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가 둘이 되는 농막의 밤
이 은 택
농막(農幕)에 비가 내린다. 차양(遮陽)으로 떨어지는 빗방울이 굵고 요란한 것을 보면 지나가던 검은 구름 한 점이 무거운 물기를 조금 덜어 뿌리는 듯하다. 4개월째 비다운 비는 내리지 않았다. 일주일만 가물어도 부처손(바위에 붙어사는 이끼과 식물)이 탄다는데 7월 장마는 간곳없고 태양만 작열한다. 산밭에 심은 작물이 타들어 간다. 잔챙이 산 감자는 씨도 건지지 못했고, 옥수수, 고구마도 성장을 멈춘 지 오래다. 오랜 장마에 햇빛을 보지 못했던[長霖不陽] 시절도 있었다. 비가 순하게 내리고 바람이 조화로워야[雨順風調] 인심도 너그러워지는 법인데 아무래도 심상찮은 가뭄이다. 모일 듯 멈출 듯하던 검은 구름도 비구름인가 할라치면 어느 결에 흔적 없이 사라지고 하늘은 다시 싸그르르한 별빛만 토해낸다
아침 일찍 김매러 나간 뒤 달빛 띄고 돌아와 고전(古典)을 읽는 것이 농자의 낙이라고는 하나[朝出耕 帶月歸而 讀古典 農者樂] 지금은 그런 낭만적인 행복도 낙도 전혀 없다. 맨살 드러내는 것을 한사코 싫어하는 흙의 생리는 가뭄에 관계없이 잡초만 무성케 하여 다루기 힘들고 작물은 말라죽는데 무슨 낙이 있을 텐가? 기상이변도 장기한발(長期旱魃)도 인간 탓이라면 더 할 말이 없다. 그러나 국지적인 가뭄이 아니고 아시아 전체가 이처럼 한발에 들볶인다면 어느 생물이 살아남을지.....
걱정과 근심이 쌓여 두려움으로 번진다. 뜨락을 내려서서 다시 하늘을 본다. 구름은 한 점도 없고 음력 6월 열여드렛날 밤, 늦게 솟은 이지러진 달빛만 하늘에 가득하다. 낯선 별 두어 개를 거느린 조금 기운 하현(下弦) 달 주위엔 달무리[月暈]도 없다. 둥글고 큰 달무리가 선명하면 장마가 진다던 옛 어른들의 말씀을 떠올리다가 도리 없이 눈 내리깔고 방으로 들어서다. 목이 메이도록 밤새워 우는 소쩍새의 울음이 안쓰러워 괜히 혼자 소주 한 잔을 마시려다가 그 마음마저 거둔다.
서탁(書卓) 위 조그만 등불 밑으로 무릎을 접는다. 멀뚱히 혼자 앉아 사위를 살피노라니 시간은 새벽 2시 반으로 접어든다. 잠을 쫒아버린 꼭두새벽에 동그마니 혼자 앉아 무슨 생각을 하고 무슨 여백으로 남은 밤을 보낼까 하다가 결국 가장 나답고 만만하고 임의로우며 뒷탈도 뒷말도 있을 리 없는 내가 나를 면밀히 검토하기로 한다. 나의 인생가치를 내 스스로 솔직하게 가늠할 수 있는 반추의 시간을 갖는 것이다. 벽에 걸린 거울을 떼어내 내 눈앞에 놓는다. 그리곤 검게 그을린 못 생긴 얼굴을 들여다보며 지금의 나와 머언 옛날을 반추해보는 것이다. 한마디로 못생긴 추물(麤物)이다. 심안상부동론(心眼像不同論)이라 하여 내 마음과 눈, 그리고 내 얼굴은 같을 수가 없다고는 하나 아무리 그렇다손 치더라도 이건 아니다. 하기사 겉본 안이라고 얼굴 인상이 이 꼴인데 속인들 오죽하랴만 사실 나의 속내 역시 못 생긴 주제답게 못생기고 어리석은 짓만 골라가면서 했다. 이해관계 없이 남에게 당한 뒤 후회하고 마음 아파한 적은 말할 것도 없고, 명분 없고 가치와 생색도 없는 돈을 쓴 뒤 마누라에게 꾸중들은 적도 헤일 수 없이 많다. 해서 내 스스로의 사념 역시 뇌구조 자체가 하우불이(下愚不移)로 생긴 이상, 그 못난 처신은 죽을 때까지 고쳐지지 않는다는 것을 자인(自認)도 하고 있다. 한 예를 든다면 20대 중반쯤 모신문사의 교정사원을 모집한다는 광고를 보고 이력서를 냈다가 대망신을 당한 뒤 내 평생 직장생활에 대해서는 체념도 했었다.
