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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길 30리를 걸으면서

오늘 나는

by 우람별(논강) 2009. 9. 20. 2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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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나는 산길 30 리를 걸었다.

밀양 표충사 뒷산인 천황산, 재약산을

가까운 친구인 순균(대구교육청)과 함께 오르내리면서

하루 종일 많은 시간을 공유할 수 있었고,

표충사 대광전 앞 누각의 마루 위에서

비껴가는 햇살과 산에서 불어오는 통바람을 맞으면서

하루의 시간을 시원하게 정리할 수 있었다.

 

아침 7시 칠곡 IC를 빠져나와 밀양 IC까지

한 시간 만에 달릴 수 있음이 새삼 신기한 듯,

순균은 이렇게 가까운 곳에 있는지 몰랐다는 반응을 보인다.

밀양이란 동네는 언제든지 쉽게 올 수 있다는 결론,

친구는 전국의 웬만한 산은 거의 다 가 봤지만

이곳 천황산, 재약산은 대학교 1학년 때 와 보고는 30년 만이란다.

나도 대학교 2학년(1979년) 때 복음학교 선생님들과

고사리분교를 찾았던 기억이 있기에 맞장구를 쳤다.

친구와 30여 년 만에 찾게 되는 길인 만큼,

의미를 부여하면서 표충사 뒤 공터에 차를 세웠다.

아직 8시가 약간 넘은 시각, 사람들이 거의 없다.

일찍 산행에 나서는 사람들이 드물다는 걸까?

 

순균의 무거운 짐을 내 작은 배낭에 덜어 채웠다.

등산화 끈을 단단히 고쳐 신고 등산지팡이를 꺼내 들었다.

햇빛이 강하니 차양 넓은 모자를 하나 눌러 쓰고,

천황산(天皇山)을 향해서 천천히 발을 옮겼다.

가을 하늘의 쾌청함이 표충사 자락에 가득하고,

아침 공기가 더없이 신선하고 상쾌하다.

"야, 좋다. 친구가 좋고, 산이 좋고, 기분도 최고."라며

환하게 웃어대는 친구의 미소가 또 마냥 좋다.

 

전날, 토요일 오후 아내와 가을의 코스모스를 보러가자며

길을 나섰다가 우연찮게 예천 삼강나루를 찾게 되었는데,

그 분위기에 취해서 막걸리를 몇 잔 마셨고,

그 술 한 잔에 취해서 순균에게 전화를 걸어

최근의 안부를 주고받는 과정에서, 빨리 만나보자 했고,

다음날 바로 등산을 가자는 것에 의견의 일치를 보고

정해진 곳이 밀양의 천황산, 재약산이었던 것이다.

 

친구는 나에게 오늘 둘러보게 될 산의 약도를

프린트로 출력한 것을 나에게 건네주었다.

약도 위에는 제목도 붙어 있다. '2009.9.20(일) 이권주와 함께'

걸어야 할 길에는 형광펜이 따라가며 그여 있고,

주요 지점은 빨간 싸인펜으로 동그라미를 쳐 놓았다.

표충사, 천황산, 천황재, 재약산, 고사리분교에 동그라미다.

천황재는 포장마차가 있어서 동동주, 라면, 오뎅 등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표시도 있다.

친구의 정성이 고마워서 고이 접어 호주머니에 넣었다.

이런 친구의 나에 대한 배려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의 아내가 새벽에 일어나 밥을 해서 도시락을 쌌고,

김치찌개를 맛있게 끓여먹을 수 있도록

하나하나 차례차례 준비를 해 두었다는 것이다.

난 그저 감탄만 할 뿐. '숙희씨, 고맙습니다!'

 

가뭄 탓인지, 계곡은 한창 말라 있는 것 같다.

물 흐르는 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는다.

언젠가 절집에 며칠간 머물면서 하루 종일 들었던

차고 시원하기만한 그런 물소리가 아닌 것이다.

