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 대니산(戴尼山) 아래에에는 도동서원이 있다.
최근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6권'에 자세히 소개된 도동서원을
무척 가 보고 싶다는 아내의 제안을 받아들여 장맛비를 헤치고 잠시 다녀왔다.
어젯밤 친구 모친의 급작스런 교통사고 사망 소식에 문상을 하고 이슥도록 술을 마셔서
몸은 지칠대로 지친 상태였으나 아내의 제안을 무시하거나 귀찮아할 내가 아니다.
요즘 자주 찾는 식당(북삼읍 소재, '행복이 머무는 집')에서 수제비로 점심 식사를 간단히 하고
중부내륙고속도로를 타고 창원 방면으로 내달리다가 현풍 IC에서 내려
구지 방면으로 조금 내려가다 보니 서원 가는 길을 찾을 수 있었다.
도동서원 입구에는 서원을 자세히 소개하는 글이 새겨져 있다.
한훤당(寒喧堂) 김굉필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고자 한강 정구 선생이 세웠다고 하고,
유홍준은 그의 <문화유산답사기 6 - 인생도처유상수>에서 이렇게 써 놓고 있다.
"선조는 이 서원에 '道東書院'이라는 사액을 내려 주었다. '도동'이란 그 뜻은
'도가 동쪽으로 왔다'는 의미로 도학이 한훤당으로부터 시작되었음을 기리는 이름이었다.
도동서원은 1865년 흥선 대원군이 전국 47개 서원 사당만 남기고
모두 철폐할 때도 훼철되지 않아 조선 5대 서원의 하나로 꼽힌다."
서원의 정문인 환주문, 갓을 쓰고 지나가다 보면 갓이 신경쓰일 정도로 좁고 낮다.
환주문(喚主門), '주인을 부르는 문'이라 했으니 문앞에서 서서 주인을 불러볼까?
'이리 오너라 하면 누가 나올까?' '서원이면 옛날의 학교인 셈이지?'
예나 지금이나 학교의 주인은 학생들이라 했으니 댕기머리 학생들이 나와서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어쩐 일이냐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할까?
비가 와서 그런지 서원은 아무도 찾지 않았고, 처마끝 낙숫물 떨어지는 소리
카메라의 셔터 소리만이 정적을 깨뜨리고 있을 뿐이었다.
특이하게 강당 기둥머리에 흰 한지를 두른 것은 이 사당에 모신 분이
문묘에 배향된 위대한 분이라는 것을 멀리서도 알아보게 한 것이라고 한다.
유홍준은 <나의 문화유산답사 6>에서 도동 서원의 자세한 부분까지 언급해 놓아서
현장에서 일일이 확인해 보는 것도 좋은 공부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답사기 1권(남도답사 일번지)이 처음 나왔을 때 그 책을 펴들고
전라도 강진 일대 이곳저곳을 찾아다녔던 기억이 새롭다.
강당인 중정당은 아름다운 석축으로 인해 그 문화적 가치가 한층 높아지지 않았을까?
강당의 서까래가 훤하게 보이고 약간은 비틀어져 있어 '균형속의 파격'이다.
강당의 바로 뒤, 사당으로 오르는 계단이 참으로 소박하다.
사당으로 오르는 계단, 삼문(三門) 중 가운데는 신문(神門)이므로 출입할 수 없고,
제일 오른쪽 문을 통해서 들어가야 하는데 출입 제한을 하려는지 잠겨있다.
끝지점 오른쪽에 또 다른 계단이 있어 그리로 올라가도록 되어 있다.
함부로 출입해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갖다놓은 돌조각일텐데 예사롭지 않다.
벌름거리는 콧구멍과 날카로운 이빨이 제법 위협적이지만 눈 한 번 찡긋 감으니 웃는 것 같다.
학생들이 머무는 공부방, 거의재(居義齎), 마당 맞은편엔 거인재(居仁齎)가 있어서
중정당 양 옆으로 안정감있게 자리를 잡았고, 낭랑하게 울려퍼진 선비들의 글읽는 소리가
문밖으로 간간히 들리는 듯하다. 학생 선비들은 글만 읽으면서 지냈을까?
동재 서재 사이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체력 단련도 필요했다면
안마당에서 체육 시간도 운영했을 법한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했을까?
중정당 바로 앞에 세워져 있는 정요대(庭燎臺)가 특이하다.
돌기둥 위에 판석을 얹었는데 일종의 조명시설인 것이다.
제사 때 이 판석 위에 관솔이나 기름통을 올려 놓고 불을 밝혔다고 한다.
도동서원은 사방이 이런 형태의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중정당이 보물 제350호로 지정될 때(1963년), 이 담장까지 포함해서 지정되었던 바,
이 담장이 얼마나 보존가치가 큰 것인가를 단적으로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자연석 석축으로 기초를 삼고 그 위에 황토 한 겹, 암키와 한 줄을 반복하며 5단 정도로 가지런히 쌓고
기와 지붕을 얹었다. 중간중간에 수막새를 끼워 넣어 변화를 주면서 그 멋을 한껏 살렸다.
