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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던 동네 어귀

오늘 나는

by 우람별(논강) 2009. 9. 28. 1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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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동 14단지 동생 집에서 풍성한 아침을 먹고,

(신선한 참게에서 우러난 게장국의 맛은 최고였음,

청국장, 조기, 고등어 등 남주 동생의 음식솜씨에 다들 탄복을 함.

어머니의 음식 솜씨에 버금가는 실력임을 인정했음.)

어린 시절에 살던 동네인 강동구 마천동 일대를 둘러보기로 하고,

10시 경 동생의 집을 나와서 올림픽대로에 차를 올렸다.

옆에는 든든한 이원장이 타고 길안내를 하고 있다.

 

거여초등학교, 마천동, 천마산 길,

경기도 광주군 서부면 감이리 널문리 마을,

마을 위 남한산 중턱엔 산성칸트리클럽 골프장이 성업 중이고,

그 위 산꼭대기로는 딱딱한 성곽이 드러나 있다.

우리가 살던 집은 헐려서 없고, 앞집은 절로 변했다.

대불사라는 이름의 절인데, 가정집에 3개의 불상을 모셔놓았다.

주지 스님은 성각(成覺) 스님(본명 허인복, 60세)인데,

우리를 보자마자 알아보면서 우리 형제 이름까지 기억하고 있다.

반갑다면서 들어가 차나 한잔 하고 가란다.

 

41년간 같은 장소에서 살아 온 이야기,

7남매의 맏아들, 생계를 꾸려가던 이야기,

그리고 1976년부터 시집살이를 시작한 형수,

친하게 지냈던 허인배 형(분당 정자동 거주)과의 통화

성각 스님의 30년 가까운 스님 생활,

그간에 살아온 이야기를 드문드문 들을 수 있었다.

스님의 말투치고는 다소 세속적이라는 느낌도 있지만,

있는 그대로의 모습 같아서 더 좋았다.

툭툭 내뱉는 말 속에 담긴 그간의 삶을 상상했다.

분당 정자동에 사는 인배형은 혈압이 높아서 걱정이란다.

대한불교 본원종(本原宗)에 대해서 물으니

소승불교가 아닌 대승불교를 지향한다는 설명을 들었다.

 

우리가 놀던 광활한 놀이터가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서 형편없이 작아졌고,,

당시 경제기획원 소속 땅이자 개발제한구역이었던 곳도

작년 9월부터 아파트 공사가 한창이었다.

아름드리 미루나무가 우뚝 서서 긴 그늘을 드리웠는데,

언젠가 벼락을 맞아 흔적없이 사라졌다 하고,

그 맞은 편의 소나무 한 그루만이 옛 위용을 외로이 지키고 있다.

논이었던 곳은 모두 공장 건물이 들어섰거나

아파트 부지가 되어 한창 공사진행 중이다.

우리 추억의 땅은 이미 그렇게 묻혀가고 있었다.

그나마 남아있는 몇 가구의 집도 8차선 도로가 나면

모두 철거될 예정이라는 설명을 들었다.

그 누구를 탓할 수 있으랴?

 

작은 동네였지만 우리 살던 집 주변에는

또래 친구는 물론, 선후배들도 있었다.

우리 앞집의 한 해 위, 인배 형은 늘 웃으며 나를 대했다.

내 동생들도 잘 대해 주었고, 남주가 귀여웠던지 '딱주'라고 놀렸다.

어려운 살림에도 구김살 하나 없는 착한 형이었다.

2년 후배인 신석기란 놈은 덩치만 믿고 나한테 곧잘 덤볐다.

언젠가 한 번 혼내주리라 마음 먹었지만 덩치 작은 게 한이었다.

안되겠다 싶어서 툭하면 동생을 데리고 집 뒤의 무덤 앞에 가서

녀석을 혼내주겠다는 일념으로 이단 옆차기 연습을 수도 없이 했다.

어느 날, 동네 친구들과 여럿이 어울려 놀고 있을 때,

버르장머리 없는 신석기란 놈은 내 눈에 또 심하게 거슬렸고,

결국 벼르고 벼르던 싸움이 시작되었다.

