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9일, 고등학교 동기들 8명과 2명의 동기 부인이 인천국제공항 1터미널에서 만났다. 새벽 5시 경이었다. 아침 7시 45분 중국의 쿤밍으로 출발하는 중국 동방항공 MU2004를 타기 위해서다. 구미에서 2명(창열과 나), 대구에서 6명(순균, 일한, 상근, 정태, 태섭, 윤록)이 약속 시간에 맞춰서 출발했기에 모두들 제 시간에 도착했다. 고등학교 동기회장 순균의 제안과 여행 경험이 많은 창열의 가이드 역할 수락으로 추진된 윈난성(대한민국의 4배) 여행은 몇달 전부터 항공기 예약을 시작으로 착착 진행되었다. 지난 2월, 산동성 연태 지역의 풍경구를 돌아보는 여행에서 총무로서 수고를 아끼지 않던 상근이가 이번에도 총무를 맡아 주기로 했다. 사실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없으면 선뜻 나서기 어려운 게 총무의 역할이라 여간 고마운 게 아니다. 평소에도 남을 위한 봉사를 아끼지 않는 상근에게 늘 배울 점이 많다는 생각을 했다. '상근아, 고마워. 여행 끝나는 날까지 우리 마음 모아 멋진 여행 만들어 보자우.'^^

정태와 상근이는 특별히 부부와 함께하는 여행을 시도한 점에서 박수를 보낸다. 이번 여행을 통해서 부부간의 정을 듬뿍 쌓는 계기가 될 것이라 믿는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부부가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야 하는데, 나의 경우는 일상생활 따로, 함께해야 좋을 해외여행도 따로이니 두 친구들이 은근히 부러운 것도 사실이다.

우리가 타고 가야 할 중국의 동방항공 비행기가 공항 대합실 밖으로 보인다. 날개에 달린 엔진이 지면에 거의 닿아있는 것 같아 불안해 보인다. 착륙할 때 비행기의 균형이 조금이라도 어그러지면 엔진이 지면에 큰 마찰을 일으키면서 화재라도 난다면 어쩌려고? 기우임을 알지만 그런 생각을 잠시 해 봤다.

4시간 30분의 비행끝에 쿤밍 창수이 공항에 도착했다. 윈난성의 주도인 쿤밍은 리장으로 가기 위한 경유지인데, 여기서 19시간을 기댜렸다가 목적지인 리장의 싼이 공항에 도착하기로 되어 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마냥 기다리기만 한다? 작년 알프스 샤모니 여행에서 돌아올 때, 환승 시간까지 10시간 정도의 여유가 있어서 버스를 타고 가까이 있는 두바이를 찾아가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놀다가 여유있게 돌아온 적이 있는데, 이번에도 쿤밍의 관광 명소를 둘러보는 것으로 하고 우리는 공항을 빠져나왔다.



어디로 갈 것인가? 우리의 가이드(앞으로 '단장'이라 칭할 것임) 창열은 이미 계획이 다 되어 있었는지 쿤밍 시내가 훤하게 내려다 보이는 서산공원으로 우리를 안내하겠다고 한다.

공항에서 6호선을 타고 세 번째 전철역에서 내린 다음 3호선으로 환승, 그 종점에서 내리면 되었다. 65세 이상은 지하철이 공짜라서 부담이 없다. 중국에서도 우리는 이른바 '지공거사'가 될 수 있으니 좋다. 오가는 승객들도 별로 없었다.



윤록이는 현지인과 문자메시지를 자연스레 주고받으면서 의사소통을 시도하고 있다. 친구의 적극적인 태도가 보기에 좋다.

'금강산도 식후경', 우리는 늦은 점심이라도 먹어야 했다. 서산공원 전철역 바로 옆, 묻고 물어 찾아낸 음식점에 들러 우육면을 주문했다. 이번 중국 현지에서 처음 맛보는 음식치고는 소박하다.


'시장이 반찬' 아닌가! 맛있게 점심을 먹은 뒤, 무겁게 가져온 캐리어를 돌아올 때까지 맡아 달라고 식당 주인께 부탁을 하니 흔쾌히 그러겠다고 한다. 음식을 팔아준 손님에 대한 서비스이기도 했지만 수줍은 미소로 받아주는 식당 아지메의 넉넉한 마음에 고마움을 느끼면서 행장을 꾸려 가볍게 식당을 나왔다.

풍경구 입구까지 가려면 소정의 요금을 지불하고 공원 입구까지 셔틀버스를 타야 했다.

