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2일 돌아온 북유럽 여행,
정리를 미루고 미루다가 이제야 완성하고 올리니
시간 나는 대로 한 번 읽어 보시오
엄청 긴 글이라 마음 단단히 먹고 봐야지
어설프게 봤다가는 끝까지 못 읽습니다.^^
원고지 230매가 넘는 분량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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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 여행기
이권주
첫날 1일째
인천공항으로 가는 리무진 버스를 탄 것은 7월 23일 새벽 5시 20분이었다. (이번의 북유럽 여행은 올해 초부터 고교동창인 유선생과 단단히 약속해 놓은 여행이었음) 좌석이 만원인 것으로 보아 방학을 이용한 해외 관광객들의 나들이가 절정에 달해 있음을 알겠다. 다들 설레는 마음으로 차에 올랐으리라. 집에서 워낙 일찍 출발해서 공항에 도착해서도 집결 시간까지 여유가 많았다. 공항 지하 1층에 있는 식당을 찾아 아침 식사를 느긋하게 하고 차도 마시면서 여유를 즐기다가 시간이 다 되어 공항 3층 만남의 장소로 이동, 함께 여행할 사람들을 만났다. 인솔 책임자격인 '노랑풍선' 여행사의 가이드 정지희씨가 자신을 먼저 소개한다. 있는 그대로의 긴 머리, 귀여운 미소가 인상적이다. 예정된 출국 수속을 마치고 32명의 우리 일행은 오후 1시경 러시아 항공 SU-600기에 올랐다.
비행기는 천장이 아주 높고 한 줄에 3명씩 세 줄로 앉도록 되어 있다. 좌석번호는 29E다. 친구 유선생은 29F, 가운데 줄인데 밖을 내다볼 수 없는 자리다. 친구는 아직까지 창문가에 앉아보는 행운을 갖지 못했다며 불만이다. 어쩌다 창문가에 앉으면 날개 바로 위라서 아래를 내다 볼 수 없었단다. 뭐 그 정도 가지고 그리 불만이냐 핀잔을 주며 웃었다. 여행 일정을 보니 모스크바에 들렀다가 덴마크의 코펜하겐으로 다시 가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모스크바까지 가는 데만 9시간 넘게 걸린다. 아닌 게 아니라 몇 번을 자다가 깨도 그대로 비행기 안이다. 기내에 있는 동안 두 번의 식사를 했는데 먹을 만 했다. 근데 서빙을 담당하는 승무원들은 나이가 좀 들어 보였고 대체로 덩치도 컸으며 표정이 좀 굳어있는 듯하다. 친절하고 젊은 국내항공사의 승무원들과 저절로 비교가 된다. 그러나 탓할 수는 없다. 그것도 그들 나름의 문화요, 매력일 텐데 나만의 잣대로 그들을 평할 수는 없으리라. 다행히 서울과 모스크바를 왕복하는 항공기답게 우리말 기내 방송이 들린다. 잘 알아듣지 못할 정도로 어설프긴 해도 러시아를 오가는 관광객들에 대한 배려인 것 같아 좋다.
경유지 모스크바에 도착하자마자, 그 기념으로 창밖에 보이는 공항의 모습을 일단 카메라에 담았다. 사회주의, 시베리아의 땅을 연상시키고, 톨스토이, 푸쉬킨, 솔제니친 등 대문호들을 배출시킨 러시아, 그 심장부에 처음 발을 내딛게 되었으니 얼마나 감개무량하랴! 날씨는 한여름인데도 시원하다. 현지 시각 5시 15분(한국 시간 10시 15분에서 5시간을 뒤로 돌린 시간)에 시간을 맞췄다. 숙소인 덴마크의 코펜하겐에 가기 위해서는 4시간 10분을 공항에서 대기하다가 또 2시간 30분을 날아가야 한다. 대기하는 동안의 지루한 시간을 효과적으로 보낼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야 했는데 별 게 없다. 면세점에 들러 물건을 구경하거나 값싼 것이 있으면 구입하는 정도인데 동료인 유선생은 기호품인 담배를 네 보루나 사 넣고는 기분이 참 좋다. 여행 중에 한 보루는 다 피울 것 같단다. 면세품이라 40%나 싸게 샀다. 또 상점에 들러 현지 술을 맛보아야 한다면서 내 손을 잡아끈다. 그런데 너무 비싸다. 어떤 맥주는 한 병에 5유로(6,000원)나 한다. 2유로 짜리 맥주도 있어서 두 병을 사서 하나씩 따서 마셨다.
공항의 천정은 고동색으로 도금한 둥근 원통을 15센티 정도의 높이로 잘라 사방 연속무늬로 붙여 놓아서 어디를 가나 천정 모양은 똑 같다. 면세점에서는 다양한 물건을 판매하고 있는데 특히 눈에 띄는 것이 다산성(多産性)을 상징하는 '마터르시카'라는 것이다. 예쁜 얼굴 그림이 정교하게 그려진 오뚝이 모양인데 그 허리춤에 보일 듯 말 듯 나있는 선을 따라 그 방향으로 살며시 열면 약간 작지만 똑같은 모양이 하나 들어있다. 그것을 꺼내서 또 열어 보면 또 그런 게 들어있다. 그런 식으로 안에 있는 것을 하나씩 빼서 키 순서대로 늘어놓으니 10개 정도가 된다. 어떤 것은 13개까지 늘어놓을 수 있다. 정교한 기술을 요하는 것인데 장식용으로 제작된 듯하다. 선물로 적당하다고 누가 유혹을 하더라마는 우리 아이들은 그다지 선호할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에 구매를 포기하고 말았다.
현지 시각 22:00시 (다시 2시간을 줄여서) 덴마크의 수도인 코펜하겐 공항에 도착했다. 공항의 바닥은 질 좋은 원목을 바닥재로 썼다. 어디를 가나 바닥은 모두 원목이었다. 부자 나라임이 분명한 것 같다. 그런데 화물 찾는 데 거의 4, 50분이 소요되었다. 숙소에 최대한 빨리 도착해서 휴식을 취해야 할 시간에 그렇게 긴 시간을 소모한다는 게 짜증났다. 숙소는 공항에서도 버스로 달려 40분 정도 떨어져 있는 곳에 있다. 캄캄한 도로를 한참 달려 숙소까지 창밖을 보며 새로운 세계를 느끼고도 싶었지만 조명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다. 예약된 호텔에 도착해서 방 배정을 하는 데도 시간이 좀 걸렸다. 침실에 들어왔을 때는 녹초가 되어 있었다. 여행 첫날은 이렇게 24시간이 아니라 31시간을 보내고 나서야 하루를 끝낼 수 있었다. 유럽의 백야는 우리를 호락호락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다. 유선생과 난 첫날의 피곤했던 하루를 정리하면서 준비해 간 소주 몇 잔을 비우고 잠자리에 들었다.
2일째
본격적인 유럽 여행이 시작되는 날이다. 피곤했음에도 잠은 깊이 들지 못했던가 보다. 일찍 잠에서 깼다. 위도가 높은 곳에 있는 나라라서 여름이면 백야를 실감할 수 있다고 하니 이미 새벽 서너 시경에 날은 밝았던 것 같다. 현지 시각 6시경, 숙소를 나와 호텔 주변을 둘러보았다. HOTEL LAUTRUPPARK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4층 규모의 건물이 여러 동 띄엄띄엄 서 있는데 아늑하게 느껴졌다. 정원수가 적당히 서 있고 계단식 담장이 좀 특이하다. 1미터 높이 정도는 되려나? 폭은 맨 밑 부분이 넓고 위로 갈수록 점점 좁아지면서 15센티 정도로 줄었다. 벌써 여기저기 함께 투숙했던 분들이 산책을 하고 있다. 편안히 잤느냐고 정답게 인사를 나누니 훨씬 사이가 가까워진 듯하다. 일행들의 얼굴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어서 좋다. 호텔 앞 로비에 느긋하게 앉아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바라본다. 현관 밖 어느 지점에서는 우리 일행을 태워갈 차인지 건장한 버스 기사가 손님 맞을 준비로 바쁘다. 비누 거품을 내서 차 밖을 청소하는가 싶더니 실내 청소까지 끝을 낸 모양이다. 흰 바탕에 검은 글씨 'FGX-556'이란 차 번호판이 보인다. SCANIA에서 만든 고급형 버스? 우리나라 차 번호판보다 훨씬 날렵하다. 앞유리 왼쪽 구석엔 '러시아·북유럽 11일'이란 안내판이 붙었다.
아침 식사를 간단히 하고 차에 오르니 여행 준비는 다 된 것이다. 여행 막바지에 상뜨뻬쩨르부르크에서 모스크바까지 가는 비행기를 타기 전까지는 앞으로 며칠간 계속 버스 관광을 해야만 한다. 핀란드 사람 '리오(51세)'가 주로 우리와 숙식을 같이 하면서 그 버스 관광을 맡아서 해 주기로 되어 있다. 우리들은 그를 환영하고 안전 운행을 부탁하는 의미에서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32명의 일행들도 편의상 5개조로 나누었다. 우린 4조에 편성되었다.
숙소에서 나와 시내까지 오는데 주변의 모습이 새삼스럽다. 처음 보는 유럽의 모습이 아니던가? 도로 양옆으로 자전거 전용 도로가 있어서 자전거를 탄 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다. 교통 혼잡을 막고 자동차 배기가스 양를 줄이고자 하는 당국의 배려가 느껴지는 부분이다. 어떤 사람은 안전모를 썼고 어떤 사람은 치마를 나풀거리면서 잘도 달리고 있다. 치마 사이로 바람을 다 받으니 퍽 시원하겠다. 중앙분리대가 널찍하게 조성되어 있고, 도로 바로 위에는 조명등으로 보이는 것이 일정한 간격으로 가느다란 전기줄에 매달려 있는데, 하늘을 가리고 있어 조금은 답답하다. (그 이후 둘러 본 북유럽의 여러 나라들도 공통적으로 그런 도로 조명을 쓰고 있음을 확인함) 차라리 우리 나라의 가로등이 더 운치 있다. 개인 주택으로 보이는 단층집들이 무성한 숲에 둘러싸여 있는데, 붉은 색 계통의 페인트 칠을 한 지붕이 이채롭다. 지붕에 나 있는 창들이 운치 있는 다락방을 연상시켰고, 중학 시절 친구집의 다락방에서 공부하던 추억이 되살아났다.
현지 가이드가 차에 타면서 코펜하겐 시내 투어는 시작되었다. 제일 먼저 간 곳은 시청사였다. 안데르센 거리를 가운데 두고 티볼리(TIVOLI) 놀이 공원 입구와 마주한 곳이었다. 1905년에 건립된 붉은 색 건물인데, 아주 견고해 보였다. 그 안에서는 7명의 시장이 주민투표에 의해 선출된 55명의 시의원들과 함께 시정을 펼쳐나간다고 한다. 그 앞 광장은 상업의 중심지답게 사방 어디를 봐도 탁 트여 있어서 예부터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들락거렸음을 알 수 있었다. 그 광장 한 켠엔 덴마크가 자랑하는 세계적인 동화작가 안데르센(1805-1875)의 동상이 길 가운데 조각되어 있었다. 루팡의 모자를 쓰고 왼쪽 손은 지팡이를 거머쥐고 오른 손은 책을 읽고 있었던지 손가락 하나가 덮여진 책 사이에 끼어있는데,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티볼리 공원 쪽을 바라보고 앉아 있다. 동상을 매만지면서 사진을 찍었던 사람들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그의 두 무릎에는 푸른 녹이 낄 사이도 없이 누런 구리 빛을 띠고 있어서 그 위에 앉아 보면 매우 따스할 것만 같다.
현지 가이드는 덴마크에서 30여 년을 살고 있다고 하는데 나이 좀 든 초로의 할머니이다. 알고 있는 것을 많이 설명해 주긴 하는데, 말이 너무 빠르고 목소리가 크지 않아서 알아듣기 힘들다. 맨 먼저 '장미의 성'으로 불린다는 어느 왕의 성으로 갔다. 60년간 재위했던 크리스천 4세가 여름에만 사용했다는 성이란다. 그리 크지도 않은 400년 전의 성인데, 주변의 풍경이 참 좋다. 군인들이 지키고 있어 들어갈 수는 없었으나 배경삼아 사진을 찍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성 앞에 위치한 공원은 날씨만 좋으면 많은 남녀들이 일광욕을 즐기는 곳이라고 한다. 설명은 계속된다. 덴마크의 국민소득은 3만 8천불이고 사회보장제도가 잘 되어 있어서 55세 이상만 되면 연금 대상자가 되고 최저생활비 정도는 국가에서 대준다고 한다. 의료비도 모두 무료다. 대신 경제활동을 할 경우 세금이 많아서 적게는 38%에서 많게는 62%까지 세금을 내야 하는데, 국민 모두가 적극적으로 참여한다고 한다.
바닷가의 '인어공주'상이 있는 곳으로 갔다. 그의 주옥같은 동화 작품을 기념하기 위해 누군가를 모델로 해서 오래 전에 세워진 것인데 그간 신체의 일부가 자주 파괴되는 수난을 거쳤고 현재의 모습은 최근에 복원해 놓은 것이긴 하나 인어공주 상 앞에서 사진을 찍지 않으면 덴마크를 왔다 갔다 할 수 없다고 하니 너도나도 사진 담기에 바빴다. 안데르센은 자신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자기 삶에서 나온 것이라고 고백한 바 있다. 그의 말대로 의붓 누이 카렌 마리는 동화 '빨간 구두'의 카렌으로, 한 때 사랑한 여인 리보르는 '팽이와 공'의 공으로 형상화됐다. 자신의 영혼의 자화상을 동화 속에 그려놓은 것은 물론, 안데르센은 성공한 '미운 오리새끼'이자 사랑에 목숨을 건 '인어공주'였으며, '꿋꿋한 양철 병정'이자 왕의 사랑을 받는 '나이팅게일'이었다. 불쌍한 '성냥팔이 소녀'도 모두 안데르센의 분신이었음을 생각해 볼 일이다. "어른들을 위한 글을 쓸 수 있는 작가만이 어린이를 위한 작품을 쓸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안데르센과 딱 어울리는 말이 아닐까? 안데르센은 어린이와 어른 모두를 끌어들일 수 있는 작가라고 봐야 한다.
