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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여행 10박 11일

여행 이야기

by 우람별(논강) 2015. 8. 16.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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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비사막은 외롭게 거기 누워 있었다. 바람과 모래로 뒤덮인 사구 너머로

헤아릴 수 없는 역사의 소용돌이를 그윽이 품은 채 조금씩 뒤척이고 있었다.

 

온세상을 호령하던 칭기스칸의 사자후는 초원의 파꽃으로 남아

매콤하게 흔들리고 있을 뿐, 더 이상 대제국의 영웅은 거기 없었다.

엉긴히든 사원 라마승의 독경소리마저 공허하고 가난했다.

힘있는 자들의 저주는 동자승의 코흘림처럼 폐허를 남겼고

비바람에 침식된 사원터엔 흙먼지만 쌓이고 있었다.

 

한족들에게 쫓겨 망국의 한을 안고 돌아와

고비사막에서 위로받을 수 있는 무엇이 있었을까?

차디찬 동토에서 살아갈 수 있는 기백은 다 어디로 갔는가?

후손들의 기질 안에 추억처럼 남아있을 뿐인가?

게르 지어 소박하게 살면서 그저 가축들 키우고

마유주(아이락) 만들어 마시면서 위로라도 받았는가?

홍그린엘스, 황금모래 밟는 울음소리는 차라리 한맺힘일까?

 

다섯 살 때부터 말을 타고 놀았던 여인,

지금은 한국말 배워 여행사를 차렸다는 여인,

그 여인의 도움과 이시백 소설가의 안내로 몽골여행을 시작한다.

소설 쓰는 작가의 몽골사랑을 확인해 보는 것도 재밌으리라.

게르 안에 숙박을 하면서 몽골인들 숨결을 찾아가 본다.

초원을 달린다. 달려야 한다. 거친 광야를 통과하기 위해서

가만히 있어서는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다. 고통일 뿐,

 

 

 

 

인천공항에서 서너 시간만 날아가면 몽골의 수도 울란바타르 상공에 도달한다.

 

몽골에 대한 기본적인 자료를 정리해 보자.

 

◈ 공식명칭 : 몽골리아 (the Republic of Mongolia)

◈ 수도 : 울란바타르(Ulan Baator, 약 81만명 -2004년 현재)

◈ 인구 : 약 247.5만명(2004년 현재)

◈ 화폐단위 : 투그리크(Tugruk) / T 혹은 tg로 표기.

새 지폐의 앞면에는 일반적인 징기스칸의 초상이 있고, 소욤보 문양,

소욤보와 후담 문자로 표기된 몽골 국가명, 말 등에 탄 몽골 전사, 몽골 은행장의 사인 등이

들어가 있다. 뒤집어 보면 몽골 은행 발행 지폐 처음으로 아홉 주의 하얀 깃발이 있다

◈ 환율 : US 1$ = 1170 tg

◈ 기후 : "파란하늘의 나라"로 알려진 몽골은 연중 250일 동안 해가 비치는 맑은 날을 즐길 수 있다.

여름은 따뜻하고 겨울은 극도의 추운날씨를 보이며 사계절이 뚜렷한 편이나

겨울이 10월부터 다음해 4월까지로 제일 길며 봄, 여름, 가을이 모두 합해서

5개월 정도 밖에 안 된다. 11월에서 3월까지는 평균기온이 냉점이하인 24℃로 떨어지고,

여름은 평균기온이 20℃에 이러 계절 간 기온차도 매우 큰 편이다.

연 평균 강수량은 254mm 로 매우 적어 전형적인 대륙성 기후를 지니고 있다.

◈ 면적 : 1,567,000㎢ (한반도의 7.4배)

◈ 주요민족 : 몽골족(79%), 카자흐족(6%), 중국계(2%) 등 17개 부족

◈ 주요언어 : 할하 몽골어(Khalkha Mongol)

◈ 종교 : 라마교(티벳불교)(94%), 이슬람교(6%), 최근 기독교인구 증가 추세

◈ 행정 : 21개 지역, 하나의 수도, 2개의 자치도시(Darkhan, Erdenet, Choir)로 구성되어 있으며,

지역 예하에는 298개의 소지역으로 나눠져 있다. 가장 큰 지역은 남쪽 고비(Gobi)지역으로

면적이 165,000 ㎢이며, 혹독한 기후 때문에 인구가 겨우 약 42,400명으로 가장 적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

몽골의 행정 구역은 크게 세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제 1단계는 수도(니슬렐)와 각 도(아이막) 단위 행정 구역이며,

제 2 단계는 수도의 각 구(두럭)와 도의 군(솜)이다.

그리고 제 3 단계는 수도의 동(호로)과 군(솜)의 면(박)으로 구분할 수 있다.

현재 몽골은 수도인 울란바타르 외에 모두 21개의 도(아이막)로 구성되어 있으며,

울란바타르에는 9개 구(두럭)가 있으며, 21개 도(아이막)에는 모두 333개의 군(솜)이 있다.

그리고 몽골 전국의 동과 면의 숫자는 모두 1,681개에 이른다.

21개의 도(아이막) 가운데에는 한국의 국토 면적보다 넓은 도(아이막)가 모두 6개나 있으며,

가장 넓은 도는 어문고비 도(아이막)로 한국의 국토 면적의 1.66배에 이른다.

◈ 지형 : 거대한 산들로 둘려 싸인 지역으로, 그 면적이 한반도의 7.5배에 달한다.

몽골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지대에 위치한 나라로, 평균고도가 해발 1,580m에 이르며

몽골국토의 21%를 동남쪽의 고비사막이 차지하고 있다.

몽골 북쪽으로 러시아와의 국경이 3,000㎞, 남쪽으로 중국과는 4,670㎞에 달하며,

북쪽에서 남쪽까지는 산림목초와 산 초원지대, 극 남부, 사막지대 등지가 있다.

몽골에는 4,000여개에 달하는 호수와 강이 있다.

 

낯설지 않은 광고판이 눈에 띄었다. 먼 타국에 불어온 라면 바람이 실감나는 장면이다.

 

 

시내를 통과하여 숙소로 가는 길에 보았던 화력발전소의 하얀 연기,

매캐한 자동차 배기가스, 금방 샐 것만 같은 온수 배수관울퉁불퉁한 비포장 길의

흔들리는 자동차, 몽골의 수도가 보여준 첫인상은 그다지 자연스럽지 않았다.

적어도 몽골의 자연환경에 푹 빠져보고 싶어 찾아온 사람들에게는 그럴 것 같다.

이 어설픈 문명의 도시 공간에 몽골 인구의 반이 넘게 모여 산다고 하니,

몽골인들에게 이미 자연은 관심의 대상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러시아산 미니버스(푸르공)를 타고 칸 호텔에 투숙, 저녁 식사 후 우리방에서 회의를 했다.

가이드인 이시백 작가는 함께 여행을 하게 되어 반갑다면서 필요한 안내를 자세히 해 주었다.

열악한 환경이니만큼 음식 사정이 안 좋다는 것, 물 부족으로 샤워의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라는 것,

하루에도 아주 먼 거리를 8시간에서 10시간 정도의 힘든 이동을 해야 한다는 것 등이다.

우리 여행단이 감내해야 할 것들을 일일이 언급하면서 이 모든 어려움들이

오히려 몽골 여행의 매력일 수 있다면서 몽골의 참다운 재미를

만끽할 것을 주문했다. 자신의 몽골사랑을 우회적으로 표현해 준 셈이다.

이시백 작가의 소설을 한 권이라도 읽고 오면 더 좋았을 텐데.....

 

회의 끝나고 술자리가 시작되고 새벽 두세 시가 되어서야 술자리를 마감, 첫날의 일정이 마무리되었다.

 

둘째날, 오지 여행을 시작하면서 마트에 들러 필요한 음료와 음식을 준비해야 했다.

밑반찬은 개인별로 준비한 것들을 모아서 그때그때 소비하기로 했는데, 

여행을 함께하는 분들을 배려한 마음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술을 좋아하는 분들은  보드카 칭기스를 샀다. 몽골의 술 가운데는 가장 인기있는 것이라고나 할까?

한잔씩 마시다 보면 칭기스칸의 기백이 서서히 가슴으로 스며들고 용기백배 목소리가 높아질 것이다.

