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루즈 숙소에서 그 첫날을 보내고 아침 7시가 되자, 선착장 앞에서 대기중이던 관광버스를 이용해서 아부 심벨 신전이 있는 곳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4시간 정도를 달려가야 도착할 수 있단다. 많은 이집트 여행자가 피라미드 다음으로 기대하는 유적지가 바로 아부 실벨이다. 아침 일찍 출발해서 아부 심벨 신전을 보고 돌아오다가 그 중간에 있는 아스완 하이댐을 둘러보고 난 뒤, 다시 아스완 선착장으로 돌아오는 일정인 것이다. 버스를 오래 타야만 하는 날이라 소화해 내기가 결코 만만치 않을 것 같다. 면적이 넓은 나라를 빠른 시간 내에 최대한 많이 봐야 하는 것으로 계획을 짰으니 이동 거리가 많을 수밖에 없다.

또 하루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일출 장면, 매일 뜨고 지는 태양이지만 낯선 이집트란 나라에서 바라보는 일출은 또 그대로의 매력을 지녔다.

아스완 댐이 완공되고 그 이후, 이곳에서 발전되어 공급되는 전력은 당시의 이집트에서 소비하는 전력의 50% 이상이었다고 하는데, 그 송전탑들이 이집트 북부 지역을 향하여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2시간 만에 들른 어느 휴게소의 화장실 입구에 쓰인 방향 표시와 영어 문장이 재미있다. 남자들은 왼쪽으로 가고 여자들은 오른쪽으로 가라는 뜻이겠지만, 한편으로 그 이유를 밝히고 있다. '왜냐하면 여자들은 항상 옳기 때문이라고(Because women are always right)'.ㅎㅎㅎ


저기 솟은 지형들은 일종의 산일 텐데, 풀과 나무가 하나도 없다. 이집트는 전 국토의 95%가 사막이라고 하니 오죽하랴.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하니 나세르 호가 보인다. 이집트 남부 아스완에서 수단 북부 와디할파까지 이어진 나일강의 인공 호수로, 아스완댐의 건설로 인해 형성된 세계에서 가장 큰 호수다. 호수의 길이는 550킬로미터, 댐의 건설로 인해 많은 누비아인 주민들이 고향을 잃게 되었고, 여러 고대 이집트와 누비아 문화 유산이 수몰 위기에 처하여 국제사회가 협력하여 유네스코 세계유산 지정의 시작으로 이어지게 된다.



수몰 위기에 빠지자 1959년 유네스코의 도움을 받아 분해하여 현재 위치로 옮겨진 아부 심벨 신전, 먼저 인공 바위산을 지은 후 내부에 콘크리트로 돔을 만들고 가져온 조각상과 내부를 조립했다고 한다.




흔히 '아부 심벨'이라고 하면 떠올리는 거대한 좌상 4개가 줄지어 앉아있는 신전이 바로 대신전이다. 대략 짓는 데에 20년 정도가 걸렸으며, 람세스 2세가 즉위한지 24년 정도 되는 기원전 1265년에 완공되었다. 아문, 라 호라크티, 프타, 람세스 2세 본인에게 헌정된 신전으로 람세스 2세가 생전 지은 수없이 많은 신전들 가운데에서도 독보적으로 아름다운 신전으로 손꼽힌다.
호루스 신과 하토르 신의 작은 입상들이 줄지어 선 입구에 있는 20m에 이르는 좌상 4개는 모두 람세스 2세로 각각 상, 하 이집트를 의미하는 의상을 입은 형상이다. 안타깝게도 보는 방향으로 왼쪽 2번째 좌상은 세월을 견디지 못하고 지진 때문에 상체 부분이 부서졌지만 떨어진 몸체가 바로 아래에 보존되었음도 아부 심벨의 묘미다. 이 좌상들은 아부 심벨 대신전의 간판이라고 해도 좋다.
좌상 뒤쪽에 있는 거대한 파사드는 높이 33m, 폭 38m에 달하며 파사드 위쪽의 프리즈에는 스물두 마리의 개코원숭이들이 새겨져 있다. 원숭이들은 양팔을 올려 태양을 찬양하는 모습을 하고 있고, 몸에는 람세스 2세의 딸과 히타이트의 왕 하투실리 2세의 결혼을 증거하는 석판이 있다. 입구 바로 위에는 큼직한 벽감이 하나 파여있고 그 안에는 태양신 라의 입상이 들어가있다. 라는 왼손에는 깃털을, 오른손에는 정의와 질서의 여신 마아트를 들고 있는 모습. 라의 몸에는 람세스 2세의 즉위명이기도 한 '우세르 마아트 라'가 새겨졌다.

