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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둘레길을 걸으면서

오늘 나는

by 우람별(논강) 2009. 11. 15. 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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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고속도로 지리산 IC로 빠져 인월 방향으로 달리다가

왼켠에 있는 '고향식당'에 들르니 동네 잔치가 있었는지

서로들 반갑게 인사하고 알은체하는 사투리가 정답다.

산채정식을 시켜서 먹었는데, 음식이 깔끔하고 풍성해서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먹어치우니 점심 식사 해결,(오후 1시)

 

인월에서 장항까지의 강둑따라 숲길따라 고즈넉한 둘레길도 좋지만

친구인 진성 선생이 권하는 장항-금계 구간을 걸어 보기로 했다.

마을회관 앞에 널찍한 주차공간이 있으나 벌써 세울 곳이 없다.

어쩔수없이 다시 나와 마을 입구 길가 빈공간에 차를 세웠다.

지리산 둘레길은 언제부턴가 이렇게 입소문이 나서

많은 답사객들이 찾고 있다는 것인데, 참으로 보기에도 좋다.

회관앞 끔직한 안내판 앞에 잠시 서서 걸어야 할 길을 가늠하고 있는데,

"선생님, 어쩐 일이세요?" 하면서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마을 원두막 같은 정자에 들어가 점심 식사 중인 일행들 중

누군가 날 알아보고 반가워하는 소리인데 처음엔 잘 몰라 봤다.

가까이 가 보니 기석도, 권평정, 박기호 선생 등이 거기 있었다.

포항에서 함께 활동했던 동지들인데, 몇 년 사이에 자녀들이 많이들 큰 것 같다.

반가워하며 잠시 들어오라고는 했지만 갈길도 바쁘고,

또 좋은 그들의 가족적인 분위기를 깨뜨리고 싶지 않아서

간단한 수인사만 하고 헤어졌다. 그들의 미소가 정답다.

오전에 자녀들을 데리고 인월-장항 구간을 걸었단다.

작년 5월, 서울 여의도에서 열렸던 전국교사대회에서

박기호 선생이 햇볕 따가운 아스팔트 위에 종이모자를 쓰고 앉아

친환경 수세미를 만들기 위해 땀흘리며 뜨게질하던 장면이 떠오른다.

걸맞지 않는 행위 같아서 맨처음엔 좀 이상하게 생각했는데,

여러 색깔을 넣어서 수세미를 정성껏 완성시킨 다음

옆에 앉은 나에게 선물처럼 건네는 것을 보고 감동한 바 있다,

"앞으로 설겆이 하실 때 이걸 한 번 써 보도록 하세요."

세제를 굳이 쓰지 않아도 된다면서 흡족하게 웃던 장면.....

 

답사 처음부터 언덕이 시작된다.

바람에 흔들리는 아름드리 솔향이 강렬하다.

조금 더 가니 지리산 둘레길 안내표지판이 보였다.

갈래길에서 방향을 확실하게 잡아주니 꼭 필요한 이정표다.

무, 배추 등을 키우고 있는 밭을 끼고 조금 오르니 본격적인 산길이다.

경사는 급하지 않으니 누구나 만만하게 오르내릴 수 있는 정도다.

한 무리의 일행들이 앞에서 두런두런 얘기하며 천천히 걷고 있는데,

그 중 한 분의 발걸음은 조금 힘들어 보이고 보폭도 짧다.

등산복 차림의 뒷태를 보아선 나이를 모르겠는데,

앞에 가 슬며시 뒤돌아보니 70대에 가까운 노인이다.

모처럼 등산화와 등산복을 갖춰입은 입성으로 봐서는

자주 산을 찾는 분 같지는 않고, 누군가 소개한 이곳을

찾아와 둘레길 초입의 생각지 못한 가파름 때문에

갈까말까 망설이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준다.

'힘내세요. 조금 지나면 괜찮아질 것 같아요.'

아내(명혜당)도 조금 오르더니 헥헥거린다.

힘이 드는지, 자꾸만 내 어깨에 기대고 팔뚝에 매달리는데,

벌써 이렇게 힘들어 하면 10킬로 넘는 길을 어찌 답파하겠는가 싶다.

금계마을까지 4시간 정도는 걸린다고 하니 걸음 속도는 어느 정도 필요하다.

적어도 날이 어두워지기전에는 답사를 끝내야 하니까.

곳곳에 쉼터가 마련되어 있어서 숨을 고르기에도 좋다.

숲속의 좋은 공기를 맘껏 들이킬 수 있으니 그저 좋다.

