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전 새해의 첫날을 제주도에서 맞았고, 그 때 걸었던 올렛길의 추억이 되살아나면서
다시 제주도를 찾아야겠다는 욕심이 생기는 것은 인지상정이 아닐까 한다.
아내와 한 마음이 되어 제주행 비행기를 타고 40여 분만에 제주공항에 내렸다.
어딘지는 몰라도 제주로 가는 비행기에서 내려다 본 것인데 남해안의 지도를 보는 듯하다.^^
제주도에 가면 그곳 사람들이 주로 이용하는 식당인 <순옥이네 집>을 찾아가서
'전복물회' 한 그릇을 꼭 먹어보라는 누군가의 말이 생각났고, 약간의 호기심이 발동해서
공항에 내리자마자 제일 먼저 찾은 곳이 <순옥이네 집>이다. 과연 '전복물회'는 특별한 맛이었고,
전복의 양이 너무 많아서 씹기가 힘들 정도였다면 과연 믿을까? 푸짐한 식사였다.
첫 여행지로 찾아간 곳은 삼양동 검은모래 해변이다.
물먹은 검은빛의 모래밭을 밟아보는 느낌이 남달랐다고나 할까.
더구나 제주에서 거의 없는 검은 모래해변이라서 인상적이었다.
불탑사란 절이 있어 찾아가 보았다. 5층석탑(보물 1187호)이 이 절의 명물이다.
보통은 법당 앞에 있는 것이 보통이지만 돌고 돌아간 후미진 곳에 있어 의아스럽다.
이것이 제주특별자치도 안에 있는 유일한 불탑이라고 한다.
수많은 민속신앙이 남아있는 제주도라서 그런지 몰라도
절집의 분위기도 육지의 그것과는 다른 것 같다는 느낌이다.
많은 건축물이 현무암을 재료로 세워졌기 때문이 아닐까?
고려시대부터 존재했던 조천진 성터, 제주의 주교통항으로 축조되어 있었다고 한다.
1590년 이옥 목사 때 성을 중수하여 둘레 4백 28척, 높이 9척에 성문 하나의 석성을 쌓았으며
초루, 객사, 청사, 군기고, 포사 등을 두었다는 기록이 있다. 가냘픈 기둥이 서글프다.
연북정, 제주의 관문인 이곳에서 유배되어 온 사람들이 한양의 기쁜 소식을 기다리면서
북녘에 계신 임금에 대한 사모의 충정과 그리움을 보낸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과연 임금에 대한 그리움이 있었을까? 자신을 귀양보낸 장본인을 원망하기는커녕 그리워하다니......
송강 선생의 가사 곳곳에 표현되어 있는 연군지정처럼, 절해고도 제주에 유배되어 살던 위정자들의
소외감이 오히려 임금을 그리워하는 것으로 승화될 수 있었을까 하는
의구심을 갖게 되는 것은 나의 지나친 속됨 탓일까?
조천 비석거리, 역사가 오랜 마을마다 중심지에 마을과 관련된 사람들의 치적을
기념하는 비가 제주도에는 많이 세워져 있는데, 옥개석을 얹은 그 비각이 특이하다.
조천 - 함덕 해안도로, 하늘빛과 바다빛이 조화를 이루고 있어서 그런지 눈에 확 들어오는 곳이다.
입장료가 5,000원이나 하는 북촌의 돌하르방 공원, 비싼 만큼 볼 것이 많으리란 기대를 안고 들어갔다.
제주도의 상징인 돌하르방의 갖가지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까지는 좋았으나 그리 오래된 것이 아니고,
최근에 급조해서 만든 것들이 대부분 같고, 의도적으로 연출된 것들이라서 옛스러움은 덜했다.
만화영화 '은하철도 999'에 나오는 철이란 소년이 여기에 와 있네. 어머, 웬일이야!!
물 위에 떠있는 석탑은 지금껏 본 적이 없는데, 자연스러움을 살린 것으로 해석을 해야 하나?
'그대는 바로 내 손안에 있소이다' 하며 금방이라도 내 몸을 움켜잡을 듯한 하르방의 기세다.
세계에서 가장 큰 돌하르방이라고 소개해 놓은 작품이다.
몸통은 땅아래 숨어있고 거인의 양손만이 밖으로 노출되었다.
다음에 찾아간 곳이 '너븐숭이 4.3기념관'이다. 1949년 1월 17일
북촌리 주민 수백 명이 집단학살을 당한 장소가 바로 '너븐숭이'이다.
한국의 현대사에서 제주도의 4.3사건은 아직도 완전히 규명되지 않은 참으로 슬픈 역사이다.
'순이 삼촌' 문학비, 작가 현기영은 1978년 '순이 삼촌'이란 소설을 통해서 당시의 참혹상과
후유증을 고발함과 동시에 오랫동안 묻혀있던 사건의 진실을 문학을 통해 공론화시켰다.
