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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경묘(濬慶墓)를 아시나요?

여행 이야기

by 우람별(논강) 2011. 8. 18. 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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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삼척시 미로면 활기리, 준경묘(濬慶墓)가 있는 금강소나무 숲을 찾은 것은  8월의 태양이 작열하는 어느날 오후 두 시경이다. 자동차의 내비게이션이 알려준 곳은 준경묘 재실 부근이었다. 재실문은 굳게 닫혀 있고, 그 옆으로 소나무 묘목 수천 그루가 작은 비닐분 속에서 자라고 금강송 묘목이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문중에서 이 많은 묘목을 관리하고 있다는 것일까? 무슨 이유로?’ 누군가 옆에 있다면 물어보고 싶은데 아무도 없다. 준경묘로 가는 길도 재실 주변 어딘가로 연결되려니 싶은데 보이지 않는다. 민가 한 채가 있어 주인을 불러 물으니 잘못 들어왔으니 돌아나가서 마을 회관쪽으로 가면 연결된다고 한다.

 

 

 

  마을 회관 옆으로 난 길이 있어 들어가니 주차장이 넓다. 승용차 1대만 서 있어 더욱 넓게 보인다. 뜨거운 햇볕을 가릴 수 있는 모자를 하나 눌러쓰고 천천히 발을 떼어 놓는데 조금은 걱정이다. 아내가 오래 걷는 것을 꺼려하고 날씨도 더우니 끝까지 갈 수 있겠냐며 아까부터 자신이 없는 눈치다. 금강소나무숲을 보러 가는 것이 일차적인 목표인데 못 간다면 어쩌나 하는 마음이 앞선다. 늘어나는 체중과 약해진 체력을 고민하고 있는 아내 입장에서도 운동삼아 같이 가면 좋으련만 꺼리는 표정이 역력하다. 혼자 갔다 올 테니 여기서 기다리겠냐 하니 그렇게 하자며 걸음을 멈추고는 히죽 웃는다.

 

 

  시작부터 가파른 시멘트 포장길인데, 차는 들어갈 수 없도록 철제 빗장으로 막아 놓았다. 비상시에만 출입할 수 있도록 누군가 관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조금 걸어가니 땀이 저절로 흘러내리는데 감당이 안 된다. 더구나 덩저리 작은 날파리들이 따라다니며 눈앞에 어른어른 욍욍거리니 미칠 지경이다. 땀 냄새를 맡은 놈들이겠지만 먼 거리에서 찾아온 손님대접치고는 좀 심한 것 같다. 왜 허락도 없이 이 지역을 함부로 침범하느냐는 터줏대감 몸짓이다. 손사래를 연방 쳐보지만 소용이 없다. 에라,

 

 

 

 

  한참을 헉헉대며 올라도 계속 이어지는 오르막! 비지땀이 물처럼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린다. 그냥 포기할까 싶다가도 다시 언제 또 와 볼까 하는 마음에 발끝에 힘을 모으고 계속 오른다. 숨이 차서 이제는 정말 좀 쉬고 싶다는 생각이 절박해질 때, 저만치 오르막이 끝나는 지점이 보인다. 다그쳐 힘을 쏟고 능선에 올라서니 옆을 따라 평탄한 길이 이어진다. 1㎞가 남았음을 알리는 이정표가 눈에 보이고, 나무 사이로 불어오는 한 줌 골바람이 시원하다. 얼굴과 등줄기를 적신 흥건한 땀도 이내 식어버린다.

 

  차가 겨우 지나갈 수 있는 정도의 길이 야무지게 이어지고 있다. 가파른 왼쪽 경사면으로 아름드리 금강소나무가 한두 그루씩 보이기 시작하더니, 점점 그 수효가 길 양편으로 많아지면서 눈의 즐거움을 가누기가 힘들다. 경사 급한 오르막을 오르고 난 뒤에 이어지는 이 좋은 길을 아내와 함께 걷지 못하는 게 아쉽다. 조금만 참고 따라왔으면 좋았을 것인데……. ‘인생을 살면서 고비가 어디 한두 번일까마는 그 고비와 고통을 잘 견뎌내면 좋은 일도 종종 생기는 법이야.’ 하면서 스스로를 위로하고 준경묘로 향하는 발걸음의 속도를 조절해 본다.

