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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이목 형님과 함께 간 모임!

세상과 함께

by 우람별(논강) 2009. 8. 6.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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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토요일,
대학 시절에 활동했던 시동호회
'말과 여백' 동문 모임에 갔더랬습니다.
오후 4시 30분에 이목 형을 만나 포항을 출발,
6시경 모임에 합류할 수 있었습니다.
그날의 감상을 적은 것이 있어
모임 까페에 올렸던 것을
이곳에도 재미삼아 올려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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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7월 2일(토),
모처럼 말과 여백 선-후배들이 모였다.
1기(장광수, 장봉환, 이권주), 3기(황영진),
4기(송춘길, 한일식), 10기(정석진, 이규도),
12기(김대용) 등 졸업 동문 고참(?)들과
20기 이하 28기의 현역(?)들까지 두루 두루 모였다.
강릉 사는 송혜숙씨(1기)는 참여하지 못해 미안하다며
두루두루 안부나 전해 달라 했다.
장광수, 장봉환 선배님께는 보고 싶다고 말해 달란다.
고향이 남제주군 표선면 가시리인 사람,
남다른 감수성의 소유자, ‘말과 여백’이란 이름도
그녀가 지은 이름이지, 아마.

큰샘 선생(아이디)이신 장광수 선배님,
말과 여백을 처음 꾸릴 당시나 세월이 흐른 지금이나
시에 대한 변함없는 열정과 사랑을 보여주는 분.
덧장 제주희 양의 표현대로라면 카리스마가 넘치는 분.
맞다! 옛날도 그랬으니 지금은 오죽하겠는가?^^
나보다는 5살 연상이신데, 운동으로 다져진 몸매라
아직도 20대의 건강을 유지하며 사는 분.

호가 이목(耳木)인 장봉환 선배님,
젊은 대학 시절부터 시적 재능을 인정 받아
당시 10만원의 거금을 상금으로 타서
후배들에게 맘껏 술을 사셨던 분.^^
언젠가 시를 낭송하다가 눈물을 흘렸는데,
그 풍부한 감성은 아직도 철철 넘쳐서
지천명의 나이를 의심케 하는 분.
사회 정의를 부르짖는 휴머니스트
불의를 보고는 참지 못해 꾸짖어야만 하고
정의를 직접 실천하거나 뜻을 같이하는 사람을 보면
어떻게든 도움의 손길을 주려하는 분,
그간의 바쁜 삶을 정리하며 다시 시 쓰기를 시작했으니
머지 않아 시인의 반열에 오를 것으로 예상됨.^^

황영진 선생,
전교조 해직 교사 출신으로
개성과 카리스마가 넘치는 사람.
해직되고 거처를 포항으로 옮겨 와
모 학원에 근무하고 있을 때,
국어과 동문들과 가끔 만나 술 한 잔 하게 되면,
재치있는 달변과 독선으로 좌중을 즐겁게 하고,
때로는 기인처럼 행동해서 사람을 놀라게 했던 사람,
우리 선배들을 툭하면 ‘영감재이’라고 표현해서
얼마 되지 않는 나이를 부끄럽게 했던 사람,
상을 당하여 고향 화매 마을을 찾아 가 본 후로는
처음 만나는 자리였으니 얼마만의 해후였나?
근데 안 보는 사이에 체중이 너무 많이 불은 듯.
(운동 부족으로 인한 것이라면 반성 좀 하라우.
나도 과체중으로 위기를 느끼고 있소만
헬스 운동으로 3킬로 정도는 이미 뺐소이다.)

한일식 선생,
대학 1학년 시절 국어과 예술제 때
배우로서 연극 공연에 참여 잠재된 끼를 발휘,
시를 씀에 있어서 남다른 감성을 가졌던 사람,
언제부턴가 판소리 공부를 시작,
8년간 그 세계에 빠져 있다가 개인적 사정으로
부득이 중도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하는데,
그가 부른 ‘사철가’ 한 소절은 듣는 사람을 흥분케 했다.
추임새를 곁들여가며 그의 소리를 열심히 듣다가
놓칠세라 디지털 카메라를 들이대어
동영상으로 촬영 일부를 기록해 두었는데,
조상혁 후배님이 시화전 뒷풀이 때 불렀던
‘사랑가’ 부분과 오버랩 되었다.

