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소가 있던 파묵칼레에서 에페스까지는 버스로 한참을 가야하는 거리이다.
중간에 들른 곳은 바로 그리스인들이 모여 살았던 쉬린제 마을이다.
원래 그리이스인들이 살던 곳인데 1924년 인구 교환으로 그리스에서 온 터어키인들이 정착해서 살고 있다.
언덕 경사면을 따라 하얀 집들이 들어서 있는 광경은 마치 샤브란 볼루의 구시가지를 연상시킬 정도다.
우리 나라에서 볼 수 있는 제비가 터키에도 있고, 집을 짓는 방식도 똑같다.
위도상으로 우리와 비슷한 위치에 있는 나라이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이 마을은 와인으로 유명해서 곳곳에 많은 와인 가게가 성업 중이다.
대부분 동네 주민들이 운영하며 시음할 수 있도록 해 놓았다.
포도주 이외에도 살구, 멜론, 딸기, 키위, 블루베리 등으로 만든 와인도 있는데
와인이라기보다는 과실주에 가깝다. 아내도 블루베리와 살구와인을 각각 10달러에 구입했다.
'오늘 저녁 숙소에서 심박사 내외와 함께 마시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점심은 어느 한국인이 경영하는 식당에서 한식으로 해결했다. 오랜만의 포식이었다.
현지가이드가 안내한 가죽 공장에 잠시 들렀는데, 쭉쭉빵빵 남녀 모델이 가죽옷을 입고
워킹을 하다가 갑자기 우리 일행 중의 일부를 불러내어 즉석 모델로 위촉을 하더니
가죽옷을 몇 벌 입히고는 우리 눈앞에 같이 걸어 나와 한 바퀴 돌게 했다.
아내도 즉석모델이 되어 히죽거리면서 내 앞을 지나가고 있다.
'세상에 세상에 살다보니 별일이 다 있구먼.' '가죽옷을 입으면 기분이 특별할까?'
에페스로 가는 길, 에페스는 고대 로마의 도시 유적이 있는 곳이다.
에게해는 물론 터키 전역을 통틀어 양과 규모에서 비할 데 없는 최고의 유적지다.
기원전 2000년경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한 흔적이 발견되었으며
고대로부터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에게해의 중심 도시였다.
바리우스 욕장, 2세기에 건립된 목욕탕으로 내부에 냉탕, 온탕, 탈의실, 사우나 등의 시설과
공중화장실까지 있었다. 로마시대의 도시는 먼길을 온 여행객들이 피로를 씻고 도시에 들어갈 수 있도록
도시 입구에 목욕장을 갖춰놓았다고 하더니 입구의 욕장이 제일 먼저 보였다.
오데온, 14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로 지붕이 있던 소극장. 이곳에서
음악회나 시낭송회 등이 개최되었으며 정치적 의사결정이 이루어지기도 했단다.
시청사 건물
제의가 거행되던 프라타네이온(신전 및 시 청사)
멤미우스 기념탑, 기원전 1세기 로마의 독재관 술라의 손자였던 멤미우스가
자신의 할아버지인 술라의 소아시아 평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건립했단다.
니케(NIKE) 여신 부조, 승리의 여신 니케의 부조 날개가 달렸으며,
왼손에는 승리의 상징인 월계관이 오른손에는 밀다발을 들고 있다.
유명 스포츠 브랜드 '나이키'의 어원이기도 하다.
트라야누스 샘, 2세기 초 로마황제 트라야누스에게 바친 샘터라고 한다.
당시의 모자이크 기법과 솜씨를 엿볼 수 있는데, 아직까지 파괴되지 않고 남아있다는 게 신비스럽다.
공중화장실, 50명이 동시에 사용할 수 있는 규모였으며 중앙에는 연못도 조성해 놓았다.
용변만 단순히 처리하는 기능이 아니라 사람들을 만나는 사교의 공간이기도 했단다.