 

몇 마리의 양이 속살을 드러낸 채 거꾸로 매달려 있다. 양고기 맛은 과연 어떨꼬?

 

빨간 색의 문양은 몽골의 국기에 들어있는 '소욤보'다. 각각 상징하는 바가 있어서 오묘하다.

자료를 잠시 인용해서 그 구체적인 의미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① 소욤보의 가장 윗부분에 위치한 상징적인 불은 번영, 부활 나타내며 이는 곧 친족과 세대 및 국가의 영구한 번영과 존속을 의미하는 것이다.

② 불 아래에 놓인 태양과 달은 "몽골인의 아버지는 어린 달이오, 그 어머니는 황금빛 태양이도다!"라는 고대시에서와 같이 몽골인의 고대 토템 사상을 보여주고 있다.

③ 고대 몽골인의 상징에 따르면 아래 쪽 방향으로 향하는 창머리 또는 화살 머리는 "적에게 죽음을!"이라는 뜻을 내포한다. 이에 따라 소욤보 중앙에 놓인 두 개의 삼각형은 "민족의 적에게 죽음을!"이라는 뜻을 새기고 있다.

④ 상황에 따라 변하는 아첨꾼의 자세나 불안함을 나타내는 원형의 의미와는 반대로 직사각형은 고로 "모든 사람에게 성실하고 정직하게 봉사하라!" 라고 해석할 수 있다.

⑤ 고대 몽골 민족에게 물고기는 잠을 자지 않는 동물로 철저한 경계를 의미하며, 소욤보에 그려진 두 마리의 물고기는 남자와 여자, 기지와 지혜를 표현한다. 그러므로 소욤보 그림문자에서의 뜻은 "남자와 여성 모두 현명하고 지혜롭게 국토를 지키도록 하라!"를 의미한다.

⑥ 국장의 두개의 기둥은 요새를 뜻하며 이는 "서로 돕는 두 사람의 힘은 단단한 돌로 만들어진 벽보다도 더 강하다." 라는 의미를 새기고 있다. 그러므로 이 상징은 "민족 모두가 우호적으로 악의 없는 관계를 이루어 돌로 만들어진 요새보다도 더 강하게 할 지어다!" 라고 해석할 수 있다.

 

어워(Ovoo), 정령이 사는 곳이다. 지방신, 지역신이라 부를 수 있는 신이거나 물의 신인 용신인데

토지와 지역민을 보호하는 구실을 한다. 어워 꼭대기에는 나무를 꽂아 푸른 천(하닥)을 걸 수 있도록 했다.

 

몽골인들은 길을 떠나기 전에 어워를 중심으로 오른쪽으로 세 바퀴 돌면서

각자가 소원하는 것을 빌면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믿는다. 신성한 장소인 동시에,

경계의 표시이고, '제단'의 의미를 지니고도 있어서 몽골인들에겐 아주 중요한 지점이다.

현지가이드인 보드로바는 세 대의 차 바퀴에 우유를 부으면서 무사귀환을 기원했다.

 

어워에 던져진 것들은 별의 별 것이 다 있다. 크고 작은 돌을 기본으로 해서 동물의 뼈, 뿔, 목발, 돈 등

종류도 가지가지다. 몽골인들의 샤머니즘적 삶의 단면, 오래된 기복신앙을 읽을 수 있는 부분이다.

 

러시아 군용차를 개조한 푸르공은 몽골의 초원을 달리기에 최고의 차로 정평이 나있다.

단순 구조의 엔진이지만 힘이 좋고 차체가 높아서 험한 지형도 통과하기에는 제격이다.

새차는 우리나라 돈으로 3,000만 원 정도에 구입할 수 있다고 한다.

 

울란바타르에서 남쪽으로 길게 뻗어내린 고속도로, 몇 년 전에만 해도 비포장이었단다.

 

얼마나 달렸을까? 고속도로를 지나다가 어느 한 지점에서 초원길로 접어들었고

한 두 시간을 더 달려 도착한 곳은 풀꽃밭이었다. 파냄새가 진동하는 감격의 장소였다.

특정 장소에만 있는 게 아닌, 어디를 가나 지천으로 깔려있는, '히안'이라는 부추류의 풀꽃이었다.

하얀 빛과 보랏빛이 어울려 눈에 들어올 때는 황홀하여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장관이었다.

앉아도 보고 누워도 보면서 사진찍기에 바쁜 사람들 틈에 나도 앉아 보았다.

 

풀꽃 속으로 들어간 두 여인은 또 다른 사람꽃으로 싱그러움을 더한 셈이니 '금상첨화'다.

 

몇 시간을 더 달려 바크 다즐링 촐로에 있는 어느 특이 지형에 다다랐다.

사방을 둘러보면서 그 눈맛을 즐기느라 정신이 없었다. 하늘에 뜬 뭉게구름이

기암괴석과 어울리고 있어 그 조화로움의 미학을 감상하기에도 충분했다.

 

 

대학의 국어과 후배이기도 한 장상* 선생님은 우리 여행단의 단장으로서 보배같은 사람이었다.

책임감이 강하고 배려하는 마음이 철철 넘쳤기에 어느 누구도 불편을 얘기하는 사람들이 없었다.

입담이 좋아서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그저 기분이 좋아진다. 부인인 이추* 선생님은 얼마 전

어깨 수술을 받아서 고생을 하고 있으나 남편의 보살핌에 큰 힘을 얻고 있는 듯했다.

 

 

척박한 땅에서 솟아난 아주 작은 꽃들생명력의 강인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키는 작지만 야무진 삶이기에 더욱 눈길이 가는가 보다. '희망의 발견'이리라.

 

 

 

 

 

자연에 녹아들고 싶은 마음에 사진을 찍어보지만 내가 들어감으로써 자연스런 맛은 잃어버리고 말았다.

인간의 어설픔을 그나마 자연이 살려주는 의미도 있을 거라고 하지만, 자연속의 나는 이방인?

 

 

바크 다즐링 촐로에 있는 어느 민가에서 하룻밤을 묵기로 했다. 

남녀가 구분되어 네 채의 게르에 분산되어 숙박을 했는데, 거의 잠을 자지 못했다.

호텔이 아닌 몽고의 전통 가옥인 게르에서 최초로 잠을 자게 되는 설레임과

동료들과 어울려 노는 즐거움과 노래를 곁들인 과음으로 말미암아

많은 분들이 온전한 잠을 이루지 못했을 것이라고 판단한다.

 

게르는 원형 평면에 높이 1m 정도의 수직벽체부분과 25도 정도 경사진 지붕면,

그리고 지붕 한가운데에 뚫려있는 직경 1-1.5m 정도의 원형 천창(天窓)으로 구분된다.

작은 게르는 직경 3m 정도 되고 큰 것은 6m 정도에 이른다.

게르의 무게는 전부 합쳐서 250-300kg 정도이다. 게르의 각 부분 명칭은 지역마다 차이가 있는데

특히 몽골국 서부, 중국의 신강성 위구르자치구, 청해성, 내몽골자치구의 아라샨 지역 등지에

거주하고 있는 오이라트 몽골족이 사용하는 명칭은 기타 지역과 많이 다르다.

 

각 부위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게르 각 부분

하나(하흔): 벽체는 ‘하나’라 하며, 부재를 가위의 기능처럼 엮어서 펴면 울타리가 되게 하고 접으면 옮기기에 간단한 부피로 포개진다. ‘하나’는 버드나무로 만든다. 여름에는 ‘하나’를 높게 하고, 겨울에는 낮게 한다.

오니(운흐니): 경사진 지붕면은 긴 장대로 된 서까래를 방사형으로 걸쳐 만드는데 이 서까래를 몽골어로 ‘오니’라 한다. 이 ‘오니’는 버드나무로 만들고, 상단은 천창을 이루는 원형의 틀(터너)의 측면에 준비된 구멍에 끼우고 하단은 고리를 만들어 벽체인 ‘하나’의 윗 부분에 걸고 가죽끈으로 묶는다. 게르 하나에 81개 또는 72개의 오니가 사용된다. 72란 수는 몽골의 72절기에서 나온 것이라 한다.

