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친구 류박사는 대학 교수로 평생을 살아오면서 숱한 논문과 23권의 저서를 냈다. 작년 초에 정년퇴임을 했지만 아직도 대학원 강의를 하고 있고, 저술 작업도 계속하고 있어서 올 봄에는 24권째 저서가 나올 예정이다. 그는 2024년 12월 14일자로 발표된 <윤석열의 탄핵을 촉구하는 한국문학연구자 시국선언> '적대와 혐오의 정치를 넘어, 다시 광장으로'에 952명' 학자 중의 한 명으로 참여해서 현 시국에 대한 절체절명의 위기에 나름대로의 소신을 드러냈다. 평소 불의를 보면 잘 참지 못하는 대쪽같은 선비인지라 불가사의한 혼란 상황에서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는가! 늦게나마 시국 선언에 참여한 952명 한국문학연구자들에게 깊은 존경의 뜻을 표하고 백수인 나도 열렬히 지지하고 있음을 밝힌다.
오늘은 류박사의 연구실에 들러서 그가 소장하고 있는 추사 김정희의 글씨와 문학사에서 또는 서지학적으로 귀한 책 몇 권을 알현해 보는 시간을 갖기로 했다. 서예를 몇 년이나마 한 바 있는 나를 위한 큰 배려 같아서 고맙다. '문자향'과 '서권기'가 느껴지는 하루일 것 같다.
류박사 연구실에는 귀한 책들이 많다. 어디서나 쉽게 만나볼 수 있는 책들이 아니다. 류박사는 이 책들을 구하기 위해 전국을 누비면서 발품도 많이 팔았고, 어느새 크고 작은 책들이 4단 책장 두 개에 가득차 있다. 구입하는 데 들어간 비용으로 봐서는 아파트 한 채 값은 족히 되고도 남을 거라고 한다. 세월이 흐른 지금의 가치는 더 높아지지 않았을까? 도저히 돈으로는 환산할 수 없을 것 같다. 귀중한 책의 가치를 알아주거나 그 책이 필요한 사람들에게는 억만금에 해당할지 몰라도 관심없는 사람들에게야 그저그런것에 불과한 것이 책일지도 모른다. 이 책들의 가치를 소중하게 여기고 소장하는 데 그치지 않고 책과 관련된 논문을 써서 발표하는 등, 왕성한 문예비평 활동을 해 왔던 류박사의 문학적 업적은 이미 높이 평가된 바 있다. 2022년 교육부 학술 연구 지원사업 우수성과 수상자 50명 중의 한 분으로 선정된 것이 그것이다. 그간의 노력이 결코 헛된 삶이 아니었음을 중명하고도 남는다. 온갖 신체적 어려움을 무릅쓰고 연구에 연구를 거듭해서 저술 작업을 하고 있을 때 나는 현직 교사로서 무엇을 하면서 어떻게 살았는지를 되돌아보게 된다. 다만 위로삼을 수 있는 것이 하나 있다면 류박사와 나는 하는 일의 강도는 달랐을지언정 나름대로 소신껏 열심히 살아온 공통점이 있다는 것 아닐까 싶다.^^
아래의 자료는 류박사의 소장본을 직접 사진을 찍은 것이고 책에 대한 설명은 인터넷 자료를 인용하였음을 밝혀둔다.
육당 최남선의 <심춘순례>, 1926년 백운사(白雲社)에서 출간되었다. 작자는 1925년 3월 하순부터 50여일에 걸쳐 지리산을 중심으로 한 그 주변의 남한 각지를 순례하고 그에 대한 기행문을 집필하여 신문에 게재하였으며, 그것을 바탕으로 다음해 이 기행문집을 간행하였다.
조선어문학회(朝鮮語文學會)의 ≪조선어문학총서 朝鮮語文學叢書≫ 3집으로 1933년 5월에 간행된 한국연극통사서이며, 김태준(金台俊)의 서문과 지은이의 소전(小傳)·본문·부록(꼭두각시극 각본)의 순서로 되어 있다. 김재철은 27세로 요절한 연극학도로 그가 경성제국대학의 졸업논문으로 쓴 <한국연극의 사적 연구>가 바로 이 책으로 출판되었다. 거의 미개척지였던 이 분야에 처음으로 학문적 고찰을 한 업적이며, 한국연극을 역사적 맥락에서 잡아보자는 의도부터가 당시에는 전혀 새로운 저서이기도 하다. 문고판(學藝社刊, 朝鮮文庫, 1939년 재판)으로 230면에 불과한 내용이지만 전통연극을 가면극과 인형극으로 양분하고, 거기에다 구극(舊劇)과 신극이라는 제목으로 신연극 이후의 개관을 덧붙여놓은 매우 간단한 내용이다.
