룩소르를 향해서 크루즈는 계속 항해를 했던가 보다. 하룻밤을 자고 일어나니 에드푸에 이미 정박해 있었다. 에드푸는 나일강 서안에 위치한 이집트의 도시로 룩소르와 아스완의 중간 지대에 위치해 있다.


아침 식사를 끝내고 현지가이드와 유진씨는 일행을 에드푸 신전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에드푸 신전은 기원전 237년부터 기원전 57년까지 건설되었으며 현재 이집트에 남아있는 신전 가운데 보존 상태가 가장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가운데 탑문을 중심으로 좌우의 벽화 부조는 완전한 대칭구조로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에드푸 신전은 호루스 신전(Horus Temple)이라고 한다. 호루스는 부활의 신 오시리스(Osiris)와 최고의 여성신 이시스(Isis)의 아들이며 사랑과 미의 여신인 하토르(Hathor)의 남편이기도 하다. 오시리스는 동생 세트(Seth)에게 죽임을 당하고 14토막으로 나누어져 이집트 전역에 버려졌다. 이시스는 이집트 전역에 흩어졌던 남편 오시리스의 시체를 찾아 소생시켜 호루스를 잉태하였고 지혜의 신 토트(Thoth)와 태양의 신 라(Ra)의 힘을 빌려 호루스를 키웠고 파라오로 만들었다.




파라오가 호루스에게 봉헌하는 장면의 부조가 비교적 정교하다. 그러나 부분적으로 곳곳에 훼손된 것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은 로마제국이 점령했을 때 기독교 이외 다른 종교를 탄압할 때 행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곳곳에 방화의 그을림 흔적을 보이는 것도 그 때문이다.

호루스 벽화 부조가 많은 벽면을 가득 메우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정으로 마구 쪼아서 얼굴이나 몸을 없애려 한 흔적들이 안타까웠다. 종교간의 갈등이 노골적으로 드러난 것이라고는 하지만 그 해악과 후유증이 너무 크다. 어떤 종교든 태생적으로 타종교와는 다름을 인정하면 될 것을 왜 제것과 다르다 하여 왜곡하거나 배격의 대상으로만 바라보는지 참 모를 일이다. 예나 지금이나 골 깊은 그 종교적 갈등을 해소하는 방법은 정작 없을까?


벽화에 색채가 그나마 남아있는 것은 신전을 세울 당시의 원형이라고 보면 된다는 유진씨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였다.




에드푸 신전을 둘러보고 잠시 빠져나오다 보게된 어느 상점에는 자주 찾는 관광객들의 환심을 사려는 듯 태극기를 비롯한 여러 나라 국기를 손에 잡힐 정도의 낮은 공간에 달아놓았는데 어지러울 뿐 격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이다.

자, 관광버스를 이용한 이동이 또 시작된다. 룩소르까지 크루즈 배가 천천히 이동하는 동안, 우리는 배가 아닌 버스를 타고 룩소르까지 가는 것인데, 그 가는 동안에 봐야 할 유적들이 참 많다. 룩소르 서안의 멥논의 거상과 하트셉수트이 장제전, 왕가의 계곡 등이 그것이다. 둘러보는 데만도 많은 시간이 소요될 것 같다. 그리고 작은 배를 타고 나일강을 건너 룩소르 동안으로 가서 카르낙 신전과 룩소르 신전까지 섭렵해야 하는 코스다. 모든 일정을 끝내고 다시 크루즈 배의 숙소로 귀환하면서 오늘의 일정은 끝난다.

카이로에서 아스완까지 밤새도록 그 위를 달렸던 것으로 보이는 기찻길을 만났다. 룩소르를 향해 역방향으로 달려가고 있는 것 같았다.