 

  막바지의 완만한 오르막을 오르니 금강소나무 군락지가 한눈에 펼쳐진다. 길 오른편 가까이엔 2001년 속리산 정이품송(천연기념물 103호)을 신랑으로 맞아 혼례한 금강소나무(나이 95살, 키 32미터, 둘레 2.1미터)가 쇠울타리 안에 우뚝 서 있다. 형질이 우수하고 아름다워 신부로 간택된 소나무다. 주례는 산림청장이 맡았고, 보은군수와 삼척시장이 혼주가 되어 세계 최초의 소나무 혼례식을 열었다고 한다. 금강소나무의 가치와 우수성에 의미를 부여하고 우리 숲에서 금강송이 사라지지 않고, 영원히 살아남기를 바라는 마음의 표현이리라. 우리나라 숲은 신갈나무 같은 참나무가 득세하면서 소나무의 개체수가 눈에 띄게 줄어들고 있다고 한다. 결국 참나무와의 경쟁에서 소나무가 뒤지기 때문인데, 이제는 소나무에 대한 보호의 손길이 필요하고 잘 뿌리내려 자랄 수 있도록 주변의 잡목을 잘라내 주어야 한다. 관계당국의 보다 적극적인 소나무 보호정책을 기대하고 싶다. 10년 전에 결혼한 혼례소나무도 외로움을 타는지 그 주변에 이웃을 촘촘히 데리고 산다. 정이품송처럼 널찍한 공간을 차지하고 있어야 자신의 영양상태도 좋아지고 오래 살 텐데 수목 사이가 너무 좁아 걱정이다.

 

 

 

 

   준경묘(濬慶墓) 안내판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이성계의 5대조이자 목조(穆祖)의 아버지 이양무 장군의 묘소이다. 고종 광무 3년(1899)년에 묘소를 수축하고 제각과 비각을 건축하였다. 이양무는 원래 전라도 전주에 거주하였는데, 아들인 목조와 함께 이곳으로 이주하여 생활하다가 별세하였다. 목조는 다시 함경도로 이주하였으므로, 수 백 년 동안 실묘하였다. 태조가 조선을 건국한 이후 태조를 비롯한 태종, 세종 등 역대 왕들이 선조인 이양무 묘소를 찾으려고 부단히 노력하여 묘를 찾았으나 그 진위가 분명치 않아 고심하다가 고종 때에 이곳을 대대적으로 정비하였다. 이곳은 풍수지리적으로 명당이며, 한 도승이 시키는 대로 목조가 이곳에 선친을 안장하고 5대에 이르러 이성계가 탄생하여 조선 왕조를 건국했다는 전설이 있다.’

 

  적당한 크기의 분지 양편에 있는 산은 청룡, 백호의 형상이고 그것이 만나는 혼례소나무 쪽은 약간 높아진 안산에 해당되니 얼핏 보아도 명당은 명당이다. 청룡과 백호는 금강송을 무수히 품고 있어서 배가 부르다. 간혹 준경묘가 있는 너른 공간을 내려다보면서 숨을 크게 한 번씩 들이쉴 것 같다. 홍살문을 향해서 가는 길 양 옆으로는 평화로운 풀밭의 연속이고 시원한 풀빛이 눈의 피로를 말끔히 씻어준다. 아무데나 막 뛰어다니며 뒹굴고 싶은 공간이다. 노루나 고라니라도 있다면 이곳을 놀이터삼아 종종 찾아 풀을 뜯을 것 같다.

