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명의 대학 시절 같은과 친구들이 10월 30일 10시부터 대구간송미술관을 방문, 두세 시간 동안 귀중한 문화재를 감상할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을 가졌다. 수십 점의 국보, 보물급 유물을 아주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즐거움의 연속이었다고나 할까? 이곳을 찾는 분들의 문화재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전시된 작품의 사진을 직접 찍어 올렸고 사진과 관련한 내용은 대구간송미술관에서 간행한 <여세동보(與世同寶) > 전시도록이나 인터넷 자료의 내용을 인용하였음을 먼저 밝혀 둔다.
지난 8월 23일 한국일보 기사를 보면,
<개관 후 12월 1일까지 간송 전형필(1906~1962) 선생이 평생을 바쳐 수집한 동국정운, 청자상감운학문매병, 혜원전신첩, 난맹첩 등 40건 97점을 '여세동보(與世同寶)-세상 함께 보배 삼아'라는 이름으로 선보인다. 전시실 한곳에서는 한국화가 살아 움직이는 듯한 길이 38m의 실감미디어가 전시되고, '간송의 방'에서는 수집가로만 알려진 간송의 유품 26건 60점이 전시된다. 수집가로서만이 아닌 예술가 학자 교육자 연구자로서 간송의 면모도 확인할 수 있다.
간송의 맏손자인 전인건(53세) 관장은 문화유산 창고지기를 자처한 부친 전성우(1934~2018) 간송미술문화재단 전 이사장의 뒤를 이어 3대째 문화유산 지킴이를 자처하고 있다. 전 관장은 "말보다 행동으로 느끼고 배우는 가풍을 이어받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부친이 어릴 때 유화물감으로 그림을 그리다 붓과 팔레트도 씻지 않고 공놀이를 다녀왔더니, 간송이 깨끗이 정리한 후 혼도 내지 않았다는 일화를 들려줬다. 스스로 무엇을 잘못했는지 깨닫게 하는 무언(無言)의 가르침인 셈이다. 전 관장은 대체불가토큰(NFT)과 메타버스 등 디지털 기술 활용에 관심이 많다. 그는 "30장면으로 된 신윤복의 혜원전신첩 NFT를 발행하기 위해서는 4억 화소 초정밀 촬영 등 현존 최고 기술력으로 기록하는 작업이 수반된다"며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뛰어넘어 원본에 가장 가까운 문화유산을 감상하는 디지털 기술을 시도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훈민정음 해례본의 NFT 판매도 전 관장이 주도한 바 있다.
대구간송미술관은 서울의 간송미술관과는 차별화된 기능을 선보이게 된다. 1938년 서울 성북구에 '보화각'이라는 이름으로 문을 연 간송미술관은 연구활동과 교육, 봄·가을 정기전에 치중하고, 경북 안동의 도산서원 형태로 건립된 대구간송미술관은 재단 소장품뿐만 아니라 국내외 다양한 콘텐츠들을 기획전과 상설전 형태로 전시하게 된다.
두 간송미술관의 관장을 겸직하게 된 그는 특히 반세기 이상 보유하고 있는 지류문화유산(전적, 회화, 고문서)의 수리복원기술과 노하우를 활용해 대구간송미술관이 '영남권 지류문화유산 수리 복원 허브'가 될 수 있도록 전문인력도 배치했다. 그는 "종이류는 다른 문화재와 달리 조명에 노출되는 시간이 길어지면 치명적"이라며 "훈민정음 해례본과 미인도도 이번 전시가 끝나면 한동안 빛이 없는 수장고에서 휴식을 취하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전 관장은 "대구는 국채보상운동과 2·28민주운동 등 나라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극복하려는 힘이 강한 곳이고 근대부터 지금까지 문화예술이 살아 숨 쉬는 도시로 간송미술관의 최적지"라며 "간송께서 추구하신 문화보국정신을 실천하는 공간이 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다짐했다.>
지하 1층 지상 3층 연면적 8,003㎡ 규모의 대구간송미술관은 개관 이후 많은 분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것 같다. 한 달만에 방문 관람객 7만여 명을 돌파했을 정도였으니까.
서울에서 살고있는 희륜씨가 희경씨와 만나 제일 먼저 약속장소에 도착해서 우리 일행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대구간송미술관의 하늘이 참 맑고 푸르러 좋다. 우리의 방문과 만남을 환영하고 있는 듯했다.
행서 또는 초서라서 읽기조차 어려운 글씨다.(盤礡胸中萬化春, 筆端能與物傳神), 뜻은 그 옆에 적혀 있다. '화가의 가슴 속에 만 가지 봄 기운 일어나니, 붓끝은 능히 만물의 초상화를 그려내 준다.'
<미인도美人圖>, 신윤복, 비단에 색, 114.0×45.5센티
조선 후기의 화가 신윤복이 그린 대표적 미인도. 가체라 불리는 큰 가발을 쓰고 다소곳이 서 있는 미인의 전신상이다. 풍성한 치마에 비해 상의는 몸에 꼭 끼는 짧은 저고리를 입었다. 옷고름과 여기에 붙은 노리개를 두 손으로 만지고 있다. 머리는 다소 숙이고 있으며, 어깨는 좁고 풍성한 치맛자락 아래 맵시 있는 버선발 한쪽이 드러나 있다.
넓은 이마, 가는 눈썹, 고운 코, 흔히 앵도 같다고 하는 작은 입술, 예쁜 귀 뒤로 늘어진 섬세한 귀밑머리 등 조선시대의 유순한 미인의 전형을 보여준다. 여기에 연녹색 치마색을 바탕으로 청색, 홍색 등을 적절하게 가미하여 우아하고 절제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화면 왼쪽 상단에는 신윤복 자신이 적은 화제가 있는데, "가슴속에 서린 만 가지 사연을 붓끝으로 능히 전신했는가?"라고 묻고 있다. 질문 형식이지만 자신의 그림 속에서 그 사연을 느껴보라는 화가의 자부심이 표현되어 있다.
<훈민정음訓民正音>, 세종명찬, 1446년, 목판인쇄, 23.3*16.6센티
'만약 간송이 훈민정음 해례본을 놓쳐서 국외 반출됐다면 어떻게 됐을까. 최근 세계를 누비는 한류의 흐름을 보면 그 핵심에 한글이 있다. 훈민정음의 위대함을 하루하루 피부로 느끼는 요즘, 간송의 선구안과 용기가 더 빛을 발한다. 간송과 간송미술관은 몰라도 훈민정음 해례본이 값어치를 따질 수 없는 우주적 문화유산임은 대부분 국민이 안다.'
