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아침에는 부여로 해서 한산, 장항, 군산까지 갔다가 다시 서해안 고속도로를 타고 북쪽을 향하여 당진 위 서해대교가 있는 곳까지, 삽교호 있는 데까지 달려갔다가 다시 공주로 돌아왔습니다. 이미 충남 일대를 두루 섭렵하신 분이 계시겠지만 제가 둘러본 곳 몇 군데를 정리해 보겠습니다.
먼저 웅진성 공주에서 사비성 부여를 향해 말을 달렸습니다. 공주를 벗어날 즈음에 오른쪽으로 우금치 전적비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우금치는 당시의 동학군이 관군과 일본군에게 대항하여
싸우다가 죽어간 곳인데, 잊혀져 가는 역사적 사건을 되살릴 수 있는 교육의 장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동학혁명의 근본 정신은 여전히 살아있어야 할 것이고, 오늘날 우리 나라가 처해 있는 국내·외 상황을 고려해 볼 때 그 동학혁명 또한 미완의 혁명이고, 진행되어야 할 혁명이 아닐까 합니다. 역사는 예나 지금이나 늘 그렇게 그렇게 흘러가고 있으니까요.
부여를 향해 달렸습니다. 공주에서 30분 정도 달리면 닿을 수 있는 거리에 있었습니다. 부여의 초입,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1.5㎞ 지점, 능산리 고분군이 있는 곳으로 갔습니다. 사비성으로 도읍을 옮긴 뒤, 약 120년 남짓 재위에 있던 왕들의 무덤이라고 했습니다. 능 주변을 한참 둘러보며 기념 사진을 몇 판 찍고, 두 아들에게 닭싸움을 제안, 너른 잔디밭에서 한참 동안 나뒹굴었습니다. 큰아들과 닭싸움을 하다가 육중한 내 몸을 스스로 감당하지 못하고 녀석에게 툭 받치고는 고목나무 쓰러지듯 나동그라지고 말았을 때, 지켜보던 사람들이 얼마나 깔깔대고 웃던지……. 기고만장해진 큰놈은 자신 있는 택견 대걸이 한 판으로 겨루자고 하더군요. 좀 봐 달라고 했더니. 막무가냅니다. 자신이 있는 모양이었습니다. 먼저 넘어뜨리면 이긴답니다. 결국 붙게 되었지요.
어떻게 되었을까요? 체중이 많이 나가는 애비가 천신만고 끝에 결국 제압을 했답니다. 육중한 체중이 아니었던들 이길 수가 없었을 겁니다. 겨우 체면을 유지한 셈이지요. 아마 녀석은 조만간 捲土重來하여 다시 도전하리라 생각합니다. 지고 나서 겸연쩍어하는 녀석의 얼굴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다음은 시내 한복판에 있는 정림사지를 찾았습니다. 국보 9호로 지정된 정림사지 5층석탑을 한참 뚫어지게 바라보았습니다. 경주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신라의 탑과는 분명히 달랐습니다. 전체적인 선의 윤곽이 선명해서 그런지, 정교함보다는 투박함이 더 강했지요. 아이들에게 간단한 설명을 해주었지만 그다지 관심이 없는 듯 했습니다. 겨울의 고즈넉한 정림사터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는 그 탑이 주는 여운을 뒤로한 채, 계백장군 동상이 지키고 있는 로타리를 지나 부여 경찰서를 조금 지나치니 백제의 관문인 토성이 백마강을 가로지른 백제교 안쪽부터 좌우로 이어져 강둑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그 강둑을 따라 왼편으로 약간 들어가니 부여 출신 저항 시인, 신동엽의 시비가 세워져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의 시비에는 그의 대표작 '산에 언덕에'가 검은 돌에 흘림체로 새겨져 있었고, 30년이 넘는 세월을 금강과 함께 흐르면서 이 나지막한 공간을 조용히 지키면서 못 다한 삶의 한을 머금은 채, 우리 민족의 미래를 걱정하고 있는 듯 했습니다.
