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유년 1월 15일 토요일 오후.
예정대로 남전 형, 광운, 토담, 명혜당, 나 이렇게 다섯 명은 여행의 목적지인 문경 새재를 향하여 길을 나섰다. 벌써부터 명혜당은 기쁘고 설레는 마음을 주체하기 어려운지 연신 싱글벙글 웃고만 있다. 섬세한 준비와 꼼꼼한 자금 관리는 으레 본인의 일이라 여기고 벌써 먹을 것 마실 것 챙겨 넣고 여행 준비를 다 해 놓고 있는 듯하다. 날씨도 매우 좋다. 작년 말에 개통된 대구-포항 고속도로에 진입하여 속도를 내어 달리기 시작할 때, 차창 밖으로 보이는 강렬한 햇볕이 온 산야를 따스하게 내리비치고 있어서 마음마저 절로 포근해졌다. 점심 식사 때를 놓친 시간이라 다들 배가 출출할 거였다. 임고 터널을 조금 지나 화물차 휴게소에 들러 돌솥 비빔밥 셋, 순두부찌개 둘을 시켰다.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음식을 처리했다. 특히 토담은 음식이 억수로 맛있는 모양이다. 천천히 그 맛을 음미하면서 뒷덜미의 땀을 훔쳐가면서 드는 품이 꼭 내 모습 같았다. 친구는 그렇게도 닮는가 보다.
두 시간을 달렸을까? 대구-구미-김천-상주-문경으로 이어지는 고속도로는 예상보다 빠르게 우리의 목적지까지 데려다 주었다. 발달된 도로망과 자가용 산타모의 덕을 단단히 본 셈인데 어느 누구는 만화에 나오는 축지법을 쓴 결과가 아니냐고 한다. 근데 문경에 그냥 머물러 있기에는 시간이 좀 아깝다며 여기까지 온 김에 새재 너머 괴산의 홍명희 생가를 찾는 것이 어떻겠냐는 남전 형의 제안이 받아들여져, 새재 터널을 지나 연풍 나들목으로 내려 한참을 굽이굽이 달려갔다. 겨울 해는 짧아서 그런지 서산에 걸려서 곧 넘어갈 기세다. 생가 마을에 다다라 어느 마음 좋아 보이는 노인에게 여쭤보니 “질 따라 죽 올라가면 거기 있어유.” 한다. 말이 재미있어서인지 그 충청도 말을 그대로 흉내내면서 다들 즐거워했다. 나로서는 고향 냄새 묻어나는 정감어린 말씨라 반갑기 그지없는데, 경상도 사람들은 그저 호기심으로만 듣지 않았을지 모를 일이다.^^ 생가라고 찾아가 보니 집은 온데간데 없고 그 터만 덩그렇게 남아 우리를 맞아 주었다. 어느 문학 단체가 돌에 새겨 벽초 홍명희 선생이 태어나 자란 곳이라고 표시를 해 둠으로써 그곳을 찾는 사람들을 안내하고 있을 뿐, 벽초 홍명희 선생의 체취라고는 전혀 느낄 수 없다. 다만 집의 뒤란이었을 공간 뒤쪽으로 큰 바위덩어리가 우리의 키높이 정도에 누워있어 그것을 늘 바라보았을 홍명희를 생각하면서 아쉬운 발길을 돌려야 했다. ‘임꺽정’이란 소설을 남겨 문학사에서 길이 남을만한 문학 세계를 갖춘 그였지만 냉전 이데올로기 시대를 거치면서 월북 작가라는 시대적 불운을 안고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다가 시대가 바뀌어 그들의 문학적 업적이 재평가되고 있는 요즘이지만 아직도 이곳은 그 오명을 씻지 못했는지 한 작가에 대한 예우가 섭섭하기조차 했다. 벽초 선생께서 괴산읍으로 이사를 가서 살던 집도 명혜당의 안내를 받아 들러보았는데, 한창 건물을 대대적으로 보수하고 있어서 그냥 내팽개쳐진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면서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보수가 끝나면 괴산의 명소가 되지 않을까 싶었다. 적어도 벽초 선생의 소설을 읽은 사람들의 발길이 연이어 닿게 되리라 생각하면서 어둑어둑해진 밤길을 좇아 문경새재로 넘어 왔다.
