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아버지께서 쓰신 글인데, 좋아서 이곳에 올린다.
안은댕이의 七月아침
이 은 택
새벽 다섯시면 7월의 아침이 열린다. 싱그러운 푸른 숲이 상큼한 맛으로 가슴을 열면 숲의 하루는 또 시끄러워 진다. 암자의 새벽 예불소리가 들리고 여명을 알리는 촉새의 울음을 시작으로 백조(百鳥)들의 향연(響演)이 시작되는 것이다.
밤새워 울던 소쩍새의 울음이 멎는다. 그러면 제일 먼저 경쾌한 소프라노 음색으로 숲을 깨우는 것은 꾀꼬리다. 듣기에 따라 표현도 자유로울 수밖에 없는 황앵(黃鸚)들의 종알거림은 그 레파토리 또한 다양하다.
‘뀌-이오, 깨찌요오-빼때끼찌 쪼우요?’처럼 들리는 소리는 ‘이봐요? 빨리 빨리 서둘러 일어나시오!’ 소리로도 들리고, ‘꽤째유-웅-으-애앵앵-’ 하는 소리는 ‘눈이 아직 안 떨어졌시요?’ 하는 소리로도 들린다. 교활하고 민첩하여 남의 둥지 새알 훔쳐 먹기를 즐긴다는 꾀꼬리는 그렇다 치고 그때부터 뻐꾸기, 산비둘기, 산까치, 곤줄박이, 동박새, 궁궁이, 뱁새 등 온갖 산새들이 저마다의 소리로 합주연출을 시작한다, 숙련된 연습으로 정해진 악보에 따라 발산하는 선율(線律)의 소리가 아니고 천연 본능의 교음(咬音)으로 토해내는 종알거림이 합주(合奏)되어 산골의 새벽을 깨우는 것이다.
튕기는 용수철이 합판을 때리듯 ‘따르르-르륵 따르르-르륵’ 고사목을 쪼는 검은머리 딱따구리의 소리도 강한 반주와 지휘로 매듭을 끊는 것 같아 산중의 소리로는 제법 들을만 하다.
눈과 귀가 넘치도록 행복하다. 호흡으로 느껴지는 알싸하고 싱그러운 흙의 맛과 어우러져 촉촉이 젖어드는 숲의 소리를 새벽마다 공짜로 듣고 보는 나그네의 마음도 한껏 벅차오른다. 너무 과분한 자락에 머문 것 같아 미안한 생각도 든다. 해서 그 미뿌고 아리잠작한 자연에게 소박한 보상이라도 해야지 하곤 작은 새 둥지 몇 개를 만들어 숲 여기저기 매달아 놓았다. 어느 산새가 입주했는지는 확인하지도 않았다, 못 본 체 간섭하지 않는 것도 자연에게 맡기는 자연 같아서다. 단지 몸집 작은 박새, 솔새 등이 입주하여 새 생명이나 부화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나무 위에 서식하는 산새들 외에 숲속 산비알에 사는 산 식구들의 거동과 울음소리도 음폭이 굵고 쩌렁쩌렁하여 깨어있음을 실감케 한다. 텃밭에 심은 콩잎을 천천히 걸어와 제 것처럼 뜯어먹고 가는 고라니 한 쌍은 새벽달에게만 고마운지 괜히 하늘에다 대고 길게 ‘쾌애-액- 쾌애-액 하다가 가면 연이어 까투리를 거느린 장끼의 호들갑도 짧은 여름밤을 털어내는 산록(山麓)의 밈진 소리다. 꿔-엉- 꿔-엉 하곤 무엇이 바쁜지 산안개 토해내는 낮은 산자락으로 힘차게 날아가는 모습도 고즈넉한 산골의 일품 그림이다.
