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밤 영광읍엔 눈이 좀 내려서 아침무렵의 도로는 제법 미끄러웠다.
읍에서 법성포로 가는 길은 그다지 멀지는 않았으나 조심스러웠다.
아침 식사는 법성포로 가서 느지막하게 여유있게 먹기로 하고 차를 달려 도착하니
포구의 아침은 장갑을 끼지 않으면 못견딜 정도로 매서운 바람이 불고 있었다.
법성포, 굴비의 고향! 갯벌에도 배 위에도 지난밤에 내린 눈으로 뒤덮여 있다.
입을 벌린 굴비가 노란줄에 한 두름씩 꿰어지고 매달려서 겨울바람에 말라가고 있다.
영광의 칠산 바다에서 잡힌 크고 작은 황금조기들이 '영광굴비'라는 상품으로
전국으로 많이 팔려나가는데, 그래선지 법성포에는 택배차량들이 유난히 많았다.
물이 다 빠져나가니 배들이 뻘위에 그대로 얹혀져 있는데, 눈에 덮여 꽁꽁 얼어있는 듯하다.
희곡 <만선>의 작가, 천승세 님은 법성포의 어느 가난한 어부를 주인공으로 삼아 애환을 그렸을 텐데,
이 법성포에는 여전히 '곰치'와 같은 주인공들이 많이 살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봤다.
몇년 전, 백발의 수염 흩날리며 포항의 '형영'극단의 <만선> 공연을 보기 위해
먼 길 마다않고 찾아와 자신의 작품을 면밀히 감상하고 뒷풀이 자리에서
허스키하면서도 힘찬 말로써 격려와 찬사를 아끼지 않으며 노익장을 과시하기도 했는데
줄담배를 피우며 술에 점점 취해가던 노인의 모습도 보여주었다. 건강하셔야 할 텐데.....
뻘위에 내려앉은 배는 바닷물이 다시 들어올 때까지 꼼짝 못하고 물때를 기다려야 한다.
그처럼 우리 인생도 예정된 누군가의 도움을 받으면서 삶을 유지하는 것이 아닐까?
독불장군으로 성공할 수 없고, 상부상조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인간의 삶이라는 거?
주변에 있는 모든 분들에게 더욱 관심을 가지며 살아야 하리라.
여기 법성포가 백제불교의 최초도래지라고 하는데, 언덕 위의 탑이 그것을 기념하고 있는 듯하다.
팔려나가기를 기다리고 있는 굴비들, 그 크기에 따라 가격은 천차만별이라고 하는데
다가오는 설에는 더욱 많이 팔려나갈 것으로 예상을 해 본다.
주인공 곰치여, 올해는 많이 팔아서 또 다른 만선을 기대해 보세요.^^
포구의 '깍두기식당'에서 굴비정식 2인분(30,000원)을 시켜서 먹었는데 난 두 그릇을 비웠다.
명혜당이 덜어준 것까지 치면 그 이상을 먹었으니 과식을 했음에 틀림없다. 맛있었다.
영광읍에서 북쪽에 있는 법성포에서 아침식사를 하고,
다시 영광읍의 남쪽에 있는 불갑사를 향해서 차를 몰았다.
돌아가는 길은 내리쬐는 햇볕에 눈길이 제법 많이 녹아있었다.
허나 응달진 부분은 날씨가 추운 탓에 아직도 얼음이었고 불갑사로 가는 동안
길을 이탈해서 처박혀 있거나 논에 나뒹구는 차 두 대를 보았다.
옆에 앉은 명혜당은 겁이 나는지 천천히 몰라면서 야단이다.
영광읍에서 가까운 불갑사를 먼저 들르지 않은 것도 법성포까지
갔다오는 동안 불갑사길이 그래도 좀 좋아지리라는 기대에서였는데
조심스레 절까지 접근하는 것이 느지막하게 허락된 것이다.
새하얗게 덮인 세상과 파란 하늘, 우리들에게는 '안복(眼福)의 연속'이었다.
불갑산(516미터) 기슭에 자리잡은 불갑사는 인도스님 마라난타 존자가 백제에 불교를 전래하면서
제일 처음 지은 불법도량이라 하여 '佛甲寺'라 이름하였다고 한다.
고드름이 금방이라도 떨어져내릴 것만 같다. 오랜만에 보는 즐거움!!!
나무로 조각된 사천왕 네 분의 형상이 천왕문 좌우에서 눈 부릅뜨고
우리에게 속세의 더러움을 씻을 것을 요구하고 있다.
마음을 정화시키고 이곳을 통과하면 불국토의 시작이다.
정심(淨心)이 되었으니 하얀 눈과 우린 잘 어울리는 물아일체?
대웅전(보물 830호) 앞에 섰다. 특이한 구조에 놀랐다.
