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을 다녀와서
▶ 여행을 시작하면서
작년 3월, 일본 답사여행을 결정하고, 여행 최소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그간 일정액의 돈을 적립해 오다가, 드디어 2001년 1월 14일, 12명의 동료들과 함께 포항을 떠나게 되었다. 좀더 많은 동료와 함께 하지 못하는 아쉬움은 컸다. 최근 포항지역 특기·적성교육 문제로 여러 가지 어려운 상황이 빚어지면서 마음 한 구석엔 씁쓸함이 자리하고 있었지만 그것 때문에 예정된 우리의 답사 여행이 취소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동료들의 환송을 받고 2시간 정도를 버스로 달려 부산 여객 터미널까지 가니 시계는 오후 4시를 가리켰다. 현지 가이드가 이미 나와 우리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름은 이종수, 40대 중반의 세련된 이미지의 안내자였다. 부산의 여객 터미널은 일본으로 떠나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 대학생, 해양소년단 등 개인, 단체 여행객들, 보따리 장수들이 줄을 서 있었다. 우선 환전을 해야 했다. 109,000원을 건네주고 일본 돈 10,000엔을 받아 챙겼다. 최소한의 경비라고 생각했다. 우리 화폐 가치로 본다면 일본에서의 쇼핑은 비쌀 수밖에 없다는 판단을 했기에 특별한 것 이외에는 돈을 쓰지 않기로 결심을 했다. 소위 말하는 패키지 여행이라 저렴한 가격(4박 5일 399,000원)으로 최대의 효과를 얻으려는 데 관심을 가져야 했다.
출국 수속을 밟고 드디어 5시경에 승선을 시작했다. 우리가 탄 배는 '하마이유'(文珠蘭이란 뜻)라는 국제 여객선인데, 일본의 시모노세키와 부산을 오가는 소위 '관부 연락선'이었다. 2년 전에 구입한 배라서 그런지 모든 부대 시설이 깔끔하고 완벽해 보였다. '부관 페리호'라는 우리 나라 배와 번갈아 가면서 운행되는 모양인데, 우리 배는 50년이 넘도록 운행된 배라서 낡아서 몹시 불편한 배라고 한다. 승선 요금은 차이가 없기 때문에 시설 좋은 배를 타게 되는 것은 순전히 그날의 행운이라고 봐야겠다. 모처럼 배를 타고 하는 여행은 오랜만에 내 마음을 설레게 했다. 그러나 가슴 한 구석엔 집에 두고 온 식구들 생각으로 괴로웠다. 사실, 오늘 아침 주일 미사에 참여하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석연찮은 일이 있었다. 큰아들에게 또 화를 내고 만 것이다. 나의 성질 급함을 탓할 수밖에 없었다. 아내는 며칠간 집을 비우게 될 사람이 아이에게 좀더 너그럽기 못한 것이 몹시 안타까웠는지 나에게 짜증을 내고, 나 또한 화를 벌컥 내고……. 현관문을 나설 때 잘 다녀오라는 아들의 인사도 들은체만체 손만 흔들고 나오고 말았다. 퍽 미안했다. 나 자신이 왜 그렇게 못났는지 참……,
▶ 현해탄 건너 시모노세키로
승선을 마친 후 7시경 선내 저녁 식사를 끝내고, 날이 컴컴해진 8시30분 경이 되어서야 배는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리 일행이 하룻밤 묵게 될 곳은 갑판 1층에 있었다. 2등실이었다. 객실과 객실 사이의 복도가 무척 좁았다. 두 명이 겨우 지나갈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화장실 앞 약간 넓은 공간도 보따리 장수들이 잔뜩 사 둔 커다란 짐들 때문에 좁게만 느껴졌다. 웬만한 빈 공간은 보따리로 가득 차 있을 정도인 것으로 보아 보따리 장수들은 수십 명에 달할 것 같았다. 저들은 한국과 일본을 정기적으로 자주 오가면서 값싼 물건을 일본에 내다 팔고, 귀한 일본의 제품을 사다가 한국의 도매, 또는 소매상에 넘기면서 이윤을 챙기는 억척스런 아주머니들임에 틀림없었다.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은 참으로 여러 가지다. 돈 되는 일이라면 어떤 일이건 서슴지 않는 세상이 되었고, 그런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한 전쟁 아닌 전쟁을 하면서 팍팍하게 살아가야 하는 처지이고 보면 이런 삶의 모습은 곧 우리 시대의 자화상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배는 컴컴한 바다를 빠른 속도로 미끌어져 가고 있다. 부산항의 야경은 아름다웠다. 오륙도를 지나 한참을 빠져나가니 그 강렬한 항구의 불빛도 점점 보일 듯 말 듯 명멸하기 시작한다. 동료들과 준비해 온 소주를 한 잔씩 하면서 세상 이야기를 시작했다. 한참을 앉아 있다 보니,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멀미 기운이었다. 슬며시 일행을 빠져 나와 아무도 없는 3층 갑판 위에 올라가 바람을 쏘이며 한참을 서성거렸다. 7년 전 어느 여름날, 울릉도를 간다고 포항과 울릉도를 왕복하는 '씨플라워호'를 타고 고생했던 악몽이 떠올랐다. 3시간 30분 정도 항해하면 울릉도 도동항에 도달할 배였건만 기상악화로 항구에 접안도 못해 보고 다시 돌아와야 했던 배 속에 나는 있었던 것이다. 무려 7시간 정도를 파도에 휘둘리고 나니 계속되는 멀미에 그야말로 초죽음 상태까지 갔던 기억인 것이다. 하마이유호 갑판의 날씨는 매서웠다. 강력한 시베리아 기단의 영향인지 남쪽 바다까지도 추위가 대단했다. 아닌게 아니라 최근 며칠간의 강추위로 전국이 얼어붙어 있었고, 특히 어제의 부산 날씨는 관측 이후 가장 많은 적설량을 기록하였다고 한다. 고통스런 교통 대란을 겪기도 했다고 한다.
