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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박 9일의 터키 여행 1

여행 이야기

by 우람별(논강) 2014. 8. 2.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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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박 9일간의 터키 여행을 마치고 돌아왔다. 그간의 과정을 사진으로 정리하고자 한다.

심웅기 박사님 내외 분과 우리 부부, 그리고 부산에서 온 최철 선생님 가족 7명 등,

모두 32명이 노랑풍선 여행사의 도움을 받아 한 팀을 이루어 함께 했던 여행이었다.

별 무리없이 모두들 무사히 귀국하였음에 감사하면서 기록을 남겨볼까 한다.

 

 

아시아나 항공 oz 551편, 이스탄불까지 11시간을 날아가야만 했다.

비행기 안은 터키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로 가득했고 워낙 많은 시간이 소요되기에

터키 관련 책을 준비했다. 전국역사교사 모임에서 나온 책, '처음 읽는 터어키사'와

'프렌즈 터키'(주종원, 채미정 지음)라는 안내 책자가 그것이다. 이미 한 번 훑어 보았지만

현지에 가면 더 실감나게 읽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작은 배낭에 넣어 두었던 것이다.

그러나 책 읽기가 녹록치 않아서 비행사에서 제공하는 프로그램 중,

한국영화 3편을 보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가볍게 시청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비행기는 어느새 이스탄불 상공에 도착해서는 착륙 준비를 시작하고 있었다.

 

 

이스탄불의 국제공항 '아타튀르크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현지가이드의 안내를 받아

재래시장으로 널리 알려진 그랜드 바자르로 향했다. 이렇게 우리의 첫 여행은 시작되었다.

 

'그랜드 바자르'는 터키어로는 '카팔르 차르쉬'('지붕이 있는 시장'의 뜻)라고 하며

65개의 골목길과 길 양쪽으로 5000여 개의 가게들이 모여 있고, 출입구만 해도 20개가 넘어서

길을 잃기 쉽다고 한다. 우리는 7번 게이트로 들어갔다가 30분 정도밖에 둘러보지 못했다.

오후 7시만 되면 일제히 문을 닫기 때문에 마감 시간에 쫓겨서 다시 돌아와야 했던 것이다.

1461년 술탄 마흐메트 2세에 의해 조성된 이후, 동서양 교역의 중심지로서 역할을 해 왔고 

지금도 매일 25만에서 40만 정도의 고객들이 드나드는 곳이라고 하니 어찌 놀랍지 않으랴!

 

지금까지 열두 번의 지진과 아홉 번의 화재로 소실되는 등 풍상을 겪기도 했지만

그 때마다 더 큰 규모로 복구되면서 오늘에까지 이르고 있다고 한다.

바람을 제대로 피할 수 없었던 우리나라의 재래시장과 비교되는 부분이다.

 

심박사님 부부와 우리는 천천히 걷다가 몇 가지 상품이 눈에 띄어 구매를 했다.

터키석을 끼워 만든 팔찌가 마음에 든다면서 아내는 선물용으로 몇 개 구입한 것이다.

'견물생심(見物生心)'이라 했던가? 안 보면 그만인 것을, 보면 사고 싶은 것이다.^^

 

'악마의 눈'으로 불리는 검은 점, 터키인들은 그것이 우리의 부적과 같은 역할을 한다고 믿는다.

생활 주변의 모든 부정과 사악함을 멀리하고, 좋은 일만 생기기를 원하는 서민들의 마음이리라.

 

그랜드 바자르에는 금은 보석에서부터 양탄자, 가죽, 도자기, 동, 그릇, 옷감, 잡화 등

그야말로 없는 게 없는 쇼핑의 천국이라고 평가 받고 있다. 기기묘묘한 물건들이 많다.

 

한 젊은이가 심박사님의 어깨에 손을 얹더니 몸을 막 흔들기까지 했다.

상술 또는 반가움의 표현이라고는 하지만 그의 갑작스런 행동에 당황스러웠다.

 

첫날 여행은 그랜드 바자르에 들르는 것 이외에는 특별한 일정이 없었다.