야단법석을 차리기 위한 당간의 위치가 그러하고 일반적으로 이 사진에서 본다면
법당의 부처님은 우리를 쳐다보는 위치에 모셔야 하지만 세 분의 부처님은
오른쪽을 보고 계시니 '대웅전'이라 쓴 현판이 있는 곳이 법당의 오른쪽이 되는 것이다.
지붕의 용마루 위 가운데가 보통의 절과 다른데 남방불교의 영향이 아닐까?
중앙의 석가모니불을 중심하여 왼쪽에는 약사불이 배치되고 오른쪽에는 아미타불이 자리하고 있다.
불상 안에서 발견된 불상 조성기에 의하여 1635년 무염(無染)스님을 비롯한 승일·도우·성수 등
10인의 화승들에 의해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고 하고, 석가삼존상 16나한상 복장전적 101점,
지장보살상 시왕상 복장전적 112점, 사천왕상 복장전적 46점 등 총 3건 259점이
역시 보물 1470호로 지정되었다. 영광에 있는 4개의 국가지정문화재 중 3개가 불갑사에 있다.
법당 정면의 꽃문양 문살이 예사롭지 않은데, 그 다양한 색채의 조화가 보기 좋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건물인데, 정면과 측면 모두 가운데 칸에 각각 국화문, 연화문, 보상화문으로
처리하여 매우 화사한 느낌을 주고 있는데 또 어찌 보면 절 주변에 많이 자생하고 있다는
상사화(꽃무릇)를 연상케 하게도 한다. 전국최대규모의 상사화 군락지가 이곳 주변이란다.
다포양식의 팔작지붕 대웅전, 화려한 단청이 건물의 절정인 듯, 눈에 확 들어온다.
굴뚝 맞는가? 재미있게 만들었다. 지붕 머리 위의 장식은 우리것과 외국것의 섞임인 듯!
불갑사 경내는 사람들이 오가는 곳만 눈을 치웠고, 대부분 눈으로 뒤덮여 발이 푹푹 빠졌다.
매장 문화재를 출토하고 있는 듯한 곳도 있었는데, 스님들은 수행 중인지 한 분도 보이지 않았다.
절을 찾은 사람들도 우리 포함해서 대여섯 명 정도가 고작이고 눈덮인 산사는 고즈넉하기만 했다.
눈덮인 불갑사의 고요함의 이미지는 기억 속에 오랫동안 남을 것 같다.
9월 중순 상사화축제가 열리는 붉디붉은 화려함, 천연기념물 참식나무 군락지의 진귀함,
뭐 그런 것을 보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찾을 법한 절일테지만 나는 그것이 아니었으니까.^^
해동제일가람이요, 호남제일가경인 불갑사를 그 때묻지 않은 새하얀 이미지로만
기억해 둘 수 있는 특별한 체험을 한 셈이다.
자, 이제 고창으로 간다. 고창읍성을 둘러보고 귀로에 오르면 된다.
3,4년 전에 왔을 때와는 딴판으로 변해 있었다. 지자체인 고창군에서 많은 투자를 했음에 틀림없다.
문화의 전당, 판소리박물관, 동리국가당 등이 새로 세워졌고, 관광안내소도 운영되고 있었다.
동리 신재효(1812-1884)의 고택이 고창읍성 바로 앞에 위치해 있다.
동리가 살면서 후학을 양성하던 곳으로 조선 철종 1년(1850)에 건립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는 판소리 12마당을 6마당(심청가, 적벽가, 춘향가, 수궁가, 박타령, 변강쇠타령)으로 정리했다.
고창읍성은 단종 원년(1453)에 왜침을 막기 위해 전라도민들이 유비무환의 슬기로 축성한 자연성 성곽이다. 성의 둘레는 1684미터 높이 4-6미터, 3개소의 옹성(饔城)과 6개소의 치성(雉城), 성밖의 해자(垓字) 등
전략적 요충시설이 두루 갖추어져 있다.
윤달에는 돌을 머리에 이고 읍성의 성곽을 한 바퀴 돌면 다리병이 낫고, 두 바퀴 돌면 무병장수하고,
세 바퀴 돌면 극락승천한다는 전설이 있어서 지금도 부녀자들의 답성 풍속이 남아 있다.
나도 경주여고에서 근무하던 시절의 한 때(10년 전), 동편제의 명창 장월중선의 딸
인간문화재 정순임 명창(동국대 겸임교수) 밑에서 6개월간 판소리를 배워 본 적이 있다.
6년을 배워도 제대로 소리를 내기가 어렵겠다는 판단을 했고, 시간을 내어 배운다는 게 쉽지 않아
소리공부를 중도에 그만두었지만 판소리는 아무나 넘볼 수 없는 최고의 예술 장르임을 믿는다.
고창읍성을 떠나기 전, 판소리의 대가인 동리 선생의 집을 배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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