벽을 따라 나 있는 둥근 구멍은 좌변기다. 앉은 곳 앞쪽에 보면
수로가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는 볼일을 마친 후 씻기 위한 용도였다.
셀수스 도서관, 에페스의 상징이기도 하다. 전성기 때는 1만 2000권의 두루마리 장서를 보관했는데
이것은 고대 지중해에서 세 번째로 큰 규모였다. 270년에 지진으로 무너졌으며 1970년에 복원되었다.
이 건축물이 오랜 세월 무너지지 않고 이렇게 튼튼하게 남아있는 것은
무지개처럼 아치의 형태를 이루면서 돌 하나하나가 저마다의 하중과 단단함으로
맞물려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건축술의 위대함을 새삼 느끼는 순간이다.
대극장, 기원전 3세기 헬레니즘 시대에 지어진 것이다. 1세기 로마 시대에 대대적으로 증축되었으며
최대 수용인원 24,000명을 자랑하는 거대한 규모다. 로마 시대 말기에는 검투사와 맹수의 싸움도 벌어졌다.
시각과 음향 효과를 고려해서 무대에서 멀어질수록 아래쪽보다 위쪽 객석의 경사를 급하게 만들었다.
에게해 바닷가 아이발륵이란 곳에 있는 숙소에서 하룻밤을 유하고
다음날 트로이 유적을 찾기로 되어 있다. <6박, SARUHAN HOTEL>
트로이 목마, 철저한 고증에 의해서 재현한 것이라기보다는 관광객을 위한
이벤트성 볼거리에 가깝다. 안에 들어가 볼 수 있으며 창문도 만들어 놓았다.
우리 일행도 목마에 올라 창문밖으로 머리를 내밀어 기념사진으로 남겼다.
트로이 전쟁 당시 사용되었던 목마는 어떤 모습일지 자못 궁금해졌다.
목마 안에 남아 있다가 절호의 기회를 포착해서 적을 혼란에 빠뜨리게 했던
용감한 군인들의 충성심을 역사는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
트로이 유적, 호머의 대서사시인 <일리아드>에 등장하는 트로이 전쟁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아테나 신전의 지붕돌로 예상되는 부분인데 비교적 조각이 정교함을 알 수 있다.
슐리만의 구덩이, 슐리만은 여기에서 황금덩이를 발굴해 냈다고 한다.
성벽 경사로
트로이 유적 1 ~ 트로이 유적 9까지 이렇게 유적이 위치하고 있는 곳을 표시해 두었다.
100년이 넘는 발굴작업 결과 트로이 유적은 한 시대의 것이 아니라
청동기 시대부터 9개의 서로 다른 시기의 유적이 중복되어 있음이 밝혀졌다.
지진과 화재, 전쟁 등의 이유로 소실된 도시 위에 또 다른 도시를 건설했기 때문이다.
트로이는 역사적 중요성을 인정받아 1996년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었다.
기원전 3000년~기원후 500년까지의 유적이 혼재된 만큼 그 역사적 가치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것 같다. 전설 속의 도시로만 알려졌던 트로이가 실제의 역사였음을
증명시킨 독일의 사업가 하인리히 슐리만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것은 왜일까?
유명세에 집착한 무리한 발굴과 보물에 대한 탐욕을 비난하기에 앞서서 그의 호기심은
위대한 발견으로 이어졌던 만큼 고고학적 업적은 재평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로마 시대에 건설된 오데온(음악당), 아테나 신전과 함께 트로이 유적 중 가장 늦게 만들어진 것이다.
로마인들은 자신들의 건국 시조인 아이네아스가 탄생한 트로이에 많은 정성을 기울였다고 한다.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 등 제정 로마 초기의 황제들이 원형극장과 목욕장, 신전 등을
건설했는데 현재 남아있는 것이 아테나 신전과 오데온인 것이다.
