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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부여기행 / 김경식

여행 이야기

by 우람별(논강) 2011. 2. 7. 0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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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역사 문학기행 

 

 

                                                            글/사진        김경식

 

 

겨울이 깊어가고 있다. 한 해가 저물어 가고 있는 이즈막 사람들은 분망하다. 삶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 저마다 부산하다. 이 무렵 나는 역사와 문학속의 인물들이 부르는 소리를 듣는다. 한 해가 저물어 갈 수록 그들의 고향과 작품속의 무대를 향해 출발하고 싶어 몸살을 앓는다. 그간 역사가 있는 문학기행 답사를 떠나기를 몇 년이던가. 때로 주변 사람들로부터 오해를 받기도 했다. 역사속의 인물을 만나고 오는 날은 그들의 삶을 답사기로 썼다.

답사객을 불러 모아 몇 번이고 찾아가서 그들의 삶과 문학을 조명했다.

답사기를 쓰는 날은 때로 역사 속의 인물들을 꿈에서 만나기도 한다. 이렇게 역사문학기행에 몰입하면서 살아왔다.

 

역사가 있는 문학기행을 떠날 때는 기대로 가슴이 흔들린다. 특히 겨울기행은 국토의 속살을 볼 수 있는 계절이라 역사속의 인물들이 더욱 살갑게 다가온다.

최근에 하루가 멀다하고 들려오는 전쟁이야기와 신문지상에 대서특필 되는 사건들의 대부분들은 인간의 욕망이 원인이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외교를 비롯한  대내외적인 모든 현실적인 이해상관들은 인간의 욕망이 낳은 이중적 모순에 의해서 비극의 길을 간다. 

 

욕망의 끝은 어디인지는 알 수 없지만, 사람들은 오늘도 욕망이라는 브레이크 없는 차를 타고 어디론지 쏜살같이 달려가고 있다.

멈추고 싶어도 멈출 수 없는 차를 탄 사람들의 비극은 두려움과 공포를 지니고 살아가기에 한순간의 평화를 간직하기 조차 어렵다. 나는 과연 이런 차를 타고 있지 않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단 말인가?

 

상대적인 빈곤감과 주변사람들과의 경쟁에 신물이 나면 나는 오래전부터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를 듣는다. 아마 수백 번은 들었을 것이다. 경쟁심이 유발 되면 이 곡을 주로 답사하는 승용차에서 들어 왔다. 이 곡을 듣고 있으면 경쟁심이 사라지고 누군가에 의해 받았던 스트레스와 상처들도 몰라보게 치유되는 놀라온 성과들을 경험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고전음악을 들어 온 지는 퍽 오래 되었지만, 언제부턴가 자신감이 없거나 패배의식이 느껴질 때는 이곡을 듣고 마음의 평정을 회복하는 일이 많아졌다.



                                                            정림사지5층석탑


 

청년시절 어느 해 봄 날 부여를 답사 하였다. 그 무렵 나는 삶의 현실적인 이중적 모순에 괴로워하고 있었다.

불현듯 백제의 고도 부여에서 들려오는 역사의  슬픈 깃발 소리를 듣고 싶었다. 패배의 땅 백제의 수도는 퇴락한 촌읍이 되어 있었다. 김시습의 한시를 읽으며 가방에 담은 것은 신동엽의 시집이었다. 백제왕의 무덤들이 보이는 곳에 서서 계백장군의 오천결사대와 녹두장군의 동학농민군이 달려가던 산길을 바라보았다.

맑고 눈부신 하늘, 푸른 바람이 불던 봄 날, 황톳길 휘돌아  길없는 밭둑을 걸었다.

 

백제 왕의 무덤들은 풀섶에  신라왕의 그것에 비할것 없이 작고 초라했다. 능산리 왕릉 풀섶에 핀 둥글레꽃이 하늘거리며 흔들렸

 

다. 그곳에 쭈그리고 앉아 시 한 편 끄적였다.

 

 

 

백마강 언덕

 

바위도 늙은

 

천년의 세월

 

백제의 숨결이

 

가슴을  흔드네

 

 

가련한 여인의

 

꿈결같은 봄 빛

 

무덤가 능산리엔

 

낮닭이 우네

 

 

 

하늘엔 구름이

 

흘러가고

 

백제 백성들의 함성소리

 

대나무 숲으로 살아와

 

서걱이며 울고 있네. 

 

 

              -- 김경식 시 ' 능산리에서' 전문

 

 

지금은 백제왕릉이라 부르지만 예전에는 능산리 고분이라 했다. 그 능산리 고분 뒷산을 타고 정상까지 올라가 부여읍을 바라

 

보았다. 660년 여름 당나라 군대와 신라군대가 부소산을 향해 달려가는 것을 상상해 보았다.

 

 

 

진달래 저버린 산에 찔레꽃 피어나고 굴참나무 잎새 깃발처럼 팔랑거리던 그해 봄, 신동엽 시인의 시집 '금강'을 읽고 큰 감동

 

을 받고 있었다. 구름 한 점 없던 하늘에는 목화구름이 꽃상여 가듯 소복차림으로 자신의 길을 떠나고 있었다. 김시습과 신동엽이

 

 보았을 그 하늘에는 그렇게 구름도 길을 떠나고 있었다.  

 

 

좁고 험한 산길을 선택했던 사람은 약자를 사랑하였기에 고독했던 시인이  잠든 곳, 작고 초라한 신동엽 시인의 묘지 앞에도 서

보았다.

 

 그의 묘소는 묘하게도 능산리 고분 앞 산에 누워있다.