엊저녁 아내가 사준 오리털 파카가 더없이 고맙다. 그 옷에 달린 모자를 뒤집어쓰고 있으니 그리 추운 줄도 모르고 캄캄한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볼 수 있었다. 배에 부딪치는 파도 소리가 침묵을 깰 뿐, 배와 함께 같은 속도로 날고 있는 갈매기의 날갯짓이 정겹다. 배의 불빛의 포근함 때문에 본능적으로 이 칠흑의 밤을 함께 날고 있는 것이리라. 배위 뒷부분(고물)에 펄럭이고 서있는 일장기가 과거의 쓰라림을 되새겨 주기에 충분했다. 일제 당시 징병 또는 징용을 피하지 못하고, 소위 '관부 연락선'에 실려 부산을 떠나 현해탄을 건너 시모노세키까지 끌려와 일본 각 지역 노동현장으로, 또는 전쟁터의 총알받이로, 종군위안부로 흩어져서 처참하게 생활해야 했던 과거를 어찌 잊을 수 있으랴? 세월은 흘러 해방이 되고 그 이후 56년의 세월이 흘렀건만 아직도 일본은 우리에게 거북한 나라로 느껴짐은 어쩔 수 없다. 우리의 선열들의 노여움이 아직 우리의 가슴속에 남아있기 때문이리라.
새벽까지 동료들과 어울리다 늦게 잠들었기 때문에 다시 깨어났을 때는 이미 날이 환하게 밝아 있었다. 배는 아직도 움직이고 있었다. 시모노세키 항구 가까이 와서 몇 시간 동안 정박해 있다가 입국 수속을 관장하는 공무원들이 출근할 시간쯤 되어서야 입항을 시도한다는 것이었다. 눈이 조금씩 내리고 있다. 눈길에 관광이 제대로 될 지가 걱정이다. 배는 속도를 늦추면서 천천히 정박을 준비하고 있었다. 9시쯤 되어서야 하선을 하도록 했다. 손님들이 트랩을 내려가기 전에, 눈이 덮인 통로와 트랩을 열심히 쓸고 있는 한 분이 있었다. 혹 승객들이 미끌어져 다칠까 봐, 승객을 위하여 정성껏 친절을 베푸는 모습이어서 일본 입국의 첫인상이 참으로 좋았다.
▶ 벳부, 원숭이 공원, 온천, 밤의 낭만
짐을 들고 트랩을 내려 입국 수속을 밟았다. 터미널을 빠져 나오니 전용버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곧 본격적인 여행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런데 눈이 너무 많이 와서 우리가 가야할 벳부(別府)까지의 고속도로가 통행금지 상태라고 가이드는 설명한다. 어쩔 수 없이 해안 쪽으로 나 있는 국도를 타고 내려가야겠다는 것이었다. 고속도로로 3시간 정도면 갈 거리였지만 지체가 거듭되어 벳부에 도착하니 이미 6시간이 지난 뒤였다. 첫날 여행부터 힘들고 고통스러웠다. 엊저녁의 과음과 오랜 동안의 승차 시간이 머리를 어지럽혔고, 멀미 기운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던 것이다. 국도를 타고 오는 도중 점심 식사를 위해 들어갔던 체인점에서는 음식 맛도 몰랐고, 자꾸 찬물만 찾았다.
오후 3시경, ○○산에 무리를 이루어 야생하고 있는 원숭이들의 놀이터를 찾았다. 3시 30분, 원숭이들의 식사 시간이 다가오자 산에 흩어져 있던 원숭이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집합장소인 그 놀이터로 모여들었다. 우두머리의 지시를 받았는지 일제히 수백 마리의 크고 작은 원숭이들이 소리를 지르며 모여드는 장면은 참으로 장관이었다. 먹이를 뿌려주자 그것을 두 손으로 집어먹는 솜씨가 정교하고, 앙증맞다고나 할까? 사람들이 많이 있어도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우두머리 녀석은 먹이를 한 움큼 차지하고는 느긋하게 먹고 있고, 졸개들은 뒤질세라 바닥에 떨어진 먹이를 조금이라도 더 먹으려고 손의 움직임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턱밑에 먹이주머니가 불룩해질 때까지 먹어대고 있었다. 어미 등에 엎힌 새끼 원숭이의 모습, 어미 가슴에 파묻혀 바알간 젖을 열심히 빨고 있는 새끼는 꼭 깨물어주고 싶을 정도로 귀엽다. 원숭이를 구경하는 어린이들은 마냥 즐겁다. 인간들은 원숭이를 볼거리로 쳐다보고 있지만 원숭이들 또한 우리 인간들을 구경거리로 쳐다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야말로 야생 원숭이들의 천국이었다. 원숭이는 관광객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하고, 사람들에게서 먹이를 얻어먹는 공생의 관계가 거기에서도 펼쳐지고 있었다.
일본의 첫 숙박 장소인 산장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약간 오래된 호텔이었다. 안내된 방은 다다미방이었는데, 아기자기한 방의 분위기가 새롭게 와 닿았다. 일본 문화의 단면을 흠씬 느낄 수 있었다. 예정된 시각에 저녁 식사를 했는데, 친절함의 극치를 보여준 식사였다. 우리 일행 모두는 독상을 받았다. 밥, 국, 수저 등을 하나 하나 가져다가 무릎 꿇은 채 전해주는 종업원들의 극진한 친절에 놀랐다. 6명의 여종업원들은 손님들이 식사를 끝낼 때까지 무릎 꿇고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한국적 관념에서 본다면 벌을 서고 있는 모습으로 비칠지도 모르겠지만 한국의 음식점들이 그런 친절만큼은 배워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저녁 식사를 하고 호텔에 속한 욕실을 찾았다. 이곳이 유명한 溫泉이란다. 그런데 우리 나라의 온천과는 사뭇 다르다. 여종업원들이 남탕 안을 마음대로 들락거리고 있다. 온천 관리 책임자가 여성들뿐이라서 그런지 몰라도 발가벗은 남자들 틈을 아랑곳하지 않고 다니면서 종업원으로서의 제 할 일을 하고 가는 웃지 못할 장면이 목격되었다. 또 욕실 안은 노천 온천과 연결이 돼 있어서 그런지 실내 온도가 서늘했다. 탕 안은 따뜻하여 좋은데, 탕 주변의 공간은 그렇지 않아 감기 걸리기에 십상일 것 같다. 건강에는 그게 좋다고 누군가 이야기를 하던데 우리 나라 욕실에 익숙한 우리로서는 약간 고통스럽기까지 하다.