터너(도노, 토우노, 토흔): 게르의 지붕 한가운데에 있는 원형 천창(天窓)을 ‘터너’(토우노)라 하는데 느릅나무 같은 단단한 나무로 만든다. 원을 이루는 틀 측면에 빙 둘러가며 구멍이 있어 여기에 우산살처럼 서까래 ‘오니’를 방사형으로 꽂게 되어 있다. 때로는 오니를 그냥 걸치고 가죽끈으로 고정시키는 방법도 쓰인다.

바간나(바흐칸): 천창 ‘터너’는 보통 두 개의 기둥으로 받쳐지는데 이 기둥은 ‘바간나’라 하며, 서까래인 오니가 모두 ‘터너’에 집중되므로 결국 지붕의 무게 대부분을 이 기둥들이 지탱하는 역할을 한다. 게르가 커지면 기둥이 네 개가 사용된다. 부족에 따라 세 개의 기둥을 쓰는 곳도 있다. 게르를 지탱하고 있는 기둥 ‘바간나’는 우주목(宇宙木)으로서 샤먼도 그것을 타고 하늘로 올라간다고 생각한다.

에스기(이스끼): 게르를 덮고 에워싸 게르의 표피가 되는 펠트재료를 몽골어로 ‘에스기’라 한다. ‘에스기’는 양털을 펴서 다져 만든다. 겨울에는 두 겹 또는 세 겹으로, 여름에는 한 겹으로 덮는다. 에스기 겉에는 에스기가 오래 가도록 광목 같은 천으로 덮는다. 펠트에도 세부 명칭이 있어서 천창 ‘토오노’를 덮는 것은 ‘우르호’ 나머지 지붕부분을 덮는 것을 ‘테에베르’, 벽을 감싸는 부분을 ‘토오르’라 하며, 출입문을 감싸는 것을 ‘우우드’라 한다.

하알가: 문틀을 ‘하알가’라 한다. 문은 하나만 두며, 주로 동남쪽으로 둔다. 흔히 있는 북풍을 피하기 위함이다. 몽골어로 “우우드 사이흐”라는 말이 있는데 직역하면 “문을 지킨다”는 의미이나 “가정을 지킨다”, “집을 본다”는 의미로 쓰인다.

 

  몽골인의 천막주거 ‘게르’는 우주를 상징한다. 원형 평면으로 되어 있고 우주가 둥글다는 인식에서 비롯되었다. 천창 ‘터너’는 하늘과 통한다고 믿고 있다. 생명은 하늘이 내려준다고 믿는 까닭에 임산부가 진통을 시작하면 긴 실타래 하나를 화로 부근의 기둥에 감아 천창 ‘터너’ 밖으로 내어 묶는다.

  천창 ‘터너’는 해시계로도 쓰인다. 이를 통해 들어오는 햇볕이 닿는 곳을 보고 시간을 파악하며 하루 6시에서 18시 정도의 시간을 효과적으로 파악한다. 또한 몽골 유목민들은 밖에 나가지 않고도 이 터너를 통해 날씨를 안다. 천장 위에는 밑에서 줄을 당기면 열고 닫을 수 있는 뚜껑이 장치되어 있어서 비가 오면 줄을 당겨 닫아서 빗물이 들어오지 않게 한다. ‘터너’는 본래 게르 중앙에 있던 화덕에서 불을 쓸 때 연기가 밖으로 잘 나가게 하는 기능을 하고 아울러 빛과 공기를 받아들이는 데 쓰였다. 그러나 요즈음은 난로를 주로 쓰기 때문에 연통이 이 터너를 통하여 밖으로 솟아 있는 모습을 보인다.

 

겨울 난방용 난로가 게르의 정가운데 위치하고, 왼쪽은 남자의 공간

오른쪽은 여자의 공간이자 부엌 공간으로 엄격하게 구분되어 있다.

 

몽골의 샤워기는 이런 형태도 있다. 한 방울의 물도 아껴야 한다는 신념으로 만든 것일 테지만

물을 아끼기에는 딱이다. 옆에 놓인 물통은 여기서 말을 타고 1시간 거리에 있는 우물에서 길어온 것이다.

필요한 만큼 물을 퍼서 쓰라고 바가지가 그 안에 들어있지만 함부로 물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은근한 압박감이 작용하고 있는 듯하다. 이것도 혼자 사용하다 보면 소비되는 물의 양이 많기에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 최대한의 물낭비를 줄일 수 있다는 점에서 또한 감동적이다.

물을 사용할 때 필요 이상으로 많이 써 왔던 나 자신의 물소비 태도를 깊이 반성하지 않을 수 없다.

 

게르 민박 후 일출을 감상하고 난 뒤, 우리가 묵었던 게르의 모습을 담았다.

 

 

 

다시 남쪽의 고비사막을 향하여 짐을 챙겨 출발해야 했다. 짐은 1호차와 3호차에 싣고

각 차량마다 6명씩 한 조가 되어 움직였다. 3호차 타기를 대부분 꺼려했다. 왜일까?

3명은 역방향의 의자에 앉아서 자동차 엔진의 뜨거운 공기를 온몸으로 느껴야 했기에.

 

체리사원, 라마불교의 사원에 들러 라마 승려의 이야기를 잠시 듣고, 절하는 법을 배웠다.

 

 

 

 

사람이 죽으면 저 돌 위에 시신이 놓이고, 자연으로 돌아갈 준비를 한다.

새들이 날아와 살점을 뜯어 먹을 수 있도록 잘 잘라서 놓기까지 한단다.

이른바 '조장(鳥葬)'이라는 거다. 얼마 전에도 한 사람이 세상을 이별한 듯 핏자국이 보였다.

죽음의 순간에서 자연으로 완전히 돌아가기까지의 과정을 상상해 보니

사람살이가 별 게 아니로구나 하는 느낌이고, 지금은 이렇게 젊어서 관광을 하지만

언젠가 찾아올 죽음에 대해서도 초연할 수 있도록 늙어가는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태도가 필요하다는 생각이다수양도 좀 해야 하고.....

 

죽어서도 자연과 하나 되게 해다오…

자연의 일부가 되어 자연과 가장 가까운 모습으로 생활하는 몽골 사람들은

죽은 후에는 자연과 완전한 한 몸을 이룬다. 자연에서 태어나 사람이라는 독립된 개체로 잠시 살아가다

죽으면 그곳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아는지, 자연이 그들에게 사람으로 살아보라고

선물로 주었던 ‘몸’을 죽으면서 가장 좋은 방법으로 자연에 돌려보낸다.

 

몽골 사람들이 예로부터 행해왔던 장례풍습은 바람에 몸을 깎아내어 공기 중으로 날려 보내는 ‘풍장’,

초원에 시신을 두어 새들이 먹게 하는 ‘조장’, 물에 가라앉혀 물 속에 장사지내는 ‘수장’ 등 몇 가지가 있는데

이중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것이 풍장이다. 사람이 죽으면 주변 사람들은 수레에 시신을 싣고

하염없이 말을 타고 달린다. 시신이 수레에서 떨어지는 지점이 바로 망자의 무덤이다.

망자가 그곳을 무덤으로 선택했다고 믿는 것이다. 장례를 행하는 사람들은 시신을 땅에 묻지 않고

그대로 그 자리에 놓아두고 집으로 돌아간다. 시간이 지나 시신의 몸에서 수분이 모두 빠져나가고

말라 부서질 때가 되면 시신의 몸은 바람에 의해 조금씩 깎이며 바람과 함께 가루가 되어

공기 중으로 날아간다. 바람의 일부가 되어 자연으로 귀화하는 것이다.

 

 

다시 고속도로를 만나 남쪽으로 달렸다. 우리의 고비(gobi) 여행은 항상 이런 '길'과 함께였다.

잘 닦인 아스팔트 길도 달렸으나 대부분 풀과 꽃, 흙과 돌로 뒤덮인 울퉁불퉁한 초원길이었다.

그대로 그런 초원길이 좋았던 것은 구름과 바람이 늘 동무해 주고, 풀밭의 위안이 있기 때문이었다.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몽골의 초원길에서만 느낄 수 있는 오묘한 매력이 거기 있었다.

 

* '고비사막'에 대한 설명 자료를 잠시 인용해 본다.