룩소르로 가는 도중에 들렀던 휴게소다. 옷감을 걸어놓고 팔고 있지만 사려는 사람들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옷의 질이 어떨지는 잘 몰라도 이래저래 가격을 놓고 흥정해 보는 경험을 해 봤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관광버스는 나일강의 지류 옆으로 난 길을 따라 한참을 또 달린다. 물이 가까운지라 풀과 나무들이 서슴없이 자란다.


룩소르 서안에 위치한 멥논의 거상은 고대 이집트의 파라오 아멘호테프 3세가 건설한 장제전 유적에 유일하게 남은 두 개의 거대한 석상으로 아멘호테프를 묘사하였다고 한다. 과거 나일강의 범람이 잦은 평지에 신전이 지어졌는데 대부분 소실되었으며 현재는 두 개의 거상만이 남아 있다. 너무 많이 파괴된 것이 흠이긴 하나 완전체로서의 거상을 상상할 수 있을 정도의 위엄이 살아 있는지라 여전히 파라오들의 무덤을 지키는 파수꾼 역할은 가능할 것 같다. 3400년 전에 만들어진 거대한 석상이 주는 강렬함은 우리를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다.

이집트의 문명과 함께 오랜 세월 자리를 지켜온 저 거대한 석상에 비하면 잘해야 백년도 못 살고 금방 사라져야 하는 우리 인간들인지라 제 아무리 똑똑하거나 가진 게 많아도 겸손해지지 않을 수 없다. 기념 사진 한 장 남긴다.


저 멀리 보이는 건물이 하트셉수트 장제전이다. 천연 배경이 된 바위산이 있어서 그런지 더욱 돋보인다. 다가가기에 앞서 유진씨가 찍어주는 카메라 앞에 앉았다. 장제전? 장례와 제례를 주관하는 건물, 다시 말해 파라오의 장례식과 사후 의식을 올리는 곳이다.

하트셉수트 장제전( (Mortuary temple of Hatshepsut), 이집트 제18왕조 제5대 여왕 하트셉수트가 세운 신전이다. 파라오 시대를 통틀어 이집트를 지배한 유일한 여왕 하트셉수트, 수염을 달고까지 자신의 권위를 세우고 파라오로 인정받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바, 그 일환의 하나가 이곳에 세운 장제전이라는 것이다.
계단식 사원의 건설은 하트셉수트 재위 7년과 20년 사이에 이루어졌으며, 이 기간 동안 건축 계획은 반복적으로 수정되었고 그 디자인은 6세기 전에 건설된 인접한 이집트 제11왕조의 멘투호테프 2세 사원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러나 방과 성소의 배열은 완전히 독특하다. 일반적으로 영안실 단지를 위해 예약된 주축은 대신 아문 바크의 성소로 채워지며, 영안실 숭배는 남쪽으로 옮겨져 북쪽의 태양 숭배 단지와 함께 보조 축을 형성한다. 중앙 테라스에는 하토르와 아누비스(Anubis)의 성지가 중앙 성소와 분리되어 있다. 여기 테라스 앞에 있는 현관에는 사원의 가장 눈에 띄는 부조가 있다. 아래의 가장 낮은 테라스는 둑길과 계곡 사원으로 연결된다.
장제전이 완공된 이후에는 아문 신전으로서의 역할도 겸하여 매년 계곡 축제를 열거나 하트셉수트 여왕과 투트모스 1세를 기리는 중심 사원으로서 기능했다. 하지만 하트셉수트 여왕이 사망한 이후에는 장제전도 수난을 겪었다. 그녀의 뒤를 이은 투트모세 3세는 알 수 없는 이유로 재위 20년차부터 하트셉수트 지우기에 착수, 이 과정에서 장제전에 새겨져 있던 하트셉수트의 이름을 지우거나 장제전에 세워졌던 그녀의 조각상들을 부숴버렸다. 하지만 이 행위는 오래가지 못했고, 후일 마멘호테프 2세 즉위 2주년부터는 하트셉수트 지우기가 완전히 폐지된다. 아멘호테프 2세 본인은 파괴되었던 하트셉수트의 흔적을 어느 정도 복구했다고 주장하기는 했으나, 어쨌든 확실한 것은 이후로는 더 이상 하트셉수트 장제전에 파괴 행위가 가해지지는 않았다.