전철 3호선 종점인 서산공원 전철역 가까운 셔틀버스 정류장에서 공원 입구까지는 구불구불한 길을 한참 타고 올라갔는데 위의 사진에서 파란색으로 표시된 구간이 그것이다.

풍경구 입구에 도착,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어서 다들 우산을 쓰고 다녀야 했다. 여행 기간에 이런 날씨가 계속되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이 생긴다. 단장과 총무는 조물주한테 열심히 기도해야 한다면서 농담을 건넸다. 날씨가 관광의 전부라고 할 정도로 중요한데 다들 걱정이 아닐 수 없다. 유단장은 자신이 가는 곳은 언제나 날씨가 좋았기 때문에 곧 괜찮아 질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며 허허 웃는다. 그래? 좋아. 믿음직스런 유단장의 어깨를 툭툭 치면서 같이 웃었다.^^

공원 입구에서 입장료와 전기차 승차비를 지불하고 잠시 언덕길을 올라 공원의 볼거리 지점에 도착했다.

검은 현판에 노란 글씨, '창애만장', 푸른 벼랑이 만 길이나 되는 곳이란 뜻이니, 벼랑을 따라 펼쳐지는 멋진 경치가 예상된다.


어깨를 나란히 한 두 부부의 모습을 사진에 담아주는 기쁨을 느끼면서 본격적인 서산공원 여행을 시작해 보기로 한다.

윤록이가 목에 두른 오렌지빛 수건(스카프)이 강렬하다. 그는 패션 모델급이다. 모자, 썬글라스, 스카프를 수시로 바꿔 사용하는 센스 만점의 사나이다.^^

서산공원에서 내려다보는 쿤밍 시내의 모습, 거대한 호수가 눈에 확 들어온다. 바다처럼 느껴질 정도로 거대한 호수 디엔츠(전지), 전체 둘레가 150킬로미터 정도 된다고 하니 그 규모를 가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이곳 '용문'이란 곳이 서산공원 볼거리의 최고봉인 것 같다. 만길 낭떠러지 한 지점에 위치하여 쿤밍시내를 한아름으로 품고 있었다. 이곳에 다다르기까지 가파른 계단을 헐떡이며 올라야 했고, 석굴 아래로 난 계단을 조심스레 내려와야 했다. 지금까지 걸어온 공간들이 승천하는 용이 꿈틀거리며 지나온 자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용이 절벽을 뚫고 지나간 아찔한 모양이기도 한 저 용문, 그 글씨를 만지면 복이 온다고 믿는지 많은 사람들의 손자국이 주변에 요란했다.

맡겨두었던 짐을 찾아 지하철을 타고 쿤밍 시내 한복판으로 돌아왔다. 곧 저녁 식사를 하고 공항으로 되돌아가 내일 아침 일찍 떠나는 비행기 출발시간을 감안, 잠자는 시간을 확보해야 했다. 빡세게 진행되는 여행 일정을 소화하기 위한 최소한인 거다.


쿤밍은 중국 윈난성의 성도로 위치상 성 중부에 있다. 인구는 640만 명 이상으로 뉴욕보다 약간 적다. 4계절 내내 봄 날씨가 유지되어 '춘성(春城)'이라는 별명이 있고 여기에 중세 유적이 잘 남아 있어 다리시 및 리장시와 함께 운남의 주요 여행지 중 하나로 인기가 많다. 역사적으로 20세기 중일전쟁기에 연합군 기지가 있었고, 한국광복군이 훈련한 곳이기도 했다. 현대에는 베트남, 미얀마, 태국 등 동남아와의 교역 창구로 중시되고 있다.(나무위키 인터넷 자료 인용)


분위기 좋은 식당을 찾아 저녁을 해결하고 어두워가는 쿤밍의 야경을 잠시 즐기다가 다시 공항행 지하철을 타고 우리 일행들은 공항 내부로 조용히 스며들었다.

공항 당국에서는 밤이 깊어지자 널찍한 지하 공간 일부를 활용해서 승객들이 잠을 자거나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관리인을 배치해서 약간의 돈을 받고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는 것 같았다. 우리 나라 공항에 없는 특별한 관리 체계인 것 같아서 관심이 갔다. 덕분에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깊은 잠에 빠질 수 있었다. 잠이 깬 뒤에는 깊이 잠든 내가 부러웠고 얘기하는 친구의 말에 미안함을 느껴야 했다. 코고는 소리에 자신은 잠을 이루기 어려웠다는 말로도 들렸기 때문이다. ‘친구야, 미안해.’

