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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백두산 기행문 - 논강, 2000년 8월

여행 이야기

by 우람별(논강) 2009. 8. 6.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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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을 다녀와서

1. 서울에서 연길까지
  2000년 7월 25일, 김포공항 국제선 청사는 아침부터 여행객들로 붐비기 시작했다.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다. 얼마 전 방송에서 해외 여행객들의 과소비 문제를 다루던 기사가 생각났다. 관광객들의 무분별한 행동으로 한국이 국제적으로 망신을 당하고 있다는 것과 '보신관광'이다 '어학연수'다 하여 외화를 물 쓰듯 낭비하는 현실을 집중 조명하면서 국민들의 각성을 유도하는 기사였다. 치욕적인 구제금융의 위기를 겪어야 했던 시절이 바로 엊그제 같은데, 무너질 것 같던 나라살림도 이제는 많이 호전되었는가? 금 모으기 운동, 과소비 추방운동에 앞장섰던 우리 국민들이었는데 그 동안에 다들 형편이 정말 좋아진 모양이지? 경제전문가들도 나름대로 걱정 어린 충고의 말을 아끼지 않는 상황이고 보면, 우리 국민들이 그 말을 주의 깊게 새길 일이 아닐까 한다. 나도 여행객의 한 사람으로 외화를 사용하게 될 입장이라서 퍽 조심이 되지만 일단 최소한의 경비라고 판단되는 15만원으로 일단 환전을 했다. 달러와 중국돈을 섞어서…….
  얼마 전 서울에 사는 맏동서로부터 백두산 여행을 함께 하자는 제안을 받았다. 지난 겨울부터 학술 세미나 형식의 테마 여행을 하기 시작한 박사님들의 모임에 업저버로 참여하지 않겠냐는 거였다. 작년 겨울 우연히 꼽사리끼어 태국이란 나라를 여행하게 된 것이 인연이 된 것인데, 올 여름 휴가도 함께 해도 되지 않느냐는 것이다. 특히 모임의 고문격인 K원장님께서 꼭 함께 여행을 했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신다면서 같이 가자는 것이었다. 대전의 둘째 동서도 함께 가기로 되어 있다고 했다. 처음에는 여러 가지 상황을 생각하여 완곡하게 거절을 했지만, 마음 한 켠에 자리잡고 있는 백두산에 대한 강렬한 호기심을 버릴 수는 없었다.
  아닌게 아니라 요즘 가정 생활이든 직장 생활이든 나의 생각대로 잘 풀리지 않는다 하는 불안감에 젖어있을 때가 많았는데, 차라리 잘 되었다 싶었다. 어쩌면 백두산 여행을 통하여 뭔가 많은 변화를 시도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결국 함께 가겠다는 나의 뜻을 밝혔다. 아내의 협조가 필요했다. 나중에 아내에게도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더니 미안할 정도로 흔쾌히 갔다 오라고 한다. 일행들은 대부분 부부 동반으로 여행을 가게 되어 있는데, 나는 아내를 두고 혼자 가야만 할 입장이 된 것이다. 찜찜하다. 그래도 아내는 신경 쓰지 말고 다녀오란다. 사실 아내는 올 여름 방학 내내 대구의 모 대학교에서 실시하는 ○○과 부전공 연수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함께 여행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다. 고마웠다. 남편에 대한, 아이들에 대한 배려가 눈물겹도록 고마웠다.
  김포 공항에서 오후 1시 50분에 출발 예정이던 중국 비행기 CA124편은 현지 사정으로 4시 30분에 출발한다는 방송이 흘러나왔다. 기가 막힐 노릇이다. 오늘 북경을 거쳐 바로 연길까지 가도록 되어있는데, 이렇게 되면 여행 일정에 문제가 생기지 않을 수 없다. 누구의 말에 의하면 중국 비행기는 보통 그렇다고 한다. 제 시간에 이륙하고 착륙하는 것이 드물다고 한다. 우리 나라와 비교가 되는 장면이다. 우리나라 사람들 같으면 승객들의 항의 농성으로 공항이 시끄러웠을 것인데 중국 사람들은 으레 그러려니 받아들인다고 한다. 사실일까? 그런 것을 너그럽게 받아들이는 것이 소위 대국적 기질이라는 것일까? 여행 첫날부터 중국에 대한 이미지가 좋지 않다. 저렇게 미적지근한 한족들에게 그렇게 힘없이 당해야 했고, 조공까지 바쳐야 했던 과거의 역사가 서글프다. 지정학적으로도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는 식민사학자들의 아부성 주장은 우리 민족을 한없이 슬프게 한다.
  공항을 이륙한 비행기는 어느새 바다를 날고 있었다. 아래로 보이는 자그마한 섬들과 섬들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적갈색 갯벌이 아주 인상적이다. 섬보다 훨씬 넓은 규모의 벌들은 섬사람들의 생활터전일 게다. 썰물 때라서 그런지 하늘에서 보는 바다는 그 깊이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물 속에 살짝 잠긴 갯벌이 하늘에서도 보일 정도다. 그냥 뛰어내려 수영이라도 하고 싶은 포근하고 아늑한 바다인 것이다. 강 하구의 삼각주를 보는 것 같이 갯벌과 갯벌 사이로 물 흐름이 꾸불꾸불하다. 하얀 꼬리를 만들며 물거품을 내뿜으며 천천히 움직이는 작은 배들도 귀엽다.
  출국하기 전 동료 교사들에게 백두산 간다는 사실을 떠벌리며 자랑하던 것이 생각났다. 멀리 있는 친구에게는 이메일을 통하여 자랑을 하고, 포항여자고등학교 근무 시절 나에게 편지를 200여 통의 편지를 보냈던 제자 '새날' 한테도 백두산 여행 소식을 전했다. 이리저리 무척이나 자랑하고 싶었던가 보다. 전교조 경북지부 통신 '참교육 카페'에도 백두산 소식을 올려놓았다. 출국 하루 전날, 남전 김재환, 들사람 장봉환, 토담 김용국, 연오랑 김현식, 김중주, 천종복 선생님 등은 백두산 가는 나를 위하여 환송회 비슷한 것을 베풀어주었다. 고마웠다. 특히 연오랑님은 통신에 올라있는 글을 읽고 일부러 술자리까지 찾아와 주는 치밀함과 다정다감함으로 나를 감동시켰다. 그러나 그는 이런 저런 얘기를 하면서 일행들을 감동시키더니, 나에게는 백두산 기행문을 써서 통신에 꼭 올리라고 부탁했다. 역시 연오랑다운 제안이라는 생각을 했고 그렇게 하겠다는 약속까지 하고 말았다. 졸지에 부담을 하나 더 안고 출발하게 되는 여행이었다.
  구름 위를 한참 날고 있던 비행기는 어느 덧, 오른쪽 창문을 통하여 요동 반도의 한 모퉁이를 살짝 보여준다. 옛날 고구려의 장병들이 거기까지 말을 타고 달려 왔을 법한 곳이다. 또 망망대해 위를 한참 날더니 드디어 육지가 보였다. 계속해서 비행기는 거침없이 중국 내륙지방을 날고 있다. 중국은 동부지역을 중심으로 산업화가 추진되고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하늘에서 얼핏 보아도 그런 것 같다. 그러나 위에서 바라보는 모습은 우리나라와는 사뭇 다르다. 평야지대가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지형도를 펼쳐보아도 확인할 수 있다. 이 평야지대가 끝나고, 만리장성이 지키고 서 있는 산악 지형이 시작되는 곳에 이르면서 드디어 북경 시내가 널따랗게 펼쳐지고 있었다.
  북경 공항에 내려 입국 절차를 마치자마자 곧바로 연길(옌지)행 국내선 비행기로 갈아탔다. 우리가 올 때까지 기다렸던 비행기다. 시간상으로는 벌써 이륙했어야 할 비행기지만 서울에서 늦게 출발한 CA124 편을 계속해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참 고마웠다. 이것이 바로 중국 비행기의 매력이 아닌가 생각하며 동료들과 너털웃음을 지으면서 비행기에 올랐다. 이륙 직후엔 비행기 창 밖으로 노을이 지더니 서서히 날은 어두워지고 있었다. 120여명 정도가 탑승한 비행기 안은 백두산을 오르려는 우리나라 사람들로 가득 찼다. 가끔씩 들려오는 기내 방송은 도통 알아듣지를 못하겠다. 영어와 중국어만 귀를 어지럽히고 있을 뿐, 우리말 안내 방송은 끝내 나오지 않았다. 거의 대부분 한국 사람들이 탑승한 비행기임에도 불구하고……. 백두산을 찾는 한국인들은 대부분 이 노선을 이용하고 있음을 저들도 알고 있을 텐데, 그 정도의 배려를 할 줄 모르는 불친절한 사람들인가? 무슨 먹은 마음이라도 있다는 말인가? 땅덩이 큰 나라의 알량한 자존심 때문일까? 몹시 불쾌하고 못마땅하다. 기본적인 예의를 모른다 싶으니 화가 슬며시 오른다.
  1시간 50분을 날아 드디어 연길 공항에 도착했다. 공항은 아주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수더분하게 생긴 여행 가이드가 반가이 우리를 맞이해 주었다. '현용필'이라는 이름의 조선족인데 연길 예술대학을 나왔고, 연극을 전공했다고 한다. 27살의 총각이고 4년간의 가이드 경력이 있다고 한다. 북한의 말씨를 닮았는데, 아주 성실해 보여서 일단 마음에 쏙 들었다. 연극을 전공했다고 하니 나중에 개인적인 얘기를 해 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사실 나도 대학 시절부터 지금까지 꽤 오랫동안 연극에 인연을 맺고 있다. 아마추어 배우로서 8편의 작품에 출연, 찬란한 무대의 조명을 받으며 연기에 몰입해 본 적도 있다. 1993년부터는 포항의 교사 극단 '형영'에 소속되어 나름대로는 연극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처지어서, 내친 김에 연극 문화에 있어서 중국과 한국을 비교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기회가 있으면 그와 얘기를 좀 해야겠다.
  연길의 밤 공기는 신선하고 상쾌했다. 우리나라 가을 날씨 같았다. 한국에서 후덥지근한 여름을 괴롭게 보내고 있던 터라 피서하러 온 기분이었다. 공항에서 숙소로 가는 길은 주변이 너무 컴컴하여 우리나라 도시의 밤거리와 대조적이었다. 자동차의 불빛이 무엇보다 강하게 느껴질 정도다. 우리 일행들은 숙소인 연변 대우호텔로 안내되어 곧바로 저녁 식사를 하게 되었다. 한식 뷔페인데 먹을 만 했다. 식당은 관광객들을 위한 노래와 무용 공연을 곁들인 디너쇼를 마련, 관광객들의 피로를 풀어주고 있었다. 아예 상설무대가 마련되어 있어 매일같이 정해진 프로그램대로 공연이 계속되는 듯 했다.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무희들의 춤 솜씨도 놀랍고, 국내에서 애창되는 노래를 가창력 있게 불러대는 무명가수들의 노래 솜씨 또한 놀라왔다. 관광객들은 흥을 못 이기겠다는 듯 박수를 쳐대기 시작했다. 어떤 사람은 용기 있게 무대로 뛰어올라 가수와 나란히 서서 노래를 따라 부르고 춤을 추었고, 함께 온 일행들도 한두 명씩 무대로 나가 흥겨운 노랫가락에 맞추어 가무를 즐기기 시작했다. 낯선 이국땅에서도 전통적인 우리 민족의 기질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었던 것이다.
  디너쇼 중간에 우리 일행은 살짝 빠져나왔다. 내일 있을 백두산 등정에 대비하여 잠을 자야 했다. 배정된 방에 여장을 풀고 간단히 목욕재계를 하고 '역사적인 백두산 등정을 굽어살펴 보시고 그 아름다운 천지를 볼 수 있게 해달라'고 하느님께 기도를 했다. 설레는 가슴을 달래며 잠을 청했다. 내 옆에서 같이 자게 될 분은 우리 일행들을 즐겁게 해주고 계시는 P박사님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드물게 보석을 연구하여 학위를 가지고 계신 분이시다. 까다롭지 않고 털털하신 분이어서 여간 다행스럽지 않다. 그러나 걱정이 앞섰다. 나는 피로하면 심하게 코를 고는 증세가 있기 때문이었다. 나로 인해 남에게 피해를 줄 수는 없지 않은가! 잠을 자다가 숨이 막혀 잠을 깬 경험이 몇 번 있다. 남편의 코고는 소리에 잠을 못 이루다가 참다못한 아내가 코를 막아버리는 행동을 하기 때문이다. 얼마나 서로가 미안한 노릇인가? 아내한테도 부끄럽고 미안한데 하물며 고명하신 박사님 곁에서랴. 박사님이 잠들기를 기다렸다가 잠을 청해야 했다. 나도 모르게 잠을 잤는데 그 뒤의 상황은 나도 모른다. 박사님이 먼저 잠들었기를 바랄 뿐이다.