일행은 목욕을 끝내고 일본 문화 감상 차원에서 벳부(別府) 시내를 관람하기로 했다. 호텔에서 콜택시를 두 대 불러 타고 목적지로 갔다. 그런데 택시 요금이 보통이 아니었다. 기본 요금이 560엔, 우리 돈으로 6,000원, 구간 요금 80엔, 가까운 시내 나오는 데도 우리 돈으로 15,000원 정도의 요금을 지불해야 했다. 일행은 결국 그날 왕복 60,000원 정도의 거금을 택시비로 써야 했었다. 밤에 둘러보는 벳부 시내는 평온함과 차분함이었다. 사람들도 별로 눈에 보이지 않았다. 일찍 일을 마치고 가정에 돌아간 때문이리라. 웬만한 상점들도 저녁만 되면 문을 닫는다고 하는데, 이곳 사람들의 가정에 대한 사랑과 검소한 생활습관이 그대로 느껴졌다. 다만 곳곳에 쇠파이프를 통해 넘쳐 나오는 하얀 김들이 설설 끓고 있었다. 벳부란 도시의 땅 밑은 마그마의 활동이 아직도 왕성하다는 증거가 아닐까? 이곳은 언제든지 화산활동이 일어날 수 있는 위험한 지역으로 특별히 관리되었던(그래서 지명도 '別府') 곳이라고 하는데, 어느 한 개인의 그럴듯한 선전 방법, 즉 예쁜 아가씨에게 팬티 없는 미니 스커트를 입혀 섹시 걸을 만든 뒤, 차에 태워 가지고 이곳 저곳을 다니면서 선전하는 방법에 힘입어 차츰차츰 세상에 알려지게 되고, 사람들이 전국에서 꾸역꾸역 모여들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세계적인 온천 관광지가 가이드는 설명했다.
가이드가 안내해 준 곳을 한동안 돌아다니다가 숙소로 돌아왔다. 엊저녁 무리해서 과음을 한 김선생님은 일찍 잠자리에 들었고, 세 분은 준비해 간 놀이를 하면서 즐겼고, 토담 김용국과 정선생, 그리고 나는 다시 숙소를 나와 한참을 걸어나가 가까운 술집을 찾았다. '深仙'이라는 작은 선술집인데 50세쯤 되는 아주머니(安部紀美惠)가 운영하고 있었다. 일종의 구이집이었는데, 수더분해 보이는 주인이 걸쭉한 목소리로 우리를 맞아 주었다. 안주는 너무 비싸서 주문하기를 포기하고 그냥 맥주 3병만 시켰다. 주인은 뭔가를 베풀고 싶은 마음이 들었는지 써비스로 안주를 하나 만들어 주었다. 계란찜 종류였다. 고마웠다. 일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정선생은 주인댁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기 시작한다. 주인의 친구인 듯한 아주머니도 재미있던지 방에서 나와 끼어들고는 익살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우리 일행이 퍽이나 좋아 보인다면서 600엔 짜리 맥주 한 병을 사 주었다. 나보고는 눈매가 선해 보이고, 옛날 좋아하던 사람의 인상과 닮았다면서 한참동안 치켜세웠다. 계속해서 내 눈을 쳐다보며 한참동안 뭐라고 말을 하긴 하는데 도저히 알아듣질 못하겠다. 정선생의 통역이 없었다면 얼마나 답답한 자리가 되었을까 싶다. 평소에 묵묵하면서도 자신에게 충실한 정선생의 진가를 보여주고 있었다. 정종도 한 컵 시켜 서 셋이서 나눠 먹었다. 400엔 짜리 술인데 뜨겁게 데워서 먹으니 아주 좋았다. 취기가 가볍게 느껴졌다. 술집을 나와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서 만난 사람은 없었다. 밤이 이슥해진 탓도 있지만 일본 사람들은 밤에 쏘다니기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 아소산 가는 날
다음 날, 아소산을 오르는 날이다. 그런데 눈이 아직도 그치지 않는다. 조금씩 흩뿌리고 있다. 가이드는 위험하기 때문에 아소산 관광은 불가능할 것 같다고 자꾸 엄살을 부리는데, 우리 일행은 못내 아쉬워 그래도 한 번 가보기나 하자면서 졸라댔다. 가이드도 피식 웃더니 그럼 한 번 시도해 보자며 운전사와 뭐라 몇 마디 하더니 차를 아소로 향했다. 아침 8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 역시 고속도로로 못 가고 오이타란 市를 돌아 국도를 타고 빙 둘러서 가야 했다. 제법 오랫동안 차를 타야했다. 큐유슈우 내륙 지방을 좌우로 훑어가면서 산골 동네와 농촌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는 기회였다. 날씨 탓인지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눈에 띠는 집들은 도시와 다르게 규모가 좀 커 보였고, 가옥의 구조는 어디를 가나 비슷했다. 저 가옥들이 수 백년 내려오는 가옥 형태 그대로라면 그들의 정신을 높이 평가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보리가 자라고 있어야 할 농지엔 그냥 베어낸 벼의 그루터기만 남아 있었다. 궁금하여 가이드에게 물어보니 일본도 농촌 문제가 심각하다고 한다. 농사일을 담당하는 사람들 또한 노인들이 대부분이고, 농촌 인구도 전체 인구의 10%밖에 되지 않으며 정부의 보조금도 어느 시점에서부터인가 중단되었거나 대폭 줄어들었다고 한다. 선진국이 이러한 형편일진대 하물며 한국의 농촌의 상황은 어떠하겠는가? 지난 연말 분노한 농민들의 고속도로 점거 농성은 무엇을 시사하는 것인가? 사람들이 살아가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먹거리 문제를 근본적 해결해 주는 농촌을 죽여서는 아무런 희망이 없음을 위정자들은 정작으로 모르고 있는 것일까?
