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교육청 김종환 장학사가 출장 업무를 마치고 잠시 짬을 내어
상주 보은 주변의 동학운동 자취를 찾아보자면서 나를 직접 승용차로 태워 이곳저곳을 다녔다.
역사학도인 김 장학사의 설명을 깃들인 안내가 아니었다면 그냥 지나치고 말았을 텐데
덕분에 상주 화령 지역 주변에 실재했던 동학운동의 역사적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던 것 같다. 고맙다.
동학의 2대교주 해월 최시형 선생이 잠시 숨어살던 '전성촌(前城村)' 집터가 있던 자리
저 뒤로 보이는 산에는 산성이 구축되어 있어서 성앞의 마을이라 해서 '전성촌'이라 불렸다.
순수 우리말로는 '앞재'가 된다. 지금도 '앞재'라고 불리는 마을이다.
역시 해월 선생 등의 동학교도들이 숨어살던 상주 화남면 동광마을,
수운 최재우 선생의 가족들이 이곳에서 몸을 피한 것으로 되어 있다.
<최근 이계삼 칼럼니스트가 쓴 칼럼의 일부에 해월 최시형 선생의 말이 잠시 인용된다.
글을 쓴 의도가 해월의 사상과 잘 연결되어 있어서 여기에 옮겨 본다.>
준표 형. 저는 형님 덕택에 중학생 아들의 급식비를 매달 5만원씩 내게 된 경상남도 학부모의 한 사람입니다. 사실 저는 웬만해서는 누구한테 ‘형님’이라는 소리를 잘 하지 않는데, 진주의료원 폐업부터 무상급식 폐지까지 이어지는 형의 광폭 행보를 지켜보노라면 엉기고 싶은 마음이 들어요. 이번에 형님이 무상급식 중단을 선언하면서 ‘학교는 밥 먹으러 가는 데가 아니고, 공부하러 가는 곳이다’라고 하셨더군요. 저는 그 기막힌 말씀 때문에 이제 도지사님을 형님이라 부르기로 마음먹게 되었어요.
저는 동학의 2대 교주인 해월 최시형 선생님을 무척 존경하는데요, 그분 남기신 말씀 중에 ‘밥 한 그릇에 세상사가 다 들어 있다’(식일완만사지·食一碗萬事知)는 말씀이 있어요. 형은 학교를 ‘공부하는 곳’이라고 하지만, 저는 ‘학교는 밥 먹는 곳’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실제로 십수년 현장에서 겪은 바로도 아이들은 ‘친구들과 급식 먹는 재미’로 학교를 다녔어요. 아이들은 학교에서 나눠주는 가정통신문을 거의 제대로 보지 않는데요, 유일하게 골똘히 ‘탐독’하고 고이 모셔두는 게 바로 ‘급식 식단표’예요. 교내 체육대회 날에는 특식이 나오잖아요. 어느 해에는 한 아이가 제 입은 체육복 등판에다 그날 메뉴 ‘돼지불백, 동태전, 조개미역국’ 어쩌고 하는 거를 일일이 검정테이프로 떼서 붙여 놓고는 교내를 돌아다니며 아이들의 폭소를 자아내는 것을 보았어요. 제가 맡은 반에서 아이들과 못 어울리는 아이들이 더러 있었는데, 몇몇 아이들이 상의해서 급식 때만이라도 ‘혼자 밥 먹도록 내버려두지 않으려’고 서로 같이 ‘밥을 먹어주는’ 모습을 보곤 했죠.
저는 학교마다 농장을 조성해서 푸성귀들과 가능한 먹거리를 직접 제 손으로 거두는 일이 교육과정에 들어와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매일 수백명의 밥을 식재료 단계에서부터 조리, 배식, 뒷정리까지 그 복잡하고 고단한 과정을 알뜰하게 마무리해내는 급식소 어머니들의 노동은 지켜보노라면 그저 감탄스러울 뿐이에요. 저는 이분들이 ‘계약직 조리종사원’이 아니라 가장 중요한 ‘삶의 기술’을 몸소 시연하고 가르치는 ‘선생님’ 대접을 받아야 마땅하고, 아이들도 그 과정의 일부라도 맡아서 그분들께 배워야 한다고 생각해요.
형님은 미래의 대통령으로 ‘살기 위해’ 먹을지 모르지만, 우리들 인간은 ‘먹기 위해’ 살아요. 이 얘기만큼은 안 하려고 했는데, 실은 형님이 제 하숙집 선배거든요. 제가 복학생 시절 8개월가량 지냈던 하숙집 아주머니가 종종 ‘모래시계 검사 홍준표가 우리집 출신’이라고, ‘우리 준표가 아무거나 차려 내도 밥을 참 맛있게 잘 먹었다’고 자랑하셨어요. 형님을 검사 만들어 팔자 고치게 해준 것도 그 밥심이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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