서문에는 세종이 훈민정음을 만든 목적과 함께 새 글자 창제의 바탕을 이룬 정신이 나타나 있다. 즉 첫째 우리가 중국 글자를 빌려서 우리말을 적고 있으나 이는 중국말을 적는 데 맞는 글자이므로 우리말을 적는 데 맞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하고, 우리말을 적는 데 맞는 글자를 만들기 위해 새 글자를 만든다고 한 점에 민족자주정신이 강하게 드러나 있다. 둘째, '어린(어리석은) 백성'이란 일반 백성을 가리키는 말로, 한자를 배울 수 없었던 사람들을 위해 배우기 쉬운 글자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민본정신이 나타나 있음을 알 수 있다.
<훈민정음> 해례본에 나타난 '중국(中國)'이라는 명칭에 대해서는 역사적 배경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중국'이라는 이름은 주나라 때 편찬된 <시경(詩經)>에 처음 등장한 이후, 초기에는 현재 중국 대륙의 중심 지역인 주나라의 수도 일대를 의미하는 말로 사용되기 시작했고, 이후 황하 유역을 중심으로 한 여러 국가를 두루 일컫는 말로 사용되어 왔다. 때로는 이 지역을 지배하는 나라들이 스스로 가장 중심이 되는 나라임을 드러내기 위해 '중국'이라고 일컫기도 했다. 하지만 1912년 신해혁명 이전까지 어느 왕조에서도 '중국'을 공식 국호로 택한 적은 없다.
그러나 고려와 조선 시대에도 당시 황하 일대를 지배했던 나라들에 대한 관습적인 호칭에 따라 그 여러나라를 두루 '중국'이라고 불러왔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 건국 초기 태조 때의 기록에 당시 명나라 수도 일대를 '중국'이라고 기록한 자료가 있는 것으로 보아, 공식적으로도 이 지역 일대에 명멸한 한자 문화권의 국가들을 두루 '중국'이라고 불러왔던 것을 알 수 있다.
<훈민정음> 해례본에서 이 나라들을 '중국'이라고 부른 이유는 한자가 본디 중국말을 쓰는 사람(즉 창제 당시의 국명인 명나라뿐 아니라 하, 은, 주 나라까지 거슬러 올라가 중국어를 사용해왔던 사람들)이 쓰던 문자임을 드러내기 위해서 이들을 모두 아우르는 역사적인 명칭으로 택했던 것으로 해석된다. 즉 해례본에서 '중국'이라고 표기한 의미는, 한자는 중국어를 쓰는 사람들에게 맞는 글자이므로, 한국어를 쓰는 사람들에게 적합한 새로운 글자가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 것이다.
<산수화조도첩山水花鳥圖帖>, 17세기에 활동한 화가 허주虛舟 이징(李澄 1581~1653)이 그린 것으로 총 10폭의 산수화와 각각의 그림에 대한 제화시, 8폭의 화조화가 수록된 시화첩이다. 특히 이징의 그림과 함께 왕실의 인척을 비롯한 명문 사족들의 글이 수록된 점에서 의미가 크다.
소나무에 앉아 물음 감상하다(좌송완수座松翫水)
거문고 들고 대에 오르다(휴금등대携琴登臺)
가을날 맑은 시내에 배 띄우다(청계추범淸溪秋泛)
눈 쌓인 산에서 매화를 찾다(설산심매雪山尋梅)
첩의 제목인 '삼청三淸'은 세 가지 맑은 것, 즉 매화, 대나무, 난초를 의미하며 모두 군자의 덕성을 상징하는 식물들이다. 이정李霆은 그중에서도 특히 대나무를 잘 그렸는데, 그의 그림은 조선시대 묵죽화의 기틀이자 모범으로서 후대의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금보琴譜>, 안상(安瑺 1511~?), 1572년, 목판인쇄, 28.0*22.4센티
개인이 펴낸 거문고 악보 가운데 가장 오래된 책이다. 1572년 거문고의 명인 안상이 간행했기 때문에 '안상금보安瑺琴譜' 또는 '금합자보琴合字譜'라고도 한다. 안상은 영천군수와 덕원부사를 지낸 인물로, 고려에 성리학을 최초로 들여와 보급한 문성공 안향安珦의 후손이다.
《동국정운 (東國正韻)》, 세종명찬, 1448년, 활자인쇄, 23.4*15.8센티
동국정운은 한자음을 바로잡아 통일된 표준음을 정하려는 목적으로 간행된 책이다. 1448년(세종 30년)에 반포된 한국 최초 표준음에 관한 책이자 운서(韻書)이다. 한자음을 훈민정음으로 표기하였다. 그 시대에 통용되던 한자음을 충분히 고려치 않았기 때문에 국가적인 장려에도 불구하고 실용성이 떨어지는 관계로 잘 사용되지 않다가 16세기 들어서는 '동국정운식 한자음'을 더 이상 사용하지 않았다.(인터넷 자료 인용)
<동래선생교정북사상절東萊先生校正北史詳節>, 여조겸呂祖謙(1137~1181), 활자 인쇄, 23.4*15.2센티
이 책은 중국 남송의 문인이자 학자인 동래 여조겸(1137~1181)이 중국의 남북조시대 중 북쪽 지역 국가의 역사를 기록한 북사 중에서 중요 내용을 상세하게 서술하고, 그렇지 않은 부분은 줄여서 쓴 책이다.
1403년 조선 최초로 만든 금속활자로 사용하여 인쇄한 책이란 점에서 가치가 크다. 이 활자(계미자)는 유교 경전과 역사서의 강론을 담당하던 관청인 경연청에 소장되어 있던 고대 중국의 경전 글자체를 바탕으로 수십 만 자가 만들어졌고 30년 남짓 사용되었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된 서양 최초 금속활자인 쿠텐베르크 42행 성경보다 30여 년 앞서 제작되었고 조선 초기 금속활자 인쇄술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라는 점에서 그 가치가 매우 크다.
