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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어느 등대지기의 노래'를 보고

오늘 나는

by 우람별(논강) 2009. 11. 22. 2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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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저녁에 본 연극, 극단 형영의 32회 정기공연

'어느 등대지기의 노래',(조창인 원작, 강순원 각색/연출)

6명의 배우와 스텝들이 만들어 낸 창작극인데,

좁은 소극장 무대에 100 여 명의 관객들이 몰려들어

역시 작품에 대한 관심과 인기를 잘 보여주었다.

 

오후 6시경 광운 최희범 선생님을 만나

육거리 물곰식당 주변에 주차를 하고, 청국장 정식으로 유명한

식당에 가서 저녁 식사를 맛있게 하고, 소극장(포항아트센터)으로 갔다.

연출 강순원 선생을 비롯하여 여러 배우들이 열심히 연습을 하고 있었다.

지난 11월 15일부터 이미 공연을 시작하면서 널리 홍보도 되었고,

입소문을 통해 여전히 사람들이 많이 찾아 오고 있다고 한다.

오늘은 주말이라서 관객들이 어느 정도나 올는지 자못 궁금하다.

분장실로 가니 김태숙씨가 난희(박지영)의 분장을 막 끝내고 있다.

'그 여자의 숲속에는 올빼미가 산다'에서 검사 역을 맡으면서

극단 ''형영'과 인연을 맺은 태숙씨는 깜끔한 외모와 깨끗한 피부로 나이를 잊었다.

5학년 1반(51세)의 나이라는 게 도저히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아무리 양보한다 하더라도 40대 초반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팜플렛을 보니 나도 여전히 스텝 홍보란에 사진이 들어있다.

극단을 떠나 구미에 산 지 4년이 되어가도 팜플렛에 이름은 올라있으니

극단 '형영'은 날 끝까지 놓아주지 않으려는가 보다.

 

분장실에 앉아 태숙씨가 타 주는 따스한 커피 한잔을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강선생은 또 줄담배를 피고 있다.

얼마나 맛있게 피우는지 한 대 달라 해서 같이 피우고 싶을 정도다.

평소엔 금연을 생활화하는 강선생이지만, 연극 공연할 때만 되면 줄담배다.

배우들의 일거수일투족에 신경이 쓰이는 연출이라는 자리,

벌써 몇 년의 세월인가? 1992년 창단 이후 32회의 정기공연 중

거의 2/3를 강고문이 맡아서 연출을 하지 않았던가.

보통 열정이 아니다. 거의 연극에 미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니까!

어제는 원작자인 조창인 작가가 와서 연극을 보았다고 하고,

그와 함께 맥주를 마시면서 단원들은 많은 얘기를 나눴고,

조창인 작가로부터 형상화가 잘 됐다며 극찬을 받았다고 한다.

 

언제부턴가 강순원 선생님은

원작을 각색해서 연극을 만드는 데 관심이 많다.

천승세의 '신궁(神弓)'을 각색해서 전국연극제 작품으로 출품을 하더니

이번 32회 정기 공연에서는 조창인의 소설 '등대지기'을 각색해서

작품의 매력을 그대로 살려 감동적인 연극으로 보여주었던 것이다.

희곡으로, 아니 연극으로의 형상화가 그다지 쉬운 작업이 아닐진대

그는 성공적으로 해냈고, 만천하에 인정을 받은 셈이다.

'연출의 변'에서 가슴 설레고 기대 또한 크다며 일갈하기도 했는데,

그의 거침없는 시도와 열정에 다시한번 뜨거운 박수를 보낸다.

 

소극장 맨 앞줄 가운데 앉아 

나는 연극이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등대지기로 40년을 살았고 곧 정년퇴임을 하는 정소장(이재훈),

그의 뒤를 이어 평생 등대지기를 다짐하는 유재우(박진영),

늘 게을러 늦잠을 자다가 정소장으로부터 핀잔을 받는 이길성((한경준)

자미도 생태조사차 본청에서 파견나온 김선욱(박민식), 치매 걸린 노파(윤경희)

재우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자미도에 머물 것을 선언했던 작중 작가 난희(박지영)

6명의 배우들의 신들린 연기와 특수음향, 조명 등이 한데 어우러져

연출의 의도대로 빠른 템포의 사건 진행으로써

무대의 역동성은 충분히 살아나고 있었고,

배우들의 대사를 치는 속도에서도 그대로 느껴졌다.