 

지평선까지 펼쳐진 모래사막, 하늘과 지평선 사이로의 색다른 노을과 일출. Gobi 란 뜻은 몽골말로 “사람과 동물이 살지 않은 황폐한 땅” 이란 뜻이다. 몽골 전 국토의 41.6%를 차지하는 고비사막은 일반적인 내륙의 모래사막이 아닌 스텝지형으로 만들어진 사막이다. 스텝지형이란 모래와 낮은 목초가 공존하는 곳을 말한다. 고비사막은 크게 다섯 부분으로 나뉘는데 그 중 주로 관광객과 여행자들이 찾는 곳을 남고비 사막이며, 그레이트 국립공원은 세계에서 제일 넓은 자연 동물공원으로 유명하다. 사막희귀 동물인 눈표범, 고비큰곰, 고비독수리 등을 비롯한 52종의 포유류, 15종의 파충류, 1종의 양서류, 106종의 조류 등이 서식하며, 식용을 비롯한 400여 종의 식물이 서식하고 있다. 고비사막여행의 포인트는 넓은 스텝사막의 풍경과 한 여름에 어름이 얼어있는 계곡인 율린암(Yoliin Am), 세계최대 공룡화석 발굴지인 바얀작(Bayanzag), 바람에 따라 옮겨 다니는 모래언덕이 있다. 또 많은 공룡화석의 관람도 여행포인트이다.

 

남북으로 뻗은 도로를 자전거로 달리는 사람도 있다.

웃으며 손까지 흔들어주는 여유가 훌륭하다.

자신과의 싸움에 도전을 하는 사람이 아닌가 싶다.

 

저 분이 외로이 향하는 곳은 어딜까? 매일마다 일정한 거리를 가고

 날이 기울면 풀밭에 텐트를 치고 휴식을 취하면서 하루를 정리하고

다음 날 또 목표로 한 곳까지 묵묵히 길을 따라 달려갈 것이다.

철저하게 혼자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하는 것이어서 위험도 감수해야 하지만

서슴지 않고 도전하는 저들의 용기와 패기에 일단 박수를 보내고 싶다. 

 

푸르공이란 차는 차체의 양 옆에 기름통이 있다. 충분한 연료가 있어야

몽골땅 어디든 달려갈 수 있기에 의도적으로 장치한 것일 게다.

 

드디어 여행자 숙소에 도착해서 여장을 풀고 샤워까지 하고 나니 해가 저물기 시작한다.

여기에서 이틀밤을 묵으면서 욜린암을 트래킹하고 이튿날 아침 홍그린 엘스로 간다.

 

여행자 숙소의 본관 건물, 식당이 있어서 현지식을 맛있게 먹을 수 있었던 곳이다.

따스한 물을 충분히 제공해서 커피와 홍차까지 마실 수 있었고, 마유주(아이락)까지 맛 봤다.

 

 

염소 가죽을 말리고 있는 것 같긴 한데 말리는 형식이 특이하다. 상징물일까?

여행자 숙소 바로 앞에 위치해 있어서 궁금증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욜린암으로 가는 길, 우린 앞차의 뒤를 따라 서서히 고도를 높여갔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숙소와 욜린암 고갯마루의 고도 차이는 600미터 정도였다.

욜린암에 가까워질수록 고도는 시나브로 높아지고 있었던 것이다.

 

드디어 욜린암 입구에 도착해서, 입장 수속을 밟고 자연사 박물관에 들어갔다.

세로쓰기로 표기된 것은  키릴문자이고, 왼쪽의 가로쓰기는 자신들의 국어를 러시아 문자를 이용하거나

독특하게 변형시켜 자신들의 언어로 쓰고 있는 것이다. 우리 한글의 소중함을 새삼 느끼게 된다.

 

자연사 박물관이다. 욜린암에 살고 있는 동물들이 박제되어 전시되고 있었다.

박제된 동물의 모습이 실감나게 전시되면 괜찮을 테지만, 뭔가 어설퍼서

오히려 잘 찍은 사진을 벽에 걸어놓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욜린암'은 이라는 독수리과의 맹금류가 살고 있는 계곡이라는 뜻이다.

 

 박제가 된 '욜', 어설픈 대로 욜의 생김새를 짐작하게 한다. 수염이 있는 새라는 사실이 놀랍다.

 

차탕족이 사용하던 삼각텐트인 '오르츠(티피)'도 보인다. 차탕족이란 '순록을 따라다니는 부족'이다.

 

천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가파른 절벽을 제집 드나들듯 한다는 산양의 모습,

한 마리가 아니라 여러 마리가 주위를 경계하면서 이동하는 모습이 포착되었다.

 

공원 입구에서 차를 타고 고개를 넘을 때 고도계는 약 2300미터를 가리켰고,

고개에서 잠시 내려가니 우리가 타야 할 말들이 떼지어 기다리고 있었다.

관광객들을 위해 상시 대기 중인 것 같았다. 8명의 동료들은 걸어가는 것을 선택하고

나머지 회원들은 모두 말타기를 신청했던 것이다. 나는 그냥 걷기로 했다.

 

지금 여기에 흘러내리는 물은 모두 빙하가 녹아서 흐르는 물이라고 보면 된다.

흐르는 물에 손수건을 빨아 머리에 얹으니 정신이 버쩍 들 정도로 시원하다.

골짜기로 탁 트인 지점을 천천히 걸으면서 주변을 둘러보는 눈맛이란

직접 걸어보지 않고는 경험할 수 없는 '자연의 선물' 그 자체다.

보랏빛 허브향기가 코를 간질이는 즐거움까지 맛보고 나면

그대로 주저앉아 몇 시간이고 놀다가 가고 싶어진다. 누가 말리랴!

한가롭게 풀을 뜯는 저 소들이 어쩌면 이곳의 주인인지도 모른다.

그들의 영역에 잠시 찾아들었지만 너그럽게 우리를 받아준다.^^

 

 

몽골초원의 목축 대상은 몽골어로 <말>이라 일컬어지는 말,양,염소,소(야크포함),낙타 등 5종의 가축이다.

이 5종 가축이 몽골 유목경제의 기초를 형성하게 되는데, 새끼를 볼모로 하는 젖짜기, 번식을 관리하는

불까기, 가축을 관리하는 목축 기술 등은 유목민족인 몽골족에겐 생존수단이기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라서 가축에서 획득한 젖을 원료로 만들어낸 술(마유주)은 제의나 의례에서 빠지지 않는 중요한 음식이다.

 

보통 종마 1마리가 거느리는 말은 20~40마리가 한 떼를 이루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유목가구 1세대는 보통 종마 1마리를 중심으로 하여 이루어진 하나의 말떼가 있다.

몽골 초원에서는 보통 젖짜기, 불까기, 낙인찍기, 승용마 고르기 등 필요한 때 외에는 방목하여 키운다.

종마는 무리를 거느리고 이리 등 외부의 적으로부터 말 무리를 지킨다.

낙타도 말과 같이 종자가 되는 낙타가 무리를 통솔하는데 그래서 평상시에는

특별히 낙타치기를 두지 않고 물건을 운반할 때 등 필요한 때만 인력을 데리고 온다.

그러나 고비지역 등 물 마실 데가 우물밖에 없는 곳에서는

사람이 매일 물을 퍼올려 가축에게 물을 먹여야 한다.

낙타떼는 매일 물을 마시게 할 필요는 없지만 사람이 마실 물을 운송할 겸

며칠에 한 번씩 우물로 데리고 간다. 낙타나 말 떼는 보통 집에서 어느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데 비해,

소 떼나 양과 염소의 혼성 무리는 밤에 주인 게르 바로 가까이에서 잔다.

 이 무리는 아침에 방목하러 나갔다가 저녁엔 게르 부근으로 되돌아 오는 순환을 반복하는데,

소떼는 사람이 특별히 돌볼 필요가 없지만 양떼는 반드시 사람이 돌보아야 한다.

 

양떼는 수백 마리 단위로 큰 무리를 이룬다.

그러나 종자가 되는 양이 무리에 대한 구심력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잘못하면 무리가 뿔뿔이 흩어져 버린다. 무리에서 떨어진 양은 이리에게 잡아 먹히기도 한다.

그래서 양떼에 약 25% 정도로 염소를 섞는다.

염소는 호기심이 강하고 스스로 영양가 있는 풀을 찾아내거나 위험을 피할 수도 있다.

유목민은 목토지 이용계획에 따라 지형, 풀의 식생, 물 마실 곳의 위치,

그 날의 날씨, 특히 풍향을 고려하여 양, 염소떼의 하루 방목코스를 결정한다.