 

절망의 시대에 새싹처럼 푸르른 자유를 그리워하다가 젊은 날에 요절한 시인들을 얼마나 많은가. 시대의 아픔은 때론 겨울로 상징

된다. 독재의 살벌한 정치사회적 상황도 겨울이다. 칼날 같은 시대의 겨울이 사라진 상황에서 한(恨) 많던 백제의 도읍지 부여를 향해 떠난다. 그간 우리는 백제을 잊어 왔다. 그러나 백제의 역사성과 민족성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 성립 시기와 뿌리를 찾아 보아야 한다. 부여 기행을 이것부터 시작하는 것이 순서이리라.

 

1) 백제의 역사

 

백제(百濟)는 기원전 18 년부터 서기 660년까지 고구려, 신라와 함께 한국의 고대 국가로

삼국시대를 열었던 나라다. 백제의 시조는 온조왕이다. 지금의 한강 하류 하남위례성에 도읍을 정했는데 기원전 18년의 일이다. 백제는 한반도 한사군과 대립하면서 성장하며 대략 4세기부터 충청도, 전라도 지역으로 그 세력을 확장한다.

북쪽으로 진출하여 고구려와 대립하며 고국원왕을 전사시키고 전라도 전 지역을 장악한 왕은 근초고왕이다. 그러나 5세기 초부터는 고구려의 역공을 당한다. 이때 개로왕이 전사한다.

 

결국 한강 유역을 상실하고 475년 지금의 공주인 웅진으로 수도를 옮긴다.

와신상담하던 백제는 신라와 함께 나제동맹을 맺고 고구려에 대항한다. 백제 성왕은 신라와 함께 고구려를 협공하여 한강유역을 회복한다.

그러나 신라의 배신으로 한강 유역은 다시 상실된다. 성왕은 관산성에서 전사한다. 관산성은 지금의 충북 옥천이다.

 

현재 백제건국 시기에 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있다. 기원전 18년 부여 또는 고구려 유민 세력과 한강 유역의 토착 세력이 결합하였다는 것은 삼국사기 온조설화에 토대를 두고 있다. 백제의 최초 이름은 '십제'였다. 이 무렵 이미 백제는 우수한 철기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고구려 유민 집단이 가지고 온 문화였다.

백제의 역사는 설화 같다. 금년 여름 졸본성을 가까이서 올려다 보았다. 그 졸본부여 사람인 비류와 온조는 살길을 찾아 남쪽으로 함께 내려온다. 비류는 미추홀에, 온조는 하남위례성에 각기 도읍을 정한다. 그러나 지금의 인천인 미추홀에 도읍을 정했던 비류가 죽자 신하와 백성들은 모두 위례성으로 이주하여 비로소 백제(百濟)라는 큰 나라로 성장한다.

 

한강유역에는 이 무렵에 목지국이 자리잡고 있었다. 직산과 천안을 중심으로 한 목지국은 마한연맹체였다. 온조세력들은 목지국으로부터 100리의 땅의 할애 받는다. 이럴때 미추홀에 자리잡던 비류세력이 온조세력과 합하여 목지국을 대신하여 이 지역의 맹주로 부상한다. 이들 세력들은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며 백제라는 이름으로 거듭난다.

 

한편 백제는 한강 유역으로 세력을 확장한다. 한나라의 군현의 공격을 막아낸다. 차츰 성장백제는 3세기 중엽 고이왕 때 한강 유역을 완전히 장악한다. 중국과의 무역로도 확보한다.

차츰 중국의 선진 문물들을 받아 들이며 정치체제를 정비한다. 서기 260년에 16관등과 6좌평과 상좌평을 제정한다. 이것은 중앙집권국가의 토대를 형성했다는 증거다. 백제는 한사군과 대결에서 피해도 많았다. 낙랑과의 싸움에서 298년에는 책계왕이, 304년에는 분서왕이 사망한다.

예맥족은 예족과 맥족으로 구성된 종족이다. 예족은 고조선과 신라를 세운 종족이다. 부여와 고구려, 백제를 세운 종족은 맥족이다. 결국 예족과 맥족은 지금 한민족의 직계조상이다.

 

백제는 근초고왕 때 남으로 전라도 남해안과 제주도까지, 북으로 황해도 지역, 동으로 낙동강 유역까지 영토를 확장한다. 이 무렵부터 백제는 전제군주화가 되어 부자 상속으로 왕위계승이 확립된다.

침류왕 때에는 불교를 공인한다. 백제의 확장에 쐐기를 박은 왕은 장수왕이다. 5세기 이후 장수왕은 백제의 세력을 막기 위해 남하정책을 시작한다. 백제의 개로왕은 이때 전사하고. 백제는 급기야 475년 공주(웅진)로 수도를 옮긴다. 백제의 왕군은 급격히 흔들린다. 귀족세력이 국정을 주도한다. 백제가 정신을 차린 것은 5세기 후반 동성왕 때 부터다. 동성왕은 신라와 동맹을 맺고 고구려에 대항한다. 무령왕은 중앙집권적인 백제를 만들기 위해 노력을 다한다. 지금의 군과 시 같은 22개 지역(담로)에 왕족을 파견하여 다스리게 한다.

 

서기 538년 성왕은 웅진(공주)에서 사비(부여)로 수도를 옮긴다. 남부여로 국호를 개명한다.

성왕은 중앙 관청과 지방제도를 정비하고 불교를 진흥한다. 중국의 남조와 활발한 교류를 하면서 신라와 연합하여 한강유역을 수복한다. 그러나 551년 신라에게 한강유역을 빼앗기고 관산성에서 신라군과 싸우다가 554년 사망한다. 왕이 직접 싸움판으로 달려가던 당시의 전쟁은 실로 처절한 싸움이었을 것이리라.