<황정환아黃庭換鵝>, 황정경을 거위와 바꾸다, 119.0*52.6센티
그림 안에는 가리개를 등지고 앉은 왕희지가 경전을 쓰고 도사와 차 끓이는 동자가 이 순간을 조용히 지켜본다. 연못에는 또 다른 주인공인 흰 거위가 노닌다. 주변에는 오동나무를 중심으로 파초와 소나무, 괴석 등이 어우러져 운치를 더하는데 여타의 그림보다 이 원림의 묘사에 정성을 쏟았음을 알 수 있다.
<융봉취하融峰醉下>, 축용봉에서 취해 내려오다. 119.0*52.6센티
이 그림은 성리학의 영향으로 조선에서도 존경받았던 남송의 학자 주희가 호남성에 있는 형산의 축융봉에 올라 호탕하게 시를 읊은 일화를 그린 작품이다.
<서호방학西湖放鶴>, 서호에서 두루미를 풀어놓다. 119.0*52.6센티
북송대 시인 임포林逋(967~1028)는 황주의 서호 인근에 홀로 지내며 매화를 아내로 두고 학을 아들로 삼았다 하여 매처학자梅妻鶴子로 불렸다. 거처에 손님이 찾아오면 동자가 학을 날려 이를 본 임포가 집으로 돌아왔다는 신비한 일화도 전해진다. 임포와 같은 은둔 선비들의 삶은 이들이 지은 시를 통해 문학으로 애호되다 점차 주요 장면이 그림으로 그려져 유행했다.
<무이귀도武夷歸棹>, 무이산에서 노 저어 돌아오다. 119.0*52.6센티
주희朱熹가 무이산에서 제자를 가르치고 자연을 벗 삼았던 일화를 그린 작품이다. 화면에는 기암절벽을 끼고 건계를 빠져나가는 주자 일행이 그려져 있다. 굽이치는 급류 때문에 분주해진 사공들의 모습과 달리 배 안에서 밖을 응시하는 주희의 모습은 고요하다.
<과로도기果老倒騎>, 장과 노인이 거꾸로 타다. 비단에 엷은 색, 134.6*56.6센티
화면에는 나귀를 거꾸로 탄 장과가 등장한다. 당대의 인물인 장과는 흰 나귀를 타고 하루에 수만 리를 갈 수 있었는데, 잠시 쉴 때는 나귀를 접어 상자나 호리병에 넣어 두었다고 한다. 이 화면에서 장과는 장생의 비결이 적혔을 법한 서책을 든 채 어느 구절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다.
<마상청앵馬上聽鶯>, 말 위에서 앵무새 소리 듣다. 종이에 엷은 색, 117.2*52.0센티
풍속화는 물론 어진御眞(임금의 초상)을 비롯해 산수, 인물, 화조, 불화 등 여러 화목에 뛰어났던 김홍도는 화원으로서의 유명세로 인하여 글씨에 능했던 문인 소양의 화가였다는 사실이 덜 알려진 듯하다. 선비를 주인공으로 한 사인 풍속화를 대표하는 <마상청앵>은 자연과 교감하는 인물을 서정적으로 담아낸 걸작이다.
그림 상단의 시는 동료화원인 이인문이 지은 것이며 글씨는 김홍도가 직접 썼다. 평소 김홍도의 작은 행서 글씨가 "고상하고 아름다운 것이 여리 풀에 작은 새 그림 같다."고 했던 홍길주의 말처럼 그림과 한 몸인 듯 조화롭다 - 이랑
<해악전신첩海嶽傳神帖>,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의 대가 겸재 정선鄭敾(1676~1759)이 72세에 그린 화첩이다. 금강산을 중심으로 강원도와 동해안 일대를 그린 21폭의 그림과 41편의 시문이 총 76면에 걸쳐 실려있다. 삼부연, 피금정 등 금강산에 들어가기 전 거치는 명승지를 시작으로 단발령, 장안사, 만폭동, 불정대 등 내금강과 외금강의 명소인 동해에 접한 해금강의 여러 절경까지 망라하고 있다.
<해산정海山亭>, 33.5*25.4
<만폭동萬瀑洞>, 32.0*24.8
<장안사비홍교長安寺飛虹橋>, 32.0*24.8
<단발령망금강斷髮嶺望金剛>, 단발령에서 금강산을 바라보다. 32.2*24.4센티
<경교명승첩 (京郊名勝帖>
비단 바탕에 수묵담채. 각 폭은 세로 20.8~31㎝, 가로 16.8~41㎝. 간송미술관 소장. 1권으로 되어 있었으나 1802년 2권으로 개첩되었다. 상첩에는 정선이 양천(陽川: 지금의 서울 강서구 가양동·등촌동 일대) 현령으로 재임하던 1740~41년에 친구 이병연(李秉淵)과 시와 그림을 서로 바꿔보자는 약속을 위해 그렸던 양천팔경을 비롯하여 한강과 남한강변의 명승도들이 수록되어 있다. 하첩은 상첩보다 10여 년 뒤에 그려진 것으로, 서울 주변의 실경도들과 함께 타계한 이병연을 회상하며 양천에 있을 때 그로부터 받은 시찰(詩札)을 화제로 한 그림들이 실려 있다. 상·하첩에 모두 33점이 수록되어 있으며 파묵(破墨)·발묵(潑墨)·훈염법(暈染法)에 토대를 두고 발전된 그의 60대 후반에서 70대 중반의 독창적인 진경산수의 특색과 변모의 과정을 살펴보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인터넷 자료 인용)
<독백탄獨栢灘>, 20.8*31.2센티
이 곳이 남.북한강이 물머리를 맞대는 양평군 양서면 양수리의 전경이라는 것을 한눈으로 알아 볼 수 있다. 물 안으로 밀고 들어온 긴 섬이 중앙에 가로 놓여 남.북한강을 갈라 놓았다. 섬 위로 나 있는 강줄기가 북한강이라는 것은 수종사가 거의 산 상봉 가까이에 있는 운길산이 그 뒤로 보이는 것만으로도 단정지을 수 있다. 더구나 그 좌측으로 이어진 예봉산과 운길산 산자락이 강으로 달려들어 만들어 놓은 긴 반도 모양의 남양주군 조안면 능내리의 지형에 이르면 이곳이 양수리 일대라는 것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게 된다. 그렇다면 능내리의 마재 끝자락에 해당하는 억센 바위 봉우리 앞의 긴 섬이 바로 쪽자섬이고 그 사이를 지나는 여울목이 바로 쪽잣여울, 즉 독백탄이라 할 수 있겠다. (인터넷 자료 인용)