맡붙어 싸우면서 내가 그를 발을 걸어 넘어뜨리게 되었고,

넘어지면서도 그 큰 주먹으로 내 눈두덩을 올려치던 그,

나는 맞으면서도 그의 목과 어깨부분을 제압, 두 팔로 힘껏 휘감아

짖누르고 있는데, 어느 새 다가온 동생 범주는 짱돌로 그의 머리를.....

마치 약속이나 한 듯한 동생의 짱돌 출현은 효과 만점이었다.

녀석은 겁에 질려 집으로 도망가 버렸고 그렇게 혈투는 끝났다.

신석기란 놈은 다시는 나에게 덤비지 않았고,

동생에게도 꼬리를 내렸으니까. ㅎㅎㅎㅎㅎ

 

집앞을 흐르는 폭 좁은 개울물은 여전했다.

비가 많이 올 때면 그 개울물이 불어서 집앞의 축대가 무너지지 않을까

늘 노심초사하면서 비 멎기만을 간절히 바라던 장면도 생생하다.

당시 산성 칸트리 클럽이라는 골프장이 건설되고 있었는데,

비가 조금만 내려도 흙탕물이 겁나게 내려와 집앞 축대를 위협했던 것이다.

그것은 지금 생각해도 엄청난 동네의 생존권 위협이었다.

우리집 바로 뒤에까지 골프장 철조망이 내려와 있었고,

동네 개구장이들은 홀 주변의 보드라운 잔디의 촉감이 좋아

밤마다 철조망을 넘어서 그곳을 찾아 뒹굴곤 했다.

또 어떨 때는 철조망 주변에 숨어 있다가

그 보드라운 잔디 가까이로 굴러오면 철조망을 넘어서

그 공을 낼름 주워 갖고 다시 철조망을 넘어 잽싸게 도망가곤했다.

골프 경기를 즐기던 그 당시 고관대작(?)들은 그 상황에서

얼마나 황당해 하고 화가 났을까를 생각하면 통쾌한 마음도 있다.

생존권의 위협 속에서 살던 사람들의 복수라고나 할까.....

 

개울 건너엔 석형이란 친구집이 있고,

당시는 술과 물건 파는 가게집이었는데,

얼마전까지 주인아저씨가 거기서 살았는데

3년 전에 세상을 뜨고, 그 큰딸도 병으로 죽었다고 한다.

개울을 사이에 둔 시멘트 다리를 중심으로 행해졌던 온갖 놀이의 추억

구슬치기, 딱지치기, 자치기, 다방구, 숨바꼭질, 깡통차기 등의 장면이 생생하다.

옛 추억의 장소인 그 현장을 더 둘러보고 싶은 마음에,

우리 형제는 성황당 있던 쪽으로 가보기 위해 좁은 길을 걸었다.

옛날 그대로의 길이지만 더 좁아 보였다.

좁은 길이 끝날 무렵 왼쪽엔 무밭이 그대로 있었고,

시멘트 덩어리의 흉칙한 건물이 있던 자리엔

요양원으로 보이는 무슨 시설이 섰다.

 

37년 전의 추억이 고스란히 스멀스멀 되살아났다.

중1(1972년), 어느 여름날

나는 중2 두 명, 국민학교 3년 두 명과 함께

캄캄한 밤길을 걸어서, 그 성황당 길을 걸어서

천마산 기슭의 한 고개를 돌아오라는 벌을 받던 장면이었다.

성황당 앞에 바둑알 3개, 천마산 고갯마루에 바둑알 3개를

갖다 놓고 돌아오라는 동네 형님의 벌이었던 것이다.

다음 날 아침 일찍 가서 확인을 하고 이행되지 않을 때는

각오하라는 엄포와 함께 우리 세 명은 바짝 긴장을 하고

그 무서운 성황당 길과 고갯길을 통과하기 위해

동생들을 데리고, 온갖 노래를 부르면서 지나갔던 기억이 새롭다.

'꼬꼬댁 꼬꼬 먼동이 튼다. 복남이네 집에는.....'

공포를 이겨내기 위한 자구책으로 불렀던 노래들,

아직도 선연히 들리는 듯한데.........

