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산 장날의 하루
이은택
겨우 목로(木櫨) 한 귀퉁이에 자리를 잡는다. 엉덩이 하나 붙이는 공간을 얻는데 10여분을 기다렸다. 장날이기 때문일 테다. 2일과 7일로 열리는 선산장은 늘 사람들로 붐빈다. 본바닥 사람은 10% 정도지만 외부에서 들어오는 뜨내기 장사꾼들이 90%여서 장사꾼들이 오히려 장꾼들보다도 많은 셈이다.
트럭에 물건을 싣고 와 시장통 양편으로 포장을 치고 좌판을 벌인 길이만 해도 500미터가 넘는다. 모두 하루 벌어 하루 먹는 장돌뱅이들로 하나 같이 가난한 사람들이다. 또한 골목골목마다 쌀 되박, 콩 되박, 채소 등 올망졸망한 난전을 벌여 놓고 앉아 오가는 사람들의 눈요기를 시키는 늙은 아낙들의 시장점유율도 그 수를 헤일 수 없을 만큼 많다. 그에 따라 전통 재래시장의 맛과 멋을 아는 주변 읍면의 소비자들 역시 엄청나 시장통을 구경하자면 몸과 몸을 부대끼며 걷는다. 때문에 장날 하루 유통되는 물류량이 구미 중앙시장의 몇 배나 되어 선산읍의 경제 규모는 사실 어느 군 단위보다도 짭짤하여 알부자읍으로 알려져 있다.
열한 시 반쯤 되자 사람들이 몰려든다. 새벽 4시~5시에 일어나 짐을 챙긴 후 된장국 아니면 김치뿌다구니에 찬밥 한 술 말아 게눈 감추듯 하고 선산장을 향해 달려 왔으니 그 숨넘어갈 듯한 시장기야 말할 나위조차 없다. 아무리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했지만 허기까지 참으며 생활수단이 먼저인 그들에겐 잠시의 배고픔은 사실 이름처럼 따라다니는 부적(符籍)에 불과한 것이다.
한 그릇에 4천 원 하는 잔치국수집이다. 여섯 명의 40~50대 아낙들이 정신없이 바쁘게 동동거리는 국수집은 장날만 왔다 하면 북새통이다. 막걸리 달라, 소주는 기본이고 돼지비개두루치기, 닭살무침 , 도라지, 더덕양념무침, 게다가 가슴팍을 씨원하게 내리 씻겨주는 선산탁배기, 목구멍이 알싸하도록 찬 맛으로 넘어가는 그 대찬 맛은 Y셔츠에 넥타이로 목을 조인 월급쟁이들도 늘 부러워할 만한 현장맛이다.
한파수 장날 600~700그릇의 잔치국수를 말아내는 그 집의 간판 명칭은 ‘선산 맛집 잔치국수’다. 보통의 잔치국수는 다시마, 멸치, 양파, 대파를 끓인 물에, 삶아 사려놓은 국수 갈고리 한 다발을 넣은 다음, 양념간장 한 술, 매운 따장 한 술 넣어 말아먹는 것이 상례인데 어찌된 영문인지 그 집의 잔치국수 맛은 보통을 제거해 버린 독특한 맛이다. 한마디로 입맛에 짝짝 달라붙는 감칠맛이다. 맛 그대로를 얘기하자면 쇠뼉다귀 고은 물에 양념간장 맛이라 하겠는데 잠작만 할 뿐 알아야 할 필요도 없다. 일하는 아줌마나 매담 할멈에게 간혹 그 맛의 비결을 물을라치면 그냥 씽긋이 웃을 뿐 노-코멘트다. 가르쳐 줄 필요도 없지만 알려줘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어쨌거나 서너 젓갈 말아 입에 넣으면 금방 바닥이 나는 그 맛에 한 젓갈 더 달랄 수밖에 없는데 그 때는 고명처럼 덤으로 얹혀 나오는 것이 잡곡밥 한 술과 혓바닥이 들락날락하게 맛있는 겉절이로 버무린 어린 배추김치다. 그 맛에 선산장꾼 중 주머니 얇은 가난한 남녀노소가 뜬금없이 밀려드는 것이다. 식당 소유 면적이래야 겨우 40평 남짓한데 늘 자리부족이다.
