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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의 두들마을, 주실마을

여행 이야기

by 우람별(논강) 2011. 6. 12.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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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3월 1일자로 첫발령을 받은 석보중학교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30년 세월이 흘렀지만 대체로 변화를 비껴간 모양이다. 별로 변한 게 없다.

조례대 위에 올라가 전교생 앞에 가슴 벅찬 부임 인사를 하던 장면이 떠오른다.

 

 뜨거운 6월의 햇볕이 온 천지를 달구고 있다.

보드블록과 배수시설은 시대에 걸맞게 변화를 주었으나

 

 구식 화장실은 30년 전 그대로라서 귀신이라도 나올 것 같은 으스스함이 남아 있고,

 

 숙직실과 창고는 어찌 그리 고스란히 남아있는지 30년 세월이 참으로 무상하다. 

 

 1학년 건물로 쓰이던 것이 식당 건물로 바뀌었고, 학교 사택은 헐리고 없다.

본관에서 식당으로 가는 길은 비를 피할 수 있는 시설을 설치해서 달라져 보이긴 하다.

 

각 학년 4개 반, 각 반 학생 수 60여명, 전교생 700명의 큰학교가

전교생 30여 명의 작은학교로 변화된 것은 시대의 흐름이라 어쩔 수 없다고는 하나

우리 고향 농촌의 본래 모습이 점차 사라져가는 듯해서 그 아쉬움은 크다.

우리가 당시에 가르쳤던 학생들도 이젠 나이가 40대 중반이 넘었지 아마?

 

학교앞 하숙집이다. 학생들 떠드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이 있었다.

교장 교감 선생님은 이 집에서 기식을 하고, 총각 선생님 7명이 집단 하숙을 했는데,

 교무회의가 따로 필요 없을 정도로 식사시간을 전후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던 곳이다.

당시 30대 중반의 곰보 아줌마가 우리들 식사를 잘 챙겨주었는데, 

음식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두 아들 이름은 정원혁과 정동혁!

 

  총각 선생님 7명이 사용했던 6개의 방, 오른쪽 제일 끝방이 내방이었는데,

발령 동기인 영어과 손 선생과 둘이서 사용했었다.

 

 좁디 좁은 방이지만 별 불만 없이 군대 가기 전까지 지냈던 6개월간 지냈던 공간이다.

문틈 사이로 들여다보니 창고로 쓰고 있다. 하숙집 주인은 10년 전에 서울로 이사를 갔단다.

 

석보면 원리리 두들마을, 재령 이씨 집성촌인 셈이다. 소설가 이문열의 고향이기도 하다.

 

 대구에서 올라온 노인대학 회원들이 석계고택에서 친절한 문화재 해설사의 설명을 듣고 있다.

 

안동장씨(장계향) 석계 선생의 부인으로 한식연구가들의 필독서인 '음식디미방'을 남겼다.

신사임당 못지 않은 교양과 인격을 갖춘 여성군자로서 추앙받을 만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언제부턴가 전통한옥 체험관이 생겼고, 광산문화연구소, 정부인 안동장씨 예절관 등이

새롭게 세워져 활용되고 있다. 주변에는 석계고택, 유우당, 석천서당 등도 있다.

 

일월면 주실마을, 청록파 시인 조지훈의 생가인 호은종택(壺隱宗宅)이 있는 곳이다.

 

 

 

 

 

 

 

 

 

‘지훈 문학관’에 제일 먼저 들러 그의 삶을 살펴보는 시간을 가졌다.

지사로서의 면모를 보여준 그에 대한 존경심이 저절로 생겼던 시간이었다.

 

 

미망인 김난희 여사(90세)의 글씨와 그림도 전시되고 있다.

‘기다림에 야윈 얼굴 물위에 비초이며 가녀린 매무새 홀로 돌아 앉다.

못견디게 향기로운 바람결에도 입 다물고 웃지 않는 도라지 꽃아’

하얀 화선지 위의 오른쪽에 정성껏 도라지꽃을 직접 그리고

왼쪽에 남편의 시를 붓으로 쓴 뒤, 낙관을 찍을 때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매(梅),난(蘭),국(菊),죽(竹) 사군자를 그린 솜씨도 예사롭지 않아 눈길을 끈다.

미망인의 변치 않는 마음은 지훈의 ‘지조론’ 을 고스란히 닮았으리라.

지훈 문학관 곳곳에서는 시인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고, 집안 내력이 소개되고 있었다.

‘지훈의 증조할아버지인 조승기는 의병활동을 하다가

경술국치의 비보를 접하고 그 수치를 이기지 못해 자결한 매서운 선비였다.

할아버지 조인석은 구한말에 사헌부 대간을 지낸 선비로

한국전쟁 중에 마을이 유린되자 자결의 길을 택하였다.

아버지 조현영은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유학한 엘리트로

광복을 맞이하기 전까지 인근의 청소년을 모아 신학문과 민족정신을 가르쳐

일본인들에게 감시를 받던 민족주의자였으며,

지훈의 고모 조애영은 광주학생사건 때 배화여고 주동자로 입건되면서

무기정학을 당해 어린 나이에 감방에서 지내기도 하였다고 한다.

지훈의 글에서 접할 수 있는 선비 정신은 가문의 정신과 무관하지 않다.

누대로 이어온 가문이 한 사람의 지성인을 배출하는 데 큰 몫을 한 것이다.’

 

지훈이 목월에게 보냈다는 시 '완화삼'의 원본, 친필 글씨, 목월은 '나그네'란 시로 화답하였다고 한다.

 

 

지훈이 다녔을 것으로 예상되는 '월록서당(月麓書堂)'은 주실마을의 오른쪽 끝에 위치해 있었다.

이 건물은 조선 영조 49년(1773)에 玉川 조덕린(1658-1737)의 손자인 月下 조운도(1718-1796)가 발의하고

한양 조씨, 야성 정씨, 함양 오씨 등이 주축이 되어 후진을 양성하기 위해 건립한 서당이라고 한다.

서당의 현판은 번암(樊巖) 채재공(蔡濟恭) 선생의 친필이다.

 

 

 

 

‘ㅁ’자 형의 호은종택 툇마루에 앉아 문필봉 끝을 한참 바라보았다.

시인은 가고 아무 말은 없지만 주실마을에 서려있는 시인 집안의 절개와 지조는

 현대인들의 옷깃을 여미게 하기에 충분하리라. 한양 조씨의 집안 내력을

툭하면 자랑했던 친구의 자부심이 결코 헛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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