“형, 어느 톨게이트에서 내려요? 여주까지 가려면 아직도 멀었어요. 지금 용인쯤 달리고 있는데 스키 타러 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도로가 많이 막혀요.”
며칠 전 서울 사는 동생에게 전화를 걸어 문경새재에서 만나자 제안하자, 전부터 꼭 가보고 싶었다면서 흔쾌히 내려가겠다고 했던 동생이었다. 근데 만나기로 약속한 날 오후의 복잡한 교통사정 때문에 몹시 답답했던 모양이다.
“조심해 와, 여주까지만 일단 오면 확 트인 길을 달릴 수 있을 거야. 그 길을 따라 주~욱 가유. 그럼 금새 문경에 도착할거구먼.”
우리 일행은 일단 저녁 식사를 위해 ‘태조관’이라는 식당을 찾았다. 남전 형이 잘 아는 식당이자 명혜당의 언니인 수륜가의 단골집이라고도 했다. (우리를 맞아 주시기로 되어있던 수륜가는 지금 어디에, 유럽 여행? 으, 부러버라!!) ‘부광요’라는 도자기 공장을 경영해서 어느 정도 돈도 좀 번 도공께서 여유가 좀 생기자 길목 좋은 곳에다 이름도 그럴싸한 식당을 차린 거 같았는데, 제법 음식맛이 좋았다. 일행은 이야기꽃을 피워가며 즐겁게 시장끼를 채울 수 있었다. 조 껍데기 술과 지짐 등을 시켜놓고 한잔씩 하면서 그 독특한 맛에 취해 있을 때 동생에게서 연락이 왔다. 거의 다 목적지에 도착했다고 하는데 어느 식당에 있냐고 전화를 한 것이다. 마중하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곧 동생은 승용차를 끌고 두툼한 검정잠바 차림으로 반갑게 나타났다. 포항에서 2시간 달려 올라가고 서울에서 2시간 정도 달려 내려오면 같이 만나기에 적당한 공간이 문경새재라고 판단하고, 언제 한 번 형제 상봉을 하자던 약속이 드디어 실현된 것이다. 손을 덥석 잡고 식당으로 안내하여 동료들에게 소개하고 올갱이국을 한 그릇 주문해서 우선 요기를 하게 했다. 단 둘만의 오붓한 만남은 아니지만 친한 분들과 이렇게 만나보는 것도 참 좋은 추억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남전 형은 또 다른 곳으로 우리 일행을 안내하셨다. 월파 이정환 선생이 운영하는 ‘주흘요’다. 2003년 여름 어느 무덥던 날 남전 형 일행들은 그곳에 들러서 월파 선생으로부터 정성스런 차 대접을 받고 매화차, 곡차 등에 함초롬히 취해 그저 즐겁기만 했던 것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가슴이 설렌다. 당시 난 월파 선생에게 온갖 재롱을 떨면서 끝간 데 없이 취했었다. 맨 처음에는 도인다운 풍모가 느껴져서 접근하기 어려웠는데, 술과 운치 넘치는 분위기에 젖어든 뒤부터는 서로의 거리가 없어지고 얼마나 편해지던지 어떤 말을 해도 거슬림이 없었다. 더구나 본관이 서로 같은 전주(全州)라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어느 순간부터 형님 아우 하면서 호형호제하는 관계가 성립된 것도 특별하다. 처음 만나서 이렇게 마음이 잘 통해도 되는 것인가? 월파와 남전의 오래고 친한 교분 덕분에 나도 덩달아 가까워졌고 밤새도록 취했던 추억이 있었던 것이다.
월파는 여전했다. 우리 일행 6명과 맞절을 하고 덕담을 나눈 뒤, 차탁 안에 앉아 준비한 찻잔을 정성스레 닦은 다음, 술 한 잔 한 뒤에는 보이차가 좋다면서 그 진하게 울궈 나온 찻물을 조금씩 나누어 따라 주는데 그 정성과 손놀림, 그 분위기에 일행은 모두 취해 있었다. 평소 차를 즐기지 않는 동생은 특별한 볼거리인지라 월파 선생의 손놀림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조금 있으려니까 포항에서 가게 문을 평소보다 한 시간이나 일찍 닫고(그렇게 일찍 닫은 역사가 없었다고 함) 출발한 우산 형이 문경새재 나들목 가까이 왔음을 전화로 알려왔다. 저녁 10시 남짓 된 시간인데 벌써 도착이라니 엄청 빨리 달린 모양이다. 차 한 잔 정도 더 마셨을까 싶은데 무쏘 차의 엔진소리가 마당 안에 그득했다. 한 번 와 본 곳이라서 쉽게 찾은 것 같았다. 반갑게 맞아 주는 월파 선생과 우산형은 약속이나 한 듯이 큰절로 맞절을 하고 차탁을 사이에 두고 또 마주 앉았다. 이제 우리 일행은 한 명이 늘어 모두 7명이 되었다.
