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빠리 여행 둘째날

여행 이야기

by 우람별(논강) 2023. 8. 7. 21:15

본문

여행을 시작하는 시간은 매일 오전 7시경으로 정했다. 아내는 평소 늦잠을 즐기고, 나는 소싯적부터 아침형 인간이라 생체리듬이 우리 부부는 매우 다른데 여행 기간만큼은 나한테 맞추기로 한 것이다. '배려'라기보다는 궁여지책 '소위 본전 찾기' 라고 해야 하리라. 빠리만 오면 힘이 넘쳐난다는 아내는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다. 걷기조차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빠리 여행 7, 8일간 평균 걸음수가 2만보를 넘기니까 말이다.^^
 

튈르리 공원, 아주 넓은 마로니에 숲과 꽃밭 놀이시설이 눈에 띄는 곳이다. 1564년 만들어진 튈르리 공원은 앙드레 르 노트르(André Le Nôtre)가 자연과 과학의 조화를 기하학적으로 표현하려고 설계한 공원으로 왕비 카트린 드 메디치가 튈르리 궁전과 이탈리아식 정원을 만들게 하면서 만들어졌다. 그 후에 앙리 4세가 추가로 양잠장과 오렌지 농원을 만들었고, 지금은 오렌지 농원 자리에 오랑주리 미술관이 있다. 남북으로 길게 늘어서 있는 테라스는 과거 귀족들의 유흥장이었다고 하는데, 특히 센 강변을 따라 있는 남쪽의 테라스에서 바라보는 전망이 매우 아름답다. 최근에는 밤나무와 라임나무 정원이 조성되고, 조각가 마이욜(Aristide Maillol)의 브론즈상과 그리스, 로마 신들의 조각상이 놓여 있다. 한여름의 튈르리 공원 7~8월에는 이곳에 놀이 기구들이 들어서서 관광객들을 맞이한다. (인터넷 자료 이용)

튈르리역에서 친절한 역무원의 도움을 받고 소정의 비용을 투자하여 만능차표인 나비고(Navigo)를 만들어 충전해 두었다. 빠리 근교의 모든 교통수단을 언제 어디서든 이용할 수 있는 수단으로서 최고다. 콩코드 광장에서 72번 버스를 타고 미라보다리까지 이동할 때 처음으로 그것을 사용했다. 여행 마지막날까지 그 이용가치를 충분히 실감한 만큼 빠리 여행의 필수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라보 다리를 건너기 전에 길가의 카페에 들러 크라상(빵)과 주스를 사서 마시는 여유를 즐겼다. 제법 많은 사람들이 들어차 있었다. 동양에서 온 사람이라서 우리에게 잠시나마 시선을 줄 법도 한데 무관심하다. 관광객들이 워낙 많은 관광지라서 그러려니 하지만 대체로 이방인들에게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무심한 사람들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미라보 다리를 가로지르는 한 여인의 달리기가 여행객인 나와는 대조적이다. 느적느적 급할 게 없는 나, 왼쪽팔뚝에 측정기구로 보이는 무언가를 차고 죽자사자 달리고 있는 여인, 저렇게 오래 달려도 되는 체력을 갖고 있음이 그저 부러울 뿐이다. 얼마 전 급한 일로 100미터 정도 빨리 달려야 할 일이 있었는데, 다리가 붕붕 떠있다는 느낌이 들어 불안하다못해 황당한 적이 있는 나로서는 더욱 그렇다.

미라보 다리 위에 서서 나도 젊은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1880~1918)의 흉내를 한번 내볼까? 그가 쓴 시의 전문을 여기에 적어 본다.
 
미라보 다리 아래 센강이 흐른다/ 오 나의 연인이여/ 나를 잊지 말아요/ 어찌 기쁨은 늘 괴로움으로 이어지는지!/ 밤마다 울리는 시계탑 종소리/ 가는 세월 속에서 나만 홀로이

우리 손을 꼭 잡고 얼굴을 마주하자/ 미라보 다리 아래서/ 꼬~옥 포옹을 하고/ 아쉬움 흐르는 센강에 시선을 묻는다/ 밤마다 울리는 시계탑 종소리/ 가는 세월 속에서 나만 홀로이

흐르는 강물처럼 우리 사랑도 흘러간다/ 그 사랑마저 떠나는데/ 가난은 매 마찬가지로 더디기만 하고/ 희망은 왜 이리 들쑥날쑥한지/ 밤마다 울리는 시계탑 종소리/ 가는 세월 속에서 나만 홀로이