<광진廣津>, 20.8*31.2센티
현재 워커힐호텔과 워커힐 아파트 등이 들어서 있는 서울 광진구 광장동 아차산 일대의 모습이다. 이 곳에 한강을 건너는 가장 큰 나루 중 하나인 광나루가 있었다. 광나루가 언제부터 이 곳에 있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의정부 동두천 쪽에서 내려와 한강을 건너 광주 여주 충주 원주로 가려면 이 나루를 건너는 것이 가장 빠른 지름길이니 우리 역사가 시작될 때부터 이 나루도 함께 생겨났을 듯하다. 더구나 이 나루 건너편이 백제의 옛 도읍지인 하남위례성으로 추정되는 풍납토성임에랴! (인터넷 자료 인용)
<공암층탑孔巖層塔>, 23.0*29.2센티
공암(孔巖)은 양천(陽川)의 옛 이름이다. 신라 경덕왕 16년(757) 주군현(州郡縣)의 이름을 한자식으로 고칠 때 이렇게 바꾸었다. 고구려가 백제로부터 빼앗은 뒤에는 제차바위(齊次巴衣)라 했다. 이런 이름은 모두 한강 속에 솟아 있는 세 덩어리의 바위로부터 말미암았다. 차례로 서 있는 바위란 뜻으로 제차바위라 했고 구멍바위라는 의미로 공암이라 했던 것이다. (인터넷 자료 인용)
<행호관어杏湖觀漁>, 행호에서 고기잡는 것을 보다. 23.0*29.2센티
한강은 하류에 다다르면 물의 양이 늘고 강폭도 넓어져 덕양산 근처 행주에 이르러서는 호수처럼 보인다고 한다. <행호관어>는 그 일대에서 벌어지는 고기잡이 풍경을 그린 그림이다.
<촉찬도권蜀棧圖卷>, 심사정沈師正(1707~1769), 1768년, 종이에 엷은 색, 58.0*818.0센티
전례없이 큰 화폭에 장대한 촉산의 경관을 담은 이 작품은 현재 심사정(1707~1769)이 말년에 그린 기념비적 걸작이다. 이백의 촉도난 시는 오래 전부터 그림의 소재였지만 한국에서는 심사정이 그린 몇 점 외에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화권의 길이가 818센티미터에 달하는 규모로 이를 본 오세창은 안견의 <몽유도원도>나 이인문의 <강산무진도>와 비교하며 극찬했다. 흔히 비견되는 강산무진도는 인간이 살아가는 산수 낙원을 그린 것이라면 <촉잔도권>은 끝없이 이어진 위험한 길을 인생에 비유한 작품이다. 그림에서 고난은 험준한 바위산과 끊어졌다 이어지는 길로 드러나는 벼랑끝 나무다리인 잔도가 여정의 위태로움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림의 오른쪽에서 시작된 여정은 암산과 협곡을 지나 나그네가 도착하게 될 도회지 풍경을 끝으로 마무리된다.
심내영이 쓴 발문,
<긍재전신첩兢齋傳神帖>, 김득신金得臣(1754~1822), 종이에 엷은 색, 31.7*33.4센티(표지)
조선 후기 화원화가 긍재兢齋 김득신金得臣(1754~1822)은 김홍도 신윤복과 함께 조선시대 3대 풍속화가로 알려져 있다. 그는 유서 깊은 화원가문인 개성 김씨 집안의 일원으로 백부 김응환, 동생 김석신, 아들 김하종 등이 모두 유명한 화가였다. 일찍부터 정조대에 차비대령 화원으로 활약했으며 도식인물과 영모 외에도 풍속화에 뛰어났다.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긍재전신첩>은 풍속도 8점으로 이루어진 화첩으로 고양이의 소동을 그린 <야묘도추>를 비롯해 투전판을 그린 <밀회투전>, 짚신 삼는 농촌 풍경의 <성하직구>, 낮잠 자는 목동을 그린 <목동오수>, 고기잡이 어부를 그린 <주중가효>, 장기 두는 승려를 그린 <송하기승>, 강변에서 회식하는 <강상회음>과 대장간의 풍경 <야장단련> 등 김홍도가 그리던 소재를 새롭게 번안하는 한편 순간적인 동작이나 섬세한 정서를 가미해 자신만의 개성을 표출했다. 여기에 해학적 분위기를 더하여 김홍도에 못지않은 역량을 발휘하였다.
<성하직구盛夏織屨>, 한여름의 짚신삼기 22.4*27.0
무더위가 한창인 여름날, 사립문 앞에 자리를 펴고 짚신 삼기에 한창인 농촌 풍경이다. 할아버지 등에서 짚신 삼는 아버지를 바라보는 손자, 혀를 빼고 더위를 식히는 개, 웃통을 벗어젖힌 이들의 모습에서 여름을 나는 서민들의 생활정서가 생생하다.
<야장단련冶匠鍛鍊>, 대장장이의 쇠매질 22.4*27.0
김득신의 대표작인 이 작품은 대장장이들의 불꽃 튀는 노동을 실감나게 표현한 그림이다. 망치질에 여념이 없는 인물과 바닥에 떨어진 검은 재, 붉은 불똥 등 대장간의 내부를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주중가효舟中佳肴>, 배 안의 좋은 안주 22.4*27.0
아들과 함께 고기잡이에 나선 어부의 모습을 담았다. 아버지로 보이는 사공은 삿대를 잡았고 배 안에 아들은 물고기를 손질하고 있다. 솥에 넣어 조리할 물고기가 여러 마리인 것을 보니 이들 부자는 낚시를 마치고 돌아가려는 듯한데 어부는 문득 새소리를 들은 탓인지 멈춰서 돌아본다.
<송하기승松下棋僧>, 소나무 아래에서 장기 두는 승려
더운 날씨에 염주를 두르고 고깔까지 쓴 스님은 무엇이 못마땅한지 떨떠름한 표정인데 그가 기댄 소나무는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그림의 운치를 더해 주었다. 인물을 묘사한 간결한 필치는 김홍도의 영향이나 대상물을 확대해 현장감을 고조시키는 수법은 김득신 화풍의 특징이다.