처칠 공원에 있는 '게피온 분수대'가 있는 곳으로 갔다. 오각형 모양의 덴마크 요새가 가까이 내다보이는 곳에 위치해 있었다. 그 옆으로는 성공회 교회가 서 있는데 분수대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모를 일이다. 분수대에 있는 신화의 주인공과 황소의 조각은 실물과 차이가 없을 정도로 정교했다. 황소의 코에서는 뜨거운 김이 힘차게 뿜어져 나오고 있고 게피온의 채찍은 황소로 변한 아들의 등줄기를 사정없이 내리치고 있었다. 다시 버스를 타고 왕궁인 아미리엔보 궁전으로 갔다. 덴마크는 전통적인 왕국으로서 입헌군주제를 도입한 나라인데 현재의 왕은 여왕으로서 불란서 사람과 결혼했고, 5개 국어에 능통한 67세의 엘리트로 잘 생긴 두 아들(각각 37, 36세)을 두었다. 왕족들이 휴가를 갔는지 건물 위엔 국기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대관식을 올렸던 마모아 교회를 중심으로 제일 왼쪽이 현 왕이 거처하는 곳인데, 근위병들이 곰털 모자를 쓰고 어슬렁거리며 경계 근무를 하고 있다. 그 바로 옆에 영빈관이 있고 교회 건너 비슷한 규모의 큰 아들 궁, 그 옆 작은 아들 궁이 위치했는데 전체적으로 건물들이 큰 원을 그리고 있다. 특별한 권위가 느껴지지 않아서 좋다.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무서운 왕궁이 아니라 언제든지 다가갈 수 있는 친근한 궁전 같다. 낮은 자세로 국민과 함께 하겠다는 통치자의 의도가 담긴 바로크풍의 건물이었던 것이다. 마모아 교회를 쳐다보다가 그대로 뒤로 돌아서면 바다 건너 오페라 하우스의 위용이 한눈에 보인다. 멀리서는 그다지 커 보이지 않지만 가까이 보면 14층 규모의 공연장이라고 하니 그 규모가 놀랍다. 공연 때가 되면 왕족들을 초청할 것 같고 초청된 그들은 몇 걸음 걸어 나와 배를 띄워 오페라하우스로 곧장 향하는 장면을 상상해 본다. 바다를 끼고 있는 만(灣)이라서 그런지 운치가 넘친다. 한참을 머물렀으면 좋으련만 가이드의 독촉을 뿌리칠 수 없다. 코펜하겐의 현지 가이드와도 작별하고 노르웨이의 오슬로를 향해 발길을 옮겨야 했다.
코펜하겐에서 40분 정도 달려가면 스웨덴과 제일 가까운 국경 지방에 이른다. 조금 아래쪽으로 내려가면 동서 방향의 긴 다리로도 연결되었다고 하는데, 우린 SCANDLINE 배를 타고 국경을 넘기로 했다. 엄청난 규모의 배인데 수십 대의 소·대형 차를 실은 채 20분 정도 배를 타고 가면 되는 것이다. 배에 올라 커피 한 잔 사서 마시고 동료들과 이야기를 잠시 나누니 벌써 내려야 하는 시간이다. 유럽 연합(EU) 국가들끼리는 이렇게 국경의 넘나듦이 쉽다. 비자가 따로 필요 없으니 그저 통과다. 상징적인 국경이 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스웨덴 땅을 경유하여 노르웨이로 향하는 길은 참으로 멀었다. 남북으로 길게 뻗은 고속도로를 타고 하루 종일 가야 하는 것이다. 몇 시간을 달렸는지 기억나지 않으나 비슷한 풍광을 계속 내다보면서 달리고 또 달렸다. 대낮인데도 모든 자동차들이 전조등을 환하게 켰다. 백야가 있는 나라여서 그런가 보다 생각했다. 특히 겨울은 낮이 매우 짧고 밤이 길어서 늘 전조등을 켜야 하니까 아예 시동이 걸리면 저절로 켜지도록 설계된 차들이 아닐까? 광활하게 펼쳐진 누런 보리밭, 그리고 평원의 곳곳에 평화롭게 자리잡은 농가들, 한 폭의 그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저렇게 넓은 들을 다 차지하고 마음껏 농사를 짓는 농부들의 풍요로움과 너그러움이 부럽다. 우리 조상들은 기름진 밭뙈기는 고사하고 천수답 조차 구하지 못하고 소작농으로 또는 남의집살이로 전전하던 그 찌들렸던 가난을 생각하니 괜히 질투심이 생긴다.
가도 가도 높은 산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한참을 달리다 보니 예테보리란 도시가 우리를 맞이한다. 도시 속으로 한참을 들어가 '쿠스타프' 동상이 보이는 시 청사 앞에서 내렸다. 그 주변에서 사진을 좀 찍고 몇 걸음 옮기니 예약된 식당인 ‘오델로’가 반갑다. 입구는 좁은데, 들어가니 꽤 넓었다. 현지식으로 연어 샐러드를 준비해 놓았다. 거기서는 조별로 앉아서 그 구성원끼리 인사도 나누면서 담소를 하라는 가이드의 멘트가 정겹다. 우리 조에 속한 사람은 서울 역삼동에서 병원을 경영하고 있는 의사 부부와 서울의 강남에 살면서 지구 여행을 즐기고 있는 초등학교 선생님, 그리고 우리 친구들과 나 이렇게 여섯이다. 호흡이 다들 잘 맞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눈인사를 하고 식사 때마다 가능하면 같은 자리를 잡아서 하자고 무언의 약속을 했다. 아주 맛있게 먹었다. 시장이 반찬 아닌가?
노르웨이의 '오슬로'를 향하는 여행은 계속된다. 식곤증 때문에 차창에 기대어 잠을 좀 자기도 했지만 그냥 자면서 지나치기엔 너무도 아까운 풍광이라 애써 잠을 깨운다. 언제 이곳을 다시 오겠나 싶어서 하나라도 더 볼 심사다. 평원지대를 좀 지나니 본격적으로 자작나무, 소나무, 전나무 등이 숲을 이루기 시작했다. 침엽수림의 연속이다. 햇빛을 받아 자작나무의 곧은 줄기가 더욱 하얗게 보인다. 곧게만 뻗느라 차라리 밑에는 솔잎 하나 남겨두지 않은 소나무와 치열한 생존 경쟁을 벌이고 있는 듯 하다. 홀로 떨어져 민가에서 자라는 자작나무는 곧기는커녕 속 편하게 수많은 가지를 옆으로 퍼뜨리고 있지 않던가? '쑥도 삼 속에서 자라면 도와주지 않아도 곧다(蓬生麻中 不扶而直)'는 말처럼 자라는 환경의 중요성을 새삼 실감하게 된다.
가이드가 틀어주는 노르웨이 작곡가 그리그의 '솔베이지의 노래'는 더욱 애절하게 노르웨이의 국경 진입을 재촉한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차들이 정체되어 움직이지 않는다. 얼마 되지 않는 곳에서 발파 작업 중 돌들이 굴러 내려 도로를 덮쳤고 그 돌을 다 치워야 통행이 가능하다고 한다. 무작정 몇 시간이고 주차해 놓고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2000년 여름 백두산 여행 중에 자동차 고장으로 하염없이 기다리던 생각이 났다. 그 때 우리 일행은 그 주변 숲 속에 들어가 꽃을 꺾으면서 시간을 보냈다. 답답하다고 투정을 부려봐야 스트레스만 쌓일 뿐, 이 때는 차라리 적절하게 즐기는 것이 현명하다. 차에서 내려 도로 가에 있는 풀들과 꽃들을 유심히 둘러보았다. 우리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하얀 꽃의 토끼풀이 보였다. 자운영도 보인다. 아니 보랏빛 엉겅퀴까지 보인다. 처음 보는 꽃들도 많다. 유럽의 이 후미진 곳에서도 우리나라의 꽃을 볼 수 있다는 게 신기하고 텃새인 참새, 까치들도 살고 있다는 게 놀라웠다. 우리나라에만 있는 줄 알았던 게 사실이다.
두세 시간 좀 지났을까, 앞에 정차했던 차들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제 도로가 정비되고 통행이 시작된 것이다. E6 고속도로(국도)라고는 해도 편도 1차선, 평소는 통행이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은데 휴가철 차들이 몰리니 혼잡할 수밖에 없나보다 했다. 이러구러 한참을 달렸다. 그래도 아직 국경은 멀었나 보다. 집단을 이룬 캠핑카들이 그들의 부를 상징하듯 곳곳에 세워져 있는데, 다들 휴가를 즐기고 있음에 틀림없다. 조용하던 김선생님도 이제 청국장, 김치, 떡볶이 등이 먹고 싶다며 은근히 투정을 부린다.
아, 드디어 국경이다. 국경이라고 해도 특별한 표시가 없다. 그저 검표하는 장소가 차도와 차도 사이에 있을 뿐 잠시 섰다가 곧바로 통과다. 그런데 수도 오슬로까지는 두 시간 정도를 더 가야 한단다. 국경을 지나면서 분위기가 조금 바뀌었다. 침엽수림이 더 자주 나타나고 마을의 분위기도 더욱 목가적으로 변했다. 그림에서나 볼 수 있는 풍경이 눈앞의 현실로 무궁무진 나타나는 것이다. 밤 9시가 지났는데도 그런 풍경을 볼 수 있다는 것이 놀랍다. 북유럽의 여름철에 흔히 경험한다는 백야를 우리도 즐기게 된 것이다. 호텔은 오슬로에서 30분 떨어진 곳에 있었다. 늦은 식사를 하고 여장을 풀었을 때는 이미 자정이 넘었다. 새벽 4시면 솟아오를 태양을 생각하고 노르웨이가 자랑하는 피요르드를 상상하면서 잠을 청해야 했다.
3일째
다음 날 새벽 5시 30분에 잠이 깨었다. 호텔 주변을 산책하기 위해서다. 이미 날은 새서 온 세상이 훤하다. 호텔 뒤켠으로 조금 올라가니 크고 작은 비석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비석에 새겨진 망자의 생존 연대들을 보건대 오래된 공동 묘지였다. 그리고 그 주변에는 갖가지 모양의 멋진 주택들이 흩어져 있어서 산 자와 죽은 자들이 구분되지 않고 같은 공간에서 살고 있는 듯하다. 무덤은 더 이상 혐오의 대상이 아닌 것이다. 민가 주변에 있어서 언제든지 찾아가 대화를 할 수 있는 공간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관념은 어떠한가. 살던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하고, 어쩌면 무서운 공간의 개념? 귀신이 되어 무덤을 가르고 나타나는 것까지 상상되는 그런 공간? 우리나라와의 문화적 차이가 오히려 큰 감동으로 다가왔다. 우리도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죽으면 저런 무덤 공간이 필요할까? 난 차라리 화장할 것을 요구하고 흔적 없이 사라지길 원한다. 화장터에서 나온 뼛가루의 일부는 산이나 물에 뿌려서 자연으로 돌려보내고 그 일부를 가져다 어느 산이든 찾아가기 좋은 어느 나무 밑둥에다가 거름삼아 흙과 함께 섞어 뿌려 흔적을 없애면 된다. 간혹 망자가 생각나거든 그 나무그늘 밑에 쉬면서 그의 지나간 삶을 잠시나마 되새겨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이삼백 년은 되어 보이는 고색창연한 교회를 높직한 언덕에 두고 그 아래로 쭈욱 뻗어있는 도로를 내려와 다시 강을 넘으니 또 다른 마을 풍경이 전개되는데, 전체적인 분위기가 좋다. 다들 거기서 몇 십 년, 몇 백 년은 그렇게 서 있었던 것 같다. 대도시 근교의 매력이 한껏 느껴지는 곳이라서 하룻밤 머물고 떠나기엔 아쉽다는 생각을 하면서 숙소로 돌아와 오슬로 관광을 위해 여장을 꾸렸다.
오슬로 시청에서 만난 현지 가이드는 편애자라는 이름의 교포 1세였다. 고갱이란 화가의 '타이티의 여인'을 연상케 하는 건강미와 관능미를 지닌 여인이었는데, 첫 인상이 아주 강했다. 강한 이미지만큼이나 파란만장한 삶의 소유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다. 23년 전 공부하러 왔다가 오슬로에 계속 머물고 있다는데 그간의 사연이 자못 궁금하다. 본인이 이야기하지 않는 다음에야 어찌 알겠느냐마는 그녀가 경험한 만큼의 많은 배경 지식이 우리들에게 전달되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하나님의 땅'이란 뜻의 오슬로 시내 관광을 오전 중에 하기로 되어 있다. 우선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오슬로 시청사로 갔다. 거기서 가이드는 본격적으로 설명을 시작한다. 노르웨이 전체 인구 450만의 9/1인 50만 인구가 제1의 도시 오슬로에 살고 있으며, 시청사는 1931년 시장의 모금 운동을 시작으로 20년에 걸쳐 건축되었고 해마다 12월 10일이 되면 오슬로 시청사 중앙 홀에서 노벨평화상을 시상하고, 몇 년 전 우리나라의 김대중 전대통령도 여기서 상을 수상했다고 한다.
오슬로의 중심지요, 노르웨이의 심장부라고 하는 칼 요한 거리에는 왕궁을 비롯하여 국립오슬로 대학교(1811년 건립), 국립극장, 역사박물관, 국립미술관 등이 산재해 있다. 1988년에 설립한 국회의사당이 위용을 자랑하고 영국식 정치를 지향하고 있는데 다수당인 노동당이 현재 집권을 하고 있다. 오슬로는 북위 59도에 위치하며 크고 작은 50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고 인구의 74%가 상업에 종사하나 상점은 늦게 문을 열고 오후 5시만 되면 닫는다고 하는데, 실감나는 내용은 아니었다. 입에 발린 멘트가 관광객들에게 무슨 흥밋거리가 되겠냐마는 배낭여행이 아닌 패키지여행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다음에야 가이드의 말은 그래도 영양가 있는 내용이다.
쿠스타프 비겔란(1869-1943)의 조각 공원으로 갔다. 남북 865미터의 길이, 10만평 규모의 조각공원인데 한 조각가의 일생과 예술적 신념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곳이다. 공원 입구의 오른 켠에는 조각가 자신의 동상이 서 있다. 사람 좋아 보이는 실제 크기의 조각상인데 그 밑엔 뭐라고 쓰여 있는데 뜻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거대한 개인 조각공원을 가진 조각가는 아마도 어느 나라 왕보다도 행복할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13세에 오슬로로 유학을 온 비겔란은 19세부터 조각가로서의 웅대한 꿈을 갖고 2번의 개인전과 모금운동을 통한 전시회 1회 등을 한 바 있다. 그의 명성이 세상에 알려지자 그를 자랑스럽게 여긴 오슬로 시는 1921년 비겔란과 계약하여 그의 모든 요구를 다 받아들이게 되는데, 그가 설계한 대로 조각공원을 만들고 거기에 청동과 화강암만을 재료로 한 193점의 조각품과 260점의 인물들을 새겨 놓게 된다. 죽고 나면 살았던 집을 박물관으로 쓰게 하고 입장료를 받아서는 안 되고 모방작을 없게 하라는 작가의 유서에 따라 오슬로 시는 지금까지 해마다 조각 공원을 유지하는데 연간 7억원에 달하는 예산을 지출해야 한다고 한다. 입장료를 받게 되면 엄청난 수입을 올려 시의 예산 확보에도 큰 도움이 될 테지만 고인과의 약속을 지키려는 시 당국의 태도가 존경스럽다.
