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저녁으로 선선하다. 그 무덥던 더위는 어디론지 사라지고 없다. 한낮에만 따가운 흔적이 조금 남아있을 뿐, 가을이 왔음에 틀림없다. 여름 내내 무성하던 잡초들도 이젠 기력을 잃었는지 더 이상 크거나 뻗지를 못한다. 쪽빛 하늘에 피어나는 뭉게구름의 온갖 모습이 우리를 유혹하기에 충분하다. 들녘의 벼 익는 냄새도 문득문득 전해져 오니 몸의 감각이 가을과 함께 되살아나는 듯하다. 지난 주 토요일 오후, 아내는 갑자기 가을 속으로 떠나고 싶다고 했다. ‘가을 속으로 떠난다?’
“어디를 가든 다 가을인데, 어느 방향인들 가릴 필요가 있을까?”
“봉화 지역을 여행했을 때의 감격을 되새기고 싶어서 그래요.”
시원하게 뚫린 중앙고속도로를 달린다. 노래가 절로 나올 정도로 기분이 좋다. 한달음에 영주 IC를 빠져나와 숨을 고르는가 싶더니 어느새 봉화 방향의 시원한 국도를 달리고 있다. 자주 다니는 길이 아닐 경우에는 길안내도우미를 사용해서 거침없이 찾아가지만 옛날처럼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가는 잔재미가 없다. 가끔은 기계 속에서 칭얼대는 여인의 목소리가 원망스러울 정도다. 조금만 길에서 벗어나기만 해도 왜 엉뚱한 데로 가느냐며 난리다.
청송-영양-봉화-영월로 이어지는 외씨버선길이 잠시 머물게 되는 봉화 춘양(春陽)이란 곳에는 유명한 만산고택(晩山古宅)이 자리하고 있다. 조선 말기의 문신인 만산(晩山) 강용(姜鎔, 1846∼1934) 선생이 고종 15년(1878)에 건립하였다고 한다. 긴 행랑채 중앙의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넓은 사랑마당 서쪽에 사랑채와 안채가 연접하여 입구자[口字]형의 평면을 이루고 있고, 좌측에 서당을, 우측에 별도의 담장을 두르고 별당을 배치하여 사대부집의 면모를 갖추었다. 곳곳에 편액이 많이 걸려있는데 글씨 기운이 예사롭지 않다. 전서(篆書)로 쓴 '존양재(存養齋)'란 현판은 제대로 읽어내기가 어렵다. '만산(晩山)'이라고 쓴 글씨도 보였다. 어떤 경로로 얻게 되었는지는 모르나 당시의 명필이자 권력가인 대원군의 친필이기에 희소가치는 자랑할만 하다.
뜰 앞에는 온갖 야생화가 가득하다. 찾아오는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은 꽃만이 아니다. 그것을 담은 화분에도 예술적 안목이 군데군데 배어 있다. 우물가 돌확 안에 동그랗게 자리잡은 부레옥잠, 꽃을 피우고는 물위에 조용히 떠서 햇빛을 한 아름씩 받고 있다. 여섯 개의 꽃잎 중 하나에만 특별한 무늬가 있어 신비감이 은근하게 맺혔다. 마당 곳곳에 피어있는 설악초, 족두리꽃 등의 훤칠함도 훌륭하지만 요정과도 같은 작은 꽃들의 앙증맞음에 호기심이 발동한다. 꽃이름이라도 알아두면 참 좋을 것 같은데……. 고택을 지키고 사는 종손 어른의 해박함과 자부심도 그렇거니와 집을 찾아오는 손님들에 대한 인정미 넘치는 친절함이 마음을 잡아끌고 있어서 하룻밤 여유있게 머물다 가면 참 좋을 것 같다.
솟을대문의 행랑채는 모두 열한 칸의 긴 건물이고, 가까이 작은 서당 건물이 하나 자리를 잡았다. 그 사이에는 백수를 조금 넘긴 대추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데 좌우로 뻗은 기세가 거침없다. 정원수로서도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이번 태풍에 제법 굵은 가지 하나가 아깝게 부러져 버렸다고 한다. 그렇다고 균형을 잃은 것은 아니어서 오랫동안 아껴온 집주인의 애정을 시샘 많은 태풍도 저버리지 않았나 보다. 사랑채 마루에 앉아 마당 너머로 바라본 행랑채의 듬직함에 자꾸만 눈이 간다. 솟을대문 위로 뭉게구름 머금은 벽공의 하늘이 지붕의 멋스런 실루엣을 살려서 세상을 품은 듯했고, 금방이라도 날개를 펴고 날아오를 것만 같은 건물의 날렵함과 은은함에 흠뻑 취하고 말았다.