<야묘도추野猫盜雛>, 들고양이 병아리를 훔치다. 22.4*27.0
김득신 풍속화 중에서도 백미로 꼽히는 그림이다. 치밀한 구도와 섬세한 얼굴 묘사, 활달한 운동감은 고양이와 인물 사이의 긴장감을 한층 고조시키고 보는 이를 웃음짓게 한다.
<밀희투전密戱鬪牋>, 몰래 투전을 즐기다. 22.4*27.0
네 명의 남자가 투전에 몰입하고 있는 모습을 그렸다. 투전은 전통적인 실내 놀이로, 패의 끝수로 승부를 겨루는 노름의 일종이다. 오른편에 연두빛 중치막을 입은 사내는 초상화를 보는 느낌이 들 만큼 얼굴표현이 섬세한데 이는 김득신만의 개성이다. 안경을 쓴 인물이 주저하며 패를 내놓자 노름판에는 술기운에 승부욕이 더해져 일시 긴장감이 감돈다.
<쌍륙삼매雙六三昧>, 쌍륙놀이에 빠지다. 28.2*35.6
배자 차림에 소매를 걷어붙인 사내는 답답한 마음에 탕건도 벗어던지고 담뱃대를 입에 물었는데 그에 비해 몇 개의 말을 이미 회수해 놓은 여성은 여유가 있어 보인다. 길 가던 유생조차 이 재미에 빠져 넋을 잃었고 중앙의 여인은 대국의 심판인 양 꼿꼿이 앉아 승부가 기울어 가는 놀이판을 지켜 본다.
<삼추가연三秋佳緣>, 가을에 맺은 아름다운 인연. 28.2*35.6
국화밭에 마주앉은 한 쌍의 남녀가 인연을 맺는 장면이다. 깊어가는 가을의 아름다운 인연을 뜻하는 이 그림은 화면에 중심인물들과 국화만이 강조되었다.
<월하정인月下情人>, 달 아래 정 깊은 사람들. 28.2*35.6
눈썹달이 뜬 깊은 밤, 등불을 든 젊은 선비가 한 여인을 만나고 있다. 이들이 어떤 사이인지는 알 수 없으나 남의 눈을 피해 은밀히 만난 것은 분명해 보인다. 호롱불을 든 사내는 왼손 허리춤에서 무엇을 꺼내는 자세로 섰는데, 자주색 깃의 저고리를 입고 옥색 쓰개치마로 얼굴을 가린 여인은 수줍은 듯 고개를 숙이고 있다. 한편 남자의 발이 오른쪽을 향해 있고 갓끈도 어깨 너머에 있어 은밀한 가운데 서두르는 기색이 역력하다. 화제에 '달빛이 침침한 한밤중에, 두 사람의 마음은 두 사람만이 안다.'라고 하였으니 이들의 애틋한 상황을 잘 말해준다.
<야금모행夜禁冒行>, 야간 통행금지를 무릅쓰고 가다. 28.2*35.6
겨울밤, 도성 내 통행 금지 시간의 풍경이다. 검문에 나선 순라꾼은 도성을 돌며 위반자들을 잡아 가두거나 곤장을 쳤다. 그러나 동자를 앞세워 여인과 함께 어디론가 야행 중인 양반은 이에 구속받지 않는 신분인지 고개를 살짝 숙여 양해를 구한다. 뒤에서 이들을 불러 세운 순라꾼은 여인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위법함을 가볍게 질책하는 듯하다. 누비솜바지에 자주색 토수를 낀 기녀는 믿는 구석이 있는지 허리에 손을 얹고 담배를 피우며 여유만만하다.
<단오풍정端午風情>, 단오날의 풍속 정경, 28.2*35.6
신윤복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단오풍정>은 단오날의 생활풍속을 담았다. 신윤복은 여가를 즐기는 여성들의 활달한 모습을 소재로 삼은 경우가 많다. 그림에서 시선을 압도하는 인물은 단연 그네 뛰는 여인으로 노란색 저고리와 다홍색 치마에 자주색 신을 멋스럽게 신고 있다. 뒤편에 머리 손질하는 여인은 목욕을 마친 것인지 커다란 가체를 풀어놓고 몸단장 중이다. 개울가에서는 목욕이 한창인데 나신을 드러낸 채 자연스럽게 서 있는 여인은 언덕 위의 인물들과 호응을 이룬다. 왼편 상단에서 이들을 훔쳐보는 동자승 두 명이 그림에 해학미를 더하고 있다.
<청풍계淸風溪> 1739년, 비단에 엷은 색, 133.0*58.8
인왕산 동쪽 기슭에 있는 청풍계는 병자호란 때 순국한 김상용金尙容(1561~1637)이 고조부의 집터에 조성한 별장이다. 이후 장동김씨 집안이 대대로 거주하는 장소가 되었고 주변 경관이 빼어나 한양의 명소로 자리잡았다. 정선은 단독 작품 또는 장동팔경의 한 장면으로 이곳을 자주 그렸다.
<여산초당廬山草堂>, 정선鄭敾(1676~1759) 조선 18세기, 비단에 색, 125.5*68.7
여산에 은거하던 당나라의 시인 백거이白居易(772~846)의 고사를 주제로 한 그림이다. 여산은 중국 강서성의 산으로, 주나라 때 광속이라는 인물이 왕의 부름을 피해 오두막을 짓고 은거하다가 신선이 되었다고 하여 광려산 또는 여산이라고 불렀다. 백거이는 벼슬에서 좌천되자 이곳에 작은 초당을 짓고 지냈다. 그가 남긴 <초당기草堂記>에는 대나무와 소나무, 개울과 하얀돌로 만든 다리, 연못 등 초당의 소박하고 아름다운 경치가 묘사되어 있다.
