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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여행 12박 13일 - 2

여행 이야기

by 우람별(논강) 2015. 1. 22. 0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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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뇽(Avignon)에서 두 번째 밤을 보내고 님(Nimes)을 거쳐 카르카손(Carcassonne)으로 가는 날이다.

님(Nimes)이라는 이름은 신성한 샘의 요정, 니마우수스(Nemausus)에서 유래 되었다고 한다.

이름처럼 님은 솟아나는 샘 주위에 형성된 도시이다. 곳곳에 로마의 유적이 있어서

아를과 비슷한 느낌을 주는데, 역사는 아를보다 오래 되었고 프랑스에서 가장 오래된

로마 도시로 알려져 있다. 고대 투기장과 메종카레를 보는 것이 오늘의 일정에 잡혀 있었다.

 

**** 6일째 (아비뇽 ---> 님 ---> 나르본 ---> 카르카손)

 

퐁텐 정원의 마뉴탑(Tour Magne)은 기원전 1세기에 세운 탑인데, 그 안의 나선형 계단을 통해서 전망대까지

오를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그 아래로는 붉은 지붕 일색의 전형적인 남프랑스 도시인 님 시가지가 펼쳐진다.

 

 

 

 

고대 투기장(Arenes)의 위용, AD 1세기 건설 당시에는 2만 명이 넘는 관객을 수용했다고 한다.

현존하는 로마 투기장 중에서는 중간 수준이다. 로마 시대에는 이곳에서 노예끼리 싸우게 하는

잔혹한 경기가 자주 열렸다고 한다. 지금은 연극, 댄스, 록컨서트 등 다양한 행사가 열리고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뜨거운 관심을 갖는 것은 투우이다. 연중 수 차례 있는 축제 기간 중에는

마을 전체가 투우 본고장 스페인에 지지 않을 정도의 열기에 휩싸인다고 한다.

 

 

 

 

 

 

 

메종카레(Maison Carree), 그리스의 파르테논 신전을 연상시키는 사각형의 신전이다.

코린트 양식의 기둥 등이 그리스풍으로 되어 있어 로마 미술이 그리스의 모방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건물이다. 서기 5년,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자손에게 바친 것으로,

고대에서 현대까지 님의 2000년 역사를 되새기는 3D영화(25분)가 상영되고 있다.

 

 

 

 

님 ---> 카르카손

 

님에서 나르본을 경유해서 카르카손까지 가는 거리는 만만한 거리가 아니었다. 5시간 정도?

카르카손 가까이 왔을 때는 날이 저물기 시작했다. 제법 모든 그림자가 길게 보였으니까.

 

카르카손은 지중해와 툴루즈, 이베리아 반도와 유럽의 여러 국가들을 잇는 길목 위에 있어서

오래 전부터 교통의 요지다. 이곳에 최초로 성채가 세워진 것은 기원전 3세기 무렵의 일이다.

중세 때는 로마 교황에 의해 파견된 알비주아 십자군의 거점이 되었고 17세기 스페인과의 국경이 서쪽으로

밀려나면서 요새로서의 의미를 잃은 뒤 쇠퇴했다. 19세기에는 폐허가 되었으나 그 역사적 가치가 인정되어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고 한다. 시내를 흐르는 오드(Aude) 강을 끼고 오른쪽 연안의 높은 지대를

차지하고 있는 시테(Cite)와 13세기에 정비된 성밖의 시가지 바스티드 생루이(Bastide St-Louise)로 나뉜다.

 

성벽에 설치되어 있는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오면 그곳은 중세의 마을이다.

복잡하게 뒤엉켜있는 골목길의 양 측면에 토산품을 팔고 있는

가게와 레스토랑이 즐비하여 관광지답게 부산하다.

 

'카타르파의 마을'로 불리는 카르카손 성안의 한 골목에서 카타르파의 한 상징물을 발견했다.

카타르파는 11~13세기, 주로 남프랑스의 랑그도크에 신자를 많이 둔 그리스도교 이단의

한 종파이다. 물질을 악으로 간주하고 금욕과 채식, 비폭력을 철저히 지켜 온 그들은

복음서를 지방 언어로 알기 쉽게 해설해 민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카타르파의 인기에 위협을 느낀 가톨릭은 1209년, 알비주아 십자군을 파병해

'이단 박멸'을 시도했다. 살육방법이 너무도 잔혹해 약 50년 동안 100만 명 정도의 희생자를 냈다고 한다.

카타르파를 용인한 카르카손의 트랑카벨 가문도 십자군과의 싸움에서 패해 성을 빼앗겼다.

쫓겨난 카타르파는 험준한 산 정상에 몸을 숨겼다. 그러나 십자군의 맹렬한 공격을 견디다 못하고

결국 1255년에 항복했다. 1321년에 최후의 신자가 화형에 처해져 카타르파는 전멸했다고 한다.

 

 

 

 

카르카손 성의 위세는 보는 이들을 압도하는 듯 했다.