봉화에서 영주시 경계로 접어들기 직전에 유곡리 충재(冲齋)종택을 찾아보기로 했다. 오래 전 처음 찾았을 때의 감격을 되살릴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마을 입구에는 널찍한 주차장과 '닭실쉼터'라는 이름의 팔각정이 서 있다. ‘닭실’은 ‘유곡(酉谷)’을 우리말로 표현한 것인데 닭이 날개를 펴고 알을 품는 형상이라 그렇게 부르게 된 것이다. 동네의 상징인 장닭이 가로등 꼭대기마다 올라앉아 도도하게 마을을 지키고 있다. 안동 권씨 일가의 집성촌이며 권벌 선생을 정신적 지주로 삼아 100여 호가 함께 모여 사는 마을, 그 곁으로 이어지는 담장길을 중심으로 왼쪽은 논, 오른쪽은 높은 기와집이 산 쪽으로 완만한 경사를 이루며 앉아있어 든든하다. 길옆의 수로가 잘 정비되었고 흐르는 물의 양도 충분해서 유속이 아주 빠르다. 충재 권벌(1478~1548) 선생은 안동에서 태어나 27세인 1504년(연산군 10) 대과에 급제했으나, 글 중에 ‘처(處)’자가 들어갔다 하여 합격이 취소된 바 있다. 연산군에게 직언을 올려 죽임을 당한 내시 김처선의 ‘처(處)’자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했기 때문이었다. 3년 뒤 다시 급제하여 관직에 몸담았으나 기묘사화 때 파직되어 어머니의 묘소가 있는 이곳에 자리잡게 되었다고 한다.
여러 방향으로 열린 ‘청암정(靑巖亭)’이란 정자, 이를 훔쳐보듯 등지고 작은 문을 낸 세 칸짜리 건물 충재(冲齋)가 연못 안팎으로 관계 맺는 모습은 마치 쓰개치마로 얼굴을 가리고 도령을 바라보는 여인의 마음 같다고나 할까. 6칸 정자에 2칸의 방과 돌출된 마루가 더해져 아주 특별한 구성을 보이는 정자는 거북등 같은 자연석 위에 우뚝 서서 한옥 특유의 곡선과 멋스러움을 한껏 드러낸다. 충재의 마당에서 정자로 이어지는 돌다리는 그 곧음과 정교함의 미학을 고스란히 담았고, 올라앉은 정자 주변으로는 정중동(靜中動)의 물 흐름과 잘 가꿔놓은 정원수가 조화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조용히 앉아 눈을 감으니 주변의 좋은 기운이 한군데로 모이고 있는 듯, 얼굴을 스치는 가느다란 바람이 나에게 다가와 뭔가를 속삭이는 것 같다. 눈을 뜨고 둘러보니 검은 현판에 하얀 글씨로 쓴, 큼지막한 남명(南冥) 조식 선생의 글씨 ‘청암정(靑巖亭)’과 독특한 미수(眉叟) 허목의 과두체(蝌頭體) 글씨 ‘청암수석(靑巖水石)’이 가슴 가득히 들어온다. '물 수[水]'자의 모든 획들은 꼬물꼬물 곰실거리며 내 눈가를 간질이며 흘러내리는 듯했다.
청암정을 뒤로 하고 천천히 마을을 빠져나올 때 보였던 흙담 주변 해바라기들의 강렬함은 진한 여운으로 남는다. 마치 ‘손님바라기’의 역할을 부여받은 생명 같아서다. 마을 흙담길 앞 수로 옆에는 설악초가 강아지풀과 함께 돌바닥을 비집고 자라나 있어서 옹골찬 생명의 강인함을 실감하게 한다. 흙담 아래 피어난 수많은 백일홍과 코스모스는 동네 사람들의 변함없는 사랑과 오래된 자부심을 잘 대변해 주는 듯하다. 논둑 어딘가에는 귀여운 유홍초가 한 무더기 피어 있는데, 작은 꽃의 바알간 몸매와 그 안에 살며시 들어앉은 노랑빛 속살이 꽃무늬를 이룬 모습이 참 앙증맞고 사랑스럽다. 바짝 다가가니 녀석들도 바람에 기대어 살랑살랑 몸을 떤다. 고졸함이 배어있는 청암정의 자태와 익어가는 벼를 배경으로 한, 유홍초 군락을 조심스레 한 장의 사진으로 남겨 본다. 오랜 전통의 영원함과 작은 생명의 유한함이 함께하는 또 하나의 어울림을 생각하면서.
어머니 생신 날 (0) | 2014.01.15 |
---|---|
소래(蘇來) 포구에서 (0) | 2014.01.15 |
어느 날, 안동에서 (0) | 2013.06.06 |
남해안 일대를 돌면서 5 (0) | 2013.05.04 |
남해안 일대를 돌면서 4 (0) | 2013.05.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