어제와 오늘, 그렇게 일주일이 지났구나/ 지난날은 추억으로 남고/ 떠난 사랑은 돌아오지도 않는데/ 미라보 다리 아래 센강이 흐른다/ 밤마다 울리는 시계탑 종소리/ 가는 세월 속에서 나만 홀로이

아폴리네르의 마음을 빼앗아간 마리 로랑생은 당시 어떤 여인이었을까 궁금해진다. 피카소의 소개로 만난 여류화가 마리 로랑생, 그녀와 헤어질 때 쓴 시가 바로 <미라보 다리>라고 하는데..... 여자의 뒤꽁무니를 쫓아다니며 연시와 소설을 썼으며 문인들이 많이 모이는 카페를 들락거렸던 그는 얼핏 봐도 예술가의 면모와 개성이 뚜렷한 만큼 여인들에 대한 애착과 미련을 시로 남겼을 테고, 그 절절한 마음이 가슴에 새겨지면서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게 된 것이리라. '밤마다 울리는 시계탑 종소리/ 가는 세월 속에서 나만 홀로이'는 노래의 후렴구처럼 홀로 남은 시적 화자의 신세를 더욱 외롭게 만들고 있었다.

 

강속에 놓인 섬(시뉴섬)을 걸어보기로 했던 계획은 취소되었다. 올림픽을 앞둔 시점이라 그런지 출입을 통제하고 있었다. 유유히 흐르는 강을 따라 걸어가며 눈에 보이는 자유의 여신상, 에펠탑을 건너다 보는 사이에 우리는 어느덧 그루넬 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아침 이른 시간이라, 여객선은 보이지 않고, 작업용 배가 간혹 강을 오르내리고 있다.
 

눈에 보이는 다리가 바로 비라켐 다리이다. 파리의 센(세느)강을 가로지르는 다리가 37개인데 그 중에 가장 멋진 다리라고 아내는 말한다. 영화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곳이라 한다. 가까이 가서 자세히 보아야 그 가치를 알 것 같다.

비라켐 다리 중간에는 이런 소공원 같은 공간도 있다.
 

비라켐 다리 위에는 사진을 찍는 커플들이 유난히 많았다. 유명 장소라서 그런가 보다. 어느 젊은 커플에게 다가가 사진을 찍어 주는 친절을 베풀었더니 우리 부부도 찍어주겠다고 해서 에펠탑을 배경으로 나란히 자세를 잡았다. 그런데 사진이 너무 어둡다. 뒷배경이 너무 밝으면 피사체가 어둡게 나오는 게 당연하긴 하다.
 

걷고 걸어서 사요궁 테라스에 도착했다. 에펠탑을 배경으로 사진찍기에 최고의 장소라고 해서 사람들이 몰려드는 곳이다. 사람들이 많이 몰려드는 곳에서는 소매치기를 주의하라는 말을 무수히 들어왔지만 정작 그 피해자가 내 자신이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아내가 멘 백팩에 들어있는 현금지갑을 쥐도 새도 모르게 누가 가져간 것이다. 보호자격인 내가 옆에 있었는데도 전혀 감지하지 못했던 거다. 코를 베어가도 모를 정도의 교묘한 소매치기라서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어쩌지?’
 

이 카페에서 쥬스를 사 마실 때만 해도 지갑이 가방 속에 있었다. 음료수 비용을 지불하고 나와 사요궁 테라스로 다시 옮겨 사진을 찍다가 어느 순간에 당한 것 같다. 사요궁 테라스에서 사진을 여러 장 찍고 지하철 타고 개선문 광장으로 나오고 나서야 아내는 뒷가방이 열려있음을 알았다. 놀란 아내가 그 안을 뒤지고 뒤져봐도 환전해 놓은 돈(350만원을 유로화로 환전한 것)이 지갑채로 사라져 버렸음을 확인하는 데는 시간이 그리 걸리지 않았다. 혹시 카페에서 음료비를 지급하고 지갑을 두고 나온 것이 아닐까 싶어 다시 지하철을 타고 카페에 들러 CCTV까지 돌려 봤지만 거기는 없었다.  
 

에펠탑과 트로카데로 정원을 배경으로 
 

이렇게 열심히 사진을 찍다가 어느 순간에 당한 소매치기, 직접적으로 당하고 보니 정신이 번쩍 드는 것 같다. 더이상 남의 일이 아니었다. 현금은 하나도 없고 비자카드 하나 달랑, 이것으로 어떻게든 1주일을 버텨야 하는데 괜찮을까? 이러다가 여권마저 잃어버리면 어쩌지?
 