 

숲길을 따라 한참을 걸었다.

어느 지점인가를 지나가는데 반듯하면서도 길게 쌓아올린

성벽같은 것이 산쪽으로 보이는데 심상치 않아 아내에게

"여기에 무슨 성이 있었나 보네." 했더니

안내문에 쓰인 것을 읽어 본 아내가 알아낸 것은

농민들이 경작을 포기하고 땅을 버리고 떠나간 뒤,

세월이 흐른 뒤 이렇게 숲으로 복원되었다는 설명이었다.

지리산 둘레길 장항-금계 구간에서 가장 많이 보이는 게 다랭이논인데,

성벽같이 보였던 것은 바로 그 다랭이논의 경계인 논둑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 논둑을 쌓아야만 했던 민초들의 삶은 어떠했을까?

언제 누구에 의해 쌓여졌는지는 몰라도 짐작건대,

풍성한 평야지대에서 살 형편은 못 되고, 

이 골짜기까지 밀려 와서 화전을 일구어 곡식을 만들어 먹다가

늘어난 식솔들의 먹거리 문제를 도저히 해결할 수 없어

소출 좋은 벼농사를 지으려 한마음 되어 논만들기를 결심했을 것이다.

경사진 산의 높은 부분의 돌과 흙을 파내서 아래쪽에 석축을 쌓고,

산 위쪽으로도 같은 방법으로 쌓아올려 평평한 논을 만들었을 것이다.

오랜 세월, 엄청난 고통이 따르더라도 희망을 잃지 않고

우직하게 쉬임없이 온갖 정성을 들여서 일을 했을 것이다.

연명하다시피 살아야 했던 한 많은 민초들의 발버둥,

그 피노동의 결실이 이 다랭이논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니

논두렁 따라 그 흙밑에 쌓여있는 크고 작은 돌 하나하나가

바로 이 지리산의 역사요, 실체같아서 소스라칠 것만 같다.

논두렁 바로 밑에 서서 좌우로 길게 뻗은 두세 길 논두렁을 쳐다보니

아득한 공중에 떠 있는 '공중배미' 그 자체인 것이다.

경사를 두고 돌을 쌓지 않고 거의 직각에 가까운 것은

경작지를 최대한 확보하려는 가난한 백성의 치열함이다.

'치열한 역사'가 그 논두렁에 고스란히 남아있는 것만 같다.

'우공이산(禹公移山)' 이란 말이 자연스레 연상되면서

산을 옮기는 심정으로 흙과 돌을 옮기는 민초들의 우직한 삶을 생각한다.

깊은 지리산에서 그렇게 살다가 뼈를 묻은 조상들을 생각한다.

 

잔뜩 흐린 날씨에 비가 후두둑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한기가 느껴질 정도의 바람까지 후우욱 불어온다.

마침 동동주와 부침개를 파는 쉼터가 있어서 들어갔다.

맘씨 좋아 보이는 아주머니가 반갑게 맞는다.

여행을 하다가 길가의 주막에 들러 막걸리 한잔 하게 되는 것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기회인지라 무조건 좋고 즐겁다.

잔에 가득 따른 다음 새끼 손가락 넣어 휘휘 저은 다음

거침없이 들이키는 그 막걸리맛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날씨가 갑자기 추워지고 있으니 알코올 보충하기엔 최적의 시기다.

조금 있으니 등구령 방향에서 내려오는 여인네들 7,8명이 안으로 들어온다.

인천에서 왔다는데, 좋은 카메라를 하나씩 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사진 동호회 사람들이 의기투합되어 이곳에 온 게 아닐까 한다. 

일행 중 한 사람은 무언가를 포착하고 연신 찍어대고 있는데,  

다랑이논과 그 주변의 풍광에 매료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상상을 했다.

 

막걸리 한 병을 다 비우는 동안 날씨는 순식간에 좋아졌다.

바람도 잦아들고, 햇빛이 우리 쉼터에까지 다가와

이젠 그만 쉬고 갈길을 가라고 재촉하는 듯하여 일어섰다.

비가 오니 돌아가자고 칭얼대던 아내도 기분 전환이 되었나 보다.

무겁던 발걸음이 이젠 가벼워진 듯, 방긋방긋 잘 웃는다.

길가의 고사리밭은 아내의 밝은 모습과는 다르게 흙빛이다.

고사리는 그 한살이를 끝내고 가녀린 가지와 무성한 잎으로 덮여 있다.