보이차를 여러 순배하고 말차도 한 번 맛을 음미하라 하면서 또 자신이 만든 독특한 다완에 정성껏 따라 만들어 주는데, 이 번에는 그 특유의 느린 말씨로
“ 이 말차의 맛은 커피로 치면 카푸치노의 맛이라고나 할까?”
이렇게 말을 하는 것이 어찌나 우습던지 동생은 두고두고 그 말을 흉내냈다. 아마 너무나 진지하고 점잖게 얘기를 계속하던 분께서 특유의 뉘앙스를 풍기면서 너무 의외의 비유를 쓴 재미있는 말이기 때문일 것이다.
차를 대접하는 주인의 마음과 차를 대접받는 손님의 고마움은 겨울 밤의 황토방 만큼이나 포근하고 따스했다. 어느덧 차를 나누는 시간 지나고 매화차를 주고받는 시간으로 바뀌고 있었다. 월파 선생께서 손수 빚은 찻잔에 맥주를 따라 놓으면 매화꽃이 하얗게 피게 되는 기적이 일어나고 만다. 찻잔 바닥에 남아 있는 하얀 모양이 맥주 거품을 그대로 머금고 떠올라 소위 말하는 매화차가 되는 것이다. 동생은 신기한 듯 눈을 휘둥그레 뜨고 어찌된 일이냐 한다. 우리는 재작년 여름에 이미 경험한 바라 새롭지는 않으나 처음 보는 사람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것이다. 찻잔의 마력이라고까지 표현해도 되지 않을까? 토담과 명혜당은 연신 카메라의 셔터를 눌러대었다. (이렇게 하여 우리 일행의 역사는 생생히 살아남는 것이리라!)
매화차에 취해갈 즈음 문경 제1관문 입구에 있는 ‘초곡관’이란 식당에서 남전 일행이 그곳에 와 있음을 어떻게 알고 그리고 올라와 잠을 자도 되지 않겠느냐며 월파에게 전화를 했다. 술도 몇 잔 더 하고 노래방 기구도 있으니 잘 됐다 면서 월파 선생과 함께 모두 올라오라는 전화란다. 속으로 반갑다는 생각을 하며 남전과 월파의 눈치를 보고 있는데, 월파가 제일 먼저 옷을 챙겨 입고 길을 나선다. 술과 분위기를 너무 좋아하는 분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따라 나섰다. 가무와 음주를 저렇게 즐기다가 도자기는 언제 만들고 굽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여하튼 남전 형님 덕분에 칙사 대접을 받고 있는 것 같아서 고맙고 미안하다.
음식점 ‘초곡관’ 2층, 꽤 넓은 홀에 우리 일행들과 음식점 사장님 부부, 월파 선생 부부, 우리 일행 7명이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준비해 간 포항의 특산물 ‘과메기’를 몇 군데 펼쳐놓고 술을 한 잔씩 주고 받으면서 겨울밤은 그렇게 깊어 갔고, 우리 일행의 흥겨움은 더욱 고조되고 있었다. 어느 새 초곡관을 개업하고는 처음으로 꺼내 놓는다는 노래방 기구가 우리들 곁에 설치되었다. 식당 주인 어른께서는 오늘 실컷 놀면서 우리 집의 지신을 좀 밟아달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식탁 위에는 온갖 종류의 술들이 준비되어 있고, 누구든 노래를 부르고 싶으면 일어나서 마음껏 노래를 불러도 좋은 최상의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노래는 울려 퍼졌고, 노래의 대가인 토담 선생이 부르고, 또 논강 이권주가 부르고 주인장이 불렀다. 월파 선생 부부의 예사롭지 않은 노래 솜씨가 이어지고, 노래 소리는 한 순간도 끊이지 않고 그렇게 그렇게 밤을 이어 갔다. 흥겨운 월파 선생은 어느 순간인가 덤블링을 시도한다. 허리를 굽히더니 그 점잖은 몸을 웅크린 채 한 바퀴 휙 돌아 일어나는데 보통 솜씨가 아닌 것 같다. 순간적으로 나는 눈이 휘둥그랬졌고 흉내내고 싶은 마음에 나도 따라 그 동작을 해 보았지만 모두들 웃고 만다. 하려면 제대로 하라는 뜻일 게다. 맨 정신으로는 해 보지 못하는 짓을 취한 김에 하니 부끄러운 줄도 모르겠다. 그저 재미있다.