장제전의 수호신 격인 이 스핑크스는 규모가 매우 작아서 하트셉수트 장제전의 격에는 잘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을 준다.

장엄한 아름다움의 하트셉수트 장제전, 저 멀리 흐르는 나일강과 수 천년을 함께하고 있어서 그 역사적 가치가 더 돋보이는 것 같았다.





이 장제전은 3층 건물로 각 층마다 넓은 테라스가 있고 경사로로 연결되어 있다. 기원전 7세기 경에는 콥트교도들이 수도원으로 사용하기도 했다는 기록이 있다.

자, 이제 이웃해 있는 왕가의 계곡으로 가 보자. 투탕카멘이나 람세스 2세를 포함한 파라오들의 무덤이 있는 '왕가의 계곡(King’s Valley)은 룩소르에서 반드시 방문해 보아야 할 관광명소이다. 이 계곡에서 이집트 신왕국 파라오와 왕자의 무덤이 현재 66개 발굴되었고 발굴된 무덤은 순서에 따라 KV1~66까지 번호를 붙여서 관리하고 있다. 왕의 무덤은 22개인데 11개가 개방되어 있고 나머지 무덤은 유지 보수 및 다른 이유 등으로 폐쇄되어 있다.
투트모스 1세부터 람세스 11세에 이르기까지 18대~20대 왕조의 모든 왕들이 묻혀있는데 고대 왕들의 무덤이 더럽혀지지 않고 도굴을 방지하기 위해서 이 같이 지어졌으며 왕가의 계곡으로부터 남쪽으로 1.5킬로미터 지점에는 왕비의 계곡이 자리하고 있다.

왕가의 계곡 입구까지는 걸어가기에는 시간이 좀 걸려서 전기차를 타고 가야 하는데 나란히 타고 있는 친구들의 모습을 사진으로 담았다.

왕가의 계곡을 소개하는 안내판에 간추린 무덤 번호와 파라오의 이름이 소개되어 있다. 이 중에서 3개의 무덤(세티1세, 람세스6세, 투탕카멘)은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야 하는 옵션이다. 선택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데, 우리들 네 친구는 모두 들어가 보기로 했다.
파라오의 무덤은 파라오의 즉위와 동시에 만들기 시작했다고 한다. 300미터 두께의 암석을 필요한 만큼 파고 들어가서 제일 안쪽에 관을 만들고 방을 만든다. 그리고 관이 있는 방에서부터 무덤에 벽화를 새기는 작업을 시작하여 입구쪽으로 해 나온다. 이 작업은 파라오가 죽기 전까지 이어지는데 그런 이유로 재위 기간이 길수록 무덤에 볼 게 많아지는 것이다.


세티 1세 무덤
많은 업적을 남기며 안정적으로 이집트를 다스렸던 세티 1세는 기원전 1279년에 사망했다. 그의 시신은 성대한 장례식과 함께 왕가의 계곡의 KV17 무덤에 묻혔다. KV17은 역대 신왕국 파라오의 무덤들 중에서도 압도적으로 긴 136m에 달하는 길이와 깊이로 유명하다. 그의 무덤은 1817년에 이집트 고고학의 선구자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 이탈리아인 모험가 조반니 바티스타 벨조니에 의해 발굴되었다. 모든 통로와 방들이 정교한 벽화로 장식되어 있으며, 안에는 보물과 값진 부장품들이 가득했다. 특히 기둥에 새겨진 사랑의 여신 하토르와 세티 1세의 벽화는 이집트 벽화들 중에서도 백미로 평가받기도 한다. 관은 거대한 암석 하나를 통째로 깎아 만들었고, 하늘의 여신 누트를 새겨 매우 아름다운 푸른 빛을 띠고 있었다. 용케도 망가지지 않아 1824년에 존 소안(John Soane) 박물관에 전시되었는데, 당시 런던의 엄청난 공해와 습기 때문에 결국 색이 변색되어 칙칙한 검은색으로 변하며 훼손되고 말았다. 관 안쪽의 회반죽은 모조리 떨어져 나갔고 푸른빛 염료는 어두운 검은색으로 변했다.

