여기저기 조금씩 고여 있는 물이 몇 군데 눈에 띌 뿐이다.

계곡 양 옆으로는 아직 녹음이 무성하여 단풍이 들기엔 아직 멀었고,

연속적으로 이어진 숲 그늘 때문에 덥지는 않으나 갈 길이 멀다.

 

계곡 한가운데 우뚝 선 이름 모를 바위 하나,

아무리 세찬 물이 흐른다하더라도 미동조차 하지 않을

그 기세도 대단하거니와 무슨 전설이라도 서려 있을 것만 같다.

계곡 한가운데 우뚝 서있기만 하기엔 아까운 바위인데,

옛 시인 묵객들은 저 바위를 그냥 무심히 지나쳤을까?

바위에 눈길 한 번 더 주고 계속 오르니

한계암(寒溪庵)이라는 조촐한 암자가 우릴 맞는다.

인기척을 내도 아무런 반응이 없는 걸로 봐서 빈 절인가?

공양간을 기웃거려 보니 빈 절은 아닌데, 지금은 아무도 없다.

계곡물을 식수로 쓰고 있는지 연결된 파이프에선 쉴 새 없이

석간수로 보이는 맑디맑은 물이 흘러나오고 있다.

물바가지가 꽤 여럿 준비되어 있는 것만큼이나

찾아오는 중생들을 위한 배려가 푸짐하게 느껴진다.

한 바가지 떠서 들이키니 그 맛은 꿀맛이다.

본격적인 등산에 대비, 물병에 물을 가득 채워 넣었다.

 

갈지[之]자 형식의 지그재그길을 따라 쉴 새 없이 오른다.

서둘지 말고 천천히 오르라는 친구의 충고를 수도 없이 듣는다.

몸에 무리가 되면 멀리 갈 수가 없는 법이니 천천히 가란다.

"아주 잘 걷는데? 근데 너무 앞만 보지 말고

가끔씩 뒤돌아보면서 주변의 풍광을 살필 수 있는 여유를 갖자우."

인생을 살아가는 것도 마찬가지 이치가 아니겠냐며,

주제가 있는 얘기도 친구는 서슴지 않고 들려준다.

 

한참을 오르니 너덜지대가 나타났다.

칼로 난도질을 당한 듯한 돌들이 날선 채 넓게 퍼져있는데,

풍화와 침식을 오랜 세월 받다가 거대한 바위에서 떨어져 나온 돌들일 게다.

이 너덜지대는 일반적으로 통과하기가 쉽지 않은 곳일진대,

등정을 위한 '통과의례 지점'이라 본다면 맞을까?

힘들더라도 어쩔 수 없이 지나야 하는 운명의 너덜지대,

인생으로 친다면 한참 괴로워하고 갈등에 휩싸이는 시기일 테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그 낙원이 아닌 고통의 가시밭길일 것이다.

식물과 나무들이 자랄 수 없는 지대엔 햇살만이 강렬하다.

그런데, 누군가 길을 잃지 않도록 녹색 페인트로 길의 방향을 잡아놓았다.

배려해 주는 마음에 한없이 고마움을 느끼면서 천천히 그곳을 통과했다.

 

너덜지대를 지나 숲길로 접어드니 더 가파른 경사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숨이 차서 가슴이 터질 것 같지만, 걸음을 멈추지 않고 천천히 오른다.

산 능선을 향하는 등산객들의 모습이 한둘씩 늘어나는가 싶더니

젊은 친구 하나 넓은 보폭으로 빨리 지나가는데 길을 터 줄 수박에 없다.

그런데, 라디오에서 나오는 요란한 음악을 틀어놓은 채 흥얼거리며 지나간다.

"등산의 꼴불견이 바로 저런 거야. 어떤 사람은 개를 끌고 등산을 하는데, 그것도 꼴불견이지."

친구의 험담을 앞에 간 젊은이가 들었는지는 모르지만 사실,

'등산 중의 음악 틀어놓기'는 남을 배려하지 않는 몰상식에 가깝다.