그가 남긴 조각품을 감상하노라면 저절로 입이 벌어지지 않을 수 없다. 다리 위에 새겨진 58개의 청동 조각 하나하나가 예사롭지 않다. 특히 어린 아이가 화를 내고 있는 모습은 압권이었다. 무엇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갑자기 양손에 힘을 주고 냅다 울어대는 서너 살배기의 발가벗은 모습은 영락없이 어릴 적 내 동생의 모습이다. 광장 분수대에 새겨진 조각품이 또한 보통이 아니다. 거대한 솥 모양의 분수대를 받쳐 들고 있는 6명의 장정들을 조각한 것이다. 비겔란의 제자들을 상징한다고 하는데 그 힘의 강약은 인생의 무게로 느껴졌고, 그 분수대 주변에 배치된 청동 조각은 인생의 생노병사를 파노라마처럼 보여주고 있었다. 다시 계단을 올라 화강암을 재료로 조각한 군상들을 천천히 바라보았다. 원형무대를 뒤집어 놓고 그 위에 작품을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해 놓은 것 같은데, 인체의 핏줄, 근육, 갈비뼈, 표정까지 그대로 살려서 마치 살아 숨쉬고 있는 사람들을 보는 듯하다. 특히 한가운데 우뚝 솟은 17미터 높이의 모놀류트는 압권이었다. 오슬로에서 차로 1시간 30분 거리에 있는 240톤의 화강암을 6개월에 걸쳐 운반해다가 180톤의 완성된 작품이 되기까지 제자들과 함께 14년 동안 매일 작업을 했고, 비겔란 자신이 죽는 날까지 망치와 정을 놓지 않았다. 121명의 인물들이 뒤엉켜 있는 조각품은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비겔란의 치열한 작가 정신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조각에 대하여 워낙 문외한인 사람이 작품을 어찌 볼 수 있으리요마는 전반적으로 비겔란의 작품은 널찍한 공간과 잘 정돈된 인상인데 무엇보다 그 조각의 모티브가 사람임을 보여 주고 있다. 아이들 늙은이들 젊은이들을 각기 독자적으로 조각했는가 하면, 한 사람의 일생을 순차적으로 보여주기도 하고, 수많은 사람을 겹쳐 기둥을 만들어 놓기도 했다. 인생이란 그만큼 서로 관계를 맺어가며 살아야 한다는 의미로 쉽게 이해하기로 하였다.
다음은 바이킹 박물관을 둘러보는 순서다. 십자형 건물의 전시관 안엔 관광객들로 발 디딜 틈이 없다. '바이킹'이라 함은 8세기~10세기경, 유럽의 여러 해안을 휩쓸던, 모험적·호전적인 '북방 노르만 족'을 통틀어 이르는 말인데 당시 그들이 사용했던 배와 유물을 그대로 전시하고 있는 것이다. 노르웨이의 역사는 바이킹의 역사라고 한다. 고도로 발달한 선박 기술을 바탕으로 지중해, 흑해, 대서양, 북미 일대까지 누비면서 그들의 힘을 과시하면서 나름의 역사를 만들었다. 추위를 이겨낼 수 있는 강인함과 용감성으로 온 유럽을 호령했을 테지만 그것을 가능하게 해준 바이킹 선이 1000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고스란히 남아있어 놀랍다. 오슬로의 피오르드에서 발견된 오세베르그호, 고크스타호, 투네호 세 척은 훌륭한 문화유산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1867년, 1880년, 1904년 각각 발굴되었다고 한다. 발굴과정을 보여주는 사진과 설명이 있지만 눈뜬 장님이다. 대충 상상만 하고 지나갔다. 노를 두는 위치에 따라 전투용과 유람용이 구분되는 것 같았는데 오사 여왕이 탔다는 오세베르그호는 고물과 이물의 또아리를 튼 부분과 곡선 부분에 부조로 정교하게 조각된 것이 특별해 보이고, 15명씩 양쪽에서 노를 젓게 되어 있다. 다른 두 척의 배에 비해 규모도 좀 작다. 9세기에 만들어진 고크스타호는 길이 23미터, 최대 폭 5미터 32명이 노를 젓고 돛을 달아서 항해하는 전형적인 바이킹 선이다. 투네호는 배 밑바닥을 제외한 다른 부분이 대부분 부패된 채 발견되었는데 원거리 항해용으로 이용된 것으로 보인다. 발굴 당시 배 안에는 남자 무덤이 들어 있는 목관과 부장품들이 있었는데 이는 매장된 사람의 사회적 지위를 말해주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시내 관광은 조각공원과 바이킹 박물관을 둘러보는 것으로 끝을 냈다. 한국인이 경영하는 식당에서 한식으로 점심 식사를 한 후 서해안에 위치한 노르웨이 제2의 도시이자 피요르드의 도시 베르겐까지 가는 본격적인 피요르드 관광에 나설 차례다. 그러나 앞으로 3박 4일간 지겹도록 버스를 타야 하니 다들 걱정이다. 입담 좋은 현지 가이드는 차의 맨 앞에 앉아 틈나는 대로 여러 가지 정보를 들려준다. 원하지 않아도 알아서 한다. 노르웨이라는 나라는 94%가 산악지대고 농경지는 고작 5%정도로 오슬로 주변에 분포되어 있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가입되어 있어 순수 군인 21,000명이 국가 방어에 힘쓰고 있으나 유럽 연합(EU)에는 가입하지 않았다. 두 번의 국민투표를 통해 국민들의 의사를 물었는데 국민들이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화폐도 유로화가 아닌 크로나(KR)화를 쓴다. (1달러는 5.5크로나, 1유로는 약 7크로나) 국민소득도 5만 5천불 정도로 높아서, 이웃 나라의 지배를 받던 치욕의 슬픈 역사도 있었으나 지금은 떵떵거리고 산다. 1970년대부터 북해에서는 질 좋은 원유가 펑펑 쏟아지고 가스, 천연자원, 수산업 등으로 엄청난 부를 축적하고 있는 나라인데, 천연자원이 별로 없는 우리나라로서는 부럽기 그지없는 나라다. 또 GNP의 1%에 해당하는 돈을 매년 어려운 나라를 돕는 데 쓰는데 인도주의적 관점에서 보더라도 훌륭한 나라임에 틀림없다. 해발 800미터까지는 침엽수림 지대이지만 800미터부터 1000미터까지는 잡목이 1000미터 이상만 되면 나무가 전혀 없는 빙하지대다. 노르웨이에는 300여명의 한국 교민들이 산다고 가이드는 덧붙인다.
오슬로에서 E6도로를 타고 북쪽으로 한참을 달리다 보면 노르웨이에서 제일 크다는 ‘며싸’ 호수를 만난다. 아주 길쭉하게 생겼는데 그 둘레가 자그마치 100킬로미터이니 그 규모를 짐작할 만하다. 호수 주변에는 농가들이 띄엄띄엄 자리하였는데 어디를 보아도 좋다. 한 폭의 목가적 그림도 그보다 아름답지 않으리라. 눈앞에 펼쳐지는 아름다운 풍경도 결국 넓디넓은 목초지와 뭉게뭉게 피어오른 구름더미와 자작나무, 소나무, 전나무 등이 연출하는 침엽수림의 조화에서 오는 것이리라. 바람도 거의 없는 나라여서 얕은 뿌리로도 쓰러지지 않고 잘 자라고 있다. 암반 지대에 표토가 얇게 붙어있는 정도가 대부분인데도 나무들도 삐쭉삐쭉 키가 얼마나 큰지 모른다. 나름대로의 생존 방법이 있겠지만 우리나라처럼 바람이 많았다면 다 쓰러지고 없을 나무들이다. 나무의 지름은 얼마 안돼도 키는 비정상적으로 큰 것 같다.
또 한참을 달리니 동계올림픽이 개최되었던 릴레함메르라는 곳에 도착하였다. 환경올림픽이라 일컬어질 만큼 환경 오염을 최대한 줄이는 방향에서 기획되었던 올림픽 장소였다. 인구 2만의 작은 도시가 전 세계의 관심이 집중된 가운데 올림픽을 훌륭히 소화해 냈던 것이다. 시설을 특별히 만들지 않고 기존의 것을 최대한 활용했고, 가장 큰 문제인 선수단의 숙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주민들이 살던 집을 선수들에게 전적으로 제공하고 휴가를 떠날 정도로 유기적인 협조가 적극적으로 잘 이루어졌다. 또 감자 가루를 이용하여 포크, 나이프 등을 만들어 사용, 폐기하는 등 환경을 살리는 모범 사례를 보여주었다. 130미터, 145미터의 긴 슬로프를 가진 점핑대의 위용을 보면서 당시의 경기 장면과 온천지가 하얗게 뒤덮인 곳에서 활활 타오르는 성화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그 지역에서 많이 나오는 자연석을 쌓아서 만든 축대와 그 주변에서 조망해 보는 경치가 너무 아름다워서 입을 다물 수가 없다. 쪽빛 하늘을 배경으로 솟아오른 뭉게 구름도 기막히게 멋있다. 도시 밑으로는 호수가 광활하게 펼쳐져 있고, 내려다보이는 전원 주택의 모양새는 제각기 개성을 자랑하고, 짙고 옅은 지붕의 빛깔이 또한 강렬하다. 올림픽을 치른 이후 릴레함메르는 전과 다르게 상권이 제법 형성되어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도시가 되었다. 겨울에는 이 도시가 영하 18도까지 내려가기도 하지만 아무런 문제가 없다. 100% 전기 난방으로 잘 지어진 가옥에 이중창을 썼기 때문에 그렇게 아늑할 수 없고 비탈진 길도 전기 열선을 묻어서 많은 눈이 오더라도 금방 녹을 수 있도록 해 놓았다. 과연 잘 사는 나라는 다르다. 여느 나라 같으면 전봇대의 전기줄이 으레 보일 법한데, 하나도 없다. 모두 지하로 전깃줄을 묻었다. 시스템이 잘된 나라인가 보다.
연속되는 좋은 풍경도 이젠 질릴 지경이다. 가도가도 계속되는 목가적 풍경에 다들 기가 죽었는지 처음에 들리던 탄성도 이제는 멎었다. 꾸벅꾸벅 조는 사람들이 많다. 릴레함메르에서 약 두 시간을 북북서쪽으로 달려가니 '오따'란 곳에 도달한다. 거기서 다시 산정 호수와 호텔이 있는 곳으로 한참을 더 올라가야 한다. 가이드는 환상적인 곳에 묵을 수 있어서 다들 좋아할 거라며 피로에 지친 우리를 위로해 준다. 침엽수림을 뚫고 올라가는 기분도 자못 좋다. 매우 낭만적이다. 호텔은 1900년에 건립된 목조 건물이었는데 박공에 용머리 모양을 해서 옛 멋을 살려 좋고, 내부 시설 또한 상당히 좋다. 창을 열고 산정 호수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위치에 있어서 더 좋다. 다른 건물이라고는 없다. 호텔과 그 부대 시설만 풍광 좋은 곳에 위치하여 분위기 잡기에 적당한 곳이다. 야외 수영장도 자작나무 그늘 아래로 만들어져 있고 테니스 코트도 옆에 있다. 테라스 밑으로는 잔디밭이 일품이고 그 아래로는 이름모를 꽃들이 몇 종류 자태를 뽐내고 있다. 어떤 일행들은 호텔 난간에 기대어 호수를 배경을 사진 찍기에 바쁘다. 호수 건너편으로는 완만한 경사의 산이 가마득하다.
여장을 풀고 저녁 식사를 끝내니 오후 9시인데, 해가 넘어가려면 아직 멀었다. 준비한 소주 몇 병을 꺼내서 친구와 한 잔씩 나누었다. 금방 없어지는 것 같다. 분위기에 취해서 술도 이젠 달다. 현지 맥주도 맛보아야 한다며 6유로 짜리 캔맥주를 몇 개 사서 입가심을 했다. "자네 덕분에 낯선 땅 노르웨이에 와서 백야를 즐길 수 있다는 게 꿈 같다." "말로만 듣던 백야, 실감나제?" 밤 11시를 훨씬 넘어 자정이 다 되어가도 완전히 어두어지지 않는 백야의 한가운데서 잠조차 잊은 채 밤이 더 깊어지기를 기다렸다.
4일째
호텔 조식 후 본격적인 빙하 관광을 위해 게이랑에르 피요르드를 향한다. 네 시간 정도가 소요된다고 한다. 계곡 물이 벌써 다르다. 빙하가 녹아서 흘러가는 물이라 그런지 연한 초록의 하늘빛을 그대로 닮았다. 식물성 화합물과 빛의 작용으로 그런 빛을 띤다고 한다. 해발 1000미터가 넘는 산을 오르고 그 위에 있는 최고 수심 170미터의 빙하 호수를 감상하면서 빙하의 신비를 느끼는 여행, 지금까지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다. 계곡물은 점점 더 세차게 흘러내린다. 저 멀리 높은 산은 눈과 얼음을 잔뜩 머리에 이고 앉았다. 그 밑으로 폭포를 이루어 물보라를 일으키며 자유낙하를 하고 있다. 해발이 점점 높아질수록 침엽수림은 사라지고 잡목지대가 나오는가 싶더니 어느 순간부턴가 가까이에는 잔풀들만 보인다.
얼마를 더 달렸을까. 한 굽이를 올라가니 드디어 가이드가 말한 170미터 수심의 빙하호수가 보인다. 엄청난 규모다. 호수 건너편 산은 그야말로 빙산이다. 뜨거운 태양조차 저 눈과 얼음을 다 녹이지는 못한 것이리라. 녹아내린 물이 저렇게 호수를 이뤘고 고원지대이니 여기가 바로 빙하의 출발 지점이고 게이랑에르 피요르드를 생성해낸 곳이 아닌가 한다. 앞을 보아도 탁 트인 U자형 계곡이고 뒤를 보아도 그러하니 얄팍한 상식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이젠 고원지대를 지나 피오르드가 시작되는 지점까지는 가파른 내리막이다. 앞으로 장엄하게 펼쳐지는 U자형 계곡의 한 자락 한 자락이 원경을 이루고 하늘과 어울리면서 장엄한 광경을 연출한다. 차창 밖으로 연출되는 대자연의 신비를 만끽하면서 유람선이 대기하고 있는 바다까지 조심스레 내려간다. 구절양장의 그 가파른 굽이길에서 운전기사 리오씨는 베테랑다운 운전 솜씨를 보인다. 브레이크라도 고장나는 날이면 모두의 운명은? 으, 끔찍하다. 그러나 중간 지점에서 잠시 내려 피오르드의 원경을 사진에 담는 여유도 즐긴다.