백제교를 건넌 뒤, 서천, 보령으로 가는 4번 국도를 포기하고 금강하구둑으로 직접 연결되는 29번 국도를 달렸습니다. 그 길로 계속 달리면 모시로 유명한 한산을 지나 철새도래지인 금강 갈대밭을 왼쪽으로 끼고 주욱 달리면 장항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장항은 충청남도의 남단이고, 하구둑 위로 난 도로를 달리거나 장항에서 배를 타고 10분을 항해하면 전라북도의 북단인 군산에 닿게 된다고 하니, 군산과 장항은 갯벌이 발달된 바다를 지척에 두고 있는 사이좋은 도시임에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금강 하구둑 다리를 건너자마자 우회전하여 300미터 정도 가니 '채만식 문학관'이라는 곳이 눈에 띄었습니다. 작년 3월에 개관하여 시에서 직접 운영하고 있는 곳인데, 채만식을 소개하는 갖가지 시청각 자료를 동원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훌륭한 작가를 이곳에서 배출해 냈다는 자랑을 끊임없이 하기 위해 특정 공간을 할애하여 투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신동엽 시인이 60년대 보여주었던 작가적 냉철함과 목소리에 귀기울인다면 부여에서 보여준 을씨년스런 신동엽 시비와는 너무 대조적이었습니다. 방명록에 이름과 주소를 적고 '이 공간에 다시 태어난 백릉 채만식 선생, 차라리 부럽습니다'라고 적었습니다.
다시 군산 시내로 말을 몰았습니다. 그의 소설의 배경이 되었던 곳이기에 낯선 방문객들에겐 군산이란 곳 자체가 관심의 대상일 수 있습니다. 금강의 물줄기를 여전히 뱉어내고 있는 저 바다가 갯벌과 함께 남아 있고, 여기저기 눈에 띄는 일본식 가옥이 당시의 식민지 상황을 느끼게 해 줍니다. 처음 밟아 보는 여행길이라 좀 자세하게 훑고 싶은 욕심도 없지 않으나 시간상 더 이상 지체할 수는 없었습니다. 돌아다니느라 허기진 배를 일단 채우고,(탕수육, 짜장면, 군만두) 서해안 고속도로를 달리기 위해, 군산 IC에 올려 쏜살같이 당진 방면으로 향했습니다. 최고속도는 시속 110㎞까지 가능한 도로이더군요. 다른 고속도로보다 직선에 가깝고 깔끔했습니다. 헌데 휴게소는 거의 눈에 띠지 않았습니다. 개통한 지 얼마 안된 것이 이유이겠습니다만, 다들 엄청난 속도로 달리는 도로였습니다. 결국 난 목포와 서울을 잇는 서해안 고속도로를 처음으로 달려본 셈이지요. 무엇이고 처음이라는 것에 대체로 의미를 부여하는 현실이고 보면, 오늘은 뭔가 뿌듯한 만족감이 넘치는 날임에는 틀림없습니다. 1시간 남짓 달리니 당진에 닿을 수 있었고, 조금 더 달리다가 서해대교를 건너기 직전 삽교호 관광단지로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저 멀리 길게 뻗은 잿빛의 서해대교의 위용이 하늘 끝에 아슬아슬 걸리는가 싶더니 더 이상 오르지 못하고 바다 아래 쪽으로 경사를 낮추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삽다리 삽교호 주변의 관광단지에 주차를 한 뒤,
썰물로 물이 확 빠져버린 바다 쪽을 아이들과 함께 한참 바라보다가 삽교호 방조제 공사 완공 기념탑으로 시선을 옮겼습니다. 고 박정희 대통령의 글씨가 그 탑에 내려쓰기로 크게 새겨져 있더군요. 1979년 10월 26일, 중앙정보부장의 총에 맞아 비명에 가던 날의 그 동영상이 나의 기억 속에 생생하게 자꾸만 겹치고 있었습니다. 벌써 그 날의 그 역사도 23년이 흘렀군요. 참, 그러고 보면 세월은 무상한 것 같습니다. 오늘 아침 면도를 하다가 하얀 턱수염 몇 개를 발견하고 투정 섞인 한 마디를 내뱉었더니, 의사 선생님인 동서가 그러더군요. "이 선생, 이젠 그럴 때도 되었어. 그렇게 안타깝게 생각하지 마,"
1/20 논강 올림
출처 : 마음 샘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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