 

  묘 주변을 자세히 보니 어느 누군가 열심히 일을 하고 있다. ‘문중에서 나온 사람일까?’ 묘 앞으로 천천히 걸어 올라가 조상님께 정중하게 절하는 내 모습을 보고 다가와 어서 오라며 반가이 인사를 건넨다. 강원도 특유의 사투리가 정겹다. 선량해 보이는 40대 정도의 아저씨는 삼척시에서 파견된 관리인이란다. 이곳의 금강송은 다른 지역의 금강송과도 조금 달라서 효용가치가 뛰어나다고 자랑하면서 몇 년 전 남대문이 불탔을 때, 직경 80센티가 넘는 이곳의 금강소나무 20여 그루를 베어 복원용 목재로 사용했다는 이야기도 덧붙인다.

나는 본관이 전주(全州)이다. 어렸을 때부터 어른들이 누구 자손이냐고 물으면 덕천군(조선 2대 임금, 정종의 10째 아들)의 19세손이라 대답을 하라는 것이 세뇌되어 있다. 준경묘(濬慶墓)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임금의 5대조 무덤이니까, 따지고 보면 나한테는 26대조의 무덤인 것이다. 어떤 힘이 내 몸을 이 먼곳 강원도까지 이끌었는지 모르지만, 난생 처음으로 찾아와 조상묘에 큰절 올리고, 무심했던 나의 존재감을 다시 한번 가늠해 보았으니 의미는 남는다. 어떻게 이 세상에 왔으며, 어떻게 살고 있으며, 어디로 갈 것인가?

 

  준경묘를 찾은 기념으로 사진 하나 남겨야 되겠다 싶어 관리인에게 한 장 찍어줄 것을 부탁하니 흔쾌히 친절을 베푼다. 사라들이 거의 찾지 않는 이곳에 근무하기가 외롭지 않냐고 물으니 주말이면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찾아오는지 외로울 여유가 없다고 한다. 금강소나무 군락지로 소문이 나서 삼삼오오 찾는 사람들이란다. 나도 몇 달 전 봉화 서벽에 있는 금강송을 처음 보았고 금강송에 매료되어 이번에는 삼척 준경묘까지 찾아 금강소나무의 모습을 직접 보려고 온 것이었는데, 뜻하지 않게 오래된 조상의 무덤을 운명적으로 만났으니 일석이조의 행운을 얻었다고나 할까.

 

  조상님께 하직하고 관리인과 악수하고 되돌아서 나오는데, 햇빛을 받은 금강송 군락이 저마다 키 자랑을 하고 있다. 하늘로 솟은 그 훤칠함에 압도당하지 않을 수 있으랴. 혼례소나무 그늘에 덮인 개울가 숲에 자줏빛 물봉선 한 쌍이 호젓하다. 여기저기 흐드러지게 피어나야 더욱 어울리는 꽃일 테지만 오늘은 혼례소나무를 빼닮았다. 꽃과 잎이 따로 피는 훤칠한 대공의 상사화도 외로움 타는 혼례소나무의 이미지다.

 

  잘생긴 금강송을 실컷 완상하고 터벅터벅 내려오는 하산 길도 더위에 지쳐 땀으로 또다시 범벅이 된다. 아까 내게 달라붙던 날벌레들이 또다시 몰려와 귓가에 엉겨 붙을 기세로 욍욍거리며 아우성이다. 양손을 동원해서 반복되는 동작으로 쫓아내도 끝까지 달라붙으려는 그 집요함에 또 하나의 거부할 수 없는 자연현상을 배운다. 아직도 금강송의 훤칠한 자태와 붉은 수피의 이미지가 눈에 아른거린다.

 

 

위의 글을 좀더 줄여서 쓴 글을 뒤에 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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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경묘 찾던 날

                                                                  이권주

  강원도 삼척시 미로면 활기리, 준경묘(濬慶墓)가 있는 금강소나무 숲을 찾은 것은 태양이 작열하는 8월의 어느 날 오후다. 뜨거운 햇볕을 가릴 수 있는 모자 하나 눌러쓰고 천천히 발을 떼어 놓는데 아내는 날씨도 무덥고 왕복 4㎞를 걷는다는 게 힘들다면서 자신 없어 하는 눈치다. 늘어나는 체중과 약해진 체력을 고민하는 아내한테는 운동의 좋은 기회가 될 텐데, 혼자 갔다 오면 어떻겠냐고 한다. 그러곤 미안했는지 히죽 웃어버린다.