 

성 안의 성, '콩타르 성'을 가기 위해서는 입장료를 따로 내야 한다. 박물관 입장료인 셈이다.

 

 카르카손 시테는 전체 길이가 3킬로나 되는 성채로 52개의 탑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중으로 되어 있는 성벽은 고대 로마시대의 요새 터에 세워진 것으로

3~4세기에 만들어진 내벽의 아래쪽에는 당시의 돌이 지금도 남아 있다.

 

 

 

일행들이 동영상을 보는 동안 나는 먼저 콩탈 성 안의 구석구석을 살피면서 사진을 찍었다.

 

 

 

콩탈 성을 자세히 보고 중세 마을을 한 바퀴 돌고 난 뒤, 내성과 외성 사이에 난 길을 따라 걸었다.

 

카르카손 성에서 내다 본 성밖의 공동묘지, 이 세상을 살다가 먼저 간 사람들의 위대한 자취는

유물 또는 유적으로 남는 것 같고, 생명 다한 뒤에는 저렇게 무덤의 작은 공간 하나를 차지하고

누워있다가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우리의 인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쩌면 저런 무덤을 차지하고 있는 것조차 사치가 아닐까? 삶의 무상함이여!!

 

 

'그래, 서로 위하고 의지하면서 좋은 시간 만들고, 좋은 여행 하면서 살자. 그게 최고다. 그치?'

 

카르카손의 숙소는 고전미가 느껴지는 전통의 4성급 호텔이었다.

 

숙소의 계단에서 느껴지는 멋스러움 때문에 자꾸 눈길이 간다.

 

호텔 가까이 있는 카르카손 역, 바로 앞에 총연장 240킬로미터의 미디 운하가 위치해 있었다.

 

카르카손 역 앞에서 출발하는 미니 크루즈에서는 고저차가 있는 운하를

몇 개의 수문을 통과하여 나아가는 느긋한 배여행을 체험할 수도 있단다.

 

 

 

숙소에서 남쪽으로 골목의 상가를 구경하며 죽 내려오니 카르노 광장이 나타났다.

 정교한 조각품이 일품인 분수대 앞에서 뒷짐을 쥐고 아내의 사진촬영을 기다렸다.

 

이것도 분수대? 물이 없으니 격조가 떨어진다. '역시 제 구실을 한다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없어.'

 

유 선생 내외가 묵는 객실에서 우리 내외가 한잔씩 하면서 잠시 어울리다가 돌아와 잠을 청했다.

 

전날의 카르카손 성의 야경을 보지 못해서 새벽에라도 볼 욕심으로 30분 정도 걸어서 성까지 갔으나

성을 비추는 밝은 조명이 꺼져 있어서 가로등 불빛에 드러나는 성벽과 내 그림자만을 사진에 담았다.

 

 

새벽 산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본 어느 관청 건물의 벽화 그림,

 

시테와 성밖 시가지를  연결하는 구 다리(퐁 비외)

 

 

구 다리에서 바라본 새 다리(퐁 뇌프)

 

 

블루아로 먼길 떠나기에 앞서 호텔의 식당에서 이른 아침식사를 했다.

 

 

**** 7일째 (카르카손 ---> 블루아) - 600킬로미터의 장거리 이동(오전 07:30분 출발 오후 4:30 도착)

 

 

 

 블루와로 가는 도중, 4명의 기사(운전사)들은 휴게소에 들러 피곤한 몸을 잠시 달랬다.

 

블루아에 도착, 짐을 정리한 뒤, 저녁 식사도 하고 블루아성의 야경을 보기 위해 숙소를 나섰다.

비가 조금씩 내렸고, 걸어서 시내 방향으로 가다 보니 일부 일행들은 어두운 길에서 고생을 좀 했다.

나는 걸어가다가 다리가 불편하여 잘 걷지 못하는 바우 형님 사모님을 보고는 주차장으로 되돌아가

차를 몰고 가서 태우고(유창렬 단장도 동승) 루아르 강 주변의 블루아 성을 찾아가려 했으나

길을 잘못 드는 바람에 몇 번이나 뱅뱅 돌아야 했다. 결국 강가에 서서

블루아 성의 원경만 바라보다가, 어느 식당에 들러 식사를 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일행들과 함께하지 못하고 셋이서만 따로 떨어져 있을 수밖에 없었던 아쉬움이 컸다.

우리 여행단의 책임자였던 유창렬 선생은 그 찜찜함이 컸던 탓인지 괴로워했다.

호텔 BAR에서 맥주 몇 잔을 사 마시면서 스스로를 달래다 보니 일행들이 하나 둘씩 돌아왔다.

길을 잃고 비를 맞으면서 그 먼거리를 헤맸다면서 볼멘소리를 하는 분들도 있었다.

차를 몰고 헤매긴 했어도 비를 맞으면서 걷는 고통을 함께하지 못한 미안함이 앞섰다.

