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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제주도 여행 셋째날

여행 이야기

by 우람별(논강) 2013. 1. 12. 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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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의 산책은 용두암까지 걸어서 갔다 오는 것으로 잡았다. 아직 사방이 어둡다.

하늘엔 구름이 많이 끼어 금방이라도 제주의 해변으로 온통 쏟아져내릴 것만 같다. 

 

어둠이 가시기 전의 용두암 주변, 검은 바위의 윤곽이 거의 잘 잡히지 않는다.

 

최대한 용두암의 형상을 크게 잡아보려고 접근하다가 미끄러져서 크게 다칠 뻔했다. 십년 감수!!!

 

용두암은 멀리서 보나 가까이서 보나 그 형태는 변함이 없다.

제주도의 관광자원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특이한 곳이 있어 다가가 보니 둥그런 샘이 하나 있다. 자세히 보니 기포가 올라오고 있다.

그렇다면 물이 솟아 오르고 있다는 증거다. 내려가 물맛을 보았다. 소금물이 아니었다.

소위 제주도의 곳곳에서 볼 수 있는 '용수천'이었다. 고등 시절 지리시간에 배웠던

 기억이 되살아 났다. 용수천이 있는 강정마을 구럼비 바위도 떠올라 마음 한 켠이 아렸다.

해군기지를 세운다는 명목하에 파괴되고 있는 천혜의 비경 구럼비 바위, 지금은?

 

 

사진과 함께 있는 제주어가 보도블록 위에서 눈길을 잡아 끈다.

제주도가 특별히 신경써서 보존해야 할 것이 바로 제주어다.

오랜 세월 제주 토박이어를 구사해 온 노인들의 주고받는 말을

보물로 삼아 애용했으면 참 좋겠다. 꾸준한 연구도 뒤따라야 한다.

다른 곳에서는 보고 들을 수 없는 제주도만의 것이 있다면 그것만큼 소중한 것이 있으랴

돈이면 다 되는 세상인지는 몰라도 제주의 문화만큼은 억만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것이니

고스란히 살려내는 작업과 물질적 지원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날은 흐렸으나 짙은 구름을 비집고 해는 저렇게 강렬하게 떠오르고 있다. 저 붉은 기운을 보시라!!

 

 

 

 

아침 식사를 하면서 오늘의 일정을 점검해 본다. 제주 4.3 평화기념관을 제일 먼저 가 보는 것으로 했다.

 

 

눈 덮인 한라산 기슭 아래, 제주 4.3사건으로 행방불명된 4,000여 명의 희생자들의 가묘가 슬프다.

 

 행방불명인표석의 무채색 조각이 더욱 슬프게 한다. 저 원혼의 표정을 보시라.

 

죽은 자들의 원한과 살아있는 자들의 안타까움을 저 우뚝 선 한라산은 알고 있을까?

 

 

 

 위령제단 앞에서 4.3사건으로 세상을 뜬 분들의 명복을 빌고, 기념 사진 하나 남겼다.

 

 

 제주 4.3사건의 역사를 기념하고 추모하는 공간, 역사적 진실을 기록하는 엄정한 공간,

인류 보편의 과제인 평화 추구, 인권회복, 국민화합에 이바지하는 교육적 공간이다.

 

제1관은 이렇게 동굴의 형상으로 시작되었다. 4.3의 역사를 찾아가는 여정의 첫관문이기도 하고

오랫동안 지하에 묻혀 있던 역사적 진실을 찾아가는 과정을 상징적으로 드러낸 것 같아서 인상적이다.

제2관은 전쟁 - 해방 - 자치 - 미군정 - 3.1 발포 사건 - 탄압의 순서로 전개된다.

제3관은 1948년 4월 3일 새벽에 일어난 무장봉기와 5.10 남한만의 단독 선거, 단독 정부

반대 사건을 중심으로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이해할 수 있게 연출하였다.