다람쥐 모양의 조각을 석축의 맨 위쪽 양쪽에 배치했다. 한 마리는 올라가고 한 마리는 내려가는 형상이다.
제각기 다른 크기의 돌맞물림이 얼마나 정교한지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몬드리안의 추상화를 연상케 한다. 돌의 색깔도 제각각이어서 신비스럽기까지 하다.
석축 바로 밑에 낮게 단을 하나 쌓았는데, 안마당의 돌길과 단이 만나는 자리에는
이빨을 드러낸 돌거북 한 마리가 버티고 있다. 웃고 있는 것인지 화를 내고 있는 것인지....
서원을 찾은 유생들에게는 환영의 웃음? 때론 낙동강의 물귀신을 쫓아내려는 수호신의 모습?
석축이 머릿돌을 받치고 있는 자리에는 여의주를 문 용머리가 조각되어 있다. 모두 네 마리다.
근래 문화재 절도범이 뽑아간 것을 다행히 되찾아 세 마리는 복제품으로 대신 했고
오직 이것 한 마리만 원래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한다.
중정당 서쪽 마당에는 사각 돌기둥에 네모난 판석을 엊었는데, 이른바 '생단(牲壇)'이다.
제관들이 제사에 쓸 소, 양, 염소 등이 적합한지 아닌지를 검사하는 단이라고 한다.
영주의 소수서원 입구에 있는 흙으로 쌓은 생단과 비교되는 모습이다.
'후대(철종 6년 1855)에 증축한 수월루는 서원의 모습을 더욱 장엄하게 하기 위한 뜻이었지만
서원에서 낙동강을 내다보는 시야는 답답하게 막혀버리고 말았다'는 비판을 받을만 했다.
병산서원의 '만대루'와는 대조적으로 접근하기 어려운 공간 같아서 그 비판에 나도 동조한다.
이른 바 '김굉필나무'다.
한강(寒岡) 정구(鄭逑. 1543-1620) 선생이 서원을 세우면서 그 기념으로 심은 것이라는데
400년 서원의 역사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는 은행나무다. 옆으로 쳐진 나뭇가지들이
그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여 지지대의 도움을 받고 있고 수술 받은 흔적도 역력하다.
다행히 아직도 그 기력은 남아 있어서 짙은 초록의 잎을 매달고 있다.
가을엔 노랗게 물든 모습으로 찾는이의 마음을 숙연하게 할 것 같다.
그 때 다시 알현하리라. 건강 잘 챙기시오. '김굉필나무'!!!
대니산 다람재에 오르면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과 도동서원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장맛비로 수량이 많아진 낙동강은 세차게 흐르고 있었고, 왜관에서는
한국전쟁 발발 61주년이 되는 오늘, 철교인 '호국의 다리'가 붕괴되었다는 소식이 들린다.
4대강 공사의 무리한 준설로 인해 약해진 교각이 물살에 떠밀려 상판이 붕괴되었단다.
현정부에 의해 막무가내식으로 진행되고 있는 4대강 살리기 공사의
엄청난 재앙을 보는 것만 같아 갑자기 소름이 끼친다. 강물의 노여움을 사서는 안 되는데.....
강은 유유히 흘러야 되고 그 흐름을 막게 되면 그것은 재앙으로 돌아올 뿐!!!
도동서원에서 다람재를 넘어 강을 따라 계속 현풍쪽으로 무작정 가다보니
곳곳에 4대강 공사 구간 표시는 보이는데, 공사 현장은 불어난 강물에 묻혀 찾을 수 없었다.
거대한 기중기와 포크레인의 쇠뭉치가 흉물처럼 둑위에 올라앉아 있을 뿐.
강물이 줄어들면 언제든지 재투입할 준비를 하고 있는 듯했다.
현풍면 소재지에 들어와서 보물 673호인 '현풍석빙고'를 찾았다.
산쪽으로 출입구가 놓여있고, 내부는 무지개꼴의 홍예구조로 천정을 하여
요철(凹凸)을 이루면서 환풍구를 두 군데에 배치하였다. 1730년에 만들어졌다는 기록이 있다.
길이 9미터, 너비 5미터, 높이 6미터의 크기이고, 바닥에는 배수로를 설치하고 돌을 깔았다.
선조들의 온도와 습도 유지에 대한 과학적 사고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왼쪽 끝, 입구의 문은 매우 좁고 안은 어두워서 제대로 들여다 볼 수 없다.
카메라의 플래시를 터뜨려서야 겨우 포착할 수 있을 정도다.
시간이 더 확보된다면 망우당 곽재우의 묘소도 들르고 싶었는데.....
대학 시절의 야유회 장소였던 용연사도 들르고 싶었는데.....
석빙고를 보고 고속도로를 달려 구미로 돌아오는데,
비는 끊임없이 퍼부었다. 4대강의 한맺힌 눈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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