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릇처럼 일찍 잠에서 깨었다. 날이 밝기에는 아직 멀었다.
여행 중이라 딱히 할 일도 없고, 케이블 TV만 여기저기 옮겨가며 보다가
날이 새자 잠자리를 정리하고, 간단히 씻은 다음 출발 준비를 했다.
숙소 창문을 통해 보니 나의 애마 산타페 3573이 트럭 옆에 얌전히 서 있다.
밤새 찬이슬 맞으며 푹 쉬고 주인의 출현만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채석강'과 비슷하게 생긴 지형이 또 한 군데 있어서 찾았다. '적벽강'이다.
'채석강'에서 1.5키로 떨어진 곳인데 소동파가 즐겨놀던 '적벽강' 처럼
천혜의 절경을 이루고 있어서 이름도 그대로 딴 것이다.
아버지는 어느새 눈을 지그시 감으셨는데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실까?
감수성이 남달리 뛰어나시니 또 한편의 기행문이 탄생되기를 기대해 본다.
해가 어느 새 서서히 떠올라 적벽강의 뒷덜미를 비추기 시작한다.
어느 갯바위에 올랐는데 재질이 각기 다른 자갈들을 품고 그대로 굳어버린 특이한 암반이다.
지구과학 선생님이 옆에 계시면 암석의 종류가 뭐냐고 당장 묻고 싶다. '역암'이 아닐까?
바위에 붙은 조막손? 따개비?
적벽강 부근의 해식동이 벼랑 곳곳에 뚫려있는데,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인들이 구축한 군사기지를 연상시킨다.
'모항'이라는 항구다. 갯벌체험도 할 수 있는 공간도 마련되어 있다.
바다라기보다 호수라고 하는 게 더 어울린다. 잔잔한 수면이 고요하다.
모항 해수욕장 주변의 어느 휴식공간이다. 잘생긴 소나무 아래 부모님이 다정하게 앉으셨다.
모항 해수욕장의 전경, 언제부턴가 해안가의 경치 좋은 곳에는 펜션이 많이 들어서고 있다.
변산반도에는 '내소사(來蘇寺)'라는 유명한 절이 있어 찾았다.
절 입구에서 천왕문까지 계속 이어지는 전나무 숲길과 벚나무 길은
건설교통부가 지정한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 들었다.
천왕문에서 본 '내소사(來蘇寺) 전경, 능가산의 위용이 위압적이다.
내소사는 혜구 두타스님의 원력에 의해 백제 무왕 34년(633)에 창건되었고
오랜 세월에 걸쳐 중건, 중수를 거듭해 오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절을
인조 11년에 청민선사가 중창하였으며 웅장하고 아름다운 대웅보전을 중건하였다.
내소사 대웅보전(보물 291호), 조선 후기에 건립한 건물, 철못 하나 없이 나무로만 지어졌다고 함.
현판의 글씨는 당시의 명필, 원교 이광사의 글씨 같다 면서 아버지께서는 찬탄을 하신다.
국화, 연꽃 등의 문살이 법당의 모든 문에 수놓아져 보기에 황홀하다.
내소사 고려동종(보물 277호), 내변산에 있는 청림사에서 고려 고종 9년(1222년)만들어진
전형적인 고려 후기의 종인데 조선 철종 원년(1850년) 때 내소사로 옮겨왔다고 한다.
수령 1,000년의 느티나무, 할머니 당산나무다. 할아버지 당산나무는 절 입구에 있다.
수령 700년의 할아버지 당산나무, 당산제가 열린 뒤의 모습이다.
매년 음력 1월 14일 당산제가 열리고, 사찰에서 주도하던 당산제가
1990년 이후 마을로 이관되어 열리고 있다.
자, 이제 변산반도를 떠나 서해안고속도를 경유하여
선운산 IC로 내려 고창 땅으로 접어들었다.
고창 선운사, 도솔산 또는 선운산(禪雲山)이라 불리는 산의 북쪽 기슭에 포근히 안겨 있다.
조선 후기 선운사가 번창할 무렵에는 89개의 암자와 189개에 이르는 요사(寮舍)가
산중 곳곳에 흩어져 있어 장엄한 불국토를 이루기도 하였단다.