 

                                                   신동엽 시인 생가

 

 

2) 신동엽 시인의 살과 문학

 

신동엽시인(1930~1969)은 충남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294번지에서 태어났다.

전국의 수재들이 입학하던 전주사범에 입학하지만, 1948년 동맹휴학에 가담하였다는 이유로 제적을 당했다. 195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석림(石林)이란 필명으로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가  당선되어 본격적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한다.

조선일보에 발표한 ‘진달래산천’이란 시를 읽어 보면, 그가 6,25때에  죽어간 사람들에게 얼마나 애정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길가엔 진달래 몇 뿌리

꽃 펴 있고,

바위 모서리엔

이름 모를 나비 하나

머물고 있었어요.

 

잔디밭엔 장총(長銃)을 버려 던진 채

당신은

잠이 들었죠.

 

햇빛 맑은 그 옛날

후고구렷적 장수들이

의형제를 묻던,

거기가 바로

그 바위라 하더군요.

 

기다림에 지친 사람들은

산으로 갔어요

뼛섬은 썩어 꽃죽 널리도록.

남햇가,

두고 온 마을에선

언제인가, 눈먼 식구들이

굶고 있다고 담배를 말으며

당신은 쓸쓸히 웃었지요.

 

 

 

꽃다운 산골 비행기가

지나다

기관포 쏟아놓고 가 버리더군요.

 

기다림에 지친 사람들은

산으로 갔어요.

그리움은 회올려

하늘에 불 붙도록.

뼛섬은 썩어

꽃죽 널리도록.

 

바람 따신 그 옛날

후고구렷적 장수들이

의형제를 묻던

거기가 바로

그 바위라 하더군요.

 

잔디밭엔 담배갑 버려 던진 채

당신은 피

흘리고 있었어요.

 

-조선일보 1959. 3. 24  신동엽 시인의 시 '진달래산천' 부분

 

‘진달래산천’이란 신동엽의 이 시는 민족간의 처참한 내전이 배경이다. 6ㆍ25로 인한 깊은 상처를 우리의 산야에 어디나 피고 지는 진달래의 핏빛 이미지 속에서 그려낸 작품이다. 그의 초기시를 대표하는 전 12연의 서정적인 자유시이다.

당시 문단에서 금기시하던 민족과  통일문제와 관련한 작품들을 발표하면서 시인 김수영과 함께 민중문학의 서막을 연다.

자신의 고향 부여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처절하게 묘사한 글을 1962년 6월5일 동아일보에 발표하기도 한다.

 

“ 내 고향 사람들은 봄이 오면 새파란 풀을 씹는다. 큰 가마솥에 자운영, 독사풀, 말풀을 썰어 넣어 삶아 가지고 거기다 소금, 기름을 쳐서 세 살짜리도, 칠순 할아버지도 콧물 흘리며 우그려 넣는다. 마침내 눈이 먼다. 그리고 홍수가 온다. 홍수는 장독, 상사발, 짚신짝, 네 기둥, 그리고 너무나 훌륭했던 인생체험으로 말미암아 저항하지 않았던 이 자연의 아들과 딸을 실어 달아나 버린다.”

 

1967년 장편서사시 ‘금강’을 발표하기에 이르지만, 1969년 세상을 떠난다. 39세의 젊은 나이였다. 1975년 발간된 <신동엽전집>은 당시의 유신체제하에서 절망하던 당대의 지식인들과 대학생들에게 강렬한 은어(隱語)의 메시지가 되었다.

푸르른 자유를 갈망하며 돌파구를 찾던 사람들은 서사시 ‘금강’을 읽으며 민족의 화해와 자유의 확신을 갖기에 이른다.  민족의 자각과 통일에 관한 용어인, 이를 테면 ‘한라에서 백두까지’라는 통일의 상징적인 화두 역시 그가 창조한 언어다.

 

시대를 앞서 나가면서 민족적인 언어들을 창작한 신동엽은 예언자적인 시인이다. 성경 구약에 나오는 예레미야 같은 사람이다. 이 땅에 시인입네 하면서 시대를 거스리며 안빈낙도의 함정에서 허덕인 문인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러나 그의 민족적이며, 통일지향적인 업적들은 아직도 과소하게 평가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신동엽시인의 생가와 시비,  묘소가 존재하고 있는 부여를 답사하는 일은 민족문학의 한 뿌리를 찾아가는 의미를 지닌다. 부여는 백제 26대 성왕이 공주(웅진)에서 부여(사비)로 수도를 옮긴 후 의자왕 20년, 나당연합군에 의해 망할 때까지 123년간( AD538~660년) 백제의 문화를 꽃피운 역사깊은 고장이다.

 

부여라는 지명은 백제의 멸망 이후에도 변하지 않고 1,500년 동안 불려지고 있는 이름이다.  이렇게 오랜 기간 동안 지명이 존속되는 것은 흔치 않는 일인데 부여는, 이 지명을 지금까지 간직하고 있다.  충남의 서남부에 위치하며 북으로 청양군, 서쪽으로 보령시, 동으로는 논산시가 위치한다. 전북 익산과 금강을 사이에 두고 경계를 이루며 동북쪽에 차령산맥이 서쪽으로 대열을 이루며 앉아 있다.

