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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초를 하면서 (9/12)

오늘 나는

by 우람별(논강) 2009. 9. 14. 1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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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초를 마치고 무사히 돌아왔습니다.

모자란 수면때문에 또는 생리적현상 때문에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참 멀었습니다.

고속도로 갓길에서 토끼잠을 몇 번이나 자곤했는데도

그놈의 졸음은 좀처럼 가시질 않아 애를 먹었답니다.

그래도 이번의 벌초길이 즐거움일 수 있었던 것은,

일을 끝낸 뒤의 어울림, 만남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토요일 새벽 6시경,

간단히 아침을 챙겨 먹고 부모님 모시고 나선 벌초길,

동대구 IC를 통과 중앙고속도로를 따라 제천까지 가는 길인데,

전날 저녁부터 가는비가 조금씩 내리더니 아침까지 이어지고 있다.

오후부터는 갠다는 일기예보도 있고 해서 괜찮을 것 같다.

워낙 일찍 떠나는 길이라 길은 한산했다.

단숨에 달려 오전 8시 제천 탁사정 도착,

석주 동생한테 전화를 하니 곧 충주로 출발한다고 한다.

할아버지 할머니 산소로 오르는 길, 추석 3주를 앞둔 시점이라 그런지

아직 벌초를 하지 않은 봉분이 대부분이고,

길도 구분이 안 될 정도로 무성한 풀이 가득하다.

발길에 채이는 이슬에 이미 아랫도리는 다 젖어버렸다.

산 입구에서 어머니는 무덤까지 오르는 것을 포기하셨는데,

참으로 잘하셨다는 생각이 들었다. 

막내 며느리가 사준 고급 신발을 더럽히면 어떡하냐고,

"애, 난 돌아가 차 안에서 쉬고 있을란다."하셨다.

 

1시간 남짓, 예초기를 매고 또는 낫을 들고

정성을 들여서 벌초를 하고 술잔을 올리며 정리를 했다.

"아버님, 어머님, 내년에 찾아뵙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아버지가 벌초 후에 절을 하시면서 꼭 하시는 말씀이다.

담배를 즐기셨던 할아버지가 생각나시는지

담배를 한 모금 피워서 필터부분을 묘에 묻어 놓으신다.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을 슬퍼하면서 많은 이들이

그의 영전 앞에 담배를 피워 바쳤던 장면이 오버랩 되었다.

올해는 묘의 오른쪽 어깨 쪽에 제법 깊숙한 굴이 하나 파여 있는데,

어느 동물인가 파놓은 보금자리 같은데,

아버지도 보시고는 허물지 않고 그대로 두셨다.

할아버지 할머니를 지켜주는 동물같아서란다.

유난히 동물을 좋아하시는 아버지의 인간적인 면이기도 하다.

증조부 산소에서 발견되었던 고습도치 형제들에 대한 배려가 그러하고,

티비 프로그램 '동물의 왕국'을 유난히 좋아하시는 면도 그렇다.

 

벌초를 마치고 잣나무 숲으로 내려오는 길,

아버지께서는 올해 나뭇가지 위로 뛰어다니는

청설모의 향연을 보지 못하겠다고 표현하신다.

작년엔 잣나무숲 아래로 청설모가 먹다 남은

잣나무 열매껍질이 지천으로 떨어져 있었는데,

올해는 볼 수 없다면서 섭섭해 하신다.

1976년(고2 때), 할머니께서 돌아가시던 해,

이 산에 묘목으로 심어진 잣나무가 이젠 숲을 이루어,

이젠 제법 시원한 그늘을 드리울 정도가 되었다.

근데, 송진액이 떨어지는 곳이라 좋은 그늘은 아닐 것 같다.

 

탁사정 아래에서 간단히 짐 정리를 하고,

제천에 살던 시절의 아버지 회고담을 들으면서,

어느새 우리 차는 박달재, 다리재를 넘고 있었다.

아버지는 또 말씀하신다.

어린 시절 이 두 고갯길을 걸어서 넘은 적이 몇 번이나 있었단다.

교통이 불편하던 시절엔 그것도 하나의 걷는 문화로서

힘이 들어도 운명처럼 받아들였을 테지만,

요즘 사람들은 그런 문화에 익숙지는 않을지라도

일부러 운동삼아 옛길을 따라서 걷는 '참살이' 운동으로 번지고 있어서

나도 기회가 있으면 그런 운동 문화에 빠지고 싶을 때가 있다.

 

두 고개를 넘으니 큰고모부께서 사시던 산척면이다.