세티 1세의 무덤은 천정과 벽면에 별무늬와 신화적 장면이 가득한 고대 이집트 회화의 정수를 보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세티 1세의 무덤에서 나와 람세스 6세의 무덤을 보기 위해 잠시 이동했다.

람세스 6세는 람세스 3세 이후 쇠락해가던 이집트를 다스린 파라오였다. 마음만큼은 옛 람세스 2세나 람세스 3세 같은 위대한 파라오들을 따라하고 싶었지만 시대적 상황과 능력이 이를 따라주지 못했던 인물, 람세스 6세 재위기의 이집트는 가나안 일대의 영향력을 완전히 잃어버렸고 테베와 상이집트 일대는 점점 파라오에게서 독립해 떨어져 나가고 있었다. 람세스 6세는 선대 파라오들이 지어놓은 건축물들을 본인이 지은 것처럼 위조한다거나 자신의 조각상을 세우는 데는 열심이었으나 이집트의 쇠락을 막지는 못했다.
람세스 6세의 무덤은 본디 전임자 람세스 5세의 무덤이었다. 람세스 6세가 람세스 5세의 무덤을 빼앗아 본인이 써버렸던 것이다. 그는 8년의 재위 끝에 재단장한 무덤에 묻혔다. 람세스 6세의 무덤은 길이 104m로 관문의 서와 동굴의 서 등을 아름답게 그려놓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람세스 6세의 무덤은 고작 묻힌지 20년만에 도굴당했다. 람세스11세 시기의 파피루스 문서에 람세스 6세의 무덤을 털어버린 도굴꾼 5명을 심문했다는 기록이 있는 걸 보면 만들어지자마자 도굴당한 모양이다. 도굴꾼들은 파라오의 미라 붕대 속에 감춰놓은 보석들을 찾기 위해 미라의 손과 발, 머리를 도끼로 찍어버리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결국 제21왕조 때 보다못한 신관들이 람세스 6세의 미라를 아멘호테프 2세의 무덤 KV35로 옮겨져 재안치했고 이를 1898년 빅토르 로렛이 발견했다. 검사 결과 람세스 6세는 40대의 나이에 사망했고, 재이장하는 과정 도중 도굴꾼들에게 심하게 손상된 미라를 때우기 위해 다른 사람의 미라까지 얼기설기 갖다붙인 탓에 붕대 속에서 뜬금없이 여성 미라의 손이 발견되기도 했다.





람세르 5,6세의 무덤은 색채의 화려함이 그 특색이 아닐까 싶다. 조성 당시의 원형이 어느 정도는 보존되어 있는.....