몇 시간을 부지런히 달려 아소란 마을이 보이는 곳에 도착하니 거대한 분화구처럼 보이는 곳이 눈 아래 있었다. 지금은 화산의 또 다른 폭발에 의해 분화구의 물이 다 빠져나가고 평평한 분지가 이루어져 있었다. 거기가 바로 아소란 곳이었다. 아소란 곳을 뒤로 하고 왼편으로 경사를 따라 그 유명한 아소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눈이 길에 그대로 녹지 않고 쌓여 있어 불안했지만 관광차는 스노우 타이어를 달고 거침없이 산을 올랐다. 미끄러짐이 덜하다고는 하지만 걱정이 앞섰다. 특히 급한 커브 부분에서는 모두들 긴장되었다. 젊은 기사는 눈길 운전 경험이 많은지 노련하게 운전을 하고 있었다. 한참을 달려 올라갔다. 길의 경사가 완만하여 빙빙 둘러 천천히 오르고 있었다. 크고 작은 나무에 내린 눈이 바람에 휘날리며 나무의 가지가지마다 빙 둘러 쌓여 있어 전체적인 조화를 이루더니 아름다운 눈꽃을 활짝 피우고 있었다.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일행들의 탄성이 터져 나온다. 일찍이 보지 못한 눈꽃의 바다였다. 사진으로밖에 보지 못했던 이 광경을 이국 땅 아소산에 와서 보게 된 것이다. 차를 타고 그냥 지나가기가 아깝다. 당장이라도 내려 사진이라도 한 방 박고 싶은 충동을 강하게 느꼈다. 차를 세우자고 했더니 눈길에 서면 안 된다면서 그냥 가야한다는 것이었다. 그 눈꽃의 바다는 내 눈 앞에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분화구 가까이 있는 식당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오후 1시를 넘긴 뒤였다. 출출한 배를 채우기 위해 식당을 찾았다. 우리 일행을 맞을 준비가 이미 되어 있던 터라. 곧바로 식사를 할 수 있었다. 뷔페식이었다. 먹고 싶은 음식을 마음껏 가져다가 배를 채웠다. 너무 게걸스레 먹어서 체통을 잃지 않았나 모르겠다. 몇 번을 들락거리며 음식을 가져다 먹었다. 디저트로 귤을 하나 맛있게 까먹고 밖으로 나왔다. 눈 덮인 분화구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음악 선생인 이선생은 장난기가 발동했는지 토담 김선생 목안에 눈을 뭉쳐 몰래 집어넣고는 도망갔다. 나도 쫓아가 눈 장난을 치려다가 참았다. 칼데라호가 보이는 정상까지는 눈 때문에 가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다시 돌아가야 했다.
▶난공불락의 구마모도 성, 그 언저리
우리가 탄 차는 또 다른 여행지인 구마모도(熊本)로 미끄러져 갔다. 엊저녁 피로가 덜 풀렸는지, 차를 타고 가면서 창 밖의 경치를 쳐다보다가도 까무룩 잠이 들었다가는 차의 흔들림에 다시 깨는 것을 반복하면서 구마모도란 곳에 도착했다. 규모로 보면 우리가 살고 있는 포항 정도의 도시라고 한다. 가장 중심가라고 하는 도로 한가운데로는 전차가 운행되고 있었다. 아주 어릴 때지만 서울에 살면서 2원 짜리 길다란 승차권을 끊고 그 느린 전차를 타 보았던 1960년대의 서울 시내가 연상되었다. 제법 자주 오가는 전차위로 거미줄처럼 얽혀진 고압 전선이 하늘에 매달려 있었다.
학생들이 교복을 입고 오가는 모습이 많이 보여서 가이드에게 물어보았다.
"일본에도 방학 때 보충수업(특기적성교육)을 합니까? 방학중인데도 학생들이 학교에 나오는 것이 이상하네요."
"선생님이 잘못 알고 계신 거예요. 어제 일본 학생들은 개학을 했습니다. 일본 학교는 겨울방학은 짧고 여름방학이 길답니다."
초등학교 아이들은 추운 겨울인데도 맨살에 짧은 바지만 입고 다니는 학생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 중·고등학교 여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맨살에 치마만 입고 유유히 걸어가고 있는 학생들이었다. 우리 나라와 비교가 되는 장면이다. 우리 학부형들은 한겨울에 그런 복장으로 집을 나서는 자녀들을 보면 아마 난리가 났을 것 같다. 과잉 보호를 받으며 溫床에서 자라고 있는 우리 학생들이 아니겠는가? 어떤 어려움에도 대처할 수 있는 강인한 정신을 길러주기 위한 저 부모들의 고귀한 뜻이 담긴 것이라면 높이 평가해야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또 자전거를 타고 통학하는 학생들이 매우 많았다. 남녀 구분 없이 모두들 자전거를 즐겼다. 치마를 입고도 거리낌없이 자전거 페달을 밟는 여학생들이었던 것이다. 어떤 남학생은 교복은 입었는데, 링컨처럼 구레나룻을 시커멓게 기르고 있었다. 우리에겐 상상이 안 되는 장면일 것 같다. 중·고등학생들의 두발은 자유화되었는지 규격화된 것은 없었다. 각양 각색이었다. 요즘 우리 나라 청소년들에 의해 강력히 추진되고 있는 두발자유화 운동의 끝이 결국 지금의 일본 학생들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을까 싶다.