공항에서 그랜드 바자르까지 버스로 잠시 이동하는 사이의 느낌은 이렇다.

'8박 9일간의 대부분을 버스로 이동을 해야만 상황인데, 버스의 상태가 이래도 될까?'

맨뒷자리의 좌석과 안전벨트 상태가 불량해서 쾌적한 맛이 없었던 것이다.

현지 가이드에게 얘기했으나 이미 버스는 계약이 되어 바꿀 수 없는 상태란다.

좌석은 그래도 여유가 있으니 불편한 자리는 피하고, 괜찮은 자리를 찾아 앉으라는 말에

이의를 제기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의 처지를 무시하기 싫었나 보다.

여행을 마치면서 노랑풍선 여행사에 넌지시 건의하면서 시정을 요구할까 싶다.

<1박, ESSR DIAMOND HOTEL>

 

다음 날, 보스포러스 해협 선상 투어를 하고 사프란볼루, 앙카라까지 가는 일정이다.

9시간 정도를 버스로 이동하면서 관광을 해야만 하기에 웬만한 어려움은 각자 감수해야 한다.

화장실 이용도 요령껏 잘 해야 하고, 음식도 현지식을 주로 하기 때문에 입맛이 까다로운 사람은

자신이 먹을 수 있는 밑반찬 정도를 미리 준비해 두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마르마라해의 일부가 호텔 숙소에서 보였다. 손에 잡힐 듯한 거리에 있는 듯하여

아침 식사 전에 산책을 하면서 바닷가까지 바람 쐬고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아내를 깨워 길을 나섰지만 생각보다 거리가 멀고 낯설어서 발길을 이내 돌려야 했다.

 

숙소에서 가까운 어느 자미(이슬람사원, 모스크)의 모습을 담아 보았다.

이스탄불에는 이런 건물이 수없이 많다. 전 국민의 98%가 이슬람교를 믿기에

국교로 정할 법도 하지만 터키 당국은 정치와 종교를 분리하는 '세속주의'를 중시한다.

적어도 종교 때문에 국가의 혼란을 야기시켜서는 안 된다는 의지가 감지된다.

 

이틀째 여행의 시작이다. 심박사님 부부는 뒤출입문 첫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워낙 키가 크신 분이라 비교적 공간의 여유가 있는 출입문 자리가 딱이라서 고정석이 되었다.

나는 사진찍기에 용이한 맨뒷자리와 지금 앉아있는 자리를 오가면서 여행을 하기로 했다.

 

보스포러스 해협 크루즈 탑승, 주변의 풍광을 감상하는 시간이 찾아왔다.

여행 마지막 날에 갈라타 다리 부근의 야경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예정되어 있기도 해서

이스탄불의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를 연결하는 갈라타 다리의 풍류는 특별히 기대된다.

 

 

 

우뚝 솟은 갈라타 탑, 저 위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는 장면을 상상해 본다.

 

돌마바흐체 궁전의 외부 모습이다. 술탄만이 출입할 수 있는 바다의 문도 보인다.

잠시 후, 크루즈 여행을 마치자마자 곧바로 들르게 될 곳이기도 하다.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거대한 다리다. 현재 두 개가 사용되고 있는데,

세 번째 다리는 한국의 기술로 머지않아 세워질 것 같다는 가이드의 설명이다.

 

 

돌마바흐체 궁전, 바다를 메운 곳에 세워졌기 때문에 '가득찬 정원'이라는 뜻으로 불여진 이름이다.

내부에서는 절대로 사진을 찍을 수 없다고 해서 눈으로만 보고 나왔다. 총길이 600미터, 홀 43개,

방 285개, 발코니 6개와 목욕탕 6개를 갖추고 있는 내부장식이 화려하기로 유명하다.

