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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산의 명재고택 가보셨나요?

여행 이야기

by 우람별(논강) 2012. 12. 1. 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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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충남인터넷고등학교 진로진학상담교사 박노식 선생님한테서

논산에 올 일 있으면 연락을 꼭 하라고 했던 말이 생각나서 길을 나섰다.

어딘가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면, 앞뒤 가리지 않고 그렇게 떠나는 것이다. 

논산, 강경, 군산 일대를 한 바퀴 돌기로 했다. 지난 여름에 갔던 곳인데 또.....

 

박선생님한테 연락하는 것은 일단 보류하기로 했다.

가족들끼리 오붓한 시간을 갖고 있는데 연락을 하면 부담스러울 게 뻔하고

조용히 둘러보고 오는 게 좋다는 결론을 냈기 때문이다.

 

제일 먼저 차에서 내린 곳은 논산의 초입에 있는 백일헌 이삼(李森)장군 고택이다.

영조 3년(1727) 훈련대장으로 있을 때 이인좌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임금에게 하사받은 가옥이라는데,

보수공사 관계로 어수선한 느낌이 있으나 전체적인 분위기는 참 좋다.  

입구에 솟을대문, 그 좌우에 문간채가 있다.

 

대문의 오른편에 사당이 있다. 사랑채와 안채는 모두 간결한 민도리집 구조이며

지붕은 홑처마에 팔작지붕이다. 간결하게 지은 집으로 일부가 변형되기는 하였으나

조선시대 양반 가옥 형태를 잘 유지하고 있어서 한국 고건축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이삼장군은 윤증 문하에서 공부하였고, 정주목사를 거쳐 병마절도사, 포도대장,

어영대장, 훈련대장, 한성판윤, 공조판서, 병조판서 등의 요직을 거쳤으며

특히 기계체조와 무술에 정통했다고 한다. 사당에 걸려있는 영정 사진이 어설프다.

 

 

다음은 명재고택을 찾기로 했다. 7,8년 전 찾았던 기억이 있지만 다시 보면 새로울 것 같다.

고택으로 들어가는 길에 특별한 건물이 하나 있어서 잠시 들렀다. '노성 궐리사'라는 안내판이 보인다.

 

노성 궐리사(闕里祠), 공자의 영정을 봉안한 영당(影堂)이란다.

궐리사는 강릉, 제천, 화성(수원) 등에 있었으나 현재는 화성과 이곳 노성에만 남아있다고 한다.

1687년(숙종 13년)에 송시열이 건립을 추진하였고, 권상하 등 송시열의 제자들이

1716년(숙종 42년)에 노성 이구산에 세웠다.

 

 

궐리탑은 높이 3.9미터, 석주의 지름이 38센티, 기단은 86.14 제곱미터의 크기다.

7개의 별을 상징하는 구멍이 기단에 파여져 있어 아들 낳기를 기원했던 성혈로 보이기도 하는데

의미를 부여하는 설명이 보인다. 맨끝의 별은 공자가 태어난 중국 산동성의 곡부를 가리킨단다.

 

 명재고택의 안채로 들어가는 자연석 계단과 문이다. 담장과 대문이 따로 없는 것이 특징이다.

 

노성산(343미터)에서 남쪽으로 흘러내리는 산 줄기의 남사면을 배경으로 남향으로 자리 잡았으며,

집 전체의 평면 구성 형태는 ‘ㄷ’자의 안채와 ‘一’의 사랑채가 조합을 이룬 ‘ㅁ’자형 집이다.

북쪽 중앙에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의 대청을 두었고, 뒤편 좌우에 각각 고방(庫房)을 두었으며,

고방 앞면에 쌍여닫이 띠살문을 두었다. 대청의 서쪽으로 2칸의 안방과 1칸의 윗방을 두었으며,

그 남쪽으로 넓은 공간의 부엌을 두었다. 부엌의 상부에는 다락을 설치하였다.

대청의 동쪽에는 안방보다 작은 면적의 건넌방을 2칸 두었으며, 그 뒤편으로 윗방을 1칸 두었다.

또한 건넌방 남쪽으로 1칸 반의 다락이 있는 부엌을 두었다.('두다'라는 단어의 남발!!!)
 

사당은 가옥의 뒤편 동쪽의 경사지에 복원하여 별도의 공간으로 배치하였다.