구마모도(熊本) 성(城)을 관람하기 위해 지정된 주차장에서 차를 내렸다. 왼쪽 잔디밭에서는 육상 선수들이 연습을 하고 있었다. 제법 긴 트랙을 때로는 기록을 재기도 하면서 열심히 뛰어다녔다. 성 주변을 따라 깊게 파 놓은 인공 장애물인 해자를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너 웅대한 성문에 들어섰다. 나고야성, 오오사카성과 함께 일본의 삼대 성 가운데 하나라고는 하지만, 나에게는 별다른 관심의 대상은 못되었다. 우리 나라 역사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성도 아닌 것 같았다. 우리 나라 성의 은근함과는 대조적으로 정교함을 자랑하고 있었다. 성 위에 건축된 건물의 지붕은 우리의 팔작 지붕의 형태를 닮았지만 직선에 가까운 선처리었고, 완만한 곡선을 만들며 균형이 잡히도록 선을 낸 우리 나라의 지붕과 처마 건축양식과는 또 달랐다. 곳곳에 파놓은 수십미터의 깊이의 우물은 당시의 전투 상황을 그대로 말해주는 것 같았고, 난공불락의 요새라고는 하지만 나무로 쌓아올린 건축물은 불화살을 맞으면 곧 재로 변할 것 같아서 그렇게 실용적이지 못하다는 생각이었고, 이러한 성을 근거지로 하여 틈만 나면 우리 나라를 엿보았던 왜놈들의 호전성을 생각하니 슬며시 불쾌한 감정이 솟구쳐 오른다.
▶ 구루메라는 도시
구마모도 성을 휙 한번 훑어보고 나서 곧 우리는 1시간 30분 정도를 북쪽으로 달려 구루메라는 곳으로 향했다. 거기서 숙박을 하기로 되어 있었다. 내일 후쿠오카 관광을 조금이라도 일찍 시작하기 위한 위치 선점이었던 것이다. 호텔 8층에 있는 숙소에 여장을 풀고 곧 2층에 마련된 식당에서 음식을 들었다. 동료인 강선생은 음식이 입에 맞지 않은지 잘못 먹고 한국에서 준비해 간 반찬에 많이 의지하는 것 같았다. 식사를 마치고 포항 집에 전화를 걸었다. 한국통신을 통한 수신자 부담 국제전화였다.(전화걸 때 10엔 또는 100엔 짜리 동전이 필요함. 전화 끝낸 뒤 돌려 받을 수 있음) 아내에게 간단히 안부를 전하고 큰아들과 짤막한 통화를 했다. 앙금이 풀렸는지 목소리는 밝았다. 엄마에게 마음 편하게 해 주라고 하면서 전화를 끊었다. 요즘 큰녀석은 사춘기에 접어들었는지 불평불만이 많다. 무서운 아빠에게는 차마 대들지 못하고 만만한 제 엄마에게는 이유 없는 반항을 그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동료들끼리 호텔을 나왔다. 저녁 8시쯤 되었는데 길가의 상점들은 한둘씩 문을 닫고 있었고, 거대한 도박장만 한창 영업 중이었다. 소위 말하는 '빠찐꼬'였다. 도박장 안에는 수백 대의 슬롯머신이 현란하게 손님을 유혹하고 있고, 유혹을 이기지 못한 남녀노소들이 고액권의 지폐를 동전으로 바꿔 기계 앞에 앉아 일확천금을 기대하며 연신 똑같은 행동을 반복하고 있었다. 일제 때 왜놈들은 동양척식회사를 세우고는 그럴듯한 명목을 세워 쌀을 빼앗아 가더니, 증권회사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미두장(米豆場)을 크게 열어, 찢어지게 가난하여 일확천금을 노리고 싶은 농민들의 심리를 이용하여 먹고 살 최소한의 끼니마저 모조리 일본으로 앗아가지 않았던가? 그 슬픈 역사를 이 도박장에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았다. 매캐한 담배 연기 속으로 그들의 희망은 하나씩 둘씩 사라져가고 있었고, 도박장 직원들은 희희낙낙 손님들에게 온갖 친절을 베풀고 있었다.
몇몇 동료와 함께 상가가 죽 연결되어 있는 구루메 1번가를 둘러보았다. 보드블록이 아주 깔끔하게 깔려 있었다. 껌 자국으로 얼룩져 있는 우리 나라 도시의 보드블록과 금방 비교가 되었다. 그리고 놀라운 것은 맹인들이 밤길을 잘 다닐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정교한 장치가 블록 밑에 숨어 있었다. 일정한 간격으로 파란 형광빛이 명멸하는 장치였다. 행인들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일부러 이곳 저곳을 돌아다녀 보았다. 엊저녁 벳부에서처럼 행인들이 그다지 눈에 띄지 않았다. 가이드가 한 곳을 소개해 줘서 그곳을 찾아갔다. 불고기 집이었다. 우리 나라 불고기가 일본에 들어와서 많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는 소문은 들어 알고 있었지만 직접 가보고 맛을 볼 수 있는 것도 좋은 경험이겠다 싶었다. 다섯 명이 4인분의 불고기를 일단 시켰다. 맥주와 정종도 주문했다. 300엔 짜리 김치 두 접시도 함께 주문했다. 곧 음식이 들어왔고, 불판에 차례차례 굽혀졌다. 김치에 싸서 먹어보니 그 맛은 일품이었다. 김치가 모자라서 더 주문했더니 300엔을 더 내놓으라는 것이다. 참으로 야박한 인심이다. 겨우 한 줌밖에 되지 않는 김치를 거금을 주고 사먹으려니 정말 아깝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포기했다. 그저 맛을 한 번 봤다는데 의미를 부여하고 곧 그 불고기집을 빠져 나오고 말았다.
토담과 내가 묵고 있는 방에 4명의 동료들이 모였다. 옆방에서는 화투놀이가 한창이었지만 우리는 미리 준비해 간 진로 소주를 조금씩 나눠 마시면서 컵라면을 안주 삼아 이야기를 시작했다. 정선생의 알뜰살뜰 사람 사는 이야기, 김선생님의 가난 극복 이야기, 나 자신의 자식 걱정 이야기, 토담의 생활의 지혜 등 돌아가면서 미주알고주알 시시콜콜히 주고받는 대화 속에는 진지함이 그대로 묻어났다. 밤이 이슥하여 정선생과 김선생님이 숙소로 돌아가고 토담과 나는 친한 친구로서 새벽이 올 때까지 못 다한 이야기를 계속하다가 다음 날 답사를 대비해서 잠을 청했다. 새벽 4시경이었다. 뒤숭숭한 마음 상태라서 그런지, 몹시 피곤했음에도 불구하고 잠이 꽤 오랫동안 오지 않았다. 어쩌다가 겨우 잠이 들었지만 악몽에 시달렸다. 칼을 든 놈에게 계속 쫓기는 꿈을 꾸면서 시달려야 했다. 며칠간 무리하면서 몸이 약해진 탓이리라.