송춘길 선생,
1989년 전교조 울진지회 창립식, 참가 교사 21명,
그 중 7명이 불법단체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교육부의 칼날에 해직이 된 사실이 있는데,
해직을 감수할 것이냐 탈퇴를 할 것이냐를 놓고
21명의 교사들이 많은 갈등을 겪게 되는데,
이 때 송 선생은
‘집안의 영광으로 알고 차라리 해직을 선택하겠다.
학생들을 사랑하는 것도 죄란 말인가?’라고 말하여
주변을 숙연케 했던 장면이 떠올랐다.
해직된 후,
그의 삶을 얘기하기엔 이 공간이 너무 좁으리라.
가끔씩
지면을 통해 발표하는 시를 볼 때마다.
학교 현장과 가정의 모습이 참으로 소담스럽게
그대로 녹아 있음을 알 수 있었고,
삶 자체가 시로 거침없이 표현되고 있었다.
말할 때의 제주도 특유의 억양과
까무잡잡한 얼굴, 하얀 미소까지도
차라리 하나의 시가 아닐까?

오카리나를 연주회에 참석하고 늦게 도착한 정석진 선생, 술이 적당하게 취해서 깜짝 사회를 보았던 이규도 선생, 그들의 기수가 10기라 했나? 졸업한 지 오래되었어도 수시로 후배들을 찾아주는 그 ‘멋’을 잃지 않고 있는 것 같아 늘 흐뭇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가장 돋보이는 센스와 포근함을 보여주었다.
장봉환 선배가 직접 발행한 ‘논술세대’를 중학교 재학 시절 2년간이나 애독했다는 제주희 회장님, 옥천이 고향인 제대 복학생 조상혁, 인물 좋고 귀엽기 그지 없던 이종우, 흰 모자를 눌러 쓰고 훤칠한 키와 미소를 보여준 ‘이쑤’라는 후배, 황동규 시인의 세계를 깔끔하게 정리하여 수업을 하고 남은 자료를 내게 건네 준 김대현 군, 그리고 몇몇 후배 회원들..... 다들 참 반가웠소이다.

술을 둘러앉아 마시면서 돌림시를 쓰는 순간도 좋았다. 누군가 시작했고, 자기 차례가 되면 앞의 내용을 차분히 읽고 이미지를 그대로 살려 이어쓰는 것인데 말과 여백 초창기 때도 몇 번 그렇게 했던 기억이 있어 감회가 새로웠다. 단 3줄의 시행을 이어 나도 동참을 했고 이목 형이 마지막을 멋지게 정리해 주었고 큰샘 선생께서 낭송을 하셨다.
워낙 고참들이 많이 참석한 날이라 후배님들이 혹시 부담을 갖지는 않았을까 모르겠다. 까이꺼 20년 세월 정도는 뚝 잘라내어 만나면 되지 않을까? 시를 통해서 만나든 술잔을 나누면서 만나든 만남 자체에 의미를 부여한다면 1년에 한두 번 정도 가지고는 오히려 섭섭하지 않을라?

새벽 3시 경,
정석진, 송춘길, 황영진 선생 등과 헤어져
이목형과 나는 모 여관에서 잠자리에 들었다.
(1기 고참들을 재워 놓고 즈그들끼리 또 한잔 한 거 아냐?)

아침 11시는 되어서야 여관을 나왔다.
장맛비를 우산으로 맞으면서
우리를 포항까지 태워 줄 차를 찾아,
대학 캠퍼스 안으로 들어갔다.
이목 형 왈,
“75학번과 05학번의 만남, 이건 말백의 역사네!
좀더 세월이 흐르면 우린 전설상의 1기가 되지 않을까?”

‘너무 맥없이 흘러가 버리는 이 세월
잡을 수 있는 묘한 방법 없을까?’란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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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오는 길,
잔치 국수를 생각하니 군침이 돈다는
이목 형의 투정(?)을 무시할 수 없어
대구-포항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와룡 톨게이트로 빠져나와
국수집이 있는 영천 금호 사거리에 닿았다.
수 분을 기다린 뒤 음식이 나오자
이목 형 왈,
'이거 먹으로 포항에서 왔어요.'
도우미 아줌마가 놀라는 기색이다.

근데, 형은 속이 안 좋은가 보다.
끝까지 다 드시질 못하고 수저를 놓았다.
난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공기밥까지 한 그릇 비웠는데.....

메모 : 2005.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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