2. 연길에서 백두산으로
  백두산 가는 날, 요란한 전화벨 소리에 잠이 깼다. 가이드가 전화를 걸어 잠을 깨우고 있는 것이다. 커텐을 열어젖히니 창문 밖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호텔 마당 앞에는 줄을 맞춰 특이한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눈에 많이 띈다. 그럴듯한 자세를 취하며 천천히 체조를 하고 있다. 동작 하나 하나가 무술의 동작 같다. 얼마나 천천히 움직이는지 나무늘보나 달팽이의 움직임 같다. 어떤 사람은 칼을 손에 거머쥐고 멋진 자세를 취하며 역시 천천히 움직이고 있다. 권법을 익히는 무사의 모습과 흡사하다. 4년 전 중국을 방문했을 때도 보았던 장면이라 생소하지는 않다. 아마 저들의 건강을 유지하는 방법이 바로 저 체조가 아닐까? 우리의 택견과 비슷한 자세가 언뜻언뜻 보이는데 '달팽이 체조'라는 이름을 붙이고 싶다.
  아침 식사를 하고 가이드의 안내를 받으며 백두산 여행길에 올랐다. 20명 정도가 탑승할 수 있는 마이크로버스를 빌려 타고 우리 일행 12명은 드디어 백두산을 향하여 힘찬 발걸음을 내디딘 것이다. 하느님께 기도를 올렸다. '사랑의 주님, 백두산을 찾아가는 우리 일행이 안전하게 백두산에 갈 수 있도록 보살펴 주시고, 백두산 천지를 향하는 우리의 정성을 갸륵히 여기어 좋은 날씨를 허락해 주소서.'
  연길 시내의 아침은 상쾌하였다. 엊저녁 공항에서 내려 숙소로 오던 길의 밤 경치는 어둡고 컴컴하여 우중충하더니 오늘 아침은 그렇지 않다. 기분이 한결 좋다. 연길시는 조선족 자치주로서 1985년에 시로 승격했다고 하며 인구의 40% 이상이 조선족이라고 한다. 중국의 여러 소수 민족 가운데 하나인 조선족은 그 어떤 소수 민족보다 지혜롭고 잘 살고 있다고 한다. 문맹률도 어떤 민족보다 아주 낮고 또한 부지런하다고 가이드는 소개를 했다.
  여기저기 빨간 택시가 많이 보인다. 번호판은 '吉H○○○○○'로 되어 있는데 '吉'은 '길림성(吉林省)'을 의미하고 알파벳은 차종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라고 판단된다. 또 하나 특이한 것은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사람이 매우매우 많다는 것이다. 중국에는 남녀노소 구분 없이 자전거가 중요한 교통수단이 되고 있는 것인데 우리나라 6,70년대의 도시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고 누군가 한 마디 하고 있다. 가이드는 차내 마이크를 잡고 계속해서 방송을 한다. 판에 박힌 듯한 내용인 듯 하지만 하나 하나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기억력이 놀랍고, 습관적인 말투 또한 개성적이어서 듣기가 좋다. 우리 일행에 대한 최대한의 서비스를 다짐하고 행동하려는 젊은이처럼 느껴졌다. 중국에서는 차를 몰고 다니는 운전사가 돈을 잘 벌고 가이드 역시 돈을 잘 벌기에 좋은 신랑감이라고 하며 익살을 부린다. 언제부터인가 사회주의 노선을 걸었던 중국도 돈이 많아야 살만한 사회로 바뀌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공산주의 사상도 어느새 자본주의의 영향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물질과 돈이 우선시 되는 사회로 변하고 있는 것이다.
  연길 시내를 벗어나자 가로수와 함께 하는 왕복 2차선 아스팔트 길이 계속 되고 있었다. 한참을 달리다 보니 여기 저기 포장도로 주변의 단장 공사가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곧 다가올 연변 자치주 성립일 전후하여 행해지는 환경미화 공사라고 가이드는 설명한다.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들은 우리나라 농촌과 크게 다르지 않다. 옥수수, 마늘, 파, 호박, 고구마, 콩 등 온갖 농작물이 건강하게 자라고 있었다. 땅은 대단히 비옥한 모양이다. '산비탈 농사'라고 표현해도 될 지 모르지만 웬만한 산구릉지는 모두가 농토로 변해 있었다. 산비탈을 최대한 이용하여 농지를 만든 것이다. 아마 화전민들이 맨 처음 일구어 놓은 것을 그 후손들이 아직까지 경작하고 있는 것 같았다. 농지를 최대한 효율적으로 이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동시에 이 넓은 경작지를 이용하여 누가 어떻게 농사를 짓는지 참 궁금하였다. 사람들이 모여 사는 촌락은 거의 드물고 사람들조차 보기 힘드는 농촌이니 더욱 그러했다. 나중에 사정을 잘 아는 조선족 동포의 설명을 통하여 알게되었지만, 밭 갈고 씨뿌리는 농사철이 되면 도시의 저임금 근로자들이 일당을 벌기 위해 너도나도 농촌으로 대거 이동하여 농사에 끼어 든다고 한다. 동정심에서가 아니라 그들의 필요에 의해 자연스레 농사일을 하면서 조금이나마 돈을 벌어 쓰게 되고, 땅주인(엄격히 말하면 지주는 국가이고, 국가 땅을 임대하여 쓰는 자)은 일손을 얻어 많은 농토라 하더라도 별 어려움 없이 농사를 지을 수 있다는 것이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격이라는 것이다. 한국 돈으로 쳐서 하루 일당 3,4천 원을 벌기 위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농촌으로 몰려든다는 사실이 신기할 정도였다. 우리나라도 비슷한 현상이 있기는 하지만, 받는 임금이 제법 높다는 것이 다를까?
  어설픈 도로지만 중요한 국도인지 통행료를 곳곳에서 받고 있었다. 우리나라의 '매표소'에 해당하는 것이 중국에서는 '收費亭'이라고 쓰는 모양이다. 우리의 '주유소'도 '加油站'이라고 쓰고 있어 좋은 비교가 되었다. 철도 건널목에 써 놓은 것도 보면 재미있다.'一停二看三通過(일단 멈추고 살펴본 다음 통과하라)' 그리고 영어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곳은 어디에도 없다. 모든 것을 자기화해서 표현하고 있는 것을 많이 볼 수 있다. 이것은 외래어 투성이로 오염된 우리말의 실정과 비교해 본다면 본받아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코카콜라가 중국에서 많이 소비되고는 있어도 상품 이름에는 'Coca-Cola'대신에 '可口可樂'라고 표현하고 있고, 'Hongkong'도 '香港'으로 표기하고 사람이름 '링컨(Lincoln)'도 '林肯'이라고 쓰는 것이다. 이런 모양새를 갖춘 자기 주체적인 표현들인 것이다. 외국어를 우리말의 '체'로 거른 다음 순화된 말로 사용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사용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몰주체적 태도는 반성해야 할 부분이 아닐까 싶다.
  백두산 가는 길에 터널을 한 군데 지난 적이 있다. 자동차가 통행하는 우리나라의 터널을 보면 어디든지 24시간 불을 밝혀 두고 있는데, 이곳의 터널은 암흑의 터널이다. 제법 긴 터널인데 터널 안 천정에는 불빛이 전혀 없는 것이다. 전기를 절약하기 위한 방편인지 시설 미비인지는 몰라도 엊저녁 연길시의 컴컴한 야경이 연상되었다.
  가끔 평화스런 풍경이 눈에 곧 들어 왔다. 누런 소가 길가에서 냇가에서 또는 산기슭에서 자유롭게 풀을 뜯고 있는 모습이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송아지는 연한 살색의 몸뚱이라 귀엽기 그지 없다. 차가 지나가도 송아지는 무서워하지 않는다. 도로가로 나와 사람들이 탄 차를 신기하게 바라보는 여유를 지녔다. 어릴 적 우리집에서 기르던 송아지와 똑같다. 한국소의 후손이 중국으로 이주해 살고 있는 것이리라. 자그마한 당나귀 한 마리가 자기 몸집보다 훨씬 큰 마차를 힘겹게 끌고 있었다. 당나귀의 주인인 듯한 한 노인네는 무슨 일인지 채찍을 들고 당나귀의 발걸음을 다그치고 있었다. 느긋한 중국인들의 모습은 아닌 듯 싶었다.
  우리 일행을 싣고 가는 버스 운전사는 둥그런 얼굴의 조선족인데, 가끔씩 궁금한 것이 있어 물으면 답을 해 주긴 하는데 너무 사무적이다. 말이 너무 없다. 오랜 시간을 여행하는데 함께 웃고 이야기하면 얼마나 좋을까? 살아가기 힘드는지 모든 게 귀찮은 모습이다. 생김새로 봐서는 사람 좋게 생겼는데 필요한 말 이외에는 거의 하지 않는다. 가끔씩 무슨 일로 전화할 때라든지, 가이드와 이야기를 주고받을 때는 자기들끼리 통하는 중국말로 지껄여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 그러나 그의 운전 실력은 가히 칭찬할 만 하였다. 아무리 오랫동안 달려도 흐트러짐 없는 자세가 돋보였다.
  전봇대가 계속해서 우리를 따라 가고 있다. 나무로 만든 나지막한 전봇대인데, 가로질러 박아놓은 나무에 사기로 만든 애자가 하얗게 달려서 전깃줄을 감아 전봇대와 전봇대를 연결해주고 있었다. 어릴 때 본 시골길의 전봇대와 흡사하다. 타국에 와 있건만 그리 낯설지 않은 모습이다.