여객선은 수많은 관광객들을 태우고 헬레쉴트라는 곳까지 약 두 시간 정도 천천히 항해를 했다. 좋은 경치라도 나오면 그것을 소개하는 선내 방송이 끊이지 않는다. 반갑게 우리말 방송도 흘러나온다. 굽이치며 돌아가는 뱃길은 피오르드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자연이 만들어낸 웅장한 파노라마를 보기 위해 오늘도 전 세계 여행자들의 발길은 이곳으로 향하고 있으리라. 시리도록 푸른 바다와 깊이 팬 계곡, 그 사이에 옹기종기 들어선 작은 마을들, 협곡을 채운 바다 위를 유유히 미끄러지는 유람선,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피오르드 풍경은 보는 이의 마음을 평화롭게 만든다. 자연과 시간이 함께 빚어낸 작품으로서 아무 손색이 없었고 곳곳에 자리한 폭포 역시 빙하가 녹아 흐르는 물로 피오르드의 웅장한 아름다움을 한층 돋보이게 하고 있다. 피오르드(Fjord)는 노르웨이 말로 '내륙에 깊이 들어온 만(灣)' 즉 '협만(峽灣)'이라는 의미다. 그 중에서도 4대 피오르드로 꼽히는 게이랑에르 피오르드, 송네 피오르드, 하당게르 피오르드, 리세 피오르드는 이곳을 찾는 여행자들의 눈길을 사로잡기에 충분하다. 노르웨이 서해안은 북해와 맞닿은 곳으로 복잡한 해안선에 피오르드 지형이 발달해있는 것으로 유명한데, 구불구불한 해안선에는 내륙 쪽으로 깊숙하게 들어와 있는 바다와 그 바다 옆으로 깎아지른 듯 경사가 심한 산이 서로 힘자랑이라도 하듯 뒤엉켜 있다.
게이랑에르 피오르드 유람 후 남쪽 방향에 있는 브릭스달로 이동, 푸른 빙하지대를 관광하는 순서가 기다리고 있다. 인간의 발길이 직접 닿을 수 있는 유일한 빙하지대라고 가이드는 소개한다. 유람선에서 내린 버스는 부리나케 옥빛 계곡물을 거슬러 또다시 달리기 시작한다. 몇 시간을 달렸을까? 갑자기 오른쪽 머리 위로 눈 덮인 빙하가 보이기 시작하더니 이내 그 밑으로 세찬 폭포수를 내 품고 있다. 목표 지점에 다 온 것이다. 점심 식사가 예약된 식당이 양방향의 빙하물이 모이는 지점에 위치해 있는데, 문밖의 물 흐르는 소리를 들어 본 즉, 하얀 거품을 잔뜩 머금고 있는 소리다. 빠른 물살을 자랑하면서 이리저리 요동을 치는데 금방이라도 식당 안으로 그 물줄기를 몰고 올 기세다. 식탁 위엔 우리말로 된 광고 종이가 놓여 있다. 내용인 즉, 식사하고 토산품 가게에 와서 털옷을 좀 사가라는 안내문이다.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한 번 읽어보라는 식당 주인의 영업 전략이리라. 노르웨이에서 가장 싸게 파는 집이란다. 가이드는 그의 상술에 혀를 내두르면서 완곡하게 말린다. 제품이 다 오래된 것뿐이라면서.
약속한 시간에 소형 전기차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빙하를 직접 가까이 가서 만져볼 수 있는 곳까지 우리 일행을 태우고 갈 차들이다. 한 대당 6, 7명이 탈 수 있는지라 모두 5대에 나눠 타고 줄지어 오르기 시작한다. 옛날부터 불과 몇 년 전까지는 마차를 타고 올랐다고 하는데 시간도 많이 걸리고 사고 위험성이 많아서 몇 년 전부터 미국에서 수입해 온 소형 전동차로 대체했다고 한다. 우리 일행을 태운 운전기사는 젊고 예쁜 아가씨였는데 참 친절했다. 우리가 마냥 즐거워하자 덩달아 연방 미소를 흘린다. 말은 안 통해도 감정의 교감은 똑같은가 보다. 운전 솜씨도 좋아서 믿을 만했다. 그 좁은 길을 어찌 그리 여유 있게 잘 빠져나가는지...... 특히 물보라가 부서지는 지점을 지날 때는 온 몸이 다 젖을 정도로 시원했고 햇빛을 등지니 무지개까지 생겨서 다들 신기해한다. 나는 쌍무지개도 보았다. 마음씨 고약한 사람은 그것을 보지 못했으리라. 행운의 쌍무지개라 했으니 오늘밤엔 무슨 좋은 꿈을 꿀 수 있을까? 폭포 지점을 휘돌아 좀더 올라가니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었고 거기서부터는 10분정도 또 걸어 올라가야 한다. 약간 경사진 길을 지나 큰 바위 지점을 지나니 왼쪽으로는 산에서 천천히 흘러내린 거대한 얼음덩이가 옥빛을 잔뜩 머금고 지척에 멈춰서 있고 오른쪽 천길 암벽 위로는 곳곳마다 날카로운 얼음덩이가 금방이라도 녹아내릴 기세로 누워 있고, 그 아래로는 폭포가 된 하얀 빙하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리고 있다. 빙하가 녹아내리고 있는 흔적은 여기저기에 보인다. 얼음과 얼음 사이로 사람 키의 몇 길이 넘는 골짜기를 이루고 있는데 바로 그 부분이 녹아내린 곳이고 그 녹은 물은 그 아래로 작은 호수를 이루어 놓고 있다. 거대한 얼음덩이 하나가 떨어져나가 작은 빙산이 되어 호젓하게 물위에 떠 있다. 빙하 호수에 손을 넣어 보니 말 그대로 얼음물! 잠시만 물에 넣고 있으면 곧 동상에 걸려버릴 것만 같다. 일부 사람들은 허가를 얻어 빙벽 등반을 시도하기도 하는가 보다.
브릭스달에서 본 빙하의 모습은 너무 강렬했다. 내려오는 길에 다시 보는 목가적인 경치는 더 이상 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다. 어찌 빙하란 놈은 자신의 모습을 그렇게 쉽게 인간들에게 보여주는지 자존심도 없나 싶다. 빙하의 여운은 숙소가 있는 라르달까지 달려오는 동안 계속된 것 같다. 흘러내릴 듯한 빙하의 한 자락에서 거대한 얼음덩어리가 떨어져 나오더니 수백 미터를 낙하 급기야는 산산조각이 나서 퍼져나가는 것을 보여주는가 하면, 굽이치는 도로를 따라 거대한 산들이 변화무쌍하게 자신의 위용을 보여주면서 그 빙하의 끄트머리에서는 양떼들과 소들이 한적하게 풀을 뜯고 있었다.
송네 피오르드의 한 자락을 15분간 횡단하고 긴 터널을 지나 라르달이라는 곳에 있는 숙소에 닿았다. 오자마자 여장을 풀고 식당에 모여 저녁 식사를 해결한 뒤, 우리 조는 운치있는 호텔 앞 잔디밭에 자리를 잡았다. 일본 관광객들이 옆자리에서 담소를 즐기고 있다. 우리들은 단합을 과시하며 통조림 안주에 소주를 마시며 하루의 여행을 정리했다. 다들 브릭스달 빙하의 모습을 잘 잊지 못하겠다며 야단이다. 빙하의 여운에 모두 취해 있었던 것이다. 지척에 있는 바다는 송네피오르드의 끝부분인데 바다라기보다는 호수에 가깝다. 바람 한 점 없다. 조수간만의 차가 미약하게 느껴질 뿐이다. 저 동네 안쪽으로는 숱한 보트와 요트가 정박하고 있다. 그 옆으로는 숱한 캠핑 차들이 적당한 간격으로 공간을 차지, 가족들끼리 나름대로의 휴가를 즐기는 모습이다. 몇몇은 바다로 뛰어들더니 멋지게 수영 실력을 자랑하고 또 몇몇은 무릎까지 오는 낮은 바다로 들어가 낚시를 시도하고 있다. 피오르드 관광을 마친 대형 유람선 한 척이 유유히 들어와 피곤한 듯 닻을 천천히 내린다. 한국은 지금 캄캄한 밤중일 텐데 여긴 아직 해가 지려면 멀었다.
5일째
갈매기 우는 소리에 일찍 잠이 깼다. 아침 운동 겸 산책삼아 친구와 함께 마을 안쪽까지 들어가 보기로 했다. 천천히 걸으면서 주변의 풍경과 분위기를 느껴보는 것도 얼마나 좋은가 말이다. 보트 계류장엔 많은 보트와 요트가 정박해 있다. 조수의 차이에 따라 계류장의 높이도 자동으로 조정 되도록 되어 있다. 우리나라는 파도가 심하게 치지만 여기는 사시사철 바람이 없는 곳이라 바다의 수면이 거울 같다. 맞은편 산그림자가 그대로 비치고 있으니 명경지수 아니던가. 바다를 그렇게 표현해도 사람들이 믿을까?
잔디를 깔아놓은 맞배지붕 형태의 단정한 집들이 매력적이다. 거의 2층집이고 지붕 바로 밑은 환기용 창을 하나씩 달았다. 어느 집을 보아도 꽃과 나무들이 어울려 그야말로 한 폭의 그림이다. 꽃은 주로 장미와 다알리아가 대부분이다. 얇은 나무를 멋있게 연결하여 하얀 페인트칠을 한 담장이 눈에 들어오는데, 높이가 1미터도 안 된다. 남들의 주거 침입을 방지하기 위한 우리나라의 담장과는 이미 다르다. 지붕돌들은 형태가 조금 다를 뿐 집집마다 같은 재료를 썼다. 2센티 정도의 두께로 납작하게 가공한 돌들이 가지런하게 지붕에 붙어있다. 노르웨이의 어느 곳을 가도 그런 지붕의 형태가 많은 것을 볼 때 틀림없이 보온력이 뛰어나고 내구성이 있다고 봐야 한다. 어떤 경우는 지붕 위에 모래나 흙을 깔고 그 위에 풀이나 잔디, 혹은 꽃과 식물이 자라도록 한 경우도 있는데 그것은 우리나라의 초가와 견줄 수 있는 전통가옥이다.
산책을 하고 돌아오는 길, 4일째 여행을 같이하고 있는 운전기사 리오를 만났다. 버스 청소를 하고 있는데, 가까이서 보니 키가 엄청 컸다. 배가 좀 많이 나와서 볼품은 없지만 믿음직한 모습이다. 환한 미소를 지으면서 사진을 같이 찍었다. 전주대학교 영문과 교수님 부부도 사이좋게 산책을 하고 있다.
호텔의 아침 식사는 부실하다 못해 먹을 게 없다. 우리 한국인은 아침을 잘 먹어 두어야 든든하고 하루를 시작하는 거 같은데, 유럽은 아닌가 보다. 며칠 째 계속 부실한 음식으로 아침을 때우고 있는 셈이다. 먹는 둥 마는 둥 짐을 챙겨 또 버스에 올랐다. 오늘은 노르웨이의 제2의 도시 베르겐을 여행하는 날이다. 버스에 오른 지 얼마 안 되어 세계에서 가장 길다는 터널을 지나게 되었다. 무려 24.5킬로미터가 약간 넘는다. 빠른 속도로 차를 타고 달려도 통과하는 데 몇 십 분이 걸린다. 필요에 의해서 뚫은 터널일 테지만 이 나라에는 1,000개가 넘는 터널이 있고 터널을 뚫는 기술은 세계 제일이라고 한다. 암석의 붕괴를 막기 위해 치밀하게 암석마다 쐐기를 박아놓았고 잘 단장된 느낌보다는 자연석의 모습을 그대로 살리는 방식으로 마감처리를 했다. 7킬로마다 차가 쉬거나 돌릴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놓고 파란 조명을 달아서 변화를 주었다. 운전자들의 긴장을 풀어주는 효과를 꾀하고 있다고 가이드는 설명한다. 산소의 부족함을 해결하기 위해 기계장치를 이용해서 바깥의 공기를 터널의 중간 지점까지 공급해주는 시스템을 만들어 놓기도 했단다. 터널 입구에서 중간 지점까지는 약간의 오르막이었고 그 다음은 계속 내리막인데 양쪽에서 터널을 약간 위를 향해 뚫어가다가 그 중간 지점에서 만나도록 되어있을 텐데 보통 기술은 아니다.
해발 2미터에 위치한 플롬역에서 해발 847미터의 뮈르달역까지 오르는 산악열차를 타고 다시 뮈르달역에서 보스역까지 일반 기차를 차고 가는 옵션 여행이 시작된다. 하루 전에 가이드가 미리 계약을 해 둬야 하기 때문에 승차 희망 여부를 물었더랬고 6명을 제외한 26명이 희망, 70유로를 지불하고 오늘 그 열차를 타게 된 것이다. 함께하지 않은 6명은 연세가 좀 드신 분들이었는데, 곧바로 플롬에서 버스를 타고 보스역까지 미리 가 있어야 한다. 플롬이란 곳도 피요르드의 끝자락에 있는 작은 마을인데, 오슬로나 베르겐으로 가기 위해서는 적어도 산악지대인 뮈르달까지 가는 교통 수단이 꼭 필요했을 터, 1920년부터 20여 년간 선로 공사를 전통적 기법으로 했고 그것이 완성되면서 두 지역만을 오가는 산악열차를 운행, 지금까지 다니고 있는데 언제부턴가 관광객들의 사랑을 많이 받고 있는 코스라고 한다.
기차는 전기를 이용해서 움직였다. 밖은 칙칙한 진초록 빛이지만 안은 온통 주황색 계통이다. 천장도 의자도 손잡이도 모두 그렇다. 기차는 굽이굽이 계속 돌고 돌아 올라가고만 있다. 좌우의 창밖으로 펼쳐지는 풍경이 과연 환상적이다. 그저 그렇겠지 했는데 그게 아니다. 어제 본 빙하의 모습을 다시 보는 듯 하다. 빙하가 녹아내리는 물이 가파른 산을 타고 내리면서 폭포를 이루기도 하고 그것이 모여 개천을 이루어 빠르게 흘러가고 있다. 그 양옆으로는 평화스런 마을이 자리를 잡았다. 찻길도 꾸불꾸불 맞은편으로 기어오르고 있는데, 뮈르달까지 올라가는 지방도인 듯 하다. 터널을 수도 없이 지난다. 어느 지점에선가 기차가 한 번 선다. ‘효스’ 폭포라는 곳인데, 엄청난 양의 빙하 물이 지척에 있는 계곡 밑으로 흘러내리는데 바위에 부딪히는 소리에 금방이라도 빨려들 것만 같다. 그 폭포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도록 배려하는 지점인가 본데 제법 널찍하게 만들어 놓았다. 기차는 사십 분 정도를 기어올라 뮈르달 역에 우릴 내려놓고는 잠시 쉬다가 다시 사람들을 태우고는 플롬역으로 내려가 버린다.