제4관은 초토화 작전과 민간인 대학살, 한국전쟁 기간 형무소 재소자 학살까지의 내용을 다루고 있다.

제5관은 복구와 정착 그리고 후유증, 진상규명운동으로 나뉘어 4.3의 상처와 아픔, 회복 과정을 보여준다.

 

 다랑쉬굴의 모습을 재현해 놓은 곳도 있었다. 1948년 11명의 민간인이 토벌대에 의해

질식사한 동굴현장을 발굴 당시 그대로 재현하였다. 긴박했던 피난 생활과 당시의

학살 상황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이라고 보면 되겠다.

 

 

제6관은 에필로그에 해당되는데 4.3의 아픈 기억을 통하여 평화와 인권의 소중함을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공간이다. 맨끝의 출구 통로에는 방문객들의 관람소감문들이 걸려 있다.

누구나 남기고 싶은 소감을 적어서 남길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었다.

 

 아내도 몇 글자의 소감을 적어서 마음을 드러냈다. "막막하고 아픕니다. 이땅의 역사는

왜 이다지도 참혹한 것인지요? 정의, 평화, 인권, 자유, 진실...... 강물처럼 흐르는  세상을 꿈꾸며

2013. 1. 12.  김은숙" 이라고 썼다. 아내의 마음을 읽고 있는 내 마음 또한 먹먹해졌다.

특히 마지막 구절, '강물처럼 흐르는 세상을 꿈꾸며'라는 말이 가슴에 와 닿았다.

'그래, 우리 그런 세상 만드는 데 자그마한 역할일지라도 잊지말고 하도록 하자.'

 

 

4.3 평화기념관을 나오는데, 관람객은 거의 보이지 않고 팽나무 몇 그루가 쓸쓸히 우리를 전송해 주었다.

 

많은 분들이 4.3사건의 진상을 제대로 알고 그 역사적 교훈을 되새겼으면 좋겠다는 생각과

우리 동족끼리 더 이상 이념과 사상 때문에 억울하게 모함을 당한다거나 상처받는 일이 없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직까지도 국민들 사이에는 흑백논리의 모순이 크게 남아 있어서다.

'좌경 용공세력'이니 '친북세력'이니 '좌파'니 이런 용어가 난무하는 현실이 매우 걱정된다.

어느 한쪽으로만 가치관이 경도되는 것은 참으로 경계할 일이라고 본다.

우리 국민들 서로가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해 주는 분위기가 살아나야 한다.

민주주의 성숙도가 높은 사회일수록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이 그 기본일진대,

어찌하여 많은 사람들은 그 문제투성이의 흑백논리로 사람을 판단하는지 모르겠다.

 

자, 이젠 절물자연휴양림을 찾아 떠나자. 거칠어진 우리의 호흡도 가라앉힐 겸.

 

제주시 명림로 584(산림청 소관 국유림), 300ha의 면적, 제주 절물자연휴양림,

제주시에서 20분 거리에 위치해 있으며 하늘을 찌를 듯 쭉쭉 뻗은 50 여년 생의 삼나무 숲이

우리를 맞는다. 은은한 숲 향기 '피톤치드'가 전신을 감싸고 기분이 상쾌하고 몸과 마음이 맑아진다.

 

 '절물'이란 지명의 유래는 옛날 절 옆에 물이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현재 절은 없으나

약수암이 남아 있다. 약수터에서 솟아나는 용천수는 신경통과 위장염에 큰 효과가 있단다.

 

  

언젠가 이해인 수녀님도 이곳의 생이소리길을 걸었나 보다.

생이소리길이 시작되는 입구에 '생이소리길에서'란 시가 수녀님의 친필로 걸려 있다.

 

 

'족욕소'란 곳이다. 발을 씻으면서 자연속에 몰입해 보라는 뜻으로 만든 곳 같다.

 

 매표소 부근의 매점에서 빵 2개, 오뎅, 라면 등을 먹으면서 점심을 때웠다.