인테리어에 사용된 대리석과 가구는 유럽 각지에서 가져온 것이며, 바닥에 깔린 양탄자는

최고급 수제품들이다. 장식을 위해서 14톤의 금과 40톤의 은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오스만 제국 말기에 술탄이 거쳐했던 궁전으로 19세기 중반 술탄 압뒬 메지드 1세에 의해

건립되고, 전형적인 바로크 양식과 로코코 양식으로 지었다. 프랑스의 베르사이유 궁전이

모델이 되었다고 한다. 전부 6명의 오스만 술탄이 사용했으며, 공화제로 바뀐 후에는

초대대통령 아타튀르크 무스타마 케말 파샤가 관저로 사용했다. 그는 1938년 11월 10일

집무 도중 이곳에서 사망했는데, 고인을 기리기 위해 궁전의 모든 시간은 사망 시간인

오전 9시 5분에 멈춰져 있다. 그는 '아타튀르크(터키의 아버지)'란 칭호를 받으면서

존경을 받고 있으니 참으로 부러움을 살 만하다. '우리 나라 난세의 영웅은 도대체 누굴까?'

 

 

잔디 위에 빨간 꽃과 하얀 꽃을 길게 심어 놓아서 조경의 아름다움이 한층 부각되고 있다.

 

 

정교한 조각솜씨가 놀랍다. 마치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아서 더욱 그렇다.

 

부부는 이렇게 서로 의지하면서 사는 것이 아닐까? 남들은 이 모습을 부러워할지도 모른다.^^

 

심박사님 부부의 잔디밭 사진, 퍽 마음에 든다. 물기 많은 손수건을 어깨에 걸치는 장면.

 

돌마바흐체 궁전을 보고 9시간에 걸친 버스 여행은 시작되었다. 첫번 재 목적지는 사프란볼루다.

버스로 이스탄불에서 거기까지 6시간, 거기서 앙카라까지는 다시 3시간 정도 더 달려가야만 한다.

 

샤프란 볼루까지 6시간 정도는 가야 하는데, 두세 번 정도는 휴게소에 들러야 여행이 순조로워진다.

아내는 특히 오래 타야 하는 버스 여행의 경우, 놓치지 않고 화장실에 가야 하는 것 때문에 애를 먹는다.

 

 

 

 

1000미터가 넘는 고원지대가 많은 터키는 곳곳에서 유목이 이뤄지고 있다.

광활한 땅을 자유스럽게 오가면서 풀을 뜯는 소나 양들은 투르크인들의 삶을 잘 알고 있으리라.

중앙아시아, 몽고 지역을 호령했던 돌궐족, 선비족, 훈족이라 불렸던 선조들의 거친 삶을.

 

차를 타고 지나가다가 샤프란 볼루의 어느 시장 골목을 한 컷 찍었다.

 

저기 보이는 마을이 전통가옥이 즐비한 샤프란 볼루다. 사진 작가들에 의해서 마을 풍경과 함께

그 독특한 건축방식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면서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기에 이르렀다.

 

샤프란 볼루의 목욕탕 지붕 모습, 남녀 공용인데 남자와 여자의 출입 시간이 다르다고 한다.

 

'파샤'는 '장군'이란 뜻이다. 1661년에 건축된 메흐멧 장군의 집, 지금은 '자미'로 쓰여지고 있다.

 

자미(사원) 앞에 놓인 해시계, 하루에 다섯 번 기도드리는 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 설치한 듯하다.

 

 

제법 넓은 골목인데 머루나무의 가지들이 하늘을 다 덮고 있다.

얼마 전 열호재(悅乎齋) 데크 옆에 심어놓은 머루나무 묘목 두 그루가 생각났다.

'잘 키워서 그늘 터널을 만들어 봐야겠다. 그런데 어느 세월에?'

 

동서무역을 담당했던 대상들이 하룻밤 쉬어가던 건물의 입구 부분이다. 말이나 낙타의 고삐를

묶어둘 수 있는 고리도 벽에 견고하게 달려 있기도 하고 물을 마실 수 있도록 큰 수조도 있다.

 

무엇인가를 자르기 위해 사용했던 기구라고 한다.  돌의 날카로운 곳에 여러 번 문질러 자르는 방식이다.

 

 

 

2층엔 대상들이 묵어갔던 똑같은 모양의 방, 수십 개가 있고 그 방의 홋수가 적혀 있다.