그 계획에 따라 하루에 몇 번씩 무리의 이동방향을 바꾼다.

목동은 가끔 집에 돌아가 차를 마시거나 다른 일을 할 수도 있다.

한편 말이나 낙타떼는 스스로 풀을 뜯어 먹도록 놓아두지만, 그렇다고

주인이 가축떼를 전혀 파악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능력 있는 유목민은 지형, 기후, 특히 풍향, 풀의 식생, 물먹이는 장소 등을 머리에 넣어

시뮬레이션하면 자신의 말이나 낙타가 지금 어디에 있고,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거의 정확히 알아낼 수 있다.

 

저 하늘 위를 날고 있는 녀석이 바로 '욜'일까?

 

 

한여름인데도 아직도 얼음이 녹지 않았다.

 

얼음 녹는 소리가 방울방울 떨어지고 있는 듯,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두 선생님

 

 욜린암 계곡에서 볼 수 있는 유일한 꽃은 보랏빛 허브꽃이었다. 그 향의 간지럼은 멀리서도 느껴졌다.

 

욜린암은 고비사막의 중앙에 있는 계곡으로 달란자드가드에서 약 45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몽골의 수도에서 차량으로만 하루 정도, 항공으로는 1시간 반 정도의 거리의 달란자드가드는

고비여행을 준비하기 위한 중심도시로서 몽골전체의 낙타 중 1/4 정도를 기르고 있다.

 

****** 달란자드가드에 대한 자료를 인용해 보겠다. *****

 

몽골의 가장 남쪽, 그리고 고비의 대표지역인 어문(남쪽)고비 아이막. 어문고비의 중심도시 달란자드가드는 고비지역을 찾는 사람들이라면 꼭 한번 거쳐가는 곳이다. 몽골 대부분의 고비지역은 자갈과 건조한 토양을 가진 스텝사막인데, 어문고비에는 모래사막도 있다. ‘앨스’라는 말은 ‘모래’를 뜻하는데, 지명 이름에 ‘앨스’가 붙여 있는 곳들을 모래사막 혹은 이동사구가 있는 지역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어문고비는 고비지역에서만 볼 수 있는 사막 풍경과 5월까지도 녹지 않는 골짜기 얼음과 야생동물의 천국으로 유명한 욜리암 골짜기 등으로 관광지로도 유명하다. 특히 어문고비의 중심 도시인 달란자드가드는 커다란 세 개의 산으로 둘러 쌓여 있는데, 봄이 되어 나무들이 새 잎을 내는 때가 되면 한 폭의 그림같이 아름답다. 달란자드가드’는 ‘70개의 샘’이라는 뜻. 즉, 70개 이상의 샘물이 솟아나는 지역이라는 뜻이다. 달란자드가드는 이 70개의 샘에 의존하고 있었다.

'70’의 뜻을 가진 ‘달란(Dalan)’과 ‘트인’, ‘막힘 없는’의 뜻을 가진 ‘자드가이(Zadgai)’를 어원으로 한 ‘트인 넓은 공간’인 이 곳은, 남고비 국립공원을 관리를 하는 핵심 행정도시이다.

 

공중부양 중인 우리 여행팀, 누구의 자세가 가장 좋을까?

 

여행자 숙소 둘째날 저녁에는 작은 공연이 준비되어 있었다.

공연에 앞서 '강남스타일' 노래에 맞춰 잠시 말춤을 추는 두 선생님,

 

 마두금 연주와 무용 발표를 위해 두 여인이 분장까지 하고 우리들 앞에 섰다.

 

울란바타르 예술학교에 재학 중인 두 명의 학생은 이곳에서 알바를 하고 있단다.

 

마두금 연주 소리는 뭐라고 표현하기 어렵지만, 몽골의 전통악기로서 특유의 음색을 지녔다.

우리의 악기와 비교한다면 해금과 비슷한 악기가 아닐까 한다. 말총을 현으로 사용하여 만든 것이며,

활로 현을 문질러 소리를 내고 두 줄의 강약을 서로 다르게 하여 연주한다.

자기 새끼에게만 젖을 물리는 습성이 있는 낙타에게 마두금을 연주해서 

어미 잃은남의 새끼에게 젖을 물리게 하는 기적도 낳은 것으로 보아 동물의 본능까지도 좌우하고 있는

최고의 악기라고 평가해야 할 것이다. 마두금을 연주하면서 '허미'까지 노래하는 분은 없을까?

 

마두금 연주와 춤공연이 끝나고  기념사진을 하나 찍었다. 와, 키 큰 여인!

 

공연에 이어 장선생이 진행하는 우리들만의 뒷풀이는

밤늦도록 이어졌고, 술자리는 끝간 데를 모르고 진행되었다.

 

다음 날 아침의 일출 장면이다.

몽골 여행 10일 중, 어느 하루도 일출장면을 보지 않은 날이 없을 정도로

나는 매일 일출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남전 형은 특별히 해가 뜨는 순간에

두 손을 모아 경배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우리와 일상을 함께하는 햇님에 대한

고마움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리라.

 

오늘은 이곳을 떠나 몽골 여행의 절정이라 할 수 있는 홍그린 엘스로 가는 날이다.

 

바얀작크, 몽골의 그랜드캐년이다. 공룡화석이 발견된 곳이기도 해서 유명하단다.

자연의 신비함을 한 눈에 느껴볼 수 있어서 잠시 머물 수 있는 공간이라면서 가이드는

잠시 사진 찍을 시간을 주었다. 저 황토덩어리는 날이 갈수록 형태가 변할 가능성이 많다.

비바람에 깎이고 깎이다가 지탱할 힘이 떨어지면 어쩔 수 없이 무너져내릴 일이다.

동료들과 조심스레 흙더미 위에 올라 몇 장의 사진을 찍었다.

 

 

 

어느 민가에 들러 마유주를 시음하고 고맙다는 인사로 자녀들에게

학용품과 옷 종류 등을 전달하면서 폴라로이드 사진을 찍어주기도 했다.

 

 

남전 형은 마유주의 매력에 푹 빠져서 한 번 마시면 서너 잔은 거뜬히 해결했다.

 

 

 

 

드물게 보는 초원의 우물이다. 두레박을 이용해서 물을 긷는 방식은 우리와 같다.

 

 

유목민들은 초원의 돌들을 모아서 관광객들에게 팔고 있었다. 특별한 돌들이 아니었음에도

혹시 관광객들에게 마음에 드는 것이라도 있으면 팔아서 돈을 만들 수 있는 것이니 온식구들이 신경을 쓴다.

조금 전 학용품과 옷가지들을 선물받은 아이들이 우리들을 보고 쏜살같이 달려와 있음에 놀랐다.

 

고비의 야생늑대와도 맞서 싸워 이길 정도로 유명한 유목용 개,

맨처음에는 낯선 우리를 보고 짖어대더니 주인의 경계심이 없음을 확인하고

순한 양처럼 어슬렁어슬렁 우리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드디어 홍그린 엘스에 도착, 여장을 풀고 본관 앞 휴게소 의자에 앉아 정담을 나눴다.

 

해는 지고 별이 쏟아지는 밤이 찾아왔으나 그 감동스런 장면을 사진으로 찍을 수는 없었다.

별까지 선명하게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처럼 찍을 수 있다면 참 좋으련만.....

 

 

3일간 묵었던 여행자 숙소의 한 게르, 의자에 앉아 산쪽으로 바라보는 눈맛이 좋아서

남전형과 나는 최고의 숙소를 잡았다면서 매우 만족해 했다. 비가 온 뒤 게르 안에

진동하던 양가죽 냄새만 제외하면 최고의 숙소였다고 자평할 수 있다.

좋은 숙소의 조건으로 탁 트인 전망을 빼놓을 수는 없는가 보다.

 

사구의 그림자로 시간을 알 수 있다. 지금은 아침 해가 뜬 지 한두 시간 쯤 지난 시점이고

아래 사진은 사구의 그림자가 왼쪽으로 드리워져 있어서 오후의 해질 무렵임을 알겠다.

 

홍그린 엘스, 황금모래란 뜻이다. 3일간 머물면서

여러 가지 체험을 했던 곳이기에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첫날은 여행자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사구 쪽을 향해 마냥 바라보면서 별의 별 상상을 했다.