뮈르달 역은 한적했다. 마을이 있어서 생긴 역은 아니고 경유지로서의 역할만 하는 것 같다. 나무라고는 없고 초지만 보인다. 얼굴을 약간 들어보면 빙산이 저 멀리 있다. 산꼭대기엔 만년설이 뒤덮여 있는데 손에 잡힐 듯하다. 조금만 더 오르면 하늘에 닿을 것만 같다. 우리를 태울 기차가 오려면 20분 정도를 기다려야 한다. 동료들은 늘 그렇듯이 틈만 나면 사진 찍기에 바쁘다. 이번엔 자전거 여행을 즐기고 있는 잘생긴 유럽 사람들 틈에 끼여 포즈를 취하고는 좀 찍어달란다. ‘찰칵’ 너도 나도 ‘찰칵’
오슬로 행 기차를 타고 가다가 보스역에서 내려 6명의 일행과 다시 만나 베르겐을 향해 또 달린다. 제법 많은 시간이 걸렸는데 그 동안 타이티의 여인은 베르겐에 대해서 노르웨이의 역사와 관련지어 설명을 한다. 한자동맹, 수만 명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흑사병, 어시장 등 배경 지식을 머릿속에 쏙쏙 넣어 주고 있다. 그러나 학습량이 너무 많아서 받아들이기 힘들다. 노르웨이의 서해안에 위치한 베르겐, 제2의 도시답게 활력이 넘쳤다. 금강산도 식후경, 예약된 식당에 들러 점심을 배불리 먹었다. 맨 먼저 베르겐의 중심지였던 브릐겐 지역을 둘러보았다. 200년 넘은 독일풍의 목조 건물 여러 채가 줄지어 나란히 서 있는 데 보존 가치가 높은 곳이라 그런지 유네스코가 지정한 문화재로 되어 있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밖에서 보는 느낌과는 전혀 다르다. 2층 이상은 붕괴 위험이 있어서 출입을 통제 1층만 상점으로 사용하는 듯 했다. 옛날부터 사용하던 우물, 인력거, 도르레 시설 등도 눈에 띤다. 당시의 독일인들은 이곳 브뤼겐 지역을 한자 동맹의 근거지로 삼아 이 지역 전체를 통괄, 막대한 이윤을 고스란히 챙겨 그들의 고국으로 빼돌렸을 것이다. 현지에서 번 막대한 돈을 감당하기 어려워 곳곳에 금고를 두어 특별 관리도 해야 하지 않았을까 싶다. 한자동맹이 독일의 상업 집단이 상호교역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창설한 조직이었던 만큼 해운업, 수산업, 상업에 이르기까지 독일인의 입김은 엄청나게 작용했음을 알 수 있겠다.
버스 출발 시간에 맞춰야 하는 여행은 참으로 피곤하다. 우리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얼마되지 않고 관심 있게 볼 것은 많을 때, 급히 뛰다시피 하면서 다녀야 하니까 말이다. 1200년대의 건물이 있다는 곳으로 급히 발을 옮겼다. 삐죽이 솟은 건물이 있어 안에 막 들어가니 입장료를 받고 있다. 유로화로 입장료를 지불하려 하니 안 받는다. 이 나라 화페인 크로네화로 내란다. 수중엔 한 사람 분에 해당하는 크로네화밖에 없어 포기하고 밖으로 나가려 하니 그냥 들어가라며 온정을 베푼다. 낯선 동양의 관광객을 배려해주는 게 틀림없다.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좁은 입구를 통과 나선형 계단을 오른다. 그 건물은 옛날의 총독 관저인데 지금은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지붕 위로 난 통로가 있어 나가 보니 베르겐 시내가 한눈에 들어 온다. 베르겐 어시장 어귀부터 호화유람선이 있는 선착장까지 잔잔한 바다가 크고 작은 배들을 띄워놓았는데 매우 한적해 보인다. 바삐 움직이는 배들이 별로 없다. 바로 옆의 건물은 1200년 경에 축조된 것으로 주로 연회장으로 사용되었다고 하는데 고색창연함은 있으나 규모가 좀 작다. 그 주변의 아담하고 예쁜 숲에 더 정감이 간다. 시선을 좀더 올려서 보니 그 아름다운 베르겐의 주택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주황색, 군청색, 회색 지붕의 흰 다양한 건물들, 바다를 내려다보며 완만한 산비탈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데, 그 위쪽으로는 우거진 숲이 있어 인공과 자연의 조화를 거스르지 않는다. 산속에 외로이 떨어져 있는 주택도 몇 채 있다.
오래된 마리아 교회가 총독 관저 옆에 있어서 들어가 봤다. 그 내부는 성당의 분위기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고 명동 성당, 계산 성당 등 오래된 우리나라의 성당에서 본 느낌과 크게 다르지 않다. 브뤼겐 지역은 사람들이 가장 붐비는 상업지역으로 야외 카페가 성업중이었다. 햇빛이 강렬한 곳이지만 일광욕을 워낙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사람들을 만나 담소하기에 적절한 곳인가 보다. 또 비가 워낙 많이 오는 지역(연간 3000밀리)이라 오늘처럼 화창한 날엔 일광욕이 최고가 아닐까?
어시장을 둘러보는 사람들이 인산인해다. 관광객들이 반드시 둘러본다는 곳, 과연 온갖 수산물들이 즐비하다. 포항의 죽도시장과 비교되었다. 풍성한 해산물을 팔고 있고 사람들이 많이 붐빈다는 점에서는 다를 게 없다. 팔고 사는 사람들의 입놀림도 재미있다. 말만 좀 통하면 물건도 좀 사고 또 퍼질러 앉아 상인들과 이런저런 얘기도 해 보고도 싶지만 그런 여유가 없다. 바삐 또 다리품을 팔아 교회 건물 두 군데를 더 둘러보았다. 중세의 카톨릭 교회가 대부분 루터교 교회로 바뀌었다고는 하나 그 의식 절차는 별 차이가 없다는 가이드의 설명을 들었다. 교회 위쪽으로는 베르겐 시내를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가 있다고 하는데 거기까지는 시간상으로 갈 수가 없다. 총독관저에 올라 시내를 둘러 본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베르겐에서 다시 보스라는 곳까지는 오전에 달렸던 길이다. 한 번 달렸던 길이지만 또 새롭다. 같은 것도 보는 방향에 따라서 달리 보이듯 방향을 바꿔서 달리는 즐거움도 있음을 알겠다. 보스에서 오슬로로 가는 길은 두 번 다시 올 수 있는 길이 아니라서 차창 밖을 열심히 살피면서 달렸다. 침엽수림과 초지, 뭉게구름 피어난 하늘, 그리고 그 밑의 농가 등 그림 같은 것들을 수없이 감상하고 폭포가 있는 산악 지형을 통과하면서 한참을 달리니 또 피오르드가 나타난다. 하당에르 피오르드다. 30분마다 피오르드를 왕복하는 배가 저 건너편 길을 연결하고 있다. 천천히 횡단하는 데 15분 정도 걸린다. 국가에서 직접 운영하기 때문에 배삯은 무료란다, 노르웨이는 곳곳에 이런 곳이 많다. 다리로 연결하지 않는 것은 바다가 워낙 깊어서 교각을 세울 수가 없기 때문이다. 육지 깊숙한 곳까지 좁은 바다가 수십, 수백 킬로 기어 들어와서 이렇게 협만을 이루고 있으니 이게 바로 피오르드 아니던가, 수백만 년 전에 저 높은 산의 빙하가 흘러내리면서 깊숙이 U자형 골짜기를 파놓았고 이젠 그곳에 바닷물이 들어와 패인 곳을 메웠으니 과연 피오르드의 나라다.
피오르드를 통과한 후는 계속 산악 지형이다. 해발 2미터부터 1000미터까지 계속 오르막의 연속이다. 한참을 계곡을 끼고 돌고 돌더니 어느 새 침엽수림을 벗어나 풀들만 자라고 있는 초지를 달리고 있다. 해발 1200미터가 넘는 고원지대가 시작되는 것이다. 거기서부터 한 시간 가량은 나무 하나 없는 그런 초지를 계속 보게 될 거란다. 길가에는 바지랑대 같은 길쭉한 나무들이 길 양쪽으로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면서 꽂혀 있는데, 눈이 많이 왔올 때 그곳이 길임을 표시하여 눈을 치우는 차량들의 작업을 용이하게 하기 위함이란다. 밤에도 작업을 할 때도 있어서 나무 끝부분엔 야광표시를 해 두었다. 우리나라의 개마고원 쯤 되는 곳일 테지만 그리 높지 않은 구릉들만 초지와 함께 펼쳐지고 있다. 간혹 예쁘게 지어놓은 집들도 눈에 띄는데 그곳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휴가용 별장인 것 같다. 그 외에도 이끼 낀 크고 작은 돌들, 키가 작으면서도 예쁘기만 한 야생화, 연두빛 풀섶, 넓고 좁은 수많은 호수 등이 보이는데 하늘빛과 어울려 너무도 평화스럽다. 가끔씩은 이런 탁 트인 공간에 서서 가슴에 맺힌 것들을 시원하게 털어버릴 수 있다면 좋겠다.
고원 지대를 계속 달리다가 간이휴게소가 있는 어느 한 지점에서 10분간 쉬기로 했다. 기회를 놓칠세라 유선생과 나는 길옆에 있는 언덕으로 바삐 기어올랐다. 트롤 인형이 신비롭게 서 있기도 했고, 그곳에 가면 조금 전 차창 밖으로 보았던 거대한 빙산의 사진을 찍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볼 수 없었다. 더 높은 언덕이 수백 미터 앞에서 가로막고 있어서 나무로 만든 거대한 트롤 인형을 모델로 사진 촬영을 하는 데 만족해야 했다. 녀석의 길쭉한 코를 만져보려 했지만 큰 키는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버스는 계속 달려도 연속되는 초지였다. 완만하기는 하나 내리막길을 달리고 있을 텐데, 아직 초원이다. 한 시간 이상 달렸을까? 어느 지점에선가 자잘한 자작나무가 보이기 시작하고 또 침엽수림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우리가 달렸던 고원지대는 옛날에는 만년설로 뒤덮였던 빙하지대였을 텐데 지금은 눈이 다 녹아 초지가 되고, 우묵한 부분은 또 그렇게 호수가 되었던가 보다.
노르웨이 여행의 마지막 숙박지, 골이라는 곳에 도착했다. 식사를 마치고 여장을 풀었을 때는 이미 잠을 자야할 시간이 되고 말았다. 내일은 하루 종일 이동만 하는 날이니 밤늦게 잠을 자도, 내일 차 안에서 잠보충을 해도 되겠다 싶어 준비해 간 참치 통조림 몇 통을 비우면서 술을 좀 마셨다. 유선생과 동무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폭넓게 나누면서 우정을 쌓은 지도 벌써 30년이 다 되어간다.
6일째
다음 날은 오히려 일찍 잠이 깼다. 모닝콜이 울리려면 아직 멀었다. PERS 호텔 주변을 걸으면서 운동을 좀 할까 싶어 밖으로 나왔다. 비가 왔는지 길이 촉촉하게 젖어 있다. 저 멀리는 산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있는데 환상적인 분위기다. 아늑한 느낌을 주는 마을이었다. 노르웨이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이 있는 곳이라고도 하는데, 지금은 그 건물을 어딘가로 옮겨 놓아서 현지에서 직접 볼 수는 없단다. 전 교사였던 옥옥자 할머니는 비가 내릴 때부터 운동을 시작했는지 아직도 우의를 입고 있다. 길에서 만나니 반갑다. 갑상선암 수술을 한 바 있는데, 그 때부터 운동 삼아 등산을 즐겨 했고, 건강을 위해서 배낭여행도 마다 않는 분이다. 연세가 60이 넘은 분이지만 몸은 아직 젊은 분 같아 보였다.
아침 식사를 하고 오슬로까지 또 달렸는데 그 시간은 별 기억에 없다. 모자란 잠을 보충하는 시간이 아니었나 싶다. 어느새 오슬로 시에 도착했고, 도착하자마자 점심 식사를 했는데 식당은 노르웨이 여행 첫날 들렀던 한식집이다.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식사를 하고 그 주변의 풍광을 사진에 담기에 바빴다. 전깃줄을 타고 차도의 레일 위만을 달리는 전차들, 공원에 앉아 대낮부터 술 한 잔 기울이는 젊은이들, 알아보지 못할 건물의 낙서, 배 불룩한 여인이 남편의 손을 잡고 애완용 개를 끌고 가는 모습, 젊은 여인과 나이 든 여인, 과일 가게 주인의 묘한 표정, 식사를 끝낸 친구의 느긋함 등 사진에 담을 게 한두 장면이 아니다.
가이드는 마지막이라면서 일행을 쇼핑센타로 데리고 갔다. 몸에 좋다는 오메가3, 노르웨이의 특산품 모피 등을 구입하도록 배려하는 차원이란다. 글쎄다. 차라리 볼 만한 곳을 소개시켜 주고 언제까지 오라면 좋겠다. 배낭여행이라면 모르되 패키지여행은 곤란하다며 가이드는 애써 변명했지만 보완해야 할 부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20분이 주어진 쇼핑 시간 동안 돈 많은 분들이야 물건 사재기에 바빴을 테지만 유선생과 난 그 주변의 유명 장소를 찾아다니기에 바빴다. 눈에 들어오는 대성당을 향해 뛰었다. 다가가서 건물 외관과 내부를 두루두루 둘러보았다. 성당 안의 거대한 돔식 천장엔 태양 같은 빛을 형상화한 그림이 크게 그려져 있다. 그 안에는 DEO * GLORIA * IN * EXCELSIS라고 새겨져 있다. 파이프 오르간, 스테인드그라스 등도 인상적이다. 성당 고유의 엄숙한 분위기가 그대로 전해진다. 성당 건물뿐만 아니라 일반 건물들의 외관도 최대한 예술성을 잘 살리고 있다. 칼 요한 거리에 있는 국립극장, 오슬로 대학교, 역사박물관, 국립 미술관까지 사진에 담느라 온몸이 땀으로 젖었다. 한 곳에서 집중적으로 보면서 느끼는 것이 아니라 수박겉핥기 식으로 외관만 둘러보는 것이라 실감나지는 않지만 그 정도로 만족해야 했다.