빠리의 랜드마크 에펠탑은 파란 하늘과 뭉게구름 아래서 그 독특한 위용을 보여주면서 여행 첫날의 도난 사건으로 의기소침해 있던 우리를 위로해 주고 있었다. 그래, 더 이상 소매치기 당한 것 때문에 마음이 불편해져서는 안될 일! '호사다마' 아닌가 그러려니 받아들이고, 몸 다치지 않고 그나마 여권은 잃지 않았고 비상용 카드도 있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그래, 이곳 빠리까지 와서 들뜬 기분을 잡칠 수는 없는 일이다. 여행하면서 느끼는 기쁨과 감동으로 그 위안을 삼자. 저 많은 군상들도 우리를 위로해 주고 있잖니? 그래, 그래, 그래, 
 

개선문 광장으로 통하는 지하도
 

에뜨왈 개선문이다. 튈르리에 있는 카루젤 개선문과 라데팡스에 있는 신개선문 중간에 위치하고 있다. 높이가 50미터 폭이 약 45미터로 1806년 오스텔리츠 전투에서 승리한 나폴레옹 1세의 명령으로 세워졌다. 나폴레옹 1세는 자신이 만들어 놓은 이 개선문을 살아있을 때는 통과하지 못하고, 죽은 후에 그의 유해가 개선문 아래를 지나 빠리로 귀환해 앵발리드 돔 교회 아래에 매장되었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 때는 독일 점령에서 빠리를 해방시킨 드골 장군이 이 문을 통해서 행진하기도 했다. 개선문에는 전투를 묘사하는 그림들과 전투의 이름, 희생된 용사들의 이름 등 다양한 것들이 새겨져 있다.(인터넷 인용)
 

개선문을 겉에서만 봐서는 그 진면모를 알 수 없다. 수백 개의 계단을 밟으면서 뱅글뱅글 돌고 돌아서 개선문 꼭대기에 올라가 봐야 빠리 시내의 모습을 눈아래 내려다보며 빠리란 도시의 매력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힘들게 올라온 보람을 느끼는 순간이기도 하다.
 

개선문으로부터 뻗어나가는 방사형의 도로는 모두 12개라고 하는데, 곧게 뻗은 도로에 건강하게 자라고 있는 가로수가 시원함을 더해주고 동서남북 막힘 없이 탁 트여 있어서 전망대로서의 개선문 가치를 더욱 높이고 있다. 오른쪽 부분 살짝 높은 위치에 몽마르트가 멀리 보인다. 며칠 뒤면 가 보게 될 장소다.
 

1950년부터 1953년까지 한국전쟁에서 희생 당한 사람들을 위로하는 내용도 개선문 아래 어느 지점에 이렇게 눕혀진 채 새겨져 있다. 밟고 지나가기 쉽긴 하나 관광객들의 동선을 고려한 배려가 엿보여서 괜찮다.
 

점심 식사는 숙소 가까이에 있는 한국식당 <잔치>에서 해결했다. 우리나라 사람들보다는 한식을 좋아하는 현지인들이 많이 찾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우리는 이 식당에서 떡볶이, 채소전, 김치찌개 등을 시켜서 맛있게 먹었다. 소주 생각이 저절로 나서 그 유혹을 견디지 못하고 내 가방에서 슬그머니 꺼내서 한 잔 했는데 아내의 핀잔이 뒤따른다. 주인의 눈치는 물론 주변 손님들에게 폐가 될텐데 어찌 그리 아무데서나 그렇게 마시냐는 눈치다.  
 