<풍악내산총람楓嶽內山總覽>, 정선 1740년경, 비단에 색, 100.8*73.8센티
가을 내금강의 아름다운 풍경을 한 폭에 담아낸 작품이다. 정선은 금강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초창기부터 이와 같은 전도全圖 혹은 총도總圖 형식의 작품을 종종 남겼는데, 그 중에서도 이 그림은 규모와 표현, 세밀함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이다. 이 그림이 다른 전도류 작품보다 뛰어난 점은 세밀함에 있다. 차분하고 단정한 필치로 그린 산과 바위, 사찰의 건물들은 가까이 보아도 어느 한 구석 허술한 점이 없다. 주산이 비로봉을 비롯하여 그 아래 뾰족하고 날까로운 봉우리들이 줄지어 서 있는 중향성과, 네모진 바위가 층층이 쌓인 금강대 등 봉우리와 바위의 생김새는 특징적으로 잘 표현되어 있다. 계곡을 따라 올라가는 동선을 확실하게 표현하고, 40곳이 넘는 장소에 일일이 이름을 적어서 최대한 많은 명승과 명소를 보여주려고 했음을 알 수 있다.
무르익은 실력과 사용된 인장으로 보아 64세 경에 그려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화면을 꽉 채우는 탄탄한 구성력과 세밀하고 정확한 묘사, 화려하고 장식적인 채색 등 정선의 금강산 그림에서 볼 수 있는 장점과 특색을 모두 갖추고 있는 명품이다.- 허융
혜원 신윤복의 그림을 오랫동안 감상하는 분들이 너무 많아서 세 작품은 사진에 담지 못했다. 멀리서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계변가화>, <문종심사>, <주유청강>가 그것이다.
전시실의 작품을 감상하기 전에 10시 30분부터 시작되는 도슨트의 설명을 듣고 감상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어떤 작품(유물)이든 그 작품에 대한 배경지식을 갖고 다가서는 것과 아닌 것의 차이는 분명하고,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니까.
전형필全鎣弼 선생의 호인 '간송澗松'을 이렇게 멋진 공간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 같다. '간澗'이 뜻하는 물을 거울처럼 눕혀서 광활한 하늘을 품고 있고 '송松'이 뜻하는 저 소나무를 적절한 곳에 심어서 멋스러움을 더하고 있는 것 같다. 박물관 안의 창넓은 공간에 앉아서 내다볼 수 있는 최고의 눈맛을 잠시나마 느낄 수 있어서 좋다는 생각을 했고, 일제강점기 시절 우리 민족의 역사와 문호가 왜곡되고 단절될 위기 속에서 우리의 민족문화를 지켜내야만 한다는 확고한 신념으로 유출되는 우리 문화유산의 수집을 통한 나름대로의 독립운동을 펼치셨던 간송 전형필 선생을 다시금 우러러 보게 된다.
실감영상전시실은 초대형 파노라마 스크린을 통해서 대구간송미술관에 소장된 문화재들을 다양한 형태로 보여주는 장소인데, 비록 짧은 시간의 시청이지만 보는 이로 하여금 우리 문화재의 우수성을 부각시킴과 동시에 첨단 디지털 기술이 총망라되어 있음을 느끼게 해 주는 것 같다. 이곳의 독창성은 앞으로 대구간송미술관이 한국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명소가 될 수 있도록 하는데 크게 기여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난맹첩(蘭盟帖)>, 김정희金正喜(1786~1856), 종이에 먹 210*13.6
추사 김정희가 70여 년의 생애 동안 가장 많이 남긴 그림은 다름 아닌 묵란화墨蘭畵이다. 그간 난초 그림을 특히 좋아했던 이유는 자신이 추구했던 예술적 지향, 즉 그림이 이르러야 할 목표와 그것을 그리는 사람이 갖추어야 할 덕목을 쉽고 구체적으로 드러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두 폭의 그림으로 그런 뜻을 알아내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16편의 묵란화와 7편의 제발문이 총 23면에 걸쳐 수록된 난맹첩은 추사의 예술세계 전체는 아니더라도 묵란화를 중심으로 한 그의 작품세계를 깊게 들여다볼 수 있게 하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난맹첩은 상하 2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화첩의 그림과 글에는 추사가 추구했던 난 치는 법의 핵심을 담고 있다. 그중 김정희가 특히 강조했던 것은 글씨 쓰는 법에 따라 난을 그려야 한다는 것이다. 붓을 세 번 굴려 난잎의 굵기를 조절하는 삼전법(三轉法)이나 점과 삐침으로 단순하게 꽃을 표현한 점 등은 난멩첩에 적용된 서예적 법식이라 할 수 있다.
<적설만산積雪萬山>, 쌓인 눈 산을 덮다. 22.9*27.0
난맹첩의 첫 번째 그림이다. 짧은 잎의 춘찬이 무리 지어 자란 모습이 그려져 있다. 난잎은 짙은 먹의 붓을 급히 눌렀다가 짧게 뽑는 방식으로 그렸고, 꽃대와 꽃잎은 엷은 먹의 삐침과 점으로 간략하게 표현했다. 난초 아래 좁은 공간에 제시를 써 넣은 화면 구성 또한 무척 독특하다 하겠다. 인장(낙관) 역시 화면 구석에 치우치게 배치하여 넓은 여백을 마련하였다.
<세외선향世外仙鄕> 세상 밖 신선의 향기, 22.9*27.0
지초와 난초를 함께 그린 작품이다. 영지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진 지초는 신선의 풀이나 불로초로 여겨졌는데, 김정희는 마른 붓을 사용하여 간략한 형태로 그 모습을 그려냈다. 지초 옆 가늘고 성글게 그려진 난잎들 사이로는 옅은 먹의 꽃대와 여러 송이의 꽃이 눈에 띄게 자리잡고 있다. 예부터 깊고 그윽한 난의 향기는 군자의 고결함을 상징했다. 이 그림에서는 하나의 꽃대에 여러 개의 꽃을 피워내는 혜초를 그려 난향의 상징성을 더욱 강조하였다.
이 작품은 소재의 선택과 표현, 그리의 서체의 채용이 이르기까지 김정희가 난 그림을 통해 추구하고자 했던 예술적 지향을 잘 보여는 작품이다.
<국향군자國香君子>, 국향이며 군자다. 22.9*27.0
화면을 가로지른 두 줄기의 난잎이 가장 선명하게 눈에 들어온다. 화면 중앙에 옅은 먹으로 그려진 꽃들도 짙은 향기를 뿜는 듯하다. 두 개의 인장을 배치한 방식 또한 공교롭다.