4개의 좌상들 사이사이에는 훨씬 조그만 크기로 람세스 2세의 가족들의 상이 세워져 있다. 아무리 커봤자 람세스 2세의 무릎 높이 밖에 오지 못하는데, 어머니인 투이, 아내인 네페르타리, 장남과 차남인 아문헤르케세프와 람세스, 장녀를 포함해 총 6명의 딸들이 주인공이다.



입구를 통해 안으로 들어가면 오시리스의 모습을 한 람세스 2세의 입상 8개가 세워진 기둥의 방이 있는데, 벽에는 카데시 전투의 장면들을 새겼다. 크기가 무려 20m에 달하는 입상 8개가 줄을 맞추어 서있기 때문에 실제로 안에 들어가면 꽤나 장중한 느낌을 준다. 방의 길이는 18m, 너비는 16.7m이며 8개의 석상들이 기둥으로써 천장을 받치고 있는 모습이다. 입구에서 본 기준으로 왼쪽에 있는 조각상들은 상이집트를 상징하는 백색 왕관을 쓰고 있고, 오른쪽에 있는 조각상들은 상하이집트의 통합 왕관인 이중관 프셴트를 착용하고 있다. 조각상들 뒤의 벽에는 람세스 2세가 치른 전투들의 벽화가 새겨져 있고 대부분이 카데시 전투에 관한 것이지만 일부 누비아나 리비아 지방에서 일어난 전쟁들을 묘사한 그림도 있다.
기둥의 방을 지나면 4개의 기둥들이 천장을 떠받치는 상대적으로 더 작은 방으로 들어갈 수 있다. 이 방에는 람세스 2세와 그의 아내 네페르타리가 창조신 아문, 태양신 라와 함께 태양 방주를 타고 내세로 향하는 모습이 새겨졌다. 이 방마저 지나면 마침내 가장 안쪽에 있는 조그만 크기의 성소로 들어갈 수 있다. 가장 깊숙한 성스러운 공간에는 4명의 신들의 좌상이 있다. 라 호라크티, 신격화된 람세스 2세, 아문 라, 프타 신으로, 당시에는 각각 헬리오폴리스, 테베, 멤피스를 수호하는 신들이었다.

1년 중 2월 22일과 10월 22일에 가장 안쪽의 성소에 태양빛이 약 20분간 들어와 신상을 비추지만, 어둠신인 프타의 상에는 이 날에도 빛이 비치지 않는다. 원래는 람세스 2세의 즉위일인 2월 21일과 람세스 2세의 생일인 10월 21일이었는데,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기 위한 공사를 할 때, 날짜를 정확히 맞추고자 1년이나 시간을 들여 계산을 하였지만 결국 원래 날짜보다 각각 하루 늦게 할 수밖에 없었다. 이 날들에는 아부심벨 대신전 주위에 사는 사람들이 전통음악과 춤을 비롯하여, 이슬람의 수피즘 교도들이 추는 춤 등을 공연하는 큰 축제를 연다.