 

사려니 숲길은  '한국의 가장 아름다운 도로'로 선정된 조천읍 교래리 비자림로에서 시작하여

물찻오름을 거쳐 서귀포시 남원읍 한남리 사려니오름까지 이어지는 15킬로미터 정도의 길을 일컫는다.

천연림과 인공림이 어우러진 신성한 생명의 공간이자 자연생태문화를 체험하는 소통의 공간인 것이다.

 

날래고 힘이 좋아보이는 두 자녀를 데리고 열심히 걷던 아주머니 한 분은

부지런히 걸으면서 끝까지 갈 기세 같더니, 몇 백 미터 정도 걷다가 되돌아 갔다.

아내도 눈길이라서, 어제의 무리한 걸음 탓인지, 잘 걷지를 못하겠다며 자신없어 한다.

'이 좋은 길을 두 시간 정도는 걸어야지 그렇게 약해서 어떡하냐'고 했더니 새초롬해진다.

"그럼, 왕복 1시간 정도만 걷도록 하자. 어때?" "좋아요......"

 

아내는 한참을 걷다가 만난 눈썰매를 탄 어린 아이와 강아지를 보더니 부럽다고 한다.

'왜 나는 저런 것 안 태워주냐'며 앙탈이다. 내 손을 잡고 눈위에 앉아 미끌어져 보라 했더니

한참을 내 손에 이끌려 재미있어 하다가 아내는 이내 돌아가자면서 보챈다. 걸음걸이도 느리다.

 

 천미천, 한라산 1400미터에서 발원해서 표선면 하천리까지 이어지는

길이 25.7 킬로미터로 제주특별자치도에서 가장 긴 하천이라고 한다.

얼음장 밑으로 물이 흐르는지는 몰라도 눈에 덮여서 하천임을 분간하기 어렵다.

 

사려니숲길 입구에서 1.5킬로 지점이라는 표시가 나무에 빨갛게 걸려 있었다.

사려니숲길 전체 길이의 1/10밖에 오지 않았지만 여기서 돌아가기로 했다.

 

고사목 위에 피어난 버섯들이 좀더 걷지 않고 벌써 돌아가냐면서 하얗게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해 넘어가기 전, 대정읍의 추사 유배지까지 둘러보려면 지금쯤 돌아서야 한다고 변명을 했다.

다음 기회에는 꼭 끝까지 걸어보겠다고 약속을 하고 하얗게 돌아서야 했다. 이해하시라.ㅎㅎ

 

대정읍성은 일제시대 때 많이 파괴되고 일부분만 남아서 그 쓸쓸함을 더한다.

 

추사 김정희 선생(1786-1856)은 타고난 천품과 치열한 학예연찬으로 서예사에서 뿐만 아니라

금석고증학, 경학, 불교, 회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대정은 추사가 55세 되던 해에 옥사사건에 연루되어 약 9년간의 유배생활을 했던 곳으로

부단한 노력과 성찰로 추사체라는 서예사에 빛나는 가장 큰 업적으로 남겼으며 세한도를 그렸다.

 

세한도(歲寒圖)는 국보 제 180호다. 추사가가 제주도에 유배중일 때 제자인 이상적(1804-1865)이

책을 보내준 데 대한 보답으로 그려준 그림이다. 이작품은 예서체로 쓴 세한도라는 표제와

소나무와 잣나무, 가옥 등으로 이루어진 간결한 화면 그리고 김정희의 발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발문에는 추사가 세한도를 그린 이유가 자세히 밝혀져 있다.

 

이곳에 전시되고 있는 세한도는 당대 최고의 추사연구자였던 후지츠카 치카시(1879-1948)가

1939년 복제하여 만든 한정본 100점 가운데 한 점이라고 한다.