트로이에서 다시 이스탄불까지는 배 타는 시간(25분)을 포함해서 5시간 30분 정도가 소요된다고 한다.
명절을 쇠고 이스탄불로 돌아가는 차량들이 한꺼번에 몰리면 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을까 걱정이다.
탁심 광장 가까이 있는 한국 식당을 찾아 맛있는 저녁 식사를 하고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는 중이다.
지금부터 탁심 광장 둘러보기를 시작으로 갈라타 다리까지 이스탄불 야간투어가 시작된다.
히잡을 두른 이슬람의 여인들이 우리 일행을 쳐다보면서 지나가고 있다. 저들의 삶은 어떨까?
탁심 광장, 탁심은 신시가지의 중심이며 상업과 쇼핑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광장으로
과거에는 정치적인 모임과 시위가 벌어졌던 곳이다. 시민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은 정부가
이곳에서 시민과 학생들의 민주적 시위로 한동안 홍역을 치른바 있다. 지금은 평화로우나
언제 또 시민들의 분노가 폭발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국민들의 민주적 시위를
혼란이라 규정지어서는 안 된다. 자연스런 의견 표출이라고 보아야 옳다. 그렇지 않나요?
툭하면 국민들의 합법적 평화시위를 경찰의 공권력으로 짓밟아 놓고는 방송을 통해서
국가전복세력이니 불법폭력집단이니 매도하는 행위는 정말 글러 먹었다. '아, 대한민국!!'
광장 중앙에 있는 12미터 공화국 기념비는 1928년 이탈리아 건축가 피에르토 카노니카가
만든 것으로 터키의 독립전쟁과 공화국 탄생을 기념하는 조형물이다.
탁심 광장 남쪽으로 이어져 있는 이스티클랄 거리는 서울의 명동에 해당된다고 보면 되겠다.
명품 가게, 레스토랑, 은행과 각국 영사관이 밀집해 있으며, 분위기 좋은 클럽과 바가 성업 중이다.
자유로움과 발랄함이 넘치는 젊은이들의 물결에서 서구화를 지향하는 터키의 주소를 확인할 수 있다.
이 골목을 우리 일행이 지나갈 때, 기타 연주자는 갑자기 '강남스타일'을 외치면서 반가움을 표했다.
아내가 군밤이 먹고 싶다고 하자, 심박사님이 즉석에서 한 봉지 구입해 주신다.
아내는 '무슨 말을 못하겠어요.' 하면서 미안해 했지만 박사님의 착한 마음은 끝이 없다.
고마운 마음으로 밤알을 입안에 쏙 넣으니 달콤고소한 맛이 금방 가득해졌다.
심박사님과 아내는 거리의 악사(?) 곁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자그마한 정성을 표하고 있다.
약 2킬로 남짓한 거리의 건물은 대부분 유럽식이고
빨간색 트램이 양쪽 끝을 오가며 이국적인 정취를 자아낸다.
다리도 쉴 겸해서 한 카페에 들어가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시켜 먹으며 여유를 즐겼다.
터키에는 과일을 껍질 채 넣어서 기계로 압착, 주스를 직접 추출해 내서 파는 곳이 많다. 그 맛은? '쥑인다.'
기차역의 외관 모습이다.
첫날부터 마지막날까지 현지 가이드로 열심히 일해 준 송인찬 선생,
그는 대학에서 성악을 전공해서 그런지 목소리가 맑다. 골초인 것이 흠이지만,
터키에서 7년째 가이드로 지내고 있다고 하는데, 하루 쉬고 또 손님을 받아야 한단다.
여행 내내 우리 일행을 도와 가이드의 역할을 잘 해냈다고 평가하고 싶다.
갈라타 다리에서 처음으로 단체 사진을 찍었다. 개인별로 사진파일을 곧 보내줘야 하리라.
고등어케밥을 먹으며 야간 투어를 마쳤을 때는 거의 1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숙소까지 가려면 다시 한 시간 정도를 버스로 더 달려서 12시에 도착, 잠이 아무래도 부족할 것 같다.