그러나 여행 중 고생한 이야기는 시간이 흐른 뒤면 좋은 추억거리가 될 수 있음을 믿으며

고생한 동료들에게 쓴 소주와 맥주를 한 잔씩 권하면서 미안함을 달래야 했다.

 

 

**** 8일째 ( 블루아 ---> 상보로 성 ---> 앙부와즈 성 ---> 슈농소 성 ---> 투르)

 

 

 

상보르 성, 이 성을 세운 것은 1515년에 20세의 젊은 나이로 프랑스 왕이 된 프랑수아 1세이다.

원래는 사냥용 별궁으로 건설 되었으나 완공된 성은 높이 56미터, 77개의 계단, 282개의 난로,

426개의 방으로 구성되어 있어 사냥을 위한 산장이라고 하기엔 너무 커다란 규모이다.

 

 

 

이 성에서 가장 인기가 있는 것은 망루의 중앙에 있는 2중 나선 계단이다.

사람들이 서로 스치지 않고 오르내릴 수 있는, 절묘한 기술을 이용한 것이다.

 

 

 양탄자를 벽에 걸어놓은 듯한 태피스트리, '어느 직공이 이런 작품을 만들었을까?'

당시엔 사진도 없었을 텐데 인물의 표정까지 묘사하는 기술이 있었으니 참 대단하다.

 

 

 

 

상보르 성 ---> 앙부와즈 성

 

루아르 강을 내려다보는 고지대에 솟아있는 앙부와즈 성, 들어가 보지 못한 아쉬움이 크다.

예배당의 내부에는 1516년에 프랑수아 1세가 초대해 이 땅에서 살았던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묘가 있다.

 

 

 

 

'르 클로 뤼세',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만년에 프랑수아 1세에게서 하사 받은 저택의 입구다.

성에서 500미터 정도 떨어져 있는데 거기까지 가는 길에 관찰할 수 있는 집들의 다양함도 볼거리이다.

 

레오나르도는 여기서 3년간 살다가 1519년 1월에 이곳에서 숨졌다.

현재는 박물관으로 사용 중이며 손님을 맞았던 대형 홀 등이 재현되어 있다.

 

 

 

강둑에 서서 성 앞으로 빠르게 흘러내리는 루아르강을 바라다 본다. 마음의 평화를 느끼는 순간이다.

 

 

프랑스를 여행하는 동안 줄곧 보아왔던 플라타너스, 그 장대한 키에 위압감마저 느낀다.

 

아내는 나를 위해 도시락 점심을 마련했으나 이미 유창렬 선생과 중국음식점에 들러

뷰페 점심을 먹은 뒤라서 저녁 때 그 도시락을 먹기로 했다. 내 등 뒤로 숨는 모습이 구엽다.

 

앙부와즈 성 --> 슈농소 성

 

슈농소 성 앞의 '해자'

 

스핑크스의 형상으로 성의 입구를 만들어 놓았다.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지 못하면

출입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뜻일까? '아침에는 네 발로 걷고, 점심에는 두 발로.....'

 

 

루아르의 고성 중에서도 인기 순위 1,2위를 다투는 성이 바로 슈농소 성이다.

인기의 이유는 바로 외관의 아름다움에 있다. 성 안에 루아르 강의 지류인 셰르 강이 흐르고

강에 떠 있는 듯 새하얀 성이 그 위에 서 있다. 그 기품 넘치는 모습은 마치 물가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백조 같아 보인다고나 할까? 16세기에 창건된 이래 대대적으로

성의 주인이 여성이었기 때문에 '여섯 여인의 성'이라고도 불린다.

 

 

 

성 안의 왼쪽 첫방에 있는 조그만 예배당, 스테인드글라스와 그 주변의 장식이 인상적이다.

 

 

 

 

성 주방 내부를 공개하고 있어 사진에 담아 보았다.

 

 

 

 남성들의 관심를 끌기에 충분한 건강한 여인의 뒤태, '몇 살 정도의 여인일까?'

 

비록 석고상이지만 살아있는 듯하고 표정의 묘사가 사실적이다.

 

세 차례에 걸쳐 슈농소 성이 건축되었음을 보여주는 사진과 기록

 

카트린 정원

 

디안 정원

 

아르헨티나에서 왔다는 관광객이 사진 한 장 찍어달라고 해서 찍어줬더니

우리를 위해서 셔터를 눌러주는 친절을 베풀었다. '내가 그렇게 좋아?'

 

 

 

슈농소 ---> 투르(1박)

 

숙소에 여장을 풀고, 유단장과 나는 어둡기 전에 1시간 정도 시내를 둘러 보기로 했다.

투르(Tours)역이 숙소 바로 옆에 있고 구 시가지가 주변에 연결되어 있어서 딱이다.

 

투르는 루아르 강과 셰르 강 사이에 위치해 있고, 루이 11세 때 잠시 프랑스의 수도였던 곳이다.