투탕카멘의 무덤('나무 위키' 참조를 참조하여 간추린 내용)
사진은 파라오의 미라가 있던 현실의 모습이다. 왕가의 계곡은 고대 이집트인들의 치밀한 설계로 도굴꾼들의 침입을 막기 위해 일부러 눈에 잘 띄지 않는 후미진 위치에 자리잡고 있지만, 그마저도 완전히 막지 못해 신왕조 시기부터 거의 모든 무덤들이 전부 도굴된 상태였다. 그러나 1922년 11월 4일에 왕가의 계곡에서 엄청난 발견이 있었다. 투탕카멘의 무덤(KV62)이 거의 도굴되지 않은 거의 완전한 형태로 발견되었던 것이다.
투탕카멘의 무덤에서는 화려한 투탕카멘의 가면과 투탕카멘의 미라를 비롯한 수많은 유물이 발견되었고, 덤으로 투탕카멘의 저주라는 도시전설까지 떠돌았다. 고작 9년을 재위(在位)한 별 볼 일 없는 소년왕이었던 투탕카멘은 무덤의 발견 단 하나로 그 많은 이집트 파라오들을 전부 다 제치고 단숨에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파라오가 되었다. 사실 무덤이 도굴당하면 유명한 왕이라도 후손들이 보기엔 그냥 그 왕일 뿐이다. 그 무덤이 온전하게 후세에 전해지면 그 무덤의 주인은 역사에 대서특필된다.
사실 이 규모가 작고 별볼일 없는 무덤은 투탕카멘이 갑자기 죽어버리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사용된 것이다. 원래 파라오들은 재위 기간 내내 무덤을 지어 죽을 때 즈음에 완성해놓는데, 투탕카멘은 불과 18세의 어린 나이에 예상치 못하게 급사하는 바람에 다른 파라오들처럼 거대한 무덤을 지을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신관들은 일단 투탕카멘의 미라를 묻기는 해야 하니 귀족용으로 지어진 작은 무덤을 대신 사용했다. 투탕카멘의 뒤를 이은 아이의 귀족 시절 무덤이었다는 설이 유력하며, 거기다 아이가 투탕카멘의 원래 무덤을 차지했다는 설이 있다. 심지어 최근 연구에 따르면 투탕카멘의 상징과도 같은 황금 마스크조차 네페르티티의 이름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본래 투탕카멘을 위해 만든 것이 아닌 네페르티티를 위해 만들어진 것을 수정해 사용한 것일 가능성이 높을 정도다. 그 때문에 왕에 걸맞지 않게 무덤의 크기가 매우 간소하다. 하지만 그 간소하다는 무덤에서 나온 유물들이 총 5,398점, 총 200여 점이 넘는 보석류들이 발견되었다. 이집트 박물관의 1개 층을 모두 채우고도 남을 양이다. 실로 고대 이집트학 역사상 최고의 발견이라 할만하다.



왕가의 계곡 파라오의 무덤 일부를 둘러본 다음 룩소르 서안에서 동안에 있는 카르나크 신전으로 가기 위해서 배가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다.




카르나크 신전은 룩소르 신전 북쪽 3km 지점에 있다. 이 신전은 현존하는 신전 가운데 최대 규모의 신전이다. 기원전 2000년부터 건립되기 시작했지만, 역대왕에 의해 증축과 개축이 되풀이되어, 초기 유구로는 제12왕조 세누세르트 1세의 성당만이 남아 있다. 현재의 신전은 신왕국 시대부터 1500년 뒤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에 이르는 긴 시간에 걸쳐 건립된 10개의 탑문, 제19왕조의 창시자 람세스 1세로부터 3대에 걸쳐 건설된 대열주실, 제18왕조의 투트모스 1세와 그의 딸로 여왕이 된 하트셉수트가 세운 오벨리스크, 투트모스 3세 신전, 람세스 3세 신전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높이 약 23m의 석주 134개가 늘어선 대열주실은 너비 약 100m, 안쪽 깊이 53m로 안쪽의 하트셉수트 여왕의 오벨리스크와 함께 보는 이들을 압도한다.(위키 백과 참조 인용)


숫양은 태양과 공기의 강력한 신인 아문(Amun) '라' 신을 상징한다. 람세스 2세가 만든 이 스핑크스가 신전 앞에 열지어 세워져 있는데 이 스핑크스 길은 약 3킬로미터 떨어진 룩소르 신전까지 연결되어 있었으나 현재는 일부만 복원되었다. 신성한 보호와 왕권을 나타내고 주로 사원이나 왕실 무덤 입구의 수호자 역할을 했으며, 악의 세력을 막는 자비로운 존재로 여겨졌던 것이다.