 

 

 

샤프란 볼루는 터키인들의 전통 가옥 형태를 제대로 감상할 수 있는 곳이라는 게 실감난다.

옛건물은 낡고 실용적이지 못하다고 해서 무차별적으로 부숴버렸던 개발론자들의 분별없음에 비해

아무리 어설프고 불편하더라도 옛것이기에 더욱 보존적 가치가 있다고 보는 사람들의 신중함이

더욱 진가를 발휘할 수 있음을 증명하고 있어서 마음 한 구석이 훈훈해짐을 느낀다.

오래되고 독특한 건물 자체가 귀중한 문화재로 인정받을 수 있다는 교훈이다.

 

 

우리나라의 담장 곳곳에서 많이 볼 수 있는 능소화를 터키란 나라에서 보니 참 반가웠다.

국경을 달리 하고 있어도 나무나 꽃, 새 등을 공유하고 있으니 다행스럽다는 생각이다.

 

라마단 기간에는 결혼도 안 한다고 하는데 아마 이 부부는 막차를 탄 것일까?

결혼기념으로 유명한 관광지를 다니면서 사진 촬영을 시도하는 것도 우리와 비슷하다.

 

 

샤프란 볼루에서 앙카라까지 오는 데는 약 3시간 정도가 소요되었다.

인구 400만 명의 앙카라가 터어키의 수도이긴 하지만 이번 여행에서는 하룻밤 유하고

다음 날, 6.25 전쟁에 참전했던 터키 용사들이 잠들어 있는 한국공원을

찾는 것 이외는 특별히 예정된 것이 없었다. <2박, 앙카라 ROYAL CARINE HOTEL>

 

 

 '투르크의 아버지'라 칭송받는 무스타파 케말 파샤, 그의 무덤인

'아타튀르크 능묘'는 앙카라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자리하고 있다.

터키의 유적지 중 가장 신성한 곳이라 하는데, 외관만 슬쩍 보고 지나쳐야 한 것이 아쉽다.

잠시라도 서서 파르테논 신전을 닮은 건물만이라도 사진에 담아보고 싶었는데......

 

무스타파 케말은 이슬람 전통 복장을 폐지했으며 남녀 교육기회의 균등, 일부일처제,

남녀평등법, 아랍문자를 폐지하고 로마자를 터어키어로 표기하는 문자 개혁, 여성 선거권 부여 등

헤아릴 수 없는 개혁을 이루었다. 이슬람 전통을 고수하는 수구세력과 충돌을 피할 수 없었으나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는 대명제 아래 터키를 민주적 정치제도로 현대화하고자

끊임없이 노력했던 정치지도자이기에 1934년 국회는 그에게 '터키의 아버지'란 뜻의

'아타튀르크'라는 명예로운 호칭을 수여하게 된다. 그는 58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쳤다.

 

6.25 때 참전했던 터기 용사들을 기리기 위해 1973년 한국정부가 앙카라 시에 헌납한 공원,

한국에 있는 터키 장병들의 묘에서 흙을 가져와 석가탑을 본뜬 4층의 석조탑을 안치했다.

탑 주위를 돌아가며 740명의 이름과 사망 연도를 기록해 놓았다. 터키는 6.25 전쟁 당시

미국, 영국, 캐나다에 이어 네 번째로 많은 1개 여단 1만 5천여 명의 전투병을 파병했다.

 

'한국공원'의 '공'자가 눈에 띈다. 모음 'ㅗ'의 한 획이 'ㄱ'자에 붙어서 기묘한 글자가 되어버렸다.

'한'자의 'ㅎ'부분도 한 획이 없어져 버렸다. 한글을 모르는 터키인이 새긴 것일까? 아니면 예술적으로?

 

 

 

 

 

앙카라에서 으흘라라 계곡으로 가기 위해 고원지대를 달리고 있는 동안,

눈에 보이는 것은 끝모를 지평선과 갈아엎어 놓은 듯한 넓디넓은 밭들이었다.