<염화취실斂華就實>, 꽃을 거두고 열매를 맺다, 22.9*27.0센티
염화취실은 제사의 내용대로 <난맹첩> 상권에 실린 마지막 그림이다. 차분하며 단정한 필치로 여리고 가냘픈 잎과 두툼하고 풍성한 꽃을 그려 넣었다. 화려한 꽃이 결국 단단한 열매가 되듯이, 난을 그리는 다채로운 기법들도 결국은 난초의 본래 모습과 기운을 담아내야 한다는 뜻을 마지막 화폭에 담은 것이다.
<서결書訣>, 이광사李匡師(1705~1777) 1764년, 비단에 먹, 22.6*9.0센티
서결은 이광사가 전라남도 신지도에 유배 중인 1764년에 짓고 2년 뒤에 쓴 서예 이론서이다. 그는 이 책에서 중국 당송 시대 이후의 서예는 참고하지 말고 그보다 앞선 시기의 글씨체인 전서와 예서를 모든 서체와 필법의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동진의 왕희지 글씨는 이와 같은 서풍이 담긴 진품을 통해 배워야 한다고 하였다. 또 우리나라 서예가가 붓을 뉘여 쓰는 습관이 있으며 그 때문에 글씨의 먹색이 고르지 않다고 하였다.
<서원교필결후書員嶠筆訣後>, 김정희金正喜(1786~1856) 1844년, 종이에 먹, 23.2*9.2센티
서원교필결후는 이광사의 서예 이론서인 서결을 분석하고 비판한 글로서 김정희가 제주에 유배 중이던 1840년대에 지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김정희는 기록이나 사상, 서예를 포함한 미술 작품에 대해 역사적으로 고증하는 성과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인물이다. 이광사가 익힌 중국 동진의 왕희지의 글씨 다수가 위작이며, 한나라 이전의 글씨체인 전서와 예서를 배우기 위해 선택한 비석 역시 당시 것이 아니라는 주장은 모두 고증학에 기초한 것이다. 그는 당나라의 구양순 등이 남긴 비석 글씨에서 출발하여 왕희지의 서풍으로 다가가는 방식을 선호했다. 이는 당나라 이후의 글씨는 배우지 말라고 한 이광사의 주장과 정반대다. 이밖에 우리나라 서예가는 붓을 뉘어 쓰지 않았으며, 먹색의 차이는 필법이 아닌 묵법에 따른 현상이라고 하며 이광사의 논리를 반박했다.
<침계梣溪>, 김정희, 1852년, 종이에 먹, 42.8*122.7센티
크고 굵은 글씨로 쓰인 '침계梣溪' 두 글자가 화면을 꽉 채우고 있다. 침계는 김정희를 따랐던 문인 윤정현(1793~1874)의 호다. 두 사람의 집안은 정조(1752~1800)의 탕평책을 옹호하는 등 같은 정치적 계파에 속해 있었다. 윤정현은 김정희를 가까이서 보살폈으며 황초령에 있던 <신라진흥왕순수비>를 함게 연구하기도 했다. 이 작품은 그런 교분 속에서 탄생한 작품이다.
큰 글자 왼쪽에 쓴 작은 글씨는 글씨를 쓰게 된 사연이 빼곡히 적혀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 두 글자를 사람을 통해 부탁 받고 예서로 쓰고자 하였으나, 한비에서 첫째 글자가 없어서 감히 함부로 지어 쓰지 못하고 마음속에 두고 잊지 못한 것이 이제 이미 삽십 년이 되었다. 요사이 자못 북조 금석문을 많이 읽는데, 모두 해서와 예서의 합체로 씌어 있다. 수당 이래의 여러 비석들은 또한 그것이 더욱 심한 것이다. 그대로 그 뜻을 모방하여 써내었으니, 이제야 부탁을 들어 쾌히 오래 묵혔던 뜻을 갚을 수 있게 되었다. 완당이 아울러 쓴다.
<차호호공此呼好共>, 김정희, 종이에 먹, 각 135.7*30.3센티
김정희가 이근수에게 주려고 쓴 글씨이다. 같은 크기의 종이에 나란히 쓴 이 작품은 글씨 크기에 비해 획이 가늘고 글자 모양도 제각각인 것처럼 보인다.
"또 밝은 달을 불러 세 벗을 이루고, 매화와 같이 한 산에 머물기를 좋아한다"
(동인 인형에게 완당이 촉예법으로 쓰다)
<대팽고회大烹高會>, 김정희, 1856년, 각 129.5*31.9센티
김정희가 세상을 떠난 해인 1856년에 유치욱에게 주기 위해 쓴 글씨이다. 유치욱은 김정희의 제자인 강위(1820~1884)와 친분이 있는 인물이다. 흔한 종이가 아니라 금박이 뿌려진 냉금지를 사용한 점으로 보아 김정희가 꽤 신경을 쓴 듯하다. 고급스러운 종이에 비해 글씨체는 사뭇 다른 분위기다. 글씨의 내용은 두부나 오이처럼 흔하고 친근한 반찬이 최고의 음식이며, 부부와 자녀 그리고 손녀와 손자가 함께 모인 자리가 최고의 모임이라는 것이다. 그는 너무 흔해서 잊고 사는 일상에서 평온한 즐거움을 찾은 듯하다. 영조의 사위 집안 후손으로 부귀와 영화를 한껏 누렸으나 안동김씨 세력에 의해 두 번이나 유배를 겪은 후 김정희가 터득한 삶의 진리가 아닐까 생각된다.- 허용
<백자청화철채동채초충난국문병白磁靑畵鐵彩銅彩草蟲蘭菊文甁>, 18세기, 높이 42.3이 병은 그 동안 보아오던 조선시대 청화백자와는 달리 청화뿐만 아니라 붉은색의 동채, 검붉은색의 철채 등 다채로운 색을 사용했으며 양각으로 문양에 입체감을 더하고 있어 매우 이례적이다. 이 병에서는 3가지 색을 사용했으니 희소한 예이다.