지금은 루아르 고성 관광의 기점으로 언제나 관광객들로 붐빈다고 한다.

 

생 가티앙 대성당, 13세기에 착공해서 16세기 완성된 고딕 양식의 대성당, 수 세기에 걸쳐

지었기 때문에 다양한 건축양식이 혼합되었음에도 조화를 이룬 모습이 인상적이다.

 

 

건물 옆쪽으로 플라잉 버트러스(활처럼 보이는 기울어진 벽받이)가 보인다.

 

투르 성

 

플뤼므로 광장, 구시가의 중심지다. 투르에서 가장 활기가 넘치는 곳으로 카페와 레스토랑이

둘러싸여 있어서 볕이 좋은 날에는 테라스 석의 파라솔로 광장이 가득찬다고 한다.

 

 

샤를마뉴 탑, 12세기의 것이라고 한다.

 

생 마르탱 바실리카 성당

 

거리가 어두워지면서 노점상이 장사를 위해 여기저기서 불을 밝히기 시작한다.

 

법원

 

시청

 

투르 역에 있는 바에서 맥주 한 병을 사 마셔 보았다.

 

 

 

하룻밤 묵었던 호텔을 뒤로 하고 아침 일찍 몽 생 미셸까지 가기 위해 길을 나섰다.

 

**** 9일째 (투르 ---> 앙제 ---> 몽 생 미셸)

 

 두꺼운 벽으로 둘러싸인 앙제(Angers) 성, 13세기에 이웃나라 브루타뉴 공국에

 압력을 주기 위해 루이 9세의 명에 의해 세워졌다고 하는데 켜켜이 쌓은 흔적이 강하다.

 

 

 

 

해자에는 원래 물이 있어야 하지만 필요에 따라 멋진 정원으로 단장을 했다.

 

 

앙제 ---> 생 말로

 

선두 차량이 휴게소에 들르지 않는 바람에 여성들로부터 비난을 받아야만 했던 날, 

아침 식사 후 꽤 오랜 시간 달려 왔기에 제법 시장했을 것임에도 오후 2시 30분에야 식사를 했고,

휴게소로 가자고 유도하는 과정에서 다소 무리를 하는 바람에 교통사고의 위험도 있었음.

아무리 좋은 경치라도 배고프면 제대로 보이지 않는 법, '금강산도 식후경'임을 실감!

 

5만여 명의 인구를 가진 생 말로 시의 청사,

생 말로는 바다 사나이들의 마을이다. 이 항구에서 많은 뱃사람들이 출항해

드넓은 바다를 무대로 수많은 무용담을 남겼다. 17세기에는 해적들의 거점이 되기도 해

생 말로는 프랑스 최대의 항구로 번영했다. 에머럴드빛 바다에 둘러싸여 있으며

밝고 개방적인 분위기가 흘러넘치는 이 마을은 부르타뉴에서 가장 인기있는 휴양지다.

 

성 안의 한 레스토랑에서의 맛있는 점심 식사, 주문한 직후의 모습들.

 

오랜만에 내 모습을 직접 찍어보기도 했다. 소위 '셀프 카메라', '셀카'다.

 

수염을 멋지게 기른 종업원들의 모습이 보기에 좋다면서 아내는 기념촬영을 하기도.....

 

 

 

 

 

 

구 요새, 성벽에서 300미터 정도 위치의 바다 위에 떠 있는 요새 섬이 보인다.

이 요새는 생 말로의 수비를 좀더 강화하기 위해 1689년에 루이 14세 전속 군사 건축가인

보빈이라는 사람이 지은 것으로 되어 있다. 썰물 때에는 걸어서 건널 수 있으며

거기서 생 말로 주위로 펼쳐진 해안선의 아름다운 경관을 즐길 수 있다고 한다.

유단장은 날 보고 같이 갔다가 오자는 제안을 했으나 나는 시간이 없다면서 말렸다.

 

성채와 함께 연결되어 있는 시청사

 

구 시가지를 둘러싸고 있는 성벽은 12세기부터 건축이 시작되어 그 후 18세기까지 확장을 반복해 왔다.

예전에는 외적으로부터 마을을 지켜주었지만 이제는 아름다운 해안선을 건너다 볼 수 있는

좋은 산책로 구실을 하고 있는 것이다. 성벽 위에서도 산책하기 좋은데, 에머럴드 빛 바다를

바라보면서 구시가 주위를 한 바퀴 돌아볼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생 말로 ---> 몽 생 미셸(Mont St-Michel) - 1시간 정도 소요

 

대규모 주차장에서 몽생 미셸까지 왕복하는 셔틀버스,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회색빛 모래땅에 떠 있는 몽생 미셸,

중세에 이곳에 수도원이 세워진 이래 순례지로서 영화를 누려온 곳,

원래 육지와 닿아 있었으며 숲 속에 솟아있는 산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해일이 이 숲을 삼켜 버려

산은 육지에서 떨어져 나와 섬이 되었다고 한다. 이 일대는 조수간만의 차가 심하기로 유명하다.