 

완만한 산 능선에 접어드니 걸음이 훨씬 가벼워졌다.

아름드리 소나무 한 그루가 우뚝 서서 돌 사이에 강인하게 뿌리를 내렸으나

능선의 대부분은 크고 작은 신갈나무로 뒤덮여 있음을 확인한다.

마지막 남은 그 소나무를 위협하는 듯한 기세로 영역을 넓히고 있는 것 같다.

소나무 숲에서 버티고 살던 그 가느다랗고 초라한 신갈나무가

그 그늘의 틈을 비집고 자라나 드디어 보복의 독기를 뿜고 있는 것이다.

소나무들이 득세했을 능선이 이젠 참나무과인 신갈나무 세상으로 변한 것이다.

넙적한 입을 매달고 그 무거운 그늘을 드리워 소나무를 압도하고 있는 것이다.

순균과 나는 그 참나무 그늘 아래서 잠시 다리를 펴고 휴식을 취했다.

복숭아 2개를 꺼내 준비한 칼로 깎아서 친구는 내게 먼저 준다.

한 입 크게 벌려 물으니, 그 달콤함이 온 몸의 피로를 사르르 녹이는 듯하다.

"행복감이란 바로 이런 것 아닐까, 요즘 누님은 좀 어떠신가?"

"내가 최근 상황을 너한테 얘기를 안 했나? 그럼, 내 얘기 한번 들어 봐라."

하면서 친구가 내게 들려준 얘기는 일일이 여기에 적을 수가 없다.

다만, 어머니의 품처럼 생각해 온 맏누님(68세)의 어려움을

곁에서 지켜보아야 했던 우리 친구 순균이의 그 아픈 마음은

이렇게 틈만 나면 등산을 다니는 것으로 풀고 있다고 했다.

 

다시 배낭을 챙겨 등에 지고 정상까지 오르는 길,

막바지 비지땀을 흘리니 무성한 참나무 숲은 저 아래로 물러서고,

작은 키의 잡목만이 무성한 정상 부근은 일망무제로 사방이 탁 트였다.

높아 보이기만 했던 거대한 암벽도 발아래 있고, 친구와 나만이

사진기를 들이대며 주변을 기록하며 담아두기에 바쁘다.

정상엔 돌무더기를 원뿔 형식으로 누가 쌓아 놓았는데,

그 꼭대기에 작은 크기의 태극기 하나가 바람에 휘날리고 있다.

얼음골 3.3킬로, 재약산 2키로, 한계암 3키로, 표충사 4,8키로

각각의 방향을 가르키고 있는 튼튼한 이정표도 보인다.

그 옆에는 밀양시가 세운 정상 표지석이 부드럽게 서 있다.

‘天皇山’ 세 글자가 세로글씨로 크고 시원스럽게 쓰여 있고,

그 밑은 작은 명조체 가로글씨로 '海拔 1189미터'가 쓰였다.

그 표지석을 배경으로 서로 기념사진을 찍었다.

저 멀리 보이는 재약산이 또 빨리 오라고 손짓하는 것 같다.

 

눈 아래 천황재가 보인다. 내리막길 20분이다.

순균은 시장했던지 여기 어디서 식사를 하자고 하는데,

나무 그늘이 전혀 없으니 조금 참고 저 아래 가서 하자 했더니

그럼 그렇게 하자면서 친절하게 응낙을 한다.

내려가는 길은 경사진 바위 길이라, 여간 조심스럽지 않다.

로프를 잡기도 하고, 지팡이에 의지해서 천천히 내려가는데,

가끔씩 내려온 길을 다시 올려다보니 아득히 높기만 하다.

파란 하늘로 솟아있는 것 같은 하얗고 거대한 바위 덩이가 장관이다.

조금 더 내려가다가 오른쪽 길옆에 있는 조그만 공간을 발견,

그늘을 찾아 들어가 앉으니 마음이 참 편해진다.