 

 

신동엽 시인은 이념적인 겨울을 버티며 다가올 민주화의 봄을 노래한 시인이다. 70년대부터 80년대를 불사른 민중문학의 시발점이기도 했던 선생의 고향은 백제의 마지막 도읍지인 부여다. 사람들은 부여에 관해서 잘 알고 있다고 하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또한 시인 신동엽을 아는 사람도 드물다. 시인 신동엽을 최근에 인기 있는 개그맨으로 혼동하기도 한다. 그는 암흑의 저 60년대에 우리민족의 나갈 바를 표현한 예언자적인 시를 썼다. 그의 대표작은 단연 ‘껍데기는 가라’다.

                                                      

 

껍데기는 가라.

4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 아사녀가

중립의 초래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기로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이 땅의 사월과 오월은 부활의 달이다.  4.19혁명은 60년대 이후 오늘까지 도도한 민주화의 시발점이었다. 시간이 세월이 되어 퇴락하고 잊혀져 가는 사월혁명과 동학혁명의 민중적인 열망을 이처럼 직선적으로 표출한 시는 없었다. 이 땅의 현실은 껍데기가 기득권을 가지고 권력을 휘두르고 있음을 반증이라도 하듯이 그는 ‘껍데기는 가라’고 외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강력한 몸짓은 당시에 감히 누구도 접근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갈라진 국토에 대해서도 ‘한라에서 백두까지’란 표현을 쓰면서 고착화 되어가는 민족의 비극성을 더는 참을 수 없어 정면으로 대응하고 나선 것이다. 역사의 촉각을 곤두세우고 민족의 위기를 소름 끼치도록 느낀 시인은 얼마나 고독하였던가? 

신동엽시인의 문학적인 원천은 민족이다. 살얼음 판같은 위기의 시대에 어떻게 시를 쓸 수 있었는지, 궁금할 정도로 그의 시적 발상은 예민한 이데올로기에 용케 살아남아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차령산맥 너머 금강의 호칭이 백마강이라는 이름으로 유유히 흘러가는 곳 부여다. 전북 장수에서 발원하여 충남북을 휘어돌아 강경에서 충남과 전북을 나누면서 군산으로 흘러간다. 특이한 것은 전북에서 거꾸로 충북까지 갔다가 다시 휘돌아 나와 공주와 부여를 관통하고 서해로 흘러든다. 공주부터 하구까지 약 28KM의 거리구간이 백마강이다.

 

신동엽시인의 생가와 시비 및 묘소가 시인에 관한 설명의 단문이라면, 부여의 역사는 장문에 해당한다. 

부여읍은 몇 번의 방문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만한 크기로 백마강변에 자리 잡고 있다.

                   

3) 백제의 멸망

 

지금의 논산 황산벌에서  백제의 오천결사대가 참배를 당하고 계백장군도 장렬히 산화하였던 서기 660년 7월13일, 나당연합군에게 백제의 수도 부여는 함락되었다.

백제의 마지막 도읍지 부여는 이런 전쟁의 상흔을 가지고 살아왔다. 부여라는 지명은 백제시대에는 ‘소부리’와 ‘사비’라는 이름으로 불리었다. ‘소부리’와 ‘사비’는 언어학적으로 ‘새벽’과 ‘밝음’을 말한다. 그러니 ‘부여’라는 지명은 ‘새벽의땅’이며 ‘밝은 땅’이다.

 

약 500동안 한강유역에서 도읍을 정하고 살던 백제는 개로왕때 고구려 장수왕의 3만 군대에게 이 지역을 점령당한다. 개로왕은 이 전투에서 죽고 그 아들 문주왕이 서기475년에 웅진(공주)으로 도읍지를 옮기게 된다. 문주왕. 삼근왕. 동성왕. 무령왕. 성왕이 백제의 웅진(공주)에서 왕이 되었다.

 

성왕때인 538년 사비(부여)로 도읍지를 옮겨 123년간 찬란한 백제문화를 발전시켰다. 그러나 서기660년 백제31대 의자왕때 신라와 당의 연합군에 의해 부여를 비롯한 백제땅이 모두 함락 당하고 만다. 물론 3년후에 일본이 백제를 도와 지금의 동진강 하구인 백강구에서 백제수복 마지막 전투를 벌였지만 끝내 패배하고 말았다. 이 백강구 전투는 동양 3국 즉 당나라, 일본, 신라, 백제 유민들이 참여한 최초의 국제전이었다.

                                             

 

의자왕은 처음에는 성군이었으나 집권 후반기에는 성충과 흥수같은 충신들의 조언을 듣지않고 향락에 빠져 678년간 지속되어 온 백제왕국을 멸망케한 불명예스러운 왕이 되었다.

의장왕은 서기660년 7월12일 논산 황산벌 전투에서 계백장군의 5,000명의 결사대가 김유신 장군에게 패배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7월13일 태자 효와 신하들을 대동하고 야밤에 웅진성(공주)로 피난을 간다.



                                                      정림사지터

 

7월18일 의자왕은 사비(부여)성으로 돌아와 항복하니 7월29일 태종무열왕 김춘추도 부여에 당도한다.

8월2일 나당연합군에 의한 백제정벌을 기념하는 연회가 열렸다. 상석에는 김춘추와 김유신. 소정방이 앉았다. 말석에서 고개숙인 의자왕이 그들에게 절을하며 술잔을 바치니 백제의 신하들은 눈물을 흘렸다.

 

10만명 이상의 대군을 이끌고 서해를 건너 장항 앞바다를 거쳐 부여로 들이닥친 당나라의 소정방 군대는 백제땅을 능욕하였다. 점령한 땅에 당나라 식으로 5개의 도독부를 두고 다스렸다. 9월3일 의자왕을 비롯한 왕족과 신하들을 포함한 약 12,000명을 당나라로 압송하여 갔다. 이때 백제땅은 아비규환이었으며 대성통곡 소리가 산천을 울렸을 것이다.