 

 

앗, 그런데 하얀 소금 호수가 보이기 시작했다. 아무리 달려도 끝간 데 없이 이어지는 소금의 바다였다.

옛날에는 틀림없이 바다였지만 수만 년간의 지각변동으로 인하여 이 높은 지대로 위치 이동을 했을 것이다.

세계의 최고봉 에베레스트에서 조개의 화석이 발견되는 것으로 봐서도 그곳 역시 바다였다고 하지 않는가?

자연의 엄청난 변화와 그 신비로움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소금의 바다에 빠지고 말았다.

 

 

 

사진의 대가이신 심박사님께선 일생에 단 한 번밖에 없을 것만 같은 좋은 기회가 왔다면서

소금 호수와 하늘을 배경으로 멋진 사진을 연출하고 계신다. 모델은 부인이신 카타리나 선생님!!

 

드디어 도착한 으흘라라 계곡의 전경이다. 영화 '스타워즈' 촬영지로 유명한 곳이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 사이로 맑은 시냇물이 흐르며 나무가 울창한 숲 사이로 난

오솔길을 따라 계곡 트래킹을 해도 좋을 법한 곳임을 금방 알 수 있었다.

 

 

 

 

 

약 20키로미터에 달하는 웅장한 계곡 양 옆으로 60여 개의 교회와 수도원들이 들어서 있는데,

 이는 비잔틴 시대에 은둔생활을 하던 수도사들이 만든 것들이라고 한다.

 

 

동굴의 천장에는 프레스코화의 흔적이 남아있기도 한데, 정교함은 부족하나

그들의 돈독한 신앙심은 그 세월만큼이나 흔들림이 없는 것 같았다.

 

 

데린쿠유로 가는 길에 다시 보이는 으흘라라 계곡의 일부.

 

 

지하도시 데린쿠유가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임을 밝히고 있는 현판,

말 그대로 지하에 굴을 파고 조성한 도시다. 카파도키아 중심지에 30여 개의 지하도시가 있으며

전체로 따지면 200여 개에 달할 정도라고 한다. 그 중 한 군데에 우리가 들르게 된 셈!!

 

 

 

 

이민족의 침입이나 종교적 탄압을 피하기 위해 이곳을 은신처로 삼았던 것 같고 로마와 비잔틴 시대를

거치면서 지속적으로 확장되었는데 누가 언제 왜 만들었는지에 대한 속시원한 대답은 없는 실정이다.

내부에는 부엌, 거실, 창고, 회의실, 교회, 신학교 등이 있으며 모든 시설이 완벽하게 갖춰져 대규모의

공동생활이 이루어졌음을 알게 해 준다. 공동체생활을 해친 범죄자에게 가해지는 형벌 장소도 있다.

 

우치히사르 성채, 성채라기보다는 바위산이라는 말이 더 정확한데

로마의 핍박을 피해 기독교인들이 숨어살던 곳으로 예전에는 성채와 마을을 연결하는

지하 터널도 있었다고 한다. 카파도키아 일대를 조망하기에 최적의 장소가 아닐까 한다.

 

 

여기까지 왔으니 낙타 위에 올라 기념사진이라도 찍어야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사람,

'빨리 올라타세요. 지금은 낙타 주인도 안 보이고 혼자 저렇게 서 있으니 사진 찍는 것은 공짭니다.'

 

 

 

파샤바 계곡, 수도사의 골짜기로 불리며 카파도키아의 상징인 버섯바위가 수없이 있는 곳이다.

 

거칠게 질주하는 짚차를 타고 즐기는, 소위 사파리 체험을 하면서 들른 '사랑의 계곡'이다.

 

 

 

현지가이드는 고객들의 쇼핑을 돕겠다면서 양탄자 만드는 공장으로 안내를 했다.

워낙 고가의 상품이라서 아무도 사는 사람들은 없었으나 상품이 완성되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치는가를 공부하는 시간이 되었다고 보면 될 것 같다.

 

 

그날 저녁은 항아리케밥으로 맛있는 식사를 했다. 되네르케밥, 고등어케밥과 함께 널리 알려진 음식이다.