점심 식사를 하고 잠시 휴식을 취하려고 숙소로 돌아왔다. 교통이 편리하니 수시로 드나들 수 있어서 좋다. 숙소의 계단이 인상적이어서 사진에 담았다. 계단을 이용하기엔  너무 가파르고 좁아서 불편하다. 어설픈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면 그나마 편리하다. 두 명도 겨우 탈 정도의 크기밖에 안 되는 엘리베이터, 문이 닫힐 때 들리는 철커덕 소리는 아주 옛날식 엘리베이터임을 실감케 하지만 교체하지 않고 즐겨 사용하는 것 같다. 오래된 것을 더 소중히 여기는 프랑스인들의 우직함이 드러나는 부분인데 나는 그들의 문화를 존중하지 않을 수 없다. 편리하고 새것만이 능사가 아님을 아는 문화인들이라면 안다. 결코 흉볼 수 없을 것이고 오히려 더 옛것을 선호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방돔 광장은 빠리에서 가장 부티 나는 장소 중의 하나로, 광장 근처에는 이제까지 수많은 부호와 명사들이 살았던 것으로 유명하다. 프랑스를 찾는 헐리우드 스타들이 묵거나, 97년 여름 ‘다이아나’ 황태자비가 마지막으로 묵었던 곳으로 유명한 ‘리츠호텔’이 자리하고 있다. 나폴레옹 1세가 1805년 12월 오스트리아와의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것을 기념하여 제작한 방돔 탑 위에는 나폴레옹 1세의 동상이 서 있다.
루이 14세의 기마상을 세우기 위해 망사르(Mansart)가 설계한 광장이다. 원래 광장의 이름도 루이 대왕이라는 뜻의 '루이 르 그랑(Louis-le Grand)'이었다. 그러나 프랑스혁명 때 기마상은 파괴되었고 나폴레옹 1세가 원기둥과 자신의 기마상을 새로 세웠다. 원기둥 위의 모티브는 앙리 4세, 왕가의 문장인 백합꽃, 하사관 모습의 나폴레옹으로 시대에 따라 바뀌었다. 이후 토지의 원래 주인이었던 방돔 공작의 이름을 따서 '방돔 광장'이라 부르게 되었다. 현재는 1874년에 복원된 나폴레옹 기마상의 복제품이 놓여 있다. 방돔 광장은 오페라 극장과 튈르리 정원 사이에 있다. 광장 주변에는 고급 호텔들과 보석 가게, 유명 브랜드 숍들이 늘어서 있어 빠리 상류층이 즐겨 찾는다.(인터넷 자료)

 

마들렌 성당, 올림픽을 앞두고 역시 공사 중인지 리모델링 중인지 출입이 통제되고 있었다. 건축의 외관이 산뜻한 색으로 변화되고 있었다.
센강의 우안(右岸), 빠리의 콩코드광장으로 통하는 루이알 거리 끝, 마들렌 광장의 정면에 서 있는 높이 약 30m, 정면 너비 43m, 길이 108m의 로마 신전(神殿)풍의 대건축물이다. 1764년에 착공되었으나, 중도에 공사가 중단되어 나폴레옹 시대에는 기념관이 되었는데, 1806년에 현상 공모에서 2등으로 뽑힌 비니옹의 설계에 따라 1842년에 완성되었다. 나폴레옹 몰락 후 다시 성당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외벽 주위에는 코린트식 원주가 있고 성당 내외에는 조각과 회화가 장식되어 있는데, 전벽(前壁)을 장식한 르메르의 조각 《최후의 심판》 등 유명한 작품이 많다.(인터넷 자료)
 

아내는 빠리를 찾는 이유 중에 하나가 홍차를 구입하기 위해서다. 올 때마다 들르는 가게가 있는데 올해도 예외는 아니다. 마리아주 쁘레르 홍차를 사들고 나왔다. 
 

빠리 한복판에 위치한 유서 깊은 콩코드 광장. 센강 오른쪽 기슭의 샹젤리제 거리와 튈르리 정원 사이에 펼쳐져 있으며 역사뿐 아니라 위치, 규모 면에서 빠리 시내의 수많은 광장들 중에 가장 뛰어나다. 광장은 사방이 시원하게 트여 있어 빠리 시내 주요 볼거리를 한자리에서 감상할 수 있다. 서쪽으로는 샹젤리제 거리에서 개선문에 이르는 광대한 전망이 펼쳐지고, 그 반대 방향으로는 튈르리 정원과 루브르 궁전의 우아한 경관이 보인다. 북쪽으로 마들렌 교회, 남쪽으로 앵발리드 방면의 전망도 아름답다.
콩코드 광장은 빠리 중심가의 유명 관광지일 뿐 아니라 프랑스 역사상 굉장히 의미가 있는 곳이다. 팔각형으로 구획된 이 광장은 루이 15세의 기마상을 장식하기 위해 1755~1775년에 걸쳐 조성되었다. 당시에는 ‘루이 15세 광장’이라 불렸으며, 1770년에는 왕세자(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결혼식이 거행된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면서 광장의 역사는 피로 얼룩지게 된다. 1792년에 기마상이 파괴되고 이름도 '혁명 광장'으로 바뀌었다. 다음 해인 1793년에는 단두대가 놓여 왕족과 귀족, 성직자 등 1343명이 처형당했다. 루이 16세, 마리 앙투아네트, 혁명가인 로베스피에르와 당통마저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단두대가 있던 자리에는 분수대가 생겼다.
1795년 비로소 공포 정치가 끝나고 광장의 명칭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담아 '화합'을 뜻하는 콩코드로 바뀌었다. 현재 광장 중앙에는 1833년 이집트의 총독이었던 무하마드 알리 파샤가 루이 필리프 왕에게 선물한 오벨리스크가 우뚝 서 있다. 이집트의 람세스 2세 때 제작된 것으로 룩소르 신전에서 옮겨왔는데 운송 기간만 약 4년이 걸렸다고 전해진다. 오벨리스크의 높이는 23m에 달하며 상형문자가 새겨져 있다. 오벨리스크의 좌우에는 로마의 산 피에트로 광장을 본뜬 분수가 있으며, 8개의 모퉁이에 코르투아 플라디에가 만든 여신상이 놓여 광장의 아름다움을 더한다. 이 여신상들은 각각 마르세유, 낭트, 리옹, 보르도 등 프랑스의 8대 도시를 상징한다. 탑, 조각, 물이 만들어 내는 광장의 야경은 격동의 역사를 씻어 내듯 평화롭고 낭만적이다.[네이버 지식백과] 콩코르드 공원 [Concorde Place] (저스트고(Just go) 관광지)
 