 

순균은 아내가 준비해 주었다는 김치찌개 재료를 내어 놓는다.

완벽하다. 조리 순서까지 적어두고 음식 양을 조절해 놓았다.

음식이 싱거우면 소금을 치라는 글씨도 조그만 소금통에 깨끗이 써 놓았다.

이렇게 치밀하게 정성껏 준비한 음식인 만큼

감사하는 마음으로 맛있게 먹어주면

그 정성에 보답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음식을 만져 보기로 했다.

버너에 불을 피워 김치를 볶고, 물을 약간 넣은 다음,

다시 양념 고기와 감자 썬 것을 넣고 한참을 익혔다.

감자가 다 익어갈 즈음에 파, 고추 썬 것 등 마지막으로 양념을 넣고

다시 물을 부어서 펄펄 끓여서 김치찌개를 완성하니 식사준비 완료!

약간 싱거운 것 같아 소금의 양으로 맛을 여러 번 조절했다.

흑미를 섞어 정성껏 지은 영양 만점의 점심도시락 두 통,

큰 통의 것은 나를 주고 작은 통의 것은 본인이 먹겠단다.

덩치 큰 내가 더 많이 먹어야 한다는 것이리라. 웃었다.

'그래, 내가 조금 더 먹지, 뭐. 친구의 마음이 그렇다면.....'

오이도 깎아서 목마를 때 먹으라고 된장과 함께 준비를 했고,

비닐팩에 든 김도 한껏 맛을 더하고 있으니 금상첨화다.

술을 좋아하는 나를 의식해서 준비한 중국술 '마우타이',

그 술을 뚜껑잔에 따라 건네는데, 한잔 들이키니 속이 확 트인다.

김치찌개를 만들기 위해 사용한 가스버너의 효력도 대단했는데,

얼마 전 구입해서 오늘 처음 사용한 거란다.^^

참으로 행복한 점심 식사 시간이었다.

 

배 부르겠다. 술도 한잔 했겠다.

이 세상 부러울 게 하나도 없는 친구와 나는

주섬주섬 주변을 정리한 뒤, 가벼워진 배낭을 짊어지고

흥얼거리면서 천황재로 천천히 천천히 내려갔다.

억새풀의 하얀 수염이 절정기에 보여주는 멋이라고 한다면

지금은 억새풀의 새순이 고개를 내민 지 얼마 안 되어,

반들반들 기름기가 도는 때라 차라리 청순함의 멋이라 해야 맞다.

친구는 그 억새 속으로 들어가 사진을 찍어달라며 보챈다.

 

천황재 쉼터엔 음식을 파는 매점이 있기도 한데,

사람들이 그곳을 찾지 않고 있는지 사고파는 장면은 보지 못했다.

그 앞으로는 억새 숲이 생태공원으로 조성되어 있어 안내판도 있고,

억새 사이로 나무로 만든 길을 만들어 좌우로 감상하기 좋도록 해 놓았다.

억새밭을 배경으로 사진을 몇 판 찍고 등산화끈을 단단히 동여맨 다음

30분 거리의 재약산을 향해서 다시 오르막을 오르기 시작했다.

나무 계단을 한참 오르니 좁은 등산로가 계속 이어지고 있는데,

길에 놓인 바윗돌이 들쭉날쭉, 여간 조심스럽지 않다.

한참을 그렇게 오르다 보니 또 재약산(載藥山) 정상(해발 1108미터)이다.

역시 내 가슴 높이 크기의 작은 표시석이 거기에도 서 있다.

단숨에 1,000미터 이상의 두 산을 정복하니 그 기분이 괜찮다.

15 년 전 어느 겨울날, 강원도의 두타산, 청옥산을 오르던 기억이 새롭다.

그날도 두 산을 동시에 정복했는데, 눈길에 고생을 좀 했었다.

아침 일찍 산에 오르기 시작해서 저녁 무렵에야 하산할 수 있었으니까.

여하튼, 높은 곳을 오르는 성취감과 즐거움은 옛날과 다름없는 것 같다.