  시작부터 가파른 시멘트 포장길을 얼마나 올랐을까 숨이 차고 흘러내리는 땀을 감당할 수 없다. 더구나 작디작은 날파리들이 따라다니며 눈앞에 아른거린다. 땀 냄새를 맡았나? 먼 거리에서 찾아온 손님인데 대접치고는 좀 섭섭하다. 오늘의 터줏대감인가? 손사래를 쳐보지만 소용이 없다. 한참 계속 이어지는 오르막! 비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린다. 이제는 좀 쉬고 싶다는 생각이 절박해질 때, 저만치 오르막 끝이 보인다. 다그쳐 능선에 올라서니 평탄한 흙길이 기다린다. 1㎞ 남았다는 이정표가 서 있고, 나무들 사이로 시원하게 불어오는 골바람이 등줄기의 흥건한 땀을 이내 식혀버릴 기세다.

 

  차가 겨우 지나갈 정도의 길이 야무지게 이어지고 있다. 가파른 왼쪽 경사면으로 아름드리 금강소나무가 한두 그루 보이기 시작하더니, 길 양편으로 점점 그 수가 많아진다. 경사 급한 오르막을 오르고 난 뒤에 이어지는 이 좋은 길을 아내와 함께 걷지 못하는 게 아쉽다. 조금만 참고 따라왔더라면……. 스스로 위로하고 발걸음 속도를 조절해 본다.

  막바지 오르막을 완만하게 오르니 금강소나무 군락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길 오른편 가까이엔 2001년 속리산 정이품송(천연기념물 103호)을 신랑으로 맞아 혼례한 금강소나무(나이 95살, 키 32미터, 둘레 2.1미터)가 쇠울타리 안에 서 있다. 형질이 우수하고 아름다워 신부로 간택된 소나무다. 주례는 산림청장이 맡았고, 보은군수와 삼척시장이 혼주가 되어 세계 최초의 소나무 혼례식을 열었다고 한다. 금강소나무의 가치와 우수성에 의미를 부여하고 우리 숲에서 금강송이 사라지지 않고, 영원히 살아남기를 바라는 마음의 표현이리라. 우리나라 숲은 참나무가 득세하면서 소나무의 개체수가 눈에 띄게 줄어들고 있다. 경쟁에서 소나무가 뒤지기 때문인데, 이제는 소나무에 대한 보호가 절박한 만큼 잘 자랄 수 있도록 주변의 잡목을 솎아내 줘야 한다. 10년 전에 결혼한 혼례소나무도 그 주변에 이웃들이 많다. 정이품송처럼 널찍한 공간을 차지하고 있어야 영양상태도 좋아질 수 있을 텐데 너무 몰려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준경묘(濬慶墓)를 소개한 안내판을 읽어 본다. ‘이성계의 5대조이자 목조(穆祖)의 아버지 이양무 장군의 묘소이다. 고종 광무 3년(1899)년에 묘소를 수축하고 제각과 비각을 건축하였다. 이양무는 원래 전라도 전주에 거주하였는데, 아들인 목조와 함께 이곳으로 이주하여 생활하다가 별세하였다. 목조는 다시 함경도로 이주하였으므로, 수 백 년 동안 실묘하였다. 태조가 조선을 건국한 이후 태조를 비롯한 태종, 세종 등 역대 왕들이 선조인 이양무 묘소를 찾으려고 부단히 노력하여 묘를 찾았으나 그 진위가 분명치 않아 고심하다가 고종 때에 이곳을 대대적으로 정비하였다.’