밀물 때에는 빠른 속도로 물이 차 들어와 예전에는 섬 전체가 물에 잠겨

수도원을 방문한 많은 순례자가 목숨을 잃기도 했단다.

 

966년에 수도원 건설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그 후 수 세기에 걸쳐서 증개축이 거듭되었다.

그리하여 중세의 다양한 건축 양식이 혼합된 독특한 건축물이 오늘날의 모습이라고 한다.

 

 

 

 

 

하룻밤 묵기로 한 '르 무통 블랑' 호텔, 14세기의 건물이지만 깨끗하게 개조되어 있어 쾌적하다.

 

유 선생님 부부가 숙소가 너무 마음에 든다면서 좋아하고 있는 모습,

우리 부부가 묵는 장소는 성당 옆에 붙어있는 별채였는데, 다소 좁았다.

 

중세 무렵에는 많은 순례자들을 받아들인 몽 생 미셸이었지만, 18세기에는 감옥으로 사용된 역사가 있다.

감옥으롬의 구실을 끝난 것은 1863년인데, 드디어 중세 예술을 재평가하는 움직임과 함께 몽 생 미셸의

아름다움이 주목을 받아 현재는 프랑스에서 가장 인기있는 관광명소가 되었다.

 

저녁식사로 먹었던 새끼양고기, 처음으로 먹어 본 음식이다. 시드르(사과주) 한 잔 곁들여서!

 

아내가 시켜먹은 저녁 식사다. 워낙 감자를 좋아하긴 하나 튀김이어서 괜찮았을까?

 

호텔의 별채는 생 피에르 성당과 골목을 함께 쓰고 있었다. 왼쪽에 보이는 문이 별채의 출입구다.

조금만 더 올라가면 성당의 묘지가 있는 곳인데, 아내에게 그 사실을 일부러 알리지 않았다.

 

별채의 평면도가 벽에 붙어 있다.

 

 

 

 

새벽 6시에 일어나 산책 삼아 성안을 전체적으로 둘러보기로 했다.

날이 새기까지는 2시간 30분을 기다려야 하고 아침 식사 시간도 1시간 이상의 여유가 있다.

어둠속에서나마 천천히 걸으면서 엊저녁에 보지 못한 것들을 관찰할 수 있으면 좋겠다.

 

생 피에르 성당 입구의 왼쪽에 보이는 건축물과 조각품

 

 

생 피에르 성당 문이 열려 있어서 들어가 성호를 긋고 예를 표했다.

 

 

 

 

성안의 어느 민가 벽에 새겨진 조각품, 언제 것인지는 몰라도 그 상징과 얽힌 사연이 궁금하다.

 

 

 

 

 

 

 

 

 

**** 10일째 (몽 생 미셸 ---> 캉 ---> 에트르타 ---> 루앙)

 

아침 식사를 혼자 준비하다시피 한, 호텔 식당의 종업원은 인심이 참 좋았다.

우리 일행들이 점심 식사용으로 빵과 과일 등의 음식을 따로 챙기느라, 갖다 놓은 음식을

미안할 정도로 비웠는데, 너무 잘 먹는다면서 땀까지 흘리면서 자꾸 공급을 했다.

차여사께서는 종업원의 친절함이 고마워 팁을 5유로 정도 쥐어 주었는데

거스름돈이 없다면서 미안해 했다. 1유로는 모르겠으나 5유로는 너무 많다는 것이다.

 

아직 날이 밝지 않은 아침에 묵었던 숙소를 천천히 빠져나와 해풍을 맞았다.

간간이 비도 내리면서 쌀쌀함이 피부를 파고 들었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운행하는 셔틀버스를 타고 

주차장까지 가는 데에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빨리 갈 것을 재촉하는 듯했다.

전날 좀더 이른 시간에 도착해서 몽 생 미셸 전체를 둘러보고 수도원까지 가 볼 수 있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했던 것에 대한 아쉬움이 너무 컸었다고나 할까? 쉽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디쯤 왔을까, 해가 솟아오르기 시작하는 지점에서는 잠시 서서 사진을 찍었다.

평원지대에 해가 걸려서 그런지 나무들의 앙상한 가지가 더욱 선명하고 커 보인다.

 

어느 휴게소의 간식 시간, 전날의 여유없음을 교훈 삼아 오늘은 일행들을 좀더 친절하게 배려해야 한다.

 

캉(Caen)의 거리는 이른 아침이라서 그런지 한산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 이 도시는

온통 불타 버린 황량한 들판이었다고 한다. 1944년 6월부터 2개월에 걸친 공방전은 도시의 3/4을  불태우고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아온 피에르 교회의 첨탑도 폭격을 맞아 처참한 모습이었다고 한다.