  연길을 출발한 지 1시간 30분 정도 지나자 안도현이라는 곳에 도착했다. 여기에도 상당수의 조선족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살고 있다고 한다. 길림성, 요동성, 흑룡강성 등에 흩어져 살고 있는 우리 동포들은 언제부터 이주하여 살고 있는지 궁금했다. 일제 말엽 만주를 배경으로 하여 일본에 맞서 무장투쟁에 앞장섰던 독립투사의 후손들이거나 일제 말엽 일본의 반강제적인 만주 이주정책에 의해 내몰린 분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어쩌면 수 천년 전부터 우리의 말을 유지하면서 그대로의 민족적 기질을 유지하면서 용감하게 살고 있는 고구려의 후예들일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곱씹어 생각해 보면 속이 상하다. 만주 지방을 호령하던 기세 등등한 조상들은 어딜 가고 언제부터 저 낯선 자들이 주인노릇을 하고 있는가?
  백두산으로 가는 길, 눈에 비치는 여러 장면을 사진을 찍듯이 기록해 두고 싶다. 한 곳에 이르니 '만민이 일어나 지방병을 소멸하자'라는 구호가 눈에 띈다. 한 때 전염병이 창궐했던 지역인가 보다. 우리나라와는 다르게 농가의 집은 온통 빨간 벽돌집 투성이다. 색소를 넣은 빨간 벽돌인지 아니면 적토로 직접 구워 만든 벽돌인지는 몰라도 빨간 벽돌 일색의 농가들이 도로 주변에 널려있었다. 가끔씩 초가집도 눈에 띈다.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조선족이 사는 집과 한족이 사는 집은 집의 색깔만 보고 알 수 있다고 한다. 조선족이 사는 집은 벽에 흰 칠이 모두 되어있고, 한족이 사는 집은 그냥 그대로의 붉은 집이라고 한다. 역시 우리 민족은 흰색을 좋아하는 사람들인가 보다. 또 웬만한 집들의 담은 거의 목책(木柵)을 두르고 있는데, 나무를 켜서 만든 송판때기를 연결하여 만든 담장이 참 많았다. 잔 나뭇가지를 어설프게 엮어 둘러둔 담장도 눈에 띈다. 간혹 초가집도 제법 많이 보여 30년 전의 한국으로 돌아온 느낌이다.
  버스는 둘레의 길이가 약 30리 정도 된다는 '안도 저수지' 주변을 달리고 있었다. 노란 달맞이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우리나라의 도로가에 지천으로 피어 있는 달맞이꽃과 별 차이가 없다. 저수지 한 켠에 어설프기 그지없는 휴게소가 하나 보이는가 싶더니 버스는 그리로 서서히 빨려들어 갔다. 아니나 다를까, 화장실도 다녀오고 물건도 거기서 좀 사라는 것 무언의 압력을 받는 셈이었다. 조선족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천막을 둘러놓고 임시 매장을 만들어 온갖 물건을 팔고 있다. 산삼(실제는 장뇌삼 또는 인삼)을 팔고, 돌에 무늬를 넣고 자연석이라고 자랑하며 계란 만한 돌 하나에 우리 돈 1,000원에 판다. 수박 한 덩이를 3,000원에 팔고(나중에 다른 곳에서 700원에 샀음), 기념우표, 지도, 온갖 농산물도 팔고 있다. 백두산으로 향하는 한국의 관광객들을 고객으로 하여 조선족들이 장사를 하고 있는 모습이다. 동포들은 한국의 물가보다는 약간 싸게 팔고는 있는데, 중국의 물가와 비교해 본다면 터무니없이 비싼 가격이었다. 모처럼 찾아오는 우리 관광객들을 그저 돈벌이의 대상으로만 보고 있다는 게 조금은 서글펐다. 그렇게 장사를 해서라도 잘 살기를 진정으로 바란다. 휴게소에 딸린 화장실에 가 보았다. 천막을 사이에 두고 남녀를 구분해 놓았는데, 매우 불결했다. 곱게 자라기만 한 사람들이 와서 보면 기절초풍할 일일 것이다. 우리들이 아주 어릴 때 농촌의 뒷간과 또 느낌이 다르다. 개인적으로 편한 마음으로 볼일을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이 화장실일진대 여기는 눈치보고 일을 봐야하는 곳이다. 그래도 사람들은 이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 줄을 서서 기다리면서 볼일을 보고 있는 것이다.
  안도현 중심지를 떠난 지 시간이 얼마큼 흘렀을까? 차창 밖으로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가도 가도 아득하게 멀리만 있는 백두산, 일행들은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조용한 분위기가 어느 새 웃음이 넘치는 분위기로 바뀌었다. 모두가 돌아가면서 노래를 했다. 다 분위기 있는 노래였다. 그 중에서도 '선구자'란 노래가 그 분위기에 맞는 노래라는 생각이 들었다. J박사님 사모님의 노래였는데 너무 좋아 나도 따라 목청껏 불렀다. 둘째 동서는 '백두산'이란 말을 가지고 삼행시를 지었다. 백-백두산이라고 합니다. 두-두산이라고도 하죠, 산-산이름이에요. 모두들 배꼽을 잡고 웃었다. 특유의 말투와 요즘 신세대풍의 삼행시어서 그렇게 많이 웃었는가 보다. 맏동서인 정박사는 만주에서 고생하던 선친의 이야기를 하면서 만주 일대의 역사를 더듬고 있었다. 이 만주땅 어드메선가 고생하시던 선친을 생각하면서 내리 4곡의 동요를 불렀다. 정박사의 선친 얘기는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생각나게 했다. 유난히 갓난 시절부터 나를 귀여워 해 주셨던 할아버지였다. 30대 중반의 나이에 가난이라는 고통을 벗어나기 위해서 고향이 충청도 충주를 떠나 만주로 무조건 오셨다고 한다. 꽤 오랫동안 머물면서 돈을 벌었다고 하시는데 무슨 일을 하셨는지는 잘 모른다. 다만 일제 말기의 복잡한 국제관계 속에서 파생된 어떤 일에 동원된 인력이 아닐까 추측해 볼 뿐이다. 어디서 구입을 했는지 조그만 잔에 한 잔씩 돌리는 이과두주(二過頭酒)라는 술은 더욱 더 분위기를 고조시키고 있었다. 알콜 농도 60도 가까운 독주인데 북경에서 만들어지는 게 '오지지날'이란다. 한국의 소주와 위상이 같은 술이라고 누가 얘기한다.
  이도백하 중심지를 지나 달려가다 보니 포장도로가 끝이 나고 비포장도로가 우리를 또 맞이했다. 곳곳에 포장공사가 한창이다. 시멘트 포장인데 제법 정성을 들여 공사를 하고 있다. 다만 교통량이 적은 탓인지 공사구간의 교통신호가 전혀 없다. 인부들의 수신호라도 있어야 차가 막히는 일이 없을 텐데 한참을 기다렸다가 운행해야하는 일이 자주 일어난다. 운전자들은 별로 신경 쓰지 않겠다는 듯이 느긋하다. 기다리는 데는 이력이 나 있다는 태도다.
  백두산 전방 71킬로미터 지점, 소사하중학교가 눈에 띈다. 조선족중학교임에 틀림없다. 한글로 현판이 쓰여있다. 청년 교사 시절 걸핏하면 학생들에게 얘기하던 것이 있다. 나의 꿈과 소원이 있다면 남북이 통일되어 백두산 중학교 병사봉 분교에 가서 국어를 가르치는 것이라고 말이다. 그 병사봉 분교쯤으로 보이는 학교가 바로 저 소사하중학교가 아닐까 생각했다. 잠깐 내려서 학교 답사를 하고 싶었지만 욕심대로 할 수는 없었다. 백두산 천지를 보러 가기 바쁜 일행이 있었으니까. 아쉬웠다.
  백두산에 가까워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좌우로 키가 삐죽이 자란 침엽수와 관목숲이 많아지고 있고, 나무기둥이 유난히 하얗게 빛을 발하며 뽐내고 있는 자작나무 숲이 본격적으로 나타나고 있었던 것이다. 아름다운 자태와 큰 키를 자랑하며 쭉 뻗어있는 미인송(송풍라월)도 우리를 반겼다. 자생하고 있는 식물들 또한 예사롭지가 않다. 기록에 의하면 백두산 지구의 야생식물은 기후, 지형, 빙하 등의 원인에 의하여 온대, 한대 식물, 열대 식물의 잔여종마저 있어 식물 종류가 무려 2,424종에 이른다고 한다.
  해발 고도는 점점 높아지고 있었다. 시장기가 느껴졌다. 점심 먹을 시간이 된 것이다. 그런데 조금 올라가다 보니 '백두산한식중심(白頭山韓食中心)'이란 이름의 식당이 마침 거기 있었다. 이렇게 깊은 산중에 식당이 있다는 것이 신기하다. 관광객들을 위한 배려인가? 야심찬 사업인가? 점심을 거기서 맛있게 먹게 되었는데 강냉이밥이었다. 노란 옥수수 알맹이가 쌀과 드문드문 섞여서 새로운 맛이었다. 그 외의 음식도 우리들의 구미에 맞아 먹을 만했다. 점심을 먹고는 '白山茶藝交流中心'이란 간판을 내건 집으로 안내되었다. 커피 한 잔 하는 자리인줄 알고 들어갔더니 관광객을 상대로 하는 기업적인 차 판매점이었다. 귀엽게 생긴 조선족 처녀로부터 중국차에 대한 설명을 들으면서 그들이 따라주는 은차, 벌레차, 두견화차 등의 맛을 보고는 슬며시 나오고 말았다. 장삿속으로 베푸는 친절이라 나로서는 더 이상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박사님들은 선물용으로 차를 꽤 많이 구입한 것 같았다. 또 버스는 백두산을 향하여 차를 달리기 시작한다. 여전히 포장공사로 교통체증이 심하다. 백두산의 입산을 그렇게 쉽게 허락하지는 않겠다는 백두산 신령의 심술인 것 같다.

