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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비의 생강농사(아버지의 글)

작가들의 세계

by 우람별(논강) 2017. 7. 19. 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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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단양군 매포읍 매포리 일대는 황토가 많은 적토지대였다. 마을 앞에는 청정한 남한강 상류가 풍부한 어족자원을 품어 안은 채 유유히 흐르고, 풍치 또한 아름다워 강가의 기암괴석과 붉은 몸통으로 곧게 자란 금강송이 볼만하여 조랑말에 몸을 실은 시인묵객(詩人墨客)들이 자주 찾는 명소였다.

그곳에 본관(本貫)이 강릉(江陵)인 김진경(金眞卿)이라는 잘생긴 선비가 살고 있었으나 겉보기와는 달리 살림살이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농사에는 손도 대지 않았고 논밭이 몇 두락 있었으나 모두 병작(竝作)으로 남에게 내주곤 늘 하는 일이란 글이나 읽고 심심하면 조그만 목선 타고 강심으로 나가 낚시를 즐기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니 아내를 비롯한 일남이녀(一男二女)의 생활은 늘 궁핍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의 가난함 때문에 자존심마저 상할 수는 없었기에 차마 농사꾼이 될 수는 없었던 것이다. 하기야 양반은 얼어 죽을지언정 잿불은 쪼이지 않는다(寧凍死不近稿火)는 격으로 결기있고 꼿꼿한 선비정신에다가 생육신의 한 사람인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의 후손이고 숙종조(肅宗朝)와 정조(正祖)대에 이르기까지 좌우정승에 이어 영의정을 역임한 김상철(金尙喆, 1712-1791)이 그의 조부이고 보면 김선비의 우월감과 자존감은 하늘을 찌를 만큼 대단했을 터이다.

그러나 인간사는 늘 조석(朝夕)으로 재앙과 복이 있어서였을까? 이조참의(吏曹參議, 正三品堂上官)로 있던 그의 아버지 김우진(金宇鎭)이 죄를 지어 유배를 당하자 그의 조부 김상철은 재산 몰수에 파면까지 당했고 그 부친 김우진 역시 배소에서 죽어 갑자기 집안은 망하고 말았던 것이다. 유배를 당하고 재산을 몰수당한 집안의 자식은 과거에도 응할 수가 없었다. 초시(初試) 향시(鄕試)는 물론 진사시(進士試) 정시(庭試) 사마시(司馬試)에도 응할 수 없는 터라 김 선비는 어쩔 수 없이 백수(白首) 신세가 되고 만다.

 

1854(철종5甲寅) , 그의 나이 37세였다. 그 당시 조정의 정치 현실은 안동김씨 천하가 되어 김조순(金祖淳)을 필두로 한 김좌근(金左根), 김병학, 김병기 등이 온 조정의 실권을 틀어쥐고 나는 새도 떨어뜨릴 만큼 위세등등한 정국이어서 김선비도 그들의 세도정치에 음으로 양으로 피해자가 되어 있었다.

가슴에 가득한 문장과 시문을 발표할 곳도 없어 늘 앙앙불락(仰仰不樂)하며 지내던 어느 날, 그곳 토호(土豪)라 불리는 정대우(鄭大佑)란 사람이 김 선비를 찾아온다. 그리고 생뚱한 제안을 한다.

김 선비님, 내가 황토밭 이천 평을 일 년간 빌려드릴 테니 그 밭에 생강 농사를 한번 지어 보시지요. 생강은 한 번 심어 놓으면 거름도 필요 없이 가을에 캐기만 하면 되는 작물이라서 좀 수월할 겁니다. 한번 해 볼랍니까? 도지는 주든 말든 맘대로 하시구요.”

대단히 고마운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천 평이나 되는 넓은 땅에 생강을 심으려면 그 씨앗도 많아야 할 텐데 그것을 어떻게 구합니까?”

다 준비되어 있는 만큼 걱정 말고 금년 봄에 한 번 시작해 보세요.”

그렇게 하여 선비 김진경은 그해 음력 10월 중순쯤 토호 정태우가 빌려준 이천 평 땅에 생강을 심어 아주 만족할 만큼 풍성한 생강 농사에 성공을 거둔다. 우순풍조(雨順風調)한 세월 덕이기도 했으나 우역부역(友役賦役)한 상부상조의 도움 때문이기도 했다. 마을 사람들의 도움으로 마당 하나 가득 거둬들인 생강을 보자 김진경은 다시 그 판로를 알지 못해 고민하게 되는데 그 때 마침 그곳 부근 삼곡리(三谷里)에 사는 목선주(木船主)가 찾아와 배 두 척을 빌려줄 테니 생강을 배에 싣고 한양으로 올라가 보라는 제안을 한다.

배를 띄웁시다. 김 형은 배를 몰 줄 모르니 나도 따라가겠소. 닷새면 한양에 도착할 수 있을 게요.”