국화와 난초는 사군자 중의 하나로 선비의 표상이고 나비는 80세의 장수를 상징하니 이 병의 주인은 사대부로 추정 가능하고 장수를 축하하거나 기원하는 의미가 담겨있다고 할 수 있다. 이 병은 조선 후기 백자에 대한 미감의 변화와 그에 따른 조선백자 기술의 절정을 볼 수 있는 귀한 유물이다. - 최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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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자사옹원인白磁司饔院印>, 18세기 후반, 높이 10.5센티
조선시대 왕실에서 사용하는 그릇은 사옹원의 분원에서 제작되었는데 사옹원은 궁 안에서 음식에 관한 일을 관장하던 중앙관청이다. 분원은 그에 속해 필요한 그릇을 제작하던 곳이었다. <백자사옹원인>은 사옹원의 인장으로 확인된 매우 드문 것이자 백자로 만들어진 유일한 예이기도 하다. 또한 분원에서 백자로 사옹원의 인장을 만들었으니 역사적 가치가 크다.
현전하는 조선시대 인장들은 주로 금속이나 돌, 나무로 되어있는 것들이 많고 크기도 <백자사옹원인>보다 작다. 그에 비해 <백자사옹원인>은 일반 인장들보다 크기도 클 뿐만 아니라 백자로 제작된 드문 예여서 미술사적 의의가 크다.
<분청사기박지철채연화문병粉靑沙器剝地鐵彩蓮花文甁>, 15세기, 높이 20.0센티
세련된 정교함보다는 분청사기 특유의 도탑고 순한 멋이 있는 병이다. 바같으로 벌어진 구연부에서 안쪽으로 조이는 듯한 짧은 목을 지나 아래쪽으로 갈수록 부풀어 오르며 둥근 물방울 형상의 몸체를 하고 있다. 아담한 크기의 병이지만 흘러내리는 듯한 몸체의 윤곽선에서 부드러운 곡선미가 돋보인다.
<분청사기상감모란문합粉靑沙器象嵌牡丹文盒>, 15세기, 높이 15.0센티
<백자박산향로白磁博山香爐>, 12세기, 높이 8.0센티
<청자상감포도동자문매병靑磁象嵌葡萄童子文梅甁>, 13세기 후기, 높이 42.4센티
<청자상감운학문매병靑瓷象嵌雲鶴文梅甁>, 13세기, 높이 41.7센티
고려상감청자를 대표하는 유물이다. 이 매병은 일본 골동상에게서 서울의 기와집 20채 값에 해당하는 돈을 주고 샀다고 한다. 이 매병은 고려청자 매병 중 가장 완벽한 형태미를 갖고 있으며 전면에 시문된 운학문은 상감의 대표적인 문양으로 알려져 있다.
<청자상감연지원앙문정병靑磁象嵌蓮池鴛鴦文淨甁>, 12세기 후기, 높이 37.0센티
<청자모자원형연적靑磁母子猿形硯滴>, 12세기 중기, 높이 9.9센티
<청자오리형연적靑磁鴨形硯滴>, 12세기, 높이 8.1센티
<청자양각도철문정형향로靑磁陽刻饕餮文鼎形香爐>, 12세기, 높이 17.0센티
<청자기린유개향로靑磁麒麟有蓋香爐>, 12세기 전기, 높이 19.7센티
고려청자 향로의 뚜껑에는 기린 이외에도 사자, 용, 오리, 원앙 등의 다양한 동물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향로의 수컷을 기, 암컷을 인이라고 부르며, 기린의 뿔은 끝이 자신의 살이나 갈기에 감싸여 있기 때문에 상대방에게 상처를 입히는 일이 없다고 한다.
<청자음각환문병靑磁陰刻環文甁>, 12세기, 높이 22.0센티
중국 고대 청동기 형태를 띤 고려청자다. 단정한 몸체에 감도는 순수하고 그윽한 비색과 얇게 빚어낸 솜씨는 고려 왕실과 귀족들이 사용했던 최상급 청자의 기품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계미명금동삼존불상입상癸未銘金銅三尊佛入像>, 563년, 높이 17.7센티
삼존불입상의 광배 뒷면에는 짤막한 글이 새겨져 있어 '보화'라는 인물이 계미년(563년)에 돌아가신 아버지를 위해 이 불상을 만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마도 6세기경 삼국에는 이이 돌아가신 부모와 형제를 위해 그들이 고통에서 벗어나 좋은 곳에 태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불상을 만드는 문화가 널리 퍼져 있던 것으로 보인다.
<금동삼존불감金銅三尊佛龕>, 고려11~12세기, 전체 높이 17.8센티, 불상 높이 9.7센티
작은 전각 안에 섬세하게 만든 부처와 보살이 모셔져 있다. <금동삼존불감>은 난간을 두른 사각의 기단 위에 불상이 모셔져 있으며, 그 위를 불당 형태의 감실로 덮은 형태이다. 불당의 앞과 양쪽에는 문이 있어 안에 모셔진 불상을 밖에서도 볼 수 있어, 실제 불당 앞에 앉은 듯하다. 이처럼 불상을 모시기 위해 작은 규모로 만든 공간을 불감이라 하며, 불상과 함께 건축양식을 살필 수 있어 미술사 문화사 측면에서 중요하다.
대구간송미술관에서 두세 시간 안복의 즐거움을 누린 후, 동기들끼리 점심식사를 하면서 이야기꽃을 피웠다. 누군가 드디어 사위를 본다는 소식도 들렸다. 그때 또 오늘처럼 모임을 가질 수 있으리라.
정섭이와 신숙씨는 개인 사정상 먼저 가고 8명은 남아 오랜만의 정겨운 나들이를 시작했다. 그냥 헤어지기 아쉬웠던 것이다. 올림픽 경기장 뒤편의 청계사 방향으로 두어 시간 걸으면서 산책을 하기로 했다. 해숙, 연중, 정민 등 3명은 매주 수요일마다 만나서 걷기운동을 하고 있다는 좋은 소식을 듣기도 했다.
네 명씩 마주앉아 동기들 중에서 제일 장가를 잘 간 친구와 시집을 제일 잘 간 친구가 누구일까 여론조사를 했는데 결과는? 전자는 정윤이었고 후자는 연중이었음을 밝혀 둔다.^^
희륜씨는 늘 그랬듯이 동기들의 먹을 거리를 챙겨주고는 환한 웃음과 따스함을 선물하고 서울행 KTX를 탔다. 동기회장 해숙 회장님의 동기 사랑에 감사하면서 우리도 악수를 나누면서 헤어졌다. 내년 3월에 서울에서 동기모임을 갖기로 하고.^^
강릉 여행 1박 2일 (0) | 2024.11.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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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을저수지 둘레길 (0) | 2024.11.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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