 

동네 인근 딸기밭에서 공부하던 시절,

사법고시 준비 차 딸기밭 움막을 빌려서 공부하던 분(고려대 법대 복학생)이

그의 친동생 김성호(중2), 성호의 이웃 친구 김영배(중2)

김영배의 한 해 후배인 나(중1)를 데리고 지냈던 시절로 돌아간다.

그 때 우리는 매일 저녁 딸기밭에 모여 밤 11시까지 공부를 했다.

대학생은 고시공부를, 우린 중학교 과정의 공부를 열심히 했다.

시간표에 맞춰서 통제를 받으면서 하는 공부인 만큼

약간의 긴장도 느끼면서 제법 열심히 공부하던 시절이었다.

나의 성적은 그 당시 반에서 중상위권이었는데 그분과 공부를 하면서

반 석차 2등까지 올랐었으니까. 공부의 재미도 느꼈고,... 

다소 지겹던 공부였지만 대학생 형 때문에 공부도 즐거웠다.

가끔씩 우리에게 들려주던 이야기도 잊을 수 없다.

소름끼치게 무서웠던 '드라큐라' 이야기가 생생하다.

'알함브라의 궁전'과 같은 클래식 기타의 연주 실력은

우리들의 귀를 즐겁게 했고, 악기에 대한 관심도 불러일으켰다.

또 유단자의 바둑 실력을 보였던 고수이기도 해서

우린 일찌기 바둑까지 배울 수 있었다.

새까맣게 깔고 두던 바둑, 나중에는 그분에게 다섯 점 깔고 두면

이길 수 있을 정도의 실력까지 오를 수 있었다.

트럼프로 하는 카드 놀이도 그분에게 배웠다.

아, 정말 대단했던 분, 오늘 그 분이 보고 싶다.

사법고시에 합격해서 지금쯤 고관대작이 되었을까?

아니면 실패를 해서 불행한 삶을 살았을까?

.........................

 

성황당은 없어졌지만 금줄이 걸렸던 나무는

잘려지지 않고 그대로 검은 빛으로 자라고 있었다.

그 나무 뒤로는 약간 높은 곳에 공장 하나가 서 있고,

조금 더 가니 성황당길이란 이정표가 서 있는데,

이 길이 성황당이 있던 길임을 증명하고 있을 뿐,

"형, 전어란 고기를 들어 보셨어요?"/ "좋아하지."

"우리 동네 가서 가을 전어 맛을 한번 보여드릴게요."

"좋지. 근데, 우리 조카들이 좋아할까?"

아쉬움을 뒤로 하고, 널문리 마을을 벗어났다.

동생이 현재 살고 있는 대치동으로 차를 몰았다. 

오늘 만나기로 했던 기훈이는 여전히 연락이 안 된다.

'무심한 놈, 어찌 살아가려고.....'

 

집에 들어가니 한결과 다운이가

중간고사 대비 시험공부를 하다가 나를 맞는다.

한결이(고1)는 키도 많이 컸고, 인물도 한층 더 나 보였다.

서글서글하고 인상이 좋아서 늘 만나면 기분이 좋아진다.

아버지께 응석을 부리는 모습도 보기에 좋다.

부자간에 허물없이 지내고 마음도 통하니 최고다.

다운이(중2)는 사춘기인지 요즘 자기 방에 들어가서는

좀처럼 나오지 않고, 특별한 말이 아니면 말도 잘 안 한다고 한다.

늘 느끼는 것이지만 한결, 다운 남매의 모습은 정말 보기 좋다.

출중한 인물의 동생과 미녀인 제수의 합작품(?) 아니던가?

"동생, 다운이의 인물의 반은 예쁜 눈에서 비롯되는 것인 만큼

절대 쌍커플 수술을 하지 않게 해라."

 

서울에서 구미로 돌아오는 길,

중부고속도로, 영동고속도로,

중부내륙고속도로를 이어 달렸다.

혼자 오는 길이라 그런지 졸음이 몹시 방해를 했다.

세 번이나 길가에 세우고 잠을 자다가 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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