겨우 의자 하나를 차지했다. 마주 앉은 늙은 내외 역시 골목 안쪽 길거리에 도라지, 열무, 마늘, 깻잎 나부랭이를 갖고 나와 용돈 정도는 챙긴 듯 할멈은 잔치국시 한 그릇을 비운 후 입술을 닦고, 영감 역시 국수 한 그릇에 선산탁배기 한 병을 나눠 마시는데 늙은 두 내외의 대화가 듣는 자로 하여금 마음을 알콤하게 한다.
“워쩐다? 큰 애 입원비가 줄잡아 5~6백은 될 것이라는디 소락도 서너 마리 팔아야 엥간히 메꾸지 않겠어? 그라고 둘째는 뭐여? 마튼가 뭔가 그거 할라 칼 때 촌놈이 무신 얼어죽을 마-트냐? 함시로 극구 말렸등마- 생 지랄발광을 혀가꼬 애지중지 혔던 소 다섯 마리 값을 떠억 허니 줘-었등마 다-아 까처먹고 지곰 와서 또 손바닥 벌리는디- 당신 참말로 답답구먼-! 그래 – 워쩔 것이여-어?”
70세 후반 같은 마누라의 호된 채근이다. 허나 80세 전후로 보이는 영감은 별 말이 없다. 한숨만 내 쉰다.
“……”
“퉁부처맨치로 또 말이 웂네요이-ㅇ? 에이구 땁땁기는-! 나아 고마 나가 볼팅 게로 탁배기 마저 자시구선 집으로 가소 마. 새끼 딸린 에미소 뭐락도 메기야 되지 않겠소?”
면박과 꾸중으로 시작과 끝을 맺은 할멈은 서둘러 음식값을 치른 후 밖으로 나간다. 그래도 영감은 마음이 편한 얼굴을 가진 채 그냥 싱긋이 웃을 뿐 말이 없다. 교통사고로 인한 큰 아들의 중상과 둘째 아들의 사업 실패, 또한 자조(自嘲) 반 나무람 반반으로 밀어부치는 마누라의 모진 푸념까지 그냥 순박한 미소로 받아 넘기는 그 속은 어땠을까? 사람 산다는 것이 다 그렇듯 누구든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하나 같이 고만고만한 걱정거리와 근심이 있게 마련인데 내공(內攻)으로 가득해 보이는 그의 얼굴은 세상 삶의 희로애락이 모두 얼굴에 담겨 있다는 듯 표정엔 변함이 없다. 바라만 봤을 뿐 필자도 말 한 마디 없었다. 질문할 것도 궁금할 것도 없는 가장 편해 보이는 그의 마음 밖으로는 삶의 흔적과 인고(忍苦)의 세월이 깊게 골진 검은 주름살로 모든 걸 말해 줬기 때문이다.
남은 탁배기 잔을 비운 그는 서둘러 자리를 떴다. 미안함과 민망함을 섞은 서글한 눈매로 빙긋이 목례만 남기고 갔다. 잘 생긴 얼굴! 수려했을 젊은 날 그의 이목구비는 누구든 한 번 보면 말을 걸고 싶고 정을 나누고 싶을 만큼 인품마저 갖췄을 법한 그의 인상이다. 참으로 이상한 느낌이다. 뭔가 물어볼 게 많았는데도 주고받은 대화 한 마디 없이 헤어진 그 뒷맛이 괜히 그를 거듭 생각케 한다.
교양이 가득한 지식인이었는지, 60대 초반에 퇴임한 교육자였는지, 아니면 인물값 한답시고 주색잡기와 바람둥이로 물려받은 재산 다 털어먹고 뒤늦게 소 몇 마리로 여생을 준비하고 있는지, 어쨌거나 ‘지척에 있는 사람일지라도 그 마음 알 수 없다(咫尺人心 不可料)’는 말처럼,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이긴 하나 처음 본 인상착의 가지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는 것도 처음이어서 그 심회를 적는다.
핑크빛 노을이 서산머리 위로 번진다. 파장이 되어가는 선산시장 거리는 포장도 걷고 상품 갈무리 하는 장사꾼들로 하여 또 한 번 북새통이다. 그 움직임 하나하나가 보통사람들이 살아가는 끈적한 현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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