당시 그 사건을 이야기하는 것조차 금기시 해온 현대사, 그 진실이 묻혀진 채 오랜 세월
흘러오다가 2003년 10월 31일 노무현 대통령이 공권력의 잘못을 공식 사과함으로써
마침내 제주 4.3사건의 진실이 역사의 조명을 받게 되었다. 조천읍 북촌리 마을에서
같은 날 1월 17일에 집단 학살된 사람만도 300여 명이 넘는다. 당일의 사망자로는 가장 많다.
1949년 1월 17일, 북촌 대학살 현장의 한 장면을 보고 있는 듯하다. 널브러져 있는 네모난 돌은
당시 학살당한 시신의 모습을 형상화 한 것이고, 붉은 송이(화산석)는 붉은 피의 상징이다.
북촌리 주민들이 뒤엉켜 죽어있고, 피가 흘러내려 온 땅을 적시고 있는 참혹상을 표현한 것이리라.
애기무덤 가에 앉아, 피흘리면서 억울하게 죽어가던 마을 주민들의 절규와 고통을 생각해 본다.
갑자기 구좌읍 종달리에 고향을 둔 유선생님이 보고 싶다. 나보다 세 살 위다.
유선생님은 제주대학교 사범대학 **교육과를 졸업하고 뭍으로 발령을 받아
경북 포항 경주 지역에서 교사생활을 오래 한 분으로 작달막한 키와 야무진 체격의 소유자다.
특히 발명 분야에 일가견이 있어 그 최고상인 대통령상을 받은 바 있고
그것을 바탕으로 해서 한때 승진도 꿈꾼 바 있지만 여전히 그는 평교사다.
20대 초반 고향에서 해병대로 군생활을 하면서 ROKMC 해병대 특유의 호기를 부렸고
온 천하를 눈 아래 두고 산 적이 있으며, 그 추억이 발동하여 기질을 발휘할 때쯤이면
아무도 말리는 사람이 없음을 스스로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 특유의 기질은
막걸리든 소주든 한 잔씩 마시면서 몸과 마음이 불콰해질 즈음 서서히 나타나는데
그 첫 징후는 안경이 이마 위로 올라가 쓰여지는 순간이다. 그 다음부터는
술자리를 주도하지 않으면 안 되는지 보통은 말이 많아지고, 언성이 높아진다.
결국 주변의 사람들은 하나 둘씩 그 곁을 떠나게 되고......
언젠가 그분에게 제주도 4.3 사건에 대해서 물은 바 있으나 별다른 이야기를 들을 수는 없었고
다만, 그 사건으로 제주도의 주민들이 엄청난 죽음을 당했다는 사실만을 이야기했다.
제주도 사람들의 아픔을 아직도 구체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있다는 증거이리라.
그만큼 제주도 사람들에게 4.3은 고통이고 아픔이었다.
위령비를 세워서 원혼들을 달래고 있으나 유홍준 교수는 높이 솟은 '뽈대'라며 비판을 서슴지 않는다.
우리나라에는 천편일률적으로 하늘로 높이 세워, 뽈대같은 느낌을 주는 비들이 너무 많은 것이 사실이다.
이 위령비에는 그날 하룻만에 죽어간 사람들의 명단을 비롯하여 443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너븐숭이 4.3 기념관'에서 문화재해설사로 일하는 여자분께서는 4.3사건에 관하여
자세한 역사를 알려면 절물자연휴양림 부근의 4.3평화공원을 꼭 가 보라고 권했다.
그러겠다고 약속을 하고 일단 우리는 북촌마을을 조용히 떠났다.
어떻게 우리가 허물어져간 사람들의 마음을 어떻게 위로할 수 있을까?
'와흘본향당'을 찾아 그분들을 위한 기도라도 드려야 하지 않을까?
와흘 본향당 입구의 돌담 위에는 잘 졉혀진 소지가 돌에 감겨 있다. 무슨 사연이 적혀 있을까?
수백 년 팽나무 주변은 음기가 성한 곳이라고 한다. 음산한 느낌이 강했다.
옛날부터 그곳에 본향당을 만들어 소원을 비는 장소로 사용하는 것이리라.
얼마 전에 누군가 제단 앞에서 제사를 지내고 소원을 빈 흔적이 아직 남아있었다.
첫날의 여정을 마치고 제주시 용담3동의 숙소(실크로드 펜션)에 와서 무거운 심신을 내려놓았다.
제바나(제주 바닷가의 나루터) 식당에서 고등어조림을 주문해서
저녁 식사를 했는데, 음식 솜씨가 좋아서 그런지 입맛을 돋구기에 충분했다.
제주지방의 소주인 '한라산'을 주문했더니 강한 것과 약한 것 중에 어느 것을 원하냐고 한다.
19.5도냐, 아니면 21도 가까운 술을 원하느냐, 이왕이면 독한 거로.^^
이것 한 병을 홀짝홀짝 마시면서 하루를 아내와 함께 정리하고 피곤함을 달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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