 

 

추사의 스승인 완원(1764-1849)의 호이며, 추사 김정희가 제주 유배 시절 대정향교에서

써 준 현판으로 제주 지역 유생들과 추사와의 교류 흔적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1846년 11월에 추사가 써 주었고, 대정향교 학생들의 공부방인 동재에 걸려있었다.

 

건축가 승효상이 설계하여 건축한 추사관의 내부다. '감자창고' 같다는 주민들의 평가를 받고

오히려 만족해 하는 승효상, 그는 우리나라 건축부분에 일가를 이룬 사람으로 평가받는다.

 

겉으로 보면 단층의 소박한 건물이고, 세한도의 그림에 나오는 건축물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안으로 들어가 보면, 지하에 전시실을 대부분 배치하고 1층 부분은 빈 공간이 많다.

여백의 미를 충분히 살렸고, 세한도의 이미지를 최대한 부각시키려 한 흔적이 역력하다.

2010년 5월에 건립되었다. 그 전에는 1984년에 건립된 추사유물전시관이 있었는데

여론에 따라 새롭게 지하 2층, 지상 1층 연면적 1,192제곱미터 규모로 제주추사관을 건립한 것이다.

추사 기념홀을 비롯하여 3개의 전시실과 교육실, 수장고 등의 시설을 갖추고 있으며,

예산김정희종가유물일괄, 추사 현판 글씨, 추사 편지글씨, 추사 지인의 편지글씨 등을 전시하고 있다.

 

2층의 넓은 공간에는 화가 임옥상이 직접 조각한 김정희 무쇠 조각품 하나가 멋지게 놓여있다.

추사의 기품을 잘 살린 작품이라서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추사의 어깨에 살며시 손을 얹어 보았다. 

"네, 이놈 무엄한지고, 감히 누구의 몸에 손을 대는 거냐?"고 꾸지람하는 사람이 있을까?

 

추사 김정희는 수선화를 좋아했다고 한다. 일부러 중국에 가서 구해왔을 정도로.

그런데 제주도 사람들은 워낙 흔해빠진 수선화라 귀한 줄 모르고 짓밟기도 해서

추사는 마치 위리안치된 자신의 처지와 같은 꽃이라고 표현한 적도 있다.

 

추사의 수선화에 대한 시는 다음과 같다. 사진의 모습과 잘 어우러진다.

"연못에 얼음 얼고 뜨락에 눈쌓일 무렵, 모든 화초가 말라도 너는 선화(仙花)처럼

향기를 발산하여 옥반(玉盤)의 정결을 펼치고 금옥(金屋)의 아리따움을 간직한다.

꽃망울 노랗게 터지고, 조밀한 잎 파릇이 돋아나면 고운 바탕은 황금이 어리네."

 

 

왼쪽의 집은 주인 강도순이 가족과 함께 거처하던 안거리, 가운데는 별채인 모거리인데,

위리안치된 추사가 주로 여기에서 묵으면서 학문과 예술을 심화시켰다고 한다.

그의 추사체는 벼루 10개를 구멍내고 붓 천 자루를 닳아 없어지게 했다고 할 정도로

고독한 정진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초의선사가 찾아와서 묵었던 곳이기도 하다.

 

 

 

 

장애인들을 배려한 계단의 변화도 눈에 띈다. 경사가 급해도 어느 정도는 해결되리라.

 

왼쪽의 산은 산방산, 오른쪽의 가까이 보이는 산은 단산(簞山)이다.

추사는 대정 적거지에서 2키로 정도 떨어진 단산 아래 위치한 향교를 자주 찾았다.