 

당고종은 압송되어 잡혀온 의자왕을 접견하였지만 징벌을 내리지는 않았다. 오히려 의자왕이 병사하자 ‘금자광록대부’라는 벼슬을 내려주고 북망산에 장사 지내 주었다.

결국 의자왕은 당나라 수도 장안에서 죽어갔다.

 

4) 정림사지

 

538년 봄에 성왕은 공주에서 부여로 도읍을 옮기고 왕궁과 관청을 건설한다. 사비도성 안을 중앙부, 동 서 남 북 등의 5부로 정하고 그곳에 주민을 거주시킨다. 특이한 것은 당시 사비 도시 계획 속에는 사찰이 있었다. ‘정림사’ 였다.

당시 사비성에서 정림사는 중심사찰이다.

정림사지와 왕궁과의 관계는 중국의 북위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당시 낙양성 내의 황궁과 영녕사(永寧寺)와의 관계와 흡사하기 때문이다.

 

정림사지 석탑 1층 탑신 표면에 660년 당나라가 백제를 멸망시킨 전승기념비적인 내용이 새겨져 있다.

정림사지는 중문과 탑, 금당, 강당이 남북으로 일직선으로 조성되었다. 이것은 백제 전형의 1탑1금당식 가람배치 구조이다.

정림사지의 이런 배치 구조는 고대 일본 사찰의 모태가 된다.

정림사지는 복도가 건물을 감싸는 배치 형태다.

중문 밖에는 동쪽과 서쪽에는 연못을 만들고 다리로 건너게 하였다.

이 연목이 우리나라의 발굴된 최고(最古) 연못이다.

 

 

5)백마강과 부소산

 

백마강이란 이름은 소정방과 관련이 있다. 공주를 지난 금강이 부여에 닿으면 그 때부터 백마강이라 부른다. 이는 소정방이 사비성(부여)의 공격을 방해하는 금강의 용을 '조룡대'에서 백마를 미끼로 이 용을 낚았다고 하여 ‘백마강’이라고 하는 전설에 기인한다. 이 얼마나 허망한 발상의 이름이란 말인가. 결국 백마강은 소정방이 타던 백마의 말이 아닌가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무심코 백마강이란 이름을 금강의 별칭으로 무심결에 부르고 있다.

 

 

백제의 궁녀들과 백성들이 정절을 지키며 떨어진 낙화암 위에 있는 이 정자에 많은 묵객들과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1929년 부여군수 홍한표는 부여의 문인과 유림들의 뜻을 모아 낙하암 암반위에 6각형의 정자를 세우고 백화정이고 하였다.

낙화암에서 우측으로 난 산길을 따라 약 200m쯤 내려가면 유명한 고란사가 자리잡고 앉아있다. 고란사는 작지만 우리 국민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유명하다. 그러나 직접 찾아가 보면 실망한다. 너무 작은 사찰이기 때문이다. 공주에 있는 마곡사(麻谷寺)의 말사인 이 절은 자세한 기록이 없고 단지 백제 말기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대웅전 뒤 암벽 틈에 고란정(皐蘭井)이란 우물이 있으며 그 위쪽 암벽에 고란초(皐蘭草)가 자라고 있다. 본래 백제의 왕들을 위한 정자였다고도 하며 궁중의 내불전(內佛殿)이었다고도 전한다.

절의 규모는 비록 작지만 낙화암에서 자신의 몸을 날려 죽어간 사람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한 숭고한 장소다. 법당 뒤로 돌아가면 절벽아래 암벽틈에서 솟아나는 석간수가 유명하다. 대웅전은 앞면 7칸, 옆면 4칸으로 절규모에 비해 큰 건축물이다.

고란초는 습기 많은 바위틈에서 자라는 고사리가 30~50년을 사는 다년생의 풀이다. 고란사에서 낙화암을 올려다 보면서 계백장군과 백제의 여인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뭉클하다.

 

계백장군은 논산의 황산벌에서 신라의 김유신 장군과의 대결전을 앞두고 계백장군은 자기 손으로 처자를 모두 죽였다. 그 칼을 들고 계백장군은 싸움터인 논산의 황산벌로 말을 달렸다. 백제 왕궁터인 부여읍을 내려다보며 계백장군이 말을 달려 황산벌로 달려가던 모습을 상상해 본다. 살신성인의 비장함으로 그는 백제의 기백을 오늘에 되살리고 있다.

부소산에 세워진 삼충사는 백제의 사직을 죽음으로 지키려 했던 계백장군. 성충.흥수의 충절을 기념하기 위해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이렇듯 백제의 멸망과 훗날 동학의 이야기들은 신동엽 시인에게 현실적이며 역사적인 시적인 발상에 많은 영향을 준다.

 

6)신동엽 시인 생가

 

말을 탄 계백장군의 동상이 늠름한 군청 4거리는 방사선 형태의 길이다. 이곳에서 북쪽으로 한 블럭을 지나 좌측으로 난 골목을 따라 들어가면 신동엽 생가다. 타인의 소유가 되었던 것을 신동엽시인의 부인 인명선(현재 한국짚풀박물관장)이 구입하여 초가로 복원하였다. 그러나 해마다 이엉을 새롭게 이어야 하는 일이 만만치 않아 지금은 기와로 지붕을 교체하였다. 하늘색 기와가 이색적이다.

 

대문의 처마 밑에 있는 '시인신동엽생가'란 한글 현판이 반긴다. 또한 인병선 시인이 지은 ‘생가’라는 시가 현판에 세로행을 쓰여진 것을 읽는다.