현재 시간 4시 30분, 아침 7시에 출발하는 리장행 MU5921 비행기를 타기 위해 다시 입국 수속을 밟았다. 무거운 캐리어까지 탁송하고 난 뒤에는 비교적 여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다.

아침 식사를 위해 공항 안의 구내식당을 찾아 음식을 주문하고 기다리면서 동기 8명 모두는 모처럼 기념사진 한 장을 남겼다.

리장의 싼이 공항까지 날아가는 비행기는 불과 1시간 10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는다. 이 비행기를 타기 위해 19시간을 기다려야만 했다는 것이 다소 의아하긴 했으나 다른 방법이 없었다. 쿤밍에서 내려 리장행 고속열차나 버스를 타는 것을 알아보았으나 항공사의 허락이 떨어지지 않았다. 직항이 아닌, 경유 비행기를 타면서 얻게 되는 저비용의 댓가이니만큼 그 정도의 불편함은 감수해야 하지 않겠냐는 항공사측의 입장이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 불편함을 쿤밍 서산공원 여행으로 잘 승화시켰고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았으니 불만이 없다.

비행기에서 제공하는 환구시보 첫면의 기사, 미국과 이란 두 나라 간에 회담은 진척되지 않고 있으며 호루무즈 해협에서 교전이 있었다는 소식이 대문짝만 하다. 전 세계의 정치 경제를 교란시키며 진행되고 있는 이놈의 전쟁, 언제까지 계속되어야 하는지 참으로 답답하다. 휴전 협상은 늘 결렬되고 내세우는 명분 또한 충돌의 빌미만 되고 있을 뿐, 좀처럼 실마리를 찾기 어려운 상황인 것 같다.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스스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트럼프와 네타냐후의 미련스런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더 이상 미치광이라는 조롱을 받지 않기 위해서라도 적극적인 태도 변화를 필요하지 않을까? 세계의 보통 사람들은 전쟁 아닌 평화를 원하고 있을진대, 하루빨리 그 게걸스런 아욕을 버리고 세계인들 앞에 석고대죄 해야 한다. 그대들은 이미 용서받지 못할 전범이 되고 말았음을 알아야 한다. 당신들의 오판으로 숱한 젊은이들의 목숨을 잃게 되는 이 처절함을 어떻게 보상하려 하는가?

쿤밍 창수이 국제공항에서 이제 막 이륙하고 있는 비행기에서 찍은 사진이다. 이런 국제공항이 전국적으로 중국에는 몇 개나 있을지 궁금해진다.



우리가 타고 온 비행기를 사진에 담았다. 1시간 10분만에 데려다 준 MU5921 비행기다. 싼이 공항은 1995년 7월에 개항한 리장시의 대표적인 국제공항으로 도심부 남쪽에 있는데 중국의 주요 도시를 잇는 여러 국내 항공사들이 수시로 취항하므로 교통이 편리하나 우리나라에서 올 경우 직항편이 없으므로 국내선으로 환승해서 와야 한다.

싼이 공항에서 버스를 타고 리장 고성까지 약 30킬로미터 이동하기로 했다. 우리 팀 10명 이외는 승객들이 아무도 없어서 우리 일행이 전세버스처럼 이용할 수 있었다.

단장과 총무는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리장 고성 가까이 있는 숙소를 알아보기 위해 서둘렀고, 나는 기다리면서 리장 시내의 주변 분위기를 파악하기 위해 한참동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오가는 차량과 사람들, 가옥의 구조, 가로등, 상점의 간판 등이 눈에 들어와 리장의 독특함을 조금씩 알게되는 시간이었다.