벌초왔을 고종사촌, 서정관(57세) 형이 생각나 전화를 거니

올해는 바빠서 직접 못 오고, 아들을 보냈다고 한다.

'벌초오면 꼭 연락하라고 하더니 서울 사업이 바쁜가 보다.'

엄정면 소재지 오토바이점에 들러 예초기 수리를 간단히 하고

향림에 있는 고조부 산소를 찾아가니,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아카시아 나무가 여기저기 자라서 길을 막았고

봉분 주변의 풀이 보통 무성한 게 아니다.

맨처음엔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낫으로 길을 만들고

봉분까지 가는 데만도 시간이 많이 걸렸다.

아버지께서 예초기를 등에 짊어지신다.

올해는 아들들이 할 수 있는 기회를 달라니까 또 안 된다 하신다.

아까 내가 하는 걸 보니 몹시 불안하고 마음에 안든다면서

이번엔 거의 뺏다시피해서 기어코 기계를 등에 짊어지신다.

또 덩치 큰 자식은 갈쿠리로 잘라놓은 풀과 나무만 걷어내야 했다.

워낙 무성하게 웃자란 풀이라 걷어내기조차 쉽지 않을텐데,

힘좋은 아들이 하면 딱 좋은 것을 고집을 부려서 기어코 뺏아가는 어른이시다.

요란한 기계음이 온 산을 뒤덮더니 한참만에 묘는 제모습을 찾았다.

오랜 시간 작업을 한 어른은 몹시 힘드셨는지 소주 한잔 달라신다.

근데 한잔 달라하시는 말투에 섭섭함과 분노가 잔뜩 섞여 있다.

힘이 많이 드셨고, 힘든 만큼 또 화가 치밀어 오르시는 모양이다.

'술 한잔 가져 오너라' 하시는 말씀엔 가시가 잔뜩 돋아있다.

어머니께서는 상대하기가 거북한 듯 슬며시 자리를 피해서

차가 있는 곳으로 내려가신다. 밭둑에서 뽕잎이나 따야겠다 하시면서.

아버지는 어머니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일을 계속하신다.

석주 동생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갈매기에 이미 와 있고,

개울가에서 떨어진 밤송이에서 신나게 밤을 주워 담고 있단다.

'어, 그것 주인 있는 밤나무인데, 밤서리를 해도 되남?'

 

아침부터 잔뜩 흐린 날씨더니 비가 조금씩 내리기 시작한다.

서둘러 정리를 하고 엄정 장터로 가서 매년 가는 식당을 찾았다.

소나기로 변해서 줄기차게 내리는 빗줄기가 온 장터를 적시고 있다.

석주 동생은 미리 와서 음식을 주문해 놓고 있었다.

동생은 한 주 동안 감기로 계속 기침을 심하게 해서

목소리까지 변해 있다. 신종 인플루는 아니니 걱정 말란다.

"이렇게 비가 많이 오는데, 계속 벌초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도 해야지. 그만둘 수는 없잖은가?"

"오늘은 그만하고 내일 다시 와서 하면 되잖아요."

여하튼, 빗속에서 벌초는 할 수 없는 일,

오늘은 일찍 여주로 이사온 이모부네 집에 가서 자고,

내일 마저 하는 것으로 잠정 결정을 하고 주문한 점심 식사를 했다.

아침에 아버지와 형이 고생했으니 막내가 점심을 사는 거란다.

돼지고기 사태 부분을 졸인 요리와 청국장을 시켜서

점심 식사를 하는데, 맛은 시원치 않다. 별로다. 짜증날 정도다.

아버지는 몹시 힘들었는지 소주를 마시며 사소한 일로 자꾸 화를 내신다.

정도가 좀 심해서 다른 식당 손님들한테 민망할 정도다.

남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 안하무인 격의 어른 태도는 문제였다.

바른말 잘하는 석주의 말투가 또 아버지의 심기를 건드린다.

"뭐야, 임마. 너 지금 나한테 뭐라고 했냐?"

"...................."

 

점심 식사를 하고 나니 날이 훤해졌다.

언제 비가 왔냐는 듯이 거짓말처럼 쾌청한 날씨로 변해했다.

그렇다면 계획을 다시 변경, 벌초를 마저 해야만 했다.

고조모, 증조부모님 산소(합장)의 벌초가 남았는데,

동생까지 합류했으니 이젠 쉽게 해낼 수 있을 것 같다.

산소에 아버지보다 먼저 도착, 예초기에 시동을 걸었는데,

앗, 동력전달장치에 이상이 생겼는지, 날이 돌지 않는다.