 

 

다음 날엔 열기구를 타기로 되어 있는 날이다. 난생 처음 경험하게 될 것이라 자못 기대된다.

먼저 이곳을 찾았던 친구, 진성은 열기구를 타 보지 못해서 한이 되었다고 하면서 꼭 타 볼 것을 권했다.

그러잖아도 언제 또 그런 기회가 주어질까 싶어서 꼭 타겠다고 했고, 거금을 주고 탑승신청을 했다.

<3박, 카파도키아의 5성급 CRYSTAL HOTEL >

 

새벽 4시에 기상해서 대기중이던 마이크로버스를 타고 열기구가 있는 곳으로 갔다.

아침식사는 열기구를 1시간 30분 정도 탄 뒤에 호텔로 돌아와서 먹기로 되어 있었다.

심박사님 내외와 컵라면으로 요기를 하고 차 한잔 마신 뒤에 열기구에 올랐다.

 

이륙을 하려면 뜨거운 가스불로 열기구 안을 한참 덥혀야 한다. 이륙 바로 직전의 순간포착이다.

 

 

비슷한 시간에 여기저기 솟아오르는 각양각색의 열기구 모습은 장관이었다.

 

 

 

가끔 뜨거운 불길로 열기구의 오르내림을 조절하느라 내는 소리를 제외하고는

열기구의 움직임은 고요함과 정적 그 자체였다. 일출 장면과 동쪽으로 우뚝 솟은

화산을 볼 수 있었던 순간은 황홀하기까지 했다. 눈아래 보이는 세상 또한

우리들의 비상을 조용히 올려다보면서 하루를 즐겁게 시작할 것만 같았다.

 

열기구에서 멀리 보이는 화산인데, 그 이름을 기억할 수는 없다.

이 카파도키아 일대의 독특함은 바로 저 화산활동의 역사와 매우 밀접할 것이다.

 

 

 

열기구가 바람에 조금씩 밀리다 보니 예상보다 먼 곳까지 와서 착륙해야만 했다.

이륙과 착륙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힘을 합쳐야 열기구 작동이 가능함을 실감했다.

 

열기구에서 내리니 무사 착륙을 자축하는 의미에서 샴페인을 터뜨리는 이벤트가 있었다.

우리 일행들은 수고했다면서 1달러씩 팁을 주었고, 열기구 관계자들은 고마워했다.

 '언제 또 이렇게 기분좋게 탈 수 있을까 몰라?' / '생각보다 무섭지도 않고 너무 좋았어.'

 

열기구를 탔다는 증명서까지 발급해 주는 친절함이 또 하나의 작은 감동이었다.

 

자, 이제 호텔로 돌아가 아침식사를 하고 터키 제일의 휴양도시 안탈리아로 간다.

과거의 신비로움을 불러일으키는 안탈리아 지방은 터키에서도 경치 좋기로 유명하단다.

지중해에서도 가장 아름답고 깨끗한 해안을 볼 수 있고 터키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곳으로

자연미가 물씬 풍기고 있어 지금도 신과 여신이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신비로운 도시란다.

 

이슬람 신비주의 종파인 메블라나 교단의 발생지로 널리 알려져있는 콘야의 한 휴게소,

세마춤을 추는 장면의 조각품이 마치 콘야 지역의 랜드마크인 듯, 우뚝 솟아 있다.

그 어느 지역보다 종교색이 짙은 도시라는 가이드의 설명이 실감나는 부분이다.

 

일명 '수피 댄스'라고 불리는 세마는 일반적 의미의 춤이 아니라 신과 합일을 이루려는

종교적 수행이기 때문에 일종의 신무라고 할 수 있다. 흰옷과 치마를 입는데 이는 '상복'을 의미하고,

그 위에 후르카라는 검정 망토를 걸치고 시케라는 갈색모자를 쓰는데 망토와 모자는 '무덤'을 의미한다.

세마 의식은 전부 일곱 단계로 나누어 진행된다고 하며 2008년 세계문화유산에 선정되었다.

 

콘야에서 안탈리아로 가는 길에 만나야 하는 험준한 산악 지형의 모습을 찍었다.