  준경묘는 양편에 청룡, 백호의 호위를 받으며 자리하고 있다. 혼례소나무가 서 있는 아래쪽은 안산(案山)에 해당되니 얼핏 보아도 명당이다. 청룡과 백호는 하늘로 치솟은 금강송을 무수히 품고 있어서 기세등등하고, 간혹 준경묘가 있는 너른 공간을 내려다보면서 숨을 크게 들이킬 것만 같다. 홍살문까지 가는 길 양 옆은 평화로운 풀밭의 연속이라 시원한 풀빛이 눈의 피로를 말끔히 씻어준다. 뛰어다니며 마냥 뒹굴고 싶다. 혹 노루나 고라니라도 있다면 놀이터삼아 찾아와 배불리 풀을 뜯을 것만 같다.

 

  묘 주변을 자세히 보니 누군가 열심히 잔디에 돋아난 풀을 솎아내고 있다. ‘이씨 문중에서 나온 사람일까?’ 가까이 다가오더니 어서 오라며 반가이 인사를 건넨다. 강원도 특유의 사투리가 정겹다. 선량해 보이는 40대 초반의 아저씨는 삼척시에서 파견된 관리인이란다. 이곳의 금강송은 다른 지역의 금강송과 조금 달라서 효용가치가 매우 뛰어나다고 자랑한다. 3년 전 국보 1호인 숭례문이 불탔을 때, 직경 80센티가 넘는 것만 골라 이곳의 금강송 20여 그루를 베어서 복원용 목재로 사용했다는 말도 덧붙인다.

  나는 본관이 전주(全州)이고 덕천군(德泉君, 조선 정종의 열째 아들)의 19세손이다. 준경묘(濬慶墓)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임금의 5대조 무덤이니까, 따지고 보면 나한테는 26대조의 무덤인 것이다. 어떤 힘이 나로 하여금 이 깊은 곳까지 찾아오게 했는지 모르지만, 난생 처음으로 준경묘에 큰절 올리고, 무심했던 나의 정체성을 조심스레 가늠해 본다. 관리인에게 물어보았다. 이곳에 근무하기가 외롭지 않냐고. 주말이면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찾아오는지 외로울 새가 없다며 웃는다. 금강송 군락지로 소문이 나면서 더욱 그렇단다. 나도 몇달 전 봉화군 서벽리에 있는 금강송군락지를 처음 찾았고 오늘은 삼척의 준경묘를 운명적으로 만났으니, 금강송과는 각별한 인연을 맺은 셈이다.

 

  오후의 햇빛을 받으며 금강송 군락이 저마다 키 자랑을 하고 있는 듯하다. 하늘로 솟은 그 훤칠함에 압도되어 다른 수종(樹種)은 보이지도 않는다. 나 또한 그저 바라만 볼 뿐……. 나무 그늘에 덮이어 외롭게 핀 자줏빛 물봉선이 애처롭다. 여기저기 흐드러지게 피어나야 어울리는 꽃일 테지만 혼례소나무를 빼닮았다. 정이품송과 혼례를 올렸으나 함께하지 못하는 백 살 넘은 혼례소나무의 외로움만큼이나 누군가의 미소 띤 위로가 그리울 것 같다.  

  수려한 금강송과 그 주변을 실컷 완상하고 하산하는 내리막길도 한여름의 더위로 녹녹지 않다. 땀범벅이 되고 귓가엔 날벌레들이 떼로 몰려와 다시 귓가에 엉겨 붙을 기세다. 양손을 동원하고 모자까지 벗어 쫓아내는데도 끝까지 바짝 달라붙는 그 본능적 악착스러움에서 거스를 수 없는 자연의 순리를 배운다. 금강송이 늘 그렇게 훤칠한 자태와 붉은 수피(樹皮)의 강렬한 이미지로 감동을 주듯이 미물인 저 날벌레들의 집요함이 눈물겨울 정도다. 오래 사는 금강송과 며칠만 사는 날벌레도 이 자연 속에서 저렇게 끈덕지게 살아있는데, 평생을 살면서 행복을 좇는 우리 사람들이야 오죽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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