30분쯤 기다리니 숙소를 구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캐리어를 끌고 잠시 그곳으로 이동, 드디어 여장을 풀었다. 호텔 이름은 하이요우 호텔, 이곳에서 약 5일간 묵는 것으로 계획을 세웠다. 일단 이틀을 여기서 보내고 더친이란 먼곳까지 이동해서(8시간 정도 소요) 매리설산 일출 장면을 보는 것을 기점으로 아래쪽으로 내려오면서 샹그릴라 주변의 관광을 이틀 정도 하고 호도협의 차마고도 트레킹을 끝낸 뒤에 리장 고성으로 돌아와 귀국 전까지 3일을 여기에서 느긋하게 더 묵는 것으로 했다. 호텔 주인은 리장 주변의 관광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는 15인승 승합차를 이용하면 좋을 것 같다는 팁을 제공했는데, 유단장은 곰곰히 생각해 보더니 그게 여러 모로 괜찮을 것 같다는 판단을 한 것 같고 우리 일행의 동의를 얻어 승합차 운전자와 다음날 아침부터 우리 일행이 함께하는 것으로 결정을 했다. 이런 협상이 가능했던 것은 유단장의 능수능란한 중국어 회화 능력과 흥정의 솜씨에 말미암은 것임은 당연하다. 대중교통을 이용해도 되지만 무거운 트렁크를 들고 움직여야 하는 불편함을 생각하면 약간의 돈을 더 주더라도 승합차 이용이 훨씬 효율적이라는 결론이다. 여하튼 여행 첫날부터 일이 순조롭게 풀려간다는 느낌이라서 참 좋다.


투숙한 방 침대에 누워서 잠시 피로를 풀다가 숙소 앞에 있는 식당에 들러 점심 식사를 할 때의 시간이 12시 남짓이었고, 식사 후에는 숙소 가까운 곳에 위치한 흑룡담을 찾아가 보기로 했다. 숙소에서 흑룡담까지는 약 300미터 정도나 될란가?

흑룡담의 출입은 무료라서 언제든지 필요할 때마다 쉽게 드나들 수 있는 것 같다. 여러 날을 묵게 될 호텔 숙소에서 가까우니 새벽이든 저녁이든 산책 코스로 아주 적당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변화무쌍한 뭉게구름 뒤로 숨어있다는 옥룡설산의 모습이 몹시 궁금해진다. 오늘은 못 보지만 다음에 이곳을 찾아왔을 때는 잘 보여줄 것이라 믿는다.



이곳의 전통 누각과 다리는 청나라 건륭제 시대인 1737년에 세워진 득월루(得月樓)를 비롯해 오봉루(五鳳樓) 등 고풍스러운 중국 및 나시족 전통 건축물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또 흑룡담에서 시작된 물줄기는 수천 갈래로 나뉘어 리장 고성(丽江古城) 곳곳으로 흘러들어 가며 마을의 아름다운 수로망을 형성한다. 오죽하면 리장을 '물의 도시'라고 불렀을까?

가이드 유단장이 흑룡담에 얽힌 전설 이야기를 들려주는 장면이다. 흔히 전설은 현실적으로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내용이 많지만 그 전설과 관련된 증거물이 남아 있는 게 특징이다. 우리가 현재 발딛고 있는 흑룡담이 바로 증거물! 의미를 부여하는 장소와 인물에 대한 선인들의 멋진 스토리텔링이 그럴 듯하게 문학적 서사로 남아서 즐길 수 있는 것이어서 그저 황당무계한 것으로 받아들여서는 곤란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 내 생각이다.
아주 오랜 옛날, 세상에 가뭄이 들었을 때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검은 용이 하늘로 승천했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흑룡이 떠난 자리에 맑고 깊은 물이 고여 호수가 만들어졌고, 이것이 흑룡담의 기원이 되었다는 전설인 거다. 나시족 신화에서 흑룡은 물을 다스리는 수호신이자 평화를 상징하는 영물인데 흑룡이 사람들을 보호하고 풍요를 가져다준다고 믿어 마을 사람들은 이곳을 신성하게 여겼다는 것이다.