모닝콜 소리에 잠에서 깨어 일어나니 6시 30분, 곤하게 자고 있는 토담을 깨워 곧 아침식사를 하고 짐을 챙긴 뒤, 8시에 호텔을 나섰다. 태재부 천만궁(太宰府天滿宮)이란 신사(神祠)를 거쳐 후꾸오까(福岡)란 곳으로 가기로 되어 있었다. 구루메 시를 벗어나면서 고속도로에 차를 올렸다. 눈들이 완전히 녹아 이제 모든 도로가 정상을 되찾았고, 모처럼 고속도로를 질주하게 되어 기분은 상쾌했다. 자연을 최대한 손상시키지 않고 환경을 우선 생각하는 일본인들의 지혜도 곳곳에서 느낄 수 있었다. 산을 깎아 내린 절개지가 잘 안보였고, 돈이 들더라도 웬만하면 터널을 뚫어 자연의 파괴를 최소화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눈에 보이는 도로 사정은 우리 나라와 비슷한 것 같았고, 다만 고속도로 톨케이트를 지키고 있는 사람들이 젊은 아가씨들이 아닌 나이 든 노인들이라는 게 특이했다. 그 이유를 물어보니 정부에서 인력자원의 활용 차원에서 정년 퇴임한 노인들에게 일거리를 제공하는 것이라고 한다. 우리가 탄 차를 운전하는 기사 아저씨도 환갑이 넘은 분이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비록 남의 나라 일이지만 참으로 고마운 일이며 참 잘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을 배려한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를 새삼 느꼈다.
▶ 태재부 천만궁과 그 주변 학교
太宰府 天滿宮이라는 신사에 안내되었다. 가이드는 신사의 주인공인 '스기하라'라는 일본인 학자에 얽힌 이야기와 그 주변의 이야기까지 복잡하게 설명했다. 별로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일본인들의 무서운 단결력이 바로 이런 신사 참배에서 비롯되었다고 판단하니 섬뜩한 느낌마저 들 정도로 거부감이 앞섰다. 지금까지 여행을 하면서도, 우리 나라에서는 지천으로 보이는 교회의 십자가는 찾아볼 수 없고, 절도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그들의 신앙은 예수도, 공자도, 부처도 아니었다. 다만 그들의 신앙은 조상이요, 천왕이요, 장군이요, 학자였던 것이다. 신사 건물의 구조를 잠시 살펴보다가 곧바로 그곳을 빠져 나왔다.
신사 입구에서부터 주차장까지 양옆으로 상가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데, 상인들의 호객 행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일부러 천천히 상점 가운데로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지만 잘 사는 나라의 자존심 때문인지 중국이나 태국, 한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한 호객 행위는 없었다. 그저 필요하면 제 발로 와서 사 가라는 배짱이었다. 또 신호등이 있는 사거리를 지나게 되었는데, 신호 대기중인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어느 누구도 신호가 바뀔 때까지 정지선을 넘지 않았다. 차가 없으면 그냥 건너고 마는 것이 우리 나라 사람들의 의식이라고 볼 때, 본받아야 할 부분이 있는 것이다. 일본인들은 철두철미할 정도로 몸에 밴 도덕성을 굳게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못할 것 같다.
한참을 걸어 내려오다 보니 오른쪽 길 위쪽으로 太宰府 小學校라는 곳이 있어 무작정 그곳으로 발을 옮겼다. 그다지 규모가 큰 학교는 아닌 듯 한데, 강당 건물이 크고 세련되어 보였다. 운동장에서는 3학년쯤 된 학생들의 빨강, 파랑 모자를 쓰고 선생님들의 지시에 따라 열심히 뛰어다니고 있었다. 하나같이 반바지를 입고 있었다. 날씨가 추워 어른들도 내복까지 끼어 입는 날씨인데도……. 유리창 사이로 보이는 강당 안에서도 수많은 학생들이 역시 같은 복장으로 추위를 아랑곳 않고 열심히 뛰어다니고 있었다. 엄격한 가운데서도 자유스러움이 넘쳤다. 잘 조성된 학교 환경이 사뭇 우리와는 달랐다. 뭐라고 표현하지 못할 만큼의 깔끔함 그 자체였다.
주차장 뒤쪽으로 조그만 다리를 하나 건너면 오른 켠으로 筑紫고등학교가 보였다. 약간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어 교문을 지나 한참을 올라가야 운동장에 닿을 수 있었다. 조용했다. 수업중인 모양이다. 운동장이 아주 넓었다. 운동장 너머엔 테니스 코트가 서 있고, 운동장 입구엔 4대의 스쿨버스 차고가 있고, 늙수그레한 노인 한 분이 차를 열심히 닦고 있었다. 운동장 오른쪽엔 4,5 층 규모의 최신식 체육관이 우뚝 서 있고 그 체육관 오른쪽으로 5층 짜리 본관 건물이 앞뒤로 위치하고 있어서 제법 큰 규모의 학교인 것 같았다. 일행들이 주차장에서 기다릴 것 같이 오래 머무르지 못하고 등을 돌려 내려왔다. 교복 입은 남학생들이 저 밑에서 올라오고 있다. 시간은 오전 10:30인데 지금 등교를 하고 있는 것이다. 너무도 느긋하게 걸어오고 있다. 틀림없이 지각일 텐데도 급할 게 없다는 태도다. 가방을 들긴 들었는데 거의 비어있는 것 같고, 머리는 길게 자라 덥수룩했다. 그 몇 발자국 뒤로는 여학생이 뒤따라 들어온다. 깡마른 체구인데 뭘 생각하는지 시선을 고정시키고 천천히 오르고 있다. 불량끼가 약간 느껴졌다. 교문 옆에 자전거 세우는 곳에는 많은 자전거가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일본말을 할 수 있다면 무심히 지나가는 저런 학생과 이런 저런 것을 물어보았으면 좋으련만…….