 

생 피에르 교회, 성채 맞은 편에 우뚝 솟아 있어서 시내 어디서든 교회의 첨탑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성 피에르 교회의 첨탑, 본래의 모습으로 복구되어 캉의 시 한복판에 우뚝 솟아 있다.

 

노르망디의 영국 정복으로 알려진 정복왕 윌리엄이 1060년에 축성한 성이다.

현재는 성벽만이 남아 있으나 성벽 위에서 캉 시내의 전경을 볼 수 있다. 광대한 부지 안에는

 회화 컬렉션이 잘 갖춰진 미술관과 노르망디 지방의 역사를 알 수 있는 박물관이 있다.

 

 

 

 

캉 ---> 에트르타

 

 

 

쿠르베와 모네가 화폭에 담은 해변으로, 우뚝 솟아있는 천인단애의 경관으로 유명하다.

두 개의 단애 사이에 끼어있는 해안은 그 길이가 1.5킬로미터에 달한다.

 

 

 

  

 

 

 

에트르타 마을의 한 가옥

 

** 에트르타 ---> 루앙(Rouen)

 

세느 강 하구에 자리잡은 루앙은 그 역사가 로마 시대부터 이어지며 나중에

노르망디 공국의 수도로 번영을 누린 옛 도시다. 목조주택이 즐비한 구시가지에는

장대한 고딕 양식의 대성당과 교회가 곳곳에 있어서 인상파 화가 모네가 대성당을 화폭에 담아

세계적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15세기에 잔 다르크가 화형을 당한 마을로도 유명해서

비극의 장소에는 그녀의 이름을 딴 교회가 서 있다.

 

노트르담 대성당, 화가 모네의 유명한 연작의 모델이 된 성당, 1063년에 창건, 몇 세기에 걸쳐

수리가 거듭되었다. 특히 15세기의 스테인드글라스, 19세기에 완성된 152미터의 첨탑이 볼 만하다.

 

 

 

 

 

잔 다르크가 숨을 거둔 곳, 15세기 영국과 프랑스의 백년전쟁이 한창일 때 불현듯 나타난

구국의 소녀 잔 다르크, 패색이 짙었던 프랑스를 기적적인 승리로 이끌었지만 마녀로 몰려

단죄되었다. 1431년 5월 30일, 불과 19세의 잔 다르크는 이곳 루앙에서 화형을 당하게 된다.

처형장이던 구시장 광장에는 잔 다르크 교회가 섰으며 사람들의 참배가 끊이지 않는다.

 

 

잔 다르크 교회 앞 어느 식당에 들러 우리 여행단은 저녁 식사를 했다.

 

 

 

 

 

여행 막바지라 여기저기서 쇼핑도 하고 거리도 누비면서 시간을 아껴 썼다.

 

노르망디 특유의 목조건물들이 인상적이다.

 

 

금빛 찬란한 바늘이 하나밖에 없는 대형시계를 걸어놓은 아치가 보인다.

르네상스 양식으로 만든 이 시계는 14세기에, 문은16세기에 만든 것이라고 한다.

 

 

 

 

**** 11일째 (루앙 ---> 베르사이유 ---> 파리) 

 

안개 속에 숨어있어 신비감을 더하고 있는 베르사이유(Versailles,벡사이) 궁전,

 

단체 입장권을 끊어 입장하기 직전의 우리 일행들, 사진 찍히는 기분이 어떨까?

 

베르사유는 세계에서 가장 화려한 궁전으로  루이 13세가 사냥을 즐기기 위해

세웠던 작은 저택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을 절대왕정의 상징으로 바꾼 것은

루이 13세의 아들이자 1661년 신정을 시작한 루이 14세이다.

 

왕의 생활 공간이면서도 동시에 정치의 중심지가 되었던 왕의 침실,

마리 앙투아네트를 비롯하여 역대 왕비가 사용하였던 왕비의 침실 외에도

예배당과 오페라 극장 등 모든 방이 정신이 아찔해질 정도로 호화롭다. 

 

 

 

 

 

1684년에 완성한 거울의 방, 73미터나 되는 대회랑의 한 쪽 벽면이  당시 고가였던 거울로

이루어져  있어서 그 사치스런 공간은 유럽의 왕후 귀족들의 동경의 대상이 되기도 했단다. 

 

 

 

 

 

 

 

 

 

 

 

베르사이유 ---> 파리

 

파리 외곽의 숙소에 짐을 맡긴 뒤, 파리 시내 여행을 위해 그 중심부로 차를 몰았다.

이제부터는 루브르 근처에 있는 렌트카 회사(Herts)에 4대의 차를 모두 반납하고

나머지 일정을 소화하도록 되어 있다. 기사들은 일행들과 헤어져 선두차를 따라 다니며 주차공간을

찾아 루브르 주차장 부근을 뱅글뱅글 돌면서 한 시간 정도 이리저리 헤매면서 힘들어 했다.

겨우 어렵디어렵게 허츠 주차장을 찾아 반납을 하고 나니 앓던 이를 빼내버린 기분이었다.