그런데 버려진 부지깽이도 쓰일 곳이 있다는 격으로 1972년 5월 서울신문사에서 공모(公募)한 기록문학이 당선작으로 뽑혀 30만원의 상금을 수령하고부터는 내 인생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말하자면 대학직원부터 시작하여 H대학, D대학, K대학, C대학 등 4개 대학을 돌아다니며 국어와 한문학 서예에 대해 강의도 했고, 수십 편의 고문집(古文集) 번역은 물론 칠판글씨(백묵)와 붓글씨가 천하명필이라는 칭찬도 많이 들었다.
하지만 생활은 늘 쪼달렸다. 푼수를 모르고 날뛰던 나의 어리석음 때문이었다. 사고무친(四顧無親)하고 천애고아(天涯孤兒)인 신분으로 부모님의 유산까지 한 푼 없었던 주제가, 칠순이 넘은 부모님과 3남2녀를 거느린 아홉 식구의 가장인 외톨배기가 한 때 잘나갔다는 구실을 긍지로 여겼던지 한 때 외도와 주색으로 가산을 탕진하고 만다. 후회막급이었다.
널 푼수 하나 없이 냉혹한 생존경쟁 사회에서 밀려났을 때, 앞은 막히고 퇴로마저 끊긴 절망상태에서 그래도 휘청거리는 가정을 휘어잡고 아이들의 방만을 다독이며 가정을 붙들어준 사람은 아내였다. 불가능을 뿌리치지 않은 버팀목이었다.
노환으로 별세하신 부모님의 상(喪)을 치르고 난 다음 몰락한 집구석을 부여잡으며 5남매 모두를 대학까지 가르친 그 집념이 나를 다시 인간다움으로 이끌어 준 것이다. 어진 아내는 집안을 일으킨다[良妻起家]는 말처럼 반위가장(反爲家長)인 턱이었다. 미안했다. 아내이기 이전에 연약한 여인과 19력(男)을 가졌다는 사내라는 명제 자체가 부끄러웠다. 그러면서도 미우나 고우나 내외간이고 가족 공동체라는 대명제 안에서 56년간을 해로(偕老)한 그 삶의 궤적(軌跡)이 한없이 고마운 것이다. 때문에 50kg의 왜소한 늙은 몸으로 농막에 홀로 앉아 또 하나의 나를 저 만큼 앉혀놓고 자조(自嘲)와 후회 가득한 문장으로, 살아온 내 인생을 다듬이질하는 것은, 몸과 노력과 마음을 철없이 비웠던 젊은 날의 내 미안함을 글로나마 표현하기 위함이다
삼라(森羅) 잠든 밤인데도 소쩍새와 뻐꾸기는 밤새워 울고 있다. 무슨 넋이길래 미물들의 울음이 저토록 서러운지 모르겠다. 가끔 날아와 어릴 적 둥지의 귀소(歸巢) 여운을 읊는 듯 부-우-우-헝, 부-우-우-헝 하고 울고 가는 부엉이 소리도 어둠으로 가라앉은 새벽 산간을 처연하게 만든다.
여명이 다가옴에 따라 빛바랜 하현달(下弦月)도 산머리에 얹힌다. 홀로이던 나를 둘로 쪼개 앉힌 뒤 붓방아를 찧고 마음의 이랑[心耕]을 갈다가 살아온 뒷밭마저 되작이던 나 역시 여전히 혐오스러운 또 하나의 나를 거울 앞에 앉혀놓고 참회와 부끄러움, 후회와 수치스러움을 함께 버무려 알알했던 옛 통증을 참아내고 있다. 허나 읍소(泣訴)처럼 뒤늦은 반성이긴 하나 조금 홀가분한 기분이 드는 것은 말로 표현하지 못했던 마음의 짐을 다소나마 덜어낸 듯하여 새벽을 맞는 마음 높이가 조금 더 상쾌해진 듯하다.
늙고 기력 없는 나이에 무엇 하러 흙으로 정착했는지는 저간의 얘기로 상쇄되었지 싶다. 나에겐 사실 벅차리 만큼 무성하게 우거진 숲들의 밀어(密語)와 온갖 산새들의 노랫말, 심금(心琴)을 쪼아대는 음충(陰蟲)들의 작은 소리들은 내 생의 마지막 듣고 볼거리임에 환희를 갖는다. 또한 못난 애비를 말없이 지켜봐 줬던 5남매의 싱싱한 숲이 나를 에워싸고 있다. 곧 60대의 교사로 접어들 맏이, 성실하고 올바른 삶이 바탕이 되었는지 한의원을 운영하는 둘째, 자수성가하여 벤처기업을 운영하는 셋째, 그리고 저마다 잘 살고 있는 큰 딸, 막내딸들이 하나같이 나와 늙은 아내를 바람막이 해 주는 큰 울타리인 것이다.
하나가 둘이 되었던 농막의 밤이 상큼한 아침으로 열린다. 숲의 수다스러움이 산새들의 칭얼거림으로 번지기 전, 나는 다시 몸을 일으켜 창문을 연다. 밤새 올망졸망한 조롱박의 크기를 가늠해 보는 것도 하루 일과의 시작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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