흑룡담의 또다른 출입구로 빠져나와 리장 고성 쪽으로 걸어가기로 했다. 오후의 햇살은 따가왔으나 그렇게 더운 날씨는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리장고성 방향으로 길을 가다가 만난 소광장, 모택동의 동상이 보였다. 그 앞에서 상근이가 동상과 비슷한 동작을 보이길래 셔터를 눌렀다. 모택동(마오쩌뚱)에 관한 기록의 일부를 인용해 본다.
마오쩌둥은 후난성 샤오산의 부유한 농부의 아들이었다. 그는 일찍이 반제국주의를 견지했으며, 특히 1911년 신해혁명과 1919년 5.4운동 사건의 영향을 받았다. 베이징대학에서 사서로 일하면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받아들였고 1927년 추수 봉기를 이끄는 중국공산당의 창립 멤버가 되었다. 국민당과 국공내전이 있던 중 마오쩌둥은 홍군을 지도하였고 장시 소비에트의 급차진적인 토지 정책을 이끌었으며, 궁극적으로 중국공산당의 지도자가 되었다. 대장정, 중일전쟁 당시 국민당과 일시적으로 제2차 국공합작을 하였으나 일본의 항복 이후 중국의 내전이 재개되었고 마오쩌둥의 군대는 국민당 정부를 패배시켰다.
1949년 10월 1일, 마오쩌둥은 중국 공산당이 통제하는 마르크스-레닌주의 일당 국가인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을 선언했다. 이듬해에는 중국의 토지 개혁, 반혁명진압운동, 삼반 오반 운동, 6.25 전쟁을 통해 그의 지배를 공고히 하였다. 1953년부터 1958년까지 마오는 중국에서 계획 경제를 시행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의 첫 헌법을 만들고 산업화 프로그램을 시작했으며 "양탄일성" 프로젝트를 시작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57년에는 반우파 운동을 시작했는데, 대부분이 지식인과 반체제 인사를 박해했다. 1958년에 그는 중국 경제를 농업 사회에서 산업 사회로 빠르게 변화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는 대약진 운동을 시작했다. 그 결과 1958년에서 1962년 사이에 역사상 가장 치명적인 기근으로 1,500만~5,500만 명이 사망했다. 1963년 마오쩌둥은 사회주의 교육 운동을, 그리고 1966년에 문화대혁명을 시작하였다. 혁명 기간 동안 수천만 명의 사람들이 박해를 받았고 추정되는 사망자 수는 수십만에서 수백만에 이른다. 1976년에 일련의 심장 마비를 겪었고 8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마오쩌둥 시대에 중국의 인구는 약 5억 5천만 명에서 9억 명 이상으로 증가했다.
논쟁의 여지가 있는 인물인 마오쩌둥은 20세기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한 명으로 간주된다. 그는 정치가, 이론가, 군사 전략가, 시인으로도 알려져 있다. 마오쩌둥 시대에 중국은 한국 전쟁, 중소 분쟁, 베트남 전쟁, 크메르 루즈의 부상에 휘말렸다. 그는 독재적이고 전체주의적인 정권을 통해 중국을 통치했으며 종교 및 문화 유물과 유적지의 파괴는 물론 대량 탄압에 책임이 있다. 기아, 박해, 감옥 노동 및 대량 처형을 통해 4천만에서 8천만 명에 이르는 희생자로 추정되는 방대한 수의 사망에 책임이 있다. 마오쩌둥은 중국을 반식민지에서 강국으로 탈바꿈시켰으며, 마오쩌둥의 통치 시기 문맹 퇴치, 여성 권리, 기본 의료, 초등 교육 분야의 개선 및 기대 수명의 큰 향상이 있었다. (인터넷 나무위키백과 자료 인용)

리장 고성(丽江古城)은 중국 윈난성 리장 시의 구시가지로, 1997년 12월 3일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었다고 한다. 또한 리장 고성은 나시족에 의해서 건설되었다고 나시족은 8세기, 현재의 칭하이성 부근에서 남하해 왔다고 전해진다. 남하 당시 마사조로 불리는 작은 나라를 건국했지만, 당나라에 의해 몽사조에 편입되었다. 그 후 인근의 티베트, 윈난의 소수민족의 영향을 받아 리장에 독자적인 경관을 만들어 냈다. 이것이 현재의 구시가이다. 리장 구시가의 건축물은 대부분이 목조이다. 불교나 도교의 불상도 있고, 소수 민족에 의해서 만들어진 리장 벽화가 남아있다. 남송 시대의 토사(토착관리), ‘목씨’에 의한 성벽도 남아 있었지만 1996년에 일어난 지진으로 붕괴되었다.
중국 운남성(윈난성) 북서부에 위치한 리장은 해발 2400미터 고원지대에 자리잡은 매력적인 도시다. 나시족의 독특한 문화와 웅장한 자연경관이 어우러져 전 세계 여행자들의 사랑을 받는 곳이다. (인터넷 자료 인용)




우리 일행은 리장고성의 심장부라고 할 수 있는 사방가에 먼저 들르기로 하고 그쪽을 향해서 천천히 발을 옮겼다. 사방가는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는 리장 여행의 필수 코스인 셈이다. 과거 차마고도의 핵심 거점이었던 만큼 주변 지역에서 모여든 상인과 물자가 교류하던 상업과 무역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직사각형 모양의 이 광장은 고성 전체를 연결하는 허브 역할을 하는 곳인만큼 우리 일행은 여기에서 잠시 머물면서 사방가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감상해야 하리라.