 

재약산 발 아래는 사자평인데, 억새밭이 넓게 펼쳐져 있다.

옛날 화전민들에 의해 나무가 베어지고

경작지로 조성되었던 곳이라고 친구는 말한다.

여기서 또 내리고 내리면 고사리 분교가 나타날 것이다.

30여 년 전, 복음고등공민학교 선생님들과 함께 그곳을 방문한 적이 있고,

그 학교 주변에서 1박을 하면서 지냈던 기억이 새로웠다.

처음 그곳을 찾던 날, 비가 소리 없이 이슬처럼 내리는데,

복음학교 선생님들 20여 명이 산길을 줄지어 오르는 상황이다.

그런데 갑자기 내가 경사지고 미끄러운 바윗돌을 밟아 굴러 넘어지는 바람에

수십 길이나 되는 낭떠러지 아래(층층폭포 지점)로 떨어지기 직전의 상황이 되고 만다.

다행히 배낭이 나무에 걸렸고, 겁에 질린 내가 풀 한 포기 잡고 버둥거릴 때,

뒤에 걸어오던 야학 후배인 영어과(79학번) 김종선이 재빨리 다가와

내 배낭을 잡고 천천히 나를 부축해 일으켜주는 바람에 겨우 살아나올 수 있었다.

순간적이었지만 그 김선생이 아니었다면 아마 나는 오래 전에

불귀의 원혼이 되어 어딘가를 맴돌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 이후의 삶은 어쩌면 '덤'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그저 감사할 따름이고, 입가의 웃음을 숨길 수 없다.

 

재약산에서 고사리 분교까지는 약 40분 정도 걸린단다.

길고 길 나무계단을 다 내려온 지점부터 임도를 따라 내려오다 보니

분교가 있던 지점을 놓친 것 같아 지나가는 사람에게 물으니

고사리 분교의 위치를 정확하게 가르켜 준다.

좁은 길로 접어드니 도토리가 바닥에 지천이다.

억척스런 아주머니 등산객들은 이게 웬 떡인가 싶은지

쪼그리고 앉아 다들 도토리 줍기에 정신이 없는 것 같다.

비닐 봉투 안에는 제법 많은 도토리가 담겨져 있다.

친구가 아줌마들에게 약간은 빈정대듯 한 마디 한다.

"다람쥐 먹이인데 그것을 다 가져가면 어찌 합니까?" 하니,

"다람쥐만 먹고 사나요? 사람도 먹고 살아야지요."

돌아보지도 않고 대답을 하는데, 그 억척스러움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어린 시절, 도토리가 익어갈 즈음

흰 자루와 무거운 쇠메를 어깨에 둘러메고

가까운 산의 참나무만을 골라 나무의 옹이 부분을 향해서

쇠매로 힘껏 치면, 도토리 떨어지는 소리가 '후두둑'

어떤 놈은 내가 얄미운지 머리를 때리면서 떨어진다.

바람만 불어도 깍정이를 벗어날 즈음에 쇠메로 나무를 흔드니

한꺼번에 떨어지는 그 도토리는 영글대로 영글어 최고의 품질이다.

한 자루 가득 채우는 것은 시간 문제였는데.....

 

고사리 분교는 약간 너른 터와 느티나무,

교문 입구로 보이는 곳에 자그마한 교적비만 남기고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아이들도 선생님도 없다.

교적비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산동초등학교 사자평분교 터

1966년4월 29일 개교하여 졸업생 36명을 배출하고 1996년 3월 1일 폐교되었음

1997년 3월 1일 경상남도 교육감'

친구와 나는 그 교적비를 안고 기념 촬영을 했고,

저 멀리 올려다 보이는 재약산 너머로 떠있는 외로운 구름 하나

파란 하늘이 버거운 듯 슬며시 빗겨가고 있는 것 같다.

여기서 공부했던 학생들은 선생님의 풍금 반주에

어떤 노래를 불렀을까? 선생님은 어떤 분이었을까?