토담 특유의 춤과 노래가 점점 좌중의 분위기를 돋구기 시작한다. 광운거사 최희범 선배도 피곤함을 쫓으려는 듯 온몸을 흔들고 나도 토담도 따라서 흔들고 함께 마주 서고는 대칭의 춤동작을 반복한다. 보는 사람들이 얼마나 신나겠는가? 그래 이렇게 미쳐 보는 거다. 아, 즐겁다. 박자에 맞추어 달리는 흉내를 내고 겅중겅중 뛰는 장단도 덧붙인다. 서울의 동생은 제일 연하임에도 불구하고 점잖을 빼고 있다. 형님들의 흥겨움을 도저히 따라가지 못하겠다는 눈치다. 녀석이 잘 부르는 노래를 신청해 들어보았지만 옛날의 그 미성이 나오지 않고 형을 닮은 돼지 멱따는 소리로 불러 제끼니 형제는 역시 닮았다는 인상을 주었을 것 같다. 얼마나 지났을까 함께 어울려 놀던 월파 선생 부부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새벽 3시경 슬며시 빠져나갔다고 하는데 조금은 섭섭하다. 서로 엉겨붙어 형님 동생 하면서 그 부드러운 수염속에 얼굴을 부벼댔던 그 촉감이 생생하건만 너무 아쉽다. 남전 형을 뵙기 위해 찾아왔던 많은 여성 팬, 과거의 학부형들도 이미 자리를 뜬 지 오래다. 우리 일행들도 피곤한지 그 넓은 홀 구석구석에 한둘씩 눕기 시작하더니 남전 광운 형도 그만 자자고 방으로 들어가시고 끝까지 남은 토담과 나는 동동주 한 병을 마저 비우기로 하고 몇 잔 들이키며 노닥거리다가 잠을 깨고 난 뒤의 문경 새재 관문 통과 과업을 위해서 방 언저리를 차지하고 머리를 눕혔다. 시간을 보니 새벽 5시 20분이었다. 아직 젊다는 증거인지, 몸을 관리할 줄 모르는 무모함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오랜만에 뜨거운 광란의 밤을 보냈던 것에 만족해야 했다.
9시경 잠에서 깨었을 때는 홀의 바닥이 들끓고 있었다. 누군가 우리의 잠자리를 위해 보일러를 아주 강하게 틀어놓은 탓이리라. 더 이상 잠을 이룰 수 없을 정도의 뜨거움이었다. 찜질방에서 구이를 당하는 맥반석 계란이 된 기분이라고 동생은 말한다. 덕분에 모두는 약속이나 한 듯이 일찍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초곡관 주인이 아침 식사를 준비하려면 10시는 되어야 하니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서 문경온천에 가서 목욕을 하는 것이 좋겠다고 남전형이 말한다. 홍일점인 명혜당을 숙소에 남기고 모두는 문경읍에 있는 온천으로 향했다. 근데 그 온천은 문을 닫고 영업을 하지 않는다. 이상하다. 그 옆에 있는 좀더 규모가 큰 문경종합온천으로 갔다. 알고 보니 문경 시장이라는 자가 시에서 수십억 원을 들여 만든 그 문경온천을 폐쇄시키고 자신이 사재를 들여 세운 문경종합온천을 이용하라고 유도하고 있다고 한다. 그게 사실이라면 소가 웃을 일이 아닌가? 뭐가 잘못 되어도 한참 잘못 되었다. 민선 시장이라는 작자가 그 지위를 이용하여 온갖 사리사욕을 채우고 있다는 증거인데, 문경시민들이 어찌 그를 용서할 것이며, 그냥 앉아 당하고 있을 수 있겠는가? 우리나라가 이런 것마저 통하는 나라가 되고 말았단 말인가?
