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군 안남면 도농리 산63-1에 소재한 표충사, 의병장 조헌을 모신 사당이다.
사당 앞의 홍살문[旌門]은 조헌의 호국정신을 높이 평가해서 국가에서 내린 것,
사당을 지키기 위해 지은 건물 같은데, 눈속에 파묻힌 설경이 아름답다.
담장과 나무와 늘씬한 건물의 곡선미가 한데 어울려 한 폭의 동양화다.
칠백의총의 주역 의병장 조헌의 묘소,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일으킨 선비 중봉 조헌은
옥천에서 1300여 명의 의병과 승병을 모집하는 데 성공한다. 첫 전투는 보은의 차령전투였는데
여기서 왜군을 격퇴시키는 성과를 올린다. 이에 힘입어 호서와 영남에 의병의 봉기를 촉구하는
격문을 띄워 그 결과 많은 장정이 의병에 합세하게 되고 청주성 전투를 승리로 이끈 그는
그 세를 몰아 금산에서 그의 마지막 전투를 벌이게 된다. 그러나 중과부적,
700여 명의 의병결사대는 한 명도 남김없이 의롭게 전사하고.....
묘소 아래로 보이는 것이 표충사, 중봉을 기리는 사당이다.
금산 700의총에 함께 묻혔던 유해를 따로 옥천 안읍의 도리동에 모셨다가
그의 문인들에게 의해 인조 14(1636)년에 이곳으로 이장한 것으로 되어 있다.
교과서에 실렸던 조헌의 시조 한 수가 돌에 새겨져 외로움을 더하고 있다.
의식있는 선비는 숙명적으로 외로울 수밖에 없을지도 모를 일이다.
요즘의 지식인들이 겪는 심적인 갈등도 비슷할까?
할말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으면서 말하지 않고 사는 비겁함은?
중봉 조헌선생신도비, 인조 27년(1649)에 세운 비,
좌의정 김상헌이 글을 짓고, 이조판서 송준길이 글씨를 썼으며
비문에는 선생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기록하였고 특히 최후의 격전지였던
금산싸움에서 대하여 소상히 적고 있다.
신도비는 임금이나 정3품 이상의 높은 관직에 있었던 분의 무덤 근처,
큰 길가 동남쪽에 남향으로 세우는 것으로 되어 있다.
조헌의 신도비도 무덤에서 약 300미터 떨어져 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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