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40년 전에 울진 매화종고에서 처음 인연을 맺었던 제자들과 평소 존경해마지 않던 국어과 선배님을 대구의 약전골목 부근, 유명 식당에서 만났던 날이다. 며칠 전에 방희 여사로부터 모임 시간과 장소를 통지 받았고, 모두 6명이 모일 것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남 셋, 여 셋, 마치 미팅하는 것처럼 3:3 모임이었다. 50대 4명, 60대 1명, 70대 1명이다. ㅎㅎ 다들 적지 않은 나이들이다.
6명은 언제 어떻게 인연이 되어서 얼마만에 만난 것인가? 여인들(2기 졸업)의 경우 1984년 3월 초부터 이후 2년 동안 수업시간을 통해 만나다가 졸업 이후 오늘 처음 만났으니 40년만의 상봉이다. 김교수(1기 졸업)는 내가 현직에 있을 때, 근무하던 학교로 초청해서 임상병리사라는 직업을 자세히 소개해 달라는 부탁을 서너 차례 한 바 있는데 그때마다 흔쾌히 방문해서 협조해 주었고, 사제지간 만남의 또 다른 자리도 몇 번 있고 해서 비교적 만남의 기회가 많았다. 대선배님인 남주숭 선생님은 2년 남짓 동료교사로 매화중종고에서 근무한 인연이 있고 세월이 흐른 최근까지도 이런저런 기회로 만나왔기에 남다른 친근감을 느끼고 있었다.
지하철 반월당역 16번 출구에서 빠져나와 염매시장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경제적으로 불황기라서 사람들의 왕래가 뜸하다. 잘 닦여진 도로와 깔끔한 간판들이 옛 약전골목 염매시장의 분위기와는 대조적이어서 오히려 낯설다.
오늘의 약속장소인 식당의 입구다. 간판의 서각이 예사롭지 않은 고급식당임을 한눈에도 알겠다. '산을 담은 밥상' 일반음식점이고 코스요리(종일메뉴)를 선택해야 할 텐데 비용이 만만치 않은 식당인 것 같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김교수가 오늘의 음식비용을 다 지불했다는 말을 들었다. 김교수, 오늘 톡톡히 쐈네그랴! 고맙소. 매주마다 열심히 공부하는 데 투자한 덕에 퇴임 이후의 일자리까지 해결되는 좋은 결과를 얻었다고 하더니 그것을 기념해서 한 턱 쏜 것이라고 믿어도 되겠지? 다시한번 축하!!!! 다음 번에는 내가 쏠 수 있는 기회를 꼭 주시게. 선생이라고 제자들한테 자꾸 얻어먹는 모습, 보기에도 안 좋아. 우리 함께 늙어가면서 오래 보려면 주고받는 게 있어야 되네. 이번에는 내가 받았으니 다음에는 내가 줄 수 있어야 하는 거여. 주는 기쁨만큼 즐거운 게 없다는 것을 나는 알지.^^
제일 먼저 나타난 명숙 여사, 학창 시절의 모습과 달라진 게 하나도 없는 여인!
내가 담임했던 현숙의 언니, 명숙과 현숙 사이에 은숙이도 있었다. 성악가의 소질을 보여줬던 학생이었는데 실제로 대학에서 성악을 전공했고 지금은 목사님의 아내가 되어 대구에서 잘 살고 있다는 소식을 알게 되었다.
방희 여사는 학창 시절 유난히 글을 잘 썼다. 고2 때 매화종고 대표로 경주 화랑교육원에 가서 화랑문화제 산문부 백일장에 참여해 수상한 바 있고, 제일 오른쪽의 김교수도 붓글씨를 잘 써서 역시 화랑문화제 서예 부문에 참여해서 수상했었다. 당시 내가 지도교사로 두 학생을 인솔해서 경주까지 갔던 기억이 고스란하다. 두 친구들의 그때 추억담을 오늘 들려주었는데 그랬는가 싶을 정도로 새롭다. 누구는 어느 선생님을 좋아했었고 누구는 지금 돈도 잘 벌고 잘 나가고 있다는 이야기도 무척 재미있다. 당시 선생님들의 뒷이야기, 수업 이야기, 주변에서 볼 수 있었던 풍경들, 어느 것 하나 추억 아닌 것이 없음을 실감하는 시간들이었다. 이야기 중에 소환되는 선생님과 학생들의 이름들, 어찌 그런 것을 다 기억하냐며 놀랍다는 반응도 보인다.ㅎㅎ
두툼하게 누빈 개량 한복과 베레모가 너무너무 잘 어울리는 남주숭 선생님, 내일 모레면 환갑이 되는 제자들을 바라보는 소회가 어떨지? 70대 중반의 연세임에도 불구하고 고운 피부와 남다른 열정을 간직하고 살고 계신다. 대구 향교에서 주역 논어 등 한문 공부를 계속하고 계시고, 우리나라의 정치 현실에도 관심이 매우 많으시다. 흔히 6, 70대의 나이든 노인들에게서 느낄 수 있는 극우 보수적인 성향이 아닌 진보적 시각을 갖고 냉철한 판단을 하고 계셔서 후배인 나의 정서와도 비슷해서 대화를 나누는 데 별 어려움이 없다. 대구 경북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보수적 성향의 인사들과 정치적 견해 차이로 인해 주고 받게 되는 마음의 상처는 서로가 경계해야 할 부분이 아니던가! 그래서 대화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제자들과의 대화에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어서 오늘 정치 얘기는 피해야 했고 다들 입이 무거워 그런 얘기는 하지 않았다. 다행이다. 생각이 다름을 인정하는 데서 그쳐야지 설득하려고 했다가는 낭패감을 느끼기 쉽기 때문이다.