람세스 2세의 거상, 다리 사이에 조각된 사람은 딸이자 왕비였던 빈타나트다. 원래는 2개였으나 현재 다른 하나는 파괴되어 다리만 남아 있다.




투트모스 1세의 오벨리스크


제사장들이 종교의식을 거행하기 전 목욕재계하던 성스러운 호수(Sacred Lake), 그 옆에는 신성시 여기던 쇠똥구리 조각상이 있는데 이를 반시계 방향으로 3번 돌면 결혼하고, 5번 돌면 불임치료가 되고, 7번 돌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말이 있어 늘 사람들로 붐빈다.


친구 정우도 사람들과 함께 반시계 방향으로 계속해서 돌고 있다. 몇 번을 돌았을까 헤아리다가 말았다. 아마 그는 7번을 돌았을 것 같다.

카르나크 신전에서 룩소르 신전까지 가는 길에 해가 지고 있었다. 룩소르 신전은 특별히 야경이 유명해서 그것을 감상하기 위해서는 좀더 시간을 기다려야 했기에 27명의 일행이 모 지점에서 출발하는 룩소르행 마차를 30분 정도 타 보는 체험을 하기로 했다. 두 명씩 타야 하니 현지가이드는 열네 대의 마차를 섭외해 놓았던 것 같다.



인솔 가이드인 유진씨가 맛보라면서 제공한 사탕수수의 맛은 고향에서 보냈던 어린 시절의 추억을 떠올렸다. 수확을 마친 옥수수 대공의 껍질을 벗겨 씹어서 즙을 내먹던 맛과 비슷했기 때문이다. 친구도 자신도 그런 경험이 있었던지 내 추억의 말에 동의하면서 맛을 보고 있다. 그런데, 아직 설사가 멈추지 않았다면서 한 모금 맛만 보고는 나한테 넘겼다. 단숨에 마셔버린 나에게 더 마시라고 준 것이다.

마차를 타고 돌아보는 골목 투어는 그런대로 재미와 의미가 있었다. 룩소르 시내의 속살을 잠시나마 눈으로 보고 느껴볼 수 있던 체험이었기 때문이다.


마차, 버스, 택시, 사람들이 뒤섞여 오가는 차도는 무질서해 보이는 듯 하긴 한데, 별다른 사고 없이 잘 운행되고 있는 것 같아서 무질서의 질서가 유지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룩소르 앞까지 데려다 준 마부에게 '박시시'(팁을 이집트에서 일컫는 말)로 1달러씩 주니 고맙다고 했다.