학생은 선생님의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면서 자랐을 텐데

그들 36명은 다들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고사리분교의 1회 졸업생이 있다면 우리와 거의 동년배였을 것만 같은데,

폐교된 이곳을 찾아보는 그들의 기분은 또 어떨까?

누군지는 모르나 만나서 막걸리라도 한잔 했으면 싶다.

 

친구는 마지막으로 아내가 준비한 커피를 꺼냈다.

보온통에 담긴 물은 아직도 따스함을 유지하고 있다.

정확하게 2컵 분량의 물이 들어있는데, 등산할 때 꼭 챙긴단다.

필요할 때 녹차 한잔, 커피 한잔을 하는 맛이 제격이란다.

오늘은 커피 두 잔을 만들어 마음 나누며 역사의 현장을 새겨 본다.

'내 마음의 풍금'이란 영화의 장면도 떠오르고,

30년 전 복음학교 선생님들과의 어울림도 연상되었다.

친구도 1978년 서대구로타렉트 회원 시절,

밤늦게 이곳 모임에 홀로 찾았던 기억을 술회했다.

그때는 어느 예쁜 여선생님이 근무했더랬는데

그분의 풍금소리를 들어보았다고 한다.

 

고사리분교에서 표충사까지는 2.64킬로미터,

약도에 의하자면 1시간 10분이면 도달할 수 있는 거리다.

친구는 하산 길에 더 조심해야 한다면서 천천히 가자고 한다.

폭포로 내려가는 길로 내가 먼저 접어드니

그쪽은 더 멀고 가팔라서 자네 다리에 무리가 될 것 같으니

다른 길로 가자면서 오른쪽 길로 방향을 바꿨다.

내려오는 길의 일부 구간은 좁았다.

어떤 지점은 천길 낭떠러지에 붙어 있기도 했다.

왼 켠으로 보이는 계곡 너머로는 구불구불 임로가 나 있어

고사리 분교까지는 물론 사자평까지 차의 출입이 가능한 것 같다.

옛날부터 저 임로는 만들어져 있었던가? 산판을 위해서?

 

표충사까지 내려가는 길은 여유가 있어서 좋았다.

시간에 쫓긴다거나 해서 서두를 필요가 전혀 없었으니까.

친구의 주변 이야기를 들으며 걷는 하산 길이어서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를 다시금 생각해 볼 수 있었다.

1시간 30분 정도 걸었을까 표충사 경내가 코앞에 보인다.

대숲이 절 뒤로 우거져 있어 다시 대숲 오른쪽으로 돌아

절 옆으로 빠져나가니 주차해 놓은 내 차가 거기에 있었다.

뒤돌아보니 어떻게 저렇게 높은 산을 올라갔었나 싶고,

우리가 걸었던 산길이 보통 길이 아니었고,

그 산길 30리를 무사히 걸을 수 있었음에 뿌듯했다.

 

표충사(表忠寺) 경내는 소박한 절에서 느끼는

고졸함은 없는 듯했다. 넓고 확 트인 절집의 구조가 그럴듯할 뿐,

큼직큼직한 법당, 유물관 건물 등도 내 정서엔 다소 낯설다.

절집이 너무 큰 데서 오는 약간의 거부감이라고나 할까?

대광전 정면, 기둥만 보이는 건물(이름을 기억 못함)엔

사람들이 올라가 차탁을 앞에 두고 앉아서 편히들 쉬고 있다.

우리도 신을 벗고 들어가 앉아 보기로 했다.

기둥 밖 난간에 서니 산에서 내려오는 골바람이 시원하다.

오후 5시가 넘은 시간, 해는 이미 많이 기울었다.

우리가 앉은 건물도 은행나무 그늘 속에 들어가 버렸고,

은행나무 사이로 비집고 나온 햇살은 흔들리는 은행잎 사이에서

별처럼 불빛처럼 반짝반짝 빛을 내고 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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