저자 김태준: 일제강점기의 한문학자이자 국문학자. 호는 천태산인(天台山人). 1905년 11월 평안북도 운산에서 태어나 영변농학교와 이리농림학교를 거쳐 1926년 경성제국대학 예과에 입학했고, 1928년 예과를 마친 뒤 같은 대학 법문학부 중국어문학과에 진학해 1931년 졸업했다. 이후 명륜학원 강사, 명륜전문학교 조교수, 경성제국대학 강사를 지냈다. 1940년부터 경성콤그룹(조선공산당재건 경성준비그룹)에 참여했다가 검거되어 1941~43년 옥고를 치렀다. 항일 무력운동의 가능성을 탐색하기 위해 1944년 11월부터 1945년 4월까지 일제의 경계망을 뚫고 국외로 탈출해 중국 연안으로 갔다가 1945년 8월 일제의 패망 소식을 듣고 11월 귀국했다. 12월 경성대학 총장에 선출됐으나 미군정청의 인정을 받지 못했다. 1946년 11월 남조선노동당의 문화부장에 임명됐고, 1947년 ‘8·15폭동 음모사건’ 연루자로 연행되어 일시 투옥됐다가 석방됐다. 이후 남조선노동당 간부로 문화공작과 특수정보 분야의 지하활동을 하다가 1949년 7월 체포되어 이적간첩죄로 재판을 받고 11월 총살로 처형됐다. 생전에 단행본으로 출판된 저서로는 『조선소설사』·『조선한문학사』·『청구영언』·『고려가사』가 있고, 신문·잡지·학술지에 게재된 논문이나 수필로는 「조선의 한문학 원류」·「강담 중국영화」·「임제의 연문학」·「연암소설 경개」·「중국의 한자폐지 운동」·「성씨·문벌·족보의 연구」·「열두 달의 명칭」·「진정한 정다산 연구의 길」·「조선역사의 변천과정」·「단군신화 연구」·「조선민란사화」·「야담의 기원에 대하여」·「원조선인에 대한 고찰」·「조선가요개설」·「신라 화랑제도의 의의」·「연안행」 등이 있다. 이들 저작은 1947년에 발표된 「연안행」 외에는 대부분 1930년대에 집필되고 발표됐다.
류박사가 소장하고 있는 위의 책과 관련하여 구글에서 검색한 결과를 아래에 옮겨본다.
1930년 4월 본사 첫 공채시험에 합격한 김기림이 출근했다. 마감 직전 편집국은 분주했다. ‘기자들의 손가락의 회전은 실로 ‘프로펠러’와 같이 보였다. 사회부장은 50개 이상의 귀를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간단없는 전화가 그를 습격하기 위하여….’
이 ‘50개 이상의 귀를 가진’ 사회부장이 이여성(1901~?)이다. 1931년 ‘숫자조선연구’ 연재를 시작해 주목을 받았다. ‘청정생’(靑汀生)이란 필명으로 연재한 이 기획은 조선총독부와 각 관청에서 발행한 통계와 숫자에 근거, 일제 식민통치와 조선의 실상을 분석한 기획이었다. 그는 ‘조선인들이 조선의 실 사정을 밝고 정확하게 알기 위해서 해당 사물의 질량을 표시하는 숫자의 행렬과 변화의 족적을 표시한 통계적 기록을 찾아보는 것이 가장 첩경’이라고 밝혔다. 첫회부터 국유지 면적을 제시하면서 총독부가 조선 최대 지주라는 사실을 폭로했다. ‘조선의 신문 종류’ ‘사상관계 법령’ ‘검열’ 현황도 숫자를 제시하면서 민족 차별과 강압 통치를 비판했다. ‘숫자조선연구’는 신문 연재 도중 단행본으로도 출간돼 지식청년의 필독서로 꼽혔다.
대구 출신인 이여성의 어릴적 꿈은 해군 장교였다. 잠수함 설계사를 지망했다. 하지만 식민지 청년을 받아들이는 해군학교는 없었다. 중앙고보를 졸업하고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벌이다 체포돼 복역한 것도 그의 기질을 보여준다. 출옥 후 일본 릿교대에 유학하면서 사회주의운동에 관여했고 1927년 무렵 ‘피신차’ 상해에서 머물다 이듬해말 귀국했다.
이여성의 입사 시기는 분명치 않다. 1929년 ‘비율빈(比律賓)의 과거와 현재’(1월) ‘유태인의 민족운동’(8~9월) ‘민족문제 개관’(11~12월) 등 연재 기사가 잇달아 실린 것으로 보아 이때쯤 입사한 듯하다. 이여성은 곧 사회부장을 맡았고, 1930년 10월부터는 조사부장을 지내면서 ‘만보산 사건’ 취재차 특파원으로 파견됐다. 이여성은 1932년 10월 동아일보로 옮겨 조사부장을 지내다 1936년 말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해임됐다. ‘숫자조선연구’는 잡지 ‘삼천리’ ‘비판’ ‘동광’에 이어 동아일보에도 연재돼 모두 5권으로 출간됐다.
그는 역사와 경제, 미술에 두루 능통한 르네상스맨이었다. 틈만 나면 그림을 그렸다. 1935년 청전 이상범과 2인전(展)을 열 만큼 실력을 인정받았다. 화가 이쾌대가 동생이다. 이여성은 역사화에 집중했다. 1938년 새해를 맞아 본지 기자가 그의 중학동 아틀리에를 찾았을 때, 김유신이 백마를 칼로 베는 ‘유신참마도’가 걸려 있었다. 역사화를 정확하게 그리기 위해 각 시대의 복식을 연구했고 광복 후인 1947년 ‘조선복식고(考)’ 출간으로 이어졌다. 이 분야의 선구적 업적으로 평가받는 연구서다.
이여성 아내는 당시 성악가로 이름난 알토 박경희(朴慶姬)이다. 도쿄에서 유학한 박경희는 이여성과 함께 상해로 건너가 러시아 음악가에게 성악을 배웠다. ‘상해서 갓 돌아왔을 때 한번 들려준 독창회는 악단에 큰 충격을 주었다’(‘별건곤’ 22호)는 평가를 들을 만큼 실력파였다. 이름이 같은 소프라노 박경희(朴景禧)와 한자가 다르다.
이여성은 광복후 여운형이 이끈 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하는 등 정치적 궤적을 함께 했다. 1947년 7월 여운형이 암살당하자 이듬해 월북해 김일성 종합대 교수가 됐으나 1958년 숙청당했다. 이후 도자기 공장 화공(?工)으로 일했다는 소식만 전해질 뿐 사망 시기도 불명확하다. ‘숫자조선연구’ ‘조선복식고’ ‘조선미술사개요’를 남긴 르네상스적 지식인은 이렇게 잊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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