국경을 넘어 다시 스웨덴의 칼스타드까지 오는 길은 몇 시간이 걸렸는지 모를 정도로 잠에 취해 있었다. 숙소는 주유소 옆의 작은 호텔이었는데, 예약을 해 놓았음에도 불구하고 저녁 식사가 좀 시원찮았다. 일행들의 고함 섞인 볼멘 소리가 여기저기 터져 나와서 노랑풍선의 정지희 가이드는 남모르는 눈물까지 흘려야 했다. 아무리 거품없는 여행사라지만 이거 너무 심한 것 아니냐, 여지껏 많은 여행을 했지만 이런 대접을 받아본 적은 없다는 연세 지긋하신 분의 불만에 너도나도 참았던 불만을 얘기했기 때문이리라. 유선생과 나는 먹고 자는 것의 불편함, 못마땅함보다는 좀더 많은 것을 볼 수 있게 해 주지 못하는 패키지 여행의 한계가 더 불만이라는 데 뜻을 같이 했다. 32명의 일행을 하나하나 신경 쓰면서 즐거운 여행이 되게 하려는 정 가이드의 정성과 노련함에 대해서는 칭찬과 격려를 보내고 싶은 심정인데 오히려 오늘 꾸지람만 잔뜩 듣고 말았다. 기회가 있으면 한 번 위로해 주리라. 근데 친구인 유선생은 정가이드로부터 ‘반항아’ 소리를 듣고 있다. 가이드의 말을 순순히 듣고 따르는 것만이 아니라 틈나면 다른 것을 요구하고 제안하고 멋대로 하는 부분이 있어서 그렇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의 많은 여행 경험을 감안해 본다면 그러고도 남을 거라는 생각을 한다. 여하튼 오늘은 하루 종일 이동만 하는 하루로 기록되어야 하겠다.
7일째
작은 마을 칼스타드에서 출발한 버스는 수도인 스톡홀름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어딜 둘러보나 한 폭의 그림이던 노르웨이보다 아름답지는 않지만 그럭저럭 볼 만한 풍경이 이어지고 있다. ‘볼보(VOLVO)', '에릭손(Erickson)' 등 세계적으로 유명한 기업체의 로고가 눈에 자주 띄었고 30년 동안이나 인기를 끌고 있는 팝그룹 ‘아바(ABBA)’의 나라로도 유명하다. 아바의 노래들을 소재로 한 뮤지컬 맘마미아가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공연 중이다. 너덧 시간의 버스 주행에 무료함을 느낄 무렵, 우리 조에 속한 심요택 의사 선생님이 건강 관련 강의를 시작했다. 암의 발병 원인, 근본적인 치유대책, 현대 의학이나 병원 치료의 한계, 음식물 섭취의 중요성 등등의 유용한 강의였는데 기존의 상식을 뒤엎는 내용이 많아서 매우 신선하게 와 닿는다. 통합 의학, 대체 의학 차원에서 양의와 한의를 종합해서 환자를 돌보고 있다는 분이다. 그 분의 의술과 연구 내용이 주변 곳곳에서 인정을 받아 더 많은 암환자가 치료를 받고 완치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같은 극단에서 오랜 세월 연극을 함께 했던 이동선 선생님을 떠올렸다. 그분은 난소암을 앓고 있는 중이다. 가까운 친구인 이기호 선생의 부인이기도 하고 연극에 대한 남다른 열정을 가진 분이다. 연극만 하면 모든 것을 다 잊고 거기에 온갖 정성을 기울이던 우리 극단의 인민배우요, 공훈배우다. 그런데 갑자기 찾아온 암 때문에 요즘은 바깥 출입을 딱 끊고 있어 주위 사람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여행을 통해 만난 의사 선생님이 이동선 선생님에게 삶의 희망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건강은 우리 스스로 지켜야 하고 우리가 섭취하는 음식물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강조하면서 이야기를 마무리했고, 건강에 관심 많은 분들의 여러 가지 질문에도 성실히 답해주었다.
드디어 스톡홀름 시청사에 이르렀다. 노벨 평화상을 제외한 모든 노벨상 시상식은 노벨 기념관에서 거행되고, 이곳 시청사에서 축하 만찬회가 열린다고 한다. 청사 앞 널찍한 공간에는 잔디가 파랗게 깔려 있고 바다를 앞에 둔 야트막한 담장 위에는 청동 조각 몇 점이 인상적이다. 동양 여인처럼 아담한 체구의 나체상인데 지나가는 이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 어쩌면 그렇게 사실적으로 묘사를 했는지 금방 살아 움직일 것 같다. 발레나 무용의 한 동작을 모여주고 있는 것 같다. 까치발을 하고 양손을 아래로 쭉 뻗어 손가락을 하나씩 벌려 살짝 늘어뜨렸는데 우아함을 한껏 살리고 있다. 시청 앞마당 안쪽에는 대리석으로 조각된 근육질의 남자 나체상이 있는데 무엇이 그리 불만인지 가슴을 쥐어뜯고 서 있다.
버스에 올라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바람의 언덕이란 곳으로 갔다. 5,000원짜리 그 비싼 아이스크림을 하나 사 입에 넣으며 난간에 기대어 섰다. 스톡홀름 시내가 한눈에 보인다. 엽서에 담긴 그림처럼 아름다운 스톡홀름, 바다에 유유히 떠다니는 요트, 카누, 북유럽의 베니스라는 칭송을 듣기에 너무나 잘 어울리는 물위의 도시였다. 누군가 ‘아이, 예뻐라! 어찌 이렇게 예쁠까’ 하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소풍 나온 일가족이 벤취에 앉아서 나처럼 시내 쪽을 바라보고 있다. 자매로 보이는 두 소녀가 눈에 띄었다. 둘 다 하얀꽃이 박힌 분홍빛 원피스를 입었다. 인형처럼 예쁜 아이들, 어쩌면 그리도 예쁘고 앙증맞은지 지금이라도 저런 딸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까르륵거리며 웃는 그애들의 천진난만함이 너무 좋아서 함께 사진도 찍고 안기도 했다. 경계의 눈빛은 이미 볼 수 없다. 동양인의 품이 따스함을 그귀여운 아이들은 알았을까?
스톡홀롬의 구시가지로 다시 내려가 왕궁 주변을 관람하였다. 왕의 대관식이 열린다는 대성당을 정면에 배치하고 그곳을 오르면서 오른쪽으로 왕궁을 두었는데, 층 수는 3층이지만 거대하다. 온갖 조각품과 화려한 기둥장식을 하고 버티고 있는데, 출입구가 평지와 같아서 덴마크의 왕궁처럼 역시 권위적이지는 않다. 가이드 이인자씨가 준비해 온 왕가 가족의 사진을 보기도 했다.
왕궁을 돌아 대성당 뒤로 옮기니 골동품 거리, 화려한 상가 골목 이리저리 연결되어 있는 곳이다. 노벨기념관이 그 중앙에 자리잡았다. 다이너마이트 발명으로 엄청난 부를 축적한 노벨이 인류를 위해 공헌할 것이 무엇일까 궁리하다가 이 상을 제정하기로 하였는데 그 상을 시상하는 장소인데 참으로 소박한 건물이다. 오히려 그 앞 광장의 주변 상가 건물이 훨씬 더 아름답고 기묘하여 눈길을 끌었다. 광장 한 켠에 자리잡은 오래된 우물이 동서남북의 여기저기서 물을 뿜어낼 기세로 악마 모양으로 조각된 입에 철제 대롱을 달았는데, 이곳의 역사를 증언하고 있는 듯하다. 골목을 누비고 다니다가 집결 장소인 광장으로 나오니, 아래 위로 검은 옷을 입은 젊은이들이 광장을 펄쩍펄쩍 뛰어다니며 이상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공중에 울려퍼지는 소리가 신비로운 주술처럼 마음을 사로잡는다. 알고 보니 어떤 연극 공연을 안내하고, 소개하기 위해 퍼포먼스를 펼친 것이라고 한다. 공연에 참가한 사람 가운데 가장 앳되고 귀여운 친구에게 다가가 사진을 함께 찍을 수 있겠느냐고 하니 흔쾌히 응하며 사진기를 향하여 섰는데, 알고 보니 남장을 한 여자였다.
이제 버스는 시가지를 돌고 돌다가 북방 박물관 아래의 바사호 박물관에 닿는다. 바사호는 스웨덴의 국력이 막강하던 구스타프 2세 아돌프 왕 시대에 건조한 전함의 이름인데 길이 69미터, 폭 11.7미터 배수량 1,400톤의 규모로서 133명의 승무원과 300명의 전투원이 승선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철천지 원수 같은 사촌이 왕으로 있는 폴란드를 제압하기 위해 1628년 8월 왕궁 근처의 부두를 출발하여 진격해 나가던 중 1.3킬로미터 지점에서 돛에 갑자기 실린 많은 바람 때문에 무게 중심을 제대로 잡지 못하고 침몰되고 말았다는 불운의 배다. 막대한 돈을 들여 정성껏 축조한 배가 백성들의 환송을 받으며 출격하다가 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냥 가라앉고 말았으니 그보다 더 큰 비극이 있을까? 건물 1~3층까지 안을 꽉 채우고 있는 엄청난 규모의 전함이라고 하지만 배 전체가 화려하고 많은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이게 왕의 힘이란 말인가? 한 개인의 감정과 원한이 많은 민중들을 전쟁과 죽음으로 몰아넣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런 모순된 역사가 있다면 다시는 그런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하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하지 않을까?
300여 년간 바다 속 깊이 잠겨있던 바사호를 인양한 것은 1930년 고고학자이자 엔지니어였던 약관 20세의 ANDERS FRANZEN이다. 그는 현왕의 할아버지인 구스타프 왕한테 건의를 해서 30여년에 걸친 연구와 인양 작업 끝에 1961년 4월 뭍으로 끌어올려 이 박물관을 만들어 안치한 것이다. 박물관 안의 조명도 신경을 써서 너무 밝지 않게 했고, 두꺼운 콘크리트 벽으로 외부의 빛을 완전히 차단함으로써 급속한 부패를 막고자 했다. 그의 건의를 받아들인 구스타프 왕은 역사학자로서 경주 노서동 고분군에 있는 서봉총을 발견한 사람으로 우리나라에도 익히 알려진 분이기도 하다. 바사호의 위용과 비극만큼이나 아픈 역사를 갖고 있는 스웨덴의 스톡홀름이지만 오늘은 그것을 모두 감춘 채 생동감 넘치는 모습으로 남아서 많은 사람들에게 교훈과 즐거움을 주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실자라인’이란 거대한 배가 서서히 입항을 하고 있다. 실자라인의 ‘실자’는 ‘돌고래’라는 핀란드 말이고 돌고래처럼 신나고 활기차게 바다를 오가는 배라는 의미로 쓰여진 실자라인, 오늘 저녁 스톡홀름을 출발하여 내일 아침 핀란드의 투르크까지 항해하도록 되어 있는 배이다. 여객터미널은 탑승을 기다리는 관광객들로 인산인해다. 다행히 우리는 일찍 줄을 서서 기다렸기에 제일 먼저 배에 오를 수 있었다. 터미널 탑승구에서부터 배에 오르기까지 약 100미터 정도 짐을 끌고 걸어가야 하는데, 오른쪽 옆에는 콘베이어 벨트가 사람 걸어가는 속도만큼 움직이고 있어서 배 타기 직전까지는 짐을 그 위에 올려놓고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되어 있어 인상적이다.
배는 엄청나게 컸다. 온갖 시설이 다 있다. 사우나, 식당, 카지노, 온갖 종류의 댄스장, 나이트클럽 등등 그야말로 호화유람선이다. 우리가 하룻밤 묵을 선실에 들어가 짐을 풀고 식당에 갔더니 듣도 보도 못한 각종 청어 요리, 연어 요리, 과일, 맥주, 화이트 와인, 레드 와인, 야채 수프, 진기한 음식들이 가득가득 차려져 있다. 술까지 공짜라기에 문 닫는 시각인 밤 11시까지 진을 치고 앉아 산해진미를 즐겼다. 누구는 우릴 촌스럽다고 흉볼지 모르겠으나 오랜만의 흥겨움을 굳이 물리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부산에서 온 네 자매와 우리 조에 속한 몇 명은 합석하여 건배를 외치며 선상 파티를 연 것이다. 서로가 허심탄회한 웃음꽃을 피웠고 술이 떨어지면 또 가져다가 마시고 또 마시니 모두가 얼큰하게 취할 수밖에 없었나 보다. 결국 웨이터의 문 닫을 시간이라는 말에 고조된 흥분을 가라앉혀야 했다. 면세점을 여기저기 흘깃거리다가 피곤함이 몰려와 선실로 들어가 잠을 청했다. 술도 좀 취하니 오는 잠을 물리칠 수가 없다. 비좁긴 해도 2층 침대, 화장실, 샤워부스까지 마련된 선실이 아주 쾌적해서 좋다. 호화유람선의 매력을 느꼈다고나 할까?
8일째
우리가 쿨쿨 자는 사이에 유람선은 이미 국경을 넘어 있었고 백야의 새벽은 늘 밝아서 배의 흐름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발틱해를 휘저어 핀란드만으로 향하고 있는 것이다. 갑판에 오르니 시선이 확 트인다. 잔잔한 바다 위엔 항로 표지등이 장난감 등대처럼 꽂혀 있고 섬 주변의 호수 같은 바닷가에는 그림처럼 아기자기한 집들이 배에서 뛰어내리면 금방 닿을 것만 같은 거리에 늘어서 있다.
투르크 항에서 수도 헬싱키까지는 버스로 3시간 정도 걸렸다. 세계 1위의 휴대폰 노키아, 자작나무 수액으로 만든 히트 상품 자일리톨 껌, 그리고 울창한 숲과 수없이 많은 호수들, 이 모두가 핀란드의 상징물이 아닌가 싶다. 현지 가이드의 정신없이 바쁜 안내에 이끌려 초스피드 일정을 소화해야만 했다. 제일 먼저 세계적인 작곡가 시벨리우스 공원에 들렀더니 시벨리우스 흉상과 얼굴 모양이 새겨져 있었고 수많은 음정을 상징하는 길고 짧은 쇠막대를 뭉쳐 매달아 놓은 것이 눈길을 끈다. 조국의 독립과 평화를 기원하는 핀란디아를 작곡한 시벨리우스, 외세의 침략으로 힘들었던 나라이기에 이 나라 사람들은 그를 국가의 영웅으로 숭배하고 있다. 대성당 앞의 원로원 광장, 귀족회관, 중앙교회, 중앙극장, 우스펜스키 사원 앞에서 사진을 찍는 것으로 헬싱키 관광을 마치고 러시아 국경선을 향하는 버스에 올랐다.
러시아를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게 하는 사건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국경을 넘는 데에 세 시간이나 걸렸다. 사회주의 국가라서 그런지 공무원들의 태도엔 급할 것이 없었다. 국경을 넘기에 앞서 이것저것 조사하는 것이 많은가 본데, 수많은 차량들이 아무리 길게 늘어서 있어도 막무가내다. 아주 느긋하게 일을 보다가 퇴근 시간이 되니까 서둘러 업무를 끝내면서 동료에게 일을 떠넘기고 가버리는 그들의 모습에서 가슴이 답답해졌다. 근무하는 사람이 한 사람 줄면서 속도는 더 늦어질 판이다. 배변 욕구를 눌러 참고 있는 일행들, 꼬리를 물고 이어져 지쳐있는 차량들, 느릿느릿한 공무원들, 이 모든 게 스트레스로 작용하기에 딱 맞다. 기약 없이 기다려야 하는 우리로서는 무척 힘든 상황이었다. 국경을 넘는 데 이렇게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면 러시아 당국에서도 빨리 개선책을 마련해서 신속 정확하게 국경을 넘을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어 놓는 것이 당연한 것이거늘 거기에 대한 고민이 전혀 없는 듯 했다. ‘까짓 것, 배 째라, 배 째!’식 아닌가?