순전히 남의 도움으로 얻은 생강을 두 배에 가득 싣고 배 안에서 끓여먹고 잠을 자며 남한강물 따라 한양을 향해 흘러가는 사이, 밤이면 수궁(水宮)에서 우는 --’ 소리에 놀라기도 했으나 김진경의 고민은 자꾸 쌓여가기만 했다. 말만 들었을 뿐 한양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는 초행길에 생강을 두 배나 가득 싣고 강물을 헤쳐가다니 생각할수록 눈앞이 캄캄하고 어처구니없는 일이기도 했다. 허나 몇 번 경험이 있다는 선주 김막개(金莫介)의 호들갑으로 인해 어느 정도 마음의 위안을 찾는다.

식구들 걱정은 하지 마소. 생강을 처분하자면 아무래도 시일이 걸릴 것 아니겠소. 해서 내가 눈 질끈 감고 보리쌀 두 말 갖다 드렸으니 한 보름은 자실 것이오. 그러니 마음 쓰지 말고 생강 넘길 생각이나 하소. 나는 나루에 도착하는 대로 생강 부려놓고 곧바로 단양으로 돌아가려 하오.”

생강을 잔뜩 실은 배가 드디어 노량나루에 닿았다. 손님을 태운 나룻배만 오갈 뿐 누구 한 사람 붙들고 얘기할 사람도 보이지 않는데 마침 가까운 강가에서 빨래하는 젊은 아낙네가 보인다. 김진경은 염치 불구하고 그 여인에게 다가가 말을 건다.

실례합니다만 한 말씀 좀 드리겠습니다. 실은 제가 충북 단양에서 생강을 배에 싣고 이곳 한양까지 왔습니다만 막상 와 보니 아는 사람도 없고 또한 생강을 배에서 내려놓을 곳도 마땅치 않고 해서…….”

잠시 멈칫하다가 천천히 일어서며 젖은 손을 앞치마에 닦은 다음 서글한 눈매로 김 선비를 바라보는 그녀의 매골은 한 마디로 눈이 부실 만큼 아름다운 미인이었다. 훤칠한 키에 흰 살결이 유난히 곱고 입술은 움직이면 양 볼에 옴폭 패이는 조개볼, 그리고 보실보실 귓가로 내리자란 귀밑머리 하며 어느 것 하나 나무랄 데 없이 아름답기만 한 그녀였으나 아래위 치마저고리는 소복(素服)이었다. 그녀가 입을 뗀다.

그렇습니까? 보아하니 선비님 같은데 형편이 그러시다면 우선 저의 집 헛간에 생강부터 옮기시지요. 생강이라면 쉽게 팔릴 것도 같습니다만…….”

 

미인의 필수귀목(必需貴目)이란, 하늘의 뜻을 표현한다는 짙은 눈썹의 양 미간(眉間) 위로 이마를 향해 송송 돋아난 솜털의 아름다움이 돋보여야 하고, 땅의 정기를 은근히 떠받친다는 타원형의 곱살한 턱 맵시가 갸름한 얼굴을 감아올린 틀골의 미곽(美廓)을 말한다. 더구나 천음(天音)과 지성(地聲)이 곰삭아 잔잔한 가랑비 소리로 변화하는 소리를 사람이 감동하는 인지천음(人地天音)의 목소리라 하는데 그녀는 그런 신비스러운 목소리를 토해내고 있었다.

위와 같은 미색과 음성을 가진 미인은 중국의 4대 미인밖에 없었다. 그녀가 달을 쳐다보면 달이 부끄러워 구름 속으로 숨었다는 월훈미인(月暈美人),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을 내려다보던 기러기가 강으로 날아갈 것을 잊고 땅으로 떨어졌다는 낙안미인(落雁美人), 그리고 백합꽃이 피었다가 그녀의 손길이 닿자 부끄러워 꽃술을 오므렸다고 하는 수화미인(羞花美人), 또한 그녀가 눈물을 닦자 뻐꾸기가 슬피 울었다는 포곡미인(布穀美人) 등이 그에 속한다.

소복을 한 그녀도 누구 못지않을 만큼 천하일색이었는데 아무리 미남이고 헌헌장부(軒軒丈夫)였으며 걸걸한 성격의 김 선비라 할지라도 소복한 여인의 미색을 보고는 그만 까무러칠 만큼 현혹되고 만다.

일면식(一面識)도 없는 사이에 이처럼 큰 배려를 베풀어 주시다니요. 부인 대단히 고맙습니다.”

갑자기 도움을 드려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제가 능력은 없습니다만 사람들을 불러 저 생강 가마니를 배에서 옮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서둘러야겠습니다.”