새벽 4시에 기상한다고 하니 단 4시간밖에 잠을 자지 못한다. 빡빡한 일정을 소화하기가 만만찮다.
그러나 오늘 밤을 보내고 나면 이제 터키 여행도 마지막이다. 심박사님 내외는 매우 힘들텐데.....
마르마라해 주변의 어느 숙소에서 우리는 잤나 보다. 캄캄한 밤을 달려 자정 무렵 도착했었는데,
호텔의 쾌적함은 좋았으나 불과 서너 시간 잠자고 금방 나와야 하는 현실이 아쉬울 수밖에.....
아, 터키에서의 마지막 밤이여!!! <7박, 이스탄불 DIAMOND HOTEL>
이스탄불 시내에 들어와 제일 먼저 들른 곳은 골든 혼 부근의 어느 찻집이다.
찻집이 있는 위쪽까지 15분 정도 걸었던 것 같다. 공동묘지를 지나게 되는데 나무가 많고
공원처럼 조성해 놓아서 으스스한 기분은 전혀 들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이 편하다고나 할까?
산자와 죽은자가 가까이 함께 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기에도 충분하다.
생몰연대가 비석에 새겨져 어느 시대를 살아온 사람이었는지를 알게 한다.
터키의 장례 풍습에서 시신은 될 수 있는 한 빨리 매장한다고 한다.
오전에 사망했으면 정오 예배를 보고 오후에 매장하며
정오가 넘어 사망했으면 오후 예배를 마치고 매장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전쟁에서 죽은 시신은 시신을 씻지 않고 피 묻은 채로 매장한다.
이것은 공간이 큰 점과 묘비로 봐서 한 개인의 묘가 아니라 세 명이 묻힌 가족묘원이 아닐까?
숱한 무덤들, 나름대로 생전에는 인생을 풍미하면서 살았을 것만 같은데
자그만 공간을 차지하고 누워서 풀 한 포기 꽃 한 자루씩 피우고 있다.
언젠가는 나도 이 세상을 떠날 텐데 유골은 어디에 뿌려질지.....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란 말이 있듯이 저 고양이도 발 딛고 저렇게 살아있는 한,
뭔가를 주시하고 먹이를 찾아내야만 한다. 그게 운명이다. 구하지 못하면 죽는다.
그것이 어쩌면 살아있는 고양이의, 아니 우리 사람들의 슬픔인지도 모른다.
아무리 힘있는 권력자든, 재력가든, 그 누구든 죽음을 거역할 수는 없다.
나는 이 공동묘지 언덕을 오르면서 다시 한번 죽음을 생각하게 된다.
그 죽음이 언제 찾아오든,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을까를 생각한다.
그러기엔 아직 정리할 일이 많이 남았다는 생각에 마른 침을 삼켜야 했다.
피에르로티의 찻집, 프랑스 작가였던 피에르로티가 이곳을 즐겨 찾은 것에서 유래해 이름을 붙였다.
나무가 우거진 숲속 같은 분위기에 '골든혼'과 주변 경치가 뛰어나서 시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단다.
앞에 보이는 바다가 바로 '골든혼'이다. 마르마라해와 보스포러스 해협에서 8킬로 정도 깊이 들어간
천연의 요새를 끼고 있는 항구인 것이다. 이곳을 차지하기 위한 전쟁의 역사도 있다.
찻집 앞에서 케이블카를 타고 200미터 정도 잠시 내려가면 조금 전에 올랐던 공동묘지 입구가 나온다.
대기하고 있던 버스를 타고 구시가지의 술탄 마흐메트 1세의 자미(블루모스크)가 있는 곳으로 갔다.
8시부터 출입이 가능하다고 하는데 벌써 사람들은 길게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히포드롬, 비잔틴 시대에 전차 경주가 벌어지던 경기장이다. 경기장은 세로 500미터
가로 117미터의 규모였는데 지금은 3개의 기둥이 서 있는 공원으로 바뀌었다.