 

 

3. 아. 백두산 천지 그리고 폭포, 온천,
  이러구러 연길서부터 5, 6시간 정도 버스로 달려 드디어 백두산 바로 밑에 도착했다. 온몸이 뻐근하고 좀이 쑤셨다. 몇 년 전만 해도 백두산 가는 길의 전 구간이 비포장도로여서 차로 8, 9시간이 걸렸다고 하니 이렇게 빨리 온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비가 다시 뿌리기 시작한다. 날씨가 심상치 않다. 당장 우의가 필요했다. 아니나 다를까, 어느새 상인들은 우의를 내어놓고 팔기 시작한다. 날개돋친 듯 팔려나간다. 하나에 2,000원! 엄청 비싸다. 우리나라에서도 1,000원이면 산다. 해발이 가장 높은 곳에서 이루어지는 장사이니 만큼 까짓 것 인정하자. 별 갈등 없이 샀다. 우의의 질과 모양새는 안 좋았다. 실용적인 면에서 우리나라 제품과 비교가 안 된다. 그런데 이런 우의를 걸친 채 우중충한 모습으로 백두산을 뵈어야 한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좀더 격조 있는 모습으로 백두산에 올라 천지를 바라보고 싶은데…….
  시간이 조금 지나자 빗줄기가 약해지고 구름 층도 얇아지면서 사방이 갑자기 환해지는 것이었다. 좋은 징조였다. 천지물을 볼 수 있겠다는 기대감이 더욱 커졌다. 입구에서 우리 일행은 단체 사진 촬영을 하고 한참을 기다렸다. 줄을 서서 백두산을 오르는 짚차를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오늘 따라 관광객이 많은 지 30분 정도는 기다려야 한단다. 우리가 탈 차례가 돌아오자 짚차 두 대에 나눠 타고 마지막 등반 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관광객을 가득 태운 짚차는 그 가파른 길을 줄을 지어 올라가고 있는 것이다. 해발 2,000미터 지점에서부터 벌어지는 자동차 쇼가 시작되는 것 같다. 오르막인데도 달려가는 차의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모르겠다. 커브 길도 아랑곳하지 않고 빠른 속도로 차를 모는 것이다. 뭔가에 쫓기고 있는 상황이 아니고서야 이렇게 빨리 달릴 수 있는지 의심스럽다. 생명의 위협을 느낄 정도로 운전이 난폭하다. '시간은 돈'이라는 말을 깨닫고 있는 중국 사람들 같다. 20여분만에 천지 바로 밑까지 데려다 주고는 또 내려오면서 손님을 가득 싣고 내려오고 또 싣고 올라가고, 또 내려오기를 반복한다고 한다. 관광객이 몰려오는 한 때의 돈벌이겠지만 목숨을 건 장사였다.
  가파른 길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백두산 초입부터 좌우로 펼쳐지는 사스래나무 숲은 우리 일행을 압도할 정도로 빽빽이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나무 가운데서는 가장 높은 지대에서 살고 있는 것 같다. 자작나무는 길고 곧게 뻗은 몸을 자랑하지만, 사스래나무는 제멋대로 몸을 비틀고 있어서 자연그대로의 몸을 자랑하는 듯 했다. 사스래나무 숲을 조금 지나 한 모퉁이를 돌아서니 말과 글로 표현하기 어려운 장엄한 광경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느 정도의 경사를 이루면서 용암대지가 광활하게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식물 한계선이라고 하는 2,100미터 지점은 지났는지 나무 한 그루도 보이지 않는다. 다만 초록빛의 키 작은 풀들이 잔디밭을 연상케 한다. 쫓아가 품에 안겨 그저 그 위를 뒹굴고 싶다. 저 완만한 경사면은 마그마가 흘러나와 서서히 흘러가면서 굳어진 것이라고 판단되는데 이제는 짙은 초원으로 변하여 저렇게 늘씬한 몸매를 자랑하고 있는 것이다. 눈 아래 아득히 보이는 이름 모를 산들은 구름에 둘러 싸여 그 위로 고개를 조금씩 내밀고 있는데, 백두산 임금님의 분부를 기다리며 서있는 호위병 같았다.
  조금 올라가다 보니 놀라운 장면이 또다시 우리를 압도하기 시작했다. 바로 눈앞에서 야생화의 향연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백두산 초입에 우연히 보았던 빠알간 양귀비꽃의 자태가 생각났다. 차에 탄 일행들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여기저기 지천으로 피어있는 이름 모를 꽃들은 키 작은 요정처럼 서서 우리를 환영하면서 갖가지 태깔을 자랑하기라도 하듯 노랗고 하얗게 또는 파랗게 피어있는 야생화! 진한 향기를 내뿜으며 우리를 유혹하고 있는 것 같았다. 백두산 정상 부근의 세찬 바람에 쉴 새 없이 흔들리는 저 꽃! 한겨울의 매서운 추위와 바람을 견뎌내고 만년설의 봄 여름을 지내면서 이제야 꽃망울을 터뜨리는 저 옹골찬 생명력! 고개가 숙여질 정도로 경이롭다. 백두산에 눈이 녹은 것이 일주일 전이라고 하더니 이제야 본격적으로 꽃이 피고 있는 것이다. 이런 야생화와의 깊은 인연을 한 순간이라도 남겨두고 싶다. 당장 차에서 내려 저 아름다운 꽃들을 만져보고, 냄새도 맡아보고 기념 사진으로라도 담아두고 싶다. 차를 세우려 했으나 안 된단다. 차가 계속해서 운행 중이기 때문에 중간에 설 수 없다고 한다. 차 안에서 어설프게나마 길 좌우에 있는 꽃들에 카메라를 들이대고 연방 셔터를 눌렀다.
  정상에 오르는 막바지 길에서는 짚차도 지치는 듯 거친 숨을 몰아쉬는 것 같았다. 20여분간의 질주 끝에 천문봉 바로 밑 주차장에 도착했다. 참, 이렇게 높은 곳까지 자동차가 다닌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다. 올라오던 찻길은 잿빛의 보드블록을 끝까지 깔아 놓았는데, 가장 자연스런 백두의 땅에 가장 인공적인 벽돌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 백두산에 대한 모욕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정상 부근에 오니 비가 더 온다. 바람이 세차다. 아무래도 천지를 보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날씨의 변화가 심하다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하필 내가 올 때 이렇게……. 나는 지금까지 남다른 안복(眼福)을 타고났다고 믿었는데 오늘은 아니다 싶었다. 기온은 6℃ 정도라고 하지만 느껴지는 온도는 영하에 가깝다. 그래도 한 번 기대를 해 보자. 갑자기 날씨가 좋아질 수도 있으니까.
  바로 눈앞에 보이는 천문봉 정상을 향하여 우의를 입은 채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5분 정도만 천천히 올라가도 다다를 것 같은 정상이 바로 저 앞에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차만 타고 6시간을 달려왔는데 이제는 걸어서 정상을 오르는 것이다. 육당 최남선 일행이 장군봉(병사봉)에 오르기 시작한 것은 1926년 7월 24일, 등정을 시작한 지 열흘이 넘는 시간 동안 쉬지 않고 풍찬노숙(風餐露宿)하면서 조금씩 조금씩 땀흘려 걸어 올랐던 데 비하면 우리 일행은 실감나지 않는 등정을 하고 있는 것이다. 시간만 허락되었다면 짚차를 타지 않고 걸어서 4시간 정도 오르는 코스(입구 → 장백폭포 → 달문 → 천지)를 선택했다면 하는 아쉬움도 솔직히 생겼다. 쉽게 넘볼 수 있는 산이 아닐진대 너무 쉽게 정상 가까이 온 것이다.
  막바지 급경사를 오르는 것도 만만하지는 않아 보인다. 둘째 처형은 조금 오르더니 힘이 몹시 드는지 도와달라고 한다. 처형의 손을 잡아끌면서 올라갔다. 여전히 숨이 많이 찬 모양이다. 아마도 높은 곳에 올랐으니 산소 부족인 것 같다. 그러나 나의 발걸음은 그다지 힘들지는 않았다. 드디어 꿈에나 그려보던 백두산에 올라 보게 되었다는 만족감, 설레임으로 평소의 등산보다는 훨씬 가볍게 느껴졌다. 천문봉은 굵은 화산토인 부석(浮石)과 그 부석에 듬성듬성 박혀있는 흑요석으로 덮여있는 봉우리였다.

