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시 수성구 범물동에 있는 용학도서관에서 오후 4시 30분부터 배창환 시인과 만남이 시작되었다. 객석에는 배창환 시인과 인연이 깊은 분들 50여 명 정도가 주최측에서 제공한 자료를 조용히 살펴보고 있었다. 오늘 나의 임무는 배창환 시인의 시 <서문시장 돼지고기 선술집>을 관객들 앞에서 폼나게 낭송하는 것, 오늘의 행사 장면을 순간순간 사진으로 기록하는 것이다. 전자는 시인께서 직접 내게 부탁한 것이고, 후자는 자발적인 내 마음의 작용일 뿐이다. 둘 다 여의치 않을 수 있어서 자못 긴장된다.
행사는 김수상 시인의 차분한 진행으로 시작되었고 먼저 윤일현 시인께서 시‘라키비움’을 소개하는 시간이 주어졌다. 2019년 8월, 지역 시인들을 위한 공간을 만들어야겠다는 취지에서 용학도서관장을 비롯한 몇몇 시인들이 뜻을 모아 자연스레 시작했고 그간 코로나로 인해 진행상 어려움이 많았으나, 사실상 올해부터 본격적으로 행사를 재개할 수 있었다는 말씀이다. 분기별로 1명씩, 1년에 4명의 지역에서 활동하는 시인들을 조명하게 되는데 올해는 배창환 시인이 첫 테이프를 끊은 셈이다.
초대 손님 김윤현 시인은 대금 연주를 하기로 되어 있다. 시, 서, 화 등 모든 분야에서 능력을 발휘하고 있는 분인데 오늘은 특별히 갈고닦은 대금 연주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김윤현 시인은 친구인 배창환 시인뿐만 아니라 참석하신 관객들의 마음을 밝게 해주기 위해 ‘고드름’과 '달맞이' 두 곡의 동요를 골랐다며 함께 노래해 줄 것을 주문했다. 이렇게 오늘 행사의 서막을 멋지게 열어주었고 관객들에게 모처럼 동심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는 점에서 모든 관객들로부터 큰 박수갈채를 받았다.
진행을 맡은 김수상 시인은 40여 년의 세월을 한결같이 시와 함께 ‘위대한 평교사’로 살아온 주인공 배창환 시인에 대해 준비된 약력 자료를 통해 소개해 주었다. 한참동안 소개해야 할 정도로 경력이 무수히 많았다. 이렇게 많은 활동을 하면서 살아온 시인의 실제 삶은 훨씬 위대했으리라는 믿음이 생기는 순간이다. 시인이기에 앞서 교사로서 제자들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남달랐고 그 결과물 또한 여러 권의 책으로 출판된 바 있고, 경주여고 학생창작 수필집 '채식주의자의 이름으로'는 세종문학나눔 교양부분 우수도서로 선정되어 널리 읽히고 있다.
원로시인 이하석 선생님으로부터 행사를 축하한다는 내용의 말씀을 듣는 특별 순서가 마련되었다. 이 자리에서 배창환 시인은 이런 저런 이유로 자신과 인연이 매우 깊다고 했고 배창환 시인의 겸손한 삶과 관련하여 탄생된 작품 세계를 높이 평가한다며 후배 시인에 대한 따스한 애정을 표현했다. 서로 도움을 주고받던 각별한 사이였음도 고백했다. 구사하는 어조가 튼튼하고 강기가 있으며 숨기지 않고 수줍어하지도 않는 당당함이 있다고 했다. 현실을 보는 눈과 언어를 이끌어내는 방식도 탁월하며 발딛고 있는 현실을 표현하고자 하는 의식있는 시인이라고 평가했다.