규모가 작아서 소신전이라 불리지만 정식 이름은 '하토르와 네페르타리의 신전'이다. 대신전에서 북동쪽으로 100m 정도 떨어진 장소에 세워졌고 사랑의 여신 하토르와 람세스 2세의 왕비인 네페르타리에게 바쳐졌다. 참고로 이 신전은 아케나텐이 왕비인 네페르티티를 위해 신전을 지어준 이래 고대 이집트 역사상 두 번째로 왕비를 위해 지어진 신전이다.
대신전과 마찬가지로 암벽을 그대로 깎아 입구를 만들었고, 정면에는 람세스 2세의 입상 4개와 네페르타리의 입상 2개가 세워져 있다. 두 사람의 입상의 크기는 거의 같으며 그들의 입상 아래에는 왕자와 공주들의 입상이 작은 크기로 세워져 있다. 신분이 높을 수록 인물의 크기를 크게 묘사했던 고대 이집트에서 파라오와 왕비의 크기를 거의 비슷비슷하게 조각해 놓은 경우는 아부 심벨의 소신전이 거의 유일하다. 전통적으로 왕비의 조각상을 세우긴 했어도 파라오의 조각상 무릎 정도까지의 키로 깎아놓는 것이 전통적인 관례였기 때문. 파라오와 왕비의 조각상들 바로 곁에는 왕자와 공주들의 상이 세워져 있다.
소신전의 구조 배치는 대신전을 축소해 놓은 것과 비슷하다. 다만 대신전의 경우 입구를 통과하면 8개의 거대한 파라오 입상이 세워진 방으로 들어갈 수 있었던 반면 소신전은 입구를 통과하면 6개의 기둥들이 받치고 있는 방이 나온다. 기둥에는 사랑의 여신 하토르의 머리모양이 새겨져 있고, 벽과 기둥에는 네페르타리 왕비가 라, 크눔, 콘수, 토트, 이시스, 마아트 등의 신과 노니는 장면이 있다. 또한 람세스 2세가 신들에게 향료를 바치는 장면도 있다.
6개의 기둥이 있는 방을 통과해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3개의 문이 있는 벽과 조그만 방이 나온다. 이 곳에도 역시 신들을 찬미하는 내용의 벽화가 가득한데, 주로 소의 모습을 한 하토르 여신에게 네페르타리 왕비가 공물을 바치고 숭배하는 모습이 주를 이루고 있다. 소신전 맨 안쪽에는 조그마한 크기의 성소가 있다. 이 곳에도 대신전처럼 신상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현재는 남아있지 않고, 성소에 남은 것은 하토르 여신과 합일을 이루어 신격화된 네페르타리 왕비를 그린 벽화 정도 밖에 없다.

소의 형상을 한 하토르, 보통은 암소 머리를 한 여성의 모습으로 묘사되며, 이러한 모습을 한 하토르일 때는 다산, 풍요, 행복 등을 상징하는 좋은 신이다. 죽은 자들(특히 파라오)를 저승으로 인도한다. 종종 파라오들의 어린 시절을 묘사하는 벽화에 하토르의 젖을 먹고 자랐다고 표현되는 신.





지금 걷고 있는 곳은 복원된 아부 심벨 신전의 뒷부분이다. 저 능선 위에 올라서 내려다보면 그 발 아래 신전이 위치하고 눈을 들어 똑바로 보면 광활한 나세르호가 가마득하게 보일 것이다. 이제 서둘러서 아스완에서 우리 일행을 기다리고 있는 크루즈 배로 돌아가야 한다.



휴게소에 잠시 쉬면서 그 주변을 담은 사진이다. 휴게소 이외에 보이는 것은 사막과 도로, 송전탑 뿐이다. 병국의 얼굴이 수척해 보인다. 설사병을 만나 고통을 받고 있는 순간의 연속이니 오죽할까 싶다.


아부 심벨에서 아스완으로 돌아가는 길에 잠시 들른 아스완 댐, 제일 먼저 Russian-Egyptian Friendship Monument 기념비가 보인다. 이집트의 나세르 대통령은 아스완 하이댐 건설을 미국에 요청했는데 당시 미국 의회가 거절해서 당시 프랑스-영국이 운영했던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하여 그 수입으로 아스완 하이댐을 건설하려고 했으며 이 때문에 2차 중동전 (Suez Crisis)가 벌어지게 된다. 그 이후에 구소련이 아스완 하이댐 건설을 지원했다고 한다.