    드디어 백두산 천문봉 봉우리 정상
    아, 바로 여기는 백두산!
    우리 민족의 성산, 백두산!
    우리 민족의 모든 역사를 간직한 채
    몇 천년을 변함 없이 살아있는
    우리의 아버지, 어머니 같은 산이여,
    당신의 아들, 내가 왔습니다.
    당신의 힘찬 기상을 닮고 싶어 이렇게 왔습니다.
    당신의 품에 안기고 싶은 당신을 닮고 싶은
    우람별 이권주가 왔습네다.

  천문봉 일대는 짙은 운무가 하얗게 뒤덮고 있어서 5미터 앞을 볼 수 없을 정도였다. 비바람은 한겨울의 폭풍만큼이나 세차게 불었고, 그토록 기도하며 보고 싶어했던 천지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한눈에 펼쳐지기를 기대했던 것이 지나친 욕심이었는가 보다. 쉽게 그 위용과 아름다움을 보여주지는 않았다. 옆에 있던 둘째 동서는 현기증 증세를 보이며 괴로워하고 있었다. 고생하지 않고 너무 쉽게 오르는 등산객들의 태도가 얄미운지 우리 일행에 대한 백두산의 꾸짖음은 그렇게 표현되는 것 같았다.
  그대로 내려갈 수는 없었기에 추위를 참으면서 20분 정도 기다렸을까, 어느 한 순간, 천지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내 눈앞의 운무를 살짝 걷어가더니 갑자기 파란 천지 물이 발아래 보이기 시작했다. '와, 보인다 보여! 저것 좀 봐!' 장엄한 광경이었다. 시퍼런 물이 저 아래서 손짓하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저 아래가 천지! 숱한 전설을 간직한 채 몇 천년을 살아있는 천지의 신비가 우리의 발밑에서 우리 일행을 불러모으고 있었다. 탄성을 지르며 카메라를 들이대는 순간, 얄밉게도 천지는 또 다시 모습을 감추고 말았다. 너무도 안타까워 눈물이 날 뻔했다. 한참을 또 기다려 보았지만 끝내 다시 볼 수는 없었다. 좀처럼 제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하는 듯 했다. 그 정도의 광경이라도 본 것을 천만 다행이라고 스스로 위로했다. 백두산에 여러 번 올라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차라리 천지를 못 보더라도 이대로 걸어가서 천지를 둘러싼 13개의 봉우리를 모두 밟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백두산 최고의 봉우리인 장군봉(병사봉)에 우뚝 서서 마음껏 소리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몇날 몇일이라도 이 주변에 머물면서 백두산 구석구석을 답사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운무가 걷히기를 기다렸지만 별 변화가 없다. 정박사님의 제안으로 우리 일행은 '통일의 노래'를 목이 터져라 불렀다. 노래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내 목소리가 심하게 떨리고 있음을 느꼈다. 울컥 나오는 눈물을 참기가 어려웠다. 38선을 깔고 죽겠다던 김구 선생이 생각났다. 4년 전 상하이의 허름한 임시정부 청사를 방문했을 때, 김구 선생 동상 앞에서 흘렸던 눈물이 생각났다. 통일되는 세상에서 내가 할 일이 무엇인가를 가르쳐주는 듯 했다. 하산하기 직전, 함께 간 동료들과 손에 손잡고 대학원장님의 주도로 통일을 기원하는 기도를 바쳤다. 원장님의 간절한 기도는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통일에 대한 강한 소망을 단 몇 마디에 담아내기는 어려웠던 것이다. 비바람을 맞으며 손을 꼭 잡고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했다. 우리들은 이미 한 마음 한 몸이 되어 통일의 화신이 된 느낌이었다. 우리의 간절한 기도가 백두산 천지에, 아니 우리가 모여 사는 한반도에, 남북 위정자들의 가슴속에, 깊이깊이 새겨지기를 간절히 바랬다. 언제 다시 이 백두산을 다시 올 수 있겠는가 하는 마음에 봉우리 주변 여기저기 흩어져있는 자그마한 흑요석 몇 개를 손에 넣고 가파른 길을 내려오기 시작했다. 통일되는 날까지 잘 간직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천문봉 주차장까지 내려왔을 때는 비바람에 온몸이 다 젖어버렸다. 우의를 입었는데도 소용이 없었다. 너무 추웠다.
  올라올 때 탔던 짚차를 다시 타고 내려오는 길은 또 다른 매력이 있었다. 길의 오른쪽으로 펼쳐지는 용암대지와 왼쪽으로 보이는 병풍 같은 산세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감히 범접하지 못할 위엄이 바로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말로는 도저히 표현하지 못할, 자연의 위대함은 우리들을 압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올라갈 때 보았던 야생화는 여전히 온몸을 흔들면서 '호르르 호르르르' 이별의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추위에 떨고 있는 우리를 포근하게 감싸주는 듯해서 더없이 정겨웠다. 사람들을 사랑하고 싶다. 저 야생화처럼 은은하게.
  짚차에서 내려 다시 버스를 타고 장백폭포가 있는 쪽으로 올라갔다. 조금 달리자 온천 지구가 나온다. 2, 3개의 온천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오늘 저녁은 여기 어드메쯤에서 자게 되어 있는 것이다. 식사를 하기 전에 일단 폭포가 있는 데까지 갔다 오기로 했다. 장백폭포(비룡폭포)를 찾아가는 것이다. 거대한 협곡 저 멀리 폭포가 보인다. 오른쪽엔 주상절리 모양의 높은 암벽이 우람하게 서 있고, 암벽 밑 계곡 주변에는 사스래나무 군락이 폭포 쪽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왼쪽을 바라보면 깎아지른 벼랑이 하늘 높이 우뚝 솟아있는데, 벼랑 곳곳에 화산 폭발 때 타다 만 흙덩이인지 붉은 빛을 띤 것들이 드러나 보였다. 빙하의 활동으로 생겨난 거대한 협곡이라 관광객들을 그 웅장함에 탄성을 지르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가는 길목에 있는 88℃의 노천 온천물에 자연스레 삶긴 계란을 하나씩 사먹고 한 걸음씩 한 걸음씩 폭포를 향해 걸었다. 천지에서 달문을 지나 하얗게 흘러나오는 물이 그대로 거대한 60미터 높이의 장백폭포를 만들고는 우렁찬 소리를 내면서 떨어지고 있는 것이다. 한 마리의 용이 천지로 기어오르는 형상이라 '비룡폭포'라고도 하는가 보다. 폭포 아래 서서 폭포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폭포의 하얀 물보라는 하늘에서 내리는 선물인 것 같고, 허리를 굽혀 두 손으로 그 물을 움켜 마시고, 그 물에 발을 담그니 그저 좋다. 인간이 맛보는 감격으로는 이만한 것이 없을 것만 같다. 이것이 곧 하늘과 인간의 조화가 가져다주는 감동의 극치가 아닐까 싶다. 천지물은 발이 시릴 정도로 차가웠다.
  폭포에서 2시간 정도 오른쪽 사면을 타고 더 기어오르면 천지물이 강으로 흘러 내려가는 길목인 달문에 다다를 것 같고, 거기서 조금만 더 걸어가면 봉우리 아래 좋은 지점에 종덕사터가 있을 것 같고, 이내 광활한 하늘 연못, 천지에 도착하는 꿈같은 등산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시간상 우리는 그냥 등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천문봉에서 천지를 보지 못한 것만큼이나 아쉬웠다. 천지의 물은 동쪽으로 흘러 두만강이 되고 서쪽으로 흘러 압록강이 된다고 옛날에 배웠지만, 달문으로 흘러나와 폭포로 떨어지는 물줄기는 실제로 쑹화강으로만 흐른다고 한다. 이 물은 결국 쑹화강의 상류가 되는 셈이다. 물이 흐르며 돌에 부딪치는 소리가 하도 커서 멀리 보이는 폭포 소리도 이젠 들리지 않는 것 같다. 내려오는 길에 노천 온천에서 계란 하나를 다시 하나 사 먹었다. 
  날은 서서히 어두워지고 있었다. 숙소 주변에 있는 온천에 들어갔다. 얼마 전에 세워졌다고 한다. 우리 돈 7,000원에 해당하는 중국돈으로 입장료를 지불하고 목욕을 시작했다. 천지의 물과 온천물을 섞어서 목욕하기 좋은 온도로 조절한다고 하는데 지금까지 가 본 어떤 온천보다 훨씬 수질이 좋은 것 같다. 비바람에 시달리던 몸이라 따스한 온천물이 온몸에 그대로 전해졌다. 어머님 마음만큼이나 따스했다. 넓은 천지의 품에 안긴 듯한 느낌으로 한동안 행복감에 젖어 헤엄치듯 탕 안을 돌아다녔다.
  長白山國際旅遊賓館(中國 吉林省 安圖縣 二道白河鎭 ☏0433-5746001)이란 이름의 호텔에서 하룻밤 묵게 되었다. 일단 숙소에 여장을 풀고 1층 식당으로 내려왔다. 창문이 있는 쪽을 제외하고는 식당의 세 벽은 온통 백두산 그림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북한의 화가들이 그린 그림이라고 한다. 서쪽의 벽은 커다란 하나의 그림만 걸려있는데 식당 지배인은 북한의 국보급 그림이라고 자랑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이 호텔은 북한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 같다. 호텔의 주인(總經理 朴正人)도 일본에서 제법 많은 돈을 벌었는지 몇 년 전에 이곳에다 중국의 협조를 얻어 깨끗한 시설을 자랑하는 호텔을 세우게 되었다고 한다. 음식은 아주 깔끔하게 나왔는데, 서비스를 담당하는 '최경희'라는 아가씨가 아주 인상적이다. 평양에서 온 아가씨라고 하는데 깔끔하게 차려입은 제복이 잘 어울렸다. 북한 방송에서 들어보던 강한 악센트의 사투리를 그녀에게서 직접 들어보는 즐거움이 거기 있었다. '백로주'라는 북한 술을 권하는 아가씨의 제안에 모두들 '좋다, 어서 먹어 보자.'고 아우성이었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정성을 다하는 아가씨의 태도가 아주 정겹다. 웃음을 잃지 않은 표정이 얄미울 정도로 아름답다. 이 호텔의 경영 방식이 '친절'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우리들을 최고의 손님으로 대해 주는 것 같다. 흥겨운 식사시간이었다. 호텔 로비에는 거대한 백두산 호랑이가 대리석으로 조각되어 있는데, 이 조각품은 북한에서 육로를 통하여 백두산 바로 밑까지 수송되어 왔다고 한다. 보통 수준의 조각이 아닌 것인지 P박사는 혀를 내두르며 감탄을 한다.
  식사 후 커피를 한 잔 하고 숙소 앞 '두견산장'에 노래방이 하나 있길래, 이곳의 노래방 분위기는 어떤가 싶어 잠깐 들러보고 싶은 호기심이 발동했다. P박사님을 모시고 가이드 현군과 셋이 함께 들어갔다. 비가 많이 내리는 지역인지 실내는 온통 곰팡이 냄새가 코를 찔렀다. 노래방 주인은 중국인이고 종업원들은 조선족인 듯 했다. 그 중 젊어 보이는 아가씨가 생글생글 웃으면서 같이 놀자고 한다. 요염한 말투와 행동이다. 주인은 맥주 5병, 마른 안주 하나를 기본으로 하고 아가씨의 수고료를 포함해서 8만원 가량의 비용을 요구하는 것이다. 터무니없이 비싼 액수이다. 그냥 나가려 했지만 P박사님께서 만류하면서 그냥 잠시 놀다 가잔다. 백두산 바로 밑에 있는 귀하디 귀한 노래방이니 그러려니 생각하고 분위기를 바꿔보기로 했다. 술을 몇 잔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곧 돌아가면서 노래를 하게 되었는데 웬만한 노래는 다 구비되어 있어서 신청하는 대로 다 부를 수가 있었다. 가이드인 현군은 연극 배우라 그런지 노래 솜씨가 정말 대단했다. 연변 지역에서 주로 불려지는 노래를 우리들에게 들려주었는데 가사가 대단히 서정적이다. 삶에 지친 사람들의 노래라서 그런지 슬픈 분위기의 노래가 대부분이다. 현군 자신이 살아온 삶을 노래로서 표현하는 듯 하기도 했다. 중국인 아가씨와는 말이 안 통했으므로 현군에게 통역을 부탁해서 몇 마디 대화를 나눴는데 웃음 섞인 중국말로 열심히 대답을 하는 모습이 귀여웠다. 한 시간 가량 놀다가 숙소로 돌아왔다.
  침실은 가이드 현군을 포함해서 세 명이 함께 잠을 자야 하는 3인용 방이다. P박사님은 피로에 지쳐 먼저 잠자리에 들었고, 현군과 나는 탁자를 사이에 두고 앉아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다. 여행을 하면서 궁금하게 생각하던 간자체 몇 글자를 배웠다. 우리나라에서 쓰는 고문 한자와 비교해서 살펴보니 재미가 있었다. 제법 많은 간자체 글자를 익혔다. 몰랐던 글자를 알게 되는 즐거움, 바로 그것이었다. 밤이 깊어짐에 따라 연극과 관련된 이야기를 잠시 더 나누다가 다음 날 일정 때문에 잠을 청해야 했다.