밤 11시에 쌍트페쩨르스부르크(앞으로는 ‘뻬쩨르’라고 줄여서 표현할 것임)의 한 섬에 위치한 모 호텔에 도착했다. 오후 내내 불편함과 불쾌감에 시달렸지만 우리의 마음을 풀어준 것은 호텔의 시설과 식사 내용이었다. 지금껏 묵은 호텔과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아늑하고 쾌적한 시설이었으며 그림 한 점, 조명 기구 하나 신경 쓰지 않은 것이 없었다. 식사까지 정성껏 마련한 흔적이 느껴져서 하루의 피로가 말끔히 풀리는 기분이었다.
9일째
여행 중 내내 아침 일찍 잠에서 깬다. 아무리 오래 자려해도 그게 잘 안 된다. 여행에 대한 설레임일까? 아니면 버릇일까? 뻬쩨르의 아침은 역시 백야와 함께 일찍 날이 새었다. 복장을 갖추어 호텔을 나와 거리를 걷기 시작한다.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러시아를 여행하는 관광객들은 특히 몸조심을 해야 한다고 했으니 낯선 곳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볍지는 않다. 이 건물 저 건물을 기웃거리면서 이 도시의 냄새를 맡아볼 심사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유심히 쳐다본다. 그들의 시선을 좀 느끼고 싶어서다. 그러나 그들은 낯선 동양인에 대해서 별 관심이 없는 듯하다. 이내 시선을 피하고 갈 곳을 갈 뿐이다. 발걸음이 제법 빠른 것으로 보아 아침 일찍 출근하는 사람들 같다. 사람의 움직임 만큼이나 오가는 차량들도 차츰차츰 늘고 있다. 건물은 얼핏 보아도 오래된 것이 많아 보이는데, 대체로 4층 규모로 된 건물이다. 골목이 하나 보여서 들어가 보니 양옆으로 낙서를 심하게 해 놓았다. 그 안에는 아파트 주차장인 듯한데, 몇 대의 허름한 차가 주차되어 있다.
시내를 잠시 둘러보다가 호텔로 돌아와 가방을 챙기고 식당으로 내려와 시종일관 생글생글 웃으며 서빙을 하는 호텔 식당 웨이터의 태도에 고마움을 느끼면서 아침 식사를 푸짐히 했다. 그런데 아직 부산의 네 자매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간밤에 무슨 재미있는 일이 있었을까? 추측컨대, 밤새도록 자매간의 이야기꽃이 너무 길어졌을 테고 오랜만에 술도 한 잔씩 걸쳤으리라. 버스에 오르니 오늘 하루 현지 여행을 책임질 가이드가 미스터 한이라고 자기를 소개하면서 전라도 사투리가 물씬 풍겨나는 말을 마구 쏟아낸다. 러시아의 역사에 대해서 많은 공부를 했는지 시종일관 역사적 관점에 초점을 맞추어 설명을 해 주는데 아주 재밌다. 나름대로의 인생관도 있고, 가치관도 분명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전라북도 임실이 고향인데, 러시아가 좋아서 죽을 때까지 살려고 마음먹었단다. 우선 그는 나름대로 뻬쩨르를 소개하고 있다.
로마노프 왕조의 피터 대제가 스웨덴으로부터 빼앗은 땅에 자신의 이름을 한 도시를 만들었고(1703년), 과거에는 150개의 섬으로 되어 있었는데 지금은 42개의 섬으로 구성된 인구 600만의 도시로 발전했다. 중심에 네바강이 흐르고 있으며, 계획적으로 만든 도시이기 때문에 인위적인 냄새가 좀 나긴 하지만 예술적으로 훌륭한 건축물이 많으며 그 중요성으로 보아 ‘유럽의 창’이라고 불리는 도시라고 한다. 네덜란드의 건축 양식을 본뜬 바로크 풍의 도시로 형성된 도시, 후에 레닌의 고향임을 기념하기 위해 ‘레닌그라드’ 라고 불리다가 1996년에 다시 원래의 이름을 되찾았다고 한다.
미스터 한은 먼저 피터 대제의 4계절 궁전 중의 하나인 여름 궁전을 안내하겠다고 한다. 거기까지 가는 데만도 30분 정도 걸리니 러시아의 역사에 대해 공부를 좀 하잔다. 우린 열심히 그의 설명을 들으면서 머리에 입력하기 바빴다. (그 때 들은 이야기를 이 공간에 옮길 생각을 하니 머리가 아파 생략하기로 한다.)
여름 궁전 입구에서 내리자 우리나라 관광객을 알아본 거리의 악사들이 애국가, 고향의 봄, 아리랑을 연주하며 댓가로 몇 푼 던져주기를 기대하고 있다. 궁전으로 들어서니 어마어마한 규모의 숲이 가지런히 정돈된 모습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얼마나 부지런히 가꾸어야 저렇게 아름다운 숲이 조성될 수 있을까? 좀더 걸어 들어가니 궁전 앞 뜰에 연못이 있었고 뒤로 돌아가 보았더니 황금빛을 입힌 수많은 동상과 어우러진 분수공원이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궁전 건물 곳곳에도 금박이 입혀 있었다. 여름 궁전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인터넷 자료를 잠시 인용할까 한다.
** 페테르부르크에서 서북방향으로 29km떨어져 핀란드만을 끼고 형성된 작은 도시에 위치한 여름 궁전이다. 길이 300m, 3층으로 지어진 작은 궁전이지만 이곳의 장관은 계단식으로 이루어진 윗정원과 아랫공원의 경계라 할 수 있는 윗정원 중심 부분에 위치하고 있다. 정문 현관 부분은 육지쪽 윗정원 방향으로 되어 있고, 후문 현관은 뱃길로 오는 손님을 맞이하기 위하여 아랫공원 핀란드만 방향으로 이루어져 있다. 지금도 쾌속선이 다니고 있는 이 뱃길은 동궁(에르미따쉬 박물관) 정문 네바강에서 출발하여 핀란드만을 지나 아랫공원 선착장에 다다른다. 이 길은 경호의 안전성 때문에 황제들과 손님들이 육로보다 자주 이용했다. 궁전은 지금은 1,2층만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계단을 오르면 입구엔 2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들의 점령으로 인한 궁전과 도시의 피해 장면 사진들이 초기의 궁전건축 그림, 재건축사진등과 함께하며 첫 번째 방(시종, 황제비서진 집무실)을 지나 황제들이 각국의 손님과 대상인들로부터 인사와 선물을 받았다는 아름다운 황금으로 이루어진 접견실을 지나면 마지막황제 니콜라이2세가 사용했던 옥좌와 상단 벽에는 제정러시아 황제들의 초상화가 걸려있는 연회실이 나온다. 연회실을 지나면서 건물 2층은 아랫공원 부분과 윗정원 부분으로 나뉘어진다 아랫공원 쪽은 거울방, 모델방, 황금의 방, 침실, 황제와 황족들의 전용 하얀식당, 중국의 방등 주로 여황제들이 사용하였다는 방들이 아름답게 꾸며져 있다 우측으로 돌면서 윗정원 부분은 파벨1세의 침실, 피터 대제의 집무실 등으로 나뉘어진다. 윗정원은 주로 보리수나무와 연못을 이용 영국식으로, 아랫공원은 대분수(삼손분수), 장난분수, 요술분수 등 많은 분수와 바다까지의 작은 수로 등 불란서식으로 웅장하고 화려하게 꾸며져 있다. 이곳은 피터대제가 북방전쟁에서 스웨덴으로부터 승리하여 핀란드만을 통해 발틱해로 나갈 수 있는 대전과를 올린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그의 구도로 1714년 공사를 시작하여 1723년 8월15일 대궁전, 대폭포, 몬플레지르 궁전 등을 완성하고 이미 이때 윗정원과 아랫공원의 기초가 다 지어졌다. 각 분수들의 물 공급을 위하여 1720-1721년 러시아의 수리학 기술자 바실리 뚜볼코프가 네덜란드와 불란서로부터 배운 기술로 그의 지휘 아래 자연 저수지에서 윗 정원 수영장으로 물을 끌어들이고 이곳에서 16m 경사진 아랫공원을 파이프와 관을 통해 분수의 물을 공급하고, 1721년 여름 아랫공원의 작은 운하와 갑문을 건설한다. 가장 특이한점은 이곳에 물을 공급하고, 분수를 작동하기 위하여 수압에 의한 설비와 펌프를 사용했다는 것이다. 벌써 18세기 초에 발달된 러시아의 수리 기술을 이곳에서 볼 수 있다. 이 도시는 피터대제 사후에도 2세기 가까이 많은 건축가, 조각가, 화가, 도금공, 주물공, 농민, 농노, 군인, 기술자들이 참여하여 화려하고 장엄하게 확대 번성된다. 하지만 이곳은 2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의 점령으로 후퇴하는 소련군들이 문화재와 보물 등을 갖고 철수하자 이에 독일군들의 보복으로 대궁전등이 불타, 많은 피해를 입었다. 1944년 독일군으로부터 소련군이 도시를 수복하였을 때는 궁전과 공원의 각종 조각품, 예술품들은 이미 남아있지 않았다.이것들을 복구하기 전에 우선적으로 봉착한 문제가 러시아의 민족적 문화유품들을 과연 전과같이 부활시킬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것은 이곳을 방문하는 자국인과 하루 평균 1000명에 가까운 외국인 관광객들이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이상은 네이버에서 인용)
발틱해와 이어진 공원, 아래쪽 산책로를 따라 걷던 중 낯익은 인물이 눈에 띄었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쓴 책의 저자이자, 현 문화재청장인 유홍준씨가 아닌가! 내가 먼저 알아보고 어쩐 일로 이렇게 먼 곳까지 오셨냐고 했더니 휴가를 이용하여 동료들과 잠시 들렀다고 한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을 해서 배경 지식의 중요성을 널리 설파했던 유명인사 아니던가? 함께 기념 사진을 찍자고 했더니 흔쾌히 응한다. 그 사진은 두고두고 기념할 만한 사진이 되지 않을까 한다. 나같이 평범한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그는 미학적이든 철학적이든 전문적 안목을 가지고 특별하게 비교 고찰하는 능력이 뛰어날 테니 그분의 말을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더구나 이렇게 낯선 땅에서 만나 그런 기회를 가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헤어졌다.
피터 대제가 머물렀다는 바닷가의 작은 집에도 가 봤다. 예쁜 꽃으로 꾸며진 정원도 얼마나 화려한지 드넓은 궁전을 가득 채우고 있는 듯하다. 우리 일행은 다시 시내 관광을 위해 시내로 돌아와야 했다. 우선 점심을 해결해야 한다. 근데 교통이 매우 혼잡하여 예정시간보다 늦게 식당에 도착, 서둘러 식사를 해야 했다. 여름 궁전에서 식당까지 지루한 이동 시간일 수도 있었지만 가이드의 재미있는 이야기에 모두가 빠져들었기에 아무 불만이 없는 듯 했다. 특히 과거와 전통을 중시하는 러시아인들의 정신을 우리들이 배울 필요가 있고 가이드 자신도 그것을 실천하고 있다고 고백하는 부분에서는 일행 모두가 박수를 보내 주었다.
점심을 먹고 일행은 출중한 건축물인 이삭성당을 보기 위해 차를 탔다. 1818년부터 1858년까지 40년 동안 공사를 했는데 통대리석(1개가 114톤) 기둥들이 건물 바깥에 주욱 늘어선 외관이 인상적이었다. 공사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간 곳이며, 한 때 10,000명이 미사를 보았던 만큼 엄청난 규모의 성당이었는데 지금은 관광용으로만 사용된단다. 내부 곳곳에 높다란 돔이 몇 개나 있고 기둥과 벽에는 성서에 근거한 그림이 그려져 있고 그 중의 일부는 다시 세밀한 모자이크로 만들어 놓기도 했는데, 벽화의 원그림과 거의 흡사하다. 모자이크 기법의 우수성을 반증하는 것이리라. 성당 내부 촬영이 원칙적으로 금지되어 있는데 50루블을 지불하면 허용되기도 했다. 아는지 모르는지 많은 사람들이 거리낌없이 사진을 찍어댄다. 이삭 성당에서 나온 우리는 버스를 타고 다니면서 창밖으로 보이는 뻬쩨르의 명소를 훑어보기에 바빴다. 군 해군성 본부, 순양함 아브로라호(오로라호), 페트로 파블로프스크 요새, 세계 3대 박물관(대영, 루브르를 포함) 중의 하나인 에리미타쥐 박물관, 피터 대제가 초기에 살았던 오두막집, 에카테리나 2세 여왕 동상 등등, 왕조 시대 귀족들의 호사스런 건물들이 네바강 가로 군집을 이루며 산재해 있는데, 겉만 보고 지나가는 아쉬움을 달래기가 쉽지 않다. 사진 속에 그 모습을 담아두는 것으로 만족하기엔 우리가 찾아온 거리가 너무 멀다.
뻬쩨르 시의 외곽지가 아닌 중심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건물은 웬만한 것은 다 300년 또는 400년 된 오래된 건물이라고 보면 된다. 당연히 많이 낡았는데 그렇다고 함부로 보수 건축할 수는 없도록 법에 규정되어 있다. 시청에 보수 신청을 하면 시청에서 전적으로 예산을 들여서 하나씩하나씩 보수해 나가는데 겉모습은 절대로 바꾸지 않고, 내부만 손상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고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전통을 중시하는 당국의 의지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고 오래된 것은 무조건 새것으로 교체하고 바꾸기를 좋아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좋은 귀감이 되지 않을까? 건축물의 벽은 50센티 정도여서 겨울철에 매우 따뜻하나 층과 층 사이가 콘크리트가 아닌 나무로 되어 있어서 화재가 나면 건물 전체가 다 타버리고 마는 단점이 있다고 가이드는 설명한다. 1층은 대체로 상가이고 2층부터는 민가로 사용되고 있는데, 그 민가의 경우 방 2개 정도 사용하려면 50만원에서 60만원 정도의 월세를 내야 된다고 한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뻬쩨르 시 외곽에 있는 공항으로 급히 달려야 했다. 저녁 식사를 끝내고 비행기 출발시간을 맞추려니 좀 바빴던 거다. 모스크바까지는 600킬로미터, 비행기로 이동해야 하는 거리이다. 저녁 8시 30분에 이륙한 비행기는 10시 경에 모스크바에 닿았는데 현지 가이드 김영그리(‘김영글’이 아님을 강조했음)라는 친구가 마중을 나왔다. 영화 감독을 꿈꾸고 있는 30대 초반의 유학생이란다. 결혼해서 이곳 모스크바까지 유학을 왔는데, 자기 부인은 대학에서 연극을 전공했고 석사 과정을 모스크바 대학에서 밟고 있다고 한다. 모자란 학비를 보충하기 위해 부부 모두가 가이드를 하고 있는데 2년째 접어든단다. 나중에 유명한 영화감독이 되면 모스크바에서 만난 가이드로 기억해 달라며 넉살을 부린다. 시가지를 돌고 돌아 호텔에 도착하니 11시였다. 피곤에 지친 우리 일행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호텔방이 아니요 번잡한 로비였다. 예약이 잘못되었는지 현지 가이드와 프론트에 있는 담당자 사이엔 실랑이가 두 시간이나 이어졌고, 우리는 거의 파김치가 된 상태로 로비 한쪽 구석 의자에 쳐박혀 하염없이 체크인 허가를 기다리고 기다릴 따름이었다. 새벽 1시가 넘은 시각 드디어 방 배정을 받았다. 객실 엘리베이터 입구엔 건장하고 무시무시한 인상의 장정이 드나드는 사람을 일일이 점검하고 있어서, 아직 사회주의 잔재가 있다는 것이 실감났다.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에 즈음하여 외국 손님을 받기 위한 용도로 지었다는 호텔, 코스모스라는 이름에 걸맞은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설계는 프랑스인 건축가가 했다나?