가장 남쪽에 있는 기둥은 이집트 오벨리스크라고 불리는 것으로 기원전 16세기
이집트의 파라오 투트모세 3세가 시리아 정복을 위해서 유프라테스 강을 건넌 기념으로
룩소르의 카르나크에 세운 것 중의 하나다. 세계의 중심을 상징하는 오벨리스크,
비잔틴의 콘스탄티우스 황제가 가져왔고 390년 테오도시우스 1세가 현재 자리에 세웠다.
아야소피아 박물관, 본당 55미터의 돔,
중앙 돔을 중심으로 이슬람문자가 새겨진 커다란 원판이 있는데
이는 알라와 예언자 무함마드를 비롯한 초대 칼리프의 이름이다.
직경 7.5미터의 이 원판은 이슬람 세계의 최고 달필로 손꼽히는 작품이다.
제일 안쪽의 '미흐랍'은 오른쪽으로 조금 치우쳐 있다. 메카의 방향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미흐랍 옆의 계단은 '밈베르'이고, 왼쪽은 술탄이 앉던 자리다.
박물관 내부에는 총 91개의 채광창이 있는데 이는 자연광을 이용해
벽화를 부각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만든 것이라 할 수 있다.
내랑에 들어서면 왼쪽 끝에 2층으로 올라가는 길이 있다. 계단 대신 비탈길로 만들어졌다.
그 이유는 다른 여성들이 가마를 타고 올 때 기도하고 있는 여성을 방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수심이 가득한 예수와 성모 마리아, 세례 요한의 얼굴이 인상적이다.
위 모자이크의 부분을 자세히 보기 위해 당겨서 찍었다.
2층에서는 모자이크화를 더 자세히 감상할 수 있다.
아야소피아 박물관을 훑어보았으니 다음은 블루모스크를 둘러볼 차례다.
아야소피아 박물관 맞은편에 서 있는 블루모스크
블루모스크 입구,
드디어 안으로 들어섰다. 미나렛이 하나 우뚝하게 서 있어 블루모스크의 위치를 확인해 주고 있다.
개방 시간과 폐쇄 시간을 알려주는 게시판, 특히 폐쇄 시간을 이용해서 예배가 이뤄지고 있음을 알겠다.
술탄 아흐메트 1세 자미(블루모스크),
아야소피아 박물관 맞은편에 있으며 터키에서 가장 아름다운 자미 중의 하나다.
‘자미’는 이슬람 사원을 지칭을 터키어로 ‘꿇어 엎드려 경배하는 곳’이란 뜻이다.
1609년에 착공해서 1616년에 완공되었다. 유독 종교적 신념이 철저했던 술탄은 기공식에 참석해
직접 땅을 파고 흙을 날랐다고 한다. 건물은 높이 43미터, 직경 27.5미터의 거대한 중앙돔을
4개의 중간돔과 30개의 작은 돔들이 받치고 있으며 6개의 미나레(첨탑)가 본당을 호위하고 있다.
자미의 미나레는 두 가지 기능이 있는데 하루 다섯 차례의 예배 시간을 알리기 위해
소리치는 것과 외부인에게 자미의 위치를 쉽게 알려주기 위함이란다.
내부에는 260개의 스테인드글라스 창이 실내를 비추고 있으며
2만 1000여 장의 푸른색 타일이 창에서 들어오는 빛과 어우러져
신비로운 느낌을 자아낸다. 이른바 ‘블루모스크’라는 별칭이 붙은 이유다.
건물의 쓰임이 무엇이었을까 궁금하여 가이드에게 물으니 물 저장고란다.
자료를 찾아 보니, 1723년에 지은 '술탄 마흐메트 3세의 샘'이라고 되어 있다.