 

사람과 사람과의 만남은 첫인상이 중요하다. 첫 대면이 그럴 듯하고 언어와 행동거지가 자기 안목 틀에 눈설지 않고 바로 저런 인상이다.’ 싶으면 비록 첫 대면이라 할지라도 본인의 마음을 열게 되고 조금 더 진전되어 의기투합(意氣投合)이 되면 연민을 느끼게 되는 것, 그것을 이른바 일소대진치천금(一笑對眞置千金)’이라 하는데 그 과정은 특히 남녀 간의 애정을 나눌 때 성사되곤 했다.

하여 청상과부가 된 김설인(金雪仁)과 강릉 김문의 선비 김진경은 깊은 사랑에 빠지게 되는데 김진경을 대하는 김설인의 사랑 과정 또한 놀라웠다. 매일 세 끼마다 진수성찬과 반주를 곁들인 조석 밥상이 대가집 밥상과 못지않을 만큼 사랑 폭탄을 퍼붓자 김진경은 가난하게 사는 단양 마누라와 어린 삼남매의 삶은 까맣게 잊고 만다. 겨울이 지나고 다음해 봄 5월이 되는 동안 잘 먹고 잘 살아온 반 년(半年)의 세월을 짚어본 김진경은 그제서야 단양처자들이 생각나고 그리워 눈물을 닦으며 김설인에게 쌓인 회포를 털어놓는다.

보소 임자, 내 단양 고향에 처자식을 떼어놓고 집을 나온 지 무려 반 년(半年)이 됐소. 덕분에 그간 잘 지냈는데 이젠 처자식을 만나러 가야겠으니 그 생강 처분한 돈을 다는 말고 반만 나에게 줄 수 있겠소?” 하자 그 말을 들은 김설인은 말없이 눈웃음 짓다가 옆에 놓인 문갑(文匣)을 열고 창호지에 붓글로 쓴 싯구(詩句) 한 편을 꺼내 보인다.

 

당신 모시며 몸 바친 지 반 년 동안                 倍君身供半年生

생강 판 돈 진수성찬으로 다 써버렸는데          生薑消盡盛饌費

지금 와 무슨 낯으로 노자돈을 달라는가?        今朝何散路資願

저문 날 이별할 때 나를 잊지나 마소!              暮江別離永不忘

 

김설인의 싯구 내용은 한 푼도 줄 수 없다는 절망적인 내용이었으나 그 글을 추연(惆然)히 바라보던 김진경도 마침내 지필묵을 달라 하여 한 수 적는다.

 

멀리서 보면 죽은 말 눈깔 같고                      遠看死馬目

가까이서 보면 물러터진 종기 덩어리 같은데    近視破濃瘡

두 언덕에 이빨 한 개도 없건만                      兩岸無一齒

두 배 가득했던 생강 다 먹어치웠다.                    能食二船薑

여인의 음기(陰器)를 솔직하게 표현한 오언절구(五言絶句)의 싯구다. 그러나 그 안에는 본인이 여인에게 미처 처자식도 돌보지 않고 허송세월한 후회와 생강농사를 지은 그 노고를 여인에게 다 바쳤다는 안타까운 슬픔이 한가득 담겨있다. 하지만 뜻밖에도 결과는 그 반대로 돌아선다. 즉 그 싯구를 본 김설인이 와락 김 선비를 끌어안으며 그간 자기가 행동한 사실을 낱낱이 고백하는 것이다.

서운할 것도 서러워할 것도 없습니다. 그간 나는 당신을 무척이나 사랑했습니다. 내 사람을 만들기 위해서였지요. 생강 값의 열 배를 더 보태어 당신의 처자식이 살만한 집 한 채도 마련해 두었습니다. 처자식 데려와 한양에서 살며 나하고 평생을 같이 합시다.”

그렇게 하여 김 선비는 처자식을 한양으로 데려와 잘 지은 기와집에서 살게 됐고, 김진경 역시 김설인이라는 멋진 애인 덕분에 음직(蔭職)으로 사역원(司譯院) 주부(主簿, 從六品官)가 되어 평생을 같이 했다는 기록이 이름 없는 한 선비의 필사본(筆寫本)으로 전해졌다. 해묵은 전설이 끈질긴 입을 통해 세월을 거듭하면 정설(正說)이 되기도 했고, 그 정설이 인맥의 연결과 시일이 맞으면 정사(正史) 또는 역사에도 기록되어 온 것이 조선 오백 년 간의 숱한 기록물들이었다.

그러나 불가록불가폐(不可錄不可廢)인 어정쩡한 기록이 역사인 것처럼 기록되어 온 반면, 인간사의 정사(正史)이고 야사(野史)인 비애와 통한들이 이름 없는 선비들의 필사본으로 전해졌지만 그 옳고 정직한 기록들이 전혀 발굴되지 못하고 사장(死藏)되어 온 것도 사실이다. 그런 만큼 위의 기록들도 100여 년 전의 어느 이름 모를 선비의 필사본을 근거로 하여 문장화한 것임을 밝힌다. 그 필사본의 표지 제목은 순 한문으로 기록한 <사역원김생기(司譯院金生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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