저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어쩌면 저렇게 엄청난 모래들이 쌓일 수 있을까?

, 사구, 평원지대가 함께하는 삼겹의 조화를 바라보면서

자연의 신비로움에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또 하나 잊지 못하는 것은 밤하늘에 명멸하던 별들이다.

남북으로 이어진 은하수 옆으로 자리한 수많은 별자리들을 바라보면서

그 위치를 확인하고 이름을 공부했던 추억은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

상식적으로 몇 개 알고 있던 것에다가 고대 신화를 곁들인 별자리 공부는 남전형과 같이하면서 가능했다.

저녁 식사 후, 마당에 멍석을 깔고 누워 별을 바라보던 어린 시절이 오버랩되어 더 느낌이 좋았다.

작은곰자리, 큰곰자리, 견우성, 직녀성, 전갈자리, 돌고래자리, 땅꾼자리,

궁수자리, 왕관자리, 오리온자리 등 모두 다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또 어떤 날은 별똥별이 무수히 떨어지는 모습을 관찰할 수 있어서 좋았다.

날씨가 워낙 좋아서 별자리를 보지 않은 날이 없을 정도였다.

특히 권영* 선생님은 지구과학을 전공한 선생님이어서 레이저광을 쏘아

별자리를 하나하나 연결해 주니 공부가 아주 잘 되었다.

 모두가 별자리 이름을 공부하는 행운을 얻었다고나 할까?  

 

해가 질 무렵, 남전 형과 나 사이에 2호차 기사분을 모시고 기념사진 한 장,

그는 현지가이드인 보드로바의 남편이고 1남 2녀의 가장이었다. 서른여덟 살.

 

아침해가 다시 밝았다. '사구 오르기'를 체험하는 날이다.

 

저 산너머는 중국의 내몽고 자치구역이다. 몽골의 땅이었으나 중국에게 빼앗긴 땅,

그곳에서 날아오른 모래들이 저 산을 넘어 쌓이기 시작하면서 저렇게

거대한 사구를 만들어 놓은 것이다. 홍그린 엘스, 이름도 느낌이 좋다.

 

 

다음 날 아침, 홍그린엘스 바로 앞까지 접근해서

어느 민가에 들러 마유주(아이락) 시음을 하기로 했다.

아이락은 몽골의 전통주다. 우리도 치면 막걸리에 해당하는 술,

장을 정화시켜 주는 작용이 좋아 변비로 고생하는 분들은 즉각적인 효과를 본다.

 하지만 설사 증세로 고생했던 나로서는 솔직히 그림의 떡일 뿐이다.

 

점심은 이 민가 부분에서 염소고기를 먹는 것으로 예정되어 있었다.

안타깝지만 유목민들이 기르는 가축 중에서 흑염소 한 마리가 죽음을 당해야 할 처지가 되었다.

가이드는 짖궂게도 그 염소를 잡는 장면을 보여주겠다고 해서 보기로 했다.

 

게르 안의 침대 부분이 마치 왕궁의 임금자리와 비슷하다.

 

 

염소 도살 장면임을 안 염소들은 일제히 고개를 돌렸고 무심한 개만 태연하다.

두 사람이 앞다리와 뒷다리를 잡고 염소의 배를 하늘을 향해 눕힌 뒤,

10센티 정도를 가르더니 손을 뱃속으로 푹 넣어 머리로 통하는 동맥을 끊어 놓으면

염소는 2,3 분 안에 목숨이 끊어진다. 염소를 제일 고통스럽지 않게 하는 방법이기도 하고

그렇게 해야 염소가 좋은 세상에 살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실행하는 것 같았다.

 

일상화 된 일이라 그런지 피 한 방울 안 흘리고 삽시간에 가죽을 벗기고 토막을 내었다.

돌을 불로 뜨겁게 달군 다음, 거기에 고기를 얹어 익히는 방식으로 요리를 하게 된다고 했다.

염소 고기를 익히고 음식을 준비하는 동안 우리 일행은 사구 오르기를 체험하는 것이다.

 

 

가파른 사구를 오른다는 것은 난생 처음 해 보는 거다. 신발을 벗어놓고 맨발로.

내 체력으로 제대로 오를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도 있긴 하나 평상시 산을

비교적 잘 오르는 것으로 보아 웬만하면 성공할 것이라 자신하고 도전을 했다.

 

맨처음에는 괜찮았으나 경사가 급해지면서

푹푹 빠지는 발을 감당할 수 없을 정도가 되니 당황스러울 정도로 힘이 들었다.

두 발로 계속 갈 수 없어 두 팔을 동원 엉금엉금 기어가지 않고는 한 걸음도 내디딜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김정식 선생은 꼿꼿하게 45도 각도의 급경사를 거침없이 오르기도 하는데

나는 옆으로 비스듬하게 올라가는데도 이렇게 헤매고 있다 싶으니 부끄럽기도 했다.

나의 저질 체력은 그렇게 한 순간에 드러나고 말았던 것이다.

 

누구는 전생의 죄가 많아서 이렇게 힘들게 사구를 오르게 되는 것이라고 했다.

힘든 정도의 차이가 있기는 하겠지만 다들 느끼는 강도는 비슷하리라 본다.

무리해서 오르다 보면 어지럽고 구토까지 될 수 있으니 절대로 무리하지 말라고는 해도

일단 오르기 시작한 것 끝까지 올라야 하는 입장이니..... 천신만고 끝에 사구의 칼날진 그 위에 섰다.

그 때의 통쾌함 또한 무엇과 견주랴. 사구의 능선 너머로 무엇이 있을까 궁금했는데

역시 갖가지 모양의 사구가 무더기무더기로 여기저기 존재하고 있었다.

일단 목표로 한 높은 사구에 올랐으니 물을 한 모금 마셔야 했다.

남전 형은 내가 메었던 물병 배낭을 대신 짊어지고 사구를 제일 먼저 올랐다.

이 정도의 사구쯤 오르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여유있게 오른 뒤,

한참 뒤에 힘들게 올라온 나에게 고생했다면서 물병을 건네준다.

지리산과 설악산 종주를 밥먹듯이 하는 남전형의 체력이 그저 존경스럽고 부럽다.

 

사구 가운데 제일 높은 곳에 오른 성취감은 컸다. 아래로 보이는 사구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규모가 작다.

 

 

사구 위에서 한참을 쉬다가 약속한 시간이 되자, 모두들 일어나 내려가는데

모두들 신이 났는지 여기저기서 탄성이 들리기 시작한다. 여인들의 즐거움은 극에 달한다.

오를 때와는 반대로 성큼성큼 발을 내디뎌 보는 발의 감촉은 일찌기 경험하지 못한

특별한 즐거움이어서 그런지 내려가는 속도가 점점 느려진다. 다들 내려가기가 싫은 거다.

모두들 털썩 주저앉아 엉덩이를 내리밀면서 나는 모래소리는 경이로울 정도였다.

숱한 모래알의 마찰이 한꺼번에 일어나면서 나오는 소리일 것 같은데 제법 선명했다.

 

사구를 오르내리는 사이에 달궈진 모래를 밟고 지나기가 뜨거울 정도가 되었을 때

우리는 모두 내려왔고, 신발을 신고 점심 먹는 장소로 옮겼다. 맛있는 염소고기가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1호차와 3호차 사이에 플라잉 텐트를 치고 그 그늘 아래서 점심을 먹는 낭만을 연출한 것이다.

국내에서 먹었던 염소고기의 맛과는 확연하게 달라서인지 모두들 맛있다며 난리다.

 

낙타를 타고 사구 아래로 난 초원지대를 1시간 정도 둘러보는 체험을 했다.

말타기를 포기한 대신 낙타는 한 번 타 보고 싶은 마음에 신청했는데 모두 8명이었다.

 

 

 

 

다음 날 아침, 7시쯤 숙소를 출발해서 10시까지 다시 돌아오는 것으로 하고

전날의 가파른 사구와는 다른 아주 완만한 사구에 올라보기로 했다.

숙소에서 사구까지 가는 데만도 50분 정도 걸렸다. 가는 시간 감안해서

사구 오르기 체험은 1시간 남짓 할 수 있다는 결론이다.

 

저 멀리 사구에 박힌 검은 점은 낙타였다. 천천히 움직이고 있는.....