10일째
이번 여행의 마지막 일정, 러시아의 수도 모스크바를 관광하는 날, 첫 코스는 크렘린 궁전이었다. 크렘린이라고 하면 과거 철의 장막을 연상시키는 무서운 곳으로 떠오르지만, 원래는 왕조시대의 궁전으로 쓰인 곳이라고 한다. 성모 수태 대성당, 성모승천 대성당, 천사 대성당, 12사도 사원 등이 또 그 안에 있다. 가이드는 성모승천 대성당 안으로 우릴 안내하여 러시아 정교의 분위기와 러시아인들의 종교적 신념 등에 대해 설명한다. 과연 성경과 관련되는 수많은 그림들이 그려져 있는데, 모든 기둥과 벽면에 가득하다. 그리스 정교, 아니 러시아 정교의 분위기가 그대로 드러난다. 설명이 아닌 그림으로써 신앙심을 고취시키고자 한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의 의지를 드러낸 것이 아닐까? 문맹자들이 많던 시대에 그림의 효과는 문자보다 월등했고, 적어도 그것이 러시아인들의 정서에 맞다고 본다면 성당 내부의 숱한 그림은 당연한 결과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상당수의 그림이 자작나무 껍질을 위에 그려져 있는 것이었다. 열에 강하고 습기에 강하여 내구성이 뛰어나다는 자작나무 껍질, 어느 새 저렇게 벽화의 바탕이 되어 온갖 색을 머금고 몇 백 년을 버티고 있어도 최근 그린 그림과 다를 바 없다. 다만 제작 과정에서 자작나무의 둥근 껍질을 평평하게 펼치다 보니 일정한 간격으로 틈이 나 있는 것이 흠이라면 흠이다. 그래도 고졸한 맛을 살리고 있고, 정교하게 그려진 그림들인 것이다. 경주 천마총의 천마도를 연상시켰다. 그 그림 또한 자작나무 껍질에 그려진 것 아니던가!
성모수태 대성당은 내부 장식이 화려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천사 대성당에도 들렀다. 이곳은 모스크바의 황제들과 대공들이 잠들어 있는 곳이다. 관광객들을 위해 무반주 합창인 아카펠라를 미사복 입은 5,6명의 신부들이 15분마다 한 곡씩 직접 들려주고 있다. 맑고 고운 목소리가 잔잔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숙연한 분위기에 맞는 아카펠라, 처음부터 끝까지 들어봤는데 좋다. 한 번만 듣고 말기에는 아쉬워 그 녹음 CD를 20유로를 주고 샀다. 방금 노래 부른 젊은 신부 한 분이 그 CD 표지에 자신의 싸인을 해 준다. 저들의 끊임없는 노래는 망자들을 위로하는 의식의 하나로 자리 잡은 것이 아닐까 한다. 가이드의 설명은 어디서고 끝이 없다. 일일이 기억할 수 없을 정도다.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수밖에 없다.
실전에서는 한 번도 사용되지 않고 만드느라 힘만 들었다는 ‘황제의 대포’(1586년)와 그 밑의 공룡 알 같은 대포알, 주조 과정에서 물이 들어가는 바람에 결국 종이 되지 못했다는 ‘황제의 종’, 현 러시아 대통령 푸틴의 집무실 건물, 넓으면서도 아늑한 정원 등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며 일정 지역을 자유롭게 돌아다녔다. 모처럼 4조의 구성원들이 다 모여서 꽃을 배경으로 단체 사진을 찍었다. 유선생은 가뜩이나 멋있는 외모에다가 썬그라스를 머리 위에 걸쳐 멋을 부렸고, 서울의 김보은 선생 또한 선글라스에, 브이자(V)를 만들며 모델 흉내를 낸다. 대체 의학을 강조하는 의사 선생님 부부는 사이좋게 웃음을 흘리고 난 모자의 창을 뒤로 돌리고 앉아 웃고 있는데 살진 얼굴이 아무래도 거슬린다.
고르바초프의 글라스노스트, 뻬레스트로이카로 대표되는 개혁 정책 이후 옐친, 푸틴으로 이어지면서 러시아는 닫힌 사회에서 열린 사회로 한창 변화 중이고 특히 현 대통령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가 대단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사회주의 몰락 이후 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요즘의 러시아는 복지가 잘 갖추어져서 교육, 의료 분야 등에서 무상 혜택을 볼 수 있고, 노인 연금도 나온다고 하니 부럽기조차 하다. 저축할 필요가 없을 만큼 사회보장이 잘 되어 있다면 언제나 든든한 마음으로 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삼위일체탑의 출입문을 다시 빠져 나와서 붉은 광장을 찾았다. 모스크바의 상징, 크렘린 외벽을 따라 조성된 길쭉하면서도 매우 넓은 광장, 사방으로 둘러싼 건축물이 하나같이 명물임을 과시하고 있는 듯 했다. 광장 입구의 성 바씰리 성당은 8개의 양파(큐폴라) 모양이어서 각도에 따라 각기 다른 그림으로 눈에 들어오는데, 지붕의 다색 처리, 밑 부분의 풀 모양 장식은 동화에 등장하는 요술나라의 성을 연상시키고 예쁜 색채와 형태가 사람들의 탄성을 자아낸다. 그 옆엔 국영 백화점인 굼 백화점이 오래된 성처럼 길게 늘어서 있는데 얼핏 보아도 우리나라 백화점의 대여섯 배는 될 만하다. 부산의 네 자매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그곳에 한 번 들어가 보니 우리나라 백화점 분위기와 너무 다르고 좋아서 나오기가 싫었단다. 백화점과 직각으로 놓인 붉은 건물은 역사박물관이고, 백화점 맞은편에 놓인 붉은 대리석의 나지막한 건축물은 레닌의 묘라고 한다. 사회주의 국가에서 정신적 지주로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추앙받던 레닌, 아직도 러시아인들의 가슴 속에는 크게 자리하고 있을 것만 같다. 무덤 안에서 살아있는 듯 잠들어 있을 레닌, 크렘린 궁 바로 앞, 그 붉은 광장의 가장 중심되는 곳을 응시하면서 양 옆의 계단식 사열대를 날개로 하여 많은 사람들을 품고 있는 듯 했다. 주변의 보이는 것 모두가 아름다운 것이어서 광장의 이름이 ‘붉은 광장’이라는데 러시아에서는 ‘붉다’는 말이 ‘아름답다’는 뜻으로 통용된단다.
광장 끝자락을 휘돌아 나간 곳에 알렉산드레이 공원이 있다. 그곳에 안치된 무명용사의 묘, 꺼지지 않는 불에는 참배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2차 대전 때 독일 치하에서 2,800만 명의 러시아인이 죽음을 맞았고, 그들의 희생을 기리는 후손들의 참배 행렬이 세대가 바뀌어도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신혼부부가 결혼식을 치르자마자 그곳을 먼저 찾아 영령들을 기린 후 혼인 신고를 하러 간다고 한다. 러시아의 힘이 바로 이런 데서 나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불행했던 과거를 결코 잊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 아닌가? 주욱 둘러보고 다시 만나기로 약속한 장소인 붉은 광장으로 다시 돌아오는 동안 과연 몇 쌍의 신혼부부가 하얀 웨딩드레스를 자랑하면서 행복에 겨운 표정으로 그곳을 향해 걸음을 옮기고 있다. 그들과 사진도 찍고, 축하주를 얻어 마신 일행도 있다. 드레스를 입은 신부가 얼마나 예쁘고 날씬한지 눈이 자꾸 갔다. 그런데, 저렇게 날씬한 신부가 결혼하여 아이를 몇 낳으면 대체로 몰라볼 정도로 뚱보가 된다고 하니 참 이상한 일이다. 우리나라의 어머니들은 나이가 들면서 처녀 때에 비해 몸매가 덜 예쁘긴 해도 그렇게 심한 정도는 아니지 않는가? 여행 중 지나치면서 본 러시아의 나이 든 여인들은 하나같이 뚱뚱하다. 그 형질 유전적인 요소가 계속 남아서 자손들에게 대물림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쓸데없는 생각도 해 본다.
붉은 광장에서 단체 사진을 찍고, 아르바트 거리로 향했다. 거기는 우리나라로 치면 서울 인사동 거리와 비교할 수 있는데, 러시아의 문화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라고 한다. 러시아의 시인 푸쉬킨이 결혼하여 한 때 신혼살림을 살았던 곳이 기념물로 고스란히 남아 있고, 그 바로 맞은편엔 부인과 함께 다정하게 서 있는 동상이 퍽 싱그럽다. 푸쉬킨은 정장을 하고 부인도 화사한 블라우스를 입고 어디론가 외출하고 있는 모습이다. 그것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느라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고 있다.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니 한때 러시아의 민중들 사이에 영웅시 되다가 불의의 교통사고로 비명횡사한 가수 ‘빅토르 최’를 기리는 공간이 있다. 벽돌에 온갖 글들이 낙서로 남아 있는데 붉은 얼굴에 검은 머리의 형상은 아직도 저승에서 제대로 눈을 감지 못하고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 같다. 소비에트 연방 당시 KGB의 요시찰 인물이었고, 그의 인기가 하늘을 찌르자 민중 가수의 등장을 용서할 수 없는 정권 당국에서는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이고 교통사고로 위장하지 않았을까 싶다. 우리 배달겨레의 피가 흘렀기 때문일까 왠지 모르게 가슴이 아려온다. 음유시인의 거리도 한쪽 골목에 형상화해 놓았다. 술 취한 한 시인이 비틀거리며 거리를 걸으며 온 세상 근심을 도맡아 방황하고 있는 것을 동상으로 세워 놓았다. 일행 중 일부는 모피 파는 가게에 들러 흥정을 하더니 기어코 몇 개 사 버린다. 국내보다 반이나 싸다면서 좋아한다.
삼성 애니콜 광고, LG전자 광고가 크렘린 궁을 둘러싸고 기세를 자랑하더니, 모스크바 시내 한복판에서는 롯데 백화점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인데, 완공이 되면 코리아의 위상이 한층 높아지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를 하게 된다. 가이드는 또 모스크바에서 지형적으로 제일 높은 곳에 있다는 곳으로 우릴 안내한다. 모스크바 시내를 아래로 굽어볼 수 있는 곳이라고는 하지만 상대적으로 높은 곳이지 낮은 언덕에 불과하여 실감나지는 않는다. 아래로는 올림픽이 개최되었던 경기장이 보이고 뒤로는 첨탑 위에 큰 별을 달고 있는 모스크바 국립대학교의 건물이 우뚝하다. 가이드는 또 마지막으로 보여줄 게 있다면서 한국대사관과 북한대사관이 있는 곳으로 안내한다. 한국 대사관은 모스크바 중심에 있으면서도 규모가 컸고 북한 대사관은 변두리에 위치해 있어서 초라하게 느껴지는 것이 차이라면 차이다. 요즘은 북한보다 한국이 러시아에게 더 비중이 있는 나라라는 것을 보여주려고 했는지 모르나 그렇게 판단하기는 아직 어렵다는 생각을 한다.
이럭저럭 10박 11일의 여행은 마무리해야 할 시점이다. 인천행 비행기는 갈 때와 같은 기종인 러시아 항공 SU-599편이었다. 시간이 좀 남아서 면세점을 기웃거리며 탑승 시간을 기다렸다. 면세점은 보드카, 담배, 화장품, 가방, 마터르시카 등 온갖 러시아 특산품들이 즐비하다. 열흘 전 덴마크로 가기 위해 잠시 경유했을 때의 생소함은 어느덧 사라지고 오히려 어제 본 듯 친숙하게 느껴지는 곳이다. 외국인들에 대한 거부감 내지 어색함은 사라지고 어떤 나라를 가더라도 이젠 어려움 없이 여행할 것 같은 자신감마저 생긴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격일까?
친구의 권유로 떠나게 된 북유럽 여행, 열흘 동안 내 나라 돈처럼 사용했던 EURO화, 어딜 가나 숲으로 무성했던 자작나무, 호수처럼 잔잔한 바다, 고요한 물가의 도시 오슬로, 생동감 넘치는 인상의 스웨덴 수도 스톡홀름, 그림 같은 집을 보여준 유서 깊은 도시 베르겐, 대자연과 우주의 신비를 한눈에 보여준 브릭스달 빙하와 피요르드, 안데르센과 인어 공주가 반기던 코펜하겐, 돌고래처럼 날렵하고 신속하게 우리를 태워 준 실자라인, 개인 소유의 요트가 빼곡히 정박해 있던 항구, 바위를 뚫어 만든 반석교회의 헬싱키, 역사의 소용돌이를 헤쳐 나와 이제 아름다운 비상을 꿈꾸는 뻬쩨르, 편안한 여유를 느끼게 했던 북유럽의 다른 도시와 달리 새로이 도약하면서 엄청난 규모로 사람들을 압도하던 모스크바, ......... 이 모든 곳이 신비롭고 멋진 모습으로 가슴에 남아 있다.
여행하는 10일 동안 한국에는 비도 많이 내렸고, 폭염이 엄청나게 기승을 부려 계속되는 열대야에 시달렸다고 하는데, 난 그것도 생각 못하고 마냥 자연을 즐기는 데만 빠져 있었으니 그 송구스러움과 미안함을 어떻게 표현할까? 기회가 된다면 한 잔 술로 위로하면서, 또 이렇게 긴 글을 써서 보고하는 것으로 대신하면 어떨까? 끝.^^
메모 : 2006.8.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