정소장의 경상도 사투리와 이길성의 전라도 사투리의 대비,

두 인물 간의 표면적 갈등과 그 갈등의 해소 과정도

이 작품이 의도하는 사랑의 회복 또는 화해를 보여주고 있었다.

 

치매에 걸린 노인의 입도(入島)와 함께 시작된 극중의 갈등은

노인을 기름창고에 내팽개치다시피하여 가두는 장면에서

재우의 불같은 분노의 폭발은 최고조에 다다르게 되지만,

가슴 깊숙히 감추어진 모자간의 두텁고 질긴 사랑의 끈은

그 높고 위험한 등대에 올라 자식을 위해 모든 걸 다 쏟아내는

그 마지막 화해 장면에서 잘 드러나게 되고,

그와 동시에 갈등이 해소되면서 극은 마무리 된다.

등대지기의 외롭고 고단한 삶과, 일상 속에 감추어진 미움과 갈등,

화해의 과정을 담고 있는 '어느 등대지기의 노래'는 훌륭했다.

무대를 뒤덮었던 파도소리, 바람소리, 뱃고동소리도 여운처럼 남았다.

90분의 연극은 이렇게 먹먹한 슬픔과 여운으로 끝이 났다.

나도 모르게 흘러내린 눈물 한 줌 훔쳐내면서 연출의 손을 잡았다.

"강선생, 정말 고생했다. 너무 잘 봤고, 훌륭했어."

 

조명이 밝혀진 객석을 돌아보니

남전 형님과 서정우 장학사도 와 있었다.

물론, 두 분이 올 것이라 예상을 했지만 소극장에서 보니 더 반가웠다.

공연을 막 끝낸 배우들과 함께 기념 사진을 몇 장 찍고,

곧장 극단 단원들이 자주 찾는다는 주점 '산막(山幕)'으로 갔다.

사방 벽과 천정까지 온갖 낙서투성이인 방을 하나 차지하고

시원한 막걸리를 마시면서 연극 뒷풀이가 시작되었는데,

술맛이 너무 좋아 술잔에 그득 담아서 얼마나 마셨는지 모른다.

재우 역의 박진영 대표, 정소장 역의 이재훈 선생을 제외하고는

다른 배우들은 장소가 협소해서 옆방으로 옮겨서 술을 마셔야 했다.

주점은 온통 막걸리 냄새로 가득했고, 강순원 선생님이 준비해 온

영산강 홍어는 적당하게 숙성이 되어 그 맛을 더했다.

 

그날 나는 엄청 취했다.

기분 좋아 마시는 막걸리인지라 끝간 줄 모르고 마셨다.

노래방에도 갔던 것 같은데, 거기서 무슨 노래를 불렀는지도 모른다.

다만 분장을 맡은 김태숙씨가 갑장이라는 사실이 놀라워

주민등록증을 좀 보자고 주문했던 것은 기억난다.(하도 젊어 보여서)

흥겨운 음악에 맞춰서 춤을 방정맞게 춘 것도 기억난다.

노래방에서 춤을 춘다는 것은 몹시 취했다는 또다른 증거다.

광운 형님께서 그날 마지막까지 챙기셨던 것도 기억한다.

가마득한 국어과 후배인 서정우 장학사와 나를 위해

술집 가까운 곳에 있는 숙소까지 잡아 주시고,

술도 사 주시고,그 많은 비용을 부담하셨던 것 같은데,

그저 황송할 따름이다.

 

월여 이영률 선생님도 대구 모임에 갔다가

극단 모임에 참여하기 위해 일찍 빠져 나와

밤 10시 30분 경 포항에 도착했다는데 전화 연락이 되지 않아

얼굴을 보지 못한 안타까움이 있었다. 그 다음날에야 알았으니....

내 휴대폰에 부재중 전화가 무려 10 여 통이 와 있었던 거다.

잠에서 깨어나니 모텔 안에 서정우 선생이 내 옆에서 잠들어 있었고,

같이 일어나 정신을 좀 차리고 몸을 추스른 다음,

오거리 콩나물해장국집을 찾아가 한 그릇씩 먹고 난 뒤에야

세상이 바로 보였고, 친구와 나는 광운 형님께 전화를 걸어서

고맙다는 인사를 드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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