측백나무나 전나무 등만이 바위 틈에 뿌리를 비집어 넣고 사투를 벌이는 듯하다.

 

 

두 시간 정도 산을 넘고 넘어 온 뒤, 어느 휴게소에서 뒤돌아 본 풍경,

멀리 보이는 하얀 산과 뭉게구름(북한에서는 '더미구름')이 눈길을 끈다.

 

지층과 지층 사이에 꿈틀거리는 습곡의 형태가 보여서 사진기를 들이댔는데......

 

어느 새, 해는 저물어 가고 우리는 지중해의 휴양도시 안탈리아에 가까이 접근하고 있었다.

옷을 벗어버리고 후다닥 지중해로 달려내려 첨벙첨벙 몸을 던지며 놀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숙소에 여장을 풀고 안탈리아 시내를 잠시 걸어보기로 했다.

지중해 부근이라 그런지 습도가 높고 옷이 몸에 휘감기면서 무척 더웠다.

길가에 앉아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명절을 앞둔 시민들의 가벼운 발걸음은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맥주라도 한잔 하면서 쉴 수 있는 곳이 어딜까를 찾아다니다가 한참만에 발견했다.

농담을 즐겨하는 젊은 웨이터가 다가와 우리의 요구를 친절하게 들어주었다.

 

안탈리아 주변의 건물 옥상에는 태양전지가 많이 설치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태양열이나 빛을 이용한 자가발전을 유도하는 정부의 정책이 반영된 결과이리라.

<4박, 안탈리아 RING HOTEL>

 

 

 

이블리 미나레, 이블리이라는 뜻. 미나레 외벽에 붉은 벽돌로

여덟 줄의 세로 이 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단순한 원기둥이 아닌 특별한 모습!!

 

안탈랴 해안가의 풍경을 지중해에 배를 띄워 감상해 보는 시간을 갖기로 했다. 옵션이었다.

 

 

 

 

 

 

 

   부산에서 온 최철 선생님과 김성욱님 가족들의 모습. 최철 선생님은 김성욱님과 처남 매부지간이시다.

 

마리나 항구, 2세기부터 안탈리아를 기점으로 지중해를 오가던 배들이 쉬어가던 일종의 정거장.

 

항구 뒤쪽으로 자리한 오래된 성벽과 파란 바다가 멋지게 조화를 이루고 있어서

어디에서 사진을 찍든 배경이 잘 나오게 되어 있다. 나의 못생긴 인물이 문제일 뿐!

 

 

 터키 아이스크림은 값이 비싸긴 해도 쫀득쫀득한 맛이 일품이라서 우리나라 것보다 한 수 위임을 알았다.

 

로마의 향기가 묻어나는 하드리아누스 문,

서기 130년 로마황제 하드리아누스가 안탈리아를 방문한 것을 기념해 건립된 문,

3개의 멋진 아치가 인상적이다. 요즘 같으면 나무를 한 그루 심는 것으로 기념해도 될 것을

옛날엔 권력자의 방문이 퍽 영광스러웠던 모양이다. 건물까지 지어서 이름 붙이는 것을 보면

예나 지금이나 권력은 쥔 자들은 자신의 업적을 어떤 형태로든 부각시키려 함을 알겠다.

 

 

시계탑으로만 사용하기엔 너무 건축물이 아깝다. 어느 시대 작품일까?

 

 

안탈리아에서 다음으로 가야 할 코스는 '파묵칼레'라는 곳이다.

 

 

히에라폴리스, 기원전 190년경 건설된 도시, 같은 시대의 대도시가 무역의 이점 때문에

대부분 해안에 위치한 것과는 달리 내륙에 건설된 것이 특징이다.

그 이유는 온천수를 이용한 질병의 치료와 휴양이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로마와 비잔틴 시대를 거치며 번영했는데 전성기에는 인구가 10만 명에 달할 정도였다고 한다.