아스완 하이댐과 관련하여 Dr.JW Kim's blog에서 발췌한 내용을 아래와 같이 소개한다.
아스완 하이댐 (Aswan High Dam)은 1970년 소련의 지원을 받아 완공한 댐으로 1971년에 정식으로 개통되었습니다. 당시로 약 10억 달러의 경비가 소모되었다고 하는데 현재 화폐 가치로는 약 70억 달러로 8조 정도의 재원이 지출되었습니다. 구소련은 과거 지원을 해주더라도 나중에 대부분 지원에 대한 보상을 받아갔는데 아스완 하이댐 만은 거의 무료로 지원해주었다고 합니다. 이 댐의 높이는 111미터 댐 마루부 길이는 3,830미터로 거대한 댐입니다.
이 댐의 건설로 만들어진 나세르 호 때문에 이집트 방면으로 320킬로미터, 수단 방면으로 160킬로미터 정도가 수몰되어 많은 사람들이 생활의 터전을 잃고 이주를 했습니다. 9만 명의 이집트 농부와 수단 누비아 지역의 유목민이 이주를 해야 했습니다. 5만 명의 이집트인은 아스완의 북쪽 50 킬로미터 지점에 위치한 콤옴보 계곡으로 이주해 누바리아라는 새로운 농경 지구를 형성했고, 대부분의 수단인은 수단의 카슴 알키바 근처에 다시 정착했습니다.
이 때 아부심벨 신전들이 수몰될 위기에 빠지자 유네스코와 국제사회, 특히 미국이 이 신전을 살려내기 위해 나섰습니다. 4년 반 동안에 50개국의 지원과 수많은 고고학자의 노력으로 신전은 원래 위치에서 65 미터 위로 이동했습니다. 냉전으로 미국이나 구소련의 첨예한 대립이 있었던 당시 미-소의 중간에서 중간적인 정치 입장을 취하던 비동맹국인 맹주였던 이집트의 위상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집트 하이댐의 경제적인 효과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 아스완 하이댐은 해마다 발생하는 나일 강 홍수를 사상 처음으로 통제하고, 홍수 때 물을 저장한 후 적절하게 방출하여 관계농지의 효용성을 높이는 효과가 있었습니다. 또한 새로운 땅에 물을 공급하고, 아스완 근처의 운항을 더욱 원활하게 했으며 엄청난 양의 전력(210만 kW)을 생산했습니다. 그러나 나일강 범람으로 발생하는 경작지의 침척토 발생이 없어져서 나일 강 양쪽 농경지의 생산성이 저하되고 강이 자연적으로 배출하던 광물은 없어져 연안어업의 실적이 하락했습니다. 염기가 농작지로 스며들어 염해 피해를 야기한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아스완 하이댐의 경사도는 매우 완만해 보인다. 저 아래로 흐르는 강물은 1902년에 완공된 아스완 로우댐에 막혀 또 저렇게 거대한 호수를 이루어 크고 작은 섬들을 만들었을 것이다.

1970년 7월 21일, 아스완 하이댐 건설 완공 기념으로 만든 기념탑으로 보이는 곳에서 친구 4명이 나란히 서서 인증샷 하나 남긴다.


버스 차창 밖으로 아스완 대학교 정문이 보인다. 이집트에서 이 대학이 차지하는 위상은 어느 정도?


우리 일행이 크루즈로 돌아오자 배는 드디어 아스완에서 닻을 올리고 2박 3일에 걸쳐 룩소르 방향으로 천천히 항해를 시작했다.

점심을 맛있게 먹은 후 크루즈 선박 4층 데크로 올라가 나일강 주변의 모습을 둘러보면서 몇 장의 사진으로 담았다.






일렁이는 강물결 위에서 고기를 낚는 두 젊은이의 부지런한 손짓이 눈에 확 들어왔다. 누군가의 아들? 누군가의 아버지일까? 나일강 크루즈 여행을 즐기는 우리들과 대비되는 저들의 팍팍한 삶이 느껴져서 마음 한구석이 곧 애잔해진다.

내가 애정을 담아 찍은 사진, 좋은 친구들과 이렇게 좋은 공간에서 함께하는 순간이 그저 행복하다.

오후 내내 나일강 하구를 향해 순항을 하던 크루즈 선상에서 본 일몰, 모든 이의 마음을 훔치려는지 멋있는 장면을 연출하고 있는 것 같다. 저녁을 먹고 나면 곧 배는 콤옴보에 도착하면서 선착장에 정박을 할 것이다.

낮에만 해도 선상의 풀장에 남녀 관광객들이 일광욕과 수영을 즐기던 분들이 좀 있었는데 어둑해지면서 나만 이렇게 호젓하게 다소곳이 앉아 본다. 정우가 찍어준 사진!