 

우리의 만남을

헛되이

흘려버리고 싶지 않다.

 

있었던 일을

늘 있는 일로

하고 싶은 마음이

당신과 내가

처음 맺어진

이 자리를

새삼 꾸미는 뜻이라.

 

우리는

살고 가는 것이 아니라

언제까지나

살며 있는 것이다.

 

                                                         ----인병선 시인의 시 ‘생가’ 전문

                                     신동엽 시인의 생가의 안방입구에 걸린  인병선 시인의 시 '생가'

 

“우리는/살고 가는 것이 아니라/언제까지나/살며 있는 것이다.”라는 마지막 연이 가슴을 흔들며 감동으로 밀려온다.

인병선 시인은 신동엽 시인의 선양사업에 일생을 바친 분이다. 젊은 날에 요절한 남편을 그토록 잊지 못하고 최선을 다한 그의 삶은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곤하였다.

 

방 안과 부엌의 내부를  유심히 본다. 헛간까지 기웃거리면서 그의 흔적을 더듬는다. 방명록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생가를 방문한 소감을 기록해 놓았다. 전국 각지에서 찾아온 흔적이 역력하다. 결국 신동엽시인은 시련의 겨울을 이기고 부활하여 평범한 사람들과 접근을 시도하고 있음이 발견되었다.

 

이 집은 시인이 소년기부터 청년기를 보낸 곳으로 1985년5월 유족과 문인들에 의해 복원되었고 2003년 부여군에 기증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지붕의 이엉을 이는 일이 번거롭고 까다롭다고 하여 생가를 푸른 기왓장으로 만들어 버린일이 못내 아쉽다. 현재는 군청에서 관리하는 만큼 조속한 시일 내에  초가지붕으로 환원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생가 바로 옆에는 보훈회관이 자리 잡고 있다.

 

7)김시습의 삶과 문학

 

부여 무량사는 조선의 유명시인 김시습이 머물다가 세상을 하직한 장소다.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인 금오신화를 지었던 작가이며, 생육신의 한 사람인 김시습의 삶은 소설같다.

김시습(1431~1493)은 한양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강릉이며 호가 매월당(梅月堂)이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그는 천재였다. 3세에 한시를 쓰고 5세에 세종의 총애을 받아 후일 중용하겠다며 비단을 선물을 직접 전달할 정도였다.

그의 이름인 시습(時習)은 논어 학이편(學而篇)에서 따왔다. '때로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라는 구절을 인용한 것이다.

 

삼각산 중흥사에서 과거시험을 준비하던 수양대군이 왕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중이 된다. 그의 나이 21세였다. 그는 우리 국토와 만주벌판을 답사한다. 백성들의 삶을 직접 체험하는 계기가 되었다. 매월당시사유록( 每月堂詩四遊錄)은 이때의 체험을 토대로 쓴 시편들이다. 단종의 죽음에 절망과  슬픔을 가슴에 품고 살았던 김시습이 자신의 마지막 안식처로 정한 곳이 부여였다.

그는 부여 무량사에서 자신의 초상화를 직접 그려놓고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 31세 때에 금오산에서 우리나라의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를 창작한지  30년이 되던 해였다.

 

30대의 어느 날, 김시습은  한양의 어느 골목을 걷고 있었다.

벽에는 한명회의 시가 붙어 있었다.

 

靑春扶社稷 청년시절에는 사직을 붙잡고

白首臥江湖 늙어서는 강호에 묻히리라.

 

김시습은 화가 났다. 그래서 그 글을 다음처럼 수정한다.

靑春亡社稷 청년시절에는 사직을 망치고

白首汚江湖 늙어서는 강호를 더럽히리

 

김시습이 5세 때 지은 시(詩)는 이미 원숙성이 담겨 있다.

老木開花心不老(노목개화심불로) 해석하면 '늙은 나무에도 꽃이 피니 마음은 늙지 않네’

 

그의 시 '도 중(途中) '을 읽으면 우리의 답사도 더욱 의미가 있어진다.

 

貊國初飛雪(맥국초비설) 맥국 땅에 첫눈이 내리네

春城木葉疏(춘성목엽소) 춘성의 나뭇잎은 사라지고.

 

秋深村有酒(추심촌유주) 가을 깊은 마을에 술이 있는데,

客久食無魚(객구식무어) 나그네 오랫동안 고기 맛을 못보았네.

 

山遠天垂野(산원천수야) 산이 멀어 하늘은 들에 닿았고,

江遙地接虛 (강요지접허) 강물 아득히 흘러  허공에 붙었네.

 

孤鴻落日外(고홍락일외) 외로운 기러기 지는 해 밖으로 사라지네,

征馬政躊躇(정마정주저) 나그네  떠남을 주저하노라.

 

                            -- 김경식 번역

 

 

乍晴乍雨(사청사우)라는 시는사람살이의 인심을 개탄한 시다. 날씨의 변화를

 인간사에 비유하였다.

 

 

乍晴乍雨雨還晴(사청사우우환청) : 잠깐 맑았다가 비 내리고 다시 맑았다가 비 내리니,

 

天道猶然況世情(천도유연황세정) : 하늘의 섭리도  그럴진데 세상사람들 인심이야.

 

譽我便是還毁我(예아편시환훼아) : 나를 칭찬하다가  도리어 나를  질타하누나,

 

逃名却自爲求名(도명각자위구명) : 명예를 버린다고 하더니 명예를 구하노니.

 

花開花謝春何管(화개화사춘하관) : 봄에 꽃 피고 지는 것을  어찌하리오

 

雲去雲來山不爭(운거운래산불쟁) : 구름이 가고 오는 것을 산은 다투질 않나니.