사당은 멸실되었던 것을 1983년 도비와 시·군비를 보조받아 복원한 것으로,

정면 3칸의 전퇴를 둔 맞배지붕 건물이다.

 

 

안채의 남쪽에 위치한 대문채는 2칸의 중문칸과 서편의 행랑방 1칸, 동편에는 광으로 사용되고 있는 2칸의 방으로 구성되어 사랑채와 ‘ㄱ’자로 연결된다. 대문이 별도로 없는 집의 구조상 중문을 대문으로 겸하되, 대문이 열렸을 경우 안채가 바로 보이지 않도록 판자벽을 두어 외부 시선을 차단하는 완충 장치로 활용하였다.

 

 

사랑채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홑처마 팔작지붕으로 오른쪽 앞뒤 2칸에 대청을 두었고,

왼쪽 앞뒤 2칸에 누마루를 두었으며, 중앙에는 2×2칸 규모의 온돌방을 만들었으나

앞면은 반 칸을 안으로 들여 툇마루를 두었다. 온돌방 뒤에 반 칸의 고방(庫房)이 있으며,

누마루 후면으로는 1×2칸의 방이 꾸며져 있어, 대문 옆의 행랑채와 ‘ㄱ’자형으로 연결되고 있다.

가구 구조는 공포(栱包)가 없는 민도리로, 퇴고주를 세워 퇴량(退梁)과 대들보를 걸었으며,

종량 위에 있는 제형 대공에서는 뜬창방을 볼 수 있다. 사랑의 앞면에는 넓은 마당을 두었으며,

마당의 왼쪽으로 우물과 연못이 조성되어 있다.

 

 

 

연못은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 사상을 형상화한

방지의 형식으로 내부에 원형의 섬을 조영하였다. 멀리 보이는 건물은 노성 향교이다.

 

 

 사랑채의 오른쪽으로는 집안에서 오래 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전통 장류를 상품화하여

 지역 특산물로 양산하기 위한 장독대들이 들어서 있다.

 

명재고택은 수백 년 된 정자목 아래로 편안하게 앉아 있다. 내려다보는 풍광이 압권이라 할 만하다. 
 

명재고택 옆 언덕배기에는 찻집인 동시에 책방으로 영업 중인 황토집이 하나 서 있는데, 

초가지붕을 새롭게 단장하느라 오늘은 문을 닫아놓고 영업을 하지 않고 있는 것 같다.

문화재 해설이 필요한 사람은 이곳으로 연락을 하라고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혹시 이곳 주인이 문화재 해설까지 도맡아서 봉사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를 일이다.

 

이엉을 엮고 있는 아저씨한테 다가가 몇 마디 나눠보니 귀에 익은 말소리다.

고향이 어디냐고 여쭤보니 충북 음성이라 하신다. '그러면 그렇지'

나도 충북 충주가 고향이라며 맞장구치니 그저 반가워하시는 순박한 어른이시다.

어릴 적 우리 할아버지도 가끔씩 이엉을 엮으셨고, 가마니를 짜고, 짚신도 삼으셨다.

한겨울에 방안 가득 짚을 쌓아놓고 새끼를 꼬시던 모습도 눈에 선하여 고향어른이 남달리 보인다.

"아저씨 이엉엮는 모습을 보니 할아버지 생각이 나네요. 사진 좀 찍어도 될까요?"

"그거야 당신 마음이지요." 하면서 웃으시고는 묵묵히 일을 계속하신다.

너무도 귀하고 보기 어려운 장면이라 동영상으로도 남겨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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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를 돕기 위해 명재 윤증 선생에 대한 인터넷 자료를 여기에 옮겨놓는다.

출신 및 학통

할아버지는 황(煌)이고, 아버지는 선거(宣擧)이며, 어머니는 공주이씨(公州李氏) 장백(長白)의 딸이다. 성혼(成渾)의 외손이다. 아버지와 유계(兪棨)에게 배우고 뒤에는 장인인 권시(權諰)와 김집(金集)에게 배웠다. 29세 때에는 김집의 권유로 당시 회천에 살고 있던 송시열(宋時烈)에게 〈주자대전 朱子大全〉을 배웠다. 송시열의 문하에서 특히 예론(禮論)에 정통한 학자로 이름났다. 1663년(현종 4) 천거되어 내시교관·공조랑·지평 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했다. 숙종대에도 호조참의·대사헌·우참찬·좌찬성·우의정·판돈녕부사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했다.

