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박 4일 제주도 여행의 마지막 날 아침이다.
짐을 주섬주섬 챙기고, 렌트카 반납 시간인 아침 8시 30분에 맞춰서
마지막 한 코스를 더 섭렵해야 했다. 비행기 출발 시간은 9시 10분이다.
펜션 주인한테 그간 고마웠다는 인사를 하고 숙소를 나섰다.
숙소 바로 앞 해변에서 사진 하나 남기자는 아내의 제안에 잠시 차를 멈췄다.
해변의 벤치에 앉아서 폼나는 사진을 찍고 싶어했는데 내가 급하게 서두는 바람에 그 기회를 놓쳤다.
벤치에 앉아 찍으나 서서 찍으나 무슨 차이가 있느냐고 아내 말을 무시한 남편이 원망스러웠을 것이다.
빨리 움직여야지 공항에 닿을 수 있겠다는 급해진 마음에 그랬는데 섭섭했는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제주의 향기가 그윽한 오현단을 찾았다. 제주를 다녀간 조선시대 다섯 명현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충절과 학문이 후세에 크게 존숭받게 된 충암 김정, 동계 정온, 청음 김상헌, 규암 송인수,
우암 송시열 등 이렇게 다섯 분이 바로 오현단에 모셔진 분들이시다.
향현사(鄕賢祠), 제주 출신으로 조선왕조 세종 때 문신이었던 고득종을 모신 사당이다.
고득종은 부친을 따라 10세 때 상경하여 제주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문과에 합격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그는 제주 목마장에 관한 임금의 자문에 응하면서 세종의 총애를 받았고, 안견의 몽유도원도에
찬시를 쓸 정도로 안평대군과 가까웠다. 한성판윤 등을 지냈고 기록상 제주에 세 번 다녀간
제주의 출향 인사였다. 훗날 이원조 목사는 헌종 9년(1843)에 고득종을 모신 사당을 세워주니
그것이 바로 오현단 곁에 있는 향현사인 것이다. -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7> 인용
오현단의 뒷벽은 바로 옛 제주성이다. 제주 시내를 빙 둘러 축조했던 제주성은
성곽의 둘레가 약 1,424미터, 높이 약 3.3미터로 동.서.남문이 있었다고 했다.
올렛길을 걷는 사람들이면 반드시 거쳐가야 할 곳임을 강조하고 있는 듯한 올레리본.
'증주벽립'은 '증자와 주자가 이 벽에 서 있도다'라는 뜻으로 서울 성균관에 있는 우암 송시열의 글씨를
탁본하여 철종 7년(1856)에 새겨놓은 것이다. 우암 송시열의 영향력이 얼마나 컸는가를 증명한다.
제주시에서 가장 많이 본 가로수인데, 이름은 '구실잣밤나무'라고 한다.
9시 10분발 아시아나 항공, 10분 지연하여 출발
어느 새 비행기는 공항을 이륙하여 고도를 높이더니 땅에서 멀어져 간다.
잠시 눈감고 있는 사이 아내가 찍은 사진인데, 수염이 이젠 보기가 싫다. 지저분해 보여서다.
가뜩이나 얼굴에 검버섯이 많이 펴서 좀 지저분하게 보이는데 수염까지 저리 무성하니.
누구는 멋있다며 계속 기르라 하지만 내 스스로가 감당이 안 되니 조만간 깎아버려야 한다.
동대구에서 구미로 가는 기차 안인데, 아내는 싱겁게 웃고 있다. 셀카의 등장 때문일 것이다.
자세히 확대해 보니, 이건 완존히 할아버지 수염!! 우리 부친 수염도 이렇게 희지는 않은데..... 당장 깎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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