고사리는 야생의 것을 채취하는 것으로만 알았는데,

둘레길을 걷다보니 그 고사리도 대량으로 경작됨을 알았다.

고사리밭이 둘레길 주변에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등구령까지 오르는 길은 한동안

다랭이 논을 끼고있는 시멘트길이다.

경운기가 모든 논에 드나들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다.

경사의 완급에 따라 돌로 된 논둑의 높낮이가 달라지는 것은

계단식 논이기에 자연스러운 것 같았고, 제일 윗논의 바로 위엔

제법 넓고 깊은 저수지까지 만들어 놓아서 가뭄에 대비한 지혜가 엿보인다.

천수답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지리산 민초들의 치열함은 이렇게 감동이다.

다랭이논 지역이 끝나갈 즈음에 쉼터가 한 군데 있어 평상에 잠시 앉아

구절초식혜 두 잔을 2,000원에 사서 들이키니 갈증이 싸악 가신다.

그런데 그 쉼터 옆의 포크레인 작업 소리가 귀에 거슬린다.

돌을 모으고 쌓으면서 건물을 짓기 위한 기초공사를 하는데,

주춧돌의 위치로 보아 그럴듯한 건물이 그려진다.

관광객들의 출입이 많은 곳이니 만큼 상가를 짓는 것이리라.

 

경사가 조금씩 급해진다.

지금까지 걸어온 거리 5.8킬로,

등구령 막바지의 경사는 아내를 힘들게 하기에 충분했다.

고관절의 윤활작용이 잘 안 되는지 다리의 고통을 자꾸 호소한다.

부축을 하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고갯마루를 향해 오른다.

혼자 열심히 오르는 노인 한 분이 느리디느린 우리를 보고

'어찌 젊은 사람들이 나보다 산을 잘 못 오르나?' 할 것만 같다.

고갯길을 더 오르다 보니 왼쪽으로 토종꿀 농장이 보인다.

수백 개의 벌통이 키자랑이라도 하듯이 여기저기 길쭉하게 서 있다.

머리 부분은 모자를 쓴 것처럼 두꺼운 스티로폼을 얹었고

그 위에 다시 묵직한 것으로 고정을 시켜놓았다.

'농장에 들어오면 벌한테 쏘입니다. 조심하세요.'

벌통 주인의 관리흔적이 역력하다.

 

드디어 등구령 고갯마루,

경상도 함양군과 전라도 남원군을 연결하는 도 경계다.

구름 사이로 빠져나온 강렬한 햇볕이 내려와 우리 주변을 감쌌다.

다른 곳은 햇볕이 없는데 우리 주변만 비추는 그 강렬함이다.

사진기를 얼른 꺼내어 그 주변의 모습을 찍어 놓았다.

특히 삼나무의 노랗게 물든 짧고 뾰족한 잎들이 마음을 편하게 해 준다.

그 삼나무 아래 흙길을 지날 때의 발바닥 감촉은 그야말로 폭신폭신!

곧게 뻗은 삼나무 숲이 좋아서 쉼터에 걸터앉아 무한정 즐기고 싶다.

 

이제부터는 내리막길, 

삼나무 군락지가 끝나는 지점에

나무 계단이 지그재그로 가파른 내리막길을 만들었다.

사진기를 들이대서 그 나무 계단을 찍어 두었다.

계단을 다 내려가니 길은 웅덩이 둑길로 이어지는데,

웅덩이 방향으로 안내문이 또 하나 보인다.

온갖 새들과 야생동물이 이곳을 자주 찾아 목을 축이고 간다는 것이고,

이곳을 지날 때는 사람들이 조용히 해줘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과 자연의 교감을 강조하는 안내인의 배려가 고맙다.

창원마을까지 1.8킬로미터의 길은 계속되는 내리막길이다.

산길을 조금 더 내려가면 다시 시멘트로 포장한 농로가 이어지는데,

탁 트인 곳이라 맞은편에 보이는 지리산의 위용과 자태을

눈높이로 고스란히 볼 수 있다는 게 큰 매력이다.

 

명혜당은 달팽이처럼 천천히 걷고 있다.

나도 주변의 모든 것을 천천히 완상해 볼 수 있는 여유가 있어 좋다.

등구령을 오를 때는 고관절이 아프다 하더니

내리막길에서는 염려한 대로 엄지발가락의 관절 부위 왼쪽,

유별나게 튀어나온 탓에 신발과 자주 맞닿게 되면서 상처가 났다.

통증이 심해서 뒷걸음질로 걷는게 편하다며 미안해 한다.