룩소르 신전이 언제 지어졌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대략 아멘호테프 3세의 재위기인 기원전 1400년 쯤에 지어진 걸로 추정된다. 그 이래로 카르나크 신전과 함께 테베를 상징하는 신전으로 자리매김했는데, 당시에는 '남쪽 성소'라는 뜻의 '이페트 레시트'라고 불렀다. 다만 차이점이라면 신에 대한 숭배가 중심인 카르나크 신전과 달리 룩소르 신전은 파라오의 왕권 강화적인 목적이 더 강했다는 것. 일부 학자들은 파라오들이 룩소르 신전에서 대관식을 치렀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아멘호테프 3세가 처음 지을 때 지성소와 내부 광장, 다열주홀이 만들어졌고 후대에 건축광 람세스 2세가 추가로 탑문과 입구 쪽 광장을 덧붙였다. 다만 람세스 2세 외에도 수많은 파라오들이 공사를 진행했는데, 일례로 그 유명한 소년 파라오 투탕카멘도 룩소르 신전에 조금씩조금씩 건물들을 덧붙였다.
이후 룩소르 신전은 알렉산드로스 대왕 시절을 거쳐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시절에도 여전히 가장 중요한 사원들 중 하나로 기능하면서 중요한 대접을 받았다.
룩소르 신전은 전형적인 이집트 신전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일단 우리가 룩소르 신전하면 떠올리는 사다리꼴 모양의 탑문은 '필론'이라고 부른다. 두께가 4.5m에 달하는 신전의 정문이며 이 문을 통해서 신전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건축왕 람세스 2세가 지어 봉헌했고, 그래서 그 앞에 서있는 수많은 석상들 역시 모조리 람세스 2세를 묘사한 것들이다. 길이는 약 65m, 그리고 탑문에는 히타이트 군대와 맞서 싸우는 람세스 2세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탑문 바로 앞 왼쪽에는 22.5m 정도 높이의 높다란 오벨리스크가 하나 서있는데, 원래는 양쪽에 한 개씩 쌍을 이루고 서있었다. 허나 1833년 프랑스 군대가 오른쪽 오벨리스크를 떼어가버리면서 현재는 하나 밖에 남지 않았다. 오른쪽 오벨리스크는 현재 파리 콩코르드 광장에 서있다. 오벨리스크 뒷편의 탑문에는 1m 정도의 받침대 위에 15.50m의 거대한 람세스 2세의 좌상 2개, 그리고 높이 7m의 람세스 2세의 입상이 양쪽에 2개씩 총 4개가 있었다. 붉은 화강암으로 만들었고, 현재는 룩소르 신전을 상징하는 석상이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멸망과 함께 고대 이집트 종교의 쇠퇴, 그리고 이집트를 지배하던 로마 제국이 기독교를 국교로 정하면서 룩소르 신전은 점차 사람들에게 버려졌고, 나중에는 작은 콥트 교회가 사원 안에 들어서기까지 했다. 후일 파티마 왕조가 들어서고 이슬람교가 새롭게 유입되자 룩소르 신전 유적 위에 모스크가 세워졌지만 딱히 거대한 규모는 아니었고 그냥 점차 모래 속에서 무너져가는 유적 정도의 취급만 받았다.
1800년대에 이르자 무너진 잔해들과 그 위에 쌓인 모래들이 겹치고 겹쳐져서 유적 전체에 높이가 15m에 달하는 거대한 언덕을 이루기에 이르렀다. 대략 신전 유적 전체의 4분의 3 정도가 이 모래언덕에 묻혀있었던 것. 이렇게 언덕 아래에 묻혀있던 룩소르 신전을 1884년 가스통 마스페로 교수가 이집트 당국의 허가를 받아 발굴하기 시작했고, 이후 1960년대까지 꾸준하게 발굴이 이루어지며 몇 천년만에 다시 지상 위로 모습을 드러낸다. 60년대에 이르자 이집트의 대표적인 관광지로 꼽히면서 국가적인 보호 관리에 들어갔고, 1975년에는 바로 옆에 룩소르 박물관이 세워졌다. 현재는 이집트와 룩소르의 대표적인 관광지다.






크루즈 선박은 이미 룩소르에 정박해 있었다. 야경이 특별히 돋보이는 룩소르 신전은 나일강 바로 옆에 위치해 있어서 우리 일행들은 신전을 전체적으로 둘러보고 곧장 크루즈 선박으로 돌아올 수 있었고, 준비되어 있던 저녁 식사도 여유있게 할 수 있었다. 어느 덧 크루즈의 마지막 밤이기도 해서 휴식을 즐길 겸 우리들은 선상으로 올라가 그 주변 분위기를 살폈다.



덕제의 옆모습이 왠지 쓸쓸해 보인다. 어두워지는 밤이라서 그렇게 느끼는 것은 걸까? 엊저녁 네 명이 한방에 모여 이야기를 하다가 돌아가신 부모님 이야기를 하다가 갑작스레 흐느끼던 장면이 떠올라서 일지도 모른다. 누구든지 언젠가는 늙고 병들어 삶 자체가 힘들어질지도 모르는 법이니 우리들에게 주어진 오늘 하루는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