 

여행단의 총무로서 처음부터 끝까지 혼신의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손경수 부장님,

특히 그 사모님께서는 모든 통역을 맡아 해 주셔서 누구도 의사소통에 무리가 없었다.

 너무너무 고마웠음을 이 자리에서 밝힌다. 그리고 우리 친구 유창열 단장, 정말 수고했다.^^

 

길을 헤매면서 기회를 잡아 찍었던 개선문, 꼭대기까지 오른 사람들이 개미처럼 보인다.

개선문의 규모를 가히 알 만하다. 5년 전에 가까이 가서 찍었던 기억이 새롭다.

 

 기사들이 렌트카를 반납하기 위해 여기저기 헤매는 동안 다른 일행들은 다행히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된 온갖 예술작품들을 2시간 정도나마 감상할 수 있었다.

 

 1808년에 완성된 카르젤 개선문, 나폴레옹의 여러 차례 전쟁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높이 14.6미터, 폭 19.5미터로 건축되었다. 콩코드 광장의 오벨리스크, 에뜨왈(드골) 광장의

개선문, 이 3개의 건축물이 일직선으로 놓여 있는 것이 큰 특징이다.

 

 

 

 

퐁 데자르(예술 다리)에는 잠겨진 사랑의 자물쇠가 수없이 걸려 있다.

자물쇠에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쓰고 잠근 다음 , 열쇠는 강물에 버린다?

사랑을 약속한 사람과는 결코 헤어져지 않겠다는 결심의 표편이기도 해서 비장함마저 느껴진다.

사랑의 자물쇠에 얽힌 세르비아의 어느 슬픈 사랑이 시인의 심금을 울리면서

현재화 되고 젊은이들의 사랑에 불을 지핀 것이 바로 사랑의 자물쇠!!!

'그나저나 그 자물쇠의 무게도 엄청나서 다리가 위험할 수도 있겠는 걸.'

 

퐁 네프 다리 아래로 지나가는 배, 납작하게 생겨서 세느 강을 안전하게 오르내리는 데는 안성마춤!!

 

 

 

 

 

 

 

 

노틀담 대성당, 파리의 발상지인 시테 섬에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솟아 있다.

역사의 보고인 파리에서도 특히 귀중한 초기 고딕 건축의 걸작이다. 1163년에 착공하여

1330년 무렵 완공되었다고 하니 170년이라는 긴 시간을 들여 지어진 것이다.

거대한 내부 공간! 그 공간을 채우는 스테인드글라스에서 쏟아지는 신비로운 빛!

이 성당에도 몇 가지 수난이 있었다. 프랑스 혁명 당시에는 조각이 파괴되고

사제는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성당은 그렇게 폐쇄되어 황폐해져 갔던 것이다.

그 후 나폴레옹이 다시 이곳에서 대관식을 거행하고, 위고의 소설 '노틀담 드 파리'로

그 문화적 중요성이 재인식됨에 따라 대대적인 복원 작업이 시작되었다.

대성당은 1864년 드디어 본래의 빛나는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고 한다.

 

 

일부 일행은 에펠탑을 보러 가고, 바우 형님 부부께서는 몸이 안 좋다고 해서

호텔까지 택시로 모셔다 드리고, 우리 부부는 몽 마르트 언덕을 올라 보기로 했다.

 

우리 일행이 프랑스 여행에서 마지막 밤을 보내기로 한 호텔이다.

길 건너편에서 택시를 기다리다가 한참 지나도 오지 않아서 걷기로 했다.

 

걷다가 오른쪽으로 보니 운하가 보인다. '우르크 운하'다.

 

운하를 이용하는 관광객들도 제법 많은지 사람들이 줄을 서서 승선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조금 더 걸어가다가 택시가 오길래 손을 드니 세워 준다. 알고보니 기사는 매우 친절했다.

몽 마르트 언덕까지 얼마나 걸리냐고 물었더니 15분 정도 걸린다며 웃었다. (15유로 지급)

 

몽마르트르(Montmartre), 석양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려는 사람들로 붐볐다.

파리 북단에 있는 언덕인 몽마르트르, 하얀 벽의 성당 사크레 쾨르가 높게 솟아 있는

이 언덕을 중심으로 한 일대에는 지금도 화가가 사랑했던 풍경과 만날 수 있다.

 

 

 

 

몽마르트르 언덕에서 내려다보는 파리 시내, 장엄한 석양 빛에 어울려 신비롭기까지 하다.

 

사크레 쾨르 성당, 비잔틴 양식으로된 3개의 새하얀 돔은 햇빛을 받으면 더욱 환해진다.

성당이 건축된 것은 보불전쟁과 파리코뮌의 붕괴로 낙담한 시민들을 위한 것이라 한다.

가톨릭 교인이 기부한 4000만 프랑을 들여 40년에 걸쳐 1919년에 완공했다.