 

 

4. 용정으로 가는 길
  아침 5시에 기상을 했다. 아침 일찍이 출발해야 오늘 여행 일정을 충분히 소화해 낼 수 있다는 판단에서 서두른 것이다. 여전히 엊저녁의 친절이 계속되고 있었다. 꽤 이른 시간인데도 아침 준비가 다 되어 있는 것이다. 엊저녁에 보았던 그림들을 다시 한 번 찬찬히 훑어  보니 작품이 더 가슴에 느껴졌다. 음식도 깔끔하게 차려져 그런지 더욱 맛있다. 엊저녁 마시다 남은 백로주 한 잔의 맛도 금상첨화다. 웃음꽃을 피우며 아침 식사를 하고 로비에 나와, 엊저녁 보았던 백두산 호랑이 조각상 앞에 다시 섰다. 살아있는 듯 했다. 백두산 밀림 어디에선가 살아 있을 것만 같은 저 호랑이건만 실제로는 멸종되었다고 한다. 백두산을 포효하던 호랑이가 이렇게 조각상으로 밖에 남아 있지 않은 현실이 야속하다. 
  여장을 챙겨서 하산하는 차에 오르니 호텔 직원들 모두가 호텔 밖으로 나와 전송을 한다. 사장인 듯한 노인 朴正人씨가 양복을 곱게 차려 입은 채 고개 숙여 인사를 하고 연신 손을 흔들어 대고 있다. 직원들도 물론 차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같은 행동을 계속하고 있는데, 일본식 경영방식을 취하고 있다고 설명한 호텔 선전물이 사실이라는 것을 확인한 셈이다.
  마이크로 버스가 30분쯤 달려 내려왔을까? 차의 기어 상태가 안 좋은지 요란한 기계음이 계속해서 들리기 시작한다. 이내 운전기사도 차를 멈추고 차의 상태를 점검해 보더니 묵직한 수리 기구를 꺼낸다. 고개를 젖는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아무리 기다려도 시간만 흘러갈 뿐 쉽게 고치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 큰일났다 싶다. 첩첩 산중에서 차가 고장났으니 이것을 어쩌랴! 운전수에게 항의해 봐야 별 소용이 없을 테고, 난감했다. 정박사는 불편한 심정을 내색하지 않고 초조하게 기다리던 일행을 모두 한 자리에 자연스레 모이게 한 다음 또 하나의 추억거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특유의 웃음을 지으며 준비해 두었던 음식을 길바닥에 내려놓고 간단한 술자리를 만들어 재미난 분위기를 유도했다. 모두들 협조해 주었고, 또 그렇게 하는 것이 최선이었는지도 모른다. 한참을 웃고 즐기다가 슬며시 빠져온 L박사님은 길가에 여기저기 피어있는 꽃을 꺾어 한 움큼 모으더니 그것을 묶어 부인에게 선물을 하는 것이 아닌가? 머리에도 예쁘게 생긴 노란 꽃을 하나 꽂아주는 재치까지 보여주었다. 일행들은 일제히 박수를 치면서 난리가 났다. 다들 부러운 눈으로 그 장면을 보고는 약속이나 한 듯 정박사, 장박사님도 같은 행동을 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 모습이 하도 아름다워 그 보기 좋은 장면을 서로서로 사진기에 담아주었다. 숲에서 새어나오는 백두산 자락의 맑고 깨끗한 공기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신선함 그 자체였다. 이런 데서 몇 날 몇 일이고 살다가 가고 싶다. 속세의 찌든 때를 벗어내고 싶다. 백두산의 정기를 온몸에 담아서 내려가고 싶다. '봉이 김선달 대동강물 팔아먹듯' 누군가 백두산 공기를 퍼 담아서 사람들이 복잡하게 모여 사는 곳에다가 팔 수 만 있다면 하루아침에 백만장자가 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아직도 운전수는 옷에 기름칠을 하면서까지 최선을 다하여 차를 고치고 있다. 차량의 중요 부분을 거의 해부해 놓다시피 했다. 연길에 있는 본사에 연락하여 다른 차가 온다고 해도 4시간 이상은 기다려야 한다고 한다. 이 차를 고쳐서 간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판단이 섰는지 가이드는 백두산 쪽으로 올라가는 트럭을 한 대 빌려 타고 다른 여행사의 협조를 구하러 간다며 올 때까지 기다리란다. 아마 다른 차에 꼽사리 끼어서 하산해야 할 것 같았다. 어쨌든 지금 상황에서 그 방법 이외에는 별 방법이 없었다. 우리 일행은 시간을 아끼는 의미에서 저녁에 예정된 세미나를 고장난 차안에서 하기로 결정했다. 주제는 '우리의 백두산'이다. 제일 먼저 어설픈 나보고 백두산에 관련된 얘기를 하란다. 특별히 준비된 얘기도 없어서 몇 일 전 읽었던 최남선의 '백두산근참기(白頭山覲參記)'의 일부를 일행들에게 읽어 주었다. 천지에 도착한 감격을 묘사하고 서술한 부분을 집중적으로 읽었다. 그냥 읽는 것보다는 실감나게 얘기로 한다면 더욱 자연스러울 테지만 육당의 생생한 글을 읽어보는 것도 의미가 있겠다 싶었다. 우리가 어제 본 천지와 육당이 보고 표현한 천지를 스스로 비교해 보는 기회라고 판단했다. 나의 발표가 끝나고 돌아가면서 한 사람씩 백두산에 오른 감격을 표현하는데 기본적인 생각들이 비슷한 것 같았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웃음꽃을 피웠고 재미있는 얘기는 계속되었다. 특별한 체험을 했던 예상 밖의 시간이었다.
  차가 고장난 지 3시간 정도가 지나자 답답한 상황이 해결되었다. 대형 버스가 한 대가 우리들 앞에 구세주처럼 나타났던 것이다. 우리의 가이드 현군이 사정사정 협조를 구해서 드디어 우리 앞에 나타난 대형 버스인 것이다. 전라북도 전주에 사는 사람들의 단체 관광버스였는데 뒷자리가 다행히 14석이 비어 있어서 협조가 가능했던 것 같다. 눈물이 날 정도로 고마웠다. 그 고마움을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표현했고 두 팀이 함께 어울려 노래를 부르기도 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나도 노래부르기를 요구받고 앞좌석으로 나가서 판소리 풍으로 '진주난봉가'를 한 곡 불렀다. 특히 맏동서 정박사님은 불려나가서 우리 일행을 대표해서 전주의 인심을 찬양하면서 노래보다는 재미있는 역사 이야기를 풀어놓아 반응이 좋았다.
  2시간 가량 차를 타고 백두산의 원시림을 빠져나와 안도현 송강(松江)이라는 곳에 이르렀다. 거기에서 점심을 먹고 차를 갈아타도록 되어 있었다. 식사를 하고 차를 기다리면서 식당 앞에서 장사를 하고 있는 조선족 동포들과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눴다. 특히 독립군 지도자인 홍범도 장군을 존경한다는 어떤 아저씨의 친절이 정답다. 여느 장사꾼과는 다르다. 우리들의 조그만 친절에 간이라도 빼내줄 정도로 잘 대해 준다. 40대 중반의 나이지만 순박하기 그지 없다. 알고 보면 중국에 살고 있는 우리 조선족들이 모두 저 분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기다리는 차는 아직도 오지 않았다. 길 건너에 허름하게 생긴 소학교가 하나 있어 잠깐 들러 보기로 했다. '안도현 송강 2소학교'라는 곳이다. 어린 꼬마들이 백두산 천지 주변의 약도가 그려진 손수건을 가지고 와서 사달라고 매달리기 시작했다. 1달러 짜리 지폐가 한 장 있어서 제일 가냘프게 보이는 여자 애가 파는 손수건을 하나 사 주었는데 나머지 애들도 자기 것도 사달라며 울먹거리고 있었다. 마음이 아팠다. 천 원짜리 돈도 없다. 만 원짜리와 10달러 짜리 지폐를 함부로 줄 수도 없고 해서 내키지는 않았지만 짜증을 내고 표정을 무섭게 하여 멀리 가게 했다. 그래도 한 녀석은 못내 아쉬운지 내 주변을 계속 맴돌고 있었다. 교실은 초등학교 건물이라 그런지 아주 작았고 우리말로 환경정리가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족 학교인 것 같다. 어린 시절 다니던 농촌의 국민학교 교실과 비슷했다. 방학이라 공부하는 학생들은 한 명도 없었고, 학교 건물 주변의 무성한 잡초가 을씨년스런 학교의 분위기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인기척을 느꼈는지 창문을 삐죽이 열고는 마음 좋아 보이는 아가씨가 검지손가락을 입에 대어 조용히 하라고 하면서 겸연쩍게 웃는다. 그곳은 학교 부설 유아원인 듯 했다. 2, 3살 정도로 보이는 꼬마들이 낮잠을 자고 있었다. 아이들의 잠을 깨울세라 조용조용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복도에는 이 학교 교직원의 사진과 이름을 써서 걸어놓은 액자가 하나 눈에 띄는데 성과 이름으로 보아 대부분 조선족 교사였던 것 같고 나이도 젊었다. 교감을 포함하여 모두 14명이 근무하는 학교였다. 학교 재정이 열악한 조선족 학교의 애환을 생각했다.
  기다리던 버스는 우리를 싣고는 용정시를 향하여 달리기 시작했다. 윤동주의 고향, 해란강이 시내 한 복판을 가로지르고 일송정이 굽어보는 북간도의 땅, 우리의 옛 터전을 찾아가는 것이다. 버스를 타고 비포장도로를 벌써 몇 시간을 달리고 있는지 모른다. 쉼 없이 덜컹덜컹 굽이길을 달려가다 보면 통행세를 받는 곳이 군데군데 눈에 띄었다. 교행하는 차도 거의 없다. 백두산 자락에서 벌목한 나무를 싣고 힘들게 기어가는 트럭을 가끔 만나지만 여행하는 분위기로서는 아주 그만이다. 차를 타고 가고는 있지만 천리마의 안장에 앉아있는 것 같다. 차의 운전석 옆의 맨앞에 앉아 여행하니 그 기분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쏜살같이 말을 달리며 자신의 용맹을 자랑하고, 온 세상을 호령하던 고구려의 장군이 된 듯하고 인적이 드문 만주 땅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일본군과 싸우다 외롭게 죽어갔던 독립군의 한 사람이 된 듯하기도 하다. 순간적인 착각이지만 용맹스런 선조들의 후예가 바로 나요, 내가 바로 이 일대를 관장하는 책임자인 것만 같다. 만주 땅이 그렇게 낯설지 않은 것은 바로 그런 착각에서 오는 익숙함일 것이다.
  백두산에서 오랜 시간을 달려 화룡현을 경유, 용정시에 가까워 올 즈음, 가이드가 바빠지기 시작한다 이런 저런 설명을 하면서 차안의 침묵을 깨뜨렸다. 저 멀리 나지막한 산꼭대기에 서 있는 조그만 정자 하나를 가리켰다. 그 유명한 일송정이며 해란강이 그 밑을 흘러간다고 한다. 조금 더 가서 용정시가 한 눈에 보이고 일송정이 잘 보이는 적당한 지점에 차를 세웠다. 일송정을 배경으로 사진 촬영을 하고 누군가 제안한 '선구자'란 노래를 소리 높여 불렀다.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늙어 갔어도, 한 줄기 해란강은 천년 두고 흐른다.
   지난 날 강가에서 말달리던 선구자, 지금은 어는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용두레 우물가에 말을 씻던 선구자…….