시낭송가인 문지원 님은 <동주의 우물>이란 시를 낭독했고, 나는 <서문시장 돼지고기 선술집>을 낭송했다. 낭독과 낭송의 차이는? 낭독은 보고 읽는 것이고 낭송은 외워서 읽는 것이다. 관객 입장에서는 낭송이 더 듣기가 좋을 것이다. 그만큼의 노력과 단련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문지원님은 경북재능시낭송협회 회장을 역임한 분인데, 구미낭송가협회에서 부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나와는 10여 년 전부터 알고 지내는 사이다. 시인들끼리 잘 알고 가까이 지내듯 시낭송가들끼리도 마찬가지다. 시인은 시를 쓰는 전문가라면 시낭송가는 그 시가 갖고 있는 묘미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려고 노력하는, 시에 날개를 달아주는 사람들이라고 하면 될까? 언제부턴가 시낭송도 새로운 예술 영역으로 확장되고 있어서 시낭송가의 한 사람으로서 기대하는 바가 크다.
또 두 분의 시인께서 배창환 시인의 시를 각각 낭독하는 순서로 이어졌다. <아름다움에 대하여>란 시를 성희 시인이, <백설기>란 시를 박선주 시인이 차례차례 낭독했다. 특히 박선주 시인은 배창환 시인이 경화여중 근무하다가 전교조 사태로 해직되던 그해 가르친 제자이며, 배 시인이 상주여고 퇴임하는 날 학교로 백설기를 보내어 <백설기> 시를 쓰게 만든 열두 명 제자들 중 한 사람이다. 박 시인은 <백설기>란 시를 낭독하면서 울컥했고 듣고 있던 나도 눈가에 눈물이 맺히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배창환 시인의 시에 담긴 서사는 이렇게 큰 감동을 선사하는 매력을 지녔다.
문학평론가이자 계간지 <사람의 문학> 발행인 정대호 시인과 배창환 시인의 대담 순서가 이어졌다. 정대호 시인은 <살아온 날들에 대한 성찰>이란 평론을 먼저 발표하고, 질의응답을 통해서 독자의 궁금증을 풀어주는 형태로 진행했다. 먼저 배창환 시인과 끈끈한 40년 인연을 언급하면서 배 시인의 시 전반에 나타나고 있는 특징을 두 가지로 분류해서 정리를 했다.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자각, 교육운동가로서의 현실과 삶에 대한 성찰이 그것이다. 이렇게 각각의 주제에 해당하는 여러 편의 시를 근거로 하여 맥을 짚어 나갔고, 무엇보다 배창환 시인은 교사로서 치열한 삶을 살았으며 그 삶속에서 함께하고 있는 제자들과의 동행이 참 아름다웠고, 여전히 그런 삶은 큰 감동이 아닐 수 없다고 평가하면서 정리를 했다.
오늘 행사의 클라이막스는 ‘시는 나에게 무엇이었는가?’ 라는 주제를 놓고 솔직담백하게 이야기하는 부분이었다. 배 시인은 화두같은 그 주제를 서서히 차분히 풀어내고 있었다.
제자 아난다와의 대화에 나타난 석가모니의 가르침이 결국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인연이 인생의 전부라는 사실이며 그것을 믿으며 살고 있는 배창환 시인의 성찰은 이미 높은 경지에 올라 있는 것이 아닐까? 물론 아직은 모르는 것이 많아서 늘 배우는 사람으로 남고 싶다는 겸손함마저 내재된 바, 그 인격의 완성도가 더욱 높아 보인다.
배창환 시인의 시에 자주 등장하는 '아버지'에 대해서는 시의 출발점이자 발상지라고 고백했다. 아버지는 가난함이 무엇인지 동시에 거기서 벗어나기 위해 열심히 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신 분이라고 했다. 농민의 아들, 일용직 노동자로서 살아가는 과정에서 시대를 깨우쳐 주셨던 분, 그러나 그 가난이 어디서 오는 것일까 탈피하지 못하고 죽을 수밖에 없는 모순이 결국 사회적 역사적 문제임을 보여주었던 증인이 바로 아버지라고까지 표현하고 있었다. 가난도 힘이 될 수 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었고, 삶의 현실이 모순되고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공부도 하고 글도 쓰게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허무주의에 빠져서 힘들어 할 때, 어디에선가 봤던 구원의 언어 '인생은 짧다 그러나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만큼 짧지는 않다.'는 말을 통해 자신도 뭔가를 할 수 있겠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했다. 태산의 작은 흙처럼 살아가는 것도 탑을 쌓는 것과 같다는 깨달음. 중국 속담에 '태산은 작은 흙도 버리지 않는다.'는 말이 큰 위로가 되었다고 했다. 걸출한 시인의 뒤를 따라가면서 훌륭한 분들의 뒤를 따르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 나도 태산 속에 있는 필요한 존재일 수 있겠구나. 큰 바위, 작은 돌멩이, 흙, 큰나무, 작은 풀도 있는데 내가 작은 풀이 될 수 있겠구나 하는 깨달음이었다는 고백이다.
