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5~26일, 부모님과 함께 한 1박 2일의 나들이를 다녀왔다.
아버지께서 그 전에 기회가 된다면 변산반도 일대를 다녀와 봤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늘 신경이 쓰였던 바, 봄방학을 기해서 1박 2일의 시간의 할애하기로 했다.
아버지 생신(음 2.3) 기념으로 전라도 일대를 한 바퀴 바람쐬는 것으로 여행의 주제를 설정한 것이다.
아침 8시 30분에 출발, 경부 고속도로를 달려 충남 논산까지 단숨에 달렸다.
백제군사박물관 뒤, 전망대에서 본 황산벌 부근, 계백장군이 마지막 격전을 벌였던 곳.
논산 탑정호 부근에 위치한 황산벌, 1350년 전의 그 전쟁 상황을 상상해 보기도 했으나
동족끼리 백제 신라로 나뉘어 서로 물고 물리는 처참한 혈투를 치러야 했던 상황이 마음에 아프다.
계백 장군 5,000여 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신라의 군사들과 맞서 싸웠으나.....
논산시 은진면에 위치한 관촉사(灌燭寺), 특별히 윤장대가 서있어 한 바퀴 돌리고
경전을 한 권 읽는 것과 같은 공덕을 하나 쌓았다. 아들 옷을 입고 계신 품이 괜찮다.
조각기법의 웅장함과 안정감을 보여주는 석등(보물 232호)과
국내 최대의 석불상이요, 고려초기의 대표적 불상인 석조미륵보살입상(보물 218호)
특히 석불은 '은진미륵'으로 널리 알려져 있고 완성되기까지 40여 년(968~1006)이 걸렸다.
자연석 화강암반에 별석으로 얼굴을 포함한 상체 부분과 허리 이하를 각각 한 개의 돌로 조각하였고,
가슴 좌, 우에는 가늘고 긴 돌을 연결하여 두 팔을 만들고, 머리 위에는 원통의 관을 만들어
이중으로 된 사각형의 보계를 두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논산 강경 포구, 금강은 유유히 조용조용 흐르고 있었으나
그 너머에는 굴삭기의 소음과 덤프트럭의 모습이 요란스러웠다. 아, 슬픈 우리나라!!
강경은 젓갈로 유명한 곳이다. 읍소재지 어디를 가도 젓갈 가게들이 수두룩하다.
'황해도 젓갈상회'에서 운영하는 식당에 들러 젓갈 정식(1인당 7,000원)으로 점심을 먹었다.
각종 젓갈을 자그마한 접시에10여 가지 이상 조금씩 제공해서 맛을 음미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젓갈의 맛이 제법 좋았던지, 조금도 남기지 않고 다 잡수셨다.
조금 짜다할 수 있는 정도인데, 남기면 안 된다면서 다 드셨고, 주인한테는
주려면 좀 많이 주지 않고, 왜 그렇게 조금 주냐며 농담조로 뭐라 하셨다.
더 달라고 하면 얼마든지 더 줄 수 있었는데 하면서 겸연쩍어 한다.
강경포구가 내려다 보이는 읍내의 야산, 옥녀봉에 오르면 달랑 하나 남아있는 퇴락한 민가를 볼 수 있다.
키 작은 할머니 한 분이 음료수와 주류를 조금씩 팔고 있는 조그만 구멍가게다.
손옥례 할머니(77세)란 분인데 인상이 참 좋으시고 곱게 늙으신 편이다.
4개월 전까지만 해도 110세 되시는 시어머님(유옥녀)을 모시고
수십 년을 함께 살아오셨다고 한다. 얼마 전 EBS TV '한국기행'에서 본 분이다.
우리나라 3대 시장의 하나로 강경이란 곳이 번성할 때의 사진에는 옥녀봉 일대가
수많은 집들로 가득했는데, 지금은 다 철거되고 할머니네 집만 남았단다.
갈 곳이 없어 못간다고 버텼더니 이렇게 우리집만 남게 되었다고 말씀하신다.
외롭게 살아온 그간의 세월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러나, 할머니의 표정은 맑기만 했다. 삶의 고통은 당신에게 단지 하나의 운명이었을 뿐,
거부의 대상은 아닌 듯했다. 할머니의 표정과 말씀이 그렇게 평화로웠던 이유가 그것일까?
커피 석 잔을 사서 마시고 2,000원을 드리니 500원을 거슬러 주는데, 됐다고 하니
충청도 특유의 말로 고맙다면서 웃으신다. 정감이 넘치는 노인이셨다.
작은 야산 옥녀봉 꼭대기에 있는 봉수대, 사방으로 둘러 보아도 이곳이 제일 높다.