콩코드 광장을 가로질러 오랑주리 미술관에 도착했다. 사람들의 행렬이 길게 늘어서 있는데, 우리는 뮤지엄 패스를 소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기다리지 않고 입장할 수 있었다.

오랑주리 미술관 건물은 본래 1852년 오렌지 나무 온실(Orangerie)로서 튈르리 정원 안에 지어진 것으로, 나폴레옹 3세 시절부터 다양한 전시 공간으로 이용되었다. 1922년 모네가 자신의 수련 그림을 이곳에 기증하기로 계약하면서 미술관은 모네의 거대한 작품을 전시하기 위한 공간 설계에 들어간다. 이후에도 몇 차례의 리노베이션을 거쳐 2006년 재개관했다.(인터넷 자료)
 

이 미술관의 주인공은 1층에 전시되고 있는 모네의 '수련' 여덟 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작품의 굽은 캔버스를 그대로 걸 수 있도록 전시실이 타원형으로 생겼다. 사실 모네는 수련을 굉장히 즐겨 그렸기에 좀 유명하다 싶은 미술관은 그의 수련 그림을 한 점씩 소장하고 있는 것이 보통이지만, 오랑주리 미술관에서는 한 점도 아니고 무려 여덟 점을 상설 전시하고있다.
지하에는 장 발터와 폴 기욤 컬렉션이 있는데 여기서는 피카소, 마티스, 르누아르, 세잔, 루소, 모딜리아니 등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화가들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작은 규모의 미술관 치고는 의외로 알짜인 셈.(인터넷 자료)
 

퐁네프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공간이다. 다리 중간중간에 이렇게 쉴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두었다. 센강의 다리 중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다.

시떼섬의 가장 서쪽끝에 있는 베르 갈랑, 휴식하기 좋고 연인들끼리 프로포즈하기 좋은 공간이다. 여기서 좀 쉬다가 유람선을 타면 된다.

 

유람선 이름은 ‘브데뜨 뒤 퐁네프’ 1시간 정도 탔는데 그다지 길지도 짧지도 않은 시간이라 센강의 바람결과 함께 감미롭고 만족스러웠다. 야경을 보고 싶었는데 못봤다. 한 시간 정도 더 늦게 승선했어야 했다. 한여름 빠리의 밤은 오후 9시 30분 일몰 후라야 시작된다. 북유럽의 백야만큼은 아닐지라도 빠리에서도 여름밤은 너무너무 짧은 것 같다.

저녁 9시 30분에 하선했는데, 곧 해가 지는 시간이긴 하나 주변이 환하다.
퐁네프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튈르리역에서 내려 숙소로 돌아오니 피로가 갑자기 느껴졌고 곧 잠자리에 들어야 했다. 이날 걸은 걸음수는 거의 3만 보였다. ‘내 다리 장한 다리’

'여행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빠리 여행 넷째날  (0) 2023.08.10
빠리 여행 셋째날  (0) 2023.08.09
빠리 여행 첫날  (0) 2023.08.06
파리 여행(7박 9일)을 앞두고  (0) 2023.08.03
오랜만의 나들이(반야사, 물한계곡, 월유봉)  (0) 2023.07.26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