들어왔다. 아마 시인 천상병을 만나러 온 것이리라. 자리를 양보해 주어야 될 것 같아 시집 한 권을 구입해서 나왔다. 주인이 건넨 명함도 하나 받아 넣었다. (귀천 목순옥, 서울특별시 종로구 관훈동 24, tel)02-734-2828, fax) 02-735-1003,
http://www.kwichon.net)
인사동을 빠져나와 마지막으로 종묘(宗廟)에 들렀다. 조선 역대 왕들의 위패를 모셔놓은 곳이다. 제례악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세자와 문무백관 및 종친을 거느리고 임금이 직접 참여하는 대제(大祭) 장면을 상상하면서 정전(正殿)과 영녕전(永寧殿)을 둘러보았다. 정전 19실에는 태조부터 순종까지의 王과 妃를 모시고 영녕전 15실에 목조부터 장조까지의 王과 妃 신주를 모시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될 정도로 빼어난 조선시대 건축물 하나를 여유 있게 감상할 수 있었음에 만족하면서 천천히 종묘 정문을 빠져나왔다. 그 바로 앞은 작은 공원인 듯 했다. 노인들과 장년층이 많이 보인다. 따스한 오후의 햇볕을 쬐면서 정처 없이 돌아다니고 있으리라. 할아버지 몇 분과 그분들의 친구로 보이는 잘생긴 할머니가 대화하는 소리가 예사롭지 않다. 한 할아버지 왈, '○○씨, 다른 사람하고는 말하지 말아요.' '그건 오야 맘이야, 왜 그러우?' 미소를 잔뜩 머금고 장난치는 할머니의 대답이 더 재밌다. 칠십의 나이는 족히 되었을 분들인데…….
비둘기 몇 마리가 여기저기 날아다니며 먹이를 찾기에 바쁘다. 이젠 해도 많이 기울어졌다. 외롭게 서울 나들이에 나선 주인을 위해 극진히 섬기면서 많은 볼거리를 제공해 주었던 산타모 7725의 안부가 갑자기 궁금해진다. 하루종일 팽개쳐 놓고 돌아다녔던 터라 녀석은 주인을 원망하며 심술을 부리고 있을 것만 같다. 북악산과 삼각산이 형과 누이처럼 서 있는 것을 보고 가다가 어느새 광화문 앞에 다다랐다는 어느 시인의 감수성이 부러워진다.
메모 : 2004.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