김제의 금산사(金山寺)와 함께 전라북도의 2대 본사로서 오랜 역사와
빼어난 자연경관, 소중한 불교문화재(보물 5점)들을 지니고 있어
사시사철 참배와 관광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특히 눈 내리는 한겨울에 붉은 꽃송이를 피워내는 선운사 동백꽃의 고아한 자태는
시인ㆍ묵객들의 예찬과 함께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법당 뒤의 동백나무가 언제부터 심어졌는지는 모르나 2,000여 그루의 동백숲은
산불로부터 사찰을 보호하기 위한 사찰보호림으로 조성한 것임에 틀림없다.
선운사 대웅전(보물 209호)의 위용,
선운사 대웅전의 옆 모습이다. 초석의 특이함과 전체적 형식이 여느 절과 다르다.
전북 고창에서는 '선운사'만 둘러보고 고창-담양 고속도로를 타고 전남 담양으로 왔다.
죽세공으로 유명한 곳이니 대나무 숲이 있는 '죽녹원'을 찾지 않을 수 없다.
부모님께서도 이런 대나무숲은 처음 걸어본다면서 마냥 좋아하셨다.
시간만 더 허락된다면, 소쇄원, 식영정, 면앙정 일대까지 보여드릴 수 있었는데
참으로 아쉬웠다. 오후 5시까지 대구에 도착해야 했다.
88 고속도로를 달려오다가 앞에 가는 차가 너무 느려서 추월을 감행했는데,
덫을 놓은 듯, 숨어서 기다리고 있는 경찰에게 걸려서 그만 벌금 60,000 원짜리 스티커를 한 장 받았다.
교통법규를 어겼으니 내탓이고, 어쩔 수 없는 것이긴 했는데 다소 억울한 느낌도 들었다.
그 좋지 않은 기분은 꽤 오래 갔다. 한참 동안 말도 없이 차만 몰다 보니
부모님이 미안해 하고, 불편해 하는 것 같아서 고령 IC로 잠시 내려
대가야박물관 순장묘를 둘러보면서 기분 전환을 꾀했다.
순장(殉葬) 풍습이 꽤 오랫동안 지속되었다고 하는 대가야(大伽倻),
고령 지역에 산재한 고분군에서는 그 순장의 역사를 확인할 수 있다.
권력자가 죽자 그를 따르는 무리들 4, 50명이 따라 죽어야 했던 악습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죽어도 죽는 것이 아니라 죽음의 세계에서도 따라 죽는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본 것이리라.
살아있는 사람을 생매장한 것인지, 멀쩡한 사람을 죽여서 동시에 묻은 것인지 궁금하다.
권력자와 함께 죽어야 했을 때의 순간을 상상하니, 숨이 저절로 막혀서 고통스러웠다.
오십 년이 넘도록 함께 살아오신 부모님, 이제 살아야 얼마나 더 살겠냐 하시지만
걸어다니시는 것을 보니 앞으로도 10년은 더 사실 것만 같다. 부디 건강하시길 바랄 뿐이다.
특히 어머니께서는 5남매 다 키웠고, 살 만큼 살았으니 이제 죽어도 한이 없다며
이제 자식들 고생시키지 않도록 짧게 앓다가 세상 뜨는 것이 소원이라 하신다.
아버지께서도 사명대사를 예로 들면서 일을 끝내듯이 조용히 떠나고 싶단다.
곳곳에 있는 저 무덤들의 주인공은 누굴까?
살아있을 때 어떻게 살았든, 지금은 다 땅속에 있거나 한 줌의 재로 뿌려졌다.
인생은 그렇게 유한한데..... 살아 숨쉬고 있을 때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한 것이겠지?
남한테 해 끼치지 말고, 인연을 맺고 사는 사람들에게 덕 베풀고,
각자의 일을 성실히 하면서 부끄럽지 않게 사는 게 중요하겠지?
현 시점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내가 해야 할 무엇이 있다면 관심을 갖고
좀더 치밀하게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겠지? 그게 나의 사명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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