목욕재계하고 초곡관 식당에 돌아와 아침상을 접하니 기가막힌 음식이 상에 올라왔다. 우거지국이었다. 술에 시달렸던 속이 확 풀어짐을 느끼게 해 주는 최고의 음식이었다. 얼마만에 맛보는 우거지국인가. 다들 찬사를 던지면서 행복한 아침 식사를 했다. 식당 주인 부부의 친절에 다시금 고개가 숙여질 정도였다. 배를 채우고 심기일전한 우리 일행은 등산을 위해 문경 새재 초입에 섰다. 등산객들의 수효가 점점 많아지고 있다. 매표소에서 입장권을 사는 명혜당의 뒷모습을 보니 마치 관광회사 가이드 같아 보여 웃음이 절로 나왔다. 걸음을 내디딘 지 얼마 안 되어 길 왼켠으로 보이는 거대한 궁궐과 마을 들, 어느 텔레비전 방송국에서 인기리에 방영된 드라마 ‘태조 왕건’ 세트장, 구경하지 않은 사람들을 위하여 한바퀴 돌아보기로 하였다. 그럴 듯하게 화면에 비치는 세트장이지만 직접 손으로 두드려보고 만져보니 조악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었다. 건물은 건물인데 건물의 역할은 할 수 없는 그야말로 세트장 그 자체였다. 실제 역사의 현장과 드라마 세트장 사이의 거리를 실감하면서 그곳을 빠져 나와 고갯마루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언뜻언뜻 불어오는 매서운 바람이 계곡을 타고 불어올 때는 과연 겨울 날씨 답다는 생각을 하면서 어깨를 몇 번이나 움추렸다. 모자를 눌러쓰고 장갑을 끼고 남전과 나는 지팡이를 짚고서 마음만은 가볍게 산길을 올랐다. 토담과 광운거사는 성큼성큼 앞장을 서고, 우산은 그 뒤를 묵묵히 따르고, 명혜당과 남전, 동생과 나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그 옛날의 선비 길을 밟아 가고 있었다. 조선 시대 영남의 무수한 선비들이 이 고개를 넘어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 다녔다는데, 그 가운데에서 과연 몇 명이나 급제를 하여 웃으면서 금의환향했을지 궁금했다. 급제와 함께 사회적 신분적 지위가 올랐을 것이고 영남인들끼리의 학파 내지 정파를 만들어 그들만의 세계를 고집했을 것이 아닌가?
제일 먼저 우리를 기다린 곳은 주흘관, 그 곳까지는 힘든 줄 모르고 흥겹게 갔건만 다음에 나타날 조곡관에 이르기 전부터 벌써 몸 약한(?) 명혜당은 엄살을 부려대는 것 아닌가? 못 오르겠다는 둥, 이렇게 먼 길인 줄 알았더라면 따라나서지 않았을 것이라는 둥, 중도에 포기하려는 기색이 역력하였지만 남전은 못 들은 척, 갈 길을 재촉할 뿐이었다. 가는 길 곳곳에 얌전히 숨어있는 조령원, 얼음폭포, 무슨 정자, 낙엽송 군락지,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주흘산의 비경이 우리의 눈을 즐겁게 했다. 이윽고 오늘의 최종 목적지, 제3관문, 조령관이 자태를 드러내었다. 6.7킬로미터의 힘든 산길 끝에 다다르니 낑낑대며 힘겨워하던 명혜당도 너무너무 뿌듯하다며 감회를 토로하였다. 먼저 올라온 토담은 어디론가 사라져 조난 신고를 하기 직전, 모습을 드러내었다. 주막집은 어찌 그리 잘 찾아내는지 참새가 방앗간을 찾아가는 수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곳에서 우리를 굽어내려 보며 어서 오라고 손짓하는 것 아닌가! 비교적 높은 언덕에 세워진 주막집, 반갑게 올랐더니 그 집의 주인도 남전 형의 극성 팬이란다. 호기심 어린 명혜당의 청문회에 힘입어 알아낸 바로는, 그 옛날 남전 형의 문경 근무 시절, 도자기를 굽는 도공의 신분으로서, 달빛 아래 또는 눈, 비, 바람을 벗삼아 함께 차를 마시던 그룹의 일원이었다고 한다. 그 덕분에 입에 착착 감겨드는 촌두부, 파전, 라면, 어묵, 커피까지 공짜로 먹게 된 우리 아닌가? 총무를 맡은 명혜당의 입이 있는 대로 찢어져(?) 귀에 걸릴 지경이다. 남전 형 특유의 친화력이 빛을 발한 순간이기도 하였다.