이곳은 경북 구미시 선산읍 죽장리 일명 ‘안은댕이’라는 작은 산골이다. 선산읍에서 3km쯤 된다. 기물답게 잘 생긴 바위들이 편도 좁은 길을 막아선 산길을 조심스럽게 돌고 돌아 경사진 마을로 들어서면 잘 지은 전원주택 다섯 채가 보이고 거기엔 하나 가득 행복이 넘친다. 들어오는 산길은 좁고 험해 병목형상인데 비해 놀랍게도 마을 안은 넓고 풍치가 그윽하여 선경처럼 보인다. 마을 좌우로는 늙고 몸매 붉은 토종 소나무가 산자락에 가득하고 아름드리 굴참나무, 해묵은 산뽕나무, 산단풍, 자귀나무, 산당화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동그랗게 마을을 감싸 안은 비봉산(飛鳳山)의 주봉은 북으로 솟아 하늘을 가렸고, 동서의 외계(外界)가 귀찮은 듯, 솟을 듯 말 듯 몽싯하게 원을 그리며 남녘을 향해 내리뻗은 두 자락은 그 끝이 안은댕이 입구로 내려앉아 그 엇갈린 산자락 끝이 Y자 형으로 고운 여인이 청라(靑羅)저고리 앞섶을 얌전하게 여민 것 같다.
그런데 안섶과 바깥섶을 Y자 형으로 여민 그 사이로는 금오산(金烏山) 자락도 보인다. 25km 밖에 솟아 있는 해발 976m의 금오산이 두 날개를 활짝 펼친 까마귀의 모형(貌形)으로 안은댕이를 향해 날아드는 것이다. 연무가 끼이거나 흐린 날은 보이지 않는다. 청명한 날 아침 마루 끝에 서면 파르스름하고 아슴하게 보이는 금까마귀가 날개를 펄럭이며 눈높이에 맞춰 날아든다.
밤비가 내린 아침이면 내가 구름 속에 갇힌다. 성림토운(盛林吐雲)이어서일 테다. 송림(松林)으로부터 시작된 짙은 안개는 삽시간에 큰지박골, 작은지박골, 분지골, 산이자골 등 안은댕이 전체를 뒤덮은 다음 사방 10m 안팎의 내 시야 만큼만 남겨놓고 구름바다를 이룬다. 잠시 내가 즐기고 소유할 수 있는 천혜의 자연풍치다. 그러면 귀하디귀한 청머구리(몸집이 큰 토종개구리)도 만나고 점잖게 몇 발작씩 기어다니는 두꺼비 대감도 만난다. 어른 주먹만한 크기에 툭 불거진 눈매하며 벌름거리는 턱밑 모양새가 너무 귀하게만 여겼던 섬류(蟾類)인 터라, 옛날 여섯 칸 대청(大廳) 마루에 장죽(長竹) 물고 뿔관 쓴 정삼품(正三品) 당상관(堂上官)의 위엄과 비슷하여 내 혼자 이름붙인 대감이다. 그도 산안개를 즐기는 것 같다. 가끔 숲 밑 계곡의 산가재를 만나는 것도 내 볼거리의 낙이다.
큰아들이 사 놓은 땅에 조그만 농막(農幕) 하나를 짓고 나 혼자 이곳으로 거처를 옮긴 것은 내 자신 흙 밟기를 소원했기 때문이다. 대구 아파트에서 옮겨온 유자나무 열매도 청람색(靑藍色) 빛깔로 자란 부피가 이제 막 어린 아이 주먹만 하게 컸다. 그 굵기가 사과알만하게 되고 마당가 답사리 폭에 풀여치가 울면 8~9월의 드센 여름이 온 숲을 달글 텐데 하얀 박꽃이 필 때쯤 온다던 친구는 아직도 오지 않았다. 산비알에 단풍이 내려앉고 푸른 하늘에 낮달이 잘 보일 때 쯤(10월), 농막에 사는 친구 한 번 보러오라는 서한(書翰)이라도 몇 줄 써야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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