▶ 후쿠오까, 하까다 항
다시 버스에 올라 후쿠오까로 향했다. 하까다 항구를 구경하는 순서였다. 거대한 수족관을 훑어보고 70미터 높이의 하카다 타워로 올라갔다. 하까다 항구와 후쿠오카 시내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곳이었다. 배를 정박할 수 있는 부두와 부두가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있고, 큰 배 작은 배의 출입이 자유로운 참으로 큰 항구임이 분명했다. 도시 고속도로가 2중, 3중으로 겹쳐있지만 높낮이로 구분되어 필요한 곳으로 팔을 뻗친 채 다양한 자태를 자랑하고 있어 문어발이 연상되었다. 그러면 우리가 서 있는 타워가 문어 대가리가 되는 셈이다. 필요에 의해 세운 전망대이지만 외국인들에게는 좋은 관광 상품일 것 같았다. 오래 있으니 현기증이 느껴져서 잠깐 있다가 내려왔다.
다음은 후쿠오까 돔을 둘러보는 순서였다. 전천후 야구 경기장이었다. 3만 5천 명의 관객을 입장시킬 수 있는 거대한 경기장인데, 우리는 그 내부를 보지 못하고 운동장 밖에서 겉만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수박 겉 핥기'식의 여행 같아서 기분은 썩 좋지 않지만 안 보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하고 경기장을 배경으로 동료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버스에 올라탔다. 다음은 동장사(東長寺)란 절을 들르는 순서였다. 구로다라는 성주가 만들었다고 하는 절로서 후꾸오카 한 복판에 있다. 일본에선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절인지라 관심을 좀 갖고 보았는데, 우리 나라 사찰의 분위기와는 전혀 달랐다. 부처님이 가까이 있는 구조가 아니라 저 멀리 모셔져 있어 대단히 권위적인 느낌을 주었고, 최근 나무를 깎아 만든 대불이 대웅전 오른쪽에 안치되어 있는데 그 불상 밑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하여 9개 지옥과 관세음보살이 제도하는 천국을 형상화 해 놓고 있었다. 인도에서 시작된 불교가 중국을 거쳐 한국으로 다시 일본으로 전래되는 과정에서 받아들이는 주체들은 전래된 것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지 않고 나름의 안목과 솜씨로써 자기화해서 받아들이게 된다는 결론이었다.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橘化爲枳]는 말이 실감났다.
신깐센이란 고속 열차의 종점이기도 한 후꾸오까엔 150만 명의 인구가 살고 있고, 일본에서는 5번째로 큰 도시이며, 우리 나라 부산광역시와 자매 결연을 맺고 있는 도시라고 가이드는 소개를 했다. '오가스끼'라는 주문식단제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엊저녁 외출해서 먹었던 불고기와 똑같은 형식이었다. 제법 맛은 있었지만 나중에 반찬이 모자라서 김치를 더 찾았지만 300엔을 더 내란다. 싫었다. 강선생이 준비한 고추장, 멸치를 조금 얻어서 남은 밥을 마저 먹었다.
▶ 또 다시 시모노세키로
오후 1시 15분 시모노세끼를 향하여 출발했다. 약 2시간 정도 달려가야 하는 거리였다. 오후 4시경에 도착하여 역시 올 때처럼 승선 수속을 밟고 6시에 출발하도록 되어 있었다. 시모노세키로 가는 길은 한층 가벼웠다. 고속도로 위를 거침없이 달렸다. 염상섭의 소설 '만세전'의 주인공이 서울의 아내가 위독하다는 말을 듣고 복잡한 심정으로 동경에서 시모노세키로 달려오는 과정에서 경험하는 것들과는 다를지라도, 나에게는 적어도 말이 통하는 세상에서 살아야겠다는 절박함이 있었다. 일본에 왔지만 그들과 한 마디 말도 못하고 그저 눈에 보이는 몇 가지만 마음에 담고 돌아가야만 하는 단조로운 패키지 여행이었다는 점에서는 아쉬웠다. 이왕 일본의 큐유슈우에 온 김에 2차 세계대전 당시 원폭이 투하되었던 도시 나가사키에도 가보고 싶고, 그곳 역사박물관도 둘러보고 거기서 열차를 타고 가고시마란 곳까지 가서 그 지방의 문화를 훔쳐보고 싶었는데, 참으로 섭섭했다. 그러나 막대한 경비를 써야 하는 개인 여행을 할 형편은 못 되었기에 이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나중에 개인적으로 다시 일본을 여행할 기회가 있다면 애환의 항구인 시모노세키에서 일본의 심장부인 동경까지 가는 코스를 택하고 싶다. 그 필요조건인 유창한 일본어 회화 능력과 재정적인 뒷받침을 해결하고 난 뒤, 이용할 수 있는 교통편은 골고루 활용하면서, 조선 후기 통신사 또는 신사유람단 일행이 거쳐간 곳을 따라가며, 당시의 상황과 오늘의 상황을 비교하여 나도 제2의 '日東壯遊歌'를 써 보고 싶다.
그간의 짧은 일본 여행을 하나하나 정리해 보아야겠다는 생각에 몇 가지를 메모했다. 눈에 스쳐간 것을 근거로 하여 마치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는 오류를 범하기는 싫지만 절도 있는 교통질서, 남을 배려하는 양보운전, 생활화된 공공질서 지키기, 화장실의 깨끗함(그 안에서 도시락을 먹어도 될 정도임), 단조로운 듯 하면서도 섬세하고 치밀한 건축양식, 몸에 밴 친절함, 남녀노소 구분 없는 부지런함, 빽빽하게 우거진 숲, 자연보호 정신, 어디를 가나 잘 지켜지고 있는 전통가옥, 100%가까운 도로 포장율, 도로공사의 깔끔함, 강인하게 키우는 자녀교육 등은 우리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와 닿는 것이었다.