노론과 소론의 분열

1680년(숙종 6) 김수항(金壽恒)·민정중(閔鼎重) 등이 경연에 나오도록 청하고, 박세채(朴世采)·조지겸(趙持謙) 등이 거듭 출사를 권했으나 사양했다. 그는 송시열·김석주(金錫胄)·김만기(金萬基)·민정중의 세도가 바뀌어야 하고, 서인과 남인의 원한이 풀어져야만 출사할 수 있다고 했다. 이 일로 최신(崔愼)이 송시열의 죄없음을 변명한다는 핑계로 윤증의 사서(私書)를 공개하면서 그가 스승을 배반했다고 했으며, 또 김수항·민정중 등도 윤증이 사사로운 감정으로 송시열을 헐뜯었다고 했다. 한편 윤증이 아버지가 죽었을 때 윤휴(尹鑴)의 조문을 받았는데 이 사실을 안 송시열은 불쾌하게 여겼으며, 또 숙종초에 송시열 일파가 남인에게 화를 입었을 때 윤증이 남인과의 인연관계로 화를 면한 일로 해서 더욱 송시열의 의심을 받았다.

또한 아버지의 묘갈명(墓碣名)을 송시열에게 부탁했는데 송시열이 내용중에 야유하는 뜻을 적자 이의 시정을 요구했으나 들어주지 않았다. 이 일로 사제간의 의리가 끊어졌으며, 두 사람 사이에 일어난 반목(反目)을 '회니(懷泥)의 반목' 또는 '회니의 사건'이라고 하는데 송시열은 회덕(懷德)에, 윤증은 이산(泥山)에 산 연유로 그렇게 불렸다. 이러한 개인적 감정과 함께 남인에 대한 처벌문제로 서인이 강·온 양파로 분리될 때 그를 지지하는 사류(士類)들에 의해 소론의 영수로 추대되었다.

그는 송시열을 "대인의 의와 소인의 이익을 함께 행하고, 왕도와 패도를 같이 쓴다"(義利雙行王覇竝用)고 비난했으며, 사국(史局)에 편지를 보내어 아버지의 일을 변명하고, 다시 이이(李珥)가 젊어서 불문에 들었던 일을 끌어서 이이는 입산의 잘못이 있으나 자기 아버지는 처음부터 죽어야 될 의리가 없다고 했다. 이에 대해 유생들이 들고 일어나 선현을 모독했다고 그를 성토함으로써 조정에서 시비가 크게 일어났다. 송시열이 변명의 상소를 올려 죄가 전부 자신에게 있다고 했으나, 왕은 듣지 않고 윤증을 전과 같이 대우하지 말라는 명을 내렸다. 사림과 간관(諫官) 사이에 비난과 변명의 상소가 계속되었다. 노론·소론 간의 당쟁은 계속되었고, 그가 죽은 뒤 1715년 유계가 지은 〈가례원류 家禮源流〉의 발문에 정호(鄭澔)가 그를 비난한 것을 계기로 당쟁이 격화, 소론 일파가 거세되고 아버지와 함께 관작이 추탈되었다(→ 색인 : 가례원류시말). 1722년(경종 2) 소론 유생 김수구(金壽龜)·황욱(黃昱) 등의 상소에 의하여 복관되었다.

윤증의 배사(背師)문제는 의리·명분의 껍데기를 쓰고 노론·소론 간의 격렬한 논쟁의 주제가 되었지만, 그 이면에는 양자의 사상적 견해, 정치적 노선의 차이가 놓여 있었다. 양자 모두 주자도통주의(朱子道統主義)에 입각한 철저한 유교적 도덕정치를 내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송시열은 훈척인 김익훈(金益勳) 등과 결탁하게 됨으로써 명분을 잃게 되고, 나아가 그 사회경제적 지향도 굴절되게 마련이었다. 말하자면 송시열을 비롯한 노론측은 현실과의 일정한 타협을 통해 권력을 장악하는 데 최우선의 의미를 두었던 것이고, 윤증을 내세운 소론측은 현실과의 타협을 거부하며 명분을 고수하려 했던 것이다. 저서로 〈명재유고〉·〈명재의례문답 明齋疑禮問答〉·〈명재유서〉 등이 있다. 홍주 용계서원(龍溪書院), 노성 노강서원(魯岡書院), 영광 용암서원(龍巖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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