1354년 이 지역을 강타한 대지진으로 한순간에 막을 내리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오래된 유적의 원형이 파손되지 않도록 천천히 천천히 발굴해야 하는 당국의 입장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사진의 파여진 부분이 작년 1년 동안 발굴한 전부라고 한다.

 

 

 

 

 

고고학 박물관, 과거에는 어떤 용도로 쓰였는지는 몰라도 고색창연한 맛이 느껴진다.

히에라폴리스에서 출토된 유물을 모아놓았다고 하는데 사람들의 출입은 많지 않은 듯하다.

 

박물관 옆 5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유적의 원기둥이 나뒹구는 온천이 있다.

지진으로 파손된 유적 위에 온천물이 솟아나와 형성된 것이라고 한다.

시간의 여유가 있다면 온천욕을 하면서 그 짜릿함을 만끽할 수 있어서 참 좋을 텐데.....

 

 

 

심박사 내외와 아내는 뜨거운 햇볕으로 일사병의 위험이 있다면서 그냥 앉아서 쉬겠다고 한다.

 

 

나 혼자 카메라를 둘러메고 밖으로 나와 대극장이 있는 곳으로 향하다가 여기저기 널려있는

돌무더기가 눈에 띄어 한참을 둘러보았다. 정작 철조망에 막혀 가보려던 대극장까지는 못 가고

결국 망원줌렌즈로 전체적인 윤곽만 몇 장 촬영하고는 그냥 내려오고 말았다. 참 아쉬웠다.

 

 

 

당시, 멀리 산에서 내려오던 물줄기를 이렇게 수로를 만들어 원하는 곳으로

꾸불꾸불 흘러가게 했음을 보여주고 있어서 그 감동이 적지 않다.

 

한 바퀴 답사를 마치고 일행이 있는 자리로 돌아와 흑맥주 한 잔을 들이키니 이 세상 모두가 내것이었다.

 

잘생긴 수탉의 조형물 옆에서 아내와 함께 기념 사진을 남겼다.

 

카파도키아의 기암괴석, 셀축의 에페소와 함께 터키 관광의 빅3의 하나로 일컬어지는 곳.

마을 뒷산을 감싸고 있는 하얀 석회층은 마치 목화솜이 만들어낸 성(城) 같다고 해서

목화의 성이란 뜻의 '파묵칼레'가 되었다. 석회층 뒤편으로 광대하게 자리한

고대도시 히에라폴리스 유적은 '파묵칼레'가 보유한 또 다른 자랑거리임에 틀림없다.

 

석회 성분을 품은 33~36정도의 물이 지하에서 솟아나 언덕을 흐르며

석회를 남기고 그 위에 계속해서 침전이 진행되어 대규모의 석회언덕이 형성되었다.

석회층의 두께는 매년 1미리미터 정도 증가한다고 한다.

 

작열하는 햇볕 아래 나의 피부는 점점 검어지고 있음을 실감하고 있다.

 

 

 

 

석식 후 HALICH 호텔에서 수영과 온천욕을 즐길 수 있었다. 새로운 경험이었다.

아내는 수영을 전혀 하지 못해서 150센티 정도 깊이를 목만 내놓고 물속을 천천히 걸어다녀야 했다.

나도 오랜만의 수영이라 그런지 어설펐고, 개헤엄 또는 배영으로 잠시 물위를 좌우로 오갔을 뿐이다.

심박사님 부부는 온천욕이 생각보다 아주 좋다면서 따스한 물속에 한참을 앉아 있었다.

우리 부부도 좋은 기회를 놓칠세라 수영장과 온천을 오가면서 깊어가는 밤을 껴안았다.

호텔의 공연장에서는 악기 연주소리와 함께, 한 여인의 벨리댄스가

뭇 남성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다. < 5박, HALICH HOTEL>

 

수영과 온천욕을 마치고 음료수와 맥주를 마시면서 멋진 하루를 정리했다.

 

*** 위의 글 중에서 개인의 신상이나 느낌을 밝힌 부분을 제외하고, 사실을 설명하는 부분에서는

주종원 채미정 님이 지은 '프렌즈 터키(중앙북스)'란 책을 인용했음을 밝혀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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