화려함의 극치를 보는 듯하다. 지붕과 처마의 디자인, 금박을 입힌 부분이 눈에 확 들어온다.
톱카프 궁전, 세계 최강대국으로 명성을 떨쳤던 오스만 제국의 술탄이 거주하던 본 궁전.
15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초까지 약 500년간 오스만제국을 통치했던 36명의 술탄 중
톱카프에 살았던 술탄은 18명, 궁전을 처음 지었을 당시에는 ‘새로운 궁전’ 또는 그냥 ‘궁전’이라 불렀는데
후대로 오면서 정문 앞에 거대한 대포가 있어 톱카프로 불리게 되었다.
'톱'은 '대포', '카프'는 '문'이라는 뜻이란다. 21만평에 달하는 광대한 궁전은
1856년 새로운 궁전 돌마바흐체에 영광을 넘겨주기까지 명실상부한 제국의 핵심이었다.
바브 셀람(예절의 문) 입구 부분
예절의 문 천장 부분
예절의 문을 통과하면 제 2정원이 이어지는데 이곳부터 본격적인 궁전이 시작된다.
제 2정원의 왼쪽으로 위치해 있는 의회 건물이다.
바브 사뎃(행복의 문), 로코코 양식으로 지어졌다. 이 문 앞에서 술탄의 대관식 등
국가의 주요 행사가 치러졌으며 외교 사절도 이곳에 술탄의 알현을 기다렸다고 한다.
안으로 들어서면 제 3정원인데, 알현실, 아흐메트 3세의 도서관,
유물전시실, 보물전시실 등 볼 것이 많이 있다고 한다.
톱카프 궁전의 백미인 보물 전시실 입구, 에머럴드, 루비, 다이아몬드 등 세계 각지에서 모은
엄청난 보물들을 자랑하는데 그 중 관람객의 가장 큰 관심을 끄는 것은 86캐럿 짜리 다이아몬드와
세계 최대의 에머럴드가 박힌 톱카프의 단검, 황금의자 등이다. 무한 권력을 누린
술탄의 부와 권세를 짐작할 수 있는 온갖 보물이 많이 있다고는 하나 아무런 감동이 없었다.
제 4정원에서 본 바다, 제 4정원은 술탄과 가족들을 위한 휴식공간이었다. 다른 정원에 비해
규모가 작고 정자 격에 해당하는 쾨시퀴라는 건물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전망이 좋기로 유명하다.
마르마라해, 보스포러스 해협이 한눈에 들어오는 최고의 인증샷 장소로 각광 받고 있다.
제 3정원 안에 있는 술탄의 알현실 건물 처마 부분이다. 알현실은 외교사절을 접견하고
중요한 협상을 하던 일종의 회담장소였다. 술탄은 존재의 신비감을 유지하기 위해
국무회의 등 공식석상에 거의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고 외교사절을 접견할 때 이 방을 사용했다.
사람의 목을 치던 망나니가 일을 끝내고 손을 씻었던, 이른바 '망나니의 샘'이다.
술탄 마흐메트 3세의 샘, 자꾸만 눈길이 간다. 처마 부분의 정교함이 인상적이다.
톱카프 궁전의 외벽을 따라 너른 골목 아래로 주욱 내려오니 택시 정류장도 보인다.
톱카프 궁전에서 7,8분 걸어내려오니 한식 식당인 '한사랑 식당'이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터키에서의 마지막 식사가 이뤄진 장소다. 음식맛이 좋아 다 먹고 나서도 더 먹고 싶었다.
터키 여행의 아쉬움이 이렇게 맛있는 점심을 들면서도 계속되고 있었나 보다.
데오도시우스 성벽, 413년 비잔틴 제국의 데오도시우스 2세 때 지은 성벽이다.