 

물결 무늬 선명한 모래 위를 걸어가는 그 기분은 직접 경험해 보지 않으면 잘 알 수 없으리라.

 

 

 

 

 

 

 

그래도 목표 지점까지 왔으니 기념 사진 한 장 남겨야지!

 

사구 오르기를 끝내고 내려오다 만난 낙타의 무리들

풀뜯기에 바빠 사람들의 접근에는 관심이 없는 듯했다.

단, 교미 중인 상태에서 사람에게 발견되었을 경우는 극도의 흥분 상태가 되어

 사람들을 공격하는 경우가 있어서 특별히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단다.

 

오전 10시에 돌아와 늦은 아침 식사를 한 뒤부터는

하루 종일 아무 것도 안하는 것이 일과였다. 낮잠을 자건

독서를 하건, 글을 쓰든 나름대로 시간을 보면 되었다.

저녁 무렵에 작은 공연이 있기까지는.....

 

시인이신 남전 선생님께서는 뭔가를 계속 쓰고 계신다.

홍그린앨스에서의 감동을 시로 쓰고 계실 것만 같다.

삶이 고독해진다는 것, '외로움'에 대하여 한창 생각하고 있을 것이기에

 

이날 오후는 우리가 아무것도 안 하고 쉬는 시점을 알기라도 한 듯,

비가 흩뿌리고 모래바람이 불면서 숙소와 들판엔 먼지 냄새가 가득했다.

만약 이동 중에 이런 비바람을 만났다면 낭패였을 텐데, 우린 운이 좋았다.

 

끝없이 이어지는 가축들의 이동도 장관이었다. 밑부분의 하얀 줄이 가축의 무리들이다.

 

홍그린 엘스의 마지막 날 저녁, 여행자 숙소의 식당에서 작은 음악회가 열렸다.

알바로 써빙을 담당하던 학생이 전통 옷과 모자를 쓰고 노래를 부르는데, 절창이었다.

우레와 같은 박수와 짭잘한 팁도 받았으니 기분은 꽤 좋았으리라.

 

다음 날 아침, 오전 9시 출발, 바얀자크를 거쳐 엉긴사원으로 이동(7시간 30키로)

점심 식사는 현지 식당에서 몽골식으로 하고 폐사지(엉긴히드 사원)를 둘러보는 일정이었다.

 

엉긴 히드 사원, 라마불교의 쇠퇴를 한눈에 보여주고 있었다.

사회주의 혁명 당시, 라마교의 승려들이 탄압을 받아 환속을 강요당하고

치욕적인 죽음을 선택해야 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라마교(티벳불교)에 대한 아래의 설명자료를 인용한다.

 

지금 몽골의 전체 인구의 26% 정도가 라마교를 믿고 있으며 계속 부흥하고 있다. 국가 종교로서 불교에 대한 관심은 징기스칸 시대부터 비롯되었다. 징기스칸은 불교를 믿는 위구르인을 선생이나 공직자로 채용했다. 위구르인은 일반인으로부터 크게 존경받았고 몽골에 지대한 문화적 영향을 끼쳤다. 왕위에 있으면서 징기스칸은 또한 주요 불교 지도자들과 회의를 하였다. 그의 뜻에 따라, 후계자인 오게데이칸(Ogedei Khan)은 티벳의 라마승을 초대해 하라호룸(Kharakhorum)에서 불교의식을 배웠다. 그리고 여기서 샤머니즘이 결합되어 이러한 다신교적인 샤머니즘이 몽골의 전통적인 신앙이 되었다. 불교가 몽골의 정식 종교로 채택된 것은 쿠빌라 칸(Kubila Khan) 때의 일이다. 쿠빌라 칸은 불교를 원나라의 공식 종교로 발표했다. 그리고 그는 라마승 로디자틀산(Lodijaltsan)을 몽골 불교의 공식 지도자로 임명하였다. 라마승은 군대의 의무를 공식적으로 면제받았으며 세금도 면제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쿠빌라 칸의 노력에도 불교는 몽골에서 널리 받아들여지는 종교가 되지는 못했다. 불교는 상류층들의 종교였으며 티벳제국이 몰락함에 따라 불교도 그 지지기반을 잃고. 대신 샤머니즘이 16세기 중반부터 왕성하게 일어나기 시작했다. 또한 이 시기 황모파 불교(Yellow Hat sect Buddhism) 또는 라마교가 몽골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라마교는 정치적 사회적 이유에서 몽골에 도입된 것이었다. 정치적으로 라마교는 몽골의 지배계층이 그들의 입지를 종교적 인물을 통해 강화하기 위해서 이용되었고, 둘째로, 티벳의 황모파 지지자들이 적모파에 대항해 몽골 지배층과 연합을 꾀했기 때문이었다. 마지막으로 라마교가 몽골에 도입된 세번째 이유는 중국의 명나라에서 호전적인 몽골을 잠잠하게 만들 수단으로 라마교를 삼았기 때문이었다. 1577년, 알탄 칸(Altan Khan)은 티벳의 수장을 몽골로 초대했다. 알탄 칸은 몽골을 라마교로 하나로 통일하고자 했던 것이다. 알탄 칸은 불교신앙을 법률에 통합하여 샤머니즘의 관행을 제거하는 법적인 근거로 삼았다. 그의 이 같은 시도는 아브타이 사인 칸(Avtai Sain Khan) 에 의해 지속되었다. 아브타이 사인 칸은 1586년 제3 대 달라이 라마를 만났다. 이 만남에서 몽골 라마교의 중심으로 하라호름(Kharakhorum)에 주(Zuu)사원을 설립하는 것이 결정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몽골 라마교의 수장인 자나바자르(Zanabazar)의 지도아래 라마교 절과 학교가 생겨났다. 자나바자르는 상류 계급이나 일반인을 가리지 않고 몽골인들에게 라마교를 전하는 데 열심히 노력했다. 이후 200년간 몽골 인민 혁명이 일어날 때까지 라마교는 점점 몽골 전역으로 확산되어 나갔다. 또한 이 기간동안 승려들을 사원 밖으로 내보내 일하게 함으로써 몽골의 노동인구를 늘리기 위한 일환으로 소위 "좌익편향(Left Deviation)" (1929-1932)이라는 이름으로 대략 300개의 사원을 폐쇄했다. 일부 승려들은 처벌이 두려워 떠났다가 1932년 "새전환운동(New Turn movement)"의 시작으로 다시 사원으로 돌아왔다. 이 운동은 신앙, 교육, 선전을 지향한 운동이었다. 1936년 사원 수는 1929년에서 1932년 사이에 폐쇄당한 300개 이상의 사원을 포함해 모두 767개에 이르렀다. 그리고 "좌익 편향(Left Deviation)" 직후의 기간동안 늘어난 승려의 수는 10,000명 이상으로 전체 모두 100,000명 이상의 승려가 생겨났다. 당시 성인 라마승은 전체 남성 인구의 40%이상을 차지했다. 이것은 사회주의 국가인 몽골의 큰 문제가 되었다. 1930년대 중반, 몽골 공산당은 "사원의 기관화"를 실시했다. 이 같은 정책을 실시한 까닭은 몽골 공산 정부에 반대하는 정치 세력이 사원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설 때문이기도 했다. 당시 승려들은 사원을 떠나 세속의 생활로 돌아갈 것을 매우 강력히 권고 받았다. 1938년 약 20,000명의 승려들이 유목민이 되었으며 5,000명은 정부 지원 인원으로, 나머지 청년은 군대로, 어린이는 가족 품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나머지 승려들은 1930년대 중반 사원 방화와 파괴의 희생자가 되고 말았다. 1937년은 몽골 역사상 최악의 한해로 기록된다. 수백개의 사원이 파괴되고 수천개의 불교서적이 불에 태워졌으며 100,000명 이상의 라마승들은 세속 생활로 돌아가거나 죽임을 당했다. 이후 40년 이상, 몽골인들은 공포 속의 종교 생활을 했다. 나이든 신자들은 100여명의 승려가 남은 중심 사원 간단 사원에 나갔으며 혹은 고비 사원으로 갔다. 고비사원에는 약 40명의 승려들이 있었다. 젊은 사람들은 집에서만 종교생활을 했고 단체로 예배를 드리는 일은 중지되었다. 현재 독립국가인 몽골의 불교는 부흥을 맞이하고 있다. 젊은이들은 사원에서 운영하는 학교에 가기도 하고 1930년대 억지로 세상으로 쫓겨 났던 많은 승려들이 다시 사원으로 돌아와 원래 살고자 했던 삶을 살고 있다. 1990년, 약 20여명의 여성 신자들이 세운 여성들을 위한 사원이 울란바트르에 세워졌다. 그러나 종교 분쟁이 잠잠해진 것은 아니다. 현재 많은 외국 선교사들이 들어와 전도활동에 나섰으며 몽골인을 서구 종교로 개종시키고자 노력하고 있다.