콤옴보는 마을 이름인데 그 이름을 딴 콤옴보 신전을 둘러보는 시간을 갖기로 했다. 선착장 바로 앞에 신전이 있어서 이동 거리가 매우 짧았고 길에는 상점들이 즐비했다.

콤옴보 사원은 투트모스 3세가 악어 머리를 한 소베크(Sobek)와 매의 머리를 한 호루스(Horus) 신에게 봉헌한 사원이다. 나일강의 악어로 인해 피해가 많아지자 고대 이집트인들이 악어를 신으로 만들고 피해를 줄이고자 신전을 지은 것 같다. 신전 내부는 한 때 신전을 교회로 사용했던 콥트인들에 의하여 파손이 심한 편이지만 벽화의 완성도는 뛰어나다.


소베크(Sobek) 신이 지켜보는 가운데 파라오가 신들로부터 왕관을 받는 장면


어둠 가득한 곳에 조명을 비추어 탑문과 신전의 조각들이 불빛과 어울려 신비감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낮에 보는 신전과 밤에 보는 신전의 느낌이 다른 이유는 조명의 효과가 아닐까 한다.

신전 외곽에는 우물처럼 생긴 곳이 있다. 나일로미터(Nilometer)라 하며 나일강의 수위를 재는 데 사용되었다고 하는데, 사람이 걸어서 내려갈 수 있는 계단이 있다. 홍수철에 나일 강의 수위 변화를 파악하는 데 쓰였으며, 이 측정값을 통해 그해 농사의 흉작 여부를 예측하고, 물 관리 및 제례를 조절하는 중요한 자료로 활용했다고 한다. 단순한 도구를 넘어 자연과 인간의 상호작용을 상징하는 문화적 유산으로서의 의미를 가진다. 나일강이라는 환경적 요소에 대한 관찰과 예측은 곧 생존 전략이었고, 이를 바탕으로 제정된 제사와 행정 제도는 이집트 문명의 체계를 이루는 핵심 요소로 작용했다. 오늘날에도 나일강은 여전히 아프리카 동북부 국가들의 생명선이며, 나일로미터는 과거 인류가 자연에 어떻게 적응하고 활용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대열주는 넓고 높게 설계되어 있으며, 기둥들은 파피루스와 연꽃 등 고대 이집트에서 신성시한 식물을 모티프로 한 화려한 장식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파피루스는 생명력, 재생, 창조를 상징하고, 연꽃은 태양과 창조, 부활, 순수함을 상징한다.

유진씨가 찍어 준 네 명의 사진, 환한 조명 아래 찍는 기분이 특별했다. 우리의 그림자를 신전의 저 기둥에 새겨놓을 수 있을까? 특히 정우의 둥그런 두상이 참 귀엽게도 기둥에 새겨졌다.

콤 옴보 신전 옆에는 악어로부터 이집트 사람을 지켜주는 신이자 물을 다스리는 신인 세베크 신과 관련된 악어 박물관이 있으며 악어 미라가 많이 전시되고 있다.

덕제가 찍어준 사진, 크루즈 4층 선상에 올라 나일강의 선선한 바람을 만끽하고 있는 장면이다. 셋이서 가위바위보를 해서 진 사람이 맥주를 사 주는 것으로 하자고 덕제가 제안을 했고 단번에 받아들여져 결정했는데, 제안자인 덕제가 맥주를 사야 했다. 맥주를 사고 싶은 명분으로 가위바위보를 제안한 것 같았다.

배 위는 바람이 너무 강해 한기가 느껴져 잠시 머물다가 2층 침실로 돌아와 이집트산 맥주를 마셨다. 덕제와 정우, 옛날에는 술을 잘 마셨더랬는데 요즘은 거의 입에도 대지 않는 것 같다. 아직도 음주를 즐기고 있는 나로서는 그 섭섭함을 혼자 마시면 달랠 수밖에 없다. 맥주만 마시니 약간 모자란 듯해서 가져온 소주를 한 병 더 꺼내어 마셔야 했다. 병국이도 이 자리에 함께 하고는 있어도 앉아 있지 못하고 누워 있어야 했다. 아직도 몸이 성치 않은 탓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