구시가지를 에워싸듯이 둘러서 있으며 1000년 동안 외적으로부터 이스탄불을 지켜온
철옹성이다. 총길이 6.5킬로미터에 이르는 성벽은 이중으로 되어 있는데, 바깥쪽 성벽은
높이 10미터, 두께 5미터의 3중 구조로 견고하게 축조되었으며 11개의 성문과
195개의 감시탑이 있었다. 1204년 제4차 십자군 원정으로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될 때도
골든혼 부근 일부만 제외하고 육지쪽 성벽은 건재했으며, 이스탄불을 점령했던
오스만 제국의 메흐메트 2세도 이 성벽만은 돌파하지 못하고 열린 문을 통해
이스탄불로 입성했다고 하니 성벽으로서의 구실을 톡톡히 해낸 셈이다.
오후 5시에 출발하는 인천공항 행 아시아나 비행기를 타기 위해 수속을 마치고 기다리면서
면세점에 들어가 필요한 몇 가지 상품을 챙겼다. 소주를 좋아하시는 아버지께는 터키식 소주(45도)를,
귀여운 조카들을 생각하면서 로쿰(LOKUM)을, 고마운 분들을 생각하면서 터키의 와인을 샀다.
그러다가 실수로 카메라를 떨어뜨려 줌렌즈의 필터가 깨지는 사고가 있었다.
'큰일인데 이거. 충격으로 말미암아 혹시 카메라 기능이 불가능해진다면 어쩌지?'
카메라의 전문가인 심박사님의 응급조치로 일단 렌즈가 상하지 않도록 조치를 했고
카메라 몸체에 줌렌즈를 끼워 작동에 문제가 없음을 확인한 뒤에야 안심이 되었다.
귀국을 앞두고 겪게 될지 모를 액운을 카메라 사건으로 땜질 할 수 있었음에 만족해야 하리라.
"안타깝게 생각 말고 액땜했다고 생각해요." 아내의 웃음섞인 말에 퍽 위로가 되었다.
터키에서 인천공항까지는 9시간이 걸렸다. 갈 때보다 두 시간이나 단축되었다.
심박사님의 두 따님과 외손주들이 공항까지 마중을 나와 벌써부터 기다리고 있었다.
외손주들에 대한 사랑이 유난히 깊은 심박사님 내외는 터키에서도
손주들과 카톡을 하고 문자메시지를 나누면서 끊임없는 대화를 했었다.
마중나온 딸들과 손주들을 보면서 그간의 피로가 단숨에 풀렸을 것만 같다.
"박사님, 덕분에 여행이 행복했습니다. 늘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그간 찍었던 사진은 정리되는 대로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심박사님께서 터키 여행을 비행기에 정리하면서 내게 하신 말씀.
“터키에서 본 그 어느 것보다 논강 부부의 삶의 모습이 더 귀한 것 같아.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있는 그대로 소박하게 살고자 하는 그 정신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어.”
“박사님께서는 마치 우리들을 칭찬하기 위해서 여행 오신 것 같습니다."
터키 여행에서 나는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꼈을까?
두 눈으로 본 것은 사진에 담으려고 애를 썼던 것 같고
이제 사진을 차례대로 정리하면서 그 내용이 무엇이고 그것이 주는 느낌을
순간순간 정리해 보았던 것인데, 그리 쉽지는 않았다. 사실 위주의 기록에 그치고 말아 아쉽다.
짬을 내서 시간을 좀 투자했지만 어찌 필설로 다 표현할 수 있겠냐 싶었다.
귀국 후 며칠 지나다 보니 이젠 기억도 선명치 않은 것 같아서 안타까웠다.
그러나 힘들게 계획했던 8박 9일 간의 터키 여행은 매우 감동이었고
기억 속에 오래도록 남을 것임은 분명하다.
*** 위의 글 중에서 개인의 신상이나 느낌을 밝힌 부분을 제외하고, 사실을 설명하는 부분에서는
주종원 채미정 님이 지은 '프렌즈 터키(중앙북스)'란 책을 인용했음을 밝혀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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