 

寄語世人須記認(기어세인수기인) : 세상 사람들이여  반드시 기억하시라

 

取歡無處得平生(취환무처득평생) : 환락을 누려도 평생 누릴 곳은 없다네.

 

                                                             --김경식 번역

 

 

8) 신동엽 시비

 

신동엽 시인의 시비는 오래전에 백마강가에 세웠다. 그런데 외지인이 시비를 찾기는 쉽지 않다. 시비는 부여읍 사거리의 계백장군 동상이 서 있는 곳에서 백제대교 넘기 전 백마강가에 있다. 읍내에서 가려면 백제대교를 건너지 말고 다리 입구에 있는 중앙병원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강변길로 들어서면 강변의 소나무 숲 사이에 신동엽시인의 시비가 서 있다.

 

이 숲을 부여 사람들은 '선화공원'이라고 부른다. 시비건립 당시 옹색한 여건 하에서 그래도 이만한 시비를 세웠다는 것이 신기했다. 그러나 바로 옆에는 반공애국지사추모비가 웅장하게 멋을 부리고 서있어 단촐한 신동엽시인의 시비와 대조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인근에 또 다른 기념비인 ‘불교전래사은비’는 비록 일본인들이지만 백제에 고마움을 전하는 모습을 진하게 보이고 있다.

 

“일본 불교는 일본국흠명조(서기552년)에 백제26대 성왕이 전한데에서 시작된다. 그후부터 발전을 거듭하여 일본문화의 정화를 이룩하였다. 일본불교도는 그 은덕을 천추에 잊을 수 없어 정성어린 감사의 뜻을 표하고저 한국불교도의 협찬을 얻어서 성왕의 옛 도읍지인 이곳에 사은비를 건립하고 한일양국민의 영원한 친선의 표로 삼음과 아울러 세계평화의 상징이 되기를 염원하는 바이다.”           --서기1972年 5월 10일 일본 불교전래사은사업회--

 

백제와 일본의 친선을 돋보이게 하는 이 기념비를 읽으며 부여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구드래’란 말을 기억하고 싶다. 부여에는 ‘구드래공원’이 있고 선착장 이름도 구드래 선착장이다. 이 '구드래'란 말은 일본어로 ‘큰 왕국’이란 말로 당시 백제를 칭한다.

 

이곳은 좌회전이 되지 않아 백제대교를 넘어가 다시 유턴을 해 와야 한다. 화강암으로 단을 쌓고 그 사이에 검은 오석을 넣어 만든 신동엽 시인의 시비의 글자는 가까이에서 보아야 확인 될 정도로 희미하다. 현대문인의 시비로는 충남에서 가장 먼저인 1970년 4월7일에 세워졌다.

시비에 새겨진 신동엽 시인의 시 ‘산에 언덕에’를 읽는다.

                                           

 

그리운 그의 얼굴 다시 찾을 수 없어도

화사한 그의 꽃

산에 언덕에 피어날지어이.

 

그리운 그의 노래 다시 들을 수 없어도

맑은 그 숨결

들에 숲속에 살아갈지어이.

 

그리운 그의 모습 다시 찾을 수 없어도

울고 간 그의 영혼

들에 언덕에 피어날지어이.

 

세로의 궁서체로 써 내려간 비문은 시 전문을 쓰지 못하고 있다.

이 시의 6행 다음에 이어지는 다음의 싯구는 아마도 시비의 공간 때문에 빼어 버린 듯 하다.

 

쓸쓸한 마음으로 들길 더듬는 행인아

눈길 비었거든 바람 담을 지네.

바람 비었거든 인정 담을 지네

 

아름다운 서정성을 바탕으로 한, 이 시는 이 땅에서 숭고하게 살다가 떠나간 사람들을 포함할 수 있겠다. 이 시는 1989년 중학교 3학년 국어 교과서에 게재된다. 70년대와 80년대 신동엽의 시를 읽지 못하게 했던 정부도 그의 시가 지닌 민족적인 정서와 아름다움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으리라.

시비 건립식에는 소설가 김동리를 비롯하여 약 300명의 문인이 모였다. 진보와 보수를 마다하고 모두 모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소설가 김동리가 추도사를 읽었고, 박두진 시인이 강연을 하였으며 오랜 친우 박봉우 시인이 시비 건립문을 읽었다. 이제 이분들도 모두 세상을 떠났다.  이미 시간이 세월이 되었기 때문이다.

 

9) 신동엽 시인 묘소

 

신동엽 시인의 묘소는 본래 경기도 파주에서1993년 11월 부여로 옮겨와 능산리고분의 건너편 산에 있다는 이야기만 풍문으로 듣곤 하였다. 누구도 정확한 위치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 부여에서 논산으로 가는 국도를 따라 가다보면 왼쪽에 능산리고분이 있다. 이 고분을 지나치지 말고 약 50M전에 있는 다리를 건너서 약 500M쯤 가면 야트막한 고개를 만나게 된다.

 

이곳에서 왼쪽 산길로 200M를 걸어 들어가면 축사가 나온다. 축사 옆 경사진 밭을 거슬러 올라가면 소나무 숲이다. 호젓한 숲길을 따라 약 150M지점을 오르면 신동엽시인의 묘소에 이르게 된다. 필자는 지금껏 그 묘소를 찾았다는 사람을 만나보지 못했고 어떤 자료에서도 묘소 행에 관한 정보를 알지 못했다.