주변의 상점과 레스토랑, 카페가 밀집해 있어서 취향대로 잠시 들러서 물건을 구입하거나 쉬어가기에 좋을 것 같았다. 나는 보이차를 파는 가게에 잠시 들러 이것저것 둘러보다가 원하는 것이 보이지 않아 그냥 나왔다. 귀국하기 전까지는 원하는 보이차를 구입해야 하리라.



고성에서 가장 높은 곳인 사자산에 올라보기로 했다. 사자산 정상의 만고루에 올라 리장 고성의 전체적인 모습을 조망해 보는 것이 가능할 것 같아서이다.


중국의 어디를 가든 곳곳에서 볼 수 있는 사회주의 핵심 가치관! 국가, 사회, 공민적 차원에서 꼭 지켜져야 할 항목임을 강조하기 위한 것 같은데, 중국 공산당의 지배이데올로기로 작용하고 있음이 분명한 것 같다.

건물 자체가 매우 우아하고 웅장한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다. 저 만고루의 꼭대기에 올라 조망해 보는 리장 고성의 동서남북의 전경은?





만고루는 리장고성의 상징적인 건축물이다. 단순한 전망대를 넘어 역사적, 문화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름 그대로 만고의 세월을 견디는 누각이라서 이 건축물에는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리장고성을 수호하고 영원히 번영하기를 바라는 염원이 틀림없이 담겨있을 것 같았다. 5층 규모의 목조건물로 나시족의 전통 건축 양식으로 지어졌다고 하며 못을 사용하지 않고 나무를 끼워맞추는 정교한 기술이 적용된 점이 특징이라고 한다. 5층 전망대에서 사방을 둘러보는 장쾌함은 뭐라 설명할 수 없는 희열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왜 리장고성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이 되었는지 그 진가를 온전히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내부와 외부에 새겨진 정교한 목조 조각들은 나시족의 뛰어난 예술감각을 보여주고 있었다.

만고루에 올라 고성을 조망하다가 내려오는 길에 들렀던 찻집, 눈 아래 보이는 고가들을 편하게 앉아서 감상해 보고 싶은 마음에 잠시 들른 곳인데 차보다는 맥주를 마시고 싶어 주문했는데 곧바로 갖다줘서 갈증을 시원하게 풀 수 있었다.


패션 모델을 방불케 하는 윤록의 멋진 모습을 포착했다.


옥룡설산의 빙하물이 흘러내려 리장 고성 골목까지 흐르고 있다. 물이 풍부한 리장 고성임이 실감나는 순간이다. 리장이 '동양의 베네치아' 혹은 '물의 도시'라고 불리는 이유는 도시 전체를 관통하는 정교하고 유기적인 수로시스템 때문일 것이다. 단순히 물이 많은 것을 넘어 나시족의 지혜가 담긴 수로 구조가 도시의 생명줄 역할을 해왔기 때문일 것이다. 흑룡담에서 솟아나는 맑은 샘물을 도시 안으로 끌어들인 저 많은 물과 수로, 크고 작은 다리는 그 고풍스러움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리장 특유의 낭만적이고 수려한 경관을 완성하는 요소라고 봐야 할 것이다.


한낮의 고성 안 골목 분위기는 고즈넉한 편이다. 사람들의 통행이 비교적 적어서 한가롭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리장 고성 안에서 펼쳐지는 일상을 오후 내내 살피면서 다니다 보니 어느 덧 시장기도 느껴졌고 날도 어두워지기 시작한다. 맛집 검색을 통해 비교적 손님들의 평가가 괜찮은 식당을 찾아 들어가 10명의 일행이 자리를 잡았다. 식당 주인의 익살스런 말과 표정을 재미있게 읽으면서 우리 앞에 차려진 저녁 식사는 부족함이 없었다. 약간의 술울 마시면서 또 하루의 피로를 푸는 귀중한 시간이기도 했다.



리장고성의 밤은 낮의 고즈넉한 풍경과는 달리 매우 활기차고 낭만적인 분위기로 변해 있었다. 현지인들과 여행자들이 한데 어우러지는 장소로. 음악가들이 즉흥적으로 연주를 하거나 노래를 부르며 고성 전체에 낭만적인 분위기를 더하고 수로를 따라 늘어선 전통 가옥들이 화려한 홍등으로 장식되면서 환상적인 야경을 선사하고 있었다.


저물어가는 하루를 아쉬워하면서 숙소 바로 앞에서 찍은 사진이다. 굿나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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