일본의 큰 섬인 혼슈우와 큐유슈우를 연결하는 1300미터의 거대한 다리를 건넜다. 저 다리 아래 바다 밑 지하 속으로 신깐센 열차가 달린다고 한다. 바다 밑으로 터널을 뚫고 열차를 달리게 한다는 것이 나로서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우리의 상식을 초월할 정도로 앞서 있는 일본의 기술이 아닐까 하여 다시 한번 놀랐다. 버스는 다리를 건너자마자 왼쪽에 위치한 시모노세키 항으로 우리를 데려다 주었다. 오후 4시경이었다. 여객 터미널에는 일본 관광을 마치고 돌아가는 우리 나라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보따리 장수 아주머니들도 엄청난 양의 물건을 사다 재어놓고 배 뜨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정선생이 일본의 정통음식 '우동'을 한 번 먹어보자고 제안했다. 군침이 돌았다. 대합실 모퉁이에 우동 파는 가게가 있어 그리로 가서 높은 의자에 걸터앉았다. 500엔(5,400원) 짜리 우동이었다. 기가 막힌 맛이었다. 우리 나라에서 먹는 우동과는 질적으로 다른, 전에 느끼지 못했던 그 맛이었다. 다 먹고난 정선생은 '현지 적응하는 데 최선을 다했다'면서 우동을 맛있게 먹고 난 포만감 만큼이나 만족스러워 했다. 잘 사먹었다 싶었다. 내 지갑엔 아직도 2,300엔이 남아 있었다. 7,700엔을 소비했다. 거의가 술값 또는 음식값으로 지출되었다. 선물 비용은 생각지 않기로 했으나 나의 피붙이 두 아들이 마음에 걸려 저렴한 가격의 학용품을 조금 샀다. 여행 도중 가이드가 안내한 면세점이 여러 군데 있었으나 그렇게 싸다는 느낌은 전혀 없었다. 끼리끼리 손잡고 소비를 조장하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을 뿐이었다.
▶ 현해탄을 다시 건너오면서
배는 6시에 정확하게 출발했다. 4일 전 부산항을 출발했던 바로 그 배였다. 2등실의 한 공간이 우리들에게 주어졌고, 선내 식당에 마련된 저녁 식사를 마치고, 배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가 배 안의 목욕탕에서 몸의 피로를 풀기도 했다. 배는 어느덧 시모노세키 항을 멀리한 채 부산을 향해 빠른 속도로 나아가고 있었다. 부산을 떠나오던 날의 낭만적 분위기는 다시 자연스레 만들어졌고 동료들은 한 잔씩 술을 들이키기 시작했다. 그런데 파도가 심한 탓인지 배의 움직임이 더 심해져서 조금은 고통스러웠다. 동료들과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면서 그 고통을 잊으려 애를 썼다. 조금 지나니 그저 참을만 했다. 밤은 점점 깊어갔고, 취기가 올라 동료들도 한두 명씩 잠자리를 찾아갔다. 나도 늦게 잠을 청했다. 몸이 피곤하면 코를 심하게 골기 때문에 자세를 잘 다듬은 후 잠자리에 들었다.
깨어나니 새벽 5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욕실을 찾아가 샤워를 하면서 새벽을 깨웠다. 갑판 위로 올라갔다. 날이 점차 밝아오고 있었다. 하마이유호는 이미 현해탄을 건너와 오륙도 앞바다에 정박하고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말로만 듣던 '오륙도(五六島)'를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바라볼 수 있어서 더없이 좋았다. 왜 '오륙도(五六島)'라고 하는지 알 것 같았다. 다섯 섬은 일정한 간격으로 우뚝 솟아있어 분명히 오(五)이지만, 해안가 쪽으로 있는 나즈막한 섬이 그 육(六)에 해당하는 것 같았다. 밀물 때는 잠기고 썰물 때만 드러내는 섬이기에 통틀어 오륙도라고 한 것이다.
배도 잠에서 깨어났는지 부산항을 향해 이제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늘의 상태로 본다면 일출 장면을 충분히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갑판 위로 올라가 붉게 물든 동쪽 바다와 부산항의 전경과 오륙도의 모습을 번갈아 보는 즐거움도 있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을까? 드디어 저 멀리 보이는 수평선 위, 검은 안개 위로 검붉은 해가 불그스레 머리를 내밀기 시작했다. 점점 그 모습이 커지면서 또렷해지면서 이내 온 주변이 환해지고, 햇볕 기운이 점점 강렬하게 번져 가고 있었다. 배 위엔 일출 장면을 보면서 사진을 찍는 승객들로 한동안 복잡했다.
배는 한참 동안 부산항을 향하여 미끄러져 갔다. 속도는 점점 느려졌다. 부산 여객 터미널이 보이고 선원들의 움직임이 한동안 부산해지더니 배는 소리 없이 항구에 닻을 내렸다. 아침 9시가 조금 안 되었다. 4박 5일간의 안내를 해준 이종수씨와 헤어지고 우리 일행은 피로에 지친 육신을 이끌고 집의 아늑한 품을 기대하면서 포항으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 여행을 끝내면서
여럿이 함께 한 여행인지라 순간 순간 웃을 일들도 많았고, 추억 거리도 많이 생겼다. 두고두고 이야깃거리가 될 것 같다. 곧 설날이 다가온다. 온 가족들이 모인 가운데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고 모두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는 시간을 만들었으면 좋겠다. 명절을 쇠고 나면 곧 개학! 오랜만에 학생들 앞에 서야 하는 우리 교사들, 또 가르치는 싸움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 학생들에게 들려줄 수 있는 무슨 감동어린 이야기가 있어야 할텐데, 무슨 이야기를 할까? 차라리 지금 쓴 이 글을 읽어줄까? 이 글을 학교 홈페이지에 올려 한 번 읽어보게 할까?
2001. 1. 21
출처 : 마음 샘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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