높은 곳에 올라가면 반드시 내려와야 하는 법, 일곱 명 중에서 남전, 토담, 우산, 나 이렇게 네 명은 왔던 길을 도로 내려가기로 하였고 셋은 반대 방향의 길로 차를 타고 오기로 하였다. 남전 형의 팬께서 차를 몰고 오기로 되어 있다면서 좋아하던 명혜당, 동생, 광운거사를 뒤에 남겨둔 채 우리는 터벅터벅 산길을 걸어 내려왔다. 남겨진 일행은 2킬로미터의 눈길을 걸어내려 온 끝에 차를 만났다고 한다. 그 사이에 벌써 정이 든 동생과 명혜당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왔다는데, 초면에 나눈 이야기의 주제가 무엇일까 약간 궁금하기도 하다. 거의 비슷한 시각에 새재 입구의 초곡관 앞에서 합류한 우리들, 서울로 떠나야 할 동생과 아쉬운 작별을 해야 하는 나는 이내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말았다. 요즘 형의 처지를 안타까워하고 걱정하는 착한 동생의 마음을 알고 있는 때문이리라. 어린 시절부터 남달리 형제애가 뜨거웠던 우리, 마흔이 넘은 지금도 늘 그렇게 변함없는 마음으로 살고 있다는 게 자랑스럽다. 나에겐 그저 사랑스럽고 자랑스런 동생일 뿐이다.
우리도 여장을 꾸려 포항으로 향했다. 포항에선 20년만의 폭설이 쏟아져 내렸다는데 오늘 중으로 도착할 수 있을지 걱정이다. 내 차에는 광운, 토담, 명혜당이 탔고, 우산 형 차에는 남전 형이 탔다. 쏜살같이 달려나가는 우산형 차를 도저히 따라가지 못하고 천천히 달려야 했다. 마음 같아서는 우산형 차를 추월하고 싶은 기분이었으나 광운 형님의 만류로 참았다. 운전대를 잡은 나는 마음껏 달리고 싶은데 다들 불안한 모양이다. 근데 한참을 달리다 보니 지난 밤에 거의 수면을 취하지 못한 후유증이 나타난다. 졸음이 쏟아지고 있는 것이다. 뒷자석의 토담은 본인의 피곤함에도 불구하고 운전하는 내가 졸까봐 어깨를 주무르고 말을 걸면서 노심초사다. 수면 부족에 비해서는 그래도 씩씩하게 운전을 잘 하고 있지만 졸다가는 큰일 아닌가? 칠곡 휴게소에서 잠시 쉴 때, 난 차 안에서 잠시 눈을 붙여 피곤을 씻었다. 30분 정도 쉬고 다시 대구 - 포항 고속도로에 접어들어 신나게 달렸는데 영천 가까이 오니 지난 밤에 눈이 많이 내렸음을 알 수 있었다. 포항 가까워질수록 점점 더 수북이 쌓여 얼어붙은 눈길을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밟아 올 수밖에 없었다. 불안 초조해 하는 일행을 안심시켜 가면서, 앞장 선 우산의 차와 연락을 취해 가면서 천천히 천천히 빙판길을 달려왔다. 7,8년 전에 경주 포항간 국도의 눈길에서 미끄러지면서 뺑글뺑글 돌며 혼비백산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눈길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약속대로 북부 해수욕장의 어느 유명한 음식점으로 가서 아구탕을 먹으며 모임을 마무리했다. 얼큰하면서도 시원한 아구탕 맛처럼 늘 따뜻하고 포근하며 화끈한 열정으로 뭉친 선배, 친구, 후배, 나, 가히 참으로 행복한 사람들이 아니겠는가? 함께 가는 사람들이 있어 삶의 길은 쓸쓸하지 않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길은 내 앞에 이미 나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럿이 함께 가다보면 뒤에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라던 신영복 선생의 말씀이 문득 생각난다.
메모 : 2005.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