 

 

 

 

 

몽골 여행 중에 처음 보는 아름드리 나무다. 가까이 여행자 숙소가 있고,

강이 흐르고 있어서 이렇게 큰 나무가 자랄 수 있는가 보다.

 

모기가 갑자기 기승을 부려서 하룻밤을 지내기가 쉽지 않았던 최악의 숙소였다.

숙소 옆으로 강이 있어서 많은 물도 흐르고 운치도 제법 괜찮은 곳이긴 했지만

아주 작은 모기떼의 습격에 유성우를 감상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마저 포기해야만 했다.

그날 밤은 별똥별이 비처럼 떨어지는 날로 기록되어 기사에 실리기도 했다.

일몰 직전의 한 장면, 몸에 달라붙는 모기를 쫓아내기에 바빴던 시간이다.

여행자 숙소의 본관 건물, 식당과 사우나, 맛사지 시설까지 갖춰놓고 성업 중이었다.

 

다음날 아침 일출을 보기 위해 높은 곳에 올라 조망한 여행자 캠프, 저 멀리 어제 보았던 폐사지가 보인다. 

 

몽골에서는 좀처럼 보기 어려운 강이 바로 눈앞에 펼처져 있다.

우리나라로 치면 개울 정도에 해당되지만 여기에서는 큰 강이란다.

 

 

 

오전 8시 여행자캠프에서 아침식사 후 9시 출발, 바크 가즐링 촐로로 이동(7시간 320키로)할 예정

 

하룻밤 묵은 여행객들을 환송하기 위해 캠프의 직원들은 이렇게 나란히 서서 인사할 준비를 하고 있다.

 

 

마지막 여행자 캠프에 여장을 풀고 주변의 들꽃을 살펴보았다. 가을이 오고 있는 것 같다.

 

사진의 몽골의 어느 노인과 별자리 선생님인 권 선생님은 어떻게 다른가? (주관식 문제)

 

나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연예인 중 누구와 90% 이상 닮았다면서  

 그 연예인의 이름을 부르며 나를 찾던 마명* 선생님, 인상이 너무 좋으시다.

앞으로는 나의 이름을 불러주길 기대한다. 그래야 그에게로 가서

'의미있는 존재'가 될 수 있지 않겠어? 나는 연예인이 아니다.^^

 

해가 넘어가는 순간에 찍은 파꽃의 자태, 잘 찍혔다.^^

 

 

여행자 숙소의 주인이자 가수인 ***의 기타 연주 공연, 수준급의 노래 솜씨와

기타 연주 실력에 모두가 감탄해 하면서 오랜 시간을 함께 했다. 누구는 기분이 너무 좋은 나머지

즉석에서 거금의 팁을 주기도 햇다. 대단한 공연이었다. 너무 길어진 느낌이 없지 않지만.

 

현지가이드인 보도르마도 함께 노래하고 춤추면서 잠재된 실력을 발휘했다.

음악에 취하고 분위기에 취한 홍선생님, 늦게까지 그 여흥을 살리느라 바빴다.

 

벌써 10일째다. 몽골의 초원, 하늘, 바람, 구름, 별, 모래 등과 하나 되어 보낸 지,

영락없이 해는 떠올라 또 하루를 재촉한다. 몽골의 수도 울란바타르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아침 햇살을 받은 파꽃의 싱싱함이 좋다. 여행 내내 우리들의 코를 자극했던 상큼함이 고맙다.

 

숙소 뒤 돌산의 따사로운 이미지가 아침햇살에 녹아드는 듯, 두 눈에 강렬하게 반사되었다.

 

아침 식사를 간단히 하고 이제 울란바타르 시내로 돌아가는 일정이 남았다. 오후 두세 시 경에 도착 예정!!

 

 

 

 

울란바타르 시내에 있는 캐시미어 매장에 머물면서 필요한 몇 가지를 구입했다.

 

은으로 가공된 제품이 많았는데, 비교적 가격이 쌌다. '몽골이란 나라엔 은의 산지가 많은가?'

 

 

역시 울란바타르 시내에 있는 국영백화점, 6층에 올라가지 기념품점이 있었다.

아들에게 줄 지갑과 아내에게 줄 가방을 하나 구입했다. '다들 마음에 들어할까?'

 

  17세기부터 혁명까지 몽골을 다스렸던 승전들의 궁전 1대부터 8대까지 있었으며 이들의 겨울 궁전이다. 궁전이라기 보다는 이들의 신분 자체가 라마승이었기에 라마사원이라고 해야 올바를 것이다. 러시아 왕이 지어준 서양식 2층 목조건물이 있고 이 안에는 왕과 왕비가 사용했던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1층의 한 전시실에는 8대 벅드왕의 즉위를 축하하여 군주들과 이웃나라의 왕이 선물한 몽골에서 서식하지 않고 있는 희귀한 동물 박재들이 전시되어 있다. 8대 자신이 이러한 것들에 매우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기타 우리의 관심을 끄는 전시물은 몽골 중앙지역의 영주가 벅드왕에게 선물한 150마리 눈표범 가죽으로 만든 몽골 전통 가옥인 게르가 있고 왕과 왕비가 입었던 진주로 수를 놓은 의복이 있다. 또한 7채의 불당이 있고 그 안에는 여러가지 라마교에 관련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겨울 궁전 내부에는 볼 것이 조금 있으나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었고,

의미있는 관광지가 될 법한 곳이지만 거의 관리가 되고 있지 않았다.

 

공연 배우들의 사진이 일정한 간격으로 걸려져 있는 것이 보인다.

 

오후 6시 공연인데, 시작 전에 이미 전 좌석이 꽉 차서 통로에 앉거나

임시 자리에 앉은 사람들이 보였다. 얼핏 봐도 우리나라 관광객들이 대부분이었다.

 

투멘에흐 가무단 공연 장면, 여러 가지 기예를 많이 보여줬으나 특별히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허미(Hoomii)의 고수로 보이는 분의 특이한 발성법(소리)에 모두들 놀라워하며 귀를 쫑긋 세웠다.

목소리의 성대와 가성대를 동시에 울려 저음과 고음을 같이 내는 발성인데,

몽골인중에도 1000명 중 한 명만이 이 발성이 가능하다고 하며 체력소모가 상당히 많다고 알려져 있다.

성대의 진동을 위한 공명 기관인 비강의 모양이 변하면서, 동시에 강하게 모음을 발성함으로써

멜로디 톤을 강조하기 쉽게 하면서 생기는 소리이다.

 

첫날 묵었던 울란바타르 칸 호텔에 다시 돌아와 우리 방에서 여행객 모두가 모여

그간의 여행을 정리하는 의미에서 허심탄회하게 이야기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마지막 날 저녁은 8.15광복 70주년이 되는 날이라서 우리 일행도 만세삼창을 하기로 했다.

우리의 고국을 사랑하고 걱정하는 마음을 담아서..... '위정자들이여, 진정으로 그대들은 국민들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하나니..... 더이상 국민들을 속이거나 우롱하지 마라. 언론인들이여,

그대들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 사람들인가. 자신의 본분을 잃지 마시라. 국민들은 결코

위정자들이나 언론인들의 반민주적 언행을 좌시하거나 용서하지 않을 것이오.'

 

자, 이제 다시 고국의 품으로 가야 한다. 울란바타르 시내를 통과 칭기스찬 공항으로!!

 

몽골의 전통 모자를 닮은 체육관?

 

 

 

인천공항에 짐을 부치면서 사진 한 장 찰칵!

 

여행 내내 우리 일행을 위해 애썼던 이시백 작가, 그리고 나와 일정 내내 동고동락했던 김재환 시인,

 

비행기에 오르기 전, 옥남 샘과 남전 시인은 칭기스칸의 초상화 앞에서 마지막 기념사진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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