길 좌우로 다랭이논들이 산의 경사를 따라 계속해서 층계를 이뤘고,

어느 곳인가 감홍시를 주렁주렁 매단 아름드리 감나무가 인상적이다.

멀리 보이는 지리산의 검은 빛을 배경으로 한폭의 그림이다.

감나무 아래에서 명혜당은 입을 벌리고 한참을 서 있었다.

홍시 하나라도 떨어지면 받아 먹겠다는 심사일테지만,

그 모습을 담은 기념 사진으로 만족해야 하리라.

뒷걸음질하는 명혜당의 팔을 끼고 아주 천천히 내려가다 보니

나도 덩달아 달팽이가 되었다면 지나친 말일까?

 

다랭이 논만 있는 것은 아니다. 밭도 있다.

고랑을 깊이 파고 잡풀의 성장을 막기 위해 비닐로 덮어

온갖 정성을 들여서 경작한 고추밭이 이젠 그대로 늙어버렸다.

고추가 달린 채, 흙빛이 되어버린 고추밭의 모습인 것이다.

아무런 수확도 안 하고 그냥 버려둔 것임에 틀림없는데,

그 무슨 사연이라도 있을까? 수확해 봐야 생산비도 못 건지니

일손도 모자라고 해서 그냥 방치해 버린 것이 아닐는지.

여러 해 묵힌 다랭이논에는 시들어 있는 풀들이 무성하다.

논두렁 가에서 서걱이는 억새풀의 군집이 을씨년스럽다.

 

혼자 걷는 답사객들도 간혹 눈에 띈다.

느리디느린 우리들을 빠른 속도로 지나치는 그, 또는 그녀

그들의 생각 속으로 들어가 그들의 말을 엿들어 보면 어떨까?

아무런 속박없이 자연을 맘껏 즐기고자 하는 혼자만의 답사 여행,

지금껏 그런 여행을 해 보지 않았기에 은근한 호기심이 발동한다.

시간은 흘러 벌써 오후 4시가 넘었고, 앞으로 한 시간 뒤면 어둑해진다.

오후 1시에 출발하여 지금까지 3시간 걸은 거리는 겨우 7.6킬로미터,

매동마을에서 창원마을까지의 거리가 그 정도인데,

아내의 다리 상태로는 금계마을까지의 나머지 구간 3.2킬로는 무리다.

창원마을에 다다르자마자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낫을 들고 열심히 일을 하고 계신 할머니에게 다가가 여쭤보니

조금만 더 내려가면 함양에서 오도재 넘어 인월로 가는 버스가

통학하는 학생들을 잔뜩 태워서 가끔 온다는 순박한 할머니의 대답이다.

지금 내려가면 탈 수 있다면서 서둘러 보라는 것이다.

그런데 빨리 갈 수가 없는 우리들 걸음걸이니 어쩌겠나?

마을을 통과해서 저 밑에 큰길이 보이는 지점까지 왔다.

 

옥상에 감홍시 덕장을 만들어놓은 집,

김장을 하느라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바쁜 모습를 보여주는 집,

배추를 절이고 다듬고 계신 아주머니에게 다가가서 버스가 지금 있냐고 물으니

"방금 갔는데, 우짜노? 다음 차는 7시 가까이 되어야 오는데...."

집 마당엔 자가용이 한 대 서 있다. 태워달라고 부탁해 볼까 하는데

아주머니가 먼저 아들을 시켜서 이분들 좀 태워주라고 한다.

'이렇게 고마울 수가 있나?' 싶다. 하늘이 돕는가 보다.

젊은이는 막걸리 한잔 했지만 괜찮다며 우리를 태운다.

워낙 활달한 친구라서 우리도 마음이 참 편해졌다.

알고 보니 그 젊은이는 그집의 사위였다. 김장한다기에 다니러 왔단다.

고향은 충북 청주인데, 처갓곳이 하도 좋아 자주 온다는 것이다.

나도 고향이 충주라면서 맞장구를 치니 더욱 반가워한다.

우리가 답사를 시작한 매동 마을까지는 차를 타고도 제법 멀었다.

한참을 얘기하다보니 마을 입구에 닿았다. 차에서 내리기전에

고마움의 표시로 10,000원을 건네 주니 안 받으려 한다.

그래도 우리의 성의를 무시하면 안 된다면서 주고 내렸다.

덕분에 편하게 답사 마무리를 했지만 뭔가 허전하다.

금계마을 끝까지 걷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이라고 할까?

지리산도 우리를 좀더 오래 품지 못해 아쉬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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