넓은 들판이 눈 아래 있고, 저 멀리서부터 금강이 흘러 내려오니, 조망 좋은 곳으로는 딱이다.
김제 '벽골제' 둑의 경사면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나란히 앉아 금방이라도 기댈 기세다.^^
제천 의림지, 상주 공검지(공갈못)와 함께 우리나라 3대 저수지로 알려져 있는데,
의림지를 제외하고는 지금은 못의 역할을 못 한다. 그 터만 남아있을 뿐,
벽골제는 백제 비류왕 27년(330년)에 쌓았고, 신라 원성왕(785~798) 때 늘려 쌓았고,
조선시대에도 여러 차례 수리하였으나 그 이후로 방치되었다고 한다.
'장생거' 가 있던 자리다. 기록에 의하면 느티나무를 이용해서 물을 막고 조절했다고 한다.
조정래의 '아리랑 문학관', '벽골제' 바로 앞에 위치해 있어서 찾기가 좋다.
조정래의 대하소설 '아리랑'의 배경이 김제 죽산마을에서 시작되니 격에 어울린다나 할까?
살아있는 작가의 문학관으로는 조정래가 우리나라에서 유일하지 않을까?
보통은 작가의 사후에 그 문학정신을 기려 세우는데, 특이한 경우라 해도 되리다.
벌교에도 '태백산맥 문학관'이 세워져 독자들에게 이미 많은 감동을 주고 있지 않은가?
그의 대하소설을 읽으면서 우리나라의 근현대사에 새롭게 눈을 뜬 사람들이 그 얼마나 많은가?
그 자체로서 조정래는 문학사에 기릴만한 큰일을 해냈다고 평가받을 만하다.
중국 2번, 미국 3번, 동남아시아 3번, 러시아 2번, 일본 3번....
작가는 '아리랑'을 쓰기 위해 지구를 세 바퀴 돌 정도의 취재 여행을 했다고 했다.
식민지 백성으로서 유랑의 삶을 살아야 했던 우리 민족이고, 작가는 그 유랑의 삶터를 찾아
세계 여러 곳을 다녔으니, 그 지역들이 모두 '아리랑'의 무대가 되었다고 보면 되리라.
'아리랑'이야말로 무대가 제일 넓은 소설이라는 평가는 당연하지 않을까 한다.
김제 죽산면 일대의 땅을 반 이상 차지하고 온갖 횡포를 일삼던 '하시모토'의 농장 사무실,
소설 '아리랑'에서 일제의 수탈과 강제징용, 소작쟁의, 독립운동 등
우리 근대사와 민초들의 애환을 생생히 그린 바 있다.
건물 입구의 오른쪽에 검은 무엇이 보이는데, 가서 읽어 보니 등록문화재 표시다.
직사각형의 동판에 '김제농업기반공사 동진지부 죽산지소-작은 글씨
한민국 근대문화유산-큰 글씨'(2003년 지정)이라 새겨져 있다.
변산반도의 '채석강', 일몰 장면을 볼 수 있는 좋은 장소로 찾은 곳이다.
바닷물에 침식되어 퇴적한 절벽이 마치 수천 만 권의 책을 쌓아놓은 듯하고
당나라 시인 이태백이 술을 먹고 달빛에 반하여 달을 잡으려고 물에 뛰어들었다는
이야기가 전하는 채석강과 비슷하다 하여 '채석강'이라 이름했다고 한다.
석양의 햇빛이 강렬한 음영을 만든다. 그림자도 매우 길어지고, 우리 세 식구의 모습도.....
저 멀리 보이는 섬이 바로 '위도'다. '홍길동전'에 나오는 '율도국'의 배경이라는 설도 있다.
그 섬 위로 해가 조금씩 넘어가고 있다. 해넘이의 장관을 끝까지 보려니, 날씨가 너무 춥다.
방파제 끝까지 갔으나 오래 견디지 못하고, 격포 항쪽으로 돌아가면서도 수도 없이 셔터를 눌렀다.
격포항 가까이 와서 양쪽 방파제 사이로 지는 해를 배경으로 어머니의 그윽한 모습을 담아 보았다.
격포 채석강 부근의 현대횟집, 저녁 식사를 푸짐하게 하고 숙소를 찾으니
저녁 식사하던 곳에서 아주 지척인 곳에 모텔이 하나 있어 온돌방을 구했다. 숙박비 30,000원,
평소에 일찍 잠자리에 드시는 아버지는 피곤하신지, 잠자리를 펴드리자마자 주무셨고,
어머니와 나도 드라마 몇 편을 보고, 이야기를 좀 하다가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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