  아직도 젊은이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시인, 윤동주의 모교인 명동중학교를 찾아갔다. 학교는 제법 컸다. 운동장에서는 동네 축구 경기가 열리고 있는지 운동장 주변에 제법 많은 사람들이 경기를 관람하고 있었다. 대성중학교가 있던 터에 새로운 건물이 들어섰지만 그의 대표작인 '서시'가 새겨진 윤동주의 시비와 유물관이 남아 있어서 관심을 가지고 찾아오는 사람의 발걸음을 붙잡기에 충분했다. 2층 전시실에는 당시 용정에 있던 중학교의 제반 역사가 사진과 함께 기록되어 있었다. 대규모로 찾아오는 관광객들을 위해 전문적으로 설명하면서 도우미 아가씨도 항상 대기 중에 있었다. 그만큼 윤동주는 우리 국민들의 가슴속에 살아남아 사랑을 받고 있다는 증거이리라. 이곳을 찾아온 웬만한 관광객들은 시비에 새겨진 서시 정도는 낭송하면서 돌아갈 것만 같다. 현재까지 남아있는 학교는 대성중학교 하나밖에 없다고 한다. 방명록에 내 이름을 적었다. 그리고 윤동주 기념 사업에 쓸 기금 마련에 협조하라는 아가씨의 권유가 있어서, 잘 됐다 싶어 적은 돈이나마 기부했다. 좋아하는 시인에 대하여 마음을 전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더없이 기뻤다. 그가 남긴 작품을 통하여 윤동주 시인을 처음 알았지만 막상 그의 모교를 와서 보니 그와 직접 면전에서 만나 대화를 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자신을 드러내기 싫어했고, 유난히 부끄럼이 많았던 시인, 조선독립운동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치안유지법에 의해 2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1945년 4월 일본의 후꾸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하기까지 겨우 28년의 세월만 살다 간 시인, 치열하고 적극적인 저항은 아니었으나 끝까지 민족 의식을 잃지 않고 민족에 대한 애정과 사랑을 간직했던 시인, 식민지 백성으로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비굴하게 살고 있는 것을 부끄러워했던 시인, 그런 민족 시인을 만나고 있는 듯한 기쁨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그가 죽기 3년 전 발표한 '별 헤는 밤'이란 시를 보면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예견이라도 한 것처럼 표현되어 있는데, 그것 또한 신비롭다. 윤동주가 독자들에게 알려진 것은 1947년, 경향신문에 '쉽게 쓰여진 시'가 처음으로 소개되고 1948년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윤동주의 친구 정병욱에 의해 세상에 소개되면서부터이다. 편안히 잠드시라. 그의 용정시의 어딘가에 있을 그의 무덤가에 가서 술이라도 한 잔 권하고 상석에 꽃이라도 한 다발 바치고 싶지만 그것 또한 여의치 않았다. 다음에 올 기회가 있다면 충분한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여행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용정시 한복판을 해란강이 흐르고 있었다. 강이라기엔 그 폭이 좁은 편이지만 태고의 세월과 함께 유유히 흘러가는 역사의 강! 용문교 밑을 무심하게 흘러가는 그 강은, 틀림없이 역사의 애환을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숱한 사람들이 이 강을 사이에 두고 슬퍼하고 기뻐하며 그 한과 환희를 노래했을 것 같았다.

 

 