시를 안 썼다면 지금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아버지 요구대로 육사에 갔더라면? 결국 아버지 뜻을 거역하고 교사의 길을 걷게 되었던 것은 참 잘한 결정이었다고 고백은 계속되었다. 작은 것은 양보하더라도 중요한 결정을 할 때는 스스로 한다고 했다. 가난하지 않기 위하여 자신의 삶속에서 그렇게 열심히 살아가듯 삶이 가난하지 않기 위하여 시를 썼고, 나를 발견하고 나에게 돌아오는 방법으로서의 시 쓰기가 아닐까 하는 고백도 했다. 그래서 시는 거울이고 나침반이고 채찍인 것이다.
인터넷을 통하여 본 '어른 김장하'의 사례를 이야기하면서 어떻게 이렇게 과연 살 수 있을까 하는 감동을 받았다. 그의 삶 자체가 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고, 삶으로써 시를 쓴 분, 삶 자체가 시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니까 삶의 이야기를 시로 쓰는 것이 중요하다. 꾸미는 시는 아무런 감동을 줄 수 없다. 시를 통해서도 그렇고 자기가 만든 세상을 자기가 살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작가는 그 시대가 유일한 기회'라고 말한 샤르트르의 말을 좋아한다고 했다. 그 시대의 정신과 시대의 삶이 현실을 놓치게 되면 사실은 그 시에서 뭘 담을 수 있을까? 결국 내가 어떤 시를, 이야기를 쓰더라도 그 시대를 놓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작년에 만해문학상을 수상한 울진의 시인 김명기가 말한 "어떤 위대한 예술도 삶을 우선할 수 없다."고 한 말에 절대적인 공감을 갖게 된다고 했다. 결국 예술은 삶의 감동을 형상화해서 설득력 있게 전달하는 이야기이고 노래라는 것이다. 물론 예술에는 여러가지 장치가 들어가지만 어떻게 쓸 것인가 하는 방법의 문제가 ‘무엇을(주제, 감동)’보다 먼저일 수는 없다는 뜻이 아닐까. ‘무엇을’과 ‘어떻게’는 예술에서 분리될 수는 없는 것이긴 하지만…..
'시에 속아 한 세상 잘 살았다.' 시인의 비명2에 수록되어 있지만 나중에 묘비명을 한 번 더 써 보고 싶다고 마무리했다. 그러러면 더 많은 노력을 해야 할 것 같다고 했다. 아직도 청년임을 믿고 열심히 시를 쓰겠다고 정리를 하면서 참석해 준 모든 분들께 감사하다는 인사말과 자신이 선택한 시 <소례리길>을 낭송하면서 행사를 모두 마쳤다.
행사를 마치고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용학도서관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위치한 ‘토장집’이란 식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많은 분들이 끝까지 즐거움을 같이하기 위해 식당까지 오는 성의를 잊지 않았다. 막걸리 한 잔씩 권하며 마시고 가까이 앉은 분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분위기를 고조시켰고, 배창환 시인의 노래도 한 번 들어보자는 누군가의 제안에 따라 배창환 시인은 선뜻 일어나 청아한 목소리로 '솔아솔아 푸르른 솔아'를 불러서 화답했다. 마치 작금의 부도덕한 독재정권이 설치고 있는 시대를 살아내야 하는 답답한 마음을 한꺼번에 해소해 보려는 듯 클라이막스 부분에서는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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