또한 축사입구에서는 길이없이 밭을 이용하여 올라가야 하기에 길 찾기가 어렵다. 필자 역시 몇 년 전에 처음 방문 때는 축사의 주인에게 부탁을 하여 길을 찾을 수 있었다.

 

지금은 축사도 문을 닫고 곧 헐릴것처럼 방치되어 있다.

묘소는 정갈하게 잘 정돈되어 있다.  봄 숲에서 나는 숲 향기로 기분이 상쾌하다 . 묘역에도 새 잔디가 파랗게 올라오고 있다. 주변의 소나무 숲도 싱싱하다. 작은 봉근 앞에는 상석이 놓여있고, 오른쪽에는 검은 비석이 앉아있다. '詩人 申東曄 '의 선연한 비문이 시인의 무덤임을 확인 시켜 줄 뿐이어서 소중하고 반가웠다.  화강석 받침대에 오석을 넣어 만든 작고 초라한 비석의 뒷면을 읽는다.

                                         

 

西紀 1930年8月18日 申淵淳氏

의 아들로 夫餘 錦江 기슭에 나다.

全州師範 檀大 健大大學院에서 修業

1957年 印貞植의 딸 印柄善과

結婚,貞燮 佐燮 祐燮을 낳다.

1959年 文壇出帆 詩集 阿斯女

錦江 等을 남기다.

1969年 4月7日 문득 요절 여기

月龍山 기슭에 잠들다

 

시인의 일생이 빼곡하게 써있다. 서른아홉에 요절한 시인의 일생을 읽으며 하늘을 쳐다본다.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라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월용산, 특이한 이름의 산이다. 그러나 이 묘비는 파주에서 이장할 때 가지고 와서 다시 사용한 것이기에 오류가 있다.

 

월용산은 파주시 교하 다율리에 있는 월롱산으로 수정해야 한다. 결국 이 묘비를 교체하지 않은 것이 아쉽다. 묘소 주변은 찾은 사람의 흔적이 없다. 올라오던 길에도 풀섶이지만 사람의 발자국이 보이지 않는다. 묘지 구석에 앉아서 숲과 하늘을 본다. 소나무 숲 속에 자리 잡은 묘지의 상석에 앉아 그의 대표시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를 읽는다.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구름 한 송이 없는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네가 본 건, 먹구름

 그걸 하늘로 알고

 일생을 살아갔다.

 네가 본 건, 지붕 덮은

 쇠 항아리,

 그걸 하늘로 알고

 일생을 살아갔다.

 닦아라, 사람들아

 네 마음속 구름

 찢어라, 사람들아,

 

 네 머리 덮은 쇠 항아리.

 아침 저녁

 네 마음속 구름을 닦고

 티 없이 맑은 영원의 하늘

 볼 수 있는 사람은

 외경을

 알리라

 

 아침 저녁

 네 머리 위 쇠항아릴 찢고

 티 없이 맑은 구원의 하늘

 마실 수 있는 사람은

 연민을

 알리라

 

 차마 삼가서

 발걸음도 조심

 마음 조아리며.

 서럽게

 아 엄숙한 세상을

 서럽게

 눈물 흘려

 살아 가리라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구름 한 자락 없이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이 시는 제대로 된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살아온 사람들에게 강한 은유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1894년 동학혁명, 1919년 3월1일, 1960년 4월19일의 하늘이 잠깐 맑았을 뿐 온통 먹구름이었다. 평화롭고 자유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쇠항아리’를 찢고 ‘먹구름’을 닦으라는 호소의 시다.

 

산길을 내려오면서 내 안의 쇠항아리와 먹구름은 무엇인지 하늘을 보면서 생각해 본다. 자유를 갈망하면서도 머리덮은 쇠항아리를 깨트리지 못하고 살아가는 이 시대의 사람들 속에 여전히 내가 존재함을 확인한다.

오래 전에 답사했던 능산리 고분은 그냥 지나치고 낙화암을 오르기 위해  4번 국도를 다시 타고 부여읍으로 간다.

아름다운 궁남지를 답사한다. 부여읍에서 남쪽으로 약 1km지점에 위치에 있는 궁남지는 마래방죽이라고도 한다.

백제 무왕의 탄생설화가 있는 이곳의 역사성은 실로 아득하다.

 

궁남지에는 '서동요' 문학비가 서 있지만 나는  부여 석성면 출신의 정한모 시인의 '어머니'란 시가 떠 오른다.

백제는 어머니 같은 존재다.

슬픔을 남기고 역사속으로 사라졌기 때문이다. 정한모 시인(1923~1991)은 '가을에'라는 시로 유명하다.

해방직후에 문단에 등단하여 시를 썼지만, 서울대 교수로 근무하며 평론을 주로 썼다.

노태우 대통령 정부때에 문공부장관을 지낸 그는 당시에 월북작가 해금에 도움을 주고 세상을 떠났다.

 

많은 그의 시중에서 <어머니>의 전반부를 읽으면,  나는 언제나 백제와 세상 떠나신 어머니 생각이 난다.

섣달그믐이 되면 더욱 그렇다. 눈발이 날리면 더욱 그립다. 어머니가...

어머니는
눈물로
진주를 만드신다.

그 동그란 광택(光澤)의 씨를
아들들의 가슴에
심어 주신다.

씨앗은
아들들의 가슴속에서
벅찬 자랑
젖어드는 그리움

때로는 저린 아픔으로 자라나
드디어 눈이 부신
진주가 된다.
태양이 된다.

어머니는
오늘도
어둠 속에서
조용히
눈물로
진주를 만드신다.

 

    --정한모 시인 시 <어머니> 부분

출처 : 공부하는 시민연대
글쓴이 : 栖栢/서백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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