 

 

 

 

 

이 시각의 에펠탑 상황은 어떤지 궁금해진다. 직접 가 보지 못한 아쉬움은 있으나 5년 전의

그 느낌을 되살리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리라. 동료가 보낸 사진이나 이곳에 올려 두자. 

 

 

 

에펠탑 전망대 위에서 조망한 파리 시내, 석양과 더불어 유유히 흐르는 세느강은 조용히 어둠을 맞고 있다.

 

 

우리 일행들은 에펠탑 아래에서 1시간 정도 줄을 섰다가 전망대에 겨우 올랐다고 하는데

우리 부부는 몽마르뜨르 언덕에서 일몰 직전의 석양을 즐기다가 상점에 들러 쇼핑도 하고.....

 

 

광장 모서리에 있는 레스토랑에 들어가 저녁 식사를 했다.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붐볐다.

 

지중해 피자와 갈레뜨가 이날의 저녁식사다. 맥주 한잔 곁들이고....

 

 

 

테르트르 광장, 초상화를 그리는 화가들이 많다. 한국에서 왔냐며 묻는 화가가 있어

바라보니 우리나라 여류화가였다. 초상화를 그려줄 테니 앉으라는 말도 곁들였다.

시간 관계상 그냥 돌아서야 했지만, 왜 좀더 대화를 나누지 못했을까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이방인 화가로서의 삶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르거늘

참으로 좋은 기회를 놓쳐버린 데 대한 아쉬움이 컸다.

 

 

 

 

 

 

 

 

 

 

**** 12일째 (파리 ---> 드골공항 ---> 인천)

 

프랑스 여행을 모두 마치고 이제 대한민국으로 귀국하는 날,

일찍 잠을 깼다. 아내에게 산책을 다녀오겠다고 말하고 호텔 문을 나섰다.

전날 밤에 호텔 뒤로 봐 두었던 '과학 산업 시티'라는 건물과 그 주변을 둘러보고 싶었던 거다.

아침 바람이 제법 차서 장갑, 귀마개까지 준비하고 천천히 걸었다.

 

라 비예트(La Villette)는 고 미테랑 대통령이 추진한 '그랑 프로제(파리 대규모 개발 계획)'의 일환으로

재개발된 미래 지향적인 종합 공간이다. 여름에는 야외 상영제와 재즈 페스티벌도 열린다고 한다.

 

 

 

오른쪽의 둥근 건축물이 유명한 제오드(Geode)다. 지금 36미터의 거대한 공 모양의 영화관이란다.

 

과학 산업 시티와 라비예트 공원 사이에 있는 우르크 운하

 

 

라비에트 공원 안에 있는 도서관

 

책의 크기와 쪽수에 따라 가격표가 다르다. 한화로는 얼마일까? 1유로는 1400원 정도이니까.

 

 

과학 산업 시티, 독특한 기획전으로 유명한 과학 박물관이다.

호텔의 숙소 창문에서 정면으로 보였던 사진 그대로다.

 

산책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니 일행들은 벌써 아침 식사를 끝내고

행장을 꾸리며 귀국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호텔에서 동역까지 지하철을 타고 북역에서 환승하면 드골공항까지 곧장 갈 수 있다.

 

 

드골공항까지 가는 지하철 안의 모습들

 

남편 뒷바라지 하랴 3남매 키우랴 고생을 많이 했던 사모님, 그리고 우리 친구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 보니 참 좋다. 덕분에 나는 여행 잘하고 이렇게 행복하다우.^^

 

유영배 선생님, 이번 여행 때 멋진 사진을 남길 생각으로 폰까지 새로 바꿨단다.

사진 찍어 놓은 것을 보니 대성공이다. 시간나는 대로 내 사진은 카톡으로 보내주리라 믿는다.

사모님과는 10일 내내 함께 차를 타고 다녔기에 정도 많이 들었다.

 얼마나 재미있었는지 모른다. 유선생님의 배려가 아닌가 생각된다.

 

드골 공항에서 탑승 절차를 마치고 탑승구인 L46 게이트에 도착했을 때는 

아직도 출발 시간이 1시간이나 남아서 이래저래 여유가 많이 생겼다.

12일 동안 여행한 과정을 되새기면서 관련 자료를 훑어보았다.

 

'나는 이번 여행에서 무엇을 보았으며 무엇을 느꼈는가?'

이것에 대한 답을 하기 위해서는 늘 그랬듯이 귀국 후 기행문을 써야 하리라.

'왜 하필이면 우리가 프랑스까지 왔는가?' 답은 '글쎄'였다.

어느 새 여행이 나의 삶의 일부가 되어 있는 느낌을 저버릴 수 없다.

'여정회'의 프랑스 여행 소식을 듣고 나도 함께 가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했고

그것이 받아들여져 이렇게 프랑스 여행에 동참하게 되어 참 고맙다.

보통 인연이 아니다. 여행을 함께하면서 맺어진 인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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