남주숭 선생님 오른쪽에 앉은 숙경 여사, 멀고 먼 전라도 순천에서 차를 직접 몰고 오늘 모임에 참여하기 위해 달려왔다. 그곳의 특산물인 유자청 선물을 들고 조금 늦게 도착했다. 참 반가웠다. 영호남 교류 차원에서 전라도로 시집을 갔다고 한다. 친구 결혼식에 참여했다가 지금의 신랑을 만나 결혼까지 했고 오래도록 보건 공무원으로 근무해 왔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다. 고등학교 시절의 앳된 모습이나 40년이 지난 지금의 모습이 별 차이가 없는 듯 하지만 곱게 늙어가면서 더해지는 멋스러움은 세월만큼이나 그 내면에 가득할 것이라 믿는다. 반가웠어!!!
사제지간의 대화는 끝간 데 없이 계속되었고 차곡차곡 정과 추억은 쌓여가고 있었다.
식당 영업 마감시간인 저녁 9시까지 이야기하다가 차 한잔을 더 하기 위해 찻집을 찾아 이동 중인 장면이다. 한옥스타일의 스타벅스를 찾았으나 여섯 명이 앉을 자리가 없어서 다시 찾은 곳이 골목길에 숨어있는 미도다방!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미도다방, 50년 전에도 존재했던 다방이다. 이곳에서 아메리카노 커피를 찾는다면 이방인 취급을 당할 수도 있단다. 얼마 전 누군가 미도를 찾아 아메리카노 커피를 요구했다가 '이런 곳에서 아메리카노 커피를 찾으시다뇨?'란 핀잔을 들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미도다방의 주메뉴는 5천원 짜리 쌍화차다. 여기는 밤 10시 마감이다. 그 시간까지 또 우리는 할 이야기를 해야 했다. 계란 띄운 쌍화차를 한 잔씩 주문해 마시면서 우리들의 추억담은 계속 이어졌다. 본의 아니게 나는 젊은 시절의 짝사랑을 이야기를 꺼내고 말았다. 나이들수록 ‘이제는 말할 수 있는 이야기’가 점점 많아지는가 보다.
젊은 총각 시절 만났던 제자들과 40년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서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사실에 크게 감사한다. 정년퇴임에 이르기까지 40년 세월을 교직에 몸담고 살아왔지만 돌이켜 보면, 20대의 젊은 교사 시절을 잊을 수 없다. 개인적인 어려움 뿐만 아니라 온세상 근심까지 도맡아 살고있는 것 같던 시절이었다. 비상 계엄령이 내려지고 5.18 광주민주화항쟁의 얼룩진 피의 역사가 온 세상에 잔인하게 작용하고 있을 때, 자유와 민주주의 질서를 기만했던 정권하에서 대부분의 교사들은 찍소리 못하고 전두환 대통령 지시사항철이라는 서류를 꼬박꼬박 챙겨야 했고, 교실의 환경정리를 할 때도 국민정신 9대 덕목(주인정신, 명예심, 도덕심, 협동심, 사명감, 준법정신, 애국심, 반공정신, 통일의지)을 반드시 게시하도록 했던 시절이다. 학생들에게 어떤 이념을 주입해야만 교육이 바로설 수 있다는 관료적 발상이라서 많은 비판과 논란거리가 되었다. 학교 교문 입구 아치에 '국가에 충성을 부모에 효도를' 이라 써놓고 강조했던 시절이다. 당시 군사정부는 충효 사상을 강조해야 지배를 쉽게 할 수 있고 정통성 없는 정권에 그나마 권위를 부여할 수 있겠다고 착각한 것 같다. 얼마 전 윤석열 정부가 획책했던 비상계엄(소위 친위쿠데타)이 성공해서 다시 옛 군사정권 시절로 돌아가는 상황이 생겼더라면 어찌 됐을까를 생각하면 지금도 소름이 끼친다. 12.3 그날, 잠 한숨 못자고 긴장했던 순간을 잊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남주숭 선생님, 옛날에는 참 어렵게만 느껴졌던 부장 선생님, 선배님이셨는데 이젠 형님이라 불러야 더 어울릴 것 같은 분! 오랜동안 바삐 사느라 뵙지 못하고 지냈는데 가끔씩 만나서 이야기 나누며 많이 배울 수 있는 시간을 가졌으면 합니다.
김 교수, 방희 여사, 숙경 여사, 명숙 여사, 오늘 참 고마웠다우. 세월이 흘렀지만 옛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어서 얼마나 좋았는지! 모습은 물론 그 따스한 마음까지 변하지 않았으니 40년 세월도 별 것 아닌 것 같네. 다시 만날 날 기다릴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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