몇 번을 시도해도 안 된다. 방법이 없다. 낫으로 해야만 한다.

기계를 고치려 해도 시간 걸리고, 고칠 수 있다는 보장도 없다.

기계의 생명이 다한 것 같다는 판단을 하고 동생과 함께 낫을 들었다.

'낫질은 이렇게 하는 거야' 하며 아버지의 실습 강의를 듣고

형제는 낫질을 하기 시작하는데, 그게 생각보다 쉽지는 않다.

땀으로 범벅이 된 상태에서 쪼그리고 앉아 낫질을 하기란

소아마비를 앓은 적이 있는 나에겐 차라리 고통이다.

이럭저럭 두 산소를 정리하고 나니 온몸이 다 젖어버렸다.

비록 몸은 힘들었지만, 일을 끝냈다는 성취감에 기분은 좋다.

 

외삼촌은 외갓동네에서 벌초를 다하고,

개를 한 마리 잡아서 이제 여주 이모네 집으로 가기로 했으니

목계다리에서 지금 만나자는 전화가 왔다.

근데, 아버지께서는 여주로 가기 전에 들를 곳이 있다 하신다.

소태면 야동 풀무골로 먼저 가자고 하신다.

아버지를 아껴 주셨던 돌아가신 양어머니네 집인데

고기 몇 근 사서 그집의 며느리를 보고 가야 한다는 것이다.

거기로 가시는 것보다는 함께 여주로 움직이는 게 좋지 않겠냐 말씀드렸더니 막무가내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다. 일단 석주 차로 어머니 모시고 먼저 가고,

나는 일단 아버지를 모시고 풀무골에 들렀다가 나중에 가는 걸로 했다.

 

충주시 소태면 야동리 풀무골,

어른으로부터 수없이 들었던 지명이기도 하다.

권영철(권태철의 형)이란 분의 미망인께서 홀로 지키고 있는 집,

아버지의 가난한 어린 시절, 학비를 댈 능력이 없을 때,

미망인의 시어머니께서 어른을 무척 귀여워한 나머지

학비까지 대주었고, 물질적으로 많은 도움을 주었다는 것이다.

그 때의 그 은혜를 갚으려면 수천 금으로도 갚지 못하겠다면서

입만 여셨다 하면 칭송해 마지 않던 분이신 것이다.

그분께서는 이 세상에 안 계시지만

그분을 지극 정성으로 모셨던 며느리를 찾아보는 것도

도리라면서 돼지고기 여러 근을 사서 건네주셨다.

아버지와 동갑내기 며느리는 옛날의 추억을 더듬으면서

한참동안 대화를 나누시는데, 들어보니 아버지 특유의 개성을 잘 드러내신다.

나는 며느리 분에게 인사만 드리고 집주변을 서성거렸다.

아버지의 그 전설같은 이야기의 현장을 둘러보면서

오랜 집 곳곳에 남아있는 옛날 흔적을 살피기에 바빴다.

행랑채의 구조, 발아래 아궁이, 가마솥, 화로에 쓰이던 기구,

옛날 화장실 등. 사랑채의 지붕, 서까래, 수수깡을 이어붙인 벽, 

마당 한구석에서 사육되는 10여 마리의 개 등,

 

풀무골에서 내려와 충주 방향으로 한참을 내려가니

남한강이 햇살 속으로 시원하게 흐르고 있는데

탁 트인 풍광에 걸맞는 장면이라 한참을 머물다 가고 싶다.

그러나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으니 마냥 그럴 수는 없다.

신경림 시인께서 읊은 바 있는 '목계장터'의 현장을 저 멀리 두고

배로 건너야 했던 남한강을 이젠 십여 미터 아래로 흐르게 하고,

서울 방향으로 늘씬하고 빠르게 연결시킨 다리를 건너니

어느새 앙성면으로 접어드는데,

강마을은 또 멀어지고 만다.

 

여주로 가는 찻길은 햇살이 너무 강했다.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을 정도로 차 안 깊숙히 들어왔다.

시간상으로 빗겨진 햇볕이라 더욱 그런가 보다.

아버지는 일하면서, 점심 식사하면서 드신 소주 때문인지

간혹 잠에서 깨어 '여기가 어디냐'는 말씀을 연거푸 하신다.

점심 식사를 고기 반찬으로 하셨는데도

국수 몇 올밖에 안 잡수셨다는 말씀을 하셔서

혹시 치매 증세가 있는 것은 아닌지 슬며시 걱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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