 

왼쪽에 있는 것이 인성리 방사탑(防邪塔)이다. '탑꼭대기에는 돌하르방이나 동자석처럼 생긴 석상,

또는 까마귀나 매를 닮은 돌을 올려놓는다. 까마귀로 하여금 궂은 것을 모조리 쪼아먹게 한다는

속뜻이 있다. 탑속에는 밥주걱이나 솥은 묻어두는데, 밥주걱을 묻는 이유는 솥의 밥을 긁어 담듯 재물을

마을로 담아들이라는 뜻이고, 솥을 묻는 이유는 솥이 무서운 불도 끄떡없이 이겨내듯

마을의 재난을 없애달라는 뜻을 담고 있다.'  이 방사탑은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되었고,

또 거욱대의 성스러운 모습이 잘 살아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7의 인용>

 

* 제주지역의 이 액막이 방사탑들은 마을마다 명칭이 조금씩 다른데, '거욱대', '거왁' '극대'라 불림.

 

대정향교, 태종 16년(1416)에 세워졌는데 효종 4년(1653)에 이원진 목사가 현재의 위치로 이건했다.

 

대정향교는 전학후묘라는 향교의 기본구조를 갖추었다. 앞에는 명륜당이라는 배움의 공간을

뒤에는 대성전이라는 묘실을 배치했다. 명륜당 양옆으로는 학생들의 기숙사인 동재와 소재가

대칭으로 배치되어 있다. 집이 낮고 제주도의 다른 건축물처럼 지붕은 합각이며 수키와가 이어지는

곳에는 회를 사용해 거센 바람에 날아가지 않도록 단단하게 발라놓았다.<위의 인용>

 

대정향교 앞의 주차장에서 산방산을 향해 찍었다. 단산과 산방산, 그리고 마늘밭.....

 

향교를 벗어나 알뜨르 비행장을 찾아가다가 백조일손지묘라는 이정표를 발견하고 그곳을 먼저 만났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정부는 전국의 계엄사에 좌익분자를 색출할 것을 명령하고,

이에 제주지구 계엄당국은 4.3사건 때 체포했다가 석방된 사람 등을

'예비 검속'이라는 명분으로 검거하여 대량 학살을 감행하였다.

그 중에서도 1950년 8월 20일 새벽 5시에 섯알오름에서 132명이 집단으로 처형되었다.

이 사건은 당국에 의해 은폐되어 시신조차 수숩되지 못하다가 사건 발생 6년 8개월만에

비로소 유해가 수습되도록 인도되었는데, 서로 뒤섞인 상태여서 신원을 확인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이에 유족들은 한 마음으로 숨진 모든 이들을 같은 조장으로 모시기로 결의하고

한 자손으로 살기를 맹세한다. 그리하여 처형지에서 조금 떨어진 이곳에

132개의 작은 봉분들을 만들고, 이를 백조일손지묘라고 이름하였다고 한다.

 

묘역 담장 너머로 산방산이 조용히 앉아서 물끄러미 우릴 바라보고 있다.

 

 

모슬포항의 모습이다. 모슬포는 모실개의 한자식 표기다. 모실은 모래, 개는 갯가를 말한다.

실제로 모슬포에는 모래가 많다. 모슬포는 일찍부터 위아래 마을로 나뉘어 상모슬리, 하모슬로

불리다가 급기야 아무도 알아차리기 힘든 상모리, 하모리로 둔갑해 버린 것이다.

 

모슬포와 대정마을이 있는 제주의 서남쪽은 관광객이 그다지 많이 않다.

예로부터 바람이 하도 거칠고 세어 '사람들이 못살 포구'라는 뜻을 가진 이곳은

관의 수탈에 못 견딘 이들과 살곳없는 이들이 모여 화전을 하며 이룬 마을이었다고 한다.

 

일몰이라도 좀 볼까 싶어 전망좋은 모슬포의 한 지점을 차지했으나 끝내 일몰의 장관을 볼 수 없었다.

 

모슬포 큰길 가에 '명궁횟집'이란 곳이 있었다. 손님들의 많은 것으로 보아 음식맛이 괜찮으리라.

사람이 많이 모이는 음식점에 가면 절대로 실망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하나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과연, 음식이 맛있었고, 푸짐했다. 소주를 한잔 하고 싶었으나 숙소까지 차를 몰아야 해서 참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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