5. 국경 마을 그리고 두만강
  일정상으로는 북한 국경과 가장 가까운 도문시를 거쳐 두만강가 국경마을을 가도록 되어 있었는데, 아침의 차량 사고로 많이 지체되어 용정에서 1시간 정도 달려가면 닿을 수 있는 '개산툰(開山屯)'이라는 또 다른 국경마을로 가는 것으로 일정을 바꿨다. 모두들 급히 서두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갔다오자마자 곧바로 연길 공항으로 가서 북경행 비행기를 타야 하는 상황이라서 서둘러야 했다. 마이크로버스를 타고 비포장도로 1시간 남짓 달려갔다. 차창 밖으로 계속해서 펼쳐지는 북간도의 땅은 대부분이 다 농토였다. 웬만한 구릉지에는 어김없이 농작물이 심어져 있었다. 국경서 매우 가까운 곳이고 농토가 워낙 비옥한 만큼 우리나라 사람들도 이 땅에 대한 욕심이 제법 컸을 것 같고 위험을 무릅쓰고 국경 넘어 몰래 이곳에 들어와 농사를 지으며 살았을 것 같다. 강 건너 우리 땅은 대부분이 산지이고 토질이 척박하여 먹고살기가 만만찮았을 것이고, 먹을 것 찾아 강을 건너는 주민들이 많은 것은 어쩌면 당연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몇 년 전 북한의 기근 현상이 우리들의 애간장을 태울 당시, 먹을 것 찾아 두만강을 건너는 북한 주민들의 모습을 TV화면을 통해 본 적이 있는데 막상 이곳에 와서 보니 강 건너 국경선 넘기는 별로 어렵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과 100미터도 안 되는 강폭에다가 수심도 별로 깊지 않고, 게다가 경비망은 허술(?)한 것 같고…….
  주변을 보면 마치 우리나라 60년대 시골을 연상하게 하는 마을이 강을 따라 길쭉하게 형성되어 있었다. 아마 여기에 사는 조선족들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거의 다 일제의 핍박에서 도망 왔거나, 독립운동에 참가했던 사람들일 것만 같다. 그렇게 모질게 고생을 했고, 심지어 생명까지도 바쳤지만, 그들 후손에게 남은 것은 가난뿐이고 문화적인 혜택은 거의 못 받으며 살고 있는 것 같다. 세관[海關] 옆으로 작은 도랑이 하나 흘러가고, 또 그 옆으로 나 있는 길을 따라서 두만강 가까이로 다가갈 수 있었다. 이곳을 찾은 관광객들은 아무리 둘러보아도 우리밖에 없는 것 같다. 주민들의 모습도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고즈넉한 국경마을의 분위기 그대로다. 옛날의 정치적 상황 같으면 차라리 무서운 분위기였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 낯익은 마을에 온 느낌이 들 정도로 편안하다. 얼마 전 남북의 정치지도자들이 서로 부둥켜안고 화해의 악수를 한 상황에서, 화해 분위기를 타고 남북회담이 순조롭게 진행되어 남북의 이산가족들이 감격적인 상봉을 해야 할 상황에서, 더 이상의 긴장과 무서움은 없는 것이다. 그것이 아니었다면 이곳까지 올 수도 없었을 것이다.
  남북한의 역대 군사 독재 정권은 자유와 민주주의를 짓밟으면서 국민들을 유린하고 남북의 대치 상황을 교묘하게 정치에 이용했음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지 않는가? 사실 나도 고등학교 재학 시절 얼마나 반공교육을 철저히 받았는지 모른다. 귀에 못이 박히도록 '반공(反共)'이고 '멸공(滅共)'이고 '승공(勝共)'이었다. 철저하게 이념적으로 무장되어야만 했었던 것이다. 교련 시간만 되면 학도호국단의 일원으로서 총검술, 각개 전투 등의 군사 훈련을 받았다. 특히 총검술을 할 때는 총검을 적(김일성)의 인후부를 노리면서 '찔러' '길게 찔러' 소리를 운동장이 떠나갈 듯이 외쳐댔다. M1소총, M16소총 분해 결합 속도도 채 1분이 걸리지 않을 정도로 능수능란하게 했고 그것으로 실기 평가 점수를 받던 기억이 난다. 그런 군사교육은 대학교 3학년 때까지도 받아야 했었다.
  눈앞으로 두만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강가에서는 두 남자가 고기를 잡고 있었다. 한 사람은 느긋하게 낚시를 하고 있고 한 사람은 물 속에 들어가 허리를 굽혀 그물질을 하고 있었다. 평화로웠다. 국경을 사이에 두고 있는 지역에서 저렇게 평화로운 고기잡이가 가능하다는 것이 도리어 신기했다. 북한쪽 다리 끝에 초소가 있고 그 뒤로는 북한 쪽 세관으로 보이는 2층 짜리 하얀 건물 하나만 녹음 사이로 선명하게 보였다. 그 건물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건물이 보이지 않는다. 녹음이 우거진 까닭이리라. 북한과 중국은 긴 다리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두 나라 사이의 무역이 이루어지는 아주 중요한 다리라고 한다. 다리 한가운데 국경선이 존재하는지 그것을 사이에 두고 다리 위의 모양과 색깔이 각각 달랐다. 북한의 물건이 이곳 세관을 거쳐 바로 중국으로 들어가고 중국의 물품이 이 다리를 건너 북한 지역으로 들어간다고 한다. 다리 양끝에는 국경수비대의 군인들이 다리의 출입을 철저하게 통제하고 있는 것이다.
  한참 동안 북녘 땅을 말없이 바라 봤다. 다들 감개무량한지 북한쪽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둘째 동서 L형은 어머니의 고향이 저 강 건너 어드메쯤 될 것 같다며 여기서 더 이상 갈 수 없음을 매우 아쉬워했다. 언젠가 남북간의 자유 왕래가 가능해 진다면 차를 타고 올 날도 있지 않을까 싶긴 한데 중국을 거쳐 이 곳까지 빙 돌아서 와야만 하는 현실이 서글펐다. 더구나 이산가족들이라면 그 마음이 오죽하겠는가 싶다. '통일의 노래'를 함께 부르기 시작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이 정성 다해서 통일, 통일을 이루자, 이 나라 살리는 통일, 이 겨레 살리는 통일, 통일이여 오라.'
  강둑을 따라 주민들이 모여 사는 집들이 이어져 있어서 노래를 크게 부르지는 못하겠다. 천지 위에서 목청껏 부르던 때와 달랐다. 그러나 차분하면서도 경건하게 부르는 통일의 노래는 강 건너 병사의 귀에까지 들렸는지 군인 한 명이 우리 일행들을 향하여 두 손을 휘저었다. 우리도 약속이나 한 듯이 그곳의 병사에게 같은 모양으로 힘차게 손을 휘저으며 외쳤다. 서로 통하는 마음이 있어서일까? 남북이 하나 되는 날, 휴전선이 허물어지고 이산 가족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들이 자유롭게 왕래하고, 남한 사람들은 금강산으로, 칠보산으로, 묘향산으로, 백두산으로! 북한의 동포들도 지리산으로, 한라산으로, 설악산으로 마음껏 등산할 수 있는 날을 상상해 본다. 열 살배기 우리 아들이 나중에 군에 입대하여 이곳의 국경을 지키는 용감한 군인으로 근무하게 되어 경의선 열차를 타고 북으로 북으로 달려가다가, 혜산선 열차를 갈아타고 다시 북동쪽으로 한참을 달리고, 또다시 버스를 타고 이곳 국경까지 면회 오는 날을 상상해 본다. 50년 이상의 분단 세월의 한도 얼음 녹듯 녹아내려 한반도 삼천리 금수강산이 온통 엉기덩기 통일의 춤을 추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더 이상의 냉전도 이데올로기도 아닌 민족주의 정신으로 한 뜻 되어 민족의 저력을 세계 만방에 한껏 발휘하는 그런 날을 상상해 본다. 저승에 계신 김구 선생께서도 흐뭇하게 웃을 만한 그런 날을 상상해 본다.
  돌아가야 할 시간이 되었다. 아쉬움을 뒤로 한 채 걸어오는데 쉰 살 정도 되는 웬 아주머니가 우리 곁으로 다가왔다. 아까부터 우리 일행을 관심 있게 지켜보던 분인 것 같다. 웃음 띤 얼굴로 우리들에게 말을 건넸다.
  '어서 오시라요, 먼길 오셨습니다. 정말 고맙습네다, 빨리 통일 돼야디요. 나는 저 다리를 오가며 온갖 소식을 전하는 사람이외다. 필요하면 말씀하시라요.'
  국경 마을의 전령사 같았다. 그 분과 잠시 몇 마디 나누고 곧 오던 길을 돌아가야 했다. 차는 또다시 연길을 향하여 달리기 시작했다. 북한 땅과 점점 멀어져 갔다. 그런데 개산툰[開山屯]의 마을 왼쪽으로 무슨 공장이 하나 덩그렇게 하나 서 있는데, 그쪽에서 흘러보내는 폐수인지 다리 밑이 형편없다. 유심히 바라보니 온통 거품이고 진한 잿빛의 오염된 물이 개울을 더럽히면서 두만강으로 서서히 흘러 들어가고 있었다. 이렇게 되면 두만강 상류에서부터 오염이 되고 있다는 결론인데 마음 한구석이 아려왔다. 차라리 안 본 것만 못했다.
  비행기 시간에 맞추어 우리 일행은 급하게 서둘러야 했다. 저녁 식사시간이 10분 정도밖에 확보되지 않을 정도였다. 예약해 놓은 식당에서 맛있는 냉면을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먹어치우고는 모두들 대기중인 차에 오를 수 있었다. 입안에는 아직도 냉면의 뒷맛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갑자기 내린 소나기 때문에 연길 시내는 물난리가 난 듯 했다. 배수시설이 잘 되어 있지 않은지 금방 도로가 물바다가 되어 버렸다. 물을 헤치고 자동차는 잘도 가더라마는 중간에 시동이 꺼질까 걱정되었다. 서두른 덕분에 비행기 시간은 어느 정도 맞출 수 있었다. 2박 3일 동안 우리 일행을 알뜰히 챙겨주고 도와준 현용필군과 아쉬운 작별을 하고 북경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날은 이미 어두워진 뒤였고, 창 밖은 그저 컴컴할 뿐이었다. 비행기는 또 우리를 북경으로 데리고 갈 것이다. 오늘 저녁 거기서 자고 내일 아침부터 1박 2일간의 북경 여행(용경협 → 만리장성 → 이화원 등)이 우리를 또 기다리고 있었으나 여행의 성격상, 그것은 나에게 '덤'일 뿐이었다.
  여행기는 여기서 끝을 내면서 넋두리 삼아 몇 자 더 적어본다.

  비행기를 타고 다니는 고급스런 여행보다
  걸어도 좋고, 자전거도 좋고, 삼등 열차라도 좋다.
  부산에서 신의주까지, 원산까지, 아니 백두산까지
  마음껏 우리 땅을 돌아다니고 싶다.
  힘들면 주저앉아 도시락 까먹고
  더우면 명사십리 앞 바다에 풍덩, 자맥질하고
  사람이 그리우면 평양의 지하철을 타고
  불놀이가 생각나면 대동강에 배도 한 번 띄어보고
  님 생각에 영변의 진달래꽃도 꺾어보면서
  일년 내내 살아가는 세상살이
  목숨 걸어놓고 돌아다니고 싶다.
  우리의 산하를 돌아다니고 싶다.
  사진을 찍고, 글을 쓰고, 그림도 그리면서…….   <끝>


출처 : 마음 샘터
글쓴이